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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요시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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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하야마 요시키(葉山 嘉樹)는 일본의 소설가로,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적인 작가 중 한 명이다. 1894년 후쿠오카현에서 태어나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생활을 하다가 노동 운동에 참여하여 투옥되기도 했다. 옥중에서 작품 활동을 시작하여, '바다에 사는 사람들', '시멘트 통 속의 편지' 등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그린 작품으로 주목받았다. 하지만, 사상 통제가 강화되자 전향하여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작품을 쓰기도 했다. 만주로 이주했다가 일본으로 귀국하던 중 1945년 사망했으며, 고향에는 문학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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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야마 요시키
기본 정보
일본현대문학연구회 '현대일본소설대계' 제42권 (1949)에서
본명알 수 없음
출생일1894년 3월 12일
출생지일본, 후쿠오카현 교토군 도요쓰촌 (현 미야코정)
사망일1945년 10월 18일 (51세)
사망지중화민국 지린성 더후이현
안장 장소아오야마 영원
국적일본
직업소설가
학력
모교와세다 대학 고등예과 중퇴
문학 활동
장르소설
사조프롤레타리아 문학 (문전파)
대표 작품감옥의 반나절 (1924년)
음매부 (1925년)
시멘트 통 속의 편지 (1926년)
바다에 사는 사람들 (1926년)
탁류 (1936년)

2. 생애

하야마 요시키는 사족의 가정에서 태어났다. 도요츠 중학교를 거쳐 1913년 와세다 대학교 고등 예과에 진학했지만, 학비 미납으로 제적되었다. 이후 선원 생활을 하며 콜카타 항로 및 무로란 - 요코하마 항로의 화물선에서 일했고, 이때의 경험은 훗날 그의 작품 소재가 되었다. 1920년 나고야시의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주도하다 해고되었고, 이후 노동 쟁의를 지도했다.

1923년 나고야 공산당 사건으로 검거되어 나고야 형무소에 투옥되었다가, 옥중에서 「창녀」, 「난파」(후에 「바다에 사는 사람들」로 개제)를 집필했다. 1924년 유죄 판결을 받고 스가모 형무소에 복역하면서 간토 대지진의 체험을 바탕으로 「감옥의 반나절」을 집필, 『문예전선』에 발표했다. 1925년 출옥 후에는 『문예전선』 등에 작품을 발표하며 문단의 신진 작가로 주목받았다.

이후 하야마는 프롤레타리아 문학 운동에서 『문예전선』의 대표 작가로 활동했다. 특별 고등 경찰의 사상 통제가 심해지자 전향하여 익찬 체제를 지지했다. 1934년부터 나가노현에서 소설을 쓰며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1943년 만주국 『만주 신문』에 투고[3]하고, 만주국 개척단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45년 6월, 딸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으나, 일본의 패전으로 귀국하던 도중 1945년 10월 18일 열차 안에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유해는 덕혜역 부근에 매장되었고, 유발은 아오야마 영원의 해방 운동 무명 전사 묘에 안치되었다.[5]

1977년 10월 18일, 고향인 미야코정(당시 도요츠정) 핫케이산에 문학비가 설립되었다.

2. 1. 초기 생애와 문학 활동 (1913년 이전 ~ 1926년)

1894년 일본 후쿠오카현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으로 인해 와세다 대학교를 중퇴하고 선원 생활을 시작했다. 1920년 나고야 시멘트 공장에서 노동 운동을 주도하다 해고되었으며, 이후 노동 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1923년 나고야 공산당 사건으로 체포, 투옥되었고, 옥중에서 '윤락부', '바다에 사는 사람들' 등을 집필했다. 1925년 출옥 후, '윤락부', '시멘트 통 속의 편지', '바다에 사는 사람들' 등을 발표하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신성으로 떠올랐다.[3]

2. 2. 프롤레타리아 문학 활동과 전향 (1926년 ~ 1945년)

하야마 요시키는 잡지 『문예전선』의 대표적인 작가였다. 기존의 프롤레타리아 문학이 관념적이고 도식적이었던 것에 비해, 하야마의 작품은 인간의 자연스러운 감정을 자유롭게 그려내면서도 예술적 완성도가 높았다. 특히 「바다에 사는 사람들」은 일본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걸작으로 꼽힌다.[3]

1934년부터 나가노현에 살면서 현지에서 소설을 쓰면서 공사 현장에서 일하기도 했다. 특별 고등 경찰(특고)에 의한 사상 통제가 심해지고, 일본의 국론이 중국 대륙 침략으로 통일되어 가자, 하야마는 전향하여 익찬 체제에 대한 지지를 강화했다.

1943년 만주국에서 발행된 『만주 신문』에 투고했고[3], 스스로도 만주국으로의 개척단 운동에 적극적으로 관여하여 여러 번 만주로 건너갔다. 1945년 6월, 딸과 함께 만주로 건너가 개척 마을로 이주하려 했지만,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제2차 세계 대전일본 패배로 인해 일본으로의 귀국을 결심한다.[4]

2. 3. 만주에서의 죽음 (1945년)

하야마 요시키는 葉山大樹居士일본어라는 법명을 받았다.[4] 1945년 6월, 딸과 함께 만주로 이주했으나, 소련군의 만주 점령과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일본의 패배로 인해 일본으로 귀국을 결심한다. 1945년 10월 18일, 귀국 도중 열차 안에서 뇌출혈을 일으켜 덕혜역에 도착했을 때는 이미 사망한 상태였다. 유해는 덕혜역 부근의 선로 변에 매장되었고, 유발은 장녀에 의해 아오야마 영원의 해방 운동 무명 전사 묘에 안치되었다.[5]

3. 주요 작품

하야마 요시키는 초기에는 노동자와 빈민의 삶을 사실적으로 묘사한 작품들을 주로 발표했으나, 후기에는 제국주의를 옹호하는 작품들을 발표했다. 초기에는 감옥의 반나절, 윤락부, 시멘트 통 속의 편지, 바다에 사는 사람들 등을 발표했고, 후기에는 移動する村落|이동하는 촌락일본어, 濁流|탁류일본어 등을 발표했다.[1]

3. 1. 초기 작품

하야마 요시키는 1920년대 중반에 주로 작품을 발표했다.

제목발표 시기게재지
감옥의 반나절1924년 10월문예전선
윤락부1925년 11월문예전선
시멘트 통 속의 편지1926년 1월문예전선
바다에 사는 사람들1926년 10월개조사


3. 2. 후기 작품


  • 移動する村落|이동하는 촌락일본어 (東京朝日新聞|도쿄 아사히 신문일본어, 1931년 9월~1932년 9월)[1]
  • 濁流|탁류일본어 (中央公論|주오코론일본어, 1936년 7월)[1]

4. 평가

하야마 요시키는 초기 프롤레타리아 문학의 대표 작가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작품은 노동자들의 비참한 현실과 투쟁을 생생하게 묘사하여 많은 독자들에게 감동을 주었다.

그러나 그의 전향과 친일 행적은 비판의 대상이 된다. 특히 일제강점기에 제국주의를 옹호하고 식민지 침략을 찬양하는 글을 발표한 것은 한국의 진보적 관점에서 더욱 비판적으로 다루어져야 한다.

참조

[1] 서적 Gender and Labour in Korea and Japan: Sexing Class Routledge 2009
[2] 논문 Japanese Literature and Politics in the 1930s 1976
[3] 뉴스 葉山の連載記事発見のニュース http://j.peopledaily[...] 人民日報 2005-10-19
[4] 서적 作家の臨終・墓碑事典 東京堂出版 1997
[5] 서적 文学者掃苔録図書館 原書房 20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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