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윤용 (조선귀족)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이윤용은 1854년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난 조선 말기의 문신으로, 판서를 지낸 이호준의 서자였다.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결혼했으나 사별 후 김기대의 딸과 재혼했다. 그는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를 지냈으며, 아관파천을 주도하여 친러파 내각에서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친일 행위로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으며, 친일 단체에 가입하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을 지냈다. 그는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 포함되었다.

이윤용 (조선귀족)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이윤용 초상
이름이윤용
한글이윤용
한자李允用
로마자 표기I Yun-yong
경중(景中)
별칭자(字)는 경중(景中)
출생1855년 9월 5일
출생지조선 평안도 평양
사망1938년 9월 8일
사망지일제강점기 경성부 가회동
가문
본관우봉 이씨
아버지이호준
의붓아버지흥선대원군
배우자흥선대원군의 서자, 김기태의 서자
자녀이명구
친척이병옥(손자), 이항구(조카), 이병길(종손), 이병주(종손), 이완용(이복 적제)
경력
직업관료, 군인
군대대한제국군
복무 기간1896년–1907년
계급육군 부장
소속대한제국
주요 보직궁내부대신, 군부대신
관직
봉작남작
품계궁내부대신
훈장
훈장
40px
40px
훈일등욱일동화대수장
40px
40px
훈일등욱일대수장
40px
40px
훈이등서보장
40px
40px
대훈위이화대수장
40px
40px
훈일등태극장
40px
40px
훈일등팔괘장
기타
📚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대한제국의 경상북도관찰사 - 박중양
    박중양은 대한제국과 일제강점기에 이토 히로부미의 지원을 받으며 관료로 활동, 대구읍성 철거 등 근대화 정책을 추진했으나 친일 행위로 비판받고,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식민 통치에 협력한 인물로, 광복 후 반민특위에 체포되었으나 친일 행적을 정당화하며 여생을 보냈다.
  • 일제강점기의 은행가 - 이해창 (조선귀족)
    이해창은 조선 후기 왕족이자 대한제국 관료, 조선귀족으로, 창산군에 봉해졌으며 한일 병합 후 후작 작위를 받았으나 친일 행적으로 비판받고 친일반민족행위자 명단에 포함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은행가 - 김수학 (1896년)
    교토제국대학 경제학부 졸업 후 호남은행 목포지점장을 지낸 김수학은 제2대 상공부 차관과 제2대 국회의원을 역임했으나, 당적 변경으로 정치적 변절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 대한제국의 궁내부대신 - 심상훈
    심상훈은 조선 말기 문신으로 고종의 외사촌이자 민승호의 외조카이며, 문과 급제 후 임오군란과 갑신정변 진압에 기여하고 갑오개혁 이후 탁지부 대신, 군부 대신 등을 역임하며 대한제국 시기 정권의 중추에서 활동했고 을사조약에 반대했으며 사후 충숙이라는 시호를 받았다.
  • 대한제국의 궁내부대신 - 박영효
    박영효는 갑신정변을 주도하고 갑오개혁 시기 내무대신을 지냈으나 일제강점기에 친일 행위를 한 조선 후기의 문신, 정치가, 개화 운동가이며, 태극기 디자인을 고안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2. 생애

이윤용은 1854년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사위가 되면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1868년 돈녕부 구성원으로 이조에 임명되었고, 1년 후 별군직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경제부 대신 및 경무사로 임명되어 이준용의 쿠데타를 진압,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반일 정치인으로 간주되어 이완용, 이범진, 민상호와 함께 직위를 잃고,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친미 정치인들과 미국 공사관으로 망명했다. 이후 친러 정치인으로 변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망명을 주도했다. 독립문 건설을 후원한 독립 협회의 지지자였다.

1896년 10월, 드미트리 푸챠타를 러시아 교관으로 초빙하여 2,200명의 군인 훈련을 요청했으나,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무산되었다.

관직 외에 사업가로도 활동, 인천 항해권 보호를 위해 해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총 5척의 선박으로 여러 한국 항구를 연결한 최초의 한국 해운 회사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중 선박 4척이 일본군에 의해 병력 및 물자 수송에 이용되었다.

1900년대 후반, 이윤용은 친일 협력자로 변모했다. 1909년 성장하는 의병과 협상하여 200을 제공했으며, 국시유세단을 비롯한 수많은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 1910년 합병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7년 불교 옹호 단체의 강사가 되었고, 1921년에는 대정친목회에 가입했다. 1928년 11월 2일, 일본 식민 정부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매년 3000KRW을 받았다. 1938년에 사망했고, 그의 손자가 그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2.1. 생애 초반

1854년 조선 평안도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얼 출신이었지만, 흥선대원군의 사위가 되면서 높은 지위에 오를 수 있었다.

1868년 돈녕부 구성원으로 이조에 임명되었고, 1년 후 별군직으로 임명되었다. 1894년 경제부 대신 및 경무사로 임명되어 이준용의 쿠데타를 진압,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반일 정치인으로 간주되어 이완용, 이범진, 민상호와 함께 직위를 잃고,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친미 정치인들과 미국 공사관으로 망명했다. 이후 친러 정치인으로 변신,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망명을 주도했다. 독립문 건설을 후원한 독립 협회의 지지자였다.

1896년 10월, 드미트리 푸챠타를 러시아 교관으로 초빙하여 2,200명의 군인 훈련을 요청했으나,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명되면서 무산되었다.

관직 외에 사업가로도 활동, 인천 항해권 보호를 위해 해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총 5척의 선박으로 여러 한국 항구를 연결한 최초의 한국 해운 회사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중 선박 4척이 일본군에 의해 병력 및 물자 수송에 이용되었다.

2.1.1. 출생과 가계

평안도 평양 출신으로, 판서를 지낸 이호준의 서자였다. 이호준은 그를 적자로 올리지 않는 대신, 생전에 자신의 재산을 이윤용에게 대부분 상속하였다. 양자이완용은 여기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주변의 반발에도 자신은 제사를 받들러 온 양자라 하였다. 한편 이윤용에게 다른 친형제 자매나, 아버지 이호준의 다른 첩에게서 나온 다른 서출 형제들이 있었는지 여부는 정확하게 전하지 않고 있다.

아버지 이호준은 처세술의 달인이었다. 고종 재위 기간은 임오군란, 갑신정변, 갑오경장, 을미사변, 아관파천과 같은 정치적 사변이 끊이지 않던 격동의 시기였다. 이런 와중에서 수많은 조정 대신들과 정객이 참살당하거나 외국에 망명하고 아니면 감옥에 갇히거나 귀양을 갔다. 정변이 일어날 때마다 권력은 부침을 거듭해서 계속해서 온전하게 자리를 지킨 자를 찾기가 힘들었다. 그런데 이런 격동의 시기를 살면서 이호준만은 이와 같은 정치적 사건에 단 한 번도 휘말리지 않고 무려 30년 이상 국왕의 총애를 받으며 평탄한 벼슬살이를 했다. 이것은 조선 말기의 정치사에서 거의 기적과 같은 일이다. 이로 미루어 그는 처세의 달인 중에서도 가히 입신의 경지에 이른 달인이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아버지의 처신은 그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이복 동생 이완용(그가 서자였던 탓에 아버지 이호준은 먼 친족의 아들인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다.)
이복 동생 이완용(그가 서자였던 탓에 아버지 이호준은 먼 친족의 아들인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다.)

2.1.2. 혼인

이윤용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이자 이재선의 친누이와 첫 결혼을 했다. 이재선 역모 사건 고변자 중 한 명이었던 이윤용은 운현궁을 배반하고 고종과 명성황후 민씨에게 이 사실을 알렸다.

흥선대원군의 서녀와 이윤용의 혼인으로 인해 그의 아버지 이호준과 흥선대원군의 관계는 더욱 긴밀해졌다. 이호준은 철종 말기, 후사 없이 병세가 위중할 때 자신의 정실 사위인 조성하, 조영하를 흥선대원군에게 연결하기도 했다.

2.2. 한일합방 이전

이윤용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1868년 돈녕부 구성원으로 이조에 임명되었고, 1869년 별군직에 임명되었다. 1894년 경제부 대신 및 경무사가 되었으며, 이준용의 쿠데타를 진압하여 흥선대원군의 미움을 샀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반일 정치인으로 간주되어 이완용, 이범진, 민상호와 함께 직위를 잃었다.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친미 정치인들과 함께 미국 공사관으로 망명했고, 이후 친러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아관파천을 주도했다. 독립문 건설을 후원한 독립 협회의 지지자였으며, 1896년 드미트리 푸챠타를 러시아 교관으로 초빙하여 조선군 훈련을 요청했으나, 곧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명되면서 교체되었다.

관리 외에도 사업가로서 인천의 항해권을 보호하기 위해 해운 회사를 설립했다. 이 회사는 총 5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여러 한국 항구를 연결한 최초의 한국 해운 회사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중, 이 회사의 선박 4척은 일본군에 의해 징발되었다.

1900년대 후반, 이윤용은 친일 협력자로 변모했다. 1909년 성장하는 의병과 협상하여 200을 제공했으며, 국시유세단을 비롯한 수많은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

2.2.1. 조선 시대

1869년 (고종 6) 특별히 돈녕부참봉에 제수되었다. 1874년 11월 흥선대원군 실각 후에도 계속 관직에 있었고, 1881년 양덕현감이 되었다.

1881년 (고종 18) 처남인 이재선이 역모로 몰려 죽자 한때 연루되어 위기를 맞았으나 이재선의 역모를 고종과 명성황후에게 고변하였다. 다시 정계에 복귀하여 1884년 통정대부로 승진했다. 전라도병마절도사로 전임되었다가 다시 내직으로 돌아와 가선대부로 승진, 한성부좌윤, 금군별장, 병조참판 등을 지냈다. 1887년 가의대부로 승진했다가 1889년 다시 자헌대부로 승진했다.

그 뒤 한성부 판윤, 의금부지사를 거쳐 영변부사로 부임했다가, 1890년 봉산군수로 발령되었다. 1891년 다시 영변부사로 부임하였다. 189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포도청 좌포도대장을 겸직하고,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로 근무하다가 1896년 이완용, 이범진, 웨베르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계획하고 실행하여 고종과 왕실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이후 친러파 내각의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1897년 의정부찬정으로 승진했다.

2.2.2. 아관파천과 대한제국

189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으며 포도청 좌포도대장을 겸직했고,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로 근무하다가 1896년 이완용, 이범진, 초대 주조선러시아 공사관 웨베르 등과 함께 아관파천을 계획, 모의하였다. 2월 11일 아관파천에 가담하여 고종과 왕실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임시로 옮기는데 성공했다. 이후 친러파 내각의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1897년 의정부찬정으로 승진했다.

1898년 법규교정소 의정관에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성문 국법이자 한국의 첫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제의 각 규정, 조항을 제정, 수정하고 반포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이후 중추원의관, 군부대신 등을 역임했으며 군제의정관으로 참여하여 군사 제도 제정에 참여했다. 이후 군부대신, 농상공부대신 등에 임명되었다. 이듬해 의정부찬정, 1900년(광무 3) 6월에는 육군부장에 임용되고, 그해 7월 다시 의정부찬정에 임명되었다.

2.2.3. 친일 행적

1894년 형조판서에 임명되었고 갑오경장 이후 경무사로 근무하다가, 1896년 아관파천에 가담하여 친러파 내각의 군부대신과 농상공부대신을 지냈다. 1897년 의정부찬정으로 승진했다. 1898년 법규교정소 의정관에 임명되어 대한제국의 성문 국법이자 한국의 첫 근대적 헌법인 대한국제의 각 규정, 조항을 제정, 수정하고 반포하는 과정에 참여하였다. 1900년 6월에는 육군부장에 임용되었다.

1905년 찬모관(贊謀官)이 되고, 같은 해 시종원경 임시서리, 평리원재판소 재판장 등을 역임했다.

1907년 궁내부대신에 임명되어 영친왕이 인질로 일본에 유학갈 때 수행원 자격으로 그를 수행했다. 1907년 7월 헤이그 밀사사건이 일본 정부에 발각되면서 고종이 양위를 강요당하자, 대한제국 정부에서는 고종의 양위를 놓고 찬반이 나뉘었고 그는 양위 찬성에 섰다. 1907년 9월 19일 육군 부장직에서 면직되었다.

1910년 5월 한미합자회사를 세운다는 말로 고종에게서 자본금을 하사받았지만 이완용과 같이 이 돈을 착복하였다. 같은 해 8월 29일 대한제국이 일본에 병합되자, 조선 귀족령에 의거하여 남작을 수여받았다.

1909년에는 성장하는 의병과 협상하여 200000KRW을 제공했고, 국시유세단의 단장으로 취임했다. 1916년 조직된 친일 단체인 대정친목회의 간부를 맡았다. 1917년 불교 옹호 단체의 강사가 되었고, 1921년에는 대정친목회에 가입했다.

1920년에는 조선 인삼의 판매권을 두고 조선총독부에 항의 운동을 벌였다. 당시 조선 인삼은 총독부의 전매품이었으며, 중국으로의 수출은 미쓰이 물산이 독점하고 있었다. 이윤용 등은 내선융화의 관점에서 판매권을 조선인에게 넘겨줄 것을 호소했지만, 총독부는 미쓰이 물산의 체면 등을 이유로 거절했다.

1928년 11월 2일, 일본 식민 정부의 조선총독부 중추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매년 3000KRW을 받았다. 1934년 4월 17일에는 조선사 편수회 고문으로 임명되었다.

1935년 조선총독부가 편찬한 '조선 공로자 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선정되었다.

현재 한국에서 이윤용은 친일파 (매국노)로 멸시받으며,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의 친일파 708인 명단, 2007년 친일반민족행위 진상규명위원회의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 2008년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의 친일파 리스트에 모두 기재되어 있다.

2.3. 한일 합방 이후

1910년 국권피탈 후 일제로부터 남작 칭호를 받았고, 김종한이 설립한 한성은행에서 부은행장(1906년), 은행장(1909년-1923년)을 지냈다. 일제 강점기 동안 퍽 부유한 생활을 했다. 1923년 한성은행장 직에서 물러나고, 1926년 동생 이완용의 임종을 지켰다.

1928년 10월 2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고문에 임명되고, 수차례 유임되어 1938년 9월 8일 사망할 때까지 역임했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

1900년대 후반에 이르러 이윤용은 친일 협력자가 되었다. 1909년, 이윤용은 성장하는 의병과 협상하여 200을 제공했다. 그는 국치유신단을 비롯한 수많은 친일 단체에 가입했다. 합병 후 일본 정부로부터 남작 작위를 받았다. 1917년 불교 옹호 단체의 강사가 되었고, 1921년에는 대정친목회에 가입하는등 친일 협력자로서의 삶을 계속했다. 1928년 11월 2일, 이윤용은 일본 식민 정부의 중추원 의원으로 임명되어 매년 3000KRW을 받았다. 1939년 9월 8일경성부 가회정 9번지 자택에서 당뇨병으로 86세를 일기로 사망했다. 그의 손자가 그의 남작 작위를 물려받았다.

3. 사후 평가

2002년 친일파 708인 명단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선정되었다. 민족문제연구소의 목록에는 그의 작위를 습작한 손자 이병옥도 포함되어 있다. 2007년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195인 명단에도 들어 있다.

4. 가족 관계

👆
좌우로 밀어서 보기
구분내용
아버지이호준 (이완용의 양아버지)
어머니미상
양동생이완용 (1857년 7월 17일 - 1926년 2월 12일)
누이풍양 조씨 조성하, 연안 김씨 김준연, 청주 한씨 한관수, 양주 조씨 조영희, 해평 윤씨 윤성구, 안동 김씨 김진규, 안동 김씨 김은규에게 각각 출가
전주 이씨 (흥선대원군의 서녀), 김씨 (김기태(金箕台)의 딸)
아들이명구(李明九)
손자이병옥 (1913년 - 1989년)
장인흥선대원군 (1820년 - 1898년)
처남완은군 이재선 (1842년 - 1881년)
처조카이관용

이호준은 이완용을 양자로 들였지만, 살아생전에 자신의 친 핏줄인 서자 이윤용에게 재산을 많이 물려주었다. 그러나 이완용은 고관대작인 아버지가 그에게 재산을 물려주지 않는 것을 탓하거나 비난하는 사람들의 말조차 개의치 않고 서운한 기색 하나 나타내지 않았다. 이완용은 "나는 다른 사람의 양자다. 나를 양자로 삼은 것은 오로지 조상의 제사를 끊이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내가 양자로 들어온 이후 재산을 물려받은 것이 없다 하였더라도 어찌 나의 책임을 소홀히 하여 나를 양자로 데려온 본뜻을 저버릴 수 있겠는가."라고 말하면서 일 년에 열두 번씩 돌아오는 제사와 네 번의 절사, 한 달에 두 번씩 치르는 차례상을 지성으로 지냈다. 관직에 있을 때도 출근하지 않고 사람도 접촉하지 않으면서 하루 종일 의관을 갖추고 정성을 다했다고 한다.

5. 이재선 사건 고변

이윤용의 첫 부인은 흥선대원군의 서녀이자 이재선의 친누이였다. 이윤용은 이재선 모역 사건의 고변자 중 한 명이었다. 그는 흥선대원군이 권력을 잡기 위해 이재선을 이용하려 한다고 생각했다.

이윤용은 '운현궁이 안기영·권정호의 모의에 통하면 대권이 다시 오겠지만, 실패하면 천하고 어리석은 내 자식을 죽게 만드는 데 불과하다. 이는 크게 인륜을 저버리고 도리에 어긋나는 행위이다'라고 판단하여 운현궁을 배반하고 고종과 민비에게 이재선의 역모를 알렸다.

흥선대원군은 위정척사파의 쿠데타가 성공하면 이재선을 왕으로 추대하고 자신이 섭정이 될 계획을, 실패하면 모든 책임을 이재선에게 씌우고 자신은 빠져나올 계획이었다. 이윤용은 친아들을 죽음으로 몰면서까지 권력을 잡으려는 흥선대원군의 잔혹함에 분노했다.

6. 기타

이윤용은 평양에서 태어났다. 서얼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높은 지위에 오른 인물 중 한 명이었다. 명성황후 시해 사건 이후 이완용, 이범진, 민상호와 함께 반일 정치인으로 간주되어 직위를 잃었다. 춘생문 사건에 연루되어 다른 친미 정치인들과 함께 미국 공사관으로 망명했고, 이후 친러 정치인으로 변신하여 고종의 러시아 공사관 망명을 주도했다. 그의 동생 이완용과 마찬가지로 독립문 건설을 후원한 독립 협회의 지지자였다. 1896년 10월, 드미트리 푸챠타를 러시아 교관으로 맞이하여 2,200명의 한국 군인을 훈련시켜 줄 것을 요청했으나, 곧 이 교관들을 실제로 데려온 민영환이 군부 대신으로 임명되었다. 관리 외에도 이윤용은 사업가이기도 했다. 인천의 항해권을 보호하기 위해 해운 회사를 설립했는데, 이 회사는 총 5척의 선박을 보유하고 여러 한국 항구를 연결한 최초의 한국 해운 회사였다. 그러나 러일 전쟁 중 이 회사의 선박 4척은 일본군에 의해 병력이나 물자 수송에 이용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