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성부민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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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성부민회는 1907년 유길준 등에 의해 처음 결성된 단체로, 초기에는 일본 황태자 방한을 환영하기 위한 목적으로 설립되었다. 이후 상설단체로 전환되어 대한제국 순종의 생일 기념 행사를 주관했으며, 1908년에는 지방 자치 기관을 표방하며 자치 운동을 시작했다. 교육 및 위생 문제에 관심을 갖고 활동했으나, 1910년 한일 병합 조약으로 자치제 도입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
한성부민회의 전신은 1907년 9월 유길준, 한성부윤 장헌식 등이 조직한 비상설 단체인 大日本皇太子殿下奉迎漢城府民會|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일본어이다. 이 단체는 훗날 다이쇼 천황이 되는 일본 황태자의 대한제국 방문 시 한성부를 보조하여 환영 행사를 준비하기 위해 설립되었다. 본래 유길준은 자치 목적으로 구상했으나, 장헌식은 이를 1909년 방한 예정인 일본 황태자 환영 준비에 활용하였다.
2. 조직 배경
당시 대한제국 고종 강제 퇴위 이후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의병 항쟁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의 정치적 의도에 따라 계획된 황태자 방한을 위한 행사 준비에 이 단체가 동원되었다. 주로 서울 지역 실업인들을 중심으로 기부금을 모으고 행사를 준비했으며, 일진회 회원도 참여하는 등 민간 단체의 외형을 가졌으나 실질적으로는 관제 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2. 1. 황태자 방한과 정치적 배경
1907년 대한제국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한 후 전국적으로 반일 감정이 고조되고 의병 항쟁이 확산되는 상황이었다. 이러한 분위기를 무마하고 대한제국에 대한 영향력을 강화하려는 정치적 목적으로, 당시 통감이었던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황태자(훗날의 다이쇼 천황)의 대한제국 방문을 계획했다.
이러한 배경 속에서 1907년 9월, 유길준과 당시 한성부윤이었던 장헌식 등은 大日本皇太子殿下奉迎漢城府民會|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한국어라는 임시 단체를 조직했다. 기록에 따르면 이 단체는 본래 유길준이 자치 목적으로 구상했던 것이나, 장헌식은 이를 1909년으로 예정된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환영하는 행사 준비에 활용하고자 했다.
황태자 방한에 맞춰 일부 친일 성향의 세력들은 성대한 환영 행사를 준비했는데, 봉영회는 이 행사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한성부 지역의 실업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에는 일진회 회원들도 상당수 참여했으며, 민간 단체의 형태를 띠었지만 실질적으로는 한성부의 행사를 보조하는 관제 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봉영회의 고문으로는 총리대신 이완용, 농상공부 대신 송병준, 법부 대신 조중응 등 당시 대표적인 친일 관료들이 참여했다. 위원장은 한성부윤 장헌식이 맡았고, 부회장은 한성농공은행 이사였던 홍긍섭이었다. 봉영회의 주요 활동은 서울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황태자 환영 인파를 동원하고 제등 행사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황태자에게 바칠 선물을 마련하여 전달하는 것 등이었다.
2. 2. 초기 구성원 및 성격
한성부민회의 시작은 1907년 9월, 유길준, 당시 한성부 부윤이었던 장헌식 등이 중심이 되어 만든 비상설 단체인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大日本皇太子殿下奉迎漢城府民會)였다. 이 단체는 훗날 다이쇼 천황이 되는 일본 황태자가 대한제국을 방문했을 때, 한성부의 환영 행사 준비를 돕기 위해 만들어졌다. 본래 유길준은 자치를 목적으로 이 단체를 구상했으나, 한성 부윤 장헌식(張憲植)은 1909년에 예정된 일본 황태자 다이쇼의 방한 환영 행사 준비에 이 단체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고종이 강제로 퇴위당한 후 대한제국 내에서는 반일 감정이 높아지고 의병 항쟁이 거세게 일어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토 히로부미는 정치적인 계산 아래 일본 황태자의 방한을 계획했다. 이에 대한제국 내 일부 세력들은 황태자를 성대하게 맞이할 준비를 했다.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환영 행사에 필요한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주로 서울 지역의 실업인들을 중심으로 구성되었다. 구성원 중에는 일진회 회원도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민간 단체의 형태를 띠었지만 실제로는 한성부의 행사를 보조하는 관제 단체의 성격이 강했다.
단체의 주요 임원은 다음과 같다.
대일본황태자전하봉영한성부민회는 처음에는 일시적으로 만들어진 비상설단체였기 때문에, 일본 황태자 환영 행사를 마친 뒤에는 별다른 활동을 하지 않았다. 그러나 1908년 3월, 대한제국 순종의 생일을 기념하는 건원절 행사를 치르면서 점차 한성부의 행사를 주관하는 상설단체로 변화하기 시작했다. 이때 건원절 행사에서는 민영휘가 회장을 맡았고, 이지용과 윤웅렬이 부장을 맡아 진행했다.
1908년 5월 8일, 유길준 등을 중심으로 지방자치 기관을 표방하는 한성부민회가 종로 상공회의소에서 발족하였다. 초대 회장은 유길준이 맡았다. 같은 해 11월부터는 유길준, 유성준, 윤효정 등의 주도로 본격적인 자치 운동 단체로 탈바꿈하기 시작하였다.
이 단체의 주요 활동은 서울을 여러 구역으로 나누어 각 지역마다 황태자 환영 인파를 동원하고 제등 행사를 준비하는 것, 그리고 황태자에게 바칠 선물을 마련하여 전달하는 것 등이었다.
3. 상설단체화
4. 시민, 자치단체화
4. 1. 자치운동의 목표와 한계
1908년 11월부터 유길준, 유성준, 윤효정 등은 한성부민회를 본격적인 자치 운동 단체로 전환하고자 하였다. 같은 해 11월 28일에 발표된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는 이러한 목표와 당시의 한계를 잘 보여준다.
취지서에서는 먼저 "현금(現今) 정황으로는 법률상 자치단체가 될 수 없으므로"라고 밝혀, 당시 대한제국 하에서 지방자치가 법적으로 허용되지 않는 현실적 한계를 명확히 인식하고 있었음을 드러냈다. 이러한 제약 속에서 한성부민회는 "민회(民會) 창립하는 취지를 창(唱)해 자치에 점진하는 문로(門路)를 준비"하는 것을 목표로 삼았다. 즉, 당장 법적인 자치단체가 될 수는 없지만, 민회를 통해 자치 역량을 키우고 미래의 자치를 준비하겠다는 의도였다.
나아가 취지서는 "한 나라의 정치 기초가 민간자치제 위에 서고, 자치제는 문화·경제의 정도에 따라서 그 모습을 나타"낸다고 강조하며, 제국의 수도인 한성부가 "무릇 백가지 경장(更張)하는 규모를 솔선해 지방에 보여줌이 실로 우리 부민의 천직이라"고 주장했다. 이는 한성부민회가 단순히 한성 지역의 자치 문제에만 머무르지 않고, 전국적인 자치 운동의 모범이 되어 각 지방에 자치 단체 설립을 유도하겠다는 더 큰 목표를 가지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결론적으로 한성부민회의 자치 운동은 지방자치 실현이라는 분명한 목표를 가졌으나, 법적, 제도적 기반이 마련되지 않은 시대적 한계 속에서 출발할 수밖에 없었다.
5. 주요 활동
'한성부민회규약' 제1조에 따르면, 한성부민회는 "한성부 주거민이 그 공동편익을 증진하며, 자치사상을 계발하기 위해 협동일치하는 합의로 성립하였다."라고 설립 목적을 밝히고 있다.
한성부민회는 처무 규정에서도 나타나듯 당시 교육 문제와 위생 문제에 특히 관심을 가졌다. 특히 교육 문제에 대해서는 '한성부민회조례'에 '사립학교에 관한 규정'을 두어, 부내(府內) 각 동(洞)에 설립되는 사립학교의 상황을 보고받고, 사립학교 폐지는 이 단체의 승인을 얻어야만 가능하도록 규정했다. 또한, 가로수 심기, 도로 청소, 자기 집 앞 청결 유지, 손님과 행인에게 불쾌감을 주지 않도록 집 안팎 정리정돈을 강조하는 캠페인을 벌였다.
주민자치단체로 재출발할 당시의 관계 자료로는 다음과 같은 것들이 《한성부민회규약》이라는 제목의 책자로 편집되어 남아 있다.
- 한성부민회창립취지서
- 한성부민회창립이유서
- 한성부민회규약
- 한성부민회처무규정
- 한성부민회조례
- 방회(坊會)규약
- 한성부민회의원선거규칙
- 한성부민회의회규칙
규약상으로는 하부 조직으로 방회(坊會)를, 의결기관으로 한성부민회의를 두기로 하였으나, 실제로 방회나 의회가 조직되지는 않았다. 이는 향후 지방 자치제도가 법률적으로 시행될 때를 대비하여 미리 규정해 둔 것이었다.
5. 1. 친일 행적 논란
1909년 10월 이토 히로부미가 안중근(安重根) 의사에게 사살되자, 한성부민회는 국민대추도회를 개최하였다. 당시 회장이었던 유길준은 한성부민회를 대표하여 직접 일본으로 건너가 이토 히로부미의 장례식에 참석하는 등 적극적인 추모 활동을 벌였다. 또한, 안중근 의거 이후 여러 친일파 단체들이 주도하여 열었던 각종 추도회에도 참여하였다. 이 시기 한성부민회는 유길준이 회장직에서 물러나고 윤태정(尹泰定)이 회장대리를 맡고 있었다.6. 평가
(내용 없음 - 하위 섹션에서 상세 내용을 다루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생략)
6. 1. 부정적 평가
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 제도의 도입을 표방하였지만, 결국 1910년(융희 4년) 10월 1일의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인해 부민회의 자치제 도입 운동은 실패로 돌아갔다.6. 2. 종합적 평가
한국 최초로 지방자치라는 근대적인 정치 제도의 도입을 표방하였으나, 결국 1910년 10월 1일의 한일 병합 조약으로 인해 부민회의 자치제 도입 운동은 실패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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