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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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장헌식은 1869년 용인에서 태어나 일본 유학 후 대한제국 관료로 활동했으며, 일제강점기에는 조선총독부 사무관, 중추원 참의 등을 역임하며 친일 행위를 했다. 그는 1935년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장을 지냈으며, 일제의 전쟁을 지원하는 활동을 했다. 해방 후 미군정 자문위원을 지냈으나 공금횡령 혐의로 처벌받았고,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되어 조사를 받았다. 1950년에 사망했으며, 친일파 708인 명단,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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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진형은 일제강점기에 법조인, 기업인, 조선총독부 관료로 활동하며 식민 통치에 협력한 인물로, 친일반민족행위 관련 명단에 수록되었다. - 일제강점기의 충청북도지사 - 유만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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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범승은 충청남도 연기군 출신으로 일본 유학 후 교토 제국대학에서 법학을 전공하고, 일제강점기에는 도서관 설립 운동을 펼쳤으며 해방 후 서울시장을 역임하고 국회의원과 참의원을 지냈으나, 2002년 친일파 명단에 포함되었다. - 군정기 - 김대우 (1900년)
김대우는 일제강점기 관료이며 해방 및 정부 수립 이후의 활동 기록은 미상이다.
장헌식 | |
---|---|
기본 정보 | |
![]() | |
출생 | 1886년 1월 1일 |
사망 | 1952년 3월 26일 (66세) |
국적 | 대한민국 |
학력 | |
최종 학력 | 일본 주오 대학 법과 졸업 |
경력 | |
주요 경력 |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
친일반민족행위 | |
해당 여부 | 해당 |
결정 기관 | 대한민국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 |
결정 년도 | 2009년 |
가족 관계 | |
배우자 | 김씨 |
자녀 | 장남: 장붕익 차남: 장기익 |
기타 정보 | |
친일 관련 활동 | 국민정신총동원조선연맹 평의원 흥아보도협회 평의원 조선임전보국단 발기인 겸 평의원 대화숙 이사 징병제 실시 감사 적십자 헌금 모금 운동 애국기 헌납운동 적극 참여 일본군 위문 활동 국방헌금 모금 참여 시국 강연회 개최 |
2. 생애
1869년 음력 9월 21일 용인군 현내면에서 성급(成汲)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1868년생 설도 있다. 어려서는 한문(漢文)을 수학하다가 18세 되던 해 경성부로 올라왔다. 1935년 무렵 평안남도 평양부로 이사했다가 다시 경성부 가회동(嘉會洞) 4번지로 주소를 옮기고 정착하였다.
1895년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6월 24일 궁내부 어홍원(宮內府 御供院) 회계과(會計課) 서기,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 御供院 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
1905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교장, 1905년 10월 18일 귀국과 동시에 6품으로 승진, 12월 20일 학부참서관 주임관 4등 7급(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임명되고, 12월 27일부터 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 학부 편집국 사무임시대변(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거쳐 1907년 5월부터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장을 겸임하였다.
1907년 7월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부임했다. 그해 10월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 회원이 되어 1911년까지 재임했다. 1907년(광무 10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할 때 훈3등 팔괘장을 받았고, 1907년 10월 한성부민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08년 3월 1일 위생회(衛生會) 회장에 선출되고, 같은 날 흥사단에 평의원으로 가입했으나 곧 탈퇴하였다. 한성부윤으로 근무하던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살해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
2. 1. 생애 초반 (1869년 ~ 1903년)
1895년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2. 1. 1. 초기 활동 (1869년 ~ 1895년)
1869년 음력 9월 21일 용인군 현내면(縣內面)에서 성급(成汲)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설에는 1868년생 설도 있다. 어려서는 한문(漢文)을 수학하다가 18세 되던 해 경성으로 올라와 한성부 중서(中署) 수진방 전동(壽進坊 磚洞) 13통 11호로 주소를 옮겼다. 1935년 무렵 평안남도 평양부로 이사했다가 다시 경성부 가회동(嘉會洞) 4번지로 주소를 옮기고 정착하였다.1895년 관비 일본 유학생으로 선발되어 그해 3월 일본으로 건너가 게이오의숙 보통과에서 수학했다. 당시 근대화 작업의 일환으로 뽑아 보낸 관비 일본 유학생들은 일제의 한반도 강점 이후 다양한 부문의 전문가이자 친일파로 활동하게 되는데, 장헌식도 그런 인물들 중 하나였다.
2. 1. 2. 일본 유학 (1895년 ~ 1903년)
1896년 7월 25일 게이오의숙(慶應義塾) 보통과를 졸업하고, 게이오 의숙 고등과에 들어갔다. 당시 게이오의숙은 조선인 유학생이 급증함에 따라 조선인 특별 고등과를 설치하였다. 1897년 4월 25일 게이오의숙 고등과를 졸업하였다. 1897년 5월부터 12월까지 일본 사법성 행정사무급재판소 병설 검사국 견습사무원이 되었다. 그는 게이오의숙을 졸업하고 사법 부문의 근대 문물을 배우기 위해 일본 사법성의 재판소 검사부에서 견습 사무원으로 일했고, 1898년 1월부터 10월까지는 일본 교토부 가나가와현 요코하마항 지방재판소(神奈川縣 橫濱港地方裁判所) 검사국의 견습사무원으로 재직했다.[1]견습사무원으로 재직하면서 도쿄 제국대학에 진학, 1898년 10월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에서 행정법을 전공하며 행정법 전문가로 일본 대장성 총무국에서 견습 근무했다. 1902년 7월 11일 도쿄 제국대학 법과대학교 법과를 졸업하였다. 1902년 10월 21일 도쿄 제국대학 대학원에 진학했으나 1903년 3월 중퇴하였다. 1902년 11월 일본 도쿄에 있는 대장성 총무국 사무견습 겸 사무촉탁이 되었고, 같은 달 대장성 사무견습 통신사(大藏省 事務見習通信事)로 발령되어 1903년 3월까지 근무했다.[1]
2. 2. 대한제국 관료 생활 (1903년 ~ 1910년)
1903년 3월 학부의 훈령으로 귀국한 뒤 대한제국 궁내부 주사로 관직을 시작했다. 1904년 6월 24일 궁내부 어홍원(宮內府 御供院) 회계과(會計課) 서기, 8월 궁내부 어홍원 주사(宮內府 御供院 主事), 10월 궁내부 제실제도정리국 비서관(帝室制度整釐局祕書官)을 거쳐 1905년 7월 13일 일본 시찰 수행원으로 선발되어 일본을 다녀왔다.1905년 관립한성외국어학교(外國語學校) 교장, 1905년 10월 18일 귀국과 동시에 6품으로 승진, 12월 20일 학부참서관 주임관 4등 7급(學部參書官敍奏任官四等七級)에 임명되고, 12월 27일부터 관립외국어학교장(外國語學校長)을 겸직하였다. 1906년 10월 24일 학부 편집국 사무임시대변(學部編輯局長事務臨時代辦), 1907년 3월 학부 편집국장(編輯局長)을 거쳐 1907년 5월부터 관립 한성사범학교(漢城師範學校) 교장을 겸임하였다.
1907년 7월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부임했다. 그해 10월 한성부민회(漢成府民會) 회원이 되어 1911년까지 재임했다. 1907년(광무 10년) 7월 고종이 강제로 퇴위할 때 훈3등 팔괘장을 받았고, 1907년 10월 한성부민회 설립에 참여하였다. 1908년 3월 1일 위생회(衛生會) 회장에 선출되고, 같은 날 흥사단에 평의원으로 가입했으나 곧 탈퇴하였다. 한성부윤으로 근무하던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살해하자 이토 추도회를 여러 차례 여는 등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전부터 적극적인 친일 행위를 하였다.
3. 일제 강점기 활동 (1910년 ~ 1945년)
장헌식은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이후 조선총독부 관료로 활동하며 평안남도 참여관,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전라남도 지사를 역임했다. 1921년에는 총독부 총독관방 근무 사무관(민정시찰 사무관)을 맡아 독립 운동 감시와 탄압에 관여했다.[3]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 확산과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다.[4]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 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도 있다.[4]
1926년 관직에서 물러난 후에는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로 활동하며, 1931년 조선불교단 이사[5], 1932년 조선수산협회 공동 부회장[6], 조선교육협회 부회장을 역임했다. 1935년에는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었다.[7][8]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에는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하고,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 국민총력 조선연맹, 조선 임전 보국단 등 친일 단체에 적극 참여했다.[1]
3. 1. 관료 생활 (1910년 ~ 1926년)
1910년 한일 병합 조약 체결 후, 장헌식은 조선총독부에 의해 평안남도 초대 참여관 고등관 3등(平安南道 參與官 高等官三等)에 임명되었다.[1] 1910년 12월 27일 종5위(從五位)로 승급하였고, 1912년 8월 1일 일한병합기념장, 1915년 11월 10일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1] 1916년 3월 31일에는 정5위(正五位)로 승급하였다.[1]1917년 6월 12일 충청북도 장관(도지사) 고등관 2등(忠淸北道 長官 高等官二等)으로 승진하였으며, 도장관이 도지사로 명칭이 변경된 후에도 충청북도지사로 유임되었다.[1] 1920년 7월 31일 훈2등(勳二等) 서보장(瑞寳章)을 받았고, 1920년 9월 27일 고등관 1등(高等官一等)으로 승진하였다.[1] 1920년 6월 24일에는 청주청년회 발족에 참여하였다.[1]
1923년 11월 25일 만주의 조선인 동포가 설립한 대성중학교에 장학금으로 40원을 기탁하였고,[2] 12월 27일 경성도서관에 도서구입비 100원을 기부하였다.
1924년 12월 1일 전라남도 지사로 부임한 그는 퇴근 후 농군들처럼 식수(植樹)와 분재를 가꾸고 자신의 토지에서 논농사와 밭농사를 짓기도 했다.[1]
장헌식은 도 참여관, 도지사를 지낸 관료였지만, 1921년 총독부 총독관방 근무 사무관(민정시찰 사무관)을 맡는 등 총독부와 유착된 행보를 보였다.[3] 3·1 운동 이후 신설된 민정시찰 사무관은 독립 운동 감시와 탄압이 주된 목적이었다.[3]
1923년 간토 대지진 이후 사회주의 사상 확산과 노동 운동이 활발해지자, 이를 탄압하기 위해 설립된 친일 자본가 단체인 동민회에 가담했다.[4] 또한,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또 다른 친일 단체 대화동맹 결성을 조종했다는 증언도 있다.[4]
1926년 5월 1일 정4위(正四位)로 승급했지만, 1926년 8월 14일 스스로 사직(의원면관, 依願免官)하였다.[1] 이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 칙임관대우(中樞院參議 勅任官待遇)에 선발되었고, 1926년 9월 13일 종3위(從三位)로 승급, 1928년 11월 16일 다시 대례기념장(大禮記念章)을 받았다.[1]
3. 1. 1. 총독부 사무관 및 민정시찰 (1921년 ~ 1922년)
張憲植|장헌식일본어은 1921년부터 1922년까지 총독부 사무관으로 재직하며 민정 시찰 업무를 수행하였다. 이 시기 조선총독부는 조선인들의 정치, 사회 활동을 감시하고 통제하기 위해 노력하였다.3. 2. 중추원 참의 및 사회 활동 (1926년 ~ 1945년)
1926년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선출되었다. 1931년 5월 25일 조선불교단 이사에 선출되고[5], 12월 17일 조선수산협회 공동 부회장 중 한명으로 선출되었다.[6] 1932년 2월 5일 조선교육협회 부회장에 선출되었다.1932년 5월 27일 일기에서 김윤정, 이항구, 장헌식 등이 춤을 추며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는 내용을 자신의 일기에 남겼다. 그해 9월 3일에는 경성부윤 주최하 사회복지사역에 참석하여 답사를 하였다. 1932년 8월 16일 조선총독부 중추원 참의에 재선출되었다.
1935년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건립과 개교에 관련, 건립 및 시설 비용 부족으로 개교가 지연되자 그는 학교 개교 비용을 부담하고 자신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1935년 9월 27일 경성도시계획연구회 총회에서 집행위원으로 피선되었다. 1935년 11월 27일 김천의 김천고등보통학교 설립자 최송설당 기념 동상을 건립할 때 3원을 기부하였다.
1935년 총독부가 편찬한 《조선공로자명감》에 조선인 공로자 353명 중 한 명으로 수록되어 있다.[7][8] 1935년 8월 14일 임기만료로 참의직에서 물러났으나 특별히 중추원 참의에 재임명되었다.
1937년에는 각지에 시국강연을 다녔다. 만주사변 이후 일본군을 후원한 활동을 인정받아 1937년 일본 육군대신 명의의 표창을 받은 바 있다.[1]
3. 2. 1. 청주상업고등학교 교장 취임 (1935년)
1930년대 청주에 개교 예정인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건립과 개교에 관련, 건립 및 시설 비용 부족으로 개교가 지연되었다. 그는 학교 개교 비용을 부담하고 자신의 토지를 기증하였다. 1935년 청주상고는 사립 학교로 개교가 확정되고, 청주시민 대표 방인혁(龎寅赫), 민영은(閔泳殷) 등은 2월 20일 그를 찾아가 교장에 취임해 줄 것을 부탁하여 승낙했다. 1935년 3월 1일 청주상업고등학교(淸州商業高等學校) 교장에 취임하고 그해 5월 7일 개교식과 입학식을 거행하였다.3. 2. 2. 전쟁 지원 활동 (1937년 ~ 1945년)
1937년 중일 전쟁 발발 이후 시국강연반에 가담하여 전쟁 지원 연설을 했다. 같은 해 8월 21일에는 애국금차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38년 친일 단체인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발기인으로 참가한 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과 조선 임전 보국단에도 가담했다. 이때는 이미 70대의 노구였으나, 학병 지원을 독려한다며 전국에서 강연 활동을 벌이기도 했다.[1]1940년 1월 25일 유도회(儒道會) 경성부지부 부회장에 선출되었다. 1941년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이 되고, 조선 임전 보국단이 출범할 때 창립 발기인이자 회원으로 참여하였다. 1944년 1월 다시 국민총력 조선연맹 평의원이 되었다.[1]
4. 해방 이후 (1945년 ~ 1950년)
해방 이후 장헌식은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과 동시에 미군정 자문위원이 되었으나, 이왕직 장관직에서 물러나면서 구왕궁 물품 유용 혐의로 수사를 받았다. 이는 해방 이후 첫 수사 및 재판으로 기록된다.[9] 1946년 1월에는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기도 했다.[9] 그는 "일본 정치하에서 고관대작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는 태도를 보여 검찰관과 방청객의 분노를 샀다.[9] 이후 보석으로 풀려났으나, 공금횡령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징역형을 선고받았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 후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용인의 자택으로 돌아갔다. 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반민특위)에 자수하여 조사에 순순히 응했으며, 건강 문제에도 불구하고 보석을 거절하고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1949년 4월 20일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11] 1950년 8월 20일에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조선인민군에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다.
4. 1. 미군정기 활동 (1945년 ~ 1948년)
1945년 9월 2일 미군정 주둔과 동시에 미군정 자문위원이 되었다. 당시 그는 이왕직 장관이었으나, 11월 8일 사퇴하였다. 이 과정에서 구왕궁 물품 유용 혐의로 수사를 받았는데, 이는 해방 이후 첫 수사 및 재판으로 기록된다.[9]1946년 1월 3일 이왕직 재산 관련 공금횡령 혐의로, 일본인 이왕직 회계과장 사이토 치로(齋藤治郎)와 함께 체포되어 서대문형무소에 투옥되었다.[9] 그는 반성 없이 "일본 정치하에서 고관대작으로 있었는데 어찌하겠느냐"고 대응하여 검찰관과 방청객의 분노를 샀다.[9] 1월 16일 보석금을 내고 출감하였다.[10]
1946년 3월 15일 공금횡령 및 공문서 위조 혐의로 서울지방법원에서 징역 6개월형을 선고받고 투옥되었다가 집행유예로 풀려났다. 이후 다시 미군정 자문관으로 복직하였다.
4. 2. 대한민국 정부 수립 이후와 죽음 (1948년 ~ 1950년)
1948년 8월 15일 정부 수립과 동시에 관직에서 물러나 경기도 용인의 자택으로 돌아갔다.1949년 1월 반민족행위특별조사위원회에 체포령이 떨어지자 자수하였으며, 반민특위 조사관들이 오자 담담하게 대가를 치르는 것이라며, 손자며느리에게 뒷일을 부탁하고 출두하였다. 이후 조사에 순순히 응하여 구속 수사를 받았으며 치질로 고생하였으나 병보석은 거절하였다. 1949년 2월 22일 치질로 인해 석방된 뒤 불구속 문초를 받아 반민특위에 다녀가며 방문조사를 받았다. 3월 9일 반민특위로부터 보석이 가능하다는 통지를 받았지만 보석을 거절했다. 같은 날 반민특위로부터 불구속 기소 처분을 받았다.
1949년 4월 20일 보석금을 내고 석방되었다.[11]
1950년 8월 20일에 사망했는데, 일설에는 조선인민군에 살해되었다는 설이 있다.
5. 사후 평가
조선총독부는 장헌식을 성품이 온화하고 학식이 풍부한 인물이라고 평가했는데, 이 내용은 잡지 대륙자유평론 사업인물호 제8호의 인물소개란에 수록되어 있다.[1]
2002년 민족정기를 세우는 국회의원모임이 광복회와 함께 선정한 친일파 708인 명단과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가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하기 위해 정리한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에 모두 포함되었다.[1] 2009년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가 발표한 친일반민족행위 705인 명단에도 포함되었으며, 부인 임정재는 친일 여성 단체 애국금차회에서 활동했다.[1]
6. 가족 관계
관계 | 이름 | 출생 | 사망 | 비고 |
---|---|---|---|---|
아버지 | 장성급(張成汲) | ? | 1915년 4월 | |
어머니 | 이름 미상 | ? | ? | |
부인 | 이름 미상 | 1869년 | ? | |
장녀 | 장홍식(張鴻植) | 1897년 | ? | 한성은행 직원[12] |
아들 | 장경환(張慶煥) | 1903년 | ? | 평양중학교 재학[12] |
딸 | 이름 미상 | ? | ? | 민대식의 아들과 결혼 |
참조
[1]
서적
실록 친일파
돌베개
1991-02-01
[2]
뉴스
大成中學寄金 寄附人士 芳名錄
동아일보
1923-11-25
[3]
서적
친일파 99인 1
돌베개
1993-02-01
[4]
문서
일제 말기 총독부 학무국과 밀착하여~ : 반민특위 조병상 공판조서 (제1회) 중 조병상의 수기 (1949).
[5]
뉴스
佛敎團役員
朝鮮新聞
1931-05-25
[6]
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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每日申報
1931-12-17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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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공로자명감’친일 조선인 3백53명 기록 - 현역 국회의원 2002년 발표한 친일명단 일치 상당수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3-06
[8]
뉴스
3백53명 중 2백56명 명단
https://web.archive.[...]
일요시사
2008-03-06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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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0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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