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응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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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한응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1576년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하고 1577년 문과에 급제했다. 정여립 모반 사건을 고변하여 평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임진왜란 발발 당시 선조를 호종하고 임진강 방어를 맡았다. 이후 예조판서, 우의정을 거쳐 광해군 때 좌의정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대북세력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인조반정 이후 추증되었으며, 경기도 안산시에 묘역이 있다.

한응인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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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응인
출생1878년
사망1953년
본관청주 한씨
학력
학교배재학당 졸업
경력
직업독립운동가
교육자
주요 활동대한민국 임시정부 참여
만주 지역 독립운동 지원
훈장
훈장건국훈장 애족장 추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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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임진왜란 발발 후, 선조는 한응인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강 방어를 맡겼으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주로 향했다. 이후 좌참찬, 공조판서를 거쳤고,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왔을 때 이덕형과 함께 접반사로 선발되었다.

1595년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졌고, 세자 책봉 주청을 위해 명나라에 갔으나, 일을 서두르지 않아 탄핵받았다. 1605년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으로 진봉되었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올랐다.

광해군 즉위 후, 유영경은 영의정에서 바로 퇴출되었으나, 한응인은 우의정 자리를 유지하다가 물러났다. 이후 광해군의 원로대신 예우로 판중추부사가 되었고, 이항복의 천거로 좌의정, 영의정 후보로도 거론되었으나, 유영경과의 관계로 인해 1611년 대북 세력의 탄핵으로 관직을 삭탈당했다. 직첩을 돌려받았으나 계축옥사로 다시 삭탈관직되었다. 선조가 임종 전 한응인 등 일곱 대신에게 영창대군을 부탁한 일로 인해 광해군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인조반정 이후 복권되었다.

2.1. 초기 생애 및 관직 생활

1576년에 생원시와 진사시에 합격했으며, 1577년에 문과에 급제했다. 이후 승정원주서, 사헌부감찰, 형조좌랑을 거쳤다. 인제현감으로 외직에 나갔다가 예조좌랑, 병조좌랑, 사헌부지평, 사간원정언을 역임했다. 1590년 신천군수로 부임했는데, 정여립의 모반을 가장 먼저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호조참의에 올랐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예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주사로 명나라에 갔다.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 발발 소식을 듣고 선조의 어가를 호종해 평양에 이르렀다.

2.2. 정여립 모반 고변과 임진왜란

1590년 신천군수(信川郡守)로 부임했는데 정여립의 모반을 가장 먼저 고변한 공로로 평난공신 1등에 책록되었으며 벼슬은 호조참의에 올랐다. 이후 도승지를 거쳐 이듬해에는 예조판서의 자리에 올랐다.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주사로 명으로 향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전해듣고 선조의 어가를 호종해 평양에 이르렀다. 선조는 한응인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강을 방어하게 했다. 임진강의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주로 향했고, 이후 좌참찬을 거쳐서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나라의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그의 접반사로 이덕형과 함께 선발되기도 했다.

2.3. 임진왜란 이후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주사로 명나라로 향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전해듣고 선조의 어가를 호종해 평양에 이르렀다. 선조는 한응인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강을 방어하게 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주로 향했고, 이후 좌참찬을 거쳐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파견되었을 때 이덕형과 함께 접반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595년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진 뒤, 세자 책봉 주청을 위한 주청사 자격으로 명나라로 향했으나,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05년에는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으로 봉해지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 즉위 후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서 바로 퇴출된 것과 달리 한응인은 우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곧 물러났고, 그 뒤 광해군의 원로대신에 대한 예우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이항복의 천거로 좌의정영의정 자리에도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었으나, 유영경과 연관되면서 1611년에 대북 세력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직첩을 되돌려 받았으나 계축옥사로 다시 삭탈관직되었다. 선조는 죽기 전 한응인을 비롯한 일곱 명의 대신들을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했는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광해군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추증되었다.

2.4. 광해군 대의 시련과 죽음

1591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을 정벌하기 위해 길을 내달라고 요구한 것을 설명하기 위해 진주사로 명나라로 향했으며, 돌아오는 길에 의주에서 임진왜란 발발 사실을 전해듣고 선조의 어가를 호종해 평양에 이르렀다. 선조는 한응인을 도순찰사(都巡察使)로 삼아 임진강을 방어하게 했다. 임진강 방어선이 무너지자 의주로 향했고, 이후 좌참찬을 거쳐서 공조판서에 제수되었다. 명나라 장수 이여송이 원군으로 파견되었을 때에는 이덕형과 함께 접반사로 선발되기도 했다.

1595년 청평군(淸平君)에 봉해진 뒤, 세자 책봉 주청을 위한 주청사 자격으로 명나라로 향했으나, 일을 서두르지 않았다는 이유로 여러 차례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05년에는 청평부원군(淸平府院君)으로 봉해지고 병조판서, 이조판서, 호조판서, 형조판서, 좌찬성을 거쳐 우의정에 이르렀다. 광해군 즉위 후 유영경이 영의정 자리에서 바로 퇴출된 것과 달리 한응인은 우의정 자리를 지키다가 곧 물러났고, 그 뒤 광해군의 원로대신 예우로 판중추부사가 되었다. 이후 이항복의 천거로 좌의정영의정 자리에도 유력한 후보로 검토되었으나, 유영경과 연관되면서 1611년에 대북 세력의 탄핵으로 관직이 삭탈되었다. 이후 직첩을 되돌려 받았으나 계축옥사로 다시 삭탈관직되었다. 선조는 죽기 전 한응인을 비롯한 일곱 명의 대신들을 불러 영창대군을 부탁했는데,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광해군 때 관직이 삭탈되었으나 인조반정 후 추증되었다.

3. 사후

한응인묘역은 경기도 안산시 상록구 사사동에 있다. 부인 전주 이씨와의 합장묘이고 봉분 아랫부분에는 2단으로 둘레석을 둘렀다. 봉분 앞에는 묘비·상석·향로석이 있고 좌우에는 망주석(望柱石: 멀리서도 묘가 있음을 알 수 있게 돌기둥)과 문인석이 1쌍씩 있다. 묘역 오른쪽에는 신도비(神道碑: 왕이나 고관 등의 평생 업적을 기리기 위해 무덤가에 세우던 비)가 세워져 있는데, 김류가 비문을 짓고 한인급이 글씨를 써서 인조 20년(1642)에 세운 것이다. 1995년 8월 7일 경기도의 기념물 제157호로 지정되었다.

4. 평가

조선왕조실록에서는 한응인에 대하여 사람됨이 관후하고, 문장으로 이름이 났지만 일 처리에 있어 태도가 분명하지 않고 임기응변으로 처리했다고 평가했다.

5. 가족 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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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계이름비고
부친한경남서원부원군
모친김임정경주 김씨, 김만일(金萬鎰)의 3녀
여동생한성희(韓聖姬)
남동생한응굉(韓應宏)
부인이종이전주 이씨, 이담령(李聃齡)의 딸
장남한덕급(韓德及)
며느리광산 김씨김장생의 딸
손자한수원
손자한지원(韓智遠)
손자한지원(韓志遠)이름이 같음
손녀이여홍(李汝洪)의 처
손녀김민성(金敏成)의 처
손녀이시정(李時楨)의 처
아들한신급(韓信及)
손자한기원(韓器遠)
아들한인급(韓仁及)
손자한진원(韓振遠)
손자한명원(韓命遠)
손녀이호징(李好徵)의 처
장녀청주 한씨
사위이건전주 이씨, 감찰(監察), 증 승지(贈 承旨)
외손자이문형(李文炯)
외손녀이정(李正)
외손자이문병(李文炳)
외손자이문환(李文煥)
외손자이문정(李文炡)
외손자이문황(李文煌)
외손자이문욱(李文煜)
차녀청주 한씨
사위안대남(安大楠)
외손자안정섭(安廷爕)
3녀청주 한씨
사위남두첨(南斗瞻)
외손자남선(南翧)
외손녀박수현(朴守玄)의 처

6. 저서

* 백졸재유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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