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호문
1. 개요
한호문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음보로 관직에 올라 선전관, 하양 현감, 서산 군수 등을 역임했다. 인조 재위 기간에 화기도감 낭청, 경원부사 등을 거쳐 밀양 부사로 부임했으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정묘호란 때 소현세자를 배종하고, 병자호란 때는 남한산성으로 인조를 수행했으며, 훈련원 도정,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을 지냈다. 최종 관직은 중추부 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훈련원 지사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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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치인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정치인 -
이승만
이승만은 대한민국의 초대 대통령이자 독립운동가로서,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을 역임하고 해방 후 초대 대통령으로 선출되었으나, 독재적 통치와 부정부패에 대한 비판도 받으며 4·19 혁명 후 하와이로 망명하여 서거하였다. -
한국의 장군 -
윤곤
윤곤은 고려 말 문과에 급제하여 조선 건국 후 완산부윤, 대장군 등을 지냈고, 제2차 왕자의 난에 이방원을 도와 공신이 되었으며, 명나라 사신, 의정부 참찬, 이조판서를 역임한 문신, 무신, 정치인, 외교관이다. -
한국의 장군 -
신숙주
신숙주는 조선 전기의 문신, 학자, 언어학자, 외교관, 정치인으로, 훈민정음 창제에 참여하고 세조 즉위 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며 외교와 국방에 기여했으며, 《해동제국기》, 《동국정운》 등의 저술을 남기고 영의정을 지냈다. -
조선의 무신 -
방우정
방우정은 조선 후기 무신으로 홍경래의 난 진압에 참여하여 서정군의 좌초관으로 활약했으며, 난에 대한 경험을 바탕으로 《서정일기》를 저술하여 홍경래의 난 연구에 중요한 사료를 남겼다. -
조선의 무신 -
김응우
김응우는 김일성의 고조부로 평안도 대동 출신이며, 북한에서는 제너럴 셔먼호 격침에 기여했다고 주장하나 역사적 사실과 다르다는 비판이 있고, 김일성 가문으로 이어진 전주 김씨이다.
2. 생애
조선 중기의 무신. 음보로 관직에 나아가 선전관, 현감, 판관, 군수 등을 역임하였다. 광해군 대에는 화기도감 낭청으로 활동하였고, 인조반정 이후 밀양부사에 임명되었으나 부모 봉양 문제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기도 했다.
1627년 정묘호란 발발 시 소현세자를 호위하였고, 1636년 병자호란 때에는 훈련원 도정으로서 인조를 따라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호란 이후 훈련원 도정, 포도대장, 오위도총부 부총관 등 여러 무관직을 거쳤으며, 무과 시험의 시관으로 참여하기도 했다. 말년에는 나이가 많고 기력이 쇠했다는 이유 등으로 사헌부로부터 여러 차례 탄핵을 받았으나, 인조의 비호 아래 관직 생활을 이어갔다. 강빈 옥사 당시에는 좌포장으로서 궁궐 경비를 담당하기도 했다. 최종적으로 중추부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 및 훈련원지사에 이르렀다.
2.1. 출생과 가계
할아버지는 배천 군수(白川郡守)를 지냈고 증 가선대부 병조참판(嘉善大夫 兵曹參判)과 서림군(西林君)에 증직된 한창서(韓昌緖)이다. 아버지는 어모장군 충의위(禦侮將軍 忠義衛)와 가선대부 동지중추부사(嘉善大夫 同知中樞府事), 형판(刑判)을 지냈으며, 사후 증 정헌대부 의정부좌참찬(贈正憲大夫 議政府左參贊) 겸 오위도총부 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과 서원군(西原君)에 추증된 한강(韓綱)이다. 어머니는 우계이씨(羽溪李氏)로, 지중추부사 이전(李晉+戈)의 딸이다.
형제로는 한선문, 한의문, 한사문 등이 있었으나, 모두 아버지 한강보다 먼저 사망하였다. 누이 한 명은 칠계군 헌민공 윤탁연의 아들 윤길원에게 출가하였다.
그는 양절공 한확(韓確)의 7대손이며, 한확의 아들인 공안공 한치인(韓致仁)의 6대손이다. 따라서 소혜왕후에게는 종6대손이 된다. 또한 세종의 아들 계양군 이증의 부인인 정선군부인 청주한씨(旌善郡夫人 淸州韓氏)는 그의 6대 대고모가 된다.
2.2. 관료 생활
음보(蔭補)로 관직에 올라 여러 관직을 거쳐 1598년(선조 31년) 선전관(宣傳官), 1599년 (선조 32년) 5월 3일 하양 현감(河陽縣監)으로 부임하였다. 1602년(선조 35) 9월 14일 군기감 판관(軍器判官)을 거쳐, 12월 16일 영흥 판관으로 나갔다. 1603년(선조 36년) 11월 29일 서산 군수로 부임하였고, 그 내용은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의 선생안에도 수록되었다. 1607년 9월 4일 도총부 경력에 임명되었다.
1614년(광해군 6년) 7월 30일 화기도감 우변낭청(右邊郎廳)에 임명되었다. 1615년(광해군 7년) 화기도감 낭청으로 참여한 공로로, 그해 12월 29일 화기도감 도제조 이하 관원을 시상할 때 승급되었다. 이후 경원부사(慶源府使)에 제수되었으나, 부모의 나이가 70세 고령임을 이유로 들어 사직하였다.
1623년(인조 1년) 9월 19일 밀양 부사(密陽府使)로 부임하였다. 그러나 이전에 경원부사직을 부모 봉양을 이유로 사직했던 것과 달리 밀양부사에는 부임했다는 이유로 사간원의 탄핵을 받고 파직되었다. 하지만 바로 다음 날인 9월 20일 죄인 명단에서 특별히 정계(停啓)되었는데, 그 사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26년 4월 13일 겸 내금위장(兼內禁衛將)에 임명되었고, 1627년(인조 5) 1월 정묘호란이 발발하자 소현세자를 호위하였다. 같은 해 4월 5일 상현궁(上弦弓) 1장(張)을 인조로부터 하사받았다.
1633년(인조 11년) 9월 명나라에서 사신이 오자 서원군(西原君)으로서 호송관(護送官)에 임명되어 사신을 접대하였다. 10월 4일 명나라 사신을 모화관에서 접대한 사실을 보고하였다. 1636년 겨울 병자호란이 일어나자 훈련원 도정(訓鍊院都正)으로서 인조 등을 수행하여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1637년 1월 인조가 항복(정축하성)한 직후 작성된 호종록(扈從錄)에 그의 이름이 기록되어 있다.
1637년(인조 15)에는 도정(都正)으로서 그 해 열린 무과 정시(武科 庭試)의 명관(命官, 시험 감독관)으로 선발되었다. 당시 함께 선발된 관원은 좌참찬 이덕형(李德泂), 지사(知事) 변흡(邊潝), 동지(同知) 한명욱(韓明勖) 등이었다. 10월 13일 그 해 무과 정시 합격자가 5천 수백 명에 달해, 본래 업무와 함께 합격자를 정하느라 보고가 40일이나 지체된 것에 대해 대죄(待罪)하였으나 인조가 이를 무마시켰다. 이후 부총관(副摠管)으로 전직되었다. 10월 21일 전시(殿試)의 시관(試官)으로 논박(論駁, 합격자 발표 전 이의 제기 검토)을 위해 나갔는데, 즉시 왔어야 함에도 궐문이 닫힌 뒤 천천히 도착했다는 이유로 승지 김휼의 탄핵을 받아 추고(推考)를 당했다. 그해 12월 도총부 부총관과 훈련원 도정으로서 예조의 인사 포폄(褒貶, 공과 평가)을 마감하는 좌기(坐起, 관원 회의)에 참석하였다. 12월 16일 사헌부에서는 한호문의 위인(爲人)이 용렬(庸劣)하다며 좌기 참석에 반대했지만, 인조가 그 정도는 아니라고 하여 무마되었다.
2.3. 생애 후반
이후 포도청 좌우포장 등 여러 벼슬을 거쳤다. 1637년(인조 15)에는 정축 정시무과(丁丑庭試武科)의 시험관을 맡았다.
1638년 12월 17일, 사헌부의 장령 안시현(安時賢), 이여익(李汝翊), 지평 박수문(朴守文) 등은 당시 훈련 도정이던 한호문의 파직을 인조에게 청하였다. 이들은 훈련 도정이 무관에게 매우 중요한 자리임에도 한호문은 평소 명성이 없고 나이가 많아 기력이 쇠하였으며, 자리를 지킨 지 오래되어 사람들의 비웃음을 사고 있다고 지적했다. 또한 일을 처리할 때 거칠고 비루한 행동이 많아 인품이 용렬하다며 훈련원의 장(長) 자리를 감당하기 어렵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인조는 이 요청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틀 뒤인 12월 19일, 사헌부의 안시현, 이여익과 지평 이운재(李雲栽) 등이 다시 그의 파직을 청했으나, 인조는 이미 유시를 내렸다며 돌려보냈다.
1644년(인조 22년) 무렵에는 자헌대부(資憲大夫) 서원군(西原君)에 봉해졌고, 1645년에는 포도대장이 되었다. 같은 해 12월 25일, 사간원으로부터 추고(推考, 죄를 조사하여 문책함)를 받았다. 추고를 받은 구체적인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다.
1646년(인조 24년) 1월, 소현세자의 빈인 강빈이 인조 등을 저주했다는 강빈 옥사가 발생했을 때, 한호문은 좌포장(左捕將)으로서 궁궐 안에서 대기하였다. 1월 5일, 인조는 좌우포장인 한호문과 신경진(申景珍)에게 기밀 유지를 위해 야간 통행금지를 더욱 엄하게 단속하고 직접 순찰하여 수상한 자들의 출입을 막으라고 명령했다. 같은 해 2월 5일에는 좌변포도대장으로서 패초(임금이 신하를 부르는 명령)를 받았으나, 도착이 늦어 문제가 될 뻔했다. 하지만 승지 여이재가 그가 제때 출발했음을 보고하여 문책받지 않았다.
1648년(인조 26년) 10월, 무과(武科) 시험의 시관(試官)으로 임명되었으나 병을 이유로 패초에 응하지 않았다. 이로 인해 그해 10월 14일 승정원의 탄핵을 받고 추고되었다. 이후 정헌(正憲) 중추부동지사(中樞府同知事)를 거쳐, 최종적으로 중추부지사 겸 오위도총부도총관(五衛都摠府都摠管) 및 훈련원지사(訓鍊院知事)의 관직에 이르렀다.
3. 가족 관계
그의 동생 한의문의 부인이 도적에게 살해당한 일이 인조실록에 등장한다.
* 아버지 : 한강(韓綱, 1535년 ~ 1629년 4월 26일)
* 어머니 : 우계 이씨(羽溪 李氏) - 지중추부사 겸 비변사, 군기시제조 이전(李晉戈)의 딸
남동생 : 한선문(韓善問)
동생 : 한의문(韓疑問, 1572년 ~ 1646년 이전)
동생 : 한사문(韓思問)
누이 : 칠원 윤씨 윤길원(尹吉元)의 처
* 부인
정부인 : 남양 홍씨(南陽洪氏, ? ~ ?년 5월 2일), 부사(府使) 홍여성(洪汝誠)의 딸
계부인 : 여산 송씨(礪山 宋氏, ? ~ ?년 8월 4일) - 이순(李蕣)의 딸
* 자녀
아들 : 한구(韓𩒮)
* 손자 : 한명우(韓明遇)