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형 (원)
1. 개요
허형은 원나라 시대의 학자이자 관료로, 16세에 유학을 연구했으며, 몽골의 금나라 침공 당시 포로가 되었다가 석방되었다. 그는 쿠빌라이 칸 치하에서 여러 관직을 역임하며 몽골 조정의 중국화에 기여했고, 신력 제작에도 참여했다. 허형은 성리학을 중시하는 학파를 이끌었으며, 요추, 두묵, 야율유상, 유인 등과 교류했다. 그의 저서로는 『대학직해』, 『중용직해』 등이 있으며, 일본의 아사미 쿄사이에게는 비판을 받았지만, 이토 진사이에게는 고금 삼대 현인 중 한 명으로 꼽히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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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학가 -
왕수인
왕수인은 왕양명으로 널리 알려진 명나라의 유학자, 관료, 군인, 사상가로서, 육구연의 심학을 계승하여 양명학을 집대성했으며, 그의 사상인 심즉리, 지행합일, 치양지는 주자학에 대한 대안으로 명나라와 조선 사상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1209년 출생 -
몽케 칸
칭기즈 칸의 손자이자 툴루이의 아들인 몽케 칸은 1251년 몽골 제국의 대칸으로 선출되어 금나라 정벌, 유럽 원정 참여, 중앙 정부 강화, 무역로 확보, 고려 항복, 훌라구를 통한 이란-이라크 원정 성공, 룸 술탄국 정벌, 티베트-대리국 평정 등 광범위한 영토 확장을 이끌었으나 남송 정벌 중 병사하며 몽골 제국 분열의 원인이 되었다. -
1209년 출생 -
최항 (1209년)
최항은 고려 후기 최씨 무신정권의 3대 집권자로, 최우의 서자이며 몽골에 대한 강경책을 고수했으나 집권 8년 만에 사망 후 진평공에 추증되었고, 그의 묘지석과 유물은 문화재로 평가받는다. -
1208년 사망 -
쇼시 내친왕 (1145년)
쇼시 내친왕은 토바인과 카스가노츠보네 사이에서 태어나 타카쿠라 천황의 카모 사이인으로 점정되었으나 사임하고, 렌게죠인을 창건하여 죠에 법친왕을 유자로 삼았으며, 다이고제에서 살다가 사망했다. -
1208년 사망 -
영화궁주
고려 인종과 공예왕후의 딸인 영화궁주는 의종, 명종, 신종의 동생이자 희종과 강종의 고모이며, 1151년 궁주에 책봉된 후 소성후 왕공과 혼인하여 사후 경화의 시호를 받았다.
2. 생애
허형은 16세에 유학 공부를 시작하여 경전을 깊이 연구했다. 1232년 몽골이 금나라를 정복할 때 포로가 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이후 학문에 정진하며 1242년에는 요추를 만나 성리학의 주요 서적을 접하고 다양한 학문에 대해 토론하며 학문적 기반을 다졌다.
1254년 쿠빌라이에게 발탁되어 관직에 나아가 문교 정책에 힘썼으며, 1260년 쿠빌라이가 원의 황제로 즉위하자 중앙 관직을 역임하며 몽골 조정의 중국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아흐마드와의 갈등으로 인해 1264년 관직에서 물러나기도 했다.
1271년 다시 부름을 받아 몽골 귀족 자제 교육을 담당했으며, 1276년에는 대도로 소환되어 왕순, 곽수경과 함께 금나라의 대명력을 대체할 새로운 역법(수시력) 제작에 참여했다. 1280년 관직에서 완전히 물러났고, 이듬해인 1281년 세상을 떠났다.
2.1. 초기 생애와 학문적 성장
16세에 학문을 시작하여 유학의 경전을 깊이 연구하였다. 천흥 원년(1232년), 몽골이 금나라를 멸망시키고 신정을 공격했을 때 포로로 잡혔으나 곧 풀려났다. 그로부터 6년 뒤 소문(蘇門)으로 이주하여 살면서 유명한 은사였던 두묵을 만나 가르침을 받았다.
임인(1242년)에는 유성(楡城)의 요추를 만나 정이의 '역경', 주희의 '사서장구집주', '소학' 등의 중요한 서적들을 접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요추와 함께 경(經), 전(傳), 자(子), 사(史), 역(曆), 예악(禮樂), 병형(兵刑), 식화(食貨), 수리(水利) 등 다양한 학문 분야에 대해 깊이 있는 토론을 나누며 학문적 소양을 넓혔다.
2.2. 쿠빌라이 칸 치하의 활동
갑인(1254년), 쿠빌라이가 선무사를 설치했을 때 경조 지방의 제학으로 임명되어 문교 정책에 힘썼다. 무오(1258년)에는 하내로 이주했다. 중통 원년(1260년), 쿠빌라이가 칸으로 즉위하자 소환되어 북쪽으로 가서 태자태보, 국자제주, 의사중서(중서좌승) 등을 역임했다. 이 기간 동안 조정의 관제를 제정하여 몽골 조정의 중국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아흐마드가 평장정사가 되어 권력을 휘두르자 그와 뜻이 맞지 않아 논쟁 끝에 강등되었다. 지원 원년(1264년)에는 아흐마드를 탄핵하려 했으나 쿠빌라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핑계로 사임했다.
지원 8년(1271년), 다시 기용되어 집현대학사와 국자제주를 겸임하며 몽골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다. 지원 10년(1273년)에 다시 사임하고 회주로 돌아갔으나, 지원 13년(1276년)에 또다시 대도로 소환되어 태자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몽골은 금나라에서 이어받아 사용하던 대명력을 개정하고자 했는데, 허형은 왕순, 곽수경과 함께 새로운 역법인 수시력 제작에 참여했다. 지원 17년(1280년)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지원 18년(1281년)에 사망했다.
쿠빌라이의 부름에 응한 허형의 행적에 대해, 일본의 유학자 아사미 쿄사이는 그의 저서 『정헌유언』에서 "오랑캐를 섬겨 대의를 잃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하지만 다른 유학자 이토 진사이는 허형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며, 북송의 정이와 범중엄과 더불어 고금의 3대 현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2.3. 아흐마드와의 갈등과 은퇴
중통 원년(1260년), 쿠빌라이가 즉위하자 소환되어 태자태보, 국자제주, 의사중서(중서좌승) 등을 역임했다. 이 시기 허형은 조의 관제를 제정하는 등 몽골 조정의 중국화에 힘썼다. 그러나 아흐마드가 평장정사가 되어 전권을 휘두르자 상황이 달라졌다. 허형은 아흐마드와 정책 등 여러 사안을 두고 논쟁을 벌였으나 뜻이 맞지 않았고, 이로 인해 강등되기도 했다. 지원 원년(1264년), 허형은 아흐마드를 탄핵하며 정면으로 맞섰지만, 쿠빌라이는 아흐마드를 두둔하며 허형의 주장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에 허형은 병을 핑계로 사임하고 관직에서 물러났다.
2.4. 재기용과 교육 활동
1254년 (갑인), 쿠빌라이가 선무사를 설치했을 때 경조 지방의 제학이 되어 문교 정책에 힘썼다. 1258년 (무오)에는 하내로 이주했다. 1260년 (중통 원년), 쿠빌라이가 원의 황제로 즉위하자 소환되어 북상했다. 이후 태자태보, 국자제주, 중서성의 중서좌승(의사중서) 등을 역임하며 조의 관제를 제정하는 등 몽골 조정의 중국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당시 권력을 휘두르던 아흐마드와 뜻이 맞지 않아 강등되었고, 1264년 (지원 원년)에는 아흐마드를 탄핵했으나 쿠빌라이에게 받아들여지지 않자 병을 이유로 사임했다.
1271년 (지원 8년), 다시 기용되어 집현대학사에 국자제주를 겸임하며 몽골 귀족 자제들의 교육을 맡았다. 1273년 (지원 10년)에 사임하고 회주로 돌아갔으나, 1276년 (지원 13년)에 또다시 대도로 소환되어 태자원으로 임명되었다. 당시 원나라는 금나라에서 사용하던 대명력을 개정하고자 했는데, 허형은 왕순, 곽수경과 함께 새로운 역법 제작에 참여했다. 1280년 (지원 17년)에 관직에서 물러났고, 이듬해인 1281년 (지원 18년)에 세상을 떠났다.
쿠빌라이의 부름에 응하여 원나라에서 활동한 허형에 대해, 일본의 유학자 아사미 쿄사이는 그의 저서 '정헌유언'에서 "오랑캐를 섬겨 대의를 잃었다"고 비판했다. 반면, 이토 진사이는 허형에게도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것이라며, 북송의 정이와 범중엄과 함께 고금의 3대 현인 중 한 명으로 평가했다.
3. 학문적 파벌과 인맥
쿠빌라이 칸 즉위 초기의 한인 관료 사회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어 활동했는데, 유병충, 허형, 왕악이 각각 대표적인 파벌을 형성했다. 이 중 허형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이정자와 주자가 체계화한 성리학을 학문적 기반으로 삼았다는 특징이 있다. 『원사』 유학전에서는 경서 연구에 힘쓴 허형 파벌을 문장력을 중시한 왕악 파벌과 구분하여 유림(儒林)이라 칭하기도 했다.
허형 파벌은 사상적으로 유병충 파벌과 유사한 면도 있었으나, 허형이 기술이나 수리(數理) 같은 실용 지식보다 도(道)의 탐구를 중시한 반면, 유병충 파벌은 실학(實學)에 중점을 두었다는 점에서 차이를 보였다. 허형의 학문적 영향 아래 여러 인물들이 성장했으며, 이들은 원나라 학계와 정계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하게 된다.
3.1. 허형 학파의 특징
쿠빌라이 칸 즉위 직후의 한인 관료 사회는 크게 세 그룹으로 나뉘었는데, 유병충, 허형, 왕악이 각각 대표적인 파벌을 이루었다. 이 중 허형을 중심으로 한 파벌은 이정자와 주자가 창시한 성리학을 중요하게 여겼다는 특징이 있다. 『원사』 유학전에서는 "경서와 예법 연구를 전문으로 하는 자를 유림이라 한다(以経芸顓門者為儒林)"고 기록하며, 문장력을 중시했던 왕악 등의 파벌과 비교하여 경서 연구에 힘쓴 허형 파벌을 유림(儒林)으로 지칭했다.
허형 파벌은 사상적으로는 유병충 파벌과 가까운 점도 있었지만, 뚜렷한 차이점 또한 존재했다. 허형은 기술이나 수리(數理)와 같은 실용적 지식보다는 도(道)를 탐구하고 실천하는 것을 학자의 본분으로 삼았다. 반면, 유병충 파벌은 실학(實學)을 전문 분야로 삼아 현실 문제 해결에 집중하는 경향을 보였다.
허형에게 직접 학문을 배우거나 그의 가르침을 받아 학문적으로 이름을 알린 주요 인물들은 다음과 같다.
| 인물 |
|---|
| 요추 |
| 두묵 |
| 야율유상 |
| 유인 |
3.2. 주요 인맥
쿠빌라이 칸 즉위 직후의 한인 관료는 유병충, 허형, 왕악으로 대표되는 세 그룹으로 분류되었다. 허형으로 대표되는 파벌은 이정자·주자가 제창한 성리학을 중시했다는 특징이 있었다.마츠다 코이치 『元朝の儒学と政治』東京大学出版会、2023年, pp.146-147 『원사』 유학전은 "경예를 전문으로 하는 자를 유림이라 한다(以経芸顓門者為儒林)"고 하여, 왕악 등 문장을 중시하는 파벌에 비해 경서 연구를 중시하는 허형 등의 파벌을 "유림"이라고 불렀다.마츠다 코이치 『元朝の儒学と政治』東京大学出版会、2023年, pp.148
한편, 유병충 등의 파벌과는 사상적으로 가까웠지만, 허형이 기술·수리적인 지식을 하위에 두고 "도를 자신의 임무로 삼"았던 데 반해, 유병충 등은 실학을 전문으로 함으로써 선을 그었다.아베 타케오 『元代史の研究』東洋史研究会、1972年, pp.48-49
아래는 허형과 함께 학문을 배우거나, 허형의 가르침을 받아 이름을 떨친 사람들이다.마츠다 코이치 『元朝の儒学と政治』東京大学出版会、2023年, pp.146-147
* 요추
* 두묵
* 야율유상
* 유인
4. 저술
* 『대학직해』
* 『중용직해』
* 『대학요략』
* 『편년가괄』
* 『계고천자문』
* 『노재유서』
* 왕성여(王成儒) 교정 『허형집』(동방출판사, 2007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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