헥사밀리온 방벽
1. 개요
헥사밀리온 방벽은 408년에서 450년 사이에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에 건설된 요새로, 펠로폰네소스 반도를 야만족의 침략으로부터 보호하기 위한 목적으로 코린토스 지협을 가로질러 건설되었다. 이 방벽은 코린토스 만에서 사로니코스 만까지 약 7.5km에 걸쳐 뻗어 있었으며, 유스티니아누스 1세 시대에 망루가 추가되면서 보강되었다. 헥사밀리온은 오스만 제국에 의해 여러 차례 파괴되었고, 1460년 펠로폰네소스가 정복된 후 버려졌다. 현재는 코린토스 운하 남쪽과 이스미아의 포세이돈 신전에서 그 잔해를 찾아볼 수 있다.
| 이름 | 헥사밀리온 방벽 |
|---|---|
| 원어명 | Εξαμίλιον τείχος |
| 종류 | 방어용 성벽 |
이미지 준비중입니다.
| 위치 | 그리스 코린티아현 코린토스 |
|---|---|
| 지역 | 코린티아 |
| 길이 | 알 수 없음 |
|---|---|
| 너비 | 알 수 없음 |
| 면적 | 알 수 없음 |
| 높이 | 알 수 없음 |
| 건축 자재 | 알 수 없음 |
| 건설 시기 | 알 수 없음 |
| 폐기 시기 | 알 수 없음 |
| 시대 | 초기 중세 ~ 후기 중세 |
| 관련 문화 | 알 수 없음 |
| 소속 | 알 수 없음 |
| 점유자 | 알 수 없음 |
| 사건 | 알 수 없음 |
| 발굴 | 알 수 없음 |
| 고고학자 | 알 수 없음 |
| 상태 | 폐허 |
| 소유 | 공공 |
| 관리 | 25th Ephorate of Byzantine Antiquities (25대 비잔틴 유물 관리국) |
| 일반 접근 | 가능 |
| 웹사이트 | Hellenic Ministry for Culture and Tourism |
| 추가 정보 | 알 수 없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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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어선 -
요새
요새는 적의 침략으로부터 영토와 인구를 보호하기 위해 역사적으로 건설된 방어 시설로, 시대와 지역에 따라 다양한 형태와 기술로 발전해 왔으며, 군사적 중요성이 감소하면서 현재는 유적이나 관광지로 활용된다. -
방어선 -
하드리아누스 방벽
하드리아누스 방벽은 122년 하드리아누스 황제가 건설한 브리타니아 섬 횡단 방벽으로, 로마 제국의 국경을 표시하고 방어하는 역할을 수행했으며, 1987년 유네스코 세계유산으로 지정되었다. -
동로마-오스만 전쟁 -
앙카라 전투
앙카라 전투는 1402년 티무르와 오스만 제국의 바예지드 1세 사이에 벌어진 전투로, 티무르의 승리, 바예지드 1세의 포로,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내전이라는 결과를 초래했다. -
동로마-오스만 전쟁 -
펠레카논 전투
펠레카논 전투는 1329년 동로마 제국과 오스만 제국 간에 벌어진 전투로, 동로마 제국이 패배하며 영토를 잃고 쇠퇴하는 계기가 되었다. -
5세기 완공된 건축물 -
보은 삼년산성
보은 삼년산성은 신라 시대에 축조되어 삼국 통일 과정에서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 역할을 한 돌로 쌓은 산성으로, 축성에 3년이 걸렸다는 기록에서 유래되었으며, 성 내부 유적과 출토 유물은 당시 신라의 건축 기술과 사회상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
5세기 완공된 건축물 -
테오도시우스 성벽
테오도시우스 성벽은 동로마 제국 시대 콘스탄티노폴리스를 방어하기 위해 건설된 이중 성벽으로, 해자, 내외벽, 망루를 갖춘 3중 구조로 육상 6km 구간을 보호했으며, 지진과 홍수 피해를 수리하며 유지되었다.
2. 역사
헥사밀리온 방벽은 미케네 문명 시대부터 지협을 요새화하려는 여러 시도 중 가장 마지막에 만들어진 것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하는 대신 지협으로 후퇴하여 요새화하기를 원했다. 그러나 살라미스 해전 직전, 헤로도토스는 해상 통제 없이는 지협 요새화가 쓸모없다고 지적했다.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인 408년에서 450년 사이에, 야만인의 대규모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헥사밀리온 방벽이 건설되었다. 396년 알라리크의 그리스 공격이나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과 같은 사건들이 방벽 건설의 동기가 되었다.
헥사밀리온 방벽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고고학적 구조물로, 코린토스만에서 사로니코스만까지 7.5km 길이에 달했다. 방벽은 돌무더기와 모르타르로 채운 벽돌로 축조되었으며, 북문과 남문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북문은 펠로폰네소스의 공식적인 관문 역할을 했다. 방벽 건설에는 이 지역의 모든 건축물들이 징발되었는데, 이스트미아에 있었던 옛 포세이돈 신전은 방벽 건설을 위해 철거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에는 성벽이 총 153개의 망루로 보강되었다.
1415년,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직접 방벽 수리를 감독했으나, 1423년과 1431년에 투라한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방벽을 뚫었다.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444년에 성벽을 다시 복원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1446년과 1452년 10월에 다시 방벽을 돌파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1460년 오스만 제국의 펠로폰네소스 정복 이후, 방벽은 버려졌다.
2.1. 초기 요새
미케네 문명 시대부터 지협을 요새화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며, 헥사밀리온 방벽은 그중 가장 최근의 것이다.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 제국의 샤힌샤 크세르크세스 1세가 그리스를 침공했을 때, 많은 펠로폰네소스 동맹 도시들은 테르모필레에서 방어하는 대신 지협으로 후퇴하여 요새화하기를 원했다. (헤로도토스의 역사 7.206). 이 문제는 살라미스 해전 직전에 다시 제기되었다(헤로도토스 8.40, 49, 56). 헤로도토스는 지협 요새화가 해상 통제 없이는 쓸모가 없다고 지적했다(7.138).
2.2. 헥사밀리온 장벽 건설
동로마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의 치세인 408년에서 450년 사이에 헥사밀리온 방벽이 건설되었다. 이 시기는 로마 제국에 대한 야만인의 대규모 침략이 있던 때였다. 396년 알라리크의 그리스 공격이나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과 같은 사건들이 헥사밀리온 방벽 건설의 동기가 되었을 수 있다.
헥사밀리온 방벽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고고학적 구조물이다. 방벽은 돌무더기와 모르타르로 채운 벽돌로 축조되었으며, 북문과 남문 두 개의 문이 있었다. 북문은 펠로폰네소스의 공식적인 관문 역할을 했다.
방벽 건설에는 이 지역의 모든 건축물들이 징발되었다. 예를 들어, 이스트미아에 있었던 옛 포세이돈 신전은 방벽 건설을 위해 철거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에는 성벽이 총 153개의 망루로 보강되었다.
2.3. 구조 및 특징
헥사밀리온 방벽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고고학적 구조물이다. 펠로폰네소스의 공식적인 관문 역할을 했던 북문을 포함하여 두 개의 문(북쪽과 남쪽)이 있었다. 방벽은 돌무더기와 모르타르로 채운 벽돌로 축조되었다.
완공에 걸린 시간은 확실하지 않지만, 그 규모를 통해 당시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모든 건축물들이 헥사밀리온 방벽 축조에 징발되었는데, 이스트미아에 있었던 옛 포세이돈 신전처럼 방벽에 직접 포함되거나, 페라코라의 헤라 성소나 코린토스의 고대 조각상처럼 철거되기도 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에 성벽은 총 153개에 달하는 망루로 보강되었다. 하지만 군사적 사용은 7세기 이후에는 감소한 것으로 보이며, 11세기경에는 벽에 국내 건축물이 건설되었다.
코린토스만에서 사로니코스만까지 7.5km 길이(높이 7m, 두께 3m)에 달하는 방벽은 잡석과 모르타르 코어에 정사각형 돌을 덧대어 건설되었다. 북쪽 정면의 블록은 더 크고 더 세심하게 처리된 모서리로 합쳐졌고, 남쪽 면은 모르타르로 고정된 작은 돌로 만들어졌다. 이스트미아의 포세이돈 신전 자재는 1세기에 엠플렉톤 건축 기법으로 방벽의 주요 입구로 전환되었다. 스폴리아(아치석, 기둥 드럼, 비문이 새겨진 블록)는 구조물과 도로에 모두 통합되었다.
이스토미아의 전략적 요새는 유리한 지형을 이용하여 헥사밀리온 방벽의 남쪽에 위치해 있었으며, 포세이돈 신전의 북동쪽에 위치해 있었다. 이 요새는 총 2.7ha 면적의 벽에서 돌출된 19개의 직사각형 탑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헥사밀리온 전체를 방어하는 군사 주둔지를 수용했을 가능성이 높다. 방벽을 통과하는 주요 통로는 이스토미아 요새를 통과했으며, 북동쪽 문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가는 주요 입구 역할을 했다.
2.4. 비잔티움 제국 시기
동로마 제국 황제 테오도시우스 2세 치세인 408년에서 450년 사이에 야만인의 대규모 침략에 대응하기 위해 헥사밀리온 방벽이 건설되었다. 이 방벽 건설에는 396년 알라리크의 그리스 공격과 410년 서고트족의 로마 약탈이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 헥사밀리온 방벽은 망루, 바다 요새, 최소 하나의 요새를 포함하는 대규모 축성 사업이었다.
헥사밀리온은 그리스에서 가장 큰 고고학적 구조물이다. 방벽에는 북쪽과 남쪽에 두 개의 문이 있었고, 북문은 펠로폰네소스로 들어가는 공식적인 관문 역할을 했다. 방벽은 돌무더기와 몰타르로 채운 벽돌로 축조되었다.
방벽이 완공되기까지 얼마나 걸렸는지는 확실하지 않지만, 그 규모를 통해 당시 이 작업이 얼마나 중요했는지 알 수 있다. 이 지역의 모든 건축물들이 헥사밀리온 방벽 축조에 징발되었다. 이스트미아에 있었던 옛 포세이돈 신전처럼 방벽의 재료로 사용하기 위해 철거되기도 했고, 페르초라의 헤라 성소나 코린토스의 고대 조각상도 철거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대제 치세에 성벽은 총 153개에 달하는 망루로 보강되었다. 하지만 7세기 이후에는 군사적 사용이 감소한 것으로 보이며, 11세기경에는 방벽 안에 민간 건축물이 건설되기도 했다.
1415년,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40일 동안 직접 방벽 수리를 감독했다. 그러나 이러한 노력은 지역 권세가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1423년과 1431년에 투라한 베이가 이끄는 오스만 제국 군대가 방벽을 뚫었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위에 오르기 전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였던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444년에 성벽을 다시 복원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1446년과 1452년 10월에 다시 방벽을 돌파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가 함락되고 1460년 오스만 제국이 펠로폰네소스 반도마저 정복하면서 헥사밀리온 방벽은 버려졌다.
2.5. 오스만 제국 시기
1415년, 동로마 황제 마누엘 2세는 40일 동안 직접 헥사밀리온 방벽의 수리를 감독했으나, 이는 지역 권세가들의 불안을 야기했다. 1423년과 1431년에는 투라한 베이의 지휘 아래 오스만 제국 군대에 의해 방벽이 뚫렸다. 비잔티움 제국의 황위에 오르기 전 모레아의 데스포티스였던 콘스탄티노스 팔라이올로고스는 1444년에 성벽을 다시 복원했지만, 오스만 제국은 1446년과 1452년 10월에 다시 방벽을 파괴했다.
1446년 11월 27일, 콘스탄티노스와 투르크 간의 전투가 시작되면서 헥사밀리온 방벽은 최종적으로 무너졌다. 5만에서 6만 명으로 구성된 투르크 군대의 사령관 무라드 2세는 긴 대포(당시 새로운 무기), 공성 병기, 사다리를 이용하여 벽 전체를 공격했다. 찰코콘딜레스의 묘사에 따르면, 5일간의 전투 후 무라드는 최종 공격을 명령했고, 1446년 12월 10일 헥사밀리온은 폐허가 되었다. 1453년 콘스탄티노폴리스 함락과 1460년 오스만 제국의 펠로폰네소스 정복 이후, 방벽은 버려졌다.
3. 지역 주민과의 관계
헥사밀리온 방벽은 펠로폰네소스 반도로 들어가는 길목을 크게 좁혔다. 아테네에서 오는 길은 서쪽의 코린토스와 동쪽의 에피다우로스로 향하는 요새를 지나도록 만들어졌다. 이 때문에 이스트미아 요새와 연결된 벽은 남부 그리스로 가는 중요한 육상 통로가 되었고, 벽에 설치된 관문은 드나드는 무역에 세금을 매길 수 있게 하여 지역 경제를 활성화했다.
하지만 헥사밀리온 방벽은 지역 주민들에게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크다. 벽 건설 과정에서 땅을 매입하고 건물을 철거하면서 땅 주인들과 갈등이 생겼고, 벽은 지역 문제에 대한 국가 통제를 강화하는 수단으로도 사용되었을 수 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때 헥사밀리온 방벽을 대규모로 수리하면서 지역 노동자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하고, 지역 경제 내의 돈 분배에 영향을 주었으며, 많은 숙련 노동자들을 이 지역으로 끌어들였을 것이다.
3.1. 수비대
5세기에 이스트미아 요새 수비대는 4개에서 8개의 타그마로 구성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역사학자들은 병력의 질과 상태가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이전의 테르모필레 요새를 지키던 병사들에 대한 프로코피우스의 묘사와 유사했을 것으로 본다. 즉, 다양한 침략자의 진격을 막을 수 없는 지역 농부들이었으며, 결국 코미타텐세스로 대체되었다. 유스티니아누스 황제는 성벽 수리의 일환으로 이스트미아 요새 내에 전문 군사 수비대를 설치하여, 이전에 요새를 지키던 지역 농부들을 대체했다.
군수품을 보충하기 위해 병사들은 헥사밀리온 남쪽에서 농사를 지어 식량을 일부 생산했지만, 코린토스와 같은 인근 마을을 포함한 지역 농부, 상인, 장인, 노동자들의 주요 지원도 받았다. 빌라 루스티카는 상당한 양의 상품과 서비스를 공급하기도 했다. 이러한 빌라는 제국의 경제 교환 시스템의 중요한 부분이자, 후기 로마 및 초기 비잔틴 시대의 기본적인 생산 단위였다. 헥사밀리온 수비대가 제공하는 다양한 숙련된 노동력은 지역 곡물 창고를 건설할 수 있게 해주었고, 이 지역의 경제적 착취를 강화할 수 있었다. 이러한 개발 속도의 증가에도 불구하고, 농촌과 지역 경제에 대한 수요는 계절에 따라 변동했으며, 따뜻한 계절에는 경제 활동이 현저하게 증가했다. 마찬가지로, 수비대의 주둔은 그들의 기술이 사용되지 않는 비수기 동안 환경과 지역 경제에 부담을 주었다. 이는 군대의 주둔을 기반으로 수요와 생산이 끊임없이 변동하는 순환적인 지역 경제를 창출했다.
3.2. 반대와 저항
여러 고고학적 발견은 헥사밀리온 방벽의 건설, 재건, 심지어 완성 이후에도 지역 주민들이 벽 건설에 반대했을 수 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15번 탑 바로 서쪽 뒷면에 긁힌 낙서가 발견되었는데, 모르타르가 굳기 전에 새겨져 초기 건설 또는 수리에 관련된 사람들이 만든 것으로 보인다. 이 낙서는 두 척의 갤리선과 해상 전투, 그리고 승선 장치로 보이는 배를 묘사하여 헥사밀리온이 해상 위협에 대한 방어가 부족함을 암시한다. 헥사밀리온은 육상 위협에만 대응하도록 설계되었고 바다로 뻗어나가지 않아 해상 공격에 취약했다. 그러나 이 이미지를 새긴 사람들의 진정한 의도는 알 수 없으며, 단순한 장난이었을 수도 있다.
1954년과 1976년 사이에 발굴된 무덤들도 지역 반대의 증거이다. 이 무덤들은 상부 전투 플랫폼으로 이어지는 계단 기단에 위치해 있었는데, 벽 완공 후 약 10년 후에 배치된 것으로 보인다. 무덤 중 하나를 건설하면서 계단의 최하단 발판이 제거되어 헥사밀리온 벽의 중요한 방어 지점 중 하나의 기능을 약화시켰다. 무덤은 여러 세대에 걸쳐 만들어졌으며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하고 있어, 초기 건설 직후 요새 유지가 지역 주민들에게 넘어갔음을 시사한다.
6세기 후반과 7세기 초, 요새의 북동쪽과 남쪽 문은 두꺼운 벽으로 봉쇄되어 아테네, 코린트, 에피다우루스로 가는 도로를 막았다. 이는 주요 도시를 연결하는 문의 중요성을 고려할 때 놀라운 일이다. 건설 스타일은 서둘러 부주의하게 지어졌음을 시사한다. 북동쪽 문은 배수를 위한 수문과 통합되어 임시 거주가 아님을 나타낸다. 문 봉쇄 이유는 알려져 있지 않지만, 유스티니아누스 황제 통치 기간에 지역 주민들이 스스로 막았을 수 있다는 추측이 있다. 이스미아 지역 주민들이 자신들의 땅이 주요 간선 도로로 변모하는 것에 저항했을 수 있다. 고고학적 발견은 헥사밀리온 벽과 그 유지를 위한 제국의 관심과 지역의 무관심 및 반대라는 순환 패턴을 보여주는 듯하다.
사소한 낙서 시위와 벽을 "비무장화"하려는 무덤 배치 외에도, 공개적인 반란도 있었다. 마누엘 2세 팔레올로고스 황제 통치 기간인 1415년에 오스만 제국의 침략에 대항하기 위해 지협을 재요새화하면서 지역 주민들 사이에 공개적인 반란이 일어났고, 이는 무력으로 진압되었다. 마누엘 2세는 반대를 제국 통치 재개에 대한 저항으로 보았지만, 마누엘 크리솔라스는 벽의 지속적인 자금 지원과 건설에 대한 지역의 불만을 기록했다.
4. 현대의 헥사밀리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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