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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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기원전 499년부터 기원전 449년까지 페르시아 제국과 그리스 도시 국가들 간에 벌어진 일련의 군사적 충돌이다. 이 전쟁은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으로 시작되었으며,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을 징벌하고 제국을 확장하려는 다리우스 1세의 의도에서 비롯되었다. 페르시아는 대규모 병력과 함대를 동원하여 그리스를 침공했으나, 테르모필레 전투, 살라미스 해전, 플라타이아 전투 등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 이 전쟁은 그리스의 승리로 끝났으며, 서양 문명의 발전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주요 사료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가 있으며, 톰 홀랜드와 피터 그린과 같은 현대 역사가들의 연구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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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전쟁]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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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분쟁 명칭 |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일부 |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
시기 | 기원전 480년 – 기원전 479년 |
장소 | 그리스 |
결과 | 그리스의 결정적 승리 |
교전 세력 | |
교전국 1 | 그리스 도시 국가 (아테네, 스파르타 주축) |
교전국 2 | 페르시아 제국 |
지휘관 | |
교전국 1 지휘관 | 레오니다스 1세 테미스토클레스 파우사니아스 레오티키데스 에우리비아데스 아리스티데스 |
교전국 2 지휘관 | 크세르크세스 1세 아르테미시아 1세 마르도니우스 히다르네스 |
병력 규모 | |
교전국 1 병력 | 육군: 스파르타 10,000명 아테네 9,000명 코린토스 5,000명 테스피아이 2,000명 포키스 1,000명 아르카디아, 아이기나, 에레트리아, 플라타이아이를 포함한 기타 그리스 도시 국가 출신 30,000명 해군: 삼단노선 400척 해병 6,000명 노잡이 68,000명 총합: 131,000명 400척 |
교전국 2 병력 | 육군: 80,000–100,000명 (현대 추정) 해군: 600–1,200척 (현대 추정) 총합: 200,000명 (현대 추정) 300,000–500,000명 (현대 추정) 5,283,220명 (고대 자료) |
주요 전투 및 공방전 | |
주요 전투 | 테르모필레 아르테미시움 아테네 살라미스 플라타이아이 미칼레 |
주요 공방전 | 포티다이아 올린토스 |
관련 캠페인 | |
관련 캠페인 상자 | |
지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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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배경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사료는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이다. ‘역사의 아버지’[222]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소아시아 할리카르낫소스(당시 페르시아의 지배를 받았다)에서 기원전 484년에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440-430년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을 추적하려고 시도했던 ‘탐구’(''Enquiries'')(Historiagre, ''The Histories''영어)라는 책을 썼다. 전쟁은 기원전 450년에 끝나는데, 이는 헤로도토스가 비교적 최근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223] 헤로도토스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222]
투키디데스를 시작으로 어떤 후대의 고대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를 비판했지만,[224][225]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가 생략한 부분(세스토스 포위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시작했으며,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다시 쓰거나 교정할 필요 없이 정확하다고 생각했다.[222] 플루타르코스는 수필 ‘헤로도토스의 해악에 관하여’에서 헤로도토스를 ‘야만애호가’로 묘사하며 친 그리스적 입장을 나타내지 않은 것을 비난했지만, 이는 역으로 헤로도토스가 공정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을 시사한다.[226]
19세기 이래로 헤로도토스의 평판은 그가 언급한 사건을 확인해 준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극적으로 복구되었다.[228] 현대의 지배적인 관점은 헤로도토스가 그의 《히스토리아》(''Historia'')에서 주목할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특히 병력 수와 날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다.[222]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또한 기원전 1세기 서적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Bibliotheca Historica'')를 통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초기 그리스 역사가 에포로스에게서 파생된 것으로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230]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플루타르코스,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를 포함한 다른 고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일부 설명되었고,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극작가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뱀기둥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도 헤로도토스의 구체적인 주장을 뒷받침한다.[231]
2. 1. 이오니아 반란과 제1차 페르시아 전쟁
아테네와 에레트리아는 기원전 499년에서 기원전 494년까지 다리우스 1세의 페르시아 제국에 대항한 이오니아 반란을 지원했다. 페르시아 제국은 비교적 젊었고 피지배 민족들 사이에서 반란이 자주 일어났다.[13][21] 다리우스는 찬탈자였고 그의 통치에 반대하는 반란을 진압하는 데 상당한 시간을 보냈다.[13] 이오니아 반란은 그의 제국의 통합성을 위협했고, 다리우스는 관련된 자들(특히 아직 제국에 속하지 않은 자들)을 처벌하겠다고 맹세했다.[14][15] 다리우스는 또한 고대 그리스의 분열된 세계로 그의 제국을 확장할 기회를 보았다.[15]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의 예비 원정은 트라키아를 재정복하고 마케도니아를 페르시아의 완전한 부속 왕국으로 만들면서 끝났다.[16] 마케도니아는 기원전 6세기 후반부터 봉신국이었지만 자치권을 유지했으며 아직 완전히 종속되지는 않았다.

기원전 491년, 다리우스는 모든 그리스 도시 국가에 사절을 보내 그에게 복종하는 징표로 "땅과 물"을 요구했다.[17] 전년도에 그의 힘을 과시한 후, 대다수의 그리스 도시들이 이에 따랐다. 그러나 아테네에서는 사절들이 재판에 회부된 후 처형되었고, 스파르타에서는 단순히 우물에 던져졌다.[17] 이것은 스파르타 또한 페르시아와 사실상 전쟁 상태임을 의미했다.[17]
그리하여 다리우스는 기원전 490년에 다티스와 아르타페르네스 (아르타페르네스의 아들) 아래 야심찬 부대를 편성하여 낙소스 섬을 공격한 후 다른 키클라데스 섬들의 항복을 받았다. 그 부대는 그 후 에레트리아로 이동하여 포위하고 파괴했다.[19] 마지막으로, 그 부대는 아테네를 공격하기 위해 마라톤 만에 상륙했는데, 그곳에서 수적으로 훨씬 열세인 아테네 군대와 마주쳤다. 그 후 벌어진 마라톤 전투에서 아테네는 놀라운 승리를 거두었고, 이로 인해 페르시아 군대는 아시아로 철수했다.[20]
다리우스는 그리스를 완전히 정복하기 위해 거대한 새 군대를 모집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기원전 486년에 그의 이집트 피지배자들이 반란을 일으키면서 그리스 원정이 무기한 연기되었다.[21] 다리우스는 이집트 원정을 준비하던 중 사망했고, 페르시아의 왕위는 그의 아들 크세르크세스 1세에게 넘어갔다.[22] 크세르크세스는 이집트 반란을 진압하고 곧 그리스 침공 준비를 재개했다.[23]
3. 페르시아의 준비
기원전 481년, 대략 4년간의 준비 끝에, 크세르크세스 1세는 유럽 침공을 위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전면적인 침공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과 군비 그리고 징병이 필요했다.[222]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유럽으로 투입하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의 부교’를 가설하고, 호토스 산 지협을 가로지르는 크세르크세스 운하를 건설하는 것은 그 당시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야심이었다.[243] 그러나 원정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1년이 지연되었다.[244]
헤로도토스는 군대가 징병된 46개 나라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245]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481년 여름과 가을에 소아시아에 집결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동부 태수령의 군대는 카파도키아의 크리탈라에 집결하여 사르디스에서 겨울을 났다.[246] 초봄에 아비도스로 이동하여 서부 태수령의 군대와 합류한 후,[247] 2개의 부교를 통해 헬레스폰투스를 건너 유럽으로 진격했다.[248]
3. 1. 크세르크세스의 부교와 운하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군대를 유럽으로 투입하기 위해 ‘크세르크세스의 부교’ 가설이 결정되었으며, 호토스 산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도 건설해야 했다. 이 두 업적은 엄청난 야심의 발로였고, 당시의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243]3. 2. 페르시아군의 규모
기원전 492년 마르도니오스가 이끄는 페르시아 함대가 격파된 호토스 산 지협을 가로지르는 운하 건설과,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는 ‘크세르크세스의 부교’ 가설은 그 당시 어떤 국가도 할 수 없는 엄청난 일이었다.[243] 그러나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일어난 반란으로 인해 원정은 1년 지연되었다.[244]
페르시아군의 규모는 고대 사료와 현대 학자들의 추정치 사이에 큰 차이가 있어 논쟁의 대상이 되어왔다. 헤로도토스는 페르시아군이 총 250만 명의 병력과 그에 상응하는 수의 지원 병력을 포함하여 528만 3220명이라고 주장한 반면,[249][64] 시모니데스는 400만 명,[250] 크테시아스는 80만 명으로 추정했다.[33]
현대 학자들은 이러한 고대 기록이 과장되었거나 오산, 또는 페르시아 측의 허위 정보에 의한 것으로 보고, 실제 규모는 30만에서 50만 명 사이였을 것으로 추정한다.[251][252] 초기 현대 역사가인 조지 그로트는 보급 문제를 주된 이유로 헤로도토스의 숫자를 불신했으며,[65] 후대 역사가 J. B. 버리는 페르시아 육군이 18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했다.[66] 프레데릭 모리스 경은 그리스 지역의 강이 약 20만 명의 병력과 7만 마리의 동물을 지원할 수 있다고 보았다.[67]
페르시아 함대의 규모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다. 헤로도토스는 1,207척의 삼단노선과 3,000척의 수송선 및 보급선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83] 반면, 다른 고대 자료에서는 이보다 적거나 많은 숫자를 제시한다. 현대 학자들은 페르시아가 에게 해에 투입할 수 있는 군함의 수를 600척 정도로 추정하기도 한다.[95][96][97]
헤로도토스는 도리스코스에서 크세르크세스가 군대와 함대를 사열했으며, 그 규모를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부대 | 병력 |
---|---|
12개 민족 출신 200명으로 구성된 1,207척의 삼단노선: 페니키아인과 "팔레스타인의 시리아인"(유대인일 가능성), 이집트인,[36] 키프로스인,[37] 킬리키아인, 팜필리아인, 리키아인, 아시아의 도리아인, 카리아인, 이오니아인, 에게 해 섬 주민, 아이올리아인, 폰토스 출신 그리스인 | 241,400[38] |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또는 사카족 출신 해병대 30명 | 36,210[38] |
50인승 펜테콘테르 (80명), 30인승 배, 경량 갤리선 및 중형 말 수송선을 포함한 3,000척의 갤리선[83] | 240,000[38] |
총 선박 보충병 | 517,610[38] |
총 아시아 육상 및 해상 병력 | 2,317,610[62] |
트라키아의 그리스인과 그 인근 섬에서 온 200명으로 구성된 120척의 삼단노선 | 24,000[63] |
유럽 트라키아인, 파이오니아인, 에오르디, 보티아이, 칼키디아인, 브리기인, 피에리아인, 마케도니아인, 페르하이비, 에니에네스, 돌로페스, 마그네시아인, 아카이아인을 포함한 13개의 민족 출신 발칸 보병 | 300,000[63] |
총계 | 2,641,610 |
3. 2. 1. 육군
기원전 481년, 대략 4년간의 준비 끝에, 크세르크세스는 유럽 침공을 위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군대가 징병된 46개 나라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다.[245] 페르시아군은 기원전 481년 여름과 가을에 소아시아에서 집결했다. 크세르크세스가 이끄는 동부의 태수령에서 온 군대는 크리탈라와 카파도키아에서 집결하였고, 겨울을 나기 위해 사르디스로 갔다.[246] 초봄에 아비도스로 이동을 하여 서부의 태수령에서 온 군대와 합류를 했다.[247] 그런 다음 크세르크세스가 소집한 군대는 2개의 부교를 통해 헬레스폰투스 해협을 건너 유럽으로 진격해 갔다.[248]
제2차 그리스 침공을 위해 크세르크세스가 징집한 군대의 규모는 논쟁의 주제였다. 헤로도토스는 전체 250만 명의 군 병력과 그에 상응하는 수의 지원 병력이 있었다고 주장했다.[249] 동시대 시인 시모니데스는 400만 명이라고 언급했으며, 크테시아스는 페르시아군의 기록을 근거로 크세르크세스가 징집한 인원이 전체 80만 명이라는 수치를 제시하고 있다.[250]
현대의 학자들은 고대 문헌에 제시된 수치는 승자의 입장에서의 오산이나 과장, 또는 참전한 페르시아군에 의한 잘못된 정보 등에서 기인한 것이라고 여기고 있다.[222] 이 주제는 뜨거운 논쟁거리지만, 학자들은 대체로 30만에서 50만 명 정도에 이를 것이라고 예상하고 있다.[251][252]
헤로도토스는 트라키아로 이동하는 동안 육군과 해군은 크세르크세스에 의한 점검으로 인해 도리스코스에서 멈추게 되며 참전한 부대 규모가 드러나게 되었다고 설명하고 있다.[254]

부대 | 병력 |
---|---|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키시인, 히르카니아인,[39] 아시리아인, 칼데아인,[40] 박트리아인, 사카족,[41] 인도인,[42] 아리아인, 파르티아인, 코라스미아인, 소그디아인, 간다리아인, 다다이카인,[43] 카스피인, 사란가이, 파크티인,[44] 우티인, 미키인, 파리케이인,[45] 아라비아인, 아프리카 에티오피아인,[46] 발루치스탄 에티오피아인,[47] 리비아인,[48] 파플라고니아인, 리게스, 마티에니, 마리안디니, 카파도키아인,[49] 프리지아인, 아르메니아인,[50] 리디아인, 미시아인,[51] 아시아 트라키아인,[52] 라소니, 밀리에,[53] 모스키, 티바레니, 마크로네스, 모시노에키,[54] 마레스, 콜키스인, 알라로디인, 사스피르인[55] 및 홍해 섬 주민 출신 보병 | 1,700,000[57] |
페르시아인,[58] 사르가티아인,[59] 메디아인, 키시인, 인도인, 카스피인 및 파리케이인 출신 기병대 | 80,000[61] |
아랍 낙타 부대와 리비아 전차병 | 20,000[38] |
유럽 트라키아인, 파이오니아인, 에오르디, 보티아이, 칼키디아인, 브리기인, 피에리아인, 마케도니아인, 페르하이비, 에니에네스, 돌로페스, 마그네시아인, 아카이아인을 포함한 13개의 민족 출신 발칸 보병 | 300,000[63] |
헤로도토스는 지원 병력을 고려하여 전체 군대의 수는 5,283,220명이라고 보고했다.[64]
초기 현대 역사가인 조지 그로트는 헤로도토스가 제시한 숫자에 대해 불신을 표명했다.[65] 그로트의 주요 반론은 보급 문제였다. 후대의 역사가인 J. B. 버리는 헤로도토스의 숫자를 "전적으로 허구적"이라고 부르며 페르시아 육군은 18만 명이었을 것이라고 판단한다.[66] 영국의 수송 장교인 프레데릭 모리스 경은 그리스 지역의 강이 약 20만 명의 병력과 7만 마리의 동물을 지원할 수 있다고 제안했다.[67]
먼로와 매캔은 헤로도토스가 6명의 주요 사령관과 29명의 미리야르크(약 10,000명 규모의 페르시아 보병의 기본 부대인 바이버바람의 지휘관[76][77])의 이름을 제시하고 있음을 언급한다. 이것은 육군 병력이 대략 30만 명이라는 것을 의미한다.[78][79]
3. 2. 2. 함대
헤로도토스는 크세르크세스가 그리스 침공을 위해 소집한 함대가 1,207척의 삼단노선과 3,000척의 수송선 및 보급선으로 구성되었다고 기록했다.[83] 여기에는 50개의 노를 가진 갤리선(''갤리''의 일종인 펜테콘테르)도 포함되었다.[83] 시돈의 왕 테트라메스토스는 해군 문제에 관해 크세르크세스의 수석 고문이었으며,[84] 시돈 함대는 당시 아케메네스 제국 해군력에서 주도적 지위를 차지했다.[84] 페니키아인들은 300척의 함선을 제공했고, "팔레스타인의 시리아인"과 함께했다.[84]헤로도토스가 제공한 페르시아 삼단노선의 국적별 상세 내역은 다음과 같다:[85]
지역 | 함선 수| | 지역 | 함선 수| | 지역 | 함선 수 | |||
---|---|---|---|---|---|---|---|---|
페니키아 및 시리아 | 300 | 이집트 | 200 | 키프로스 | 150 | |||
킬리키아 | 100 | 이오니아 | 100 | 폰토스 | 100 | |||
카리아 | 70 | 아이올리스 | 60 | 리키아 | 50 | |||
팜필리아 | 30 | 소아시아의 도리아인 | 30 | 키클라데스 | 17 | |||
합계 | 1207 |
헤로도토스는 세피아와 에우보이아 해안에서의 폭풍, 그리고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의 손실에도 불구하고 살라미스 해전 당시의 함선 수가 이와 같았다고 기록했다. 그는 손실이 트라키아의 그리스인들로부터 120척의 삼단노선과 그리스 섬들로부터의 불특정 수의 함선으로 보충되었다고 주장한다. 살라미스에 참전했던 아이스킬로스 역시 그곳에서 1,207척의 군함과 마주쳤다고 주장하며, 이 중 1,000척은 삼단노선이었고 207척은 빠른 속도의 함선이었다.[86] 디오도로스 시켈로스[87]와 리시아스[88]는 독립적으로 도리스코스에 1,200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 1,207척이라는 숫자(처음 출발할 때만 해당)는 에포루스에 의해 제시되었으며,[89] 그의 스승 이소크라테스는 도리스코스에 1,300척, 살라미스에 1,200척이 있었다고 주장한다.[90][91] 크테시아스는 다른 숫자인 1,000척의 함선을 제시하며,[33] 플라톤은 일반적인 용어로 1,000척 이상의 함선을 언급한다.[92]
이러한 고대 기록의 숫자들은 (고대 기준으로는) 일치하며, 1,200척 정도가 정확하다는 해석도 가능하다. 그러나 현대 학자들 중 일부는 이 숫자를 받아들였지만, 살라미스 해전 당시에는 숫자가 더 적었을 것이라고 추정한다.[93][94][95] 페르시아 전쟁에 관한 최근 연구에서는 이 숫자(1,207)를 거부하며, 이 숫자가 일리아스에 등장하는 연합 그리스 함대를 지칭하는 것과 더 관련이 있다고 보고, 일반적으로 페르시아가 에게해에 약 600척 이상의 군함을 투입할 수 없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95][96][97]
4. 그리스의 준비
기원전 481년 늦가을, 코린토스에서 열린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 동맹 회의에서 페르시아의 침공에 대비한 전략이 논의되었다. 동맹군은 크세르크세스 1세가 올림포스 산 주변의 길을 개척하고 테르모필레로 진격하려 한다는 소식을 접했다. 마침 고대 올림픽과 카르네이아 축제 기간이었지만, 스파르타는 위협을 심각하게 여겨 레오니다스 1세와 300명의 정예병을 파견했다.[115] 레오니다스는 펠로폰네소스 동맹군과 테르모필레로 가는 도중 합류한 병력의 지원을 받았다.[2]
동맹군은 테르모필레 협곡을 점령하고, 포키스인이 세운 벽을 재건하여 페르시아군의 도착을 기다렸다.[116] 페르시아군은 8월 중순 테르모필레에 도착하여 3일 동안 동맹군이 흩어지기를 기다렸으나, 동맹군이 협곡을 방어하려 하자 공격을 개시했다.[117] 그리스의 지형은 중장 보병 전투에 유리했고, 페르시아군은 팔랑크스 대형을 정면으로 공격해야 했다.[118]
동맹군은 이틀 동안 공격을 막아냈지만, 에피알테스의 배신으로 산길을 통해 동맹군 후방으로 이동한 페르시아 정예병 불멸대의 공격을 받게 되었다.[119]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스파르타인, 700명의 테스피아인, 400명의 테베인 등과 함께 후방을 지키다 전멸, 테르모필레 협곡은 페르시아군에게 열렸다.[120]
한편,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는 271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된 동맹군 해군이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했다.[121] 페르시아 함대는 폭풍으로 많은 배를 잃었지만, 800척 이상을 동원하여 동맹군 함대의 퇴각로를 차단하려 했다.[122] 동맹군은 페르시아 함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동시에 페르시아 함대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125]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 소식을 듣고 살라미스 섬으로 퇴각했다.[127]
4. 1. 헬라스 동맹
기원전 481년 늦가을, 코린토스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의 회의가 열려 그리스사의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 동맹, 즉 헬라스 동맹이 결성되었다.[100] 이 동맹은 회원국 간의 지원 요청과 병력 파견 권한을 가졌다. 헤로도토스는 이 동맹을 "οἱ Ἕλληνες"(그리스인), "동맹을 맺은 그리스인", "함께 뭉친 그리스인" 등으로 불렀으며,[101] 이후 이들은 '동맹군'으로 지칭된다.스파르타와 아테네가 회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지만, 모든 국가의 이해관계가 방어 전략 결정에 영향을 미쳤다.[102] 회의 내용이나 과정은 거의 알려져 있지 않다. 약 700개의 그리스 도시 중 70개 도시만이 대표를 보냈는데, 이는 당시 분열된 그리스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103]
대부분의 다른 도시 국가들은 중립을 유지하며 사태를 관망했다.[104] 테베는 페르시아를 도울 의심을 받았으나,[104][105] 모든 테베인이 이에 동의한 것은 아니었다. 400명의 친 스파르타 중장 보병이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동맹군에 합류하기도 했다.[105] 아르고스는 페르시아 편을 들었는데,[106][107] 이는 기원전 494년 세페이아 전투에서 스파르타에 패배하여 약화된 탓이었다.[107]
4. 2. 그리스군의 규모
기원전 481년 늦가을, 코린토스에서 그리스 도시 국가 연합 동맹이 결성되었다.[100] 이들은 '동맹군'으로 지칭되며, 스파르타와 아테네가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01][102] 약 700개의 그리스 도시 중 70개 도시만이 대표를 보냈는데, 이는 분열된 그리스 세계에서는 놀라운 일이었다.[103]대부분의 도시 국가는 중립을 지켰지만, 테베는 페르시아를 도울 의사가 있는 것으로 의심받았다.[104][105] 반면 아르고스는 페르시아 편을 들었다.[106][107]
연합군은 상비군을 보유하지 않았고, 필요에 따라 군대를 소집했다. 따라서 작전 기간 동안 다양한 규모의 연합군이 등장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 레오니다스 1세는 300명의 스파르타 정예병과 함께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의 병력 및 테르모필레로 가는 도중에 합류한 다른 병력의 지원을 받았다.[2] 동맹군은 팔랑크스 대형을 정면으로 공격해야 하는 페르시아군에 맞서 이틀 동안 버텼다.[118] 그러나 에피알테스의 배신으로 페르시아군이 동맹군 후방으로 가는 산길을 알게 되었고,[119] 레오니다스는 300명의 스파르타인, 700명의 테스피아인, 400명의 테베인 등과 함께 후방을 지키다 전멸했다.[120]
아르테미시온 해전에서는 271척의 삼단노선으로 구성된 동맹군 해군이 페르시아 함대를 상대했다.[121] 페르시아 함대는 폭풍으로 많은 배를 잃었지만, 여전히 800척 이상을 동원할 수 있었다.[122] 동맹군은 페르시아 함대와 격렬한 전투를 벌여 큰 피해를 입었지만, 동시에 페르시아 함대에도 상당한 피해를 입혔다.[125]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 소식을 듣고 살라미스 섬으로 퇴각했다.[127]
5. 주요 전투 및 사건
기원전 480년 4월, 페르시아군은 유럽을 건너 그리스로 진격하면서 헬레스폰트에서 테르메까지 약 600km를 3개월 동안 이동했다. 이 과정에서 레우케 악테(헬레스폰트의 트라키아 쪽), 페린티안 영토의 티로디자, 에브로스 강 하구의 도리스코스, 스트리몬 강의 아이온, 현대의 테살로니키인 테르메 등 다섯 곳에 주요 식량 보급 기지를 설치했다.[108] 도리스코스에서는 함대와 합류하여 군대를 전술 부대로 재편성했다.[109]
그해 봄, 동맹군 '의회'는 테살리아 대표단의 제안에 따라 템페 계곡에 1만 명의 병력을 파견했으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의 경고로 퇴각했다.[111]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테르모필레 고개와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이용한 이중 방어 전략을 제안했고, 이는 의회에서 채택되었다.[113]
기원전 479년 겨울, 동맹국들 사이에 긴장이 고조된 가운데, 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중개자로 내세워 아테네에 평화, 자치, 영토 확장을 제안하며 교착 상태를 깨려 했다.[149] 아테네는 이 제안을 거절하고 다시 도시를 비웠으며, 페르시아군은 아테네를 재점령하여 더욱 철저하게 파괴했다.[130]
아테네의 지원 요청에 스파르타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마르도니우스는 동맹군 진군 소식을 듣고 보에오티아의 플라타이아이 근처로 후퇴하여 플라타이아이 전투가 벌어졌다.[153] 이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마르도니우스를 죽이고 페르시아군을 격파했다.[161]
같은 날 오후, 미칼레 전투에서 그리스 함대는 페르시아 함대의 잔존 세력을 파괴하고 해상권을 장악했다.[165]
5. 1.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온 해전 (기원전 480년 8월)
기원전 480년 4월, 페르시아 군대는 유럽을 건너 그리스로 진격을 시작했다. 페르시아 군대는 헬레스폰트에서 테르메까지 약 600km를 이동하는 데 3개월이 걸렸으며, 이 과정에서 아무런 방해도 받지 않았다. 그들은 도리스코스에서 함대와 합류했고, 크세르크세스는 군대를 전술 부대로 재편성했다.[109]같은 해 봄, 동맹군 '의회'는 다시 모였다. 테살리아 대표단은 동맹군이 템페 계곡에 집결하여 크세르크세스의 진격을 막을 수 있다고 제안했다.[110] 이에 스파르타의 폴레마르크 에우에네토스와 테미스토클레스가 이끄는 1만 명의 동맹군이 파견되었다. 그러나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더 1세는 그 계곡이 우회될 수 있으며, 크세르크세스의 군대가 압도적이라는 경고를 했다. 결국 동맹군은 퇴각했고,[111] 얼마 지나지 않아 크세르크세스가 헬레스폰트를 건넜다는 소식을 받았다.[111] 템페 계곡을 포기하면서 테살리아 전체와 북쪽의 많은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항복했다.[112]
이후 테미스토클레스는 동맹군에게 새로운 전략을 제안했다. 그는 남부 그리스로 가는 경로인 좁은 테르모필레 고개를 페르시아 군대가 통과해야만 한다는 점을 이용하자고 했다. 이 고개는 페르시아의 압도적인 수에도 불구하고 동맹군이 쉽게 방어할 수 있었다. 또한, 페르시아군이 바다를 통해 테르모필레를 우회하는 것을 막기 위해 동맹 해군이 아르테미시온 해협을 봉쇄하는 전략을 제시했다. 이 이중 전략은 의회에서 채택되었다.[113] 한편, 펠로폰네소스 도시들은 코린토스 지협을 방어하기 위한 비상 계획을 세웠고, 아테네의 여성과 아이들은 트로이젠으로 대피했다.[114]
5. 2. 아테네 함락과 살라미스 해전 (기원전 480년 9월)
미칼레 전투에서 승리한 후, 연합 함대는 헬레스폰트로 가서 부교를 파괴하려 했지만 이미 철거된 상태였다.[168] 펠로폰네소스인들은 고향으로 돌아갔으나, 아테네인들은 페르시아가 점령 중이던 트라키아 헤르소네소스를 공격하기 위해 남았다.[168] 이 지역의 페르시아인들과 동맹군은 세스토스로 향했고, 아테네인들은 그곳을 포위했다. 오랜 포위 끝에 세스토스는 함락되었다.[2] 헤로도토스는 세스토스 포위전을 끝으로 그의 ''역사''를 마쳤다.5. 2. 1. 아테네 파괴
플라타이아 전투와 미칼레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승리하면서,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막을 내렸다. 그리스인들은 크세르크세스가 다시 침공해 올 것을 우려했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페르시아가 그리스를 정복하려는 의지를 크게 잃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220]5. 3. 포티다이아 공성전과 올린토스 공성전 (기원전 480년 가을/겨울)
아르타바조스는 페르시아 장군으로, 6만 명의 병력을 이끌고 크세르크세스를 헬레스폰트 해협까지 호위했다. 테살리아로 돌아가는 길에 팔레네에 접근했을 때, 반란을 일으킨 포티다이아 사람들을 노예로 삼으려 했다.[144] 배신을 통해 포티다이아를 점령하려는 시도가 있었으나,[145] 페르시아군은 3개월 동안 포위 공격을 유지해야 했다.[146] 이후 유난히 낮은 조수를 이용하여 바다에서 도시를 공격하려 했으나, 밀려오는 조수에 갇혀 많은 병사들이 익사하고, 살아남은 병사들은 포티다이아인들의 배에 의해 공격받았다.[146] 결국 아르타바조스는 포위 공격을 풀고 남은 병력을 이끌고 테살리아의 마르도니우스에게 돌아갔다.[146]아르타바조스는 포티다이아를 포위하는 동안, 반란을 일으킨 올린토스 또한 포위하기로 결정했다.[147] 이 도시는 마케도니아에서 쫓겨난 보티아이 부족이 점령하고 있었다.[147] 그는 도시를 점령한 후, 방어군을 학살하고 도시를 칼키디키 사람들에게 넘겨주었다.[147]
5. 4. 플라타이아이 전투와 미칼레 전투 (기원전 479년 6월)
겨울 동안 동맹국들 사이에는 긴장이 있었다. 특히 아테네인들은 펠로폰네소스반도의 안보에 핵심적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이스트모스(지협)의 보호를 받지 못해 불만을 느꼈다. 그들은 다음 해에 동맹군이 북쪽으로 진군할 것을 요구했다.[148] 다른 동맹국들이 이에 동의하지 않자 아테네 함대는 봄에 동맹 해군에 합류하는 것을 거부했을 것이다.[149] 스파르타 왕 레오티키데스의 지휘를 받게 된 해군은 델로스에서, 페르시아 함대의 잔존 세력은 사모스에서 물러났으며, 양측 모두 전투를 감수하려 하지 않았다.[149] 마르도니우스는 이스트모스 공격이 무의미하다는 것을 알고 테살리아에 머물렀고, 동맹국들은 펠로폰네소스 밖으로 군대를 보내는 것을 거부했다.[148]마르도니우스는 마케도니아의 알렉산드로스 1세를 중개자로 내세워 아테네인들에게 평화, 자치, 영토 확장을 제안하여 교착 상태를 깨뜨리려 했다. (그 목적은 아테네 함대를 동맹군으로부터 제거하는 것이었다).[149] 아테네인들은 스파르타 사절단이 그 제안을 듣도록 했지만 거절했다.[2] 아테네는 다시 철수했고 페르시아인들은 남쪽으로 진군하여 아테네를 다시 점령했다.[149] 마르도니우스는 도시에 훨씬 더 철저한 파괴를 가했다.[130]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마르도니우스는 "아테네를 불태우고 남은 벽이나 집, 사원을 완전히 파괴하거나 철거했다"고 한다.[130]
마르도니우스는 살라미스에 있는 아테네 난민들에게 평화를 제안했다. 아테네는 메가라, 플라타이아이와 함께 스파르타에 사절을 보내 지원을 요구하고, 그렇지 않으면 페르시아 측의 조건을 받아들일 것이라고 위협했다.[150] 당시 히아킨토스 축제를 기념하고 있던 스파르타인들은 10일 동안 결정을 미루었다.[151] 그러나 아테네 사절이 스파르타인들에게 최후통첩을 전달했을 때, 그들은 이미 기동 부대가 페르시아인들을 맞이하기 위해 진군하고 있다는 소식을 듣고 깜짝 놀랐다.
마르도니우스는 동맹군이 진군한다는 소식을 듣고 보에오티아, 플라타이아 근처로 후퇴하여 동맹군을 기병대를 사용할 수 있는 열린 지형으로 끌어들이려 했다.[153] 그러나 스파르타 섭정 파우사니아스의 지휘를 받는 동맹군은 그러한 전술에 대비하여 플라타이아 위의 고지대에 머물렀다.[154]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진영에 대한 기습 공격을 명령했지만,[155] 공격은 실패했고 기병대 지휘관이 사망했다.[156] 그 결과 동맹군은 페르시아 진영에 더 가까운 위치로 이동했고, 여전히 고지대에 있었다.[157] 그 결과 동맹군의 통신선이 노출되었다. 페르시아 기병대는 식량 수송을 가로막기 시작했고 마침내 동맹군이 사용할 수 있는 유일한 샘물을 파괴했다.[2] 이제 동맹군의 입지가 약화되자 파우사니아스는 원래 위치로 야간 퇴각을 명령했다. 이 작전은 잘못되어 아테네인과 스파르타인, 테게아인들이 각각 다른 언덕에 고립되었고, 다른 부대들은 플라타이아 근처에 더 멀리 흩어졌다. 마르도니우스는 공격할 절호의 기회가 될 수 있다고 보고 그의 전 군대에 전진을 명령했다.[158][159] 그러나 테르모필레처럼 페르시아 보병은 중무장한 그리스 호플리테스에 상대가 되지 못했고,[160] 스파르타인들은 마르도니우스의 호위병을 뚫고 그를 죽였다.[161] 페르시아군은 이렇게 도망갔다. 40,000명의 군대가 테살리아로 가는 길을 통해 탈출했지만,[162] 나머지는 페르시아 진영으로 도망쳐 동맹군에게 포위되어 학살되었고, 승리를 확정지었다.[159][163]

헤로도토스는 플라타이아이 전투 당일 오후, 동맹군의 승리 소식이 미칼레 산 해안에 있던 동맹 해군에 전해졌다고 전한다.[164] 사기가 올라간 동맹 해병대는 같은 날 미칼레 전투에서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어 페르시아 함대의 잔존 세력을 파괴했다.[165] 펠로폰네소스인들이 이스트모스 북쪽으로 진군하자마자 크산티푸스 휘하의 아테네 함대가 나머지 동맹 함대에 합류했다.[165] 이제 페르시아인들과 맞설 수 있게 된 함대는 먼저 페르시아 함대가 주둔하고 있던 사모스로 항해했다.[166] 배의 상태가 좋지 않았던 페르시아인들은 전투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기로 결정하고 미칼레 해변에 배를 정박시켰다. 크세르크세스가 그곳에 6만 명의 군대를 남겨두었고, 함대는 그들과 합류하여 배를 보호하기 위해 진영 주위에 울타리를 건설했다.[166] 그러나 레오티키데스는 동맹 함대의 해병대를 이끌고 진영을 공격하기로 결정했다.[165] 동맹군의 규모가 작다는 것을 알게 된 페르시아인들은 진영에서 나왔지만, 호플리테스들이 다시 우위를 점해 페르시아 군대의 많은 부분을 파괴했다.[165] 배들은 동맹군에게 버려졌고, 그들은 배를 불태워 크세르크세스의 해상력을 약화시켰고, 동맹 함대의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165]
6. 전술 분석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서 양측은 각기 다른 전술을 사용했다. 그리스 군은 주로 호플리테 중심의 팔랑크스 전술을 사용한 반면, 페르시아 군은 다양한 병종을 활용한 복합적인 전술을 구사했다.
주요 육상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은 지형을 이용하여 페르시아 군의 수적 우위를 상쇄하려 했다. 테르모필레 전투에서는 협곡을 점령하여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저지했고,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는 고지대를 선점하여 유리한 위치에서 싸웠다.[187] 반면 페르시아 군은 테르모필레에서 우회로가 발견되기 전까지 전술적 유연성을 발휘하지 못했고,[181][188] 플라타이아이에서는 기병 공격으로 그리스 군을 혼란에 빠뜨렸으나, 결국 보병 간의 백병전에서 패배했다.[209] 미칼레 전투에서도 페르시아 보병은 호플리테와의 백병전에서 불리함을 드러냈다.[165]
침략 초기에는 페르시아가 여러 면에서 유리했다. 압도적인 병력과 함선을 동원했고,[1][191] 통일된 지휘 체계와 효율적인 관료제를 갖추고 있었다.[192][24][193][194] 페르시아 장군들은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었으며,[195] 정보전과 외교술에도 능했다.[196][197][198] 반면 그리스는 분열되어 있었고, 대규모 전쟁 경험이 부족했으며,[199][200] 지휘관들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지위에 따라 선발되었다.[201]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전략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리스를 밀어붙이는 것이었다.[209] 이에 맞서 그리스 연합군은 최대한 북쪽에서 페르시아 군의 진격을 저지하고, 지리적 이점을 활용하여 병력 차이를 극복하려 했다.[190]
살라미스 해전은 전쟁의 전환점이 되었다. 페르시아 함대는 좁은 해협에서 그리스 함대에 패배했는데, 이는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로 평가된다.[190][208] 이후 마르도니우스는 그리스 동맹을 분열시키려 했으나,[209] 플라타이아이 전투에서 그리스 군의 결사항전에 패배했다.[209]
페르시아의 패배는 연합군의 전술적 이점,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 그리스 동맹의 결속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였다.[209][210][211]
6. 1. 그리스 군의 전술
그리스의 전쟁 방식은 수 세기 동안 다듬어졌으며, 갑옷을 구매할 여력이 있는 중산층(''zeugites'') 출신 호플리테를 중심으로 이루어졌다.[172][173] 호플리테는 당시 기준으로 중무장한 병사였으며, 리노토락스 또는 흉갑(처음에는 청동이었으나 이 시기에는 아마포(아마도 리노토락스)와 가죽과 같은 유기 재료로 만들어졌을 것임), 정강이받이, 완전한 투구, 그리고 큰 둥근 방패(''aspis'')를 갖추고 있었다.[213] 이들은 페르시아의 창보다 훨씬 더 긴 것으로 보이는 긴 창(''doru'')과 칼(''xiphos'')로 무장했다.[213]
호플리테는 팔랑크스 대형으로 싸웠는데, 이는 촘촘하게 짜여진 대형으로 적에게 겹쳐진 방패와 창을 균일하게 제시하는 형태였다.[172] 제대로 갖춰진 팔랑크스는 강력한 공격 및 방어 무기였으며,[174][175] 기록에 따르면 비교적 작은 팔랑크스를 물리치는 데 엄청난 수의 경보병이 필요했다.[174] 현대 실험에 따르면 "가죽 갑옷"은 완전히 무두질된 가죽보다는 무두질하지 않거나 부분적으로 무두질된 생가죽이었을 가능성이 있는데, 일반 생가죽 또는 처리된 생가죽이 가죽보다 갑옷 제작에 훨씬 더 나은 재료라는 결론이 나왔다.[176]
하지만 팔랑크스는 지형이 맞지 않는 경우 기병에게 측면을 공격당하기 쉬웠다.[177] 호플리테의 중갑과 긴 창은 백병전에 뛰어난 병사로 만들어 주었고,[213] 경보병 및 산병의 원거리 공격으로부터 상당한 보호를 제공했다. 방패가 미사일을 막지 못하더라도 갑옷이 막아낼 가능성이 있었다.[213]
6. 2. 페르시아 군의 전술
페르시아 군은 제국 각지에서 징집된 다양한 병사들로 구성되었다. 헤로도토스에 따르면, 이들은 대체로 활, 짧은 창, 칼로 무장하고 헝겊 방패를 들었으며, 가죽 재킷 정도의 가벼운 갑옷을 착용했다.[178][179] 예외적으로 페르시아 출신 병사들은 비늘 갑옷을 입기도 했다.[178] 사카족은 도끼를 잘 다루는 것으로 유명했다.[180]페르시아 보병의 정예 부대는 페르시아인, 메디아인, 키시아인, 사카인으로 구성되었으며,[178] 선두에는 왕실 근위병인 불멸자가 섰지만, 이들 역시 기본적인 무장 형태는 유사했다.[178][181] 기병은 페르시아인, 박트리아인, 메디아인, 키시아인, 사카인이 담당했으며, 대부분 경무장 미사일 기병으로 싸웠다.[178][182]

페르시아 군의 일반적인 전술은 원거리에서 활 등으로 적을 약화시킨 후 창과 칼로 근접전을 벌이는 방식이었다.[178] 이전에 에페소스 전투에서 페르시아 기병은 그리스 호플리테를 쉽게 격파했지만,[183] 마라톤 전투에서는 기병 없이도 아테네 호플리테가 페르시아 보병에 우위를 점했다.[184]
페르시아 군은 호플리테의 강력함을 과소평가하고, 제대로 대응하지 못하여 패배했다는 평가를 받는다.[178][189]
7. 전략 분석
침략 초기에 페르시아는 여러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190] 페르시아는 압도적인 수의 병력과 함선을 그리스로 가져왔으며,[1][191] 통일된 지휘 체계와 효율적인 관료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192][24][193][194] 페르시아 장군들은 오랜 전쟁 경험을 가지고 있었고, 정보 및 외교 활용에도 뛰어났다.[195][196][197][198] 반면, 그리스는 분열되어 있었고, 전쟁 경험이 부족했으며, 지휘관은 주로 정치적, 사회적 지위를 바탕으로 선택되었다.[199][200][201]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초기 전략은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리스를 통과하는 것이었다.[209] 이에 맞서 연합군은 가능한 한 북쪽에서 페르시아의 진격을 막고, 지리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전략을 선택했다.[190] 처음에는 템페 계곡을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막으려 했다. 테르모필레에서는 협곡의 지형을 이용했으나 우회로를 막지 못해 패배했고,[190]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도 피해를 보고 철수했다.[204]
코린토스 지협을 연합군이 방어하면서 전쟁의 양상이 바뀌었다. 페르시아는 육로 공격 대신 해전을 선택했고, 테미스토클레스는 살라미스 해협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는 전략을 제안하여 성공했다.[190][207]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와 그리스의 지형적 이점이 결합된 결과였다.[190][208]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동맹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플라타이아 전투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209] 플라타이아 전투 역시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와 그리스 군의 전술적 강점이 결합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209]
결국 페르시아의 실패는 연합군에게 전술적 이점을 주고 페르시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초래한 두 가지 전략적 실수 때문이었다.[209] 연합군은 동맹을 유지하고,[209] 페르시아의 실수를 이용했으며,[209] 호플리테를 소유하여 플라타이아에서 페르시아 침략군을 격파할 수 있었다.[213]
7. 1. 페르시아의 전략
대규모 침공이었기 때문에 장기적인 계획, 비축, 징병이 필요했다.[23] 페르시아 군이 유럽으로 건너갈 수 있도록 크세르크세스의 부교를 설치하고, 운하를 아토스 산 지협을 가로질러 파야 했다.[24] 이는 당대 어떤 국가도 감당할 수 없는 엄청난 야심의 산물이었다.[24] 그러나 이 원정은 이집트와 바빌로니아에서 또 다른 반란이 일어나면서 1년 연기되었다.[25]기원전 481년에 크세르크세스는 약 4년간의 준비를 거쳐 유럽 침공을 위한 군대를 소집하기 시작했다. 헤로도토스는 군대를 징집한 46개 민족의 이름을 언급하고 있다.[26] 페르시아 군대는 기원전 481년 여름과 가을에 소아시아에 집결했다. 동부 사트라피에서 온 군대는 카파도키아의 크리탈라에 집결했으며 크세르크세스의 지휘를 받아 사르디스로 이동하여 겨울을 보냈다.[27] 이른 봄에 아비도스로 이동하여 서부 사트라피의 군대와 합류했다.[28] 그 후 크세르크세스가 소집한 군대는 두 개의 부교를 통해 헬레스폰트를 건너 유럽으로 진격했다.[29]
침략 초기에 페르시아는 대부분의 이점을 가지고 있었다.[190] 실제 규모에 관계없이, 페르시아가 압도적인 수의 병력과 배를 그리스로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1][191] 페르시아는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가지고 있었고, 모든 사람은 왕에게 답변해야 했다.[192] 그들은 놀라운 계획을 수행할 수 있게 해주는 매우 효율적인 관료 체제를 갖추고 있었다.[24][193][194] 페르시아 장군들은 페르시아 제국이 건국된 80년 동안의 전쟁에 상당한 경험을 가지고 있었다.[195] 게다가 페르시아는 그리스를 분열시키고 정복하려는 (거의 성공적인) 시도에서 알 수 있듯이 전쟁에서 정보 및 외교를 활용하는 데 뛰어났다.[196][197][198]
기원전 480년 페르시아의 전략은 단순히 압도적인 병력으로 그리스를 통과하는 것이었을 것이다.[209] 군대가 통과하는 지역의 도시들은 굴복하거나 파괴될 위험을 감수해야 했을 것이며, 실제로 테살리아, 로크리스, 포키스 도시들이 페르시아에 저항했지만 페르시아가 진격하면서 굴복하게 되었다.[202][203]
코린토스 지협을 연합군이 방어하면서 전쟁의 성격이 바뀌었다. 페르시아는 육로로 지협을 공격하려 하지 않았고, 그것을 돌파할 수 없을 것이라고 깨달았다.[205][206] 이것은 본질적으로 분쟁을 해상전으로 축소시켰다.[190] 살라미스 해협 전투에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는 것은 연합군 작전에서 전략적인 묘수로 평가된다.[190][207] 그러나 이것이 성공적이었지만 페르시아가 전쟁에서 승리하기 위해 살라미스에서 싸울 필요는 없었다. 페르시아가 지나치게 자신만만했거나 작전을 끝내려는 열망이 컸다는 의견이 제기되었다.[190][208] 따라서 살라미스에서 연합군의 승리는 적어도 부분적으로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로 돌려야 한다.[190]
살라미스 이후 페르시아의 전략이 바뀌었다. 마르도니오스는 동맹군 간의 불화를 이용하여 동맹을 분열시키려 했다.[209] 특히 그는 아테네를 얻으려 했고, 이는 연합 함대가 펠로폰네소스에 페르시아의 상륙에 대항할 수 없게 만들 것이다.[148] 헤로도토스는 마르도니오스가 결정적인 전투를 치르고 싶어 했다고 말하지만, 플라타이아로 가는 그의 행동은 이것과 일치하지 않는다.[190] 그는 자신의 조건으로 전투를 받아들일 의향이 있었던 것으로 보이지만, 그는 연합군이 공격하거나, 동맹이 무의미하게 붕괴될 때까지 기다렸다.[190]
따라서 페르시아의 실패는 부분적으로 연합군에게 전술적 이점을 안겨주고 페르시아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초래한 두 가지 전략적 실수의 결과로 볼 수 있다.[209]
7. 2. 그리스의 전략
그리스는 페르시아의 침략에 맞서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는 전략을 세웠다. 페르시아는 수적으로 우세하고 통일된 지휘 체계를 갖추고 있었지만, 그리스는 분열되어 있었고 전쟁 경험도 부족했다.[199][200] 그러나 그리스 연합군은 페르시아 군의 강점을 최소화할 수 있는 지형적 요충지를 방어하는 전략을 택했다.[190]처음에 연합군은 템페 계곡(Vale of Tempe)을 방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이후 테르모필레 전투(Battle of Thermopylae)와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 페르시아 군을 막으려 했다.[190] 테르모필레에서는 협곡의 지형을 이용해 페르시아 대군에 맞섰으나, 우회로를 막지 못해 패배했다.[190] 아르테미시움 해전에서도 피해를 보고 철수했다.[204]
전쟁의 전환점은 코린토스 지협(Isthmus of Corinth) 방어와 살라미스 해협 전투(Battle of Salamis)였다. 페르시아 군은 지협을 육로로 돌파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해상으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205][206] 테미스토클레스는 좁은 살라미스 해협으로 페르시아 함대를 유인하는 전략을 제안했고, 이는 성공을 거두었다.[190][207] 살라미스 해전의 승리는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와 그리스의 지형적 이점이 결합된 결과였다.[190][208]
이후 페르시아는 그리스 동맹을 분열시키려 했으나 실패했고, 플라타이아 전투(Battle of Plataea)에서 그리스 연합군에게 패배했다.[209] 플라타이아 전투 역시 페르시아의 전략적 실수와 그리스 군의 전술적 강점이 결합되어 승리할 수 있었다.[209]
결론적으로, 그리스는 지형적 이점을 활용하고 페르시아의 실수를 유도하는 전략을 통해 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었다. 또한, 그리스 도시 국가들은 어려운 상황 속에서도 동맹을 유지하며 페르시아에 저항했다.[209]
8. 의의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그리스가 정복되었다면, 서양 문명의 기초가 되는 고대 그리스 문화가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서양 문명 자체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255] 비록 이것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조차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군사적인 면에서, 페르시아 침공 동안 전술적 또는 전략적 혁신은 거의 없었다. 한 논평가는 이를 "병사의 전쟁"이라고 제안했다.[256]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지형을 전력 증강(force multiplier)으로 활용한 좋은 예로 자주 사용되며,[257]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 전에 사용한 계략은 전쟁에서 기만을 사용한 좋은 예이다. 침공의 주요 교훈은 마라톤 전투에서 재확인된 것으로, 근접전투에서 더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보병에 대한 호플리테의 우월성이었다.[258][259] 페르시아 제국은 이 교훈을 받아들여, 이후 펠로폰네소스 전쟁에서 그리스 용병을 모집하고 의존하기 시작했다.[260]
8. 1. 역사적 의의
제2차 페르시아의 그리스 침공은 유럽 역사에서 매우 중요한 사건이었다. 많은 역사가들은 만약 그리스가 정복되었다면, 서양 문명의 기초가 되는 고대 그리스 문화가 결코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서양 문명 자체도 그러했을 것이라고 본다.[255] 이것이 과장된 것일 수도 있지만, 당시 그리스인들조차 매우 중요한 일이 일어났다는 것을 이해했다는 것은 분명하다.
군사적으로, 페르시아 침공 동안 전술적 또는 전략적 혁신은 거의 없었다. 한 논평가는 이를 일종의 "병사의 전쟁"이라고 제안했다(즉, 전쟁에서 승리한 것은 장군이 아니라 병사였다).[256]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지형을 군사적 역량으로 활용한 좋은 예로 자주 사용되며,[257] 테미스토클레스가 살라미스 해전 전에 사용한 계략은 전쟁에서 기만을 사용한 좋은 예이다. 침공의 주요 교훈은 마라톤 전투의 사건을 재확인하는 것으로, 근접전투에서 더 가볍게 무장한 페르시아 보병에 대한 호플리테의 우월성이었다.[258][259] 이 교훈을 받아들여, 페르시아 제국은 나중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그리스 용병을 모집하고 의존하기 시작했다.[260]
8. 2. 군사적 의의
제2차 페르시아 침공은 유럽 역사상 가장 중요한 사건 중 하나였다. 많은 사학자들은 만약 그리스가 정복당했다면 서구 문명의 기초인 고대 그리스 문화가 발전하지 못했을 것이며, 더 나아가 서구 문명 자체가 그러했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이것은 지나친 주장일 수 있으나, 최소한 당사자인 당시의 그리스인들조차도 무언가 중요한 것이 일어났다는 것을 인지하고 있었다.[255]
군사적인 면에서, 페르시아의 침공 동안 전술적, 전략적 혁신은 그다지 일어나지 않았고 전쟁의 승리를 가져온 것은 장군이 아니라 병사들이었다.[256] 테르모필라이 전투는 종종 지형을 군사적 역량으로 사용한 좋은 예로 제시되며, 살라미스 전투 이전의 테미스토클레스의 책략은 전투에서 기만을 이용하는 좋은 예로 제시된다. 하지만 이 전쟁의 주요 교훈은 마라톤 전투에서도 재확인할 수 있지만, 백병전에서 페르시아 경갑보병을 상대한 중장보병의 중요성이었다.[258][259] 이 교훈을 배웠기 때문에 펠로폰네소스 전쟁 이후 페르시아 제국은 그리스 용병을 모집하고 그들에 의존하기 시작했다.[260]
9. 사료
제2차 그리스-페르시아 전쟁 연구에는 고대와 현대의 여러 사료가 중요하다. 주요 고대 사료로는 헤로도토스의 ''역사'', 디오도로스 시켈로스의 ''역사 총서'', 크테시아스의 ''페르시아사'' (포티오스 요약본) 등이 있다.
9. 1. 고대 문헌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 소아시아의 할리카르낫소스(당시 페르시아 점령)에서 태어난 그리스 역사학자로, '역사의 아버지'[222]로 불린다. 그는 기원전 440-430년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을 추적한 ''탐구''(Historia|히스토리아gre, ''The Histories''|더 히스토리즈영어)라는 책을 썼는데, 이는 기원전 450년에 끝난 전쟁을 비교적 최후까지 기록한 것이다.[223] 헤로도토스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발명한 것처럼 보인다.[222]투키디데스를 시작으로 후대의 고대 역사가들은 헤로도토스를 비판했지만,[224][225]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가 생략한 부분(세스토스 포위전)부터 자신의 역사를 시작하며 헤로도토스의 기록이 정확하다고 인정했다.[222] 플루타르코스는 자신의 수필에서 헤로도토스를 '야만애호가'로 묘사하며 비난했지만, 이는 역으로 헤로도토스가 공정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을 시사한다.[226] 19세기 이래로 헤로도토스의 평판은 그가 언급한 사건을 확인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인해 극적으로 복구되었다.[228] 현대의 지배적인 관점은 헤로도토스가 주목할 만한 일을 했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특히 병력 수와 날짜)에 대해서는 회의적인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다.[222]
시실리의 역사학자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또한 기원전 1세기 자신의 저서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Bibliotheca Historica'')를 통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는데, 이는 부분적으로 초기 그리스 역사가 에포로스에게서 파생된 것으로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230]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플루타르코스,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를 포함한 다른 고대 역사학자들에 의해서도 일부 설명되었고,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극작가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뱀기둥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도 헤로도토스의 구체적인 주장을 뒷받침한다.[231]
9. 2. 현대 문헌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주요 사료는 그리스의 역사학자 헤로도토스이다. ‘역사의 아버지’[222]라 불리는 헤로도토스는 기원전 484년 소아시아 할리카르낫소스(당시 페르시아 지배하)에서 태어났다. 그는 기원전 440-430년경에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의 기원을 추적하려 했던 ‘탐구’(''Enquiries'')(Historiagre, ''The Histories''영어)라는 책을 썼다. 전쟁은 기원전 450년에 끝나는데, 이는 비교적 최근까지의 역사를 기록한 것이다.[223] 헤로도토스의 접근 방식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었으며, 적어도 서구 사회에서는 그가 우리가 알고 있는 ‘역사’를 발명한 것으로 보인다.[222] 톰 홀랜드는 “최초로 연대기 작성자가 너무나 먼 과거가 아니라 아주 멋지게 분쟁의 기원을 추적하고, 신의 변덕이나 소원, 운명을 드러내는 사람들의 주장을 배제하고, 오히려 그가 개인적으로 검증할 수 있는 설명을 서술했다”고 말했다.[222]투키디데스를 시작으로, 어떤 후대의 고대 역사가들은 그의 발자취를 따르기는 했지만 헤로도토스를 비판했다.[224][225] 그럼에도 불구하고, 투키디데스는 헤로도토스가 생략한 그의 역사(세스토스 포위전)부터 시작했으며, 헤로도토스가 기록한 역사가 다시 쓰거나 교정할 필요가 없이 정확하다는 것을 실감했다.[222] 플루타르코스는 그의 수필 ‘헤로도토스의 해악에 관하여’에서 헤로도토스를 ‘야만애호가’로 묘사하며 친 그리스적 입장을 나타내지 않은 것을 비난했다. 그러나 그것은 역으로 헤로도토스가 공정한 작업을 진행했다는 것을 시사한다.[226] 헤로도토스에 대한 부정적인 견해는 르네상스 유럽으로 넘어갔지만, 그의 책은 인기가 있었다.[227] 그러나 19세기 이래로 그의 평판은 그가 언급한 사건을 반복적으로 확인한 고고학적 발견으로 극적으로 복구되었다.[228] 현대의 지배적인 관점은 헤로도토스가 그의 《히스토리아》(''Historia'')에서 주목할 만한 일을 했다는 것이지만, 구체적인 세부 사항(특히 병력 수와 날짜) 중 일부는 회의론적 시각이 여전히 남아있다.[222]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부 역사가들은 여전히 헤로도토스가 그의 이야기의 대부분을 지어냈다고 믿는다.[229]
디오도로스 시켈로스 또한 자신의 기원전 1세기 서적인 《비블리오테카 히스토리카》(''Bibliotheca Historica'')를 통해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에 대한 설명을 제공했다. 이것은 부분적으로 초기 그리스 역사가 에포로스에게서 파생된 것이다. 이 기록은 헤로도토스의 기록과 상당히 일치한다.[230] 그리스–페르시아 전쟁은 플루타르코스, 크니도스의 크테시아스를 포함한 다른 고대 역사학자들에 의해 일부 설명이 되어 있고, 아이스킬로스와 같은 다른 극작가에 의해서도 언급되었다. 뱀기둥과 같은 고고학적 증거도 헤로도토스의 구체적인 주장을 뒷받침한다.[23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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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로도토스의 저서에 나오는 ''earth and water''(γῆ καί ὕδωρ ge kai hydor)라는 표현으로, 페르시아가 그리스 도시 국가에 항복을 요구하는 의미를 나타내는 물건으로 사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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