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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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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는 독일 제국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독일 제국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했다. 그는 1848년 메클렌부르크에서 태어나 삼촌인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의 영향을 받아 군인의 길을 걸었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했으며, 빌헬름 2세의 부관을 거쳐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이 되었다. 슐리펜 계획을 수정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중 슐리펜 계획의 실패로 해임되었다. 그는 신지학 신봉자였으며, 뇌졸중과 신경쇠약으로 인해 전쟁 지휘에 어려움을 겪었다. 몰트케는 1916년 사망했으며, 다양한 훈장을 수여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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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1906년 몰트케
1906년의 몰트케
전체 이름헬무트 요하네스 루트비히 폰 몰트케
별칭작은 몰트케 (Moltke der Jüngere)
출생1848년 5월 25일, 독일 연방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비엔도르프
사망1916년 6월 18일,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브란덴부르크 주 베를린
사망 원인알려지지 않음
안장 장소인발리덴프리드호프
배우자1878년, 엘리자 폰 몰트케-휘트펠트와 결혼
친척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 (삼촌)
군사 경력
소속프로이센 왕국
독일 제국
복무 기간1868년 – 1916년
최종 계급상급대장
부대제7 척탄병 연대
지휘제1 근위 보병 여단
제1 근위 보병 사단
주요 참전보불전쟁
제1차 세계 대전
서훈(푸르 르 메리트)
Order of the Red Eagle (적수리 훈장)
House Order of the Wendish Crown (벤데 왕관 훈장)
Royal Victorian Order (로열 빅토리아 훈장)
Order of the Sword (검 훈장)
1914 (1급 철십자장)
정치 경력
직책독일 제국군 대참모본부 총장
임기 시작1906년 1월 1일
임기 종료1914년 9월 14일
군주빌헬름 2세
총리베른하르트 폰 뷜로
테오발트 폰 베트만-홀베크
이전알프레트 폰 슐리펜
이후에리히 폰 팔켄하인
기타 정보
출신 학교육군사관학교

2. 생애

헬무트 폰 몰트케는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비엔도르프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통일의 영웅인 삼촌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의 이름을 따랐다. 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 참전하여 용맹함을 인정받았고, 이후 참모부와 황제 빌헬름 2세의 부관을 거쳐 제1 근위 보병 사단의 지휘관까지 올랐다.[1]

2. 1. 가문 및 초기 생애

1848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의 비엔도르프에서 태어났다. 몰트케 가문은 메클렌부르크의 오래된 귀족 가문이었다. 조부 프리드리히 필리프 빅토르 폰 몰트케는 프로이센군과 덴마크군의 장군이었고, 아버지 아돌프 폰 몰트케는 라우엔부르크의 관리를 역임했다. 어머니 아우구스테는 안할트-베른부르크의 명문가 출신이었다.[34]

이름은 프로이센 왕국독일 제국의 육군 참모총장을 역임한 숙부 '대 몰트케'를 기려 '헬무트'라고 지어졌다. 그의 동생 프리드리히 폰 몰트케는 1912년 빌헬름 필히너와 함께 남극 탐험에 참여했으며, 후에 프로이센주 내무 장관을 지냈다.

1878년 엘리자 폰 퓌트펠트와 결혼했다. 아내 엘리자는 크리스천 사이언스의 열렬한 신자였는데, 몰트케는 지도자인 Frances Thurber Seal|프랜시스 서버 실eng이 아내를 치유하는 모습을 보고 감명받아 자신도 크리스천 사이언스 신자가 되었다.

2. 2. 군 경력

1848년 메클렌부르크-슈베린 대공국 비엔도르프에서 태어났으며, 독일 통일의 영웅인 삼촌 헬무트 카를 베른하르트 폰 몰트케의 이름을 따서 명명되었다. 1868년 프로이센 왕국군에 입대하였다.

프로이센-프랑스 전쟁 (1870-1871) 당시 제7 척탄병 연대에 복무하며 용맹함으로 표창을 받았고, 2급 철십자 훈장을 수훈했다. 전쟁 후에도 군에 남아 1875년부터 1878년까지 육군 대학에 다녔고, 1880년 프로이센 참모본부에 합류했다. 1882년에는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삼촌 몰트케 백작의 개인 보좌관(부관)이 되었다.

1891년 삼촌이 사망하자 독일 제국 황제 빌헬름 2세의 부관이 되어 황제의 측근으로 활동했다. 1898년에는 제1 근위 보병 여단장이 되었고, 1902년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제1 근위 보병 사단의 지휘권을 받았다.[1] 1904년에 참모차장(실질적인 참모본부 부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퇴임하면서 그의 후임으로 참모총장이 되었다.[2] 이 임명은 당시 논란의 대상이었으며 오늘날까지도 논란으로 남아있다. 참모총장직의 다른 유력 후보로는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제러, 카를 폰 뷜로, 콜마어 폰 데어 골츠 등이 거론되었다.[1] 비평가들은 몰트케가 그의 유명한 이름과 황제와의 친분 덕분에 직위를 얻었다고 비난했는데, 실제로 황제는 그를 '율리우스'라고 부르는 것을 좋아했으며[3] 다른 후보들보다 훨씬 가까운 사이였다. 역사가들은 베제러는 슐리펜과 너무 가까웠고, 뷜로프와 골츠는 빌헬름 2세가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독립적인 성향이었기 때문에 황제가 이들을 기피했다고 분석한다.[36] 또한 할아버지 빌헬름 1세를 본받아 "자신의 몰트케를 갖고 싶다"고 바랐던 빌헬름 2세의 강한 의중이 반영된 인사라는 평가도 있다.[35] 몰트케는 황제와의 친분 덕분에 다른 이들이 누릴 수 없는 자유를 누렸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한편, 골츠는 몰트케의 참모총장 임명 자체에 대해 별다른 이견을 보이지 않았다고 전해진다.[1]

몰트케는 1909년에 최고 훈장인 흑수리 훈장을 수여받는 등 빌헬름 2세로부터 절대적인 신뢰를 받았다. 참모총장 취임 이후에는 전임자 슐리펜이 구상한 대프랑스 침공 계획인 슐리펜 계획의 개정을 검토하고 실행에 옮겼다.

2. 2. 1. 슐리펜 계획 수정

1905년, 빌헬름 2세(중앙 왼쪽 말 위의 인물)와 몰트케(중앙 오른쪽 말 위의 인물)


독일 대참모본부의 참모총장이 된 후 몰트케는 전임자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이 마련한 전쟁 계획을 검토하고 조율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슐리펜 계획"은 독일이 프랑스러시아 양면에서 전쟁을 치를 가능성에 대비한 계획이었다. 이 계획에 따라 러시아와 분쟁이 발생하면, 동시에 프랑스에 결정적인 공세를 펼쳐야 했다. 프랑스 방어선을 피하기 위해 저지대 국가를 침공하여 파리 배후로 돌아 들어가 프랑스군 전체를 포위 섬멸한다는 구상이었다.

참모총장 취임 직후 몰트케는 슐리펜 계획 개정에 착수했다. 그는 기본적으로 슐리펜의 계획을 따랐으나, 침공 경로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하는 등 몇 가지 중요한 수정을 가했다. 또한 슐리펜이 강조했던 강력한 우익을 통한 포위 기동 대신, 병력을 비교적 균등하게 분배하여 중앙 전선을 강화했다. 이로 인해 독일군 우익의 규모와 작전 반경은 원안보다 축소되었다. 슐리펜 계획 원안 자체도 당시의 병참 능력으로는 실현이 어려웠다는 평가가 있는데, 몰트케의 수정안 역시 병참 문제는 해결하지 못한 채로 남았다.

1913년 몰트케는 러시아와의 전쟁 발발 시 동부 전선에 집중하는 대체 계획을 폐기했다. 이로 인해 제1차 세계 대전 직전 7월 위기 당시 독일은 러시아와 전쟁을 벌이려면 반드시 프랑스와도 동시에 전쟁을 시작해야 하는 외통수 상황에 놓이게 되었다. 1911년 12월 몰트케는 참모본부 강연에서 "모두가 언젠가는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하며 전쟁 준비의 필요성을 강조했다.[4]

2. 2. 2. 제1차 세계 대전

독일 대참모본부의 참모총장이 된 후 몰트케는 전임자인 알프레트 폰 슐리펜 백작이 마련한 전쟁 계획을 검토하고 조율하는 데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슐리펜 계획"으로 알려진 이 계획은 독일이 양면전쟁에서 프랑스러시아와 모두 싸워야 할 가능성에 기반을 두었다. 몰트케는 슐리펜의 계획을 기본적으로 따랐지만, 계획에서 네덜란드를 제외하는 등 일부 수정을 가했다. 이 계획은 러시아와의 분쟁 발생 시, 동시에 프랑스를 상대로 결정적인 공세를 펼치는 것을 목표로 했다. 프랑스의 방어선을 우회하기 위해 공세는 저지대 국가 침공을 포함했으며, 이를 통해 독일군이 파리 배후로 이동하여 프랑스 전체 군대를 포위 격파하려 했다.

1911년 12월, 몰트케는 참모본부 강연에서 "모두가 언젠가는 일어날 것으로 예상하는 대전을 준비하고 있다"고 말했다.[4] 1912년 8월에 열린 정군 회의에서는 "개전은 빠르면 빠를수록 좋습니다"라고 빌헬름 2세 황제에게 진언하며,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전부터 대(對)프랑스전을 주장했다.[37] 1913년에는 슐리펜 계획의 유일한 대안이었던 동부 전개 계획(러-독 분쟁 시 러시아로만 적대 행위를 제한하는 계획)을 폐기했다. 이로 인해 1914년 7월 위기 당시 독일은 프랑스를 상대로 동시에 전쟁을 시작하지 않고서는 러시아와 전쟁을 할 수 없는 상황이 되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 사건이 발생하자, 몰트케는 독자적으로 행동을 개시했다. 그는 예상보다 1주일 빨리 벨기에 침공을 시작하기 위해 7월 26일 외무성에 벨기에에 대한 최후 통첩을 요구했다. 7월 31일에는 동맹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의 육군 참모총장 프란츠 콘라트 폰 헤첸도르프에게 "귀국의 전쟁을 지지하는 것은 유럽을 안정시키는 마지막 수단이다"라는 전보를 보내 세르비아 왕국에 대한 군사 행동을 무조건 지지한다는 의사를 밝혔다. 8월 1일에는 독일군에 총동원령을 포고했다.[38] 8월 3일 아침에는 테오발트 폰 베트만 홀베크 총리와 회담하여 다음 날인 4일에 벨기에 침공을 개시할 것을 통고했다. 또한 몰트케는 러시아 제국을 중동 방면에서 견제하기 위해 오스만 제국의 참전을 촉구했다. 이러한 몰트케의 적극적인 군사 행동 요구는 독일 외교가 오스트리아가 원하는 전쟁 외의 다른 선택지를 갖기 어렵게 만들었으며, 이로 인해 몰트케는 제1차 세계 대전 발발의 주요 책임자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전쟁 발발 직전, 주영 독일 대사 리히노프스키 공자는 영국 외무장관 에드워드 그레이가 영국의 보증 하에 프랑스가 중립을 지킬 것이라고 제안했다고 보고했다. 이를 들은 빌헬름 2세는 몰트케에게 서부 전선의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이동시켜 양면 전쟁을 피하라고 지시했다.[5] 역사가 존 키건에 따르면, 황제는 독일이 프랑스를 공격하지 않으면 영국이 중립을 유지할 것이라고 믿었다.[6] 그러나 몰트케는 오랫동안 계획된 대규모 동원 계획을 급격히 변경하는 것은 불가능하며 군대에 혼란만 야기할 것이라고 주장하며 황제의 지시를 거부했다. (훗날 독일 철도 부서 책임자인 헤르만 폰 슈타프스 장군은 비상 계획이 존재했다고 반박했다.[7]) 결국 그레이의 제안은 리히노프스키의 희망적인 오해로 밝혀졌고[7] 황제는 몰트케에게 원래 계획대로 진행하라고 지시했다.[39][40]

전쟁 초기 몰트케는 독일군의 승리를 확신했다. 1914년 8월 16일, 그는 리에주 전투에서의 승리를 장담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를 충분히 막아낼 수 있을 것이라고 낙관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이는 함께 있던 군사 부관조차 희망적인 생각으로 여길 정도였다.

참모총장 시대의 몰트케 (1914년)


그러나 몰트케가 수정한 슐리펜 계획은 심각한 문제점을 드러냈다. 그는 서부 전선의 핵심인 오른쪽 날개 병력을 줄여 동부 전선에 배치했는데, 이 결정은 결과적으로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지 못하고 서부 전선이 참호전의 수렁에 빠지는 주요 원인이 되었다.

1914년 9월, 독일군은 제1차 마른 전투에서 패배했다. 몰트케는 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9월 14일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고, 후임으로는 에리히 폰 팔켄하인이 임명되었다.[41] 다만, 지도부 교체로 인한 군의 사기 저하를 우려하여 해임 사실은 당분간 공표되지 않았다. 마른 전투 패배 후 몰트케의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었다.

마른 전투 패배의 책임이 전적으로 몰트케에게 있는지에 대해서는 논쟁이 있다. 일부 비평가들은 몰트케가 슐리펜 계획을 임의로 수정하고 병력을 동부 전선으로 돌린 것(전쟁 전 18만 명 이동[8][9][10], 알자스-로렌 방면 병력 증강, 탄넨베르크 전투 직전 2개 군단 추가 파견 등)이 패배의 결정적 원인이라고 주장한다. 반면, 주버나 S. L. A. 마셜 같은 역사가들은 알렉산더 폰 클루크의 제1군과 카를 폰 뷜로프의 제2군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프랑스군에게 공격의 빌미를 준 것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라고 본다. 슐리펜 학파는 몰트케가 8월 동안 야전군에 대한 통제력을 상실하여 마른 전투에서 제대로 대응하지 못했다고 반박한다. 물론 독일군의 작전 교리인 임무형 지휘는 부하 지휘관의 독자적인 판단과 주도성을 강조하기도 했다. 다른 한편에서는 몰트케가 양면 전쟁 수행이라는 복잡한 전략적 상황과 동프로이센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위협 속에서 판단력이 흐려졌을 가능성을 제기한다.[11][44]

실제로 몰트케는 캠페인 초반의 승리 발표에도 불구하고, 9월 4일경 포로와 노획 물자가 부족하다는 점에 주목하며 아직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다고 판단했다.[12][13] 그는 로렌 지방에서의 실패한 공세에 지나치게 신경을 썼을 수 있으며, 마른 전투가 한창이던 9월 2일부터 5일 사이에는 주력인 제1, 2, 3군에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12]

마른 전투의 전황이 악화되자 몰트케는 황제에게 "폐하,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14][42] 윈스턴 처칠은 자서전에서 이 일화에 대해 "몰트케 장군이 황제에게 '폐하,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라고 실제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어쨌든, 군사적 문제보다 정치적 문제에 더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가 9일 밤에 아내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 파리 동쪽의 전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가 저지른 피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라고 기록했다.[15][43]

해임된 후 몰트케는 더 이상 중요한 역할을 하지 못했고, 1916년 병으로 사망했다.

2. 3. 죽음

베를린 무능자 묘지(Invalidenfriedhof)에 있는 헬무트 폰 몰트케의 무덤(2007년 복원된 묘비)


참모총장에서 물러난 이후 몰트케의 건강은 계속 악화되었다. 1916년 6월 18일, 몰트케는 베를린에서 열린 원수 콜마르 폰 데어 골츠의 국장에 참석하던 중 뇌졸중으로 쓰러져 사망했다.[1] 그의 나이는 68세였다. 유해는 베를린의 무능자 묘지(Invalidenfriedhof)에 안장되었고, 이후 그의 아내 엘리자의 유해도 함께 묻혔다.

3. 평가

독일 제국장군참모장을 역임한 헬무트 폰 몰트케에 대한 평가는 그의 군사적 능력과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역할을 둘러싸고 오늘날까지도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그의 참모총장 임명 과정부터 순탄치 않았다. 유력 경쟁자들을 제치고 임명된 배경에는 군사적 능력보다 이름값과 빌헬름 2세 황제와의 개인적 친분이 작용했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2][3][1] 참모총장으로서 전임자 알프레트 폰 슐리펜이 구상한 슐리펜 계획을 수정한 결정, 특히 서부 전선 병력 분산과 네덜란드 침공 계획 제외는 그의 군사적 판단에 대한 주요 비판 지점이며, 전쟁 장기화의 원인 중 하나로 지목되기도 한다.[8][9][10] 또한, 러시아와의 국지전을 상정한 동부 전개 계획을 폐기하여 독일이 양면 전쟁 외의 선택지를 갖기 어렵게 만들었다는 평가도 받는다.

마른 전투에서의 패배는 몰트케 평가의 핵심 쟁점이다. 병력 운용상의 문제, 야전 지휘관들과의 소통 부재 등이 패배 원인으로 거론되며,[11][12] 이로 인해 몰트케는 결국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현장 지휘관의 작전 변경이나 독일군의 Auftragstaktik|임무형 지휘de 교리, 동프로이센에서의 러시아군 위협 등 복합적인 요인을 고려해야 한다는 반론도 존재한다.[11] 마른 전투 후퇴 이후 몰트케가 카이저에게 "폐하,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라고 보고했다는 일화는 유명하지만, 실제 발언 여부는 불확실하다.[14][15]

그의 군사적 판단에는 개인적인 성향과 건강 문제도 영향을 미쳤다는 분석이 있다. 전쟁 발발 직전 겪은 뇌졸중[16]과 신경쇠약[47]은 결단력을 저해했을 수 있으며,[17] 내성적인 성격[18], 신지학에 대한 믿음[19], 사회 진화론적 사고[20] 등이 전쟁에 대한 그의 태도와 결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시각도 존재한다. 루돌프 슈타이너와의 교류도 언급된다.[46]

종합적으로 몰트케는 군사적 능력보다는 위대한 백부(대 몰트케)의 후광과 황제와의 관계로 최고 지위에 올랐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철학, 문학, 음악 등 예술 분야에 조예가 깊었으며, 이는 군사 훈련 중 괴테의 『파우스트』를 읽었다는 일화에서도 드러난다.

3. 1. 부정적 평가

독일 제국장군참모장으로서 몰트케의 역할과 능력에 대해서는 비판적인 평가가 많다. 특히 그의 제1차 세계 대전 초기 전략 결정은 많은 논란을 낳았다.

1906년 알프레트 폰 슐리펜의 뒤를 이어 참모총장에 임명될 당시부터 그의 자질에 대한 의문이 제기되었다. 유력한 경쟁자였던 한스 하르트비히 폰 베제러, 카를 폰 뷜로프, 콜마어 폰 데어 골츠 남작 등을 제치고 임명된 배경에는 군사적 능력보다는 그의 이름값과 빌헬름 2세 황제와의 개인적인 친분(황제는 그를 '율리우스'라고 불렀다[3])이 작용했다는 비판이 있다.[2][1] 역사가들은 황제가 상대적으로 다루기 쉬운 몰트케를 선호했을 것이라고 분석하기도 한다.[1]

참모총장 취임 후 몰트케는 전임자 슐리펜이 수립한 슐리펜 계획을 수정했는데, 이 결정은 치명적인 실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프랑스를 침공할 주력 부대인 서부 전선(오른쪽 날개)의 병력을 줄여 동부 전선으로 배치했다. 이로 인해 독일군은 프랑스를 빠르게 점령하지 못했고, 전쟁은 길고 소모적인 참호전 양상으로 흘러갔다. 또한, 그는 계획에서 네덜란드 침공을 제외하는 수정도 가했다. 1913년에는 러시아와의 전쟁 시 프랑스와의 동시 교전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대안이었던 동부 전개 계획을 폐기함으로써, 독일이 양면 전쟁 외에는 다른 선택지를 가질 수 없도록 만들었다.

1914년 7월 위기 당시, 영국이 프랑스의 중립을 보장할 것이라는 빌헬름 2세의 기대에 따라 서부 전선 병력을 동부로 돌리라는 지시를 받았을 때, 몰트케는 오랜 기간 준비된 동원 계획을 급히 변경하는 것은 큰 혼란을 야기할 것이라며 거부했다.[5][6] 이는 당시로서는 합리적인 판단처럼 보였을 수 있으나, 훗날 독일 철도 부서 책임자였던 헤르만 폰 슈타프스 장군은 비상 상황에 대비한 계획이 존재했다고 반박하여 몰트케의 경직성을 비판하는 근거가 되었다.[7] 전쟁 초기 리에주 전투에서의 승리를 낙관하고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이 러시아군을 충분히 막아낼 것이라고 판단했지만, 이는 현실과 동떨어진 희망적인 예측이었다.

제1차 마른 전투에서의 패배는 몰트케의 군사적 실패를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이 패배의 책임을 지고 그는 1914년 9월 14일 참모총장직에서 해임되었다. 마른 전투 패배 원인에 대해서는 여러 분석이 존재한다.

  • 몰트케 책임론: 비평가들은 몰트케가 전쟁 전 동부 전선 강화를 위해 서부 전선의 결정적인 우익 병력(약 18만 명)을 차출하고,[8][9][10] 알자스-로렌 방면으로 추가 병력을 이동시켜 우익을 약화시킨 것을 패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한다. 특히 탄넨베르크 전투 승리 직전에 2개 군단과 기병 사단을 동부 전선으로 보낸 결정은 전략적 실패로 간주된다. 또한, 8월 내내 야전 지휘관들과의 소통 부재 및 통제력 상실로 인해 마른 전투 중 효과적인 대응을 하지 못했다는 비판도 있다.[11] 실제로 그는 9월 4일이 되어서야 포로와 노획 장비 부족을 통해 독일군이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지 못했음을 깨달았고,[12] 전투가 한창이던 9월 2일부터 5일까지 예하 부대에 별다른 명령을 내리지 않은 것으로 알려졌다.[12]
  • 반론: 알렉산더 폰 클루크가 지휘하는 제1군과 카를 폰 뷜로프의 제2군 사이의 간격이 벌어져 프랑스군에게 돌파구를 허용한 것이 더 직접적인 원인이라는 주장도 있다(주버, 마셜). 독일군의 임무형 지휘(Auftragstaktik) 교리는 현장 지휘관의 재량을 중시했으므로, 전적으로 몰트케의 책임으로만 돌리기는 어렵다는 시각이다. 또한 동프로이센에 대한 러시아의 침공 위협 등 복잡한 전장 상황이 몰트케의 판단에 영향을 미쳤을 수 있다는 점도 고려해야 한다.[11]


마른 전투에서의 독일군 후퇴 이후, 몰트케는 카이저에게 "폐하,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라고 보고한 것으로 알려졌다.[14] 처칠(Churchill)은 다음과 같이 언급했다: "몰트케 장군이 황제에게 '폐하, 우리는 전쟁에서 졌습니다.'라고 실제로 말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어쨌든, 군사적 문제보다 정치적 문제에 더 뛰어난 선견지명이 있었던 그가 9일 밤에 아내에게 '상황이 좋지 않다. 파리 동쪽의 전투가 우리에게 유리하게 흘러가지 않았고, 우리가 저지른 피해에 대한 대가를 치러야 할 것이다.'라고 썼다는 것을 알고 있다."[15]

육십육 세의 몰트케 백작은 1914년 당시 노장 지휘관 중 한 명이었으며, 전쟁 발발 직전에 뇌졸중을 앓아 건강이 좋지 않았다.[16] 이러한 요인들은 그가 스트레스를 받을 때 그의 결단력에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17] 그의 개인적인 관심사는 음악, 그림, 문학이었다. 종종 단호한 태도를 보였지만, 역사가 바바라 W. 터크먼은 그의 성격을 본질적으로 자기 회의적인 내성적인 사람으로 평가했다.[18]

몰트케는 신지학의 신봉자였으며, 신지학은 인류가 흥망성쇠를 반복하는 끊임없고 변함없는 문명의 순환이라고 가르쳤다. 역사가 마거릿 맥밀란은 그의 개인적인 신념을 제1차 세계 대전으로 이어지는 전반적인 전쟁의 가능성에 대한 그의 체념적인 접근 방식과 연결시켰다.[19] 독일 참모본부의 많은 동료들처럼, 그는 사회 진화론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 국제 관계를 생존을 위한 투쟁으로 보는 그의 관점은 전쟁의 시작이 지연될수록 독일에게 더 나빠질 것이라고 믿게 만들었다.[20]

4. 수상 내역

헬무트 폰 몰트케는 독일 제국 내 여러 국가와 외국에서 다수의 훈장과 상을 받았다.[21] 자세한 내용은 아래 하위 섹션에서 확인할 수 있다.

4. 1. 독일 훈장

그는 다음과 같은 독일 지역의 훈장과 상을 받았다:[21]

  • '''프로이센'''
  • * 철십자 훈장 (1870), 2급
  • * 적수 대십자 훈장, 참나무 잎과 왕관
  • * 왕관 훈장 기사, 2급 (1896년 9월 12일 수여); 별 (1901년 9월 19일 수여);[22] 1급
  • * 왕립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사령관 성
  • * 흑수 훈장 기사, 칼라 포함 (1909년 수여)
  • * 공로 훈장 십자
  • * 푸르 르 메리트 훈장 (군사), (1915년 8월 7일 수여)
  • '''바덴'''[23]
  • * 체링거 사자 훈장 대십자 (1905년 수여)
  • * 베르톨트 1세 훈장 대십자 (1909년 수여)
  • '''바이에른 왕국'''
  • * 바이에른 왕관 공로 훈장 대십자
  • * 바이에른 군사 공로 훈장 대십자
  • '''에르네스틴 공국''': 작센-에르네스틴 왕가 훈장 사령관, 2급
  • '''헤센과 라인''': 필립 대공 훈장 사령관, 2급 (칼 포함, 1892년 5월 6일 수여)[24]
  • '''메클렌부르크'''[25]
  • * 그리핀 대사령관 훈장 (1904년 11월 15일 수여)
  • * 벤디시 왕관 훈장 대십자, 금관 포함 (1911년 9월 10일 수여)
  • '''올덴부르크''': 페터 프리드리히 루트비히 공작 훈장 대십자
  • '''작센-바이마르-아이제나흐''': 백색 매 훈장 사령관 (1892년 수여)[26]
  • '''작센 왕국'''
  • * 알베르트 훈장 사령관, 2급 (1896년 수여);[27] 금성 대십자
  • * 루 왕관 훈장 기사
  • '''샤움부르크-리페''': 샤움부르크-리페 왕가 훈장 명예 십자, 1급
  • '''뷔르템베르크 왕국'''
  • * 뷔르템베르크 왕관 훈장 명예 기사, 왕관 포함 (1892년 수여);[28] 대십자
  • * 프리드리히 훈장 사령관, 2급 (1893년 수여)[28]

4. 2. 외국 훈장

국가훈장명등급/비고수여 연도
오스트리아-헝가리철관 훈장기사, 2급1892년[29]
오스트리아-헝가리프란츠 요제프 훈장대십자1900년[29]
오스트리아-헝가리레오폴트 훈장대십자1906년[29]
오스트리아-헝가리레오폴트 훈장다이아몬드 포함1909년[29]
오스트리아-헝가리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사령관1914년[29]
벨기에레오폴드 훈장최고 훈장
불가리아성 알렉산더 훈장대십자
쌍룡 훈장1등급 3계
덴마크단네브로 훈장대십자1902년 10월 29일[30]
덴마크단네브로 훈장다이아몬드 포함1906년 11월 10일[30]
이탈리아 왕국성 마우리치오와 라자로 훈장대십자
이탈리아 왕국이탈리아 왕관 훈장대십자
일본 제국욱일 대수장
일본 제국서보장대수장
모나코성 샤를 훈장대십자1907년 4월 14일[31]
네덜란드오렌지나사우 훈장대십자
오스만 제국오스마니 훈장1급
페르시아사자 및 태양 훈장1급
포르투갈성 베네딕토 아비스 왕립 군사 훈장사령관
루마니아루마니아의 별 훈장대십자
루마니아루마니아 왕관 훈장대십자
러시아 제국성 알렉산드르 넵스키 훈장기사
러시아 제국성 안나 훈장기사, 1급, 다이아몬드 포함
러시아 제국성 스타니슬라오 훈장기사, 1급
세르비아타코보 십자 훈장사령관
스페인군사 공로 훈장대십자
스웨덴검 훈장대십자1908년[32]
대영 제국로열 빅토리아 훈장명예 기사 사령관1901년 5월 28일[33]


참조

[1] 서적 Helmuth von Moltke and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2] 웹사이트 Moltke, Helmuth Johannes Ludwig, Graf von {{!}} Encyclopedia.com https://www.encyclop[...] 2023-07-18
[3] 간행물 Herfried Münkler - Irrtümer und Illusionen im großen Krieg https://www.youtube.[...] 2015-11-25
[4] 서적 Decisions for War, 1914-1917 https://books.google[...]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4-12-13
[5] 문서 The Historical Journ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6] 서적 The First World War Pimlico
[7] 서적 The Guns of August Ballantine Press
[8] 서적 What If? Penguin Group 2001-09-01
[9] 문서 Keegan, John source cited
[10] 서적 The First World War Penguin 1966
[11] 웹사이트 Who's Who – Helmuth von Moltke http://www.firstworl[...] 2007-01-02
[12] 서적 Mons, The Retreat to Victory https://archive.org/[...] Wordsworth Military Library
[13] 서적 The First World War Penguin 1966
[14] 웹사이트 Majestät, wir haben den Krieg verloren http://jellepeters.c[...] Otto-Ernst Schüddekopf
[15] 문서 The World Crisis, 1911–1918 Free Press
[16] 서적 The First Battle of the Marne 1914 Osprey
[17] 서적 The First World War Hutchinson
[18] 문서 The Guns of August Four Square
[19] 서적 The War That Ended Peace: The Road to 1914 https://books.google[...] Random House
[20] 간행물 Why Britain Was Right To Go To War In 1914 2013-09
[21] 웹사이트 Helmuth Johannes Ludwig von Moltke, der Jüngere http://prussianmachi[...] 2021-04-09
[22] 간행물 Königlich Preussische Ordensliste (supp.)
[23] 문서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 Baden
[24] 간행물 Großherzoglich Hessische Ordensliste Staatsverlag
[25] 서적 Hof- und Staatshandbuch des Großherzogtums Mecklenburg-Strelitz: 1915 Druck und Debit der Buchdruckerei von G. F. Spalding und Sohn 1915
[26] 간행물 Staatshandbuch für das Großherzogtum Sachsen / Sachsen-Weimar-Eisenach Böhlau
[27] 서적 Staatshandbuch für den Königreich Sachsen: 1901 Heinrich
[28]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s Königreich Württemberg Landesamt
[29] 간행물 Hof- und Staatshandbuch der Österreichisch-Ungarischen Monarchie 1916
[30] 서적 Statshaandbog for Kongeriget Danmark for Aaret 1912 https://slaegtsbibli[...] J.H. Schultz A.-S. Universitetsbogtrykkeri 2020-04-30
[31] 문서 Journal de Monaco https://journaldemon[...]
[32] 간행물 Sveriges statskalender https://runeberg.org[...] 2021-04-09
[33] 서적 The Knights of England https://archive.org/[...]
[34] 웹사이트 Moltke, Helmuth Graf von https://www.deutsche[...]
[35] 서적 Die Moltkes. Beck
[36] 서적 Helmuth von Moltke and the Origins of the First World War Cambridge University Press
[37] 간행물 Aufzeichnungen über die Aera Wilhelms II.
[38] 서적 Der Erste Weltkrieg
[39] 간행물 The Historical Journal Cambridge University Press
[40] 서적 The Guns of August Ballantine Press
[41] 웹사이트 Moltke, Helmuth von
[42] 뉴스 Majestät, wir haben den Krieg verloren http://jellepeters.c[...] Bertelsmann Lexikon-Verlag
[43] 서적 The World Crisis, 1911–1918 Free Press
[44] 웹사이트 Who's Who - Helmuth von Moltke http://www.firstworl[...] 2007-01-02
[45] 서적 Ludendorff – Diktator im Ersten Weltkrieg. Siedler, München
[46] 웹사이트 http://biographien.k[...]
[47] 서적 The First Battle of the Marne 1914 Ospre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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