형가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형가는 중국 전국 시대의 위나라 출신으로, 연나라 태자 단의 의뢰를 받아 진나라 왕 정(후의 진 시황제)을 암살하려 했던 인물이다. 그는 검술과 유세술에 능했으며, 협객으로 활동하며 고점리와 교우했다. 진나라의 위협에 놓인 연나라는 형가에게 암살을 의뢰했고, 형가는 번어기의 목과 독항의 지도를 바치는 척 진나라 궁궐에 잠입하여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처형되었다. 형가의 암살 시도는 연나라 멸망의 원인이 되었으며, 그의 이야기는 다양한 문학 작품과 영화의 소재가 되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기원전 227년 사망 - 진무양
진무양은 형가의 조력자로서 진시황 암살을 시도했으나 실패하여 처형된 인물로, 어린 시절 무술에 능했으나 난폭한 성향을 보였다. - 군주 시역 미수자 - 이봉창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이봉창은 1932년 일왕 히로히토 암살을 시도한 의거를 통해 한국 독립운동의 강인함을 세계에 알렸으나 체포되어 순국하였고 건국훈장 대통령장이 추서되었다. - 군주 시역 미수자 -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
로베르 프랑수아 다미앵은 1757년 루이 15세 암살 미수 사건으로 잔혹한 능지처참형을 받은 프랑스 인물로, 그의 사건은 앙시앵 레짐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시이며 형벌 제도에 대한 사회적 시각 변화에 영향을 미쳤다. - 중국의 암살자 - 곽순
곽순은 촉한의 장군 강유에게 사로잡혀 촉에서 좌장군이 되었으나 유선을 암살하려다 실패하고 비의를 살해했으며, 이후 처형되었지만 위나라에서 추봉되었다. - 중국의 암살자 - 범강
범강은 장비의 부하로서 흰 깃발 준비를 제대로 못한 이유로 매질을 당한 것에 원한을 품고 장비를 암살한 후 오나라로 도주한 인물이다.
형가 | |
---|---|
인물 정보 | |
이름 | 형가 (荊軻) |
로마자 표기 | Jing Ke |
간체자 | 荆轲 |
병음 | Jīng Kē |
웨이드-자일스 | Ching K'o |
출생 | 불명 |
사망 | 기원전 227년 |
시대 | 전국시대 |
국적 | 위나라 -> 연나라 |
직업 | 자객 |
생애 | |
주요 활동 | 진시황 암살 시도 |
관련 인물 | |
관련 인물 | 태자 단 진무양 번오기 고점리 |
2. 생애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으로,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의 명족(名族)이었던 경씨(慶氏)이다. 위나라 사람들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는데, 후에 연나라에 가서는 연나라 사람들로부터 「형경(荊卿)」이라 불렸다.[13]
형가는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술을 배웠다. 위나라로 돌아온 후 관료가 되고자 위나라 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에게 유세술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협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번은 검술 이론을 두고 지개섭과 다투었는데, 지개섭이 노려보자 바로 물러났다. 한단에서는 노구천과 쌍륙을 하다가 규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고, 노구천이 위협적으로 소리치자 형가는 물러났다. 사람들은 형가를 겁쟁이라 비웃었지만, 형가는 사소한 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13]
이후 형가는 연나라로 가 개백정 노릇을 하며 고점리라는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잘 타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연나라 저자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연주하는 축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크게 통곡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는 훗날 '''방약무인'''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형가는 술꾼으로 지내면서도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의 현인, 호걸, 덕망 있는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전광의 빈객(賓客)이 되었다.[13]
2. 1. 출생과 성장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나라 사람이다. 그의 선조는 제(齊)나라의 명족(名族)이었던 경씨(慶氏)이며, 위나라 사람들은 형가를 「경경(慶卿)」이라는 존칭으로 불렀다고 한다(후에 연나라에선 연나라 사람들로부터 「형경荊卿」이라 불림).[13]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는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술을 배웠다. 귀국한 뒤에는 관료에 뜻을 두고 위나라 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들을 찾아다니며 여행에서 배운 유세술을 가지고 국정에 대한 논의를 펼쳤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좌절하고 협객으로서의 삶을 택하게 되는데, 한 번은 검술 이론을 두고 지개섭이라는 자와 다투게 되었는데, 지개섭이 자신을 노려보자 형가는 바로 물러났다. 또한 한단에서는 노구천과 쌍륙을 하다가 그 규칙 때문에 길 한복판에서 싸움을 벌였고, 노구천이 위협적인 태도로 형가에게 소리치자 형가는 이번에도 그냥 물러났다. 여러 사람들은 형가를 겁쟁이라며 비웃었지만 형가는 굳이 사소한 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던 것이다(《사기》 자객열전).
그 후 연나라에 들어가 개백정 노릇을 하면서 고점리라는 당시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잘 타던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연나라의 저자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켜는 축의 반주에 맞추어 저자 한복판에서 노래를 불렀고, 이윽고 크게 통곡하는데, 그 행동은 마치 자신의 옆에 아무도 존재하지 않는 것과 같았고, 훗날 이것이 '''방약무인'''의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술꾼으로 살면서도 형가는 여전히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에서 찾아온 현인과 호걸, 덕망 있는 자들과 교분을 맺었으며, 현지 유력자였던 전광의 빈객(賓客)이 되었다.
2. 2. 협객으로서의 삶
형가는 전국시대 위(衛)나라 출신이다. 독서와 검술을 좋아했으며, 젊어서 여러 나라를 떠돌며 유세술을 배웠다. 위나라로 돌아온 후 관리가 되고자 위나라 왕을 비롯한 여러 군주에게 유세술을 펼쳤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형가는 협객의 길을 걷게 되었다. 한번은 검술 이론을 두고 갑섭(蓋聶)과 다투었는데, 갑섭이 노려보자 바로 물러났다. 한단(邯鄲)에서는 노구천(魯句踐)과 쌍륙을 하다가 규칙 때문에 싸움이 벌어졌고, 노구천이 위협적으로 소리치자 형가는 물러났다. 사람들은 형가를 겁쟁이라 비웃었지만, 형가는 사소한 일로 목숨을 잃고 싶지 않았다.[13]이후 연(燕)나라로 가 개백정 노릇을 하며 고점리(高漸離)라는 축(筑, 현악기의 일종)을 잘 타는 사람과 친하게 지냈다. 연나라 저자에서 술을 마시다 취하면 고점리가 연주하는 축 반주에 맞춰 노래를 불렀고, 이윽고 크게 통곡했는데, 그 모습은 마치 옆에 아무도 없는 듯했다. 이는 훗날 '''방약무인''' 고사성어의 유래가 되었다. 형가는 술꾼으로 지내면서도 독서를 좋아했고, 각지의 현인, 호걸, 덕망 있는 사람들과 교류했으며, 전광(田光)의 빈객(賓客)이 되었다.[13]
3. 진왕 암살 계획
기원전 233년, 연나라 태자 단은 진나라에서 도망쳐 돌아와 진왕 정(훗날의 진시황제)에게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당시 진나라의 힘이 압도적으로 강했기 때문에, 연나라는 멸망 위기에 놓여 있었다. 단은 정에게 자객을 보내기로 결심하고 전광과 상의했고,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그러나 단이 비밀을 지켜달라고 당부한 탓에, 전광은 형가에게 이 사실을 알린 뒤 자결했다.[14]
형가는 진왕 정을 알현하기 위한 계책을 마련했다. 첫째는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땅인 독항(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 시줘저우 시·가오베이뎬 시)을 바치는 것이고, 둘째는 진나라 장군이었으나 정에게 간언했다가 일족이 처형당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온 번어기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단은 영토 할양은 받아들였으나, 자신을 믿고 온 번어기를 죽일 수는 없다고 거절했다.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만나 자신의 목을 바쳐 진왕에게 접근하여 복수할 기회를 달라고 설득했고, 번어기는 이를 수락하고 자결했다.[14]
단은 암살에 사용할 날카로운 비수를 찾기 위해 노력했고, 마침내 월나라의 전설적인 칼잡이 서부인의 비수를 손에 넣었다. 이 비수에 독을 발라 시험해보니, 베여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3. 1. 배경
기원전 233년, 연나라의 태자 단이 인질로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진왕 정(政)과 어렸을 때부터 친했지만, 정이 자신을 낮춰보는 것에 분노하여 연으로 도망쳐 복수를 꾀했다. 그러나 진나라의 국력이 연나라보다 훨씬 강했기 때문에, 자칫하면 연나라가 진나라에 멸망당할 수도 있었다. 단은 정에게 자객을 보내기로 하고 전광에게 의논하러 갔는데,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단은 돌아가면서 이 일은 비밀로 하라고 당부했고, 전광은 형가에게 이 이야기를 한 뒤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2]형가는 원래 작은 위나라 출신으로, 강씨(姜姓)의 경씨(庆氏) 가문 출신이며, 제나라 무괴의 먼 후손이었다. 그는 훌륭한 교육을 받았고 검술에 능했다. 그의 고향인 위나라는 기원전 239년에 진나라에 병합되었고, 형가는 연나라로 도망쳤다.[2] 협객 전광이 그를 단태자에게 소개했고,[4] 형가는 단태자의 환대를 받았다. 단태자는 최후의 수단으로 진나라 왕을 암살하기로 결정했다.[2]
형가는 진왕에게 접근할 방법을 찾았다. 첫째는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독항 땅을 바치는 것, 둘째는 진나라 장군 번오기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번오기는 정의 제안에 간언하다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인물이었다. 단은 영토는 몰라도 자신을 의지해 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고, 형가는 직접 번오기를 찾아가 설득했다. 번오기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내주었다. 한편 단은 암살에 쓸 예리한 비수를 수소문하여 조나라 사람 서부인의 비수를 구했다. 이 비수에 독을 바르고 시험해보니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
기원전 230년, 진나라는 다른 국가들을 정복하기 시작했으며, 이는 정(政)왕이 한 국가로 통일하려는 야심의 일환이었다. 진나라는 기원전 260년부터 이미 다른 국가들에 비해 절대적인 군사적 우위를 점하고 있었으며, 먼저 한나라를 멸망시켰는데, 한나라는 전국 7웅 중 가장 약한 국가였다. 2년 후, 한때 강력했던 조나라 또한 기원전 228년에 정복되었다.[2] 조나라의 북동쪽 이웃인 연나라는 진나라의 팽창에 위협을 받게 되었다. 평화를 대가로, 연나라의 희왕은 그의 아들 태자 단을 진나라에 외교적 인질로 보냈지만, 단태자는 연나라보다 진나라가 훨씬 강하고 조만간 공격할 것이라는 것을 알고 돌아왔다.[2]
3. 2. 형가의 발탁
기원전 233년, 연의 태자 단(丹)이 인질로 있던 진(秦)에서 도망쳐 왔다. 단은 진왕 정(政)과 어렸을 때부터 친하게 지냈지만, 자란 뒤 정이 자신을 낮춰보는 것에 분노하여 연으로 도망쳐 복수를 꾀하게 된다. 그러나 진에 대한 분노는 단 자신의 개인적인 원한에 불과했고, 연보다 진의 국력이 훨씬 강한 정세상 자칫하면 연이 진에게 멸망당할 수도 있었다. 정에게 자객(刺客)을 보내기로 하고 의논하러 찾아온 단에게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단은 돌아가면서 "이 일은 아무도 모르게 하라"고 했고, 전광은 형가에게 이 이야기를 고한 뒤 "태자에게 의심을 품게 했으니 내가 부덕한 탓이다"라며 스스로 목을 찔러 죽었다.[14]자객으로서 의뢰를 받은 형가는 조심스럽게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갈 방법을 찾았다. 그 방법이란 첫째로 연에서 가장 비옥한 곡창지대인 독항(督亢) (현재의 허베이성) 땅을 바치는 것, 다른 하나는 과거 진의 장군(將軍)으로서 정이 제안한 군의 소수 정예화에 대하여 간언하다 정의 노여움을 사서 일족이 처형되고 연으로 망명해 온 번오기(樊於期)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이것이라면 진왕도 기꺼이 만나줄 것이라며 형가는 단에게 이것을 요구했지만, 단은 영토는 몰라도 자신을 의지해 도망쳐 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고,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찾아가 "상금이 걸려 있는 당신의 목을 대가로 내가 진왕에게 가까이 다가가 그를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억울함도 수치도 벗겨질 수 있지 않겠습니까?"라며 설득했고, 번어기는 자신의 복수를 위해 기꺼이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내주었다.[2][5][6][7][14]
한편 단은 암살에 쓰기 위한 예리한 비수를 천하에 영을 내려 수소문한 끝에 조나라 사람 서부인의 비수를 백금을 주고 손에 넣었다. 이 비수에 독을 바르고 시험삼아 베어보니 죽지 않는 사람이 없었다고 한다.[6]
4. 암살 시도와 최후
기원전 233년, 연나라 태자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 단은 진왕 정(후의 시황제)과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지만, 어른이 되어 진나라에서 재회했을 때 정은 단을 업신여기고 냉대했다. 이에 분노한 단은 연나라로 도망쳐 복수를 결심했다.[14]
당시 진나라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연나라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 분명했기에 단은 정에 대한 자객 파견을 생각했다. 단은 전광과 상의했고,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단이 돌아갈 때 "이 일은 비밀로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이야기를 전한 뒤 "태자에게 의심을 품게 한 것은 나의 부덕함 때문이다"라며 자결했다.
자객 의뢰를 받은 형가는 신중한 정을 알현하기 위한 계책을 생각했다. 그 계책은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독항(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 시줘저우 시·가오베이뎬 시)을 헌납하고, 진나라 장군이었으나 정에게 간언했다가 일족이 처형당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온 번어기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단은 영토 할양은 가능하나, 자신을 믿고 도망쳐 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만나 "현상금이 걸린 당신의 목을 가지고, 제가 진왕에게 접근하여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원통함과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부탁했고, 번어기는 복수를 위해 이를 승낙하고 자결하여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주었다.[14]
단은 암살에 사용할 날카로운 비수를 찾았고, 고대 중국 월나라의 전설적인 칼잡이 서부인의 비수를 백금을 주고 손에 넣었다. 이 비수에 독을 발라 사형수로 시험 삼아 베었더니, 베여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형가 일행은 함양에 도착했다.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거인 지도와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진왕 정을 알현했다.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의 예로 형가 일행을 접견했다. 정 앞에 나선 진무양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었고, 이를 수상히 여긴 신하들이 묻자 형가는 "북방의 시골뜨기라 천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둘러댔다.[6][8]
형가는 지도를 가지고 정에게 바쳤고, 정이 지도를 펼치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비수가 나타났다. 형가는 비수를 쥐고 정의 소매를 잡아 찌르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정의 소매가 찢어지고 정은 피할 수 있었다.
정은 당황하여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지만, 검이 너무 길어 칼집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신하들과 호위병들 또한 당황했지만, 신하가 정의 전각에 무기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형가는 비수를 들고 정을 쫓았고, 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피해 도망쳤다. 신하들은 맨손으로 형가를 붙잡으려 했고, 시의인 하무저는 약상자를 형가에게 던졌다.[6] 형가가 주춤한 틈을 타 좌우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 뒤로 돌리시어 뽑으소서"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은 검을 등 뒤로 돌려 짊어지는 듯한 형태로 간신히 검을 뽑을 수 있었다.
검을 뽑자 장검과 비수로는 승부가 되지 않았고, 형가는 다리를 베였다. 형가는 마지막으로 비수를 정에게 던졌지만, 빗나가 기둥에 박혔다. 암살 실패를 깨달은 형가는 기둥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아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진왕을 죽이지 않고 위협하여, 땅의 반환을 약속받으려 했기 때문이다"라고 웃으며 욕설을 퍼부은 후, 참살당했다.[9] 진무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떨고만 있었다.
4. 1. 역수(易水)의 노래
기원전 227년, 단은 자객 임무를 수행하는데 진무양이라는 자를 형가에게 동행으로 추천했다. 진무양은 13세의 나이에 사람을 죽여서 장사로서 이름난 자였다. 그러나 형가는 진무양이 의지할 수 없는 풋내기임을 알아채고 「옛 친구」[17]를 불러 그와 함께 가겠다고 했으나, 단이 출발할 것을 재촉하는 바람에 형가는 자신이 기다리던 옛 친구가 고민하고 겁을 먹은 것이라 생각하고, 하는 수 없이 진무양을 데리고 가기로 했다.진으로 떠나던 날 태자 단을 비롯해 사정을 아는 모든 사람들이 상복을 입고 역수(易水, 황하 북쪽을 흐르는 강) 부근까지 전송하러 나왔다. 모두 눈물을 흘리는 가운데 형가의 친구 고점리는 축을 타고, 형가는 그의 심정을 노래하였다.
:風蕭蕭兮易水寒|바람은 쓸쓸하고 역수 물은 차구나중국어
:壮士一去兮不復還|장사 한번 가면 돌아오지 못하리중국어
이 시구는 《사기》 중에서도 가장 유명한 장면의 하나로 오늘날까지 사람들에게 회자되고 있는데, 당시 이를 들은 사람들이 모두 그 처절한 축 연주와 형가의 노래하는 소리에 머리카락이 하늘로 곤두섰다고 한다. 이윽고 형가는 배를 타고 떠나며, 끝내 뒤를 돌아보는 일이 없었다.
4. 2. 암살 시도
기원전 233년, 연나라 태자 단은 진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다가 도망쳐 돌아왔다. 단은 진왕 정(후의 시황제)과 어린 시절 친하게 지냈지만, 어른이 되어 진나라에서 재회했을 때 정은 단을 업신여기고 냉대했다. 이에 분노한 단은 연나라로 도망쳐 복수를 결심했다.[14]
당시 진나라의 힘은 압도적이었고, 연나라는 어떤 조치를 취하지 않으면 멸망할 것이 분명했기에 단은 정에 대한 자객 파견을 생각했다. 단은 전광과 상의했고, 전광은 형가를 추천했다. 단이 돌아갈 때 "이 일은 비밀로 해주십시오"라고 말하자, 전광은 형가에게 이야기를 전한 뒤 "태자에게 의심을 품게 한 것은 나의 부덕함 때문이다"라며 자결했다.
자객 의뢰를 받은 형가는 신중한 정을 알현하기 위한 계책을 생각했다. 그 계책은 연나라에서 가장 비옥한 토지인 독항(현재의 허베이성바오딩 시줘저우 시·가오베이뎬 시)을 헌납하고, 진나라 장군이었으나 정에게 간언했다가 일족이 처형당하고 연나라로 도망쳐 온 번어기의 목을 바치는 것이었다.
단은 영토 할양은 가능하나, 자신을 믿고 도망쳐 온 사람을 죽일 수는 없다며 거절했다. 형가는 직접 번어기를 만나 "현상금이 걸린 당신의 목을 가지고, 제가 진왕에게 접근하여 죽일 수 있다면, 분명 원통함과 치욕을 씻을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부탁했고, 번어기는 복수를 위해 이를 승낙하고 자결하여 자신의 목을 형가에게 주었다.[14]
단은 암살에 사용할 날카로운 비수를 찾았고, 고대 중국 월나라의 전설적인 칼잡이 서부인의 비수를 백금을 주고 손에 넣었다. 이 비수에 독을 발라 사형수로 시험 삼아 베었더니, 베여 죽지 않는 자가 없었다.
형가 일행은 함양에 도착했다. 형가는 영토 할양의 증거인 지도와 번어기의 수급을 가지고 진왕 정을 알현했다. 정은 크게 기뻐하며 구빈의 예로 형가 일행을 접견했다. 정 앞에 나선 진무양은 공포에 질려 온몸을 떨었고, 이를 수상히 여긴 신하들이 묻자 형가는 "북방의 시골뜨기라 천자 앞에서 두려워하고 있습니다"라고 둘러댔다.[6][8]
형가는 지도를 가지고 정에게 바쳤고, 정이 지도를 펼치자 두루마리 끝에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비수가 나타났다. 형가는 비수를 쥐고 정의 소매를 잡아 찌르려 했지만, 간발의 차로 정의 소매가 찢어지고 정은 피할 수 있었다.
정은 당황하여 허리춤의 검을 뽑으려 했지만, 검이 너무 길어 칼집에 걸려 빠지지 않았다. 신하들과 호위병들 또한 당황했지만, 신하가 정의 전각에 무기를 가지고 올라가는 것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형가는 비수를 들고 정을 쫓았고, 정은 필사적으로 기둥을 피해 도망쳤다. 신하들은 맨손으로 형가를 붙잡으려 했고, 시의인 하무저는 약상자를 형가에게 던졌다.[6] 형가가 주춤한 틈을 타 좌우에서 "왕이시여, 검을 등 뒤로 돌리시어 뽑으소서"라는 소리가 들려왔고, 정은 검을 등 뒤로 돌려 짊어지는 듯한 형태로 간신히 검을 뽑을 수 있었다.
검을 뽑자 장검과 비수로는 승부가 되지 않았고, 형가는 다리를 베였다. 형가는 마지막으로 비수를 정에게 던졌지만, 빗나가 기둥에 박혔다. 암살 실패를 깨달은 형가는 기둥에 기대어 바닥에 주저앉아 "내 일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은, 진왕을 죽이지 않고 위협하여, 땅의 반환을 약속받으려 했기 때문이다"라고 웃으며 욕설을 퍼부은 후, 참살당했다.[9] 진무양은 처음부터 끝까지 떨고만 있었다.
5. 암살 시도 이후
진왕 정(政)은 격노하여 연(燕)을 공격했고, 연나라와 대 연합군을 역수 서쪽에서 격파했다. 기원전 226년에는 수도 계를 함락시켰다. 암살 사건의 주모자인 단(丹)은 대왕 가의 권고를 받은 연왕 희의 명령에 의해 살해되었다. 그러나 진(秦)은 공격을 멈추지 않고, 기원전 222년에 연나라를 멸망시켰다.[9]
고점리는 형가와 함께 했던 인물들과 추방되었고, 정(政)에게 복수하고자 서탁(徐卓)으로 이름을 바꾸고 송자에 잠입했다. 시황제(始皇帝)는 형가 사건 이후 환관 조고에게 고점리임을 간파당했고, 흉기가 발견되어 붙잡혔다. 시황제는 고점리의 척(筑) 솜씨를 아까워하여 눈을 멀게 했다. 고점리는 척 안에 납을 넣어 기회를 기다렸고, 시황제의 위치를 확인하고 척을 던졌지만 빗나갔다. 고점리는 거열형에 처해졌다.
5. 1. 연나라의 멸망
기원전 226년, 진왕은 형가의 암살 시도에 격노하여 연나라를 공격, 수도 계(薊)를 함락시켰다.[9] 태자 단은 암살 음모의 주모자로 연 희왕의 명에 따라 살해되었으나, 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다.[9] 결국 기원전 222년, 연나라는 완전히 멸망당했다.5. 2. 고점리(高漸離)의 복수 시도
기원전 226년, 진왕 정은 형가의 암살 시도에 격노하여 연나라를 공격해 수도 계(薊, 지금의 베이징)를 함락시켰다. 태자 단은 연왕의 명에 따라 살해되었지만, 진은 공격을 멈추지 않았고 기원전 222년 연을 완전히 멸망시켰다.[1]과거 형가와 친했던 고점리는 태자 단의 식객이었고 형가와도 친했다는 이유로 함께 쫓겨났다. 그는 성과 이름을 바꾼 뒤 송자(宋子, 지금의 하북성)에 숨었다.[1] 중국을 통일하고 시황제가 된 진왕 정은 동쪽을 순행하여 산동(山東)의 낭야(琅邪)라는 곳에 있었는데, 그곳에서 「송자 땅에 축을 잘 타는 자가 있다」는 소문을 듣게 되었다.[1] 시황제의 행궁에 불려가게 된 고점리는 시황제를 암살하기 위한 특수한 흉기를 고안했는데, 비녀처럼 생겼지만 끝부분에 교묘하게 날이 숨겨져 있고 한 번 누르면 송곳 모양의 날카로운 흉기가 나타나도록 되어 있는 장치였다.[1] 그러나 진시황은 형가 사건 이후 암살 위협에 신경이 곤두서 있었고, 환관 조고에 의해 고점리는 자신의 정체를 들키고 말았다.[1] 시황제는 고점리의 축 타는 재주를 아껴 대신 그의 눈을 멀게 하고 궁중에서 축을 연주하게 했다.[1] 이에 고점리는 자신이 아끼는 축을 흉기로 삼을 계획을 세웠고, 축 속에 납을 집어넣어 묵직하게 만든 뒤 기회를 엿보았다.[1] 계획을 실행에 옮기기로 한 날 밤, 귀로 시황제의 위치를 확인하고 고점리는 축을 집어던졌지만, 축은 목표에서 조금 빗나가서 끝내 시황제를 암살하는데 실패했고 고점리는 그 자리에서 붙잡혀 온몸이 여덟 조각으로 찢어지는 극형을 당한다.[1] 그 뒤에도 장량 등 시황제 암살을 꾀하는 인물들이 다수 나왔지만 모두 실패했다.[1] 또한 고점리의 암살 미수 이후 시황제는 죽을 때까지 외방에서 온 사람을 만나지 않았다고 한다.[1]
6. 평가 및 영향
형가는 강대국의 왕에게 맞섰던 "의사(義士)"로서 인기가 높다. 사마천은 비록 암살은 실패했지만 그 뜻과 높은 의기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18] 도연명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라고 읊었다.
반면, 형가를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기도 하며, 일개 자객에게 국운을 건 연나라 태자 단에 대한 평가도 낮다. 당시 진나라의 국력이 연나라보다 압도적이었기 때문에 진왕 정이 살해당했더라도 연나라는 결국 진나라에 침략당했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8]
6. 1. 긍정적 평가
사마천은 『사기』 「자객열전」 말미에서 하무저와 친분이 있던 공손계공이나 동중서로부터 형가 사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비록 암살은 실패했지만 그 뜻과 높은 의기로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평가했다.[18] 또한 과거 쌍육 문제로 형가와 다투었던 노구천도 진왕 암살 미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확실하게 사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호되게 꾸짖었던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필시 나를 미워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한탄했다고 전한다. 시인 도연명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라고 읊었다.6. 2. 부정적 평가
북송의 사마광은 "형가는 태자 단의 사적으로 길러진 입장에서, (자신의) 친족을 돌보지 않고, 1척 8촌 정도의 비수로 연을 강하게 하고 진을 약하게 하려 했다. 어찌나 어리석은 일인가"라고 말했으며, 양웅의 "군자의 도에서 보면, 형가는 도적의 무리에 지나지 않는다"라는 평가를 인용하며 그의 행위를 비판했다 (자치통감「진기(秦紀) 2·시황제 하」25년).[18] 현대에는 형가를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기도 하며, 일개 자객에 불과한 형가에게 국운까지 건 연의 태자 단에 대한 평가도 낮다. 당시 진나라는 연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어 설령 진왕 정이 살해당했다 할지라도 연나라는 필연적으로 진나라에 침략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평가도 존재한다.[18]6. 3. 현대적 의의
형가는 심지 하나로 강대국의 왕에게 맞섰던 "의사(義士)"로서 인기가 높다. 사마천은 《자객열전》 말미에서 하무저와 친분이 있던 공손계공이나 동중서로부터 형가 사건의 이야기를 전해 들었는데, 비록 암살이 성공하지는 못했지만 품은 뜻이 높아 이름을 남기게 된 것이라고 평가하였다. 또한 과거 쌍륙 문제로 형가와 싸웠던 노구천도 진왕 암살 미수 사건에 관한 이야기를 듣고는 "그가 확실하게 사람 목숨을 끊을 수 있는 기술이 없었던 것은 아무래도 안타깝다. 그리고 그런 인물을 호되게 꾸짖었던 나도 사람 보는 눈이 없었다. 필시 나를 미워했을 것이 분명하다"고 한탄했다고 《사기》는 전하고 있다.[18] 도연명은 '영형가(詠荊軻)'라는 시를 지어 "형가는 죽었지만 그 뜻은 남아있네"라고 읊었다.현대에는 형가를 테러리스트에 불과하다고 평가하기도 하며, 일개 자객에 불과한 형가에게 국운까지 건 연나라 태자 단에 대한 평가도 낮다. 당시 진나라는 연나라에 비해 압도적인 국력을 갖고 있어 설령 진왕 정이 살해당했다 할지라도 연나라는 필연적으로 진나라에 침략당하고 말았을 것이라는 의견도 있다.[18]
참조
[1]
서적
Chinese civilization in a new light 中華文明傳真#3 春秋戰國
Publishing Company
2002
[2]
서적
中國歷史講堂 #2 戰國 秦 漢
中華書局
2006
[3]
서적
Kinas förste kejsare
http://www.adlibris.[...]
Natur & Kultur
2016
[4]
서적
俠客行: 縱談中國武俠
知書房出版集團 publishing
1998
[5]
서적
History of the Warring States 战国史
Shanghai People Publishing House
[6]
서적
中國歷史講堂 #2 戰國 秦 漢
中華書局
2006
[7]
서적
中國通史. 春秋 戰國 秦
Intelligence press
2003
[8]
서적
The First Emperor: Selections from the Historical Records
Oxford University Press
2007
[9]
서적
中國歷史講堂 #2 戰國 秦 漢
中華書局
2006
[10]
웹사이트
The Emperor and the Assassin: slashing and burning its way through Chinese history
https://www.theguard[...]
2014-09-25
[11]
웹사이트
The Contingency of China's Imperial Unity: Assassins Attack the First King of Qin
https://www.asianstu[...]
2004-09
[12]
웹사이트
Mo Yan's Our Jing Ke: Downfall by design - People's Daily Online
http://en.people.cn/[...]
[13]
문서
[14]
문서
[15]
문서
[16]
문서
[17]
문서
[18]
서적
천하를 움켜쥔 사생아 천하제패 진시황
2008년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