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르무즈 왕국
1. 개요
호르무즈 왕국은 페르시아만과 인도양을 연결하는 무역의 요충지였으며,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에서 유래된 지명을 사용했다. 11세기 오만에서 이주한 무함마드 디람쿠에 의해 건국되었으며,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이곳을 동방 무역의 중심지로 묘사했다. 14세기에는 몽골 제국 통치하에 번성하며 국제 무역 중심지로 명성을 떨쳤다. 1515년 포르투갈에 점령당하여 지배를 받았으며, 1622년 영국 동인도 회사의 지원을 받은 사파비 왕조의 아바스 1세에 의해 정복당했다. 이후 페르시아 본토로 항만 기능이 이전되고, 현재는 이란의 호르모즈간 주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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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페르시아 -
아케메네스 왕국
아케메네스 왕국은 기원전 705년경 아케메네스가 세운 고대 이란 왕조로, 키루스 2세의 정복 활동으로 대제국이 되었고 캄비세스 2세가 이집트를 정복하며 2세기 이상 고대 세계 대부분을 지배했다.
2. 역사
페르시아와 인도, 동아프리카를 연결하는 교역 거점이었던 호르무즈는 13세기 마르코 폴로의 동방견문록에 "향신료, 보석, 진주, 비단, 직물, 상아 등을 거래하는 인도 상인들이 모여 있다"고 기록될 정도로 번성했다. 제노바 상인들이 페르시아만에서 바그다드, 콘스탄티노플, 중앙아시아를 오가며 무역을 했지만, 14세기 이후 오스만 제국이 득세하고 비잔틴 제국이 멸망하면서 이 경로는 쓸모없게 되었다.
1498년,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양 항로를 개척한 후, 1515년 포르투갈 함대가 호르무즈를 공격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17세기 영국 동인도 회사는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 1세에게 페르시아 비단을 얻기 위한 무역 허가를 요청했고, 그 조건으로 호르무즈의 포르투갈 요새 공격을 지원했다. 1622년 호르무즈가 항복하자 아바스 1세는 항만 기능을 페르시아 본토로 옮겨 반다르 아바스로 개명했다.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동인도 회사의 상관(商館)을 설치하게 되었다.
2.1. 고대 및 중세 시대
조로아스터교의 신 아후라 마즈다가 도시 이름의 어원이며, "아후라 마즈다"가 변형되어 "오르무즈(Ormozd)" 또는 "호르무즈(Hormuz)"라고 불리게 되었다고 추정된다. 원래 호르무즈는 오늘날 호르모즈간 주 미나브 인근의 모고스탄 또는 무기스탄 주 대륙부에 있었다. 11세기 무함마드 디람쿠가 오만에서 이란 해안으로 이주하면서 호르무즈 왕국의 역사가 시작되었다.
13세기 마르코 폴로는 동방견문록에서 호르무즈를 코르모스라고 칭하며, "향신료, 보석, 진주, 비단, 직물, 상아 등을 거래하는 인도 상인들이 모여 있다"고 언급했다. 14세기 이븐 바투타는 호르무즈를 두 차례 방문했다.
1301년, 일 칸국과 차가타이 칸국의 경쟁으로 인해 주민들은 구 호르무즈를 버리고 제룬 섬(자룬 섬)으로 이주하였다. 이들은 바하 웃딘 아야즈와 왕비 비비 마리암의 지휘를 받았다.
2.2. 신 호르무즈
루크 알딘 마흐무드 칼라티(재위 1249–1286) 에미르의 통치는 오르무스 역사에서 새로운 시기의 시작을 알렸다. 이 시기에 호르무스는 케르만 셀주크 술탄국과 살구르 왕조와의 종속 관계를 끊고, 우스푸르 왕조, 오만 이맘국 방향으로 세력을 확장했다. 호르무스는 부와이 왕조 붕괴 후 케르만 왕국의 속국으로 왕국을 세운 무하마드 디람쿠의 자손들이 통치했으며, 일 칸국의 몽골 왕조 통치하에 절정에 달했다.
15세기 초, 정화는 명나라 보물선 함대를 이끌고 호르무즈를 방문했다. 마환은 영애승람에서 호르무스 사회를 긍정적으로 묘사했다. 비신은 성차승람에서 호르무스에 대한 기록을 남겼다.
2.3. 포르투갈의 지배와 쇠퇴
바스코 다가마가 인도양 항로를 개척한 1498년 이후, 1507년 아폰수 드 알부케르크가 호르무즈 섬에 상륙했다. 1515년, 포르투갈 함대는 호르무즈를 공격하여 지배하에 두었다.
포르투갈의 봉신이 된 호르무즈 왕국은 1521년 바레인 침략에 공동으로 참여하여 페르시아만의 자브리드 통치를 종식시켰다. 자브리드 통치자는 명목상 호르무즈의 봉신이었지만, 자브리드 왕 무크린 이븐 자밀은 호르무즈가 요구한 조공을 거부했고, 이는 포르투갈 정복자 안토니오 코레아의 지휘 하에 침략을 촉발했다. 바레인 전투에서 대부분의 전투는 포르투갈 군대에 의해 수행되었고, 호르무즈 제독 레이스 사라포는 이를 지켜보았다.
17세기에 영국 동인도 회사는 페르시아의 비단을 얻기 위해 사파비 왕조의 샤 아바스 1세로부터 무역 허가를 얻었지만, 호르무즈의 포르투갈 요새 공격을 지원하는 것이 조건이었다. 1622년, 호르무즈가 항복하자 아바스 1세는 항만 기능을 맞은편 페르시아 본토로 옮기고 도시 이름을 반다르아바스로 했다. ‘반다르’는 페르시아어로 항구를 뜻한다. 이후, 네덜란드와 프랑스도 동인도 회사의 상관을 설치하게 되었다.
3. 호르무즈를 방문한 역사적 인물
* 알렉산더 대왕의 신하 네아르코스 (기원전 325년, 당시에는 Harmozeia영어라고 불렸으며, 알렉산더 대왕 사후 2년 전이었다.)
* 마르코 폴로 (13세기 후반, 동방견문록에서 언급. 케르만 왕국을 여행하고 호르무즈에서 배 조달을 포기, 귀로에 인도에서 온 배로 호르무즈에 상륙하여 코카친 공주를 데려다주었다. 당시 일 칸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 이븐 바투타 (14세기, 모로코의 대여행가로 두 차례 방문. 당시 일 칸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 정화 (명나라 영락제의 명을 받은 대원정에서 1415년경, 1422년경, 1431년경 세 차례 방문. 당시 티무르 제국이 지배하고 있었다.)
4. 문화와 사회
마환과 비신의 기록에 따르면, 호르무즈는 부유하고 사치스러운 사회였으며, 다양한 문화가 공존하는 국제 무역 도시였다. 마환은 영애승람에서 호르무즈 사람들을 "세련되고 공정하며, [...] 굳세고 잘생겼으며, 옷과 모자는 멋지고 독특하며 우아하다"라고 묘사했다. 비신은 성차승람에서 "하류 계층은 부유하다"라고 언급하며, 남녀 모두 긴 옷을 입고, 여성들은 외출 시 베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는 등 현지 의상 습관을 기록했다.
두아르테 바르보사는 호르무즈 주민들이 무함마드의 신념을 존중하지만, 방탕한 생활을 하며, 음악을 즐기고 다양한 악기를 연주한다고 기록했다. 성 프란치스코 하비에르는 호르무즈의 도덕적 상태가 매우 나쁘며, 가장 추악한 관능주의와 동방 종교의 타락한 형태가 만연하다고 묘사했다. 그는 아랍인과 페르시아인들이 혐오스러운 악을 퍼뜨렸고, 합법적인 결혼은 드물었으며, 외국인, 군인, 상인들이 모든 자제를 버리고 열정을 탐닉했다고 비판했다.
아베 기욤 토마 프랑수아 레이날은 호르무즈가 외국 상인들에게 화려하고 쾌적한 도시였으며, 전 세계 사람들이 모여 상품을 교환하고 사업을 처리하는 곳이었다고 기록했다. 거리는 매트와 카펫으로 덮여 있었고, 린넨 차양으로 태양열을 막았으며, 금도금된 화병, 꽃, 방향성 식물로 채워진 중국산 캐비닛이 집들을 장식했다. 물을 실은 낙타들이 광장에 배치되었고, 페르시아 와인, 향수, 음식들이 풍성하게 제공되었으며, 동방 음악을 즐길 수 있었다.
5. 문학 속 묘사
존 밀턴의 서사시 실낙원에서 호르무즈는 사탄의 왕좌가 "오르무스와 인도의 부를 능가했다"고 묘사될 정도로 부유함의 상징으로 나타난다. 앤드루 마블의 시 '버뮤다'에서는 석류가 "오르무스가 보여주는 것보다 더 풍부한 보석"으로 묘사되어 호르무즈가 보석이 풍부한 곳으로 언급된다. 하트 크레인의 소네트 에밀리 디킨슨에게에서는 "가장 먼 마음의 화해 – 오르무스를 루비 없이, 오피르를 차갑게 만든다"라는 대구가 등장한다. 풀케 그레빌의 밀실 드라마 알라함은 오르무스를 배경으로 한다. 힐러리 맨텔의 소설 울프 홀에서 '오르무즈'로 언급되는 오르무스 왕국은 "세상에서 가장 건조한 왕국으로, 나무도 없고 소금 외에는 작물도 없다. 그 중심에 서면 30마일 이상이 재로 뒤덮인 평야로 보이며, 그 너머에는 진주로 덮인 해변이 있다."라고 묘사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