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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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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호프부르크는 13세기 무렵 건설된 오스트리아 빈에 있는 궁전으로, 합스부르크 왕가의 거처이자 신성 로마 제국 황제와 오스트리아 황제의 궁전으로 사용되었다. 여러 차례 증개축을 거쳐 현재의 모습을 갖추었으며, 스위스 궁전, 아말리엔부르크, 레오폴딘 관, 제국 재상부 관, 궁정 도서관 등 다양한 건물로 구성된 복합 건축물이다. 1938년 아돌프 히틀러가 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한 장소이기도 하며, 현재는 오스트리아 대통령 관저, 교회, 미술관, 도서관 등으로 사용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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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프부르크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호프부르크
오래된 성 부분(왼쪽), "노이에 부르크" 부분(이미지 중앙), 외부 성문(오른쪽), 앞쪽에는 헬덴플라츠.
위치오스트리아,
좌표48°12′23″N 16°21′55″E
건축 양식네오 바로크 양식
웹사이트호프부르크 공식 웹사이트
명칭
독일어Hofburg ()
역사
관련 항목카이저포럼

2. 연혁

13세기경(1275년경) 오스트리아 공국의 공성으로, 오스트리아 공작 오토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고 전해진다. 그 후 오토카 2세가 신성 로마 황제 루돌프 1세 (합스부르크가)에게 패배하여 합스부르크가의 거성 겸 황궁이 되었다.[7] 이후에도 증개축을 반복하여 현재의 모습이 되었다.

이후, 신성 로마 제국 (오스트리아 공국오스트리아 대공국),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황제의 궁전, 그리고 의 일부로 사용되었다.

1278년부터 1918년까지 합스부르크가의 거성과 권력의 중심지였으며, 호프부르크에서 태어난 역사적 인물로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아 레오폴디나 데 아우스트리아 등이 있다. 2,600개 이상의 객실을 갖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20ha 면적의 웅장한 건축물과 넓은 정원이 존재한다.

1938년, 신궁전 테라스에서 아돌프 히틀러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했다.

1945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 관저, 교회, 미술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복합 시설이 되었다.

오늘날, 광대한 복합 시설에는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스페인 승마 학교,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관저, 오스트리아 국립 박물관이 있으며, 그 안에는 빈 회의에 사용된 방과 약 7세기에 걸친 통치 기간 동안 합스부르크가에 의해 축적된 신성한 보물과 예술 작품의 컬렉션이 소장되어 있다.

1683년 제2차 빈 포위 당시의 참호와 빈 시벽과 호프부르크 궁전


빈 미술사 박물관에 있는 1845년경의 호프부르크 궁전 모형

3. 구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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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1. 스위스 궁정 (Schweizerhof)

호프부르크 궁전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13세기로 거슬러 올라가며, 주로 마지막 바벤베르크 가문이나 보헤미아의 오타카르 2세에 의해 건설되었다.[7] 원래 성은 사각형 윤곽을 가지고 있었으며, 네 개의 탑과 입구에 도개교가 있는 해자로 둘러싸여 있었다. 오늘날 이 성의 가장 오래된 부분은 스위스 궁정(Schweizerhof)을 형성하며, 이곳에는 15세기의 고딕 양식 예배당(Burgkapelle)과 빈 미술사 박물관에 속한 보물실(Schatzkammer)이 있다. 보물실에는 신성 로마 제국(Reichskleinodien)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황실 휘장이 소장되어 있다.[7] 궁정 음악 예배당(Hofmusikkapelle)은 궁정 예배당(Hofburgkapelle) 안에 위치해 있으며, 빈 소년 합창단이 전통적으로 일요일에 미사를 부르는 곳이다.

스위스 궁전


오스트리아 황실 보물 (호프부르크 궁전 스위스관 보물실에 보관).


스위스 궁정의 모습은 르네상스 시대, 신성 로마 황제 페르디난트 1세 황제의 통치 시대부터 시작되었다. 스위스 문(Schweizertor)은 페르디난트 1세의 많은 칭호들을 보여주며, 금양모 기사단의 휘장은 천장에 그려져 있다.

스위스 문


스위스관의 인접한 구역에는 라데츠키 아파트가 있다. 1848년 혁명기에 이탈리아 전역에서의 공헌을 인정하여,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는 훌륭한 원수 라데츠키에게 황실 가족의 일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이 아파트에서 거주하도록 허락했다.

1717년 5월 15일, 기사 홀(Rittersaal)에서 교황 클레멘스 11세를 대표하는 교황 사절 조르지오 스피놀라가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를 요르단강에서 가져온 몇 방울의 세례수로 세례를 주었다.

기사 홀 옆에는 황실 근위대의 당직 장교가 황제를 감시하던 경비실(Trabantenstube)이 있다. 이 관의 아랫부분에는 한때 황실 부엌이 있었다.

3. 2. 아말리엔부르크 (Amalienburg)

요제프 1세의 미망인 아말리에 빌헬미네 황후의 이름을 따서 ''아말리엔부르크''라고 불린다. 스위스 문 맞은편에 위치하며, 루돌프 2세 황제의 거처로 후기 르네상스 양식으로 건축되었다. 돔이 있는 작은 탑과 정면에 있는 천문 시계가 특히 주목할 만하다.

아말리엔부르크

3. 3. 레오폴딘 관 (Leopoldinischer Trakt)

레오폴딘 관


아말리엔부르크(Amalienburg)와 스위스 궁정을 연결하는 곳은 레오폴트 1세 황제 치세인 1660년대에 처음 건설되었으며, 그의 이름을 따 레오폴딘 관(Leopoldinischer Flügel)이라 불린다. 건축가는 필리베르토 루체세였지만, 1683년 빈 공방전 이후 조반니 피에트로 텐칼라가 이 날개를 재건하면서 층을 추가했다. 이 날개는 건축 양식을 통해 늦은 르네상스 시대와의 연관성을 여전히 지니고 있으며,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의 사무실이 있다.[6]

이 날개의 일부인 비밀 칙령실(Geheime Ratstube)에서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가 오스트리아-헝가리 대표단의 회의에서 개회 연설을 했다. 또한 이곳에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조카이자 왕위 계승자인 프란츠 페르디난트 대공은 1900년 6월 28일에 단념 서약을 하여 후손들의 왕위 계승권을 포기했다. 이는 그의 결혼이 미래의 아내와의 신분 차이로 인해 귀천상혼이 될 예정이었기 때문에 왕조적으로 필요한 조치였다.

이 날개와 아말리엔부르크의 하단 부분은 호프부르크의 거대한 와인 저장고로 사용되었다.

3. 4. 제국 재상부 관 (Reichskanzlertrakt)



슈탈부르크 맞은편(그리고 1848년 오스트리아 최초의 의회가 열린 곳)의 겨울 승마 학교(Winterreitschule)와 레오폴딘관 맞은편에는 아버지와 아들의 또 다른 협력 프로젝트로 제국 재상관(Reichskanzleitrakt)이 건설되었다.[7] 제국 재상관은 원래 요한 루카스 폰 힐데브란트가 설계했으며, 제국 부총리(Reichsvizekanzler)의 사무실과 더불어 궁정 회의(Reichshofrat)를 수용했다. 제국 부총리는 제국의 대주교(Reichserzkanzler)라는 의례적인 직책을 대신했는데, 중세 시대부터 항상 마인츠 대주교가 이 직책을 맡아왔기 때문에 신성 로마 제국의 실질적 총리였다.[7] 신성 로마 제국이 멸망한 후, 이 건물에는 라이히슈타트 공작 나폴레옹의 아파트가 있었고, 이후에는 프란츠 요제프 1세 황제의 아파트가 있었다.[7]

재상관, 스위스 궁정, 아말리엔부르크, 레오폴딘관은 내성(innerer Burghof)을 형성한다. 중앙에는 로마 황제 복장을 한 프란츠 1세의 청동상이 있는데, 이는 폼페오 마르케시의 작품이다.

3. 5. 궁정 도서관 (Hofburgbibliothek)

원래 독립된 건물이었던 궁정 도서관(''호프부르크'')은 단지의 다른 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카를 6세는 본관과 ''Prunksaal''(웅장한 홀)을 건설했다. 오늘날 이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의 관할 하에 있다. 건설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가 시작했으며, 그의 아들 요제프 에마누엘이 1735년에 완공했다. 대형 ''Prunksaal''(웅장한 홀)에는 사부아 공자 외젠의 장서, 다니엘 그란의 거대한 천장 프레스코화, 그리고 파울 슈트루델이 조각한 황제들의 조각상이 있으며, 이는 호프부르크의 이 부분을 예술적으로 가장 중요한 부분으로 만든다. 아티카 양식의 인물상으로 장식된 외관은 1726년 로렌초 마티엘리가 제작했다. 그는 정문 위에 사두 마차를 탄 아테나의 조각상을 설치했다. 지붕의 왼쪽 부분에는 천문학과 점성술에 둘러싸인 천구(天球)를 받치고 있는 아틀라스를, 반대쪽에는 기하학과 지리학의 알레고리에 둘러싸인 지구를 든 가이아를 배치했다.[6]

북쪽에 있는 도서관은 요제프 광장에 위치해 있다.

1763년부터 1769년까지 니콜로 파카시는 황실 도서관을 호프부르크의 다른 부분과 연결하고, 다른 쪽은 빈 아우구스티누스 교회와 연결하여 현재의 요제프 광장(''Josephsplatz'')을 만들었는데, 이는 거의 대칭적인 비율로 특징지어진다.[7]

3. 6. 요제프 광장 (Josephsplatz)

요제프 광장의 요제프 2세 동상. 왼쪽은 궁정 도서관, 오른쪽은 레두테 윙


주목할 만한 것은 황제 요제프 2세의 청동 기마상이다.

3. 7. 아우구스티너 관 (Augustiner Wing)

아우구스티너 교회와 수도원이 있는 바로크 양식의 아우구스티너 관은 호프부르크의 동남쪽에 있는 요제프 광장 바로 앞에 인접한 궁정 도서관 바로 전에 위치해 있다. 궁전이 확장되면서 교회와 수도원은 건물의 필수적인 부분이 되었다.

아우구스티너 교회는 합스부르크 왕가에서 궁정 교회로 사용되었으며, 결혼식에도 사용되었다. 이곳에서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와 엘리자베트 황후(시시)가 결혼했다.

로레토 측면 예배당 뒤에는 심장 묘소가 있는데, 이는 철문으로 분리된 반원형 부속 건물로, 이곳에는 합스부르크 가문 구성원 54명의 심장이 은색 단지에 보관되어 있다.[2]

알베르티나 미술관이 있는 궁전인 알브레히트 대공 궁전(구 타로우카-데 실바 궁전)은 아우구스티너 수도원과의 구조적 연결 때문에 호프부르크의 일부로 간주된다. 19세기 초에는 알브레히트 대공과 이후 그의 조카인 프리드리히 대공과 같은 황실 가족 구성원들이 이곳에 거주했다. 1820년대 요제프 콘호이젤에 의해 궁전이 개조된 후, 그 구역도 호프부르크와 연결되었다.

3. 8. 레두테 관 (Redoutensaele)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는 17세기의 오페라 하우스를 현재 ''레두텐잘레''로 알려진 무도회장과 콘서트홀로 개조했는데, 여기에는 작은 홀과 큰 홀이 있다. 여러 개의 작은 앞방과 함께 레두테 윙을 형성한다.[3]

원래 계획은 Jean Nicolas Jadot de Ville-Issey|장 니콜라 자도 드 빌 이세de가 작성했으며, 외부 정면은 니콜로 파카시와 Franz Anton Hillebrandt|프란츠 안톤 힐레브란트de의 작품이다. ''레두텐잘레''는 곧 세련된 바로크 엔터테인먼트의 무대가 되었다. 이 이름은 우아한 가면무도회를 의미하는 프랑스어 단어 "redoute"에서 유래되었으며, 그러한 무도회도 이곳에서 열렸다. 관객들은 요제프 하이든, 니콜로 파가니니프란츠 리스트의 음악을 즐겼다. 베토벤의 교향곡 8번의 초연은 1814년에 이곳에서 열렸다. "회의는 춤을 춘다(The Congress dances)"라는 유명한 말은 1814/15년에 빈 회의의 틀 안에서 레두텐잘레에서 열린 무도회에서 유래되었다. 요한 슈트라우스는 이곳에서 열린 무도회를 위해 궁정의 음악 감독을 맡았다. 수세기에 걸쳐 변화하는 취향에 맞춰 다양한 수정이 이루어졌다.[3]

1992년 11월 27일, ''레두텐잘레''를 포함한 전체 윙은 화재로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재건 및 복원 작업은 5년 동안 지속되었다. 작은 ''Kleiner Redoutensaal''은 충실하게 복원된 반면, 더 큰 ''Grosser Redoutensaal''의 내부에 대한 디자인 공모전이 열렸고, 오스트리아 예술가 요제프 미클이 우승했다. 그는 페르디난트 라임وند, 요한 네포무크 네스트로이 및 엘리아스 카네티의 문학 인용문을 바탕으로 여러 유화 작품을 제작했다. 그의 404m2 천장화는 카를 크라우스의 시 "청춘"의 34개의 필사 구절을 포함하고 있지만, 보는 사람이 알아볼 수 없는 형태로 되어있다.[3]

''레두텐잘레''는 1998년 오스트리아의 첫 번째 유럽 연합 이사회 의장국의 틀 안에서 재개장했으며, 이후 호프부르크 컨벤션 센터의 일부가 되었다.[3]

윙의 지붕 복원을 통해 원래의 다락방 공간을 옥상 로비(''Dachfoyer'')라는 새로운 편의 시설로 전환할 수 있었다. 건축가 만프레트 베드혼은 안전한 회의와 파노라마 창을 위한 구형 구조로 완성된 현대적인 인테리어를 디자인했다. 지붕 외에도, 그는 축제 홀과 스위스 안뜰의 남서쪽 윙 사이의 이전 안뜰을 다른 공간으로 개조했다.[3]

3. 9. 슈탈부르크 (Stallburg)

호프부르크 단지의 나머지 건물들과 물리적으로 연결되어 있지는 않지만, 황실 마구간(슈탈부르크)은 원래 당시 황태자였던 막시밀리안 2세의 거주지로 지어졌다. 페르디난트 1세는 아들 막시밀리안이 프로테스탄트교로 기울자 그를 자신의 집에 거주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이 건물은 이후 페르디난트 3세 황제의 예술에 조예가 깊은 형제인 대공 레오폴트 빌헬름의 미술품 컬렉션을 수용했으며, 이 컬렉션은 1889년부터 미술사 박물관의 핵심을 이룬다. 이 거주지는 바로크 시대에 개조되어 1층에 황실 말을 수용했으며, 현재 스페인 승마 학교에서 사용하고 있다.

3. 10. 성 미하엘 관 (Michaelertrakt)

광장을 마주보고 있는 미하엘러날개


미하엘러날개는 요제프 에마누엘 피셔 폰 에를라흐가 설계했으며, 겨울 승마 학교와 황실 재무부 날개를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그러나 옛 황실 궁정 극장(''부르크 극장'')이 가로막고 있어서, 이 계획은 페르디난트 키르슈너가 1889년부터 1893년까지 약간 변경된 계획을 사용하여 날개를 건설할 때까지 실현되지 못했다.

미하엘러 광장이 완공된 후, 날개 정면에는 두 개의 조각 분수가 설치되었다. 루돌프 바이어의 바다의 힘과 에드문트 헬머의 육지의 힘이다.

이 날개는 맞은편에 있는 성 미하엘 교회를 참조하여 이름이 붙여졌다.

3. 11. 축제 홀 관 (Festsaal Wing)

페스트잘(Festival Hall Wing)


비엔나 호프부르크 오케스트라의 콘서트 중 축제 홀


의례 홀 앞의 대리석 홀 벽은 16세기로 거슬러 올라가 이론적으로 레오폴딘 날개에 속하지만, 내부의 스칼리오라는 새로운 의례 홀의 외관과 일치하도록 1840년경에 변경되었다. 제국 시대에는 식당과 궁정 아이들을 위한 무도회장으로 사용되었다.

의례 홀은 19세기 초 벨기에 건축가 루이 몽토와이에 의해 황제 프란츠 2세/1세를 위해 지어졌다. 부가적인 특성으로 인해 거의 100년 동안 레오폴딘 날개에 직각으로 명확하게 보이는 돌출부를 형성하여 "코"라고도 불렸다.

화려한 코퍼 천장과 한때 1,300개의 촛불을 담았던 26개의 크리스탈 샹들리에가 있는 의례 홀은 웅장했다. 24개의 코린트식 기둥은 스칼리오라 기법으로 만들어졌으며, 여기에서 칠해진 석고는 대리석과 유사하다. 이 홀에서 나폴레옹 1세는 황제 프란츠 2세/1세의 딸인 파르마 여공 마리 루이즈에게 구혼했다. 이곳은 또한 궁정 무도회가 열렸고 나중에는 어좌 연설이 열린 곳이기도 하며, 독점적인 궁정 무도회가 열린 곳이기도 하다. 성 목요일에 황제와 황후는 12명의 가난한 노인과 여성을 초대하여 전통적인 만디 의식에서 그들의 발을 씻도록 했다.

나중에는 의례 홀이 1916년까지 새로운 성(''Neue Burg'')에 완전히 통합되었다.

1000m2의 바닥 면적을 가진 페스티벌 홀(''Festsaal'')은 호프부르크 전체에서 가장 큰 홀이다. 왕좌의 방으로 지어졌지만 실제로 사용된 적은 없다. 내부 작업은 1923년에 완료되었지만 예술 작품은 미완성으로 남아있었다. 이 홀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더 큰 영광을 위해 헌정된 알로이스 한스 슈람의 세 개의 천장화가 있으며, 황제 프란츠 요제프의 모토 "Viribus Unitis"(통합된 힘으로)가 완성되었다. 하부 루네트와 팔각형 패널은 오스트리아 역사상 유명 인물들의 에두아르트 베이트와 Viktor Stauffer|빅토르 스타우퍼de의 그림으로 장식되어 있으며, 막시밀리안 1세, 카를 5세, 페르디난트 1세, 루돌프 2세, 그리고 티롤의 페르디난트 2세가 천장화에서 볼 수 있으며, 레오폴트 1세, 카를 6세, 오이겐 공, 그리고 폴란드 왕 얀 3세 소비에스키가 측면 패널에서 볼 수 있다. 이 홀은 또한 1967년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의 개최지였다.[1]

유로비전 송 콘테스트
개최지
빌라 루브니
룩셈부르크 시 (1966년)
호프부르크 왕궁 페스트잘
(1967년)
로열 앨버트 홀
런던 (1968년)


3. 12. 영웅 광장 (Heldenplatz)

1809년, 나폴레옹 전쟁 중에 궁전에 인접해 있던 구 요새의 일부가 철거되었다. 현재의 링슈트라세까지 새로운 부지가 조성되었으며, 그 안에 신고전주의 건축 양식의 주요 성문(''Burgtor'')이 통합되었다. 1817년에 세워진 새로운 벽 안에는 황실 정원(''Burggarten''), 영웅 광장 (Heldenplatz), 시민의 정원 (''Volksgarten'')의 세 정원이 조성되었다. 이 정원들은 ''Burgtor''와 함께 페터 폰 노빌레에 의해 설계되었다.

의례 홀과 ''노이에 부르크''는 광장의 배경을 이룬다.

영웅 광장에는 사보이 공자 외젠과 카를 대공의 기마상이 서 있다. 1938년 3월 15일 아돌프 히틀러는 노이에 부르크의 발코니에서 영웅 광장을 향해 오스트리아를 나치 제3제국에 합병하는 "안슐루스"를 선포했다.

3. 13. 신궁전 (Neue Burg)

1860년대에 도시 성벽이 철거된 후 이 확장되면서 호프부르크는 마지막으로 크게 확장되었다. 링 로드 너머까지 뻗어 있는 두 개의 날개 구조로 된 황제 포럼(Kaiserforum)이 계획되었으며, 양쪽 측면에는 쌍둥이 박물관(미술사 박물관 및 자연사 박물관)이, 끝부분에는 피셔 폰 에를라흐가 지은 오래된 황실 마구간(Hofstallungen, 훨씬 더 오래된 Stallburg와 혼동하지 말 것)이 배치될 예정이었다. 이 프로젝트는 고트프리트 젬퍼가 이끌었고, 나중에는 카를 자유남작 폰 하제나우어가 이끌었다. 박물관은 1891년에 완공되었지만, 나머지 포럼의 건설은 비용 상승과 거대한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실질적인 기능을 찾을 수 없었기 때문에 천천히 진행되었고 갈등을 겪었다. 1913년에는 남서쪽 날개인 신성(Neue Burg)이 완공되었다. 그러나 황제 포럼은 결코 완공되지 못하고 미완성으로 남았다.[6]

오늘날 신성 날개에는 여러 박물관(에페소스 박물관, 무기 및 갑옷 컬렉션, 고대 악기 컬렉션, 민족학 박물관)과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의 일부 열람실이 있다. 호프부르크 컨벤션 센터도 이곳에 있다.[6]

1938년, 신궁전 테라스에서 아돌프 히틀러오스트리아 병합을 선언했다.[7]

4. 현대적 활용

현재 호프부르크에는 오스트리아 연방 대통령의 관저[6], 유럽 안보 협력 기구(OSCE)의 상설 회의장,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시시 박물관 등이 있으며, 다양한 이벤트 공간으로도 활용되고 있다. 1945년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대통령 관저, 교회, 미술관, 도서관 등이 들어선 복합 시설이 되었다.

오늘날, 이 광대한 복합 시설에는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스페인 승마 학교, 오스트리아 대통령의 관저, 오스트리아 국립 박물관 등이 자리하고 있다. 또한, 빈 회의에 사용된 방과 약 7세기에 걸친 합스부르크가의 통치 기간 동안 축적된 귀중한 보물과 예술 작품 컬렉션도 소장되어 있다.

참조

[1] 웹사이트 Hofburg, Wien http://aeiou.iicm.tu[...] 2009-02-15
[2] 웹사이트 Die Herzgruft in der Loretokapelle https://web.archive.[...]
[3] 웹사이트 Redoutensäle https://web.archive.[...] 2018-01-07
[4] 웹사이트 Eurovision Song Contest 1967 http://www.eurovisio[...] European Broadcasting Union 2012-08-29
[5] Kotobank ホーフブルク
[6] 서적 いつかは行きたいヨーロッパの世界でいちばん美しいお城 大和書房 2014-06
[7] 서적 るるぶウィーン・プラハ・ブダペスト JTBパブリッシング 2016-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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