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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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오스트리아에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주요 기관으로, 중세 시대 황실 도서관에서 유래되었다. 1722년 카를 6세의 지시로 호프부르크 궁전에 도서관 건물이 건설되었으며, 이후 나폴레옹의 오스트리아 제국 선포, 제1차 세계 대전, 나치 시대를 거치며 명칭 변경과 수집 정책의 변화를 겪었다. 주요 소장품으로는 고대 필사본, 지도, 지구본, 파피루스, 음악, 고판 인쇄본 등이 있으며, 프룬크잘은 국립도서관의 중심 건물이다. 현재는 웹 아카이빙, 여성 및 젠더 연구 자료 수집 등 현대적인 역할도 수행하며, 예산 및 인사 문제에 대한 자율성을 가지고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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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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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이름 (독일어) | 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외스터라이히ische Nationalbibliothek) |
이전 이름 (독일어) | Kaiserliche Hofbibliothek (카이저리헤 호프비블리오테크) |
위치 | 빈, 이네레 슈타트, 호프부르크, 노이에 부르크 |
일반 정보 | |
국가 | 오스트리아 |
설립일 | 1368년 (황실 도서관으로) |
소장 자료 수 | 12,229,285점 |
접근 요구 사항 | 알 수 없음 |
관장 | 요하나 라힝거 |
직원 수 | 알 수 없음 |
웹사이트 |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공식 웹사이트 |
전화번호 | +43 1 534 10 |
2. 역사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중세 시대 황실 도서관에서 유래되었다. 알베르트 3세는 빈의 보관소에 있던 책들을 도서관으로 옮기고 라틴어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했다.[1] 프리드리히 3세는 ''프라하 벤첼 성경''과 금인칙서 문서 등 귀중한 책들을 빈으로 가져왔다.[1]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의 마리와의 결혼을 통해 부르고뉴와 북프랑스의 중요한 책들을 비너 노이슈타트로 가져왔다.[1]
카를 6세는 1722년에 레오폴트 1세의 계획에 따라 호프부르크 궁전에 도서관을 위한 영구적인 건물(현재의 프룬크잘)을 짓도록 승인했다. 이 건물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에 의해 시작되어 18세기에 도서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 이 시기 사부아 공자 외젠의 장서 15,000권이 추가되어 총 200,000권의 책을 소장하게 되었다.[1] 마리아 테레지아 시대에는 제라르트 판 스비텐과 그의 아들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이 과학 저서를 추가하고 카드 색인을 도입하여 목록을 업데이트했다.[1]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된 후, 도서관은 관리자 파울 슈트라트만 아래에서 재편성되었다. 도서관은 교육, 국가, 호프부르크의 세 가지 관점을 갖게 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다국적 조건은 독일어, 슬라브어, 헝가리어 서적을 수집하게 했으며, 헝가리와의 화해 이후 헝가리 컬렉션의 상당 부분이 부다페스트로 옮겨졌다. 1848년 3월 혁명 동안 제국 도서관은 비엔나 포격으로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오스트리아 공화국 선포 이후, 1920년에 제국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 나치 시대에 도서관은 파울 하이글의 지휘 아래 유대인 등 나치 정권 희생자들의 재산을 약탈하는 데 적극 참여했다.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다시 변경되었고, 1966년에는 소장품의 상당 부분이 헬덴플라츠의 노이에 부르크 별관으로 이전되었다. 1992년에는 공간 수요 증가에 따라 약 400만 권의 장서를 개방했다. 1995년부터 전자 시스템이 구축되었고, 1998년에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2001년부터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에게서 몰수된 도서들이 상속인에게 반환되고 있다.
2. 1. 중세 시대
이 기관은 중세 시대의 황실 도서관에서 유래되었다. 중세 시대 동안,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3세 (1349–1395)는 빈의 보관소에 있던 책들을 도서관으로 옮겼다. 알베르트는 또한 라틴어의 중요한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조치했다.[1] 호프부르크에서는 대공 알베르트 3세의 보물이 황실 예배당 남쪽 탑 내부의 성물실에 보관되었다.[1] 대공은 예술 감식가였으며, 빈 대학교를 지원하고 필사본 삽화를 위한 왕실 공방을 설립했다. 도서관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책인 1368년의 황금 복음서는 알베르트 3세가 소유했다. 1368년, 요하네스 폰 트로파우는 란스크론의 사제이자 브르노의 정경으로, 캘리그래피를 통해 성경의 4개의 복음서를 부르고뉴 서적 예술 학교에서 상세한 삽화와 함께 금색 글자로 필사했다.[1] 4명의 복음사가의 삶을 묘사한 장면에는 알베르트 3세 대공이 통치했던 지역인 오스트리아 가문, 티롤, 슈타이어, 그리고 케른텐 공국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다.[1]프리드리히 3세 (1415–1493)는 합스부르크 소유물들 사이에서 예술 보물을 통합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그 외에도 그는 몇 권의 귀중한 책들을 빈으로 가져왔으며, 그중에는 ''프라하 벤첼 성경''과 금인칙서 문서가 있었다.
부르고뉴의 마리와의 결혼을 통해 막시밀리안 1세 (1459–1519)는 부르고뉴와 북 프랑스에서 중요한 책들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비너 노이슈타트로 가져왔다. 당시 가치가 로 추정되는 이 책들은 마리의 지참금의 약 8분의 1을 차지했다. 또한 막시밀리안의 두 번째 부인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역시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 이탈리아 공방에서 제작된 책들을 가져왔다.
당시 도서관의 책들은 부분적으로 비너 노이슈타트, 부분적으로 빈, 부분적으로 인스브루크에 보관되었다. 막시밀리안 사후, 책들은 인스브루크의 궁전으로 보내졌다.
2. 2. 바로크 시대
카를 6세는 1722년에 레오폴트 1세의 계획에 따라 호프부르크 궁전에 도서관을 위한 영구적인 건물을 짓도록 승인했다. 이 건물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에 의해 시작되어 18세기에 도서관으로 사용되기 시작했다.[1]이 시기 가장 가치 있는 추가물은 사부아 공자 외젠의 광범위한 장서였으며, 15,000권에는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귀중한 책들이 포함되어 있었다. 도서관의 국가 홀에는 이 시점에 약 200,000권의 책이 소장되어 있었다.[1]
재편성 과정에서 도서관이 지식 탐구보다는 주로 과시용으로 사용된다는 사실에 대한 비판이 처음으로 제기되었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주치의인 제라르트 판 스비텐 박사와 그의 아들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은 수많은 과학 저서를 소장품에 추가했다. 고트프리트 판 스비텐은 또한 카드 색인을 성공적으로 도입하여 목록의 지속적인 업데이트를 가능하게 했다.[1]
2. 3. 오스트리아 제국 시대
나폴레옹에 의해 신성 로마 제국이 해체되고 그 자리에 오스트리아 제국이 선포된 후, 도서관은 다시 재편성되었다. 관리자 파울 슈트라트만 아래에서 도서관은 처음으로 자체 질서를 설명하는 프로그램을 받았다. 도서관은 세 가지 관점을 갖게 되었다.- 교육을 필요로 하는 수도의 형성된 계급을 위한 도서관
- 방문객들이 문학적 희귀성을 찾을 것으로 예상되는 오스트리아 ''카이저툼''(제국)의 국립 도서관
- 그 이름을 따온 호프부르크의 도서관
제국 도서관의 수집 정책은 19세기 초에 표현의 요구와 과학 작품에 대한 관심으로 인해 뚜렷하게 분리되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다국적 조건은 독일어 서적뿐만 아니라 슬라브어 및 헝가리어 언어권의 서적도 수집하게 했다. 헝가리와의 화해 이후, 헝가리 컬렉션의 상당 부분은 부다페스트로 옮겨졌다. 1848년 3월 혁명 동안, 제국 도서관은 비엔나 포격으로 제국 도서관이 위치한 호프부르크가 불타면서 극심한 위험에 처했다.
제국 도서관의 중요한 추가는 비엔나 골동품상 테오도어 그라프의 수집품으로 거슬러 올라가는 파피루스 컬렉션이다.
2. 4. 제1공화국과 나치 시대
오스트리아 공화국 선포 이후, 1920년에 제국 도서관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이름이 변경되었다.[1]전쟁 중 도서관의 수집 정책은 "외국 국민의 통치를 받게 된 독일 계열 민족의 국가 문학"에 집중되었다. 당시 도서관장은 요제프 도나바움이었다. 나치 시대('NS 시대')에 총괄 관리자 파울 하이글의 지휘 아래 수십만 점의 저작물이 이곳에 보관되었거나, 가치 없는 것으로 여겨졌지만 압수된 작품들이 독일 도서관으로 가는 경유지로 사용되었다.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의 역사적 유산은 불의와 죄책감에서 자유롭지 않다. 이는 특히 국가 사회주의 시대에 해당된다. 열광적인 국가 사회주의자인 파울 하이글의 지휘 아래 국립도서관은 주로 유대인 시민뿐만 아니라 나치 정권의 다른 희생자들을 체계적으로 약탈하는 데 대규모로 적극 참여했다. 전후 몇 년 동안 상당한 반환이 이루어졌음에도 불구하고 약탈된 컬렉션의 주요 부분이 도서관에 남아 있었다. 따라서 해당 소장품을 합법적인 소유자에게 가능한 한 빨리 반환하는 것은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에게 법적 의무일 뿐만 아니라 도덕적인 문제이기도 하다. 1998년 연방 미술품 반환법[2]을 통해 오랫동안 필요했던 기반이 마련되었다. 2003년 12월, 모든 관련 소장품을 신중하게 검토한 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1998년 미술품 반환법에 따른 출처 보고서를 완료하여 출처 위원회에 전달했다. 주요 결과는 나치 시대에 불법적으로 취득하여 여전히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이 소유하고 있는 목록이다. 그 이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합법적인 소유자 또는 상속인을 찾아 가능한 한 빨리 물품을 돌려주기 위해 노력했다. 2003년 12월부터 총 32,937점의 물품이 합법적인 소유자에게 반환되었다.[3]
2. 5.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1945년 이후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으로 명칭이 변경되었으며, 소량의 자료가 반환되었지만 대부분의 자료는 도서관 소장품으로 남았다. 수집 활동의 초점은 다시금 중앙 및 동유럽으로 향했다.[1]1966년, 소장품의 상당 부분이 요제프 광장에 있는 건물에서 헬덴플라츠의 노이에 부르크 별관으로 이전되었고, 그곳에 새로운 열람실이 설치되었다. 1992년 공간 수요 증가에 따라, 도서관은 약 400만 권의 장서를 개방했다. 동시에 열람실 범위를 확장하여 현재 방문객들은 3개 층(본 열람실 2개 층과 잡지 열람실)을 이용할 수 있다.[1]
도서관은 오랜 기간 카드 목록 색인을 사용했다. 1995년부터 전자 시스템이 구축되었으며, 1998년에 온라인으로 전환되었다. 2001년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중 유대계 오스트리아인에게서 몰수된 도서들이 상속인에게 천천히 반환되고 있다. 이 범주에는 약 25,000권의 장서가 속하는 것으로 추정된다.[1]
3. 주요 컬렉션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오스트리아에서 발행되는 모든 출판물(전자 매체 포함)을 수집하고 보존하는 중요한 임무를 수행한다. 오스트리아 작가들의 해외 출판 작품뿐만 아니라 오스트리아와 관련된 작품, 그리고 인문학 분야의 해외 출판물도 중점적으로 수집한다. 도서관은 7백만 개가 넘는 자료를 보유하고 있으며, 이 중 약 3백만 개가 인쇄물이다.
주요 컬렉션은 다음과 같다.
- 대형 인쇄물, 포스터 및 엑스 리브리스 부서: 330,000점의 자료(대형 인쇄물, 포스터 및 엑스 리브리스)
- 음악 부서: 오스트리아의 음악 기록 보관소이자 방대한 친필 서명 컬렉션을 보유. 세계에서 가장 큰 도서관 중 하나이다.
- 오스트리아 문학 기록 보관소
- 그림 기록 보관소
- 오스트리아 민요 연구소 기록 보관소
- 오스트리아 국립 도서관 박물관
- 주립 홀
- 계획어 및 에스페란토 박물관
- 필사본, 친필 서명 및 폐쇄 컬렉션 부서: 4세기부터 현재까지 거의 모든 문명권의 고대, 중세 및 현대 필사본을 소장.
- 인쇄본, 고서 및 귀중본 부서: 요람기 인쇄본(1500년 이전에 인쇄된 서적), 1501년부터 1850년까지의 인쇄물, 특정 시기에 국한되지 않는 희귀한 인쇄본을 소장.
- 지도 컬렉션 및 구체 박물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도와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지구본 및 천구의를 포함한 380개의 지구본과 과학 기기를 소장.
- 파피루스 컬렉션 및 파피루스 박물관: 기원전 15세기부터 서기 16세기까지의 약 180,000점의 유물을 소장.
- 여성 및 젠더 연구 자료( 아리아드네 ): 여성과 젠더 연구에 관한 출판물을 수집, 디지털화하여 홍보.
- 오스트리아 웹 아카이브: 2009년부터 웹사이트 아카이빙을 진행.
도서관은 방대한 자료를 바탕으로 국내 대출, 원격 대출, 검색 서비스, 정보 제공 및 복제 서비스 등을 제공하며, 대학, 학교 및 성인 교육 기구와의 협력을 통해 교육적 역할도 수행하고 있다.
3. 1. 필사본 및 희귀본
중세 시대 동안, 오스트리아 공작 알베르트 3세 (1349–1395)는 빈의 보관소에 있던 책들을 도서관으로 옮겼으며, 라틴어의 중요한 작품들을 독일어로 번역하도록 했다.[1] 도서관에 기록된 가장 오래된 책인 1368년의 황금 복음서는 알베르트 3세가 소유했다. 같은 해, 요하네스 폰 트로파우는 성경의 4개의 복음서를 금색 글자로 필사했다.[1] 4명의 복음사가의 삶을 묘사한 장면에는 알베르트 3세가 통치했던 오스트리아 가문, 티롤, 슈타이어, 케른텐 공국의 문장이 표시되어 있다.[1]프리드리히 3세 (1415–1493)는 합스부르크 소유물들 사이에서 예술 보물을 통합하려 했으며, ''프라하 벤첼 성경''과 금인칙서 문서 등 귀중한 책들을 빈으로 가져왔다.
부르고뉴의 마리와의 결혼을 통해 막시밀리안 1세 (1459–1519)는 부르고뉴와 북 프랑스에서 중요한 책들을 소유하게 되었고, 이것들을 비너 노이슈타트로 가져왔다. 이 책들은 당시 가치가 로 추정되며, 마리의 지참금의 약 8분의 1을 차지했다. 막시밀리안의 두 번째 부인인 비앙카 마리아 스포르차 역시 결혼 지참금의 일부로 이탈리아 공방에서 제작된 책들을 가져왔다.
1575년, 황제 막시밀리안 2세는 후고 블로티우스를 첫 번째 관장으로 임명했다. 블로티우스는 약 9,000권으로 성장한 도서관의 장서를 작성하는 중요한 임무를 맡았다. 이후 새로운 작품들이 체계적으로 추가되었고, 다른 도서관들이 통합되었다.
1624년 8월 26일, 페르디난트 2세의 명령에 따라 사본 배포가 규제되었다. 황실 도서관은 구매를 통해서도 증가했는데, 특히 필리프 에두아르트 푸거의 도서관은 대규모 확장을 가져왔다. 도서관은 현재 푸거 도서관에서 나온 최초의 정기 간행물 중 하나인 푸거 신문의 약 17,000장의 자료를 보유하고 있다.
4세기부터 현재까지 이 컬렉션은 거의 모든 문명에서 제작된 고대, 중세, 현대 필사본을 포함한다. 이 컬렉션의 주목할 만한 항목으로는 1997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된 빈 디오스코리데스가 있다.[4]
3. 2. 지도 컬렉션 및 지구본 박물관
지도 컬렉션은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지도를 포함하며 1905년부터 존재해 왔다.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합스부르크가의 컬렉션이 인수되어 합스부르크 "가문 재산 도서관"(Familien-Fideikommiss-Bibliothek)으로 지정되었다.지도 컬렉션에는 380개 이상의 지구본이 포함된 구체 박물관이 있으며, 일부는 16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이곳은 세계 유일의 공공 구체 박물관으로 1956년부터 존재해 왔다. 구체 박물관 소장품의 주요 부분은 1850년 이전에 제작된 지구본으로 구성되어 있다. 또한 컬렉션에는 기술 문헌과 함께 혼천의와 같은 유사한 기기가 포함되어 있다.
지도 컬렉션에는 또한 17세기 아틀라스 블뢰-반 데르 헴(Atlas Blaeu-Van der Hem)이 포함되어 있으며, 2,400개 이상의 지도, 판화, 그림으로 구성된 50권 세트이다. 지금까지 제작된 가장 아름답고 주목할 만한 아틀라스로 여겨지는 이 컬렉션에는 네덜란드 동인도 회사(VOC)를 위해 제작된 필사본 지도와 지형 도면 4권이 포함되어 있다. 2003년 유네스코 세계 기록 유산에 등재되었다.[5]
3. 3. 파피루스 컬렉션 및 파피루스 박물관
19세기 동안, 파피루스 컬렉션은 도서관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이 컬렉션은 오스트리아의 라이너 대공의 개인 소장품에서 시작되었으며, 그는 1899년 8월 18일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에게 이 컬렉션을 기증했다. 파피루스 컬렉션은 기원전 15세기부터 서기 16세기까지의 약 180,000점의 유물을 포함하고 있다.[6] 파피루스 외에도 종이, 점토판 기록, 새겨진 나무 및 밀랍 트레이, 석판, 가죽, 직물, 뼈, 그리고 비문이 새겨진 금, 은, 청동 유물도 포함되어 있다. 이 파피루스 컬렉션은 세계에서 가장 큰 규모이며, 2001년 유네스코의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었다.[6]호프부르크 궁전의 노이에 부르크 별관에 위치한 파피루스 박물관은 컬렉션의 약 200점의 유물을 전시하고 있다.[7]
3. 4. 음악 컬렉션
1826년부터 안톤 브루크너나 리하르트 슈트라우스와 같은 유명 작곡가의 악보와 초판본이 다수 소장되어 있다. 음반이나 CD와 같은 수많은 녹음 자료도 보관되어 있다. 음악 컬렉션에는 작곡가의 많은 필사본도 포함되어 있다.[1]3. 5. 인큐나불라, 고판 및 희귀 인쇄물
고판 인쇄본 컬렉션은 오래되고 귀중한 인쇄물을 소장하고 있으며,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큰 역사적 목판 인쇄물 컬렉션 중 하나이다. 1995년부터 독립된 컬렉션으로 존재해 왔으며, 따라서 도서관 컬렉션 중 가장 젊은 편에 속한다. 이 컬렉션은 약 8,000점의 인큐나불라(전 세계에서 네 번째로 큰 규모), 1501년부터 1850년까지의 목판 인쇄물(예: 푸거 신문), 그리고 시간적 제한 없이 희귀하고 가치 있는 서지학적 인쇄물을 포함한다. SIAWD 컬렉션은 중국어 및 일본어 인쇄물로도 보완되었다.3. 6. 계획 언어 및 에스페란토 박물관
계획 언어 및 에스페란토 박물관은 계획 언어와 관련된 자료들을 수집하고 있다.[8]3. 7. 여성 및 젠더 연구 자료
여성과 젠더 연구에 관한 출판물을 수집, 디지털화하여 홍보하는 도서관 부서는 아리아드네로 알려져 있다. 1992년에 설립된 이 부서는 2000년에 자료를 디지털화했으며, 오스트리아 사회와 역사에 대한 여성의 기여를 알리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9]3. 8. 오스트리아 웹 아카이브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2009년부터 웹사이트 아카이빙을 해왔다. 주제별 컬렉션으로는 여성 및 젠더 연구, 미디어, 정치가 있으며, 이벤트 컬렉션에는 제1 오스트리아 공화국 100주년, 선거, 코로나19 범유행을 반영하는 사이트가 포함된다.[10] 컬렉션 목록은 전용 웹사이트에서 검색할 수 있으며, 아카이브 사본은 헬덴플라츠의 도서관, 오스트리아 연방 총리 행정 도서관, 포어아를베르거 주립 도서관, 그라츠 대학교 도서관, 티롤 대학교 및 주립 도서관, 잘츠부르크 대학교 및 주립 도서관, 비엔나 시립 도서관에서 열람할 수 있다.[11]4. 프룬크잘 (Prunksaal)
프룬크잘(Prunksaalde, State Hall영어)은 옛 황실 도서관의 중심 건물로, 호프부르크 궁전의 일부이다. 이 건물은 북쪽의 요제프 광장과 남쪽의 부르크가르텐 사이에 위치해 있다.
프란체스코회 (Minoritenkloster) 수도원의 책들이 이곳에 보관되었다. 이 건물은 요한 베른하르트 피셔 폰 에를라흐가 1721년에 착공하여, 그가 사망한 후 그의 아들 요제프 에마누엘에 의해 1723년에 완공되었다.
건물에 있는 조각들은 로렌초 마티엘리의 작품이다. 홀은 원래 책 목록에 따라 "전쟁"과 "평화"의 두 반대편으로 나뉘며, 이는 벽 프레스코화에서도 반영되어 있고, 다니엘 그란의 작품이다. 중앙 돔의 프레스코화는 헤라클레스와 아폴로가 들고 있는 카를 6세 황제의 이미지를 일종의 신격화로 묘사한다. 황제의 이미지 주위에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미덕과 그들의 영토의 부를 상징하는 복잡한 주제로 여러 종류의 우화적 인물들이 모여 있다.
홀에는 황제들의 대리석 조각상이 있으며, 그 중심에는 조각가 페터 슈트루델과 파울 슈트루델이 제작한 카를 6세 황제의 조각상이 있다. 네 개의 큰 지구본은 빈첸초 코로넬리의 작품이다.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의 통치 기간 동안 돔에 균열이 생기기 시작했고, 궁정 건축가 니콜라우스 파카시는 곧 철제 링으로 돔을 보강했다. 그란의 기념 프레스코화 (눈물의 흔적이 보이는)는 프란츠 안톤 마울베르취에 의해 복원되었다.
또한 그녀의 통치 기간 동안, 건물은 양쪽 끝으로 확장되어 중앙 프룬크잘과 호프부르크 및 성 아우구스티누스 교회를 연결하여 요제프 광장을 형성했다.
5. 현대적 의의 및 과제
2002년 1월 1일, 오스트리아 국립도서관은 직원을 해고할 수 있는 완전한 법적 권한을 얻었다. 이는 예산 및 인사 문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 권한을 가져왔다는 것을 의미한다. 도서관은 예산의 일부를 국가에서 지원받으며, 추가 자금은 후원, 복제 서비스, 구내 대여를 통해 조달해야 한다.[1]
조직적으로 도서관은 중앙 관리 체제를 사용하며, 인사 및 회계, 장서 구조 및 처리, 이용 및 정보의 세 개 주요 부서와 개별 장서를 갖추고 있다. 도서관장은 분기별로 이사회에 보고한다.[1]
참조
[1]
웹사이트
History of the Austrian National Library
http://www.onb.ac.at[...]
2022-02-27
[2]
간행물
Kunstrückgabegesetz
BGBl. I
1998
[3]
웹사이트
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 Provenance Research
http://www.onb.ac.at[...]
2012-10-31
[4]
웹사이트
Vienna Dioscurides
http://portal.unesco[...]
2022-02-27
[5]
웹사이트
The Atlas Blaeu-Van der Hem of the Austrian National Library
https://en.unesco.or[...]
2003-00-00
[6]
웹사이트
Papyrus Erzherzog Rainer
https://en.unesco.or[...]
UNESCO Memory of the World Programme
2022-12-25
[7]
웹사이트
Papyrusmuseum
http://www.onb.at/ev[...]
2012-08-30
[8]
웹사이트
Department of Planned Languages
http://www.onb.at/ev[...]
2012-08-30
[9]
논문
Über 20 Jahre Ariadne. Die Frauenspezifische Information und Dokumentation an der Österreichischen Nationalbibliothek
http://eprints.rclis[...]
Association of Austrian Librarians & Librarians
2016-00-00
[10]
웹사이트
Nationalbibliothek sammelt österreichische Webseiten zum Coronavirus
https://www.dersta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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Österreichische Nationalbibliothek
2006-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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