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지이 히로히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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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후지이 히로히사는 일본의 정치인으로, 1932년 도쿄에서 태어나 2022년 사망했다.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재무성 관료로 시작하여, 참의원 의원, 중의원 의원을 역임하며 여러 정당을 거쳤다. 자유민주당, 신생당, 자유당, 민주당 등에서 활동하며 재무대신을 두 차례 역임했다. 그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지냈으나,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 관방 부장관과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했다. 2012년 정계에서 은퇴했으며, 사후 정삼위에 서훈되었다.

후지이 히로히사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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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의 후지이
로마자 표기Fujii Hirohisa
한자 표기藤井 裕久
출생1932년 6월 24일
사망2022년 7월 10일 (향년 90세)
출생지도쿄, 일본
사망지도쿄, 일본
국적일본
학력도쿄 대학 법학부 졸업
최종 계위정3위
훈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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욱일대수장
학위법학사 (도쿄 대학, 1955년)
웹사이트후지이 히로히사 공식 페이지
정치 경력
소속 정당 (역대)자유민주당 (1977–1993)
신생당 (1993–1994)
신진당 (1994–1998)
자유당 (1998–2003)
민주당 (2003–2012)
민진당
의정 활동
중의원임기 시작: 1990년 2월 18일
임기 종료: 2005년 8월 8일
임기 시작: 2007년 7월 19일
임기 종료: 2012년 11월 16일
중의원 선거구가나가와 3구 (1990–1993)
가나가와 14구 (1994–2005)
남칸토 비례
당선 횟수 (중의원)7회
참의원임기 시작: 1977년 7월 10일
임기 종료: 1986년 6월 2일
참의원 선거구전국구 (1977–1983)
비례구 (1983–1986)
주요 직책
재무대신임기 시작: 1993년 8월 9일
임기 종료: 1994년 6월 30일
임기 시작: 2009년 9월 16일
임기 종료: 2010년 1월 6일
내각관방부장관 (정무 담당)임기 시작: 2011년 1월 14일
임기 종료: 2011년 3월 17일
총리 보좌관 (사회보장, 세제 일체 개혁 및 부처 간 조정 담당)임기 시작: 2011년 3월 17일
임기 종료: 2011년 9월 5일
민주당 대표 대행임기 시작: 2004년 9월
임기 종료: 2005년 9월
민주당 간사장임기 시작: 2004년 5월
임기 종료: 2004년 9월
자유당 간사장임기 시작: 1999년 1월
임기 종료: 2003년 9월 26일
자유당 국회대책위원장임기 시작: 1999년 1월
임기 종료: 2000년 6월
기타 정보
전직대장성 주계국 주계관
후임재무대신: 간 나오토
재무대신: 다케무라 마사요시
총리 보좌관: 마부치 스미오
내각관방부장관: 센고쿠 요시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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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생애

후지이 히로히사는 1932년 6월 24일 도쿄에서 태어났다. 1955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내각관방장관이었던 니카이도 스스무다케시타 노보루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1977년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두 번의 임기를 마친 후, 중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1986년 사임하고, 1990년 총선에서 가나가와 현을 대표하는 의석을 얻었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일본 신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호소카와 모리히로하타 쓰토무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오자와 이치로의 자유당 소속으로 활동했다.

2005년 총선에서 의석을 잃고 정계 은퇴를 선언했으나, 2007년에 국회로 복귀했다. 2009년 총선을 앞두고 민주당 대표였던 오자와 이치로를 견제하기도 했지만, 하토야마 유키오의 요청으로 다시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재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2010년 1월 건강상의 이유로 사임했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으로 활동했다.

2012년 총선 직전 80세의 나이로 정계 은퇴를 발표했다. 2022년 7월 10일 도쿄 자택에서 9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2.1. 어린 시절 및 학창 시절

후지이 히로히사는 1932년 6월 24일 도쿄부도쿄시혼고구(현 도쿄도분쿄구)에서 내과의사인 아버지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두리틀 공습을 "목격"하기도 했다.

오차노미즈 여자대학 부속 초등학교, 쓰쿠바 대학 부속 중학교·고등학교를 거쳐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고등학교 시절에는 야구부에 소속되어 1946년 전국 중등 학교 야구 대회(고시엔 대회)에 출전하기도 했다. 당시 구제 중학교 3학년이었던 후지이는 벤치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준결승에서 패배했을 때 흙을 가지고 돌아간 것이 그 후 전통의 시초가 되었다.

2.2. 관료 시절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대장성(현 재무성)에 입성했다. 처음 배속된 곳은 대신관방 문서과였다. 입성 동기로는 히라사와 사다아키, 교텐 토요오, 미즈노 마사루, 요시이 토키야, 사토 미츠오 등이 있다. 다나카 가쿠에이 정권에서 내각관방장관을 역임한 니카이도 스스무다케시타 노보루의 비서관을 지냈다. 다나카 가쿠에이의 측근과 다케시타 파의 중견으로 두각을 나타낸 두 사람의 비서관을 역임한 것이 훗날 정치인으로 전향하는 계기가 되었다. 1976년 6월 18일, 대장성 주계국주계관을 끝으로 퇴관했다.

2.3. 정치인 시절

후지이 히로히사는 1932년 6월 24일 도쿄에서 태어났으며, 1955년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했다. 졸업 후 재무성에 들어가 관료 생활을 시작했고, 내각관방장관을 지낸 니카이도 스스무다케시타 노보루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1977년 참의원 선거에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출마하여 당선되었고, 1986년까지 재직했다. 1990년 총선에서 중의원 의원에 당선되었다. 1993년 자민당을 탈당하고 일본 신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호소카와 모리히로하타 쓰토무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1990년대 후반에는 오자와 이치로의 자유당에서 활동했다.

2.3.1. 자민당, 신생당, 신진당, 자유당 시절

1977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참의원에 처음 당선되었다. 1983년 참의원 선거에서는 비례구에서 재선되었다. 1986년, 중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참의원 의원직을 사임하고, 그해 중의원 선거에 구 가나가와 3구에서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했으나 낙선했다.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 창당에 참여했다. 호소카와 내각에서 대장대신으로 취임했고, 하타 쓰토무 내각에서도 대장대신으로 재임했다. 대장대신으로서 경기 악화에 따른 세수 감소로 1989년 이후 4년 만에 적자 국채를 발행했다. 이후 신진당을 거쳐 자유당에서 간사장을 맡았다. 이 시기에는 "우리 당수(오자와)도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라는 말을 자주 사용하며, NHK 『일요 토론』 등에서 자유당의 주장을 펼쳤다.

2.3.2. 민주당 시절

2003년, 후지이 히로히사는 민주당과 자유당의 합당(민유합병)으로 민주당에 합류했다. 오카다 가쓰야 대표 아래에서 간사를 맡았으나, 선거구 조정 과정에서 자유당 출신 의원들을 우대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고 야마오카 겐지 등 오자와 측근들과 격론을 벌이기도 했다. 이후 대표 대행을 역임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 후지이는 가나가와 14구에 출마했으나 자유민주당 신인에게 패배했고, 중복 입후보했던 비례 남칸토 블록에서도 낙선했다. 73세였던 후지이는 정계 은퇴를 선언하고 오자와에게 "이제 함께 걸어갈 수 없게 되었습니다"라고 말하자, 오자와는 눈물을 글썽였다고 한다.

그러나 이후 민주당 남칸토 블록 선출 의원이었던 나가타 히사야스와 나가하마 히로유키가 각각 불상사의 책임을 지고 참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사직 또는 실직하면서, 차차점이었던 후지이가 자동 당선되어 국회에 복귀했다. 2007년 8월, 민주당 최고 고문에 취임했고, 9월부터는 당 세제 조사 회장도 겸임했다.

2009년 중의원 선거를 앞두고 후지이는 불출마를 선언하고, 자신의 지역구(가나가와 14구)를 모토무라 켄타로에게 물려주기로 했다. 그러나 하토야마 유키오 대표의 요청으로 은퇴를 철회하고 남칸토 블록에 단독 입후보하여, 민주당 압승에 힘입어 당선되었다.

2009년 9월 16일,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재무대신으로 취임했다. 하지만 2009년 12월 28일, 예산 편성 등으로 인한 피로로 검사 입원하는 등 컨디션 불량을 이유로 2010년 1월 6일 사임했다. 후임 재무대신은 간 나오토 부총리가 겸임했다.

재무대신 사임 후 잠시 휴양한 후지이는 2011년 1월 14일, 간 나오토의 요청으로 간 나오토 제2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3월 17일 관방 부장관을 퇴임하고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사회 보장·세 일체 개혁 및 성청 간 조정 담당)에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노다 요시히코 내각 출범에 따라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퇴임하고, 민주당 최고 고문과 신설된 민주당 세제 조사 회장에 취임했다.

2.4. 정계 은퇴 이후

후지이 히로히사는 2012년 총선에 불출마를 선언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이후에도 민진당 등에서 활동하며 정치·경제 현안에 대한 의견을 제시했다. 2009년에는 정권 교체 이후 정권 공약(매니페스토) 실행에 따른 예산 재원에 대해 "재원에는 그다지 언급하지 않아도 된다. 어떻게든 될 것이고, 안 되면 죄송하다고 하면 된다"라며 낙관론을 펼쳤다. 대장성 관료 출신으로, 관료에 대해 비교적 이해가 있어 "관료는 두들겨서는 안 되고, 잘 활용해야 한다"는 지론을 가지고 있었다.

2010년에는 일본은행의 물가 목표 설정에 대해 "인플레이션 위험이 있고, 노인들을 직격하고, 샐러리맨에게도 상당한 영향이 있다"며 우려를 표했다. 2011년 2월 7일에는 참의원에 대해 "질의 결의 같은 것은 이야기가 안 된다. (중의원의) 카본 카피라면 필요 없다. 지금대로라면 필요 없다"며 재검토를 요구했다가, 2월 9일 야당 측의 항의를 받고 사과했다. 2012년에는 경제 상황과 소비세 인상 시기에 대해 "지금은 디플레이션이 아니다", "소비세 인상은 저성장·마이너스 성장이 더 하기 쉽다"는 인식을 보였다.

2022년 7월 10일, 후지이는 도쿄 자택에서 90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3. 정치 활동 및 정책

후지이 히로히사는 1977년 자유민주당 공천으로 참의원 의원에 당선되어 정계에 입문했다. 1983년 참의원 선거에서 재선되었으나, 1986년 중의원 선거 출마를 위해 사직했다. 1986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했지만, 1990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어 중의원 의원이 되었다.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 결성에 참여했으며, 호소카와 내각하타 쓰토무 내각에서 대장대신을 역임했다. 이후 신진당, 자유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했다. 민주당에서는 오카다 가쓰야 대표 아래에서 간사, 대표 대행 등을 역임했다.

2005년 중의원 선거에서는 낙선하여 정계 은퇴를 표명했지만, 이후 자동 당선으로 국정에 복귀했다. 2007년 민주당 최고 고문에 취임했고, 2009년 중의원 선거에서 당선되었다.

2009년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재무대신에 취임했지만, 건강 문제로 2010년 사임했다. 간 나오토 제2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 관방 부장관,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을 역임했다. 노다 요시히코 내각 발족 후 민주당 최고 고문, 세제 조사 회장에 취임했다.

2012년 총선에 불출마하고 정계에서 은퇴했다. 은퇴 후에도 민진당 근현대사 조사회 회장을 맡았으며, 2018년에는 에다 겐지 등과 함께 초당파 시민 회의 "자유 민권 회의 @ 가나가와(민권 가나가와)"를 설립하여 회장에 취임했다.

2022년 7월 10일 사망했으며, 일본 정부는 후지이의 업적을 기려 사후 정삼위에 서훈했다.

후지이는 오자와 이치로와 오랫동안 정치 활동을 함께 했다. 니시마츠 건설 사건으로 오자와의 비서가 체포되었을 때 오자와를 옹호했으나, 이후 오자와의 대표직 속행에 쓴소리를 하면서 관계가 소원해졌다.

3.1. 경제 정책

후지이 히로히사는 도쿄 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재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했다. 이는 훗날 그가 재정 및 조세 정책에 대한 전문성을 갖추는 기반이 되었다.

1993년 신생당 결성에 참여한 후, 호소카와 내각하타 쓰토무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다. 그는 경기 악화로 인한 세수 감소에 대응하기 위해 1989년 이후 4년 만에 적자 국채를 발행했다.

자유당 시절에는 당수 오자와 이치로소비세 인상 반대 입장을 지지했다. 그러나 민주당 합류 이후, 특히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는 소비세 인상 필요성을 인정하는 입장으로 선회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의 재무대신 시절, 엔화 강세에 대해 외환 시장 개입에 반대하며 엔고를 용인하는 듯한 입장을 보였다. 이후 2011년에는 일본 시장 개방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엔화 시장 개입에 대한 기존 입장을 유지했다.

3.1.1. 하토야마 내각 재무대신 시절 (2009-2010)

藤井 裕久일본어는 2009년 9월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총리대신 선출 후 재무대신으로 임명되었다. 임명 직후 후지이는 일본 수출업체의 이익을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외환 시장 개입에 대해 공개적으로 반대하며, 다른 국가들도 같은 조치를 취하려 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는 이후 엔화 강세를 선호하지 않으며, 최근 엔화 가치 상승에 만족하지 않는다고 밝혔다.

후지이는 소비세에 대한 기존 입장을 바꿔 소비세 인상을 지지하는 노다 요시히코와 미네자키 나오키 두 명을 부대신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2009년 12월 후지이에게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말하며, 하토야마를 설득하여 후지이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휘발유세에 대한 당의 선거 공약을 변경하도록 했다.

후지이는 2010년 1월 5일 전격적으로 재무대신직 사임을 발표했으며, 하토야마 총리는 다음 날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후지이는 고혈압과 피로에 시달리고 있었기 때문에 건강 악화로 인해 스트레스가 많은 재무대신직에서 사임할 수밖에 없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후지이가 오자와 이치로와의 권력 투쟁 때문에 사임했다고 보았다.

2010년 1월 7일, 간 나오토가 후지이를 대신하여 재무대신이 되었다.

3.1.2. 간 나오토 내각 시절 (2010-2011)

후지이는 2010년 1월 5일 고혈압과 피로 등 건강 악화를 이유로 재무대신 직 사임을 발표했고, 하토야마 유키오 총리는 다음 날 마지못해 이를 수락했다. 그러나 일부 정치 분석가들은 후지이가 오자와 이치로와의 권력 투쟁 때문에 사임했다고 보았다.

2010년 1월 7일, 간 나오토가 후지이를 대신하여 재무대신이 되었다. 후지이는 간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으로 활동했다. 노다 요시히코는 간 정부에서 재무 관련 업무를 맡았고, 2011년 간을 이어 총리가 되었다. 후지이는 이 기간 동안 노다와 정기적으로 연락을 유지했지만, 조심스럽게 낮은 자세를 유지했다. 그는 2011년에 일본 시장 개방이 더 중요하다는 입장을 밝히며, 엔화 시장 개입에 대한 입장을 공개적으로 유지했다.

2011년 1월 14일, 간 나오토는 "관료를 잘 아는 것은 당신이니까"라며 후지이에게 내각 관방 부장관직을 제안했고, 후지이는 간 나오토 제2차 개조 내각에서 내각 관방 부장관에 취임했다. 하지만 3월 17일, 관방 부장관을 퇴임하고 내각총리대신 보좌관 (사회 보장·세 일체 개혁 및 성청 간 조정 담당)에 취임했다. 같은 해 9월 노다 요시히코 내각이 발족하면서 내각총리대신 보좌관에서 퇴임했고, 민주당 최고 고문과 신설된 민주당 세제 조사 회장에 취임했다.

3.2. 기타 정책

* 재일 한국인을 비롯한 영주 외국인 주민의 법적 지위 향상을 추진하는 의원 연맹에 참여했다.
* 한센병 문제의 최종 해결을 추진하는 국회의원 간담회 회장을 역임했다.
* 헌법 조사 추진 의원 연맹에 소속되어 있었다.

4. 논란 및 비판

후지이 히로히사는 여러 논란과 비판에 직면했다.

*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 신생당 결성부터 함께 활동해 온 오자와 이치로와의 관계에서 여러 논란이 있었다. 2009년 오자와의 공설 제1비서가 니시마츠 건설 사건으로 체포되었을 때, 후지이는 오자와를 옹호했지만, 이후 오자와의 대표직 속행에 대해 쓴소리를 하면서 갈등을 빚었다.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 재무대신으로 취임한 후 사임한 배경에는 오자와와의 갈등이 있었다는 견해가 있다.
* 기타: 도쿄 대학 야구부에서 포수로 활동했으며, 요미우리 자이언츠후지타 모토시로부터 안타를 친 적도 있다. 2005년 낙선 후에도 "시지호단(時事放談)"에 출연하기도 했다. 일본주와 소바를 좋아하며, 특히 "원컵 오제키"를 즐겨 마셨다. 선거구로 돌아가는 전차 안에서 승객에게 술을 권했다는 일화도 있다. 장녀는 무용가 하나자키 도키메이다.

4.1. 정치 자금 문제

자유당 간사장 시절, 자유당과 민주당의 합당 3일 전인 2003년 9월 23일에 자유당의 정치 단체 "개혁국민회의"에 560.96을 기부한 것은 정당 교부금 반환 의무를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니냐는 의혹이 제기되었다. 또한 다이와 은행으로부터 자유당에 1000을 차입한 사실이 정치자금 수지 보고서에 기재되어 있지 않다는 점을 자유민주당마쓰오카 도시카쓰가 지적했다. 그러나 정당 교부금은 그 용도에 대해 규제받지 않으며, 후자의 경우 사실이라면 실질적인 기부이며 정치자금 규정법 위반 혐의가 남지만, 총무성은 실질적인 조사권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더 이상의 추궁은 이루어지지 않았다.

4.2. 발언 논란

2009년, 후지이 히로히사는 정권 교체 후 재원 마련에 대해 "어떻게든 될 것"이라는 낙관론을 펼쳐 비판을 받았다.

2011년에는 참의원에 대해 "중의원의 카본 카피(Carbon Copy)라면 필요 없다"는 발언을 하여 논란을 일으켰다.

5. 평가

후지이 히로히사는 재무 관료 출신으로 재정 및 조세 정책에 대한 전문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생당, 일본 신당, 자유당을 거쳐 민주당에 합류했으며, 여러 정당에서 간사장, 대표 대행 등의 요직을 역임했다. 오자와 이치로와 가까운 관계였다.

호소카와하타 내각에서 재무대신을 역임했으며, 하토야마 유키오 내각에서도 재무대신으로 임명되었으나, 건강 문제와 오자와와의 갈등으로 단기간에 사임했다. 이후 간 나오토 내각에서 내각관방 부장관을 역임했다.

5.1. 긍정적 평가

후지이 히로히사는 재무 관료 출신으로, 재정 및 조세 정책에 대한 높은 전문성을 인정받았다. 그는 재무성에서 관료 생활을 시작하여, 이후 입법 활동을 할 때 재정과 조세 제도 문제에 대한 권한을 갖게 되었다.

또한, 민주당 정권 탄생에 기여한 주요 인물 중 한 명으로 평가받는다. 그는 일본 신당 결성에 참여하고, 2009년 총선에서 민주당이 압승을 거두는 데 기여했다.

5.2. 부정적 평가

후지이 히로히사는 엔화 강세 용인, 소비세 인상 등 일부 정책으로 비판을 받았다. 재무대신 시절, 일본 수출업체의 이익을 위해 엔화 약세를 유도하는 외환 시장 개입에 공개적으로 반대했다. 이후 소비세 인상을 지지하는 노다 요시히코와 미네자키 나오키를 부대신으로 임명할 것을 요구하기도 했다.

오자와 이치로는 2009년 12월 후지이에게 정치적 리더십을 보여주지 못했다고 비판했다. 또한 정치 자금 문제, 발언 논란 등으로 도덕성 문제도 제기되었다.

아베 신조 총리의 경제 정책 '아베노믹스'에 대해 "악성 인플레이션을 초래한다"며 강하게 비판했으나, 현실화되지 않아 비판을 받았다.

6. 소속 정당

藤井 裕久일본어는 여러 정당을 거치며 활동했다. 1977년부터 1993년까지 자유민주당 소속으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1993년 자유민주당을 탈당하고 신생당 결성에 참여했다. 이후 신진당을 거쳐 1998년부터 2003년까지 오자와 이치로가 이끄는 자유당에서 활동하며 간사장을 역임했다. 2003년 자유당이 민주당과 합당(민유합병)한 후에는 민주당 소속으로 활동하며, 오카다 가쓰야 대표 아래에서 간사를 맡기도 했다. 2016년 민주당이 민진당으로 당명을 변경한 후에도 당 근현대사 조사회 회장을 맡으며 활동했다.

7. 역대 선거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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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거명당락정당득표수 (득표율)순위정원비고
1977년 참의원 선거당선자유민주당---전국구에서 당선
1983년 참의원 선거당선자유민주당---비례구에서 재선
1986년 중의원 선거낙선자유민주당-차점-구 가나가와 3구
1990년 중의원 선거당선자유민주당---
2005년 중의원 선거낙선민주당-차점-가나가와 14구 및 남칸토 블록에서 차차점으로 낙선
2009년 중의원 선거당선민주당-35위-남칸토 블록에서 당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