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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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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은 1935년 9월 초 플로리다 키스를 강타한 강력한 열대성 저기압이다. 이 허리케인은 바하마 동쪽에서 발생하여 멕시코 만류를 따라 이동하며 급격히 발달했다. 플로리다 키스에 상륙했을 당시 중심 기압이 892hPa로 기록되었으며, 이는 대서양에서 육지에 상륙한 허리케인 중 가장 낮은 기압이었다. 이 허리케인으로 인해 플로리다 키스와 주변 지역에 막대한 피해가 발생했으며, 특히 재향 군인 작업 캠프의 재향 군인 사망 사건과 관련된 논란이 있었다. 복구 작업과 함께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 사업이 진행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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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
기본 정보
허리케인이 플로리다 서부 해안으로 이동하는 기상청 지상 기상 지도
허리케인이 플로리다 서부 해안으로 이동하는 기상청 지상 기상 지도
허리케인 정보
형성일1935년 8월 29일
소멸일1935년 9월 10일
온대 저기압화1935년 9월 6일
최대 풍속160 mph
최저 기압892 hPa (미국에서 기록된 최저 기압, 대서양에서 세 번째로 낮음)
영향
연도1935년
사망자423명
피해액1억 달러
영향 지역바하마
플로리다 키스
남서부 플로리다 및 북부 플로리다 (빅벤드)
조지아주
캐롤라이나
버지니아주
메릴랜드주
델라웨어주
뉴저지주
뉴욕주
뉴잉글랜드
허리케인 시즌
시즌1935년 대서양 허리케인 시즌

2. 발생 및 경로

허리케인으로 인해 플로리다 키스에서 탈선한 열차


1935년 8월 말, 바하마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기상 교란은 서쪽으로 이동하며 발달하여 9월 1일 허리케인으로 격상되었다.[19] 허리케인은 멕시코 만류를 지나며 급격한 강화를 거쳐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으로 발달했고, 9월 2일 저녁 최성기 세력(중심기압 892hPa, 최대풍속 185mph)으로 플로리다 키 중부에 상륙했다.[2][3]

이후 허리케인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플로리다주 서부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약화되었고, 9월 4일 제2등급 세력으로 시더 키 부근에 재상륙했다.[2][3] 미국 남동부 및 미드 애틀랜틱 주를 관통하며 많은 비를 뿌린 뒤[2][3] 버지니아주 케이프 헨리 근처에서 대서양으로 진출했다.[2][3] 대서양에서 잠시 재발달하기도 했으나[19] 곧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고, 9월 10일 그린란드 남부 해상에서 최종 소멸했다.[19]

2. 1. 발생 초기

1935년 8월 말, 바하마 동쪽 혹은 터크스 제도 북동쪽에서 기상 교란 지역이 발생했다. 이 교란 지역은 멕시코 만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으며, 8월 31일까지 바하마 남동부 롱 아일랜드(Long Island) 근처에서 뚜렷한 열대 저기압으로 발달하여 빠르게 강해지기 시작했다. 9월 1일, 안드로스 섬 남쪽 끝 근처에서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1등급 허리케인으로 발달했다.[19]

이후 허리케인은 수온이 높은 멕시코 만류를 지나면서 급격한 강화를 겪으며 시속 10mph의 속도로 미국 플로리다주 남부의 플로리다 키스를 향했다. 허리케인의 눈 크기는 약 14.48km에서 약 16.09km였다. 9월 2일 늦게, 허리케인은 중심 기압 892mbar(측정된 최저 기압), 1분 평균 최대 풍속 185mph의 세기로 최성기를 맞이하며 플로리다 키스 중부의 롱 키(Long Key) 근처(크레이그 키(Craig Key) 포함)에 상륙했다. 이 상륙은 저녁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에 이루어졌으며, 허리케인은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에 해당했다.

한편, 9월 2일 오후, 쿠바 육군 항공대(es: Cuerpo de Aviación del Ejército de Cuba) 소속 레너드 포베이(Leonard Povey) 대위는 허리케인 관측을 위해 커티스 호크 II 복엽기를 조종하여 이륙했다.[5][6][7] 이는 특정 목적으로 항공기를 사용하여 허리케인을 찾으려는 최초의 기록된 시도였다. 당시 미국 기상청은 오후 1시 30분 발표에서 허리케인 중심이 쿠바 이사벨라 데 사과 북쪽 약 약 43.45km, 아바나 동쪽 약 약 233.35km 지점(북위 23° 20', 서경 80° 15')에 위치한다고 밝혔다.[4] 포베이 대위는 보고된 위치 북쪽에서 폭풍을 관찰했으나, 개방형 조종석 항공기였기 때문에 폭풍 속으로 직접 진입하지는 않았다.[5][6][7] 그는 이후 항공기를 이용한 허리케인 정찰을 제안했다.[8]

2. 2. 급격한 발달



1935년 8월 말, 바하마 동쪽 해상에서 발생한 열대 요란은 멕시코 만류를 따라 서쪽으로 이동했다.[19] 8월 31일까지 바하마 남동부의 롱 아일랜드 근처에서 뚜렷한 열대 저기압으로 발달했으며, 9월 1일 안드로스 섬 남쪽 해상을 지날 무렵 허리케인으로 격상되었다.[19]

이후 허리케인은 수온이 높은 멕시코 만류를 지나면서 급격한 강화 과정을 겪었다.[19] 9월 1일부터 9월 2일 사이,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키스를 향해 시속 10mph의 속도로 북서진하며 끊임없이 강력해졌다. 이 과정에서 중심 기압은 892mbar까지 급격히 떨어졌고,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상 최고 등급인 제5등급 허리케인으로 발달했다.[2][3] 당시 허리케인의 눈의 크기는 직경 약 14.48km에서 약 16.09km에 달했다.[2] 9월 2일 저녁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키 중부에 위치한 크레이그 키(Craig Key)와 롱 키(Long Key) 부근에 최대 강도인 1분 평균 풍속 185mph의 세력으로 상륙하며 최성기를 맞이했다.[2][3]

한편, 1935년 9월 2일 오후에는 허리케인을 찾기 위한 최초의 항공 정찰 시도가 있었다. 당시 미국 기상청은 허리케인의 중심이 쿠바 이사벨라 데 사과 북쪽 약 약 43.45km, 아바나 동쪽 약 약 233.35km 해상에 위치하며 서쪽으로 느리게 이동 중이라고 발표했다.[4] 이에 쿠바 육군 항공대(Cuerpo de Aviación del Ejército de Cubaes) 소속의 레너드 포베이(Leonard Povey) 대위는 커티스 호크 II 복엽기를 조종하여 수도 아바나에 대한 위협을 확인하고자 했다. 포베이 대위는 보고된 위치 북쪽에서 허리케인을 관측했지만, 개방형 조종석 항공기의 한계로 인해 폭풍 속으로 직접 비행하지는 않았다.[5][6][7] 그는 이후 항공기를 이용한 허리케인 정찰 임무를 제안했으나[8], 이 아이디어는 1943년 서프라이즈 허리케인 당시 조셉 B. 덕워스(Joseph B. Duckworth) 대령 등이 실제로 허리케인 내부로 비행하기 전까지는 실현되지 못했다.[9]

2. 3. 플로리다 키스 상륙



1935년 8월 말, 바하마 동쪽이자 터크스 제도 북동쪽 해상에서 기상 교란 지역이 발생했다.[19] 이 열대요란은 점차 발달하여 8월 31일에는 바하마 남동부 롱 아일랜드 근처에서 뚜렷한 열대 저기압으로 확인되었다. 이후 빠르게 세력을 키워 9월 1일, 안드로스 섬 남쪽 끝 부근을 지날 때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1등급의 허리케인으로 발달했다.[19]

허리케인은 수온이 높은 멕시코 만류를 지나면서 9월 1일부터 급격한 강화를 시작했다. 시속 약 16.09km의 속도로 서북서진하며 미국 플로리다주 남부의 플로리다 키 산호 군도를 향했다.[19] 이 과정에서 허리케인의 눈은 직경 약 14.48km에서 약 16.09km 크기로 관측되었다.

9월 2일 오후, 허리케인이 쿠바 북쪽 해상에 위치했을 때, 쿠바 육군 항공대의 레너드 포베이 대위가 커티스 호크 II 복엽기를 몰고 수도 아바나에 대한 위협을 확인하기 위해 정찰 비행에 나섰다. 이는 기록상 특정 목적으로 항공기를 이용해 허리케인을 찾으려 한 최초의 시도였으나, 개방형 조종석 항공기의 한계로 폭풍 속으로 직접 진입하지는 못했다.[5][6][7][8]

허리케인은 계속해서 급격히 발달하여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에 도달했고, 9월 2일 저녁 8시 30분에서 9시 30분 사이(현지 시간), 플로리다 키 중부의 롱 키(Long Key)와 크레이그 키(Craig Key) 부근에 상륙했다. 이때 허리케인은 최성기를 맞이하여 중심기압 892hPa, 1분 평균 최대풍속 185mph를 기록했다.[2][3]

플로리다 키를 통과한 허리케인은 북쪽으로 방향을 틀어 플로리다주 서부 해안선을 따라 이동하면서 점차 약화되기 시작했다. 9월 4일, 제2등급 허리케인의 세력으로 플로리다 북서부 시더 키(Cedar Key) 부근에 두 번째로 상륙했다.[2][3] 이후 미드 애틀랜틱 주 지역을 빠르게 통과하며 메릴랜드주 이스턴에 약 42.42cm의 폭우를 뿌리는 등 많은 비를 내렸다.[2][3] 허리케인은 조지아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노스캐롤라이나주, 버지니아주를 차례로 거쳐 케이프 헨리 근처에서 대서양으로 빠져나갔다.[2][3]

대서양으로 진출한 폭풍은 9월 6일 한때 풍속 90mph까지 다시 발달했으나, 이후 약화되어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고, 북대서양으로 계속 이동하다가 9월 10일 그린란드 남부 해상에서 소멸했다.[19]

2. 4. 소멸

플로리다 키에 상륙한 뒤 허리케인은 북쪽으로 전진하며 플로리다주 서부 해안선과 나란하게 이동하면서 약해지기 시작했다. 9월 4일에는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2등급의 세력으로 플로리다 시더 키에 2차 상륙했다.[2][3] 이후 다시 멕시코만으로 잠시 빠져나왔다가 플로리다 팬핸들 지역에 상륙했고, 계속 북동진하며 조지아주, 사우스캐롤라이나주, 노스캐롤라이나주버지니아주를 거치면서 세력이 약화되었다. 버지니아주 케이프 헨리 근처에서 대서양으로 진출했다.[2][3]

9월 6일, 북대서양 해상에서 풍속 145km/h에 도달하며 다시 잠시 강해졌으나, 곧바로 약해지기 시작하여 온대저기압으로 변질되었다.[19] 이 변질된 저기압 잔해는 계속 북동쪽으로 이동하다가 열대성 특성을 완전히 잃고 9월 10일 그린란드 남부에 도달하며 최종 소멸했다.[19]

3. 피해 상황

플로리다 키와 플로리다주 본토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이었던 플로리다 동부 해안 철도의 플로리다 해외 철도 노선은 심각한 피해를 입었다. 이슬라모라다 지역으로 향하던 11량짜리 대피 열차는 강력한 폭풍 해일에 휩쓸려 기관차와 텐더를 제외한 객차들이 탈선했으며,[22][23] 이 철도는 이후 복구되지 않았다.

허리케인은 이슬라모라다를 중심으로 한 어퍼 키스 지역에 막대한 파괴를 남겼다. 거의 모든 구조물이 파괴되었고, 교량과 철도 제방 일부가 유실되어 섬들을 연결하는 교통망이 완전히 두절되었다.[24] 허리케인의 태풍의 눈은 약 13km 폭이었고, 파괴적인 바람은 중심에서 약 24km 반경 내에 집중되었다. 이는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5등급의 위력으로 크레이그 키, 롱 키, 어퍼 마테쿰베, 로어 마테쿰베 키 등에 극심한 피해를 입혔다.

국립 기상청은 허리케인으로 인한 총 사망자 수를 408명으로 추정했다. 플로리다 키에서 떠내려간 시신들은 멀리 플로리다 본토 남서쪽 끝의 플라밍고와 케이프 세이블 해안까지 떠내려가 발견되기도 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찾아온 폭염으로 시신이 빠르게 부패하자, 공중 보건 당국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현장에서 시신을 소각하도록 지시했다.

폭풍 해일로 인해 여러 척의 선박도 피해를 입었다. 덴마크 선박 ''라이세 메르스크''는 전복되어 좌초했고,[20] 미국 유조선 ''푸에블로''는 몰래시스 리프에서 침몰했으며,[20] 여객 증기선 ''딕시''는 프렌치 리프에 좌초되었다가 후에 인양되었다.[19][21]

허리케인은 북상하면서 플로리다 팬핸들과 조지아 남부, 사우스캐롤라이나 해안 지역에도 강풍과 홍수, 농작물 피해를 입혔다.[25][26][27] 이후 세력이 약화되었지만, 버지니아, 메릴랜드, 델라웨어 등 중대서양 연안 주에도 많은 비를 뿌려 상당한 농작물 피해를 발생시켰다.[28]

미국 해안 경비대를 비롯한 연방 및 주 기관들은 생존자 구조와 구호 활동을 벌였다. 파괴된 철도를 대신하여 임시 교량과 페리 착륙장이 건설되었고, 기존 철도 노반과 교량을 활용하여 키웨스트와 본토를 연결하는 오버시스 고속도로가 1938년 3월 29일 완공되었다.

3. 1. 플로리다 키스

플로리다 키와 플로리다주 본토를 연결하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당시 플로리다 동부 해안 철도의 일부인 플로리다 해외 철도 단일 노선뿐이었다.

9월 1일 오전 9시 30분, 기상청 예보에 따라 포트피어스에서 포트마이어스까지 북동부 폭풍 경보가 발령되었다.[12] 이 예보를 받은 미국 해안 경비대 마이애미 기지에서는 비행기를 동원하여 해안을 따라 이동하며 보트 탑승객과 캠핑객에게 메시지 블록을 투하하여 임박한 위험을 알렸다. 일요일 오후에 두 번째 비행이 이루어졌고, 월요일 오전 10시에 비행기는 격납고에 배치되었다.[13][14] 9월 2일(노동절) 오전 3시 30분 예보에서는 해당 기상이변이 "월요일에 플로리다 해협을 통과할 것으로 예상된다"고 예측하며 "플로리다 키스와 경로 상의 선박에 높은 파도와 강풍에 주의"할 것을 경고했다.[15] 오후 1시 30분 예보에서는 키웨스트 지역[12]에 허리케인 경보가 발령되었으며, 이는 북쪽 키라고까지 확대되었다.[16] 오후 2시경, 플로리다 응급 구호 관리청 부청장 프레드 겐트는 상부 키스에 위치한 재향 군인 작업 캠프를 대피시키기 위해 특별 열차를 요청했다.[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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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피 열차는 오후 4시 25분에 마이애미를 출발했다. 그러나 도개교 개방, 선로 위의 장애물, 시야 불량, 그리고 홈스테드 아래에서 기관차를 후진시켜야 하는 필요성(돌아오는 여정을 위해)[18] 때문에 지연되었고, 마침내 오후 8시 20분경에 어퍼 마테쿰베 키의 이스라모라다 역에 도착했다. 이는 갑작스러운 바람의 방향 변화(플로리다 만에서 대서양으로)와 폭풍 해일의 해안 도착과 거의 동시에 일어난 일이었다.[19] 이슬라모라다 근처 어퍼 마테쿰베 키에서, 11량짜리 대피 열차는 파도에 휩쓸린 강력한 폭풍 해일을 만났다. 11량의 객차[22]가 선로에서 휩쓸려 내려갔고, 기관차와 텐더만 똑바로 선 채 선로에 남았다. 놀랍게도, 기차에 타고 있던 모든 사람이 살아남았다.[23] 기관차와 텐더는 몇 달 뒤 마이애미로 바지선을 이용해 옮겨졌다.

허리케인은 오늘날 이슬라모라다 마을을 중심으로 어퍼 키스 지역에 거의 완전한 파괴를 남겼다. 태풍의 눈은 남서쪽으로 몇 마일 떨어진 곳을 지나가면서 로어 마테쿰베에는 약 40분, 롱 키에는 55분(오후 9시 20분~10시 15분) 동안 고요함이 지속되었다. 로어 마테쿰베의 캠프 #3에서는 해일이 고요함이 끝날 무렵 들이닥쳤고 곧이어 바람이 몰아쳤다.[24] 도시의 거의 모든 건축물이 파괴되었고, 일부 교량과 철도 제방이 유실되었다. 섬들을 연결하던 철도, 도로, 페리 보트와 같은 교통망이 끊어지면서 키스는 완전히 고립되었다. 허리케인의 영향 반경은 매우 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슬라모라다 부근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태풍의 눈은 약 약 12.87km였고, 가장 강력한 바람은 중심에서 약 24.14km 내에서 불었다. 이는 1992년의 허리케인 앤드류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앤드류와 마찬가지로 파괴적인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 허리케인이었다. 크레이그 키, 롱 키, 어퍼 마테쿰베 키, 로어 마테쿰베 키가 가장 큰 피해를 입었다.

폭풍이 몰아치는 동안 3척의 선박이 좌초되었다. 덴마크의 모터선 ''라이세 메르스크''는 전복되어 어퍼 마테쿰베 키 근처에서 약 약 6.44km 떨어진 곳에 좌초되었으나 인명 피해는 없었다. 기관실에 물이 차면서 배가 고장났다.[20] 미국 유조선 ''푸에블로''는 9월 2일 오후 2시경 통제력을 잃고 폭풍의 중심부로 밀려나 약 8시간 후 몰래시스 리프에서 침몰했다.[20] 여객 증기선 ''딕시''는 프렌치 리프에서 좌초되었으나, 9월 19일 다시 물에 띄워 뉴욕으로 예인되었으며 사망자는 없었다.[19][21]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구조 작업자들에 따르면 폭풍 발생 사흘째 되던 날 찾아온 폭염 때문에 시신들이 아열대 기온 속에서 부풀어 오르고 갈라졌다고 전해진다. 공중 보건 당국은 사망자를 담은 일반 나무 관들을 여러 곳에 쌓아 불태우라고 명령했다. 국립 기상청은 허리케인으로 인한 사망자 수를 408명으로 추정했다. 시신은 플로리다 본토 남서쪽 끝에 있는 플라밍고와 케이프 세이블까지 멀리 떨어진 곳에서도 수습되었다.

미국 해안 경비대와 기타 연방 및 주 기관은 대피 및 구호 활동을 조직했다. 보트와 비행기는 부상당한 생존자들을 마이애미로 이송했다. 파괴된 플로리다 해외 철도는 재건되지 않았지만, 자재가 도착하는 대로 임시 교량과 페리 착륙장이 건설되었다. 1938년 3월 29일, 키 웨스트와 본토를 연결하는 오버시스 고속도로의 마지막 구간이 완공되었다. 이 새로운 고속도로는 기존 철도의 노반과 살아남은 교량들을 활용하여 건설되었다.

3. 2. 인명 피해

플로리다 키와 플로리다주 본토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당시 플로리다 동부 해안 철도뿐이었다.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 구조를 위해 마이애미에서 키스로 향하던 10량짜리 열차는 강력한 폭풍 해일에 9량이 탈선하고 파도에 휩쓸려갔다. 기관차와 탄수차만 선로에 남았고, 객차 1량은 수개월 후 마이애미로 옮겨졌다. 미국 국립 기상 서비스는 초기 사망자를 408명으로 추산했다. 플로리다 키에서 떠내려간 시신 중 일부는 플로리다주 남서부 해안가에서 발견되기도 했다.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키 동부의 '이사모라다(Islamorada)' 지역에 상륙했다.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건축물이 파괴되었고, 다리와 철도 제방이 무너지면서 섬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허리케인의 영향 반경 자체는 매우 좁았지만(태풍의 눈 직경 약 13km, 매우 강한 바람은 중심에서 24km 내), 상륙 지점 부근은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의 위력으로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이는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보다 작은 규모였음에도 불구하고 엄청난 인명 피해를 낳았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구조 작업자들은 폭염 때문에 시신이 빠르게 부패하여 부풀어 오르고 갈라지는 끔찍한 상황에 직면했다. 공중 보건 당국은 전염병 확산을 막기 위해 시신 이동을 금지하고 현장에서 즉시 화장하거나 매장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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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35년 9월 7일, 스네이크 크릭에서의 허리케인 희생자 화장


참전 용사 캠프의 관리 책임이 있던 연방 응급 구호 행정부(FERA)는 대응 과정에서 비판에 직면했다. FERA 책임자 해리 홉킨스는 9월 5일 기자회견에서 기상청의 경고가 충분하지 못했다며 FERA의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수인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와 육군 공병대의 조지 E. 아이잠스 대령을 플로리다로 보내 사망자 수습 및 조사를 지휘하게 했다.[50][51] 하지만 시신은 키스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빠른 부패로 인해 신원 확인과 처리가 매우 어려웠다. 결국 주지사의 명령에 따라 현장 화장과 매장이 진행되었다.[52] 처음에는 나중에 유해를 발굴하여 알링턴 국립묘지 등으로 이송할 계획이었으나, 보건 당국의 금지령으로 무산되었다.[53]

화장은 9월 7일부터 시작되어 스네이크 크릭, 어퍼 마테쿰베 키, 로어 마테쿰베 키 등지에서 수백 구의 시신이 처리되었다. 금지령 이전에 마이애미로 옮겨진 123구의 시신은 우드론 공원 묘지에 마련된 임시 영안실에서 처리되었으나, 금지령 발효 후 FERA가 구입한 부지에 즉시 매장되었다. 이곳에는 참전 용사 81명, 민간인 9명, 신원 미상 19명 등 총 109구의 시신이 안장되었다.[54][55][56]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는 1936년 3월 1일까지 총 485명(참전 용사 257명, 민간인 228명)의 사망자를 확인했다고 보고했다.[57] 미국 재향 군인부(VA)는 참전 용사 사망자를 260명(사망 확인 121명, 실종 90명, 잠정 확인 45명, 기타 5명 포함)으로 집계했다.[58] 두 기관의 집계를 종합하면 최종 사망자는 약 488명으로 추정되며, 이 중 12명은 "유색인(colored)"으로 기록되었다.[59] 참전 용사 사망자 수의 차이는 시신 식별의 어려움과 캠프 등록 여부에 따른 정의 문제 때문이었다.

최종 사망자 집계
분류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 (1936년 3월)미국 재향 군인부 (VA)최종 추정치
참전 용사257명[57]260명[58]260명
민간인228명[57]-228명
총계485명[57]-488명
참고: 사망자 중 12명은 "유색인"으로 기록되었다.[59] VA 집계 방식과 정의 문제로 참전 용사 수에 약간의 차이가 발생했다.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키웨스트 자택에서 허리케인을 겪은 후 참전 용사 캠프를 방문하고, 진보 성향 잡지 뉴 매시스(The New Masses)에 "누가 참전 용사를 죽였는가?(Who Murdered the Vets?)"라는 제목의 비판적인 글을 기고했다. 그는 FERA 관리들이 플로리다 허리케인의 위험성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참전 용사들의 복지에 무관심한 시스템 때문에 희생되었다고 지적했다.[60] 같은 호 뉴 매시스에는 FERA의 형사 과실을 주장하는 사설과 함께, 러셀 T. 림바흐가 불타는 시신 더미를 그린 "신의 행위(An Act of God)"라는 제목의 신랄한 만평이 실렸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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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워싱턴 포스트는 9월 5일 자 사설 "참전 용사 캠프의 파멸(Doom of the Veterans' Camps)"에서 참전 용사들을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설계된 휴식처"에 머무는 "방랑자, 정신병자 또는 상습적인 문제아"로 폄하하며, 이들이 특별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없다는 당시 보수 진영의 냉담한 시각을 드러냈다.[62] 이는 재난 상황에서도 사회적 약자에 대한 편견과 비인간적인 태도가 존재했음을 보여준다.

3. 3. 재향 군인 피해

카리비 식민지의 파괴

이스라모라다에서 파괴된 교회

허리케인 희생자 수집

"신의 행위", 러셀 T. 림바흐

1935년 9월 8일, 우드론 공원 묘지에서 허리케인 희생자들의 대량 매장


편지

허리케인이 발생하기 전 플로리다 키스에는 세 개의 재향 군인 작업 캠프가 존재했다: 윈들리 키의 #1, 로어 마테컴베 키의 #3과 #5.[29] 1935년 8월 30일 캠프 급여 명부에는 695명의 재향 군인이 등재되어 있었다.[30] 이들은 본토와 키웨스트를 연결하는 오버시스 하이웨이(Overseas Highway) 건설 프로젝트에 고용되었다. 플로리다에 7개, 사우스캐롤라이나에 4개를 포함한 이 캠프들은 해리 L. 홉킨스 연방 비상 구호국(FERA) 국장에 의해 설립되었다. 이는 1934년 가을 워싱턴 D.C.에서 "악화될 위험이 있었고 1월에 실제로 악화된" 부랑 재향 군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조치였다.[31] 수도의 시설은 일자리를 찾는 많은 수의 재향 군인을 수용하기에 부족했다.[32][33]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대통령은 홉킨스와 로버트 페치너 시민 보존 군단(CCC) 국장을 만나 해결책을 논의했고, "남부 캠프 계획을 제안하고 홉킨스가 캠프 설립 및 유지 관리를 위해 마련한 프로그램을 승인했다."[31] 미국 재향 군인부(VA)는 자격 있는 재향 군인을 식별했고,[34] FERA는 주에서 재향 군인을 노동자로 받아들일 경우 건설 프로젝트에 대한 보조금을 제공했다. 주 비상 구호 행정부(State ERA)는 캠프의 일상적인 관리를 담당했지만,[35] 실제로는 FERA의 지배를 많이 받았으며, 행정관을 직접 선택할 정도였다.[36][37] 단 두 개의 주만 참여한 것은 당시 부랑 재향 군인이 "병든" 부랑자나 부랑아라는 대중적인 인상 때문일 수 있었다.[38] 이는 언론이 열정적으로 부추긴 특징이었다. 1935년 8월, ''타임''[39]과 ''뉴욕 타임스''는 선정적인 기사를 게재했다.[40][41] 1935년 8월 15일, 홉킨스는 재향 군인 작업 프로그램 종료와 모든 캠프 폐쇄를 발표했다.[42]

1935년 8월 26일과 27일, 재향 군인 중 한 명인 앨버트 C. 키스는 대통령과 엘리너 루스벨트에게 캠프를 폐쇄하지 말 것을 촉구하는 편지를 썼다. 주간 캠프 신문 ''Key Veteran News''의 편집자였던 키스는 재향 군인들이 부당하게 명예 훼손을 당하고 있으며, 그들의 작업 프로그램은 많은 재향 군인을 민간 생활로 복귀시키는 데 성공적인 사례라고 강조했다. ''The News''는 탬파만 입구에 있는 플로리다주 세인트피터스버그의 캠프 #2인 멀렛 키(Mullet Key)에서도 가끔 보고서를 게재했는데, 이곳은 "유색 인종" 재향 군인 캠프였고 키스의 캠프는 백인 전용이었다. 8월 초, 유색 인종 재향 군인은 플로리다주 게인즈빌의 새로운 캠프 #8로 이동했다.[25]

9월 1일 기상청 예보에 따라 폭풍 경보가 발령되었고, 9월 2일 오전에는 허리케인 경보로 격상되었다.[12][15][16] 오후 2시경, 플로리다 응급 구호 관리청 부청장 프레드 겐트는 상부 키스에 위치한 재향 군인 작업 캠프를 대피시키기 위해 특별 열차를 요청했다.[17] 열차는 오후 4시 25분에 마이애미를 출발했지만, 여러 문제로 지연되어 오후 8시 20분경에야 이슬라모라다 역에 도착했다. 이는 폭풍 해일이 해안에 도달하는 시점과 거의 일치했다.[18][19]

허리케인으로 인한 캠프의 대피 실패에 대해, 9월 5일 기자 회견에서 홉킨스는 기상청의 경고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FERA의 과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사를 위해 조수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를 플로리다로 보냈다.[50] 윌리엄스와 VA 국장 프랭크 T. 하인스의 조수인 조지 E. 아이잠스 대령은 9월 6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아이잠스는 사망자 수습, 신원 확인, 처리에 집중했다.[51] 시신이 키스 전역에 흩어져 있고 빠르게 부패하여 작업은 매우 어려웠다. 주 및 지역 보건 당국은 시신 이동을 금지하고 현장에서 즉시 매장 또는 화장을 요구했으며, 데이비드 숄츠 주지사도 이를 명령했다.[52] 하인스는 나중에 시신을 발굴하여 집이나 알링턴으로 운송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마지못해 동의했다.[53]

화장은 9월 7일 토요일에 시작되어, 스네이크 크릭(Snake Creek)에서 38구의 시신이 함께 화장되었다. 이후 일주일 동안 어퍼 마테컴베 키에서 136구, 로어 마테컴베 키에서 82구가 화장되었다. 작은 키에서는 발견된 장소에서 화장되거나 매장되었으며, 이러한 작업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금지령 이전에 마이애미로 이송된 123구의 시신은 우드론 공원 묘지(Woodlawn Park Cemetery)의 임시 영안실에서 처리되었다. 금지령 발효 후에는 모든 시신을 즉시 매장해야 했고, FERA는 묘지 부지를 구입했다. VA는 9월 8일 완전한 군사 예우를 갖춘 의식을 주관하여 109구의 시신(참전 용사 81명, 민간인 9명, 신원 미상 19명)을 매장했다.[54][55][56]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는 1935년 11월 19일 기준으로 사망자를 423명(참전 용사 259명, 민간인 164명)으로 보고했다. 1936년 3월 1일까지 62구의 시신이 추가로 수습되어 총 사망자는 485명(참전 용사 257명, 민간인 228명)으로 늘어났다.[57] VA는 참전 용사 사망자를 256명(확실한 신원 확인 121명, 실종 90명, 잠정 신원 확인 45명)으로 집계했으며, 각주에 언급된 5명(오인 1명, 주 직원 2명, 무소속 참전 용사 2명)을 포함하면 총 260명으로 추산했다.[58] 이를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의 민간인 수와 합하면 총 사망자는 488명이며, 이 중 12명은 "유색인"으로 기록되었다.[59]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키웨스트 자택에서 허리케인을 겪은 후 참전 용사 캠프를 방문하여, 뉴 매시스(New Masses) 잡지에 "누가 참전 용사를 죽였는가?(Who Murdered the Vets?)"라는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그는 FERA 직원과 가족들이 플로리다 허리케인 시즌의 위험에 익숙하지 않았고, 재향 군인의 복지에 대한 관심 부족이 비극을 초래했다고 지적했다.[60] 같은 호에는 형사 과실 혐의를 제기하는 사설과 러셀 T. 림바흐의 "신의 행위(An Act of God)"라는 제목의 만화가 실렸는데, 불타는 시체를 묘사하며 상황을 풍자했다.[61] 9월 5일 워싱턴 포스트 사설 "참전 용사 캠프의 파멸"은 "캠프는 보너스 행진자(Bonus Marchers)를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설계된 휴식처였으며... 대부분은 방랑자, 정신병자 또는 상습적인 문제아"라는 당시의 부정적인 인식을 드러냈다.[62]

한편, 윌리엄스는 서둘러 조사를 마쳤고, 9월 8일 마이애미에서 열린 희생자 대량 매장식 직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조사 보고서를 공개했다. 아이잠스는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보고서에 서명했다.[63][64] 보고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을 면책하며 재앙을 "신의 섭리"로 규정하고, 인간의 예측 능력 부족으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66] 이러한 성급한 발표와 결론은 비판을 받았다. 대통령 비서관 스티븐 얼리와 매킨타이어는 보고서 공개 시점과 내용에 대해 우려를 표했고,[65][67] 마이애미 목사 협회는 보고서를 "백지 보고서"라고 비난하며 대통령에게 항의했다.[68] 윌리엄스는 이 보고서가 예비 보고서일 뿐이며 최종 보고서는 철저할 것이라고 해명했다.[68]

홉킨스는 FERA 부사무총장 존 앱트에게, 하인스는 VA 조사관 데이비드 W. 케네머에게 각각 조사를 지시했다. 케네머는 앱트가 편향되었다고 생각했고, 앱트는 추가 조사가 불필요하다고 여겨 둘 사이에는 마찰이 있었다.[69] 케네머는 동료 해리 W. 파머와 함께 1935년 10월 30일 방대한 증거 자료를 포함한 상세한 보고서를 완성했다.[70][71][72] 그의 보고서는 윌리엄스의 보고서와 달리 플로리다 비상 구호 행정부 관리자 3명의 과실을 지적했다. 아이잠스 역시 케네머의 조사 결과를 지지했다.[73][74] 그러나 하인스와 홉킨스는 최종 보고서에 합의하지 못했고, 케네머의 조사 결과는 수십 년 동안 은폐되었다.[75] 이는 루스벨트 행정부가 수정 보상 지급법("보너스 법안") 통과와 1936년 대선을 앞두고 정치적 부담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을 시사한다.[76] 케네머는 1936년 4월 하원 청문회에 출석했지만, 논란이 된 자신의 조사 결과에 대해 질문받지 않았다.[77]

1935년 11월 1일, 미국 재향군인회(American Legion)는 자체 보고서를 완료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제출했다. 보고서는 인명 피해의 책임이 "비효율, 무관심, 무지"에 있으며, 일부 관리들이 재향 군인들을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미친 사람" 등으로 폄하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강하게 비판했다. 또한, 만약 재향 군인들이 정말 그런 상태였다면 더욱 세심한 보호가 필요했으며, 정부는 그들을 위험한 환경에 방치할 것이 아니라 병원에 수용했어야 했다고 지적했다.[78] 윌리엄스는 이에 대해 VA와 FERA의 최종 보고서가 곧 제출될 것이라고 대통령에게 보고했다.[79]

3. 4. 기타 지역 피해

플로리다 키와 플로리다주 본토를 잇는 유일한 교통수단은 당시 플로리다 동부 해안 철도뿐이었다. 허리케인이 닥쳤을 때 10량으로 구성된 구조 열차 중 9량이 탈선하여 파도에 휩쓸려 갔으나, 기관차 1량은 파괴되지 않고 남아 몇 달 후 마이애미로 옮겨졌다. 미국 국립 기상 서비스는 이 허리케인으로 408명이 사망했다고 추정했다. 플로리다 키에서 떠내려간 시신 중 일부는 플로리다주 남서부 해안까지 밀려가 발견되기도 했다.

허리케인은 플로리다 키 동부의 이사모라다(Islamorada) 지역에 상륙했다. 이 지역의 거의 모든 건축물이 파괴되었고, 다리, 철도, 제방 등이 완전히 무너졌다. 선박과 기차가 섬에 접근할 수 없게 되면서 이 지역은 완전히 고립되었다. 허리케인의 영향 반경 자체는 매우 좁았음에도 불구하고 이사모라다 부근은 완전히 황폐화되었다. 허리케인의 태풍의 눈 지름은 약 13km였으며, 매우 강력한 바람은 중심에서 반경 24km 이내에서 불었다. 이는 1992년 허리케인 앤드류보다 작은 규모였지만, 사피어-심슨 허리케인 등급 제5등급에 해당하는 강력한 허리케인이었다.

허리케인이 지나간 후 3일 만에 찾아온 폭염으로 인해 플로리다 키에 방치된 시신들이 부풀어 오르고 갈라졌다고 구조 작업자들은 전했다. 이에 공공 보건 당국은 시신을 수습하여 쌓아놓고 모두 소각하도록 지시했다.

4. 기록

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은 북대서양에서 발생한 모든 허리케인 중, 육지에 상륙할 당시의 중심기압이 900hPa 이하로 기록된 유일한 허리케인이다. 당시 중심기압 892hPa를 기록하여, 북대서양 허리케인 중 가장 강력한 세력으로 54년간 기록되었다. 이 기록은 1988년 허리케인 길버트(888hPa)에 의해 경신되었으며, 이후 2005년 허리케인 윌마가 중심기압 882hPa를 기록하며 가장 강력한 북대서양 허리케인으로 기록되었다.

이 허리케인의 최대풍속은 260km/h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노동절 허리케인은 서반구에 상륙한 열대성 저기압 중 가장 강력하며, 육지 상륙 시 공식적으로 기록된 최저 해면 기압은 892hPa로, 이는 풍속이 162kn에서 164kn 사이였음을 의미한다. 느린 이동 속도(7kn)와 매우 작은 최대 풍속 반경(5nmi)의 영향으로 상륙 시 분석된 풍속은 160kn였다. 미국 국립 허리케인 센터의 허리케인 데이터베이스(HURDAT2)에 따르면 1935년 노동절 허리케인은 육지에 상륙한 대서양 허리케인 중 2019년 허리케인 도리안과 함께 가장 강력한 세력을 기록했다. 1969년 허리케인 카밀은 2014년 재분석 결과 상륙 시 풍속이 150kn로 확인되어, 세 번째로 강력한 허리케인으로 기록되었다.[10]

5. 논란과 사회적 영향

허리케인 참사 이후 책임 소재를 둘러싼 논란과 다양한 사회적 반응이 이어졌다. 연방 응급 구호 행정부(FERA)의 해리 홉킨스는 기상청의 경고가 불충분했다며 FERA의 책임을 부인하려 했고[50], 이는 즉각적인 반발을 샀다. 참혹한 현장에서의 시신 수습과 신원 확인 작업은 매우 어려웠으며[51][52], 사망자 수 집계 또한 혼선을 빚었다.[57][58]

정부의 초기 조사는 관련자들을 서둘러 면책하고 재앙의 원인을 '신의 섭리'로 규정하여 비판을 받았다.[66][68] 이후 FERA 관리들의 과실을 지적한 미국 재향 군인부(VA) 조사관 데이비드 W. 케네머의 상세 보고서는[71][72] 정치적 부담 등을 이유로 수십 년간 은폐되었다.[75][76]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뉴 매시스 기고를 통해 정부의 무관심과 관리 부실을 강하게 비판했으며[60], 해당 잡지는 형사 과실 혐의를 제기하는 사설과 풍자 만평을 싣기도 했다.[61] 반면, 워싱턴 포스트 등 일부 언론은 참전 용사들을 부정적으로 묘사하며 정부의 책임을 희석하려는 시각을 드러내기도 했다.[62] 미국 재향군인회는 자체 조사를 통해 정부의 "비효율, 무관심, 무지"가 참사를 불렀다고 결론 내렸다.[78] 이러한 논란과 사회적 파장은 참전 용사 처우 문제와 재난 대응 시스템에 대한 중요한 논의를 촉발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5. 1. 재향 군인 대피 논란

9월 5일 기자 회견에서 연방 응급 구호 행정부(FERA)의 해리 홉킨스는 기상청의 경고가 불충분했기 때문에 FERA에게는 캠프 대피 실패에 대한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조수인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를 플로리다로 보내 FERA 노력을 조정하고 사망자를 조사하도록 했다.[50] 윌리엄스와 미국 재향 군인부(VA)의 프랭크 T. 하인스 행정관의 조수인 조지 E. 아이잠스 대령은 9월 6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아이잠스는 사망자 수습, 신원 확인, 처리에 집중했다.[51]

시신들이 키스 제도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빠르게 부패하면서 작업은 매우 어려웠다. 주 및 지역 보건 당국은 시신 이동을 금지하고 현장에서 즉시 매장 또는 화장을 요구했으며, 숄츠 주지사도 다음 날 이를 명령했다.[52] 하인스는 나중에 주 보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시신을 발굴하여 집이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송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마지못해 동의했다.[53]

화장은 9월 7일 시작되어 스네이크 크릭(Snake Creek)에서 38구가 함께 화장되었다. 다음 주 동안 어퍼 마테쿰베 키(Upper Matecumbe Key)에서 136구, 로어 마테쿰베 키(Lower Matecumbe Key)에서 82구가 각각 다른 장소에서 화장되었다. 플로리다 만의 작은 키들에서는 발견된 장소에서 화장되거나 매장되었다. 이 작업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금지령 이전에 마이애미로 이송된 123구의 시신은 우드론 공원 묘지(Woodlawn Park Cemetery)의 임시 영안실에서 처리되었다. 금지령 발효 후 이 시신들도 즉시 매장되었다. FERA는 묘지 부지를 구입했고, VA는 9월 8일 완전한 군사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주관했다.[54] FERA 부지에는 총 109구(참전 용사 81명, 민간인 9명, 신원 미상 19명)가 매장되었다.[55][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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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는 1935년 11월 19일 기준으로 사망자를 참전 용사 259명, 민간인 164명 등 총 423명으로 보고했다. 1936년 3월 1일까지 62구의 시신이 추가로 수습되어 총 사망자는 485명(참전 용사 257명, 민간인 228명)으로 늘어났다.[57] 참전 용사 사망자 수의 불일치는 시신 식별의 어려움과 캠프 급여 명단에 있는 사람만 계산할 것인지, 아니면 등록되지 않은 다른 참전 용사도 포함할 것인지에 대한 정의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VA는 참전 용사 사망자를 신원 확인 121명, 실종 90명, 잠정 신원 확인 45명으로 총 256명으로 집계했다. 여기에 오인된 1명, 주 직원 2명, 무소속 참전 용사 2명을 포함하여 총 260명으로 추산했다.[58] FERA의 민간인 사망자 수를 더하면 총 사망자는 488명이며, 이 중 12명은 '유색인'으로 기록되었다.[59]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허리케인을 겪은 후 참전 용사 캠프를 방문하여 뉴 매시스(New Masses) 잡지에 "Who Murdered the Vets?|누가 참전 용사를 죽였는가?eng"라는 비판적인 기사를 썼다. 그는 FERA 직원과 가족들이 플로리다 허리케인의 위험에 익숙하지 않았으며, 참전 용사들이 그들의 복지에 무관심해 보이는 시스템의 희생자였다고 시사했다.[60] 같은 호 '뉴 매시스'에는 형사 과실 혐의를 제기하는 사설과 러셀 T. 림바흐의 "An Act of God|신의 행위eng"라는 제목의 불타는 시체 만화가 실렸다.[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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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면, 9월 5일 워싱턴 포스트 사설 "참전 용사 캠프의 파멸"은 참전 용사들을 "방랑자, 정신병자 또는 상습적인 문제아"로 묘사하며, 이 캠프가 "보너스 행진자들을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설계된 휴식처"였다는 당시의 부정적 시각을 드러냈다.[62]

윌리엄스는 조사를 서둘러 9월 8일 마이애미에서 희생자들의 대규모 매장이 열린 날 완료했다.[63] 아이잠스는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음에도 윌리엄스가 작성한 1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 서명했다.[64] 윌리엄스는 그날 밤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고서를 공개했는데, 아이잠스는 이를 부적절하다고 여겼다.[65] 보고서는 관련된 모든 사람을 면책하고 재앙을 '신의 섭리'로 규정하며, 인간의 예지력 부족으로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66] 백악관 비서관 마빈 H. 매킨타이어 등은 보고서 공개에 불쾌감을 표하며, 하인스와 홉킨스에게 '완전하고 철저한' 공동 조사를 지시하고 최종 보고서 제출 전까지 언론 발표를 금지했다.[67] 마이애미 목사 협회가 보고서를 '백지 보고서'라고 비난하자, 윌리엄스는 해당 보고서가 예비 보고서일 뿐이라고 해명했다.[68]

윌리엄스는 FERA의 존 앱트에게, 하인스는 VA의 데이비드 W. 케네머에게 조사를 맡겼다. 케네머는 앱트가 편향되었다고 생각했고, 앱트는 추가 조사가 불필요하다고 여겨 둘 사이에는 마찰이 있었다.[69] 케네머는 다른 VA 조사관 해리 W. 파머와 함께 1935년 10월 30일 방대한 증거 자료를 포함한 보고서를 완성했다.[70][71][72] 이 보고서는 윌리엄스의 결과와 달리 FERA 관리자 3명(행정관 콘라드 반 하이닝, 부행정관 프레드 겐트, 캠프 감독관 레이 셸던)의 과실을 지적했다. 아이잠스도 케네머의 조사 결과를 지지했다.[73][74] 그러나 하인스와 홉킨스는 최종 보고서에 합의하지 못했고, 케네머의 비판적인 조사 결과는 수십 년 동안 은폐되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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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는 후버 행정부 출신인 하인스가 루즈벨트 대통령의 측근인 홉킨스와의 공개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기 때문으로 추측된다. 또한 수정 보상 지급법(Adjusted Compensation Payment Act, '보너스 법안') 표결(1936년 1월 27일 대통령 거부권 무효화 후 통과)과 193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행정부에 부담을 줄 수 있는 사안이었기 때문이다.[76] 케네머는 1936년 4월 하원 청문회에 하인스, 아이잠스, 윌리엄스 및 자신이 비난했던 관리자 3명과 함께 출석했지만, 논란이 된 자신의 조사 결과에 대해 질문받지 않았고 자발적으로 의견을 제시하지도 않았다.[77]

1935년 11월 1일, 미국 재향군인회(The American Legion)는 자체 보고서를 완료하고 루즈벨트 대통령에게 전달했다. 보고서는 인명 피해의 책임이 "비효율, 무관심, 무지"에 있다고 결론지었다.

: ... 인명 피해에 대한 책임은 "비효율, 무관심, 무지"에 있다. 캠프의 비효율성. 책임자의 안전 불감증. 열대성 허리케인의 진짜 위험에 대한 무지. 그리고 이 "I"들을 더하면 "마타콤베에서 살인(Murder at Matecumbeeng)"이 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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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 위원회는 조사 초기에 일부 사람들이 캠프에 있던 참전용사들의 인격을 비추는 경향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몇몇 관계자들은 그들을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미친 사람", "쓰레기" 등으로 언급했다. 그들은 "그들이 받을 만한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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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누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알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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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약 이 사람들이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미친 사람" 등이었다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해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다. 만약 그들이 이 범주에 속한다면, 그들은 정상 이하의 사람들이었고 그렇게 대우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다면,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수용했어야 했지, 소위 "재활 프로그램"이라는 이름으로 공해상의 황무지로 보냈어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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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른 증인들은 그들이 행실이 좋았고, 그들 중 대다수가 캠프에서 군사적 규율을 받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일부 사람들이 책임자의 실제 유죄를 "덮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가치가 없다.[78]

윌리엄스는 대통령을 위한 답변을 준비하여 다음과 같이 진술했다. "이 조사[VA와 FERA에 의해]에서 얻은 사실에 근거한 최종 보고서는 곧 저에게 제출될 것입니다. 그 때 저는 귀하의 정보와 고려를 위해 보고서 사본을 귀하에게 전달할 것입니다."[79]

5. 2. 사회적 논의

허리케인 발생 직후인 9월 5일 열린 기자 회견에서, 연방 응급 구호 행정부(FERA)의 해리 홉킨스는 기상청의 권고가 충분한 경고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캠프의 대피 실패에 FERA의 과실이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FERA 노력을 조정하고 사망자를 조사하기 위해 조수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를 플로리다로 보냈다.[50] 윌리엄스와 미국 재향 군인부(VA) 국장 프랭크 T. 하인스의 조수인 조지 E. 이잠스 대령은 9월 6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이잠스는 사망자의 수습, 신원 확인 및 처리에 집중했다.[51]

그러나 시신 수습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시신들은 키스 제도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빠르게 부패하여 끔찍한 상황을 만들었다. 주 및 지역 보건 당국은 전염병 확산을 우려하여 모든 시신 이동을 금지하고 현장에서 즉시 매장하거나 화장할 것을 요구했다. 데이비드 숄츠 플로리다 주지사는 다음 날 이를 공식 명령했다.[52] 하인스는 나중에 주 보건 당국의 허가를 받아 시신을 발굴하여 고향이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장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마지못해 동의했다.[53]

화장은 9월 7일 토요일에 시작되었다. 스네이크 크릭 옆 수집 지점에서 38구의 시신이 함께 화장되었다. 다음 주 동안 어퍼 마테쿰비 키의 12개 다른 장소에서 136구, 로어 마테쿰비 키의 20개 장소에서 82구가 화장되었다. 플로리다 만의 작은 섬들에서는 시신이 발견된 자리에서 바로 화장되거나 매장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동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123구의 시신이 마이애미로 이송되었다. 이 시신들은 우드론 공원 묘지에 설치된 임시 영안실에서 지문 전문가와 8명의 자원 장의사에 의해 처리되었다. 당초 목적은 신원을 확인하고 매장 또는 운송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나, 금지령 발효로 인해 우드론 묘지에서도 즉시 매장해야 했다. FERA는 묘지 내 부지를 구입했고, VA는 9월 8일 완전한 군사 예우를 갖춘 장례식을 주관했다.[54] FERA 부지에는 총 109구의 시신(참전 용사 81명, 민간인 9명, 신원 미상 19명)이 매장되었다.[55][56]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는 1935년 11월 19일 기준으로 사망자를 423명(참전 용사 259명, 민간인 164명)으로 집계했다. 1936년 3월 1일까지 62구의 시신이 추가로 수습되어 총 사망자는 485명(참전 용사 257명, 민간인 228명)으로 늘어났다.[57] 참전 용사 사망자 수의 불일치는 시신 식별의 어려움, 특히 허리케인 발생 몇 달 후 발견된 시신의 상태 문제와 참전 용사 정의 문제(캠프 급여 명단에 있는 사람만 포함할 것인지, 등록되지 않았지만 참전 용사인 사람도 포함할 것인지) 때문에 발생했다.

미국 재향 군인부(VA)는 참전 용사 사망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사망 확인 121명, 실종 90명, 잠정 사망 확인 45명으로 총 256명이었다. 추가로 5명이 각주에 언급되었는데, 이 중 1명은 기존 등재자의 오인, 2명은 캠프 소속 주 직원, 2명은 폭풍에 휩쓸린 무소속 참전 용사였다. 이를 포함하면 참전 용사 사망자는 총 260명으로 추산된다.[58] 여기에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가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228명을 더하면 총 사망자는 488명에 달하며, 이 중 12명은 "유색인"으로 기록되었다.[59]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키웨스트 자택에서 허리케인을 겪은 후 보트를 타고 참전 용사 캠프를 방문했다. 그는 뉴 매시스 잡지에 "누가 참전 용사를 죽였는가?"라는 제목의 비판적인 기사를 기고했다. 헤밍웨이는 참전 용사들이 플로리다 허리케인 시즌의 위험에 익숙하지 않은 연방 응급 구호 행정부(FERA) 직원들의 관리 아래 있었으며, 그들의 복지에 대한 관심 부족으로 보이는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적했다.[60]

같은 호 뉴 매시스에는 형사 과실 혐의를 제기하는 사설과 함께, 러셀 T. 림바흐가 그린 "신의 행위"라는 제목의 불타는 시체 그림 만평이 실렸다.[61]

반면, 9월 5일 자 워싱턴 포스트 사설 "참전 용사 캠프의 파멸"은 당시 일부 여론을 반영하며 다음과 같이 주장했다.

: 캠프는 보너스 행진자들을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고안된 휴식처였다... 이 참전 용사들 대부분은 부랑자, 정신병자 또는 상습적인 문제아들이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보너스 운동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62]

한편,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는 조사를 서둘러 9월 8일 일요일에 완료했다. 이 날은 마이애미에서 이잠스가 주관한 성대한 추모식과 허리케인 희생자 대량 매장이 열린 날이었다.[63] 이잠스는 조사에 참여할 시간이 없었고 윌리엄스가 심문한 12명의 증인 중 누구에게도 질문하지 않았지만, 대통령에게 제출될 1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 서명했다.[64] 윌리엄스는 추모식이 끝난 직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마이애미 언론에 보고서 내용을 공개했다. 이잠스는 여러 비판적인 전화 메시지를 받고 이 시점이 부적절하다고 생각했다.[65] 보고서는 관련된 모든 사람에게 책임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재앙은 "신의 섭리"였으며 인간의 예측 능력을 벗어났기에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밝혔다.[66] 백악관 비서 스티븐 얼리 역시 보고서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불행한 일"이라고 여겼다. 얼리는 동료 비서관 마빈 H. 매킨타이어에게 보낸 전보에서, 하인스에게 홉킨스와 함께 "완전하고 철저한" 공동 조사를 진행하도록 승인했으며, 하인스는 조사관들에게 "어떤 상황에서도 최종 보고서가 대통령에게 제출될 때까지 언론에 어떤 진술도 하지 말라"고 지시해야 한다고 강조했다.[67] 홉킨스도 자신의 조사관에게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매킨타이어는 1935년 9월 10일, 그레이터 마이애미 목사 협회가 대통령에게 보낸 분노에 찬 편지(보고서를 "백지 보고서"라고 비난)를 FERA에 전달하며 대응을 요청했다. 윌리엄스는 9월 25일 대통령 서명을 위한 답변 초안에서 해당 보고서는 예비 보고서일 뿐이며 "최종적이고 상세한 보고서 ...는 철저하고 면밀할 것"이라고 주장했다.[68]

윌리엄스는 FERA의 부사무총장 존 앱트에게 조사를 마무리하도록 지시했다. 한편, 1935년 9월 11일, VA 국장 하인스는 회의적이고 꼼꼼한 성격의 데이비드 W. 케네머에게 재해 조사를 지시했다. 앱트와 케네머 사이에는 즉각적인 마찰이 있었다. 케네머는 앱트가 편견을 가지고 있다고 믿었고, 앱트는 추가 조사가 불필요하다고 생각했다.[69] 케네머는 다른 VA 조사관 해리 W. 파머와 함께 1935년 10월 30일에 2권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파머는 참전 용사 신원 확인에 관한 세 번째 권을 추가했다. 케네머의 보고서는 2,168페이지 분량의 증거 자료,[70] 118페이지 분량의 조사 결과,[71] 19페이지 분량의 일반적인 의견을 포함했다.[72] 그의 조사 결과는 윌리엄스의 결론과 크게 달랐으며, 플로리다 비상 구호 행정부의 세 관리자(행정관 콘라드 반 하이닝, 부행정관 프레드 겐트, 캠프 감독관 레이 셸던)의 과실을 지적했다. 앱트가 대통령에게 제출할 초안 보고서에 대한 답변에서[73] 이잠스는 케네머의 조사 결과를 지지했다.[74] 그러나 하인스와 홉킨스는 최종 보고서 내용에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케네머의 조사 결과는 수십 년 동안 공개되지 않고 은폐되었다.[75]

하인스는 후버 행정부 시절 임명된 인물이었고, 뉴욕 주지사 시절부터 루스벨트의 후원을 받아온 홉킨스와의 공개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이러한 내부 갈등은 수정 보상 지급법(일명 "보너스 법안") 표결을 앞둔 루스벨트 행정부에 부담이 되었을 것이다(이 법안은 1936년 1월 27일 대통령의 거부권에도 불구하고 통과되었다).[76] 또한 1936년은 대통령 선거가 있는 해였다. 케네머는 1936년 4월 하원 청문회에 하인스, 이잠스, 윌리엄스 및 자신의 보고서에서 비판했던 세 명의 관리와 함께 출석했지만, 논란이 된 조사 결과에 대해 질문받지 않았고 스스로 의견을 밝히지도 않았다.[77]

1935년 11월 1일, 미국 재향군인회는 허리케인에 대한 자체 보고서를 완료하고, 전국 사령관 레이 머피가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사본을 보냈다. 보고서는 다음과 같이 결론 내렸다.

: ... 인명 피해에 대한 책임은 "비효율, 무관심, 무지"에 있다. 캠프 운영의 비효율성, 책임자들의 안전 불감증, 열대성 허리케인의 실제 위험에 대한 무지. 이 세 가지 '무(無)'가 합쳐져 마테쿰비에서의 살인을 초래했다 .

: [위원회는] 조사 초기에 일부 사람들이 캠프에 있던 참전 용사들의 인격을 폄하하려는 경향이 있음을 발견했다. 몇몇 관계자들은 그들을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미치광이", "쓰레기" 등으로 지칭했다. 그들은 참전 용사들이 "마땅히 받아야 할 것을 받았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 누가 그런 결론에 도달할 수 있었는지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 만약 이들이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미치광이" 등이었다면, 그들을 보호하기 위한 모든 예방 조치를 취하는 것이 더욱 필요했다. 만약 그들이 이 범주에 속했다면, 그들은 정상 이하의 사람들이었고 그에 맞게 대우받았어야 했다. 만약 그들이 스스로를 돌볼 수 없었다면, 정부는 그들을 병원에 수용했어야지, 소위 "재활 프로그램"이라는 명목으로 외딴 섬으로 보내서는 안 되었다.

: 다른 증인들은 그들이 품행이 단정했으며, 대다수는 캠프에서 군대식 규율을 받는 것을 선호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그러나 이러한 관찰은 일부 사람들이 책임자들의 실제 죄책감을 "덮으려" 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 외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78]

윌리엄스는 대통령을 대신하여 답변을 준비하며 다음과 같이 말했다. "이 조사[VA와 FERA에 의해 수행된]에서 얻은 사실에 근거한 최종 보고서는 곧 저에게 제출될 것입니다. 그 때 귀하의 정보와 검토를 위해 보고서 사본을 전달해 드리겠습니다."[79]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케네머의 상세한 조사 결과가 포함된 최종 보고서는 결국 공개되지 않았다.

6. 복구 및 기념



연방 비상 구호 행정처(FERA)의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는 조사를 서둘러 9월 8일 일요일에 마무리했다. 이날은 마이애미에서 미국 재향 군인부(VA)의 조지 E. 아이잠스 대령이 주관한 허리케인 희생자들의 대규모 장례식이 열린 날이기도 했다.[63] 아이잠스는 조사에 참여하지 않았고 윌리엄스가 심문한 증인들에게 질문할 기회도 없었으나, 대통령에게 제출될 15페이지 분량의 보고서에는 서명했다.[64] 윌리엄스는 장례식 직후 라디오 방송을 통해 보고서 내용을 공개했는데, 이는 부적절한 시점이라는 비판을 받았다.[65] 보고서는 관련된 모든 이들에게 면죄부를 주며 재앙의 원인을 예측 불가능한 신의 섭리로 돌렸고, 이로 인해 예방 조치를 취할 수 없었다고 결론지었다.[66]

스티븐 얼리 대통령 비서관은 보고서에 대한 언론의 관심이 "불행한 일"이라며 우려했고, 동료 비서관 마빈 H. 매킨타이어에게 보낸 전보에서 프랭크 T. 하인스 VA 국장과 해리 홉킨스 FERA 국장에게 "완전하고 철저한" 공동 조사를 지시했으며, 최종 보고서 제출 전까지 언론 발표를 금지하라고 명시했다.[67] 홉킨스 역시 자신의 조사관에게 비슷한 지시를 내렸다. 그러나 윌리엄스의 초기 보고서는 거센 비판에 직면했다. 1935년 9월 10일, 그레이터 마이애미 목사 협회는 대통령에게 보낸 편지에서 이를 "백지 보고서"라고 비난했다. 매킨타이어는 이 편지를 FERA로 전달했고, 윌리엄스는 9월 25일 대통령에게 보내는 답변 초안에서 해당 보고서는 예비 보고서일 뿐이며 최종 보고서는 철저할 것이라고 해명했다.[68]

윌리엄스는 FERA 부사무총장 존 앱트에게 조사를 맡겼고, 하인스는 1935년 9월 11일 데이비드 W. 케네머에게 VA 측 조사를 지시했다. 앱트와 케네머 사이에는 즉각적인 갈등이 발생했다. 케네머는 앱트가 편견을 가졌다고 생각했고, 앱트는 추가 조사가 불필요하다고 여겼다.[69] 케네머는 동료 조사관 해리 W. 파머와 함께 1935년 10월 30일 방대한 분량의 보고서를 완성했다. 이 보고서는 2,168페이지의 증거 자료,[70] 118페이지의 조사 결과,[71] 19페이지의 일반 의견을 포함했다.[72] 케네머의 조사 결과는 윌리엄스의 결론과 크게 달랐으며, 플로리다 비상 구호 행정부의 관리자 3명(콘라드 반 하이닝, 프레드 겐트, 레이 셸던)에게 과실 책임을 물었다. 아이잠스는 앱트가 대통령에게 제출할 초안 보고서에 대해 케네머의 입장을 지지했다.[74] 그러나 하인스와 홉킨스는 최종 보고서 내용에 합의하지 못했고, 결국 케네머의 조사 결과는 수십 년간 은폐되었다.[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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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인스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측근인 홉킨스와의 공개적인 충돌을 피하려 했을 가능성이 있다. 하인스는 전임 후버 행정부 시절 임명된 인물이었다. 또한, 수정 보상 지급법(보너스 법안) 표결과 1936년 대통령 선거를 앞둔 시점에서 행정부 내 불화가 드러나는 것은 루스벨트 행정부에 정치적 부담이 될 수 있었다.[76] 케네머는 1936년 4월 하원 청문회에 출석했지만, 논란이 된 자신의 조사 결과에 대해 질문받지 않았고 스스로 밝히지도 않았다.[77]

한편, 미국 재향군인회는 1935년 11월 1일 자체 조사 보고서를 완료하고 루스벨트 대통령에게 사본을 보냈다. 보고서는 인명 피해의 책임이 "비효율, 무관심, 무지"에 있다고 결론지으며, 일부 관리들이 희생된 참전용사들을 "부랑자", "알코올 중독자" 등으로 폄하하며 책임을 회피하려 한다고 비판했다. 또한, 만약 참전용사들이 정말 그러한 상태였다면 더욱 세심한 보호 조치가 필요했다고 지적했다.[78]

윌리엄스는 이 보고서에 대한 대통령의 답변을 준비하며, VA와 FERA의 최종 합동 보고서가 곧 제출될 것이라고 언급했다.[79] 그러나 앞서 언급했듯이, 이 합동 보고서는 케네머의 조사 결과를 반영하지 못한 채 발표되지 못했다.

6. 1. 복구 작업

9월 4일 수요일, 기상 상황이 나아지면서 생존자들을 대피시키는 작업이 시작되었다. 구조 작업에는 미국 적십자사, 플로리다 주 방위군, 연방 비상 구호 행정처(FERA), 사업 진흥국(WPA), 시민 보존 군단(CCC), 미국 해안 경비대, 미국 재향 군인회[43], 해외 참전 용사, 데이드 카운티 장의사 협회, 데이드 카운티 의학 협회, 시 및 카운티 관계자들, 그리고 작가 어니스트 헤밍웨이를 포함한 수많은 개인이 참여했다. 작전 본부는 플랜테이션 키의 스네이크 크릭 해안 근처에 마련되었다. 크릭 위의 다리가 파괴되어 이곳이 고속도로로 접근 가능한 최남단 지점이었다. 9월 5일, 모든 공공 및 민간 기관이 참여한 회의에서 데이비드 숄츠 주지사는 몬로 및 데이드 카운티 보안관에게 복구 작업의 전반적인 통제권을 부여했다.[44]

1935년 9월 4일 저녁, 재향군인 관리국장 프랭크 T. 하인스 준장은 뉴욕주 하이드 파크에 있는 대통령으로부터 그의 보도 비서 스티븐 얼리를 통해 긴급 지시를 받았다. 플로리다 참사 소식에 매우 괴로워한 대통령은 미국 재향 군인부(VA)에 세 가지 임무를 부여했다.[45]

# 허리케인으로 부상당한 사람들을 위해 FERA와 협력하여 가능한 모든 지원을 제공할 것.

# 시신을 정중하게 수습하여 유족에게 송환하고, 요청이 없는 시신은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할 것.

# FERA 국장 해리 홉킨스가 이끄는 조직과 함께 신중한 합동 조사를 실시하여 행정부 내에 과실이 있었는지 여부를 판단할 것.

하인스의 플로리다 대표에게 상황 통제권이 주어졌고, 다른 모든 기관은 협조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대통령의 첫 번째 지시는 즉시 실행되었다. 마이애미 지역 병원에서 124명의 부상당한 재향군인이 치료를 받았고, 이 중 9명이 사망했으며 56명은 나중에 재향군인 의료 시설로 옮겨졌다.[46] 부상당하지 않은 재향군인들은 잭슨빌의 캠프 포스터로 이송되어 CCC 편입 여부를 평가받았다. 편입을 거부하거나 고용 불가 판정을 받은 이들에게는 퇴직금과 귀향 표가 제공되었다.[47] 모든 FERA 임시 캠프는 1935년 11월에 문을 닫았고,[48] 1935년 12월에는 FERA 자체가 홉킨스가 이끄는 새로운 WPA에 흡수되었다.[49]

그러나 대통령의 두 번째와 세 번째 지시는 곧 난관에 부딪혔다. 9월 5일 기자 회견에서 홉킨스는 기상청의 권고가 충분한 경고를 제공하지 못했기 때문에 캠프 대피 실패에 대한 FERA의 과실은 없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FERA의 구호 활동을 조정하고 사망자 조사를 위해 자신의 조수인 오브리 윌리스 윌리엄스를 플로리다로 보냈다.[50] 윌리엄스와 하인스의 조수인 조지 E. 이잠스 대령은 9월 6일 마이애미에 도착했다. 이잠스는 사망자 수습, 신원 확인, 적절한 처리에 집중했다.[51] 하지만 이는 매우 어려운 작업임이 드러났다. 시신들은 키스 제도 전역에 흩어져 있었고, 빠른 부패로 인해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다. 주 및 지역 보건 당국은 전염병 확산을 우려하여 모든 시신 이동을 금지하고 즉시 현장에서 매장하거나 화장할 것을 요구했다. 다음 날 숄츠 주지사는 이를 공식 명령했다.[52] 하인스는 나중에 주 보건 당국의 허가를 받아 매장된 시신을 발굴하여 유족에게 보내거나 알링턴 국립묘지로 이송할 수 있다는 조건 하에 마지못해 동의했다.[53]

화장은 9월 7일 토요일부터 시작되었다. 스네이크 크릭 옆 수습 지점에서 38구의 시신이 함께 화장되었다. 다음 주 동안 어퍼 마테컴비 키에서는 12곳에서 136구, 로어 마테컴비 키에서는 20곳에서 82구가 화장되었다. 플로리다 만의 수많은 작은 키에서는 시신이 발견된 자리에서 바로 화장되거나 매장되었다. 이러한 작업은 11월까지 계속되었다. 이동 금지령이 내려지기 전에 123구의 시신이 마이애미로 이송되었다. 이 시신들은 우드론 공원 묘지의 텐트 아래 임시 영안실에서 처리되었으며, 지문 전문가와 8명의 자원 장의사가 투입되었다. 원래 목적은 유해 신원을 확인하고 매장 또는 운송을 준비하는 것이었으나, 금지령 발효로 우드론 묘지에서도 모든 시신을 즉시 매장해야 했다. FERA는 묘지 내 섹션 2A에 부지를 구입했고, VA는 9월 8일 완전한 군사 예우를 갖춘 장례 의식을 주관했다.[54] FERA 부지에는 총 109구의 시신이 매장되었는데, 재향군인 81명, 민간인 9명, 신원 미상 19명이었다.[55][56]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는 1935년 11월 19일 기준으로 사망자 수를 423명(재향군인 259명, 민간인 164명)으로 보고했다. 1936년 3월 1일까지 62구의 시신이 추가로 수습되어 총 사망자는 485명(재향군인 257명, 민간인 228명)으로 늘어났다.[57] 재향군인 사망자 수 집계에 불일치가 있었던 이유는 시신 식별의 어려움(특히 허리케인 발생 몇 달 후 발견된 경우)과 재향군인 정의 문제(캠프 급여 명단에 있는 사람만 포함할 것인지, 등록되지 않았지만 재향군인인 다른 사람들도 포함할 것인지) 때문이었다.

미국 재향 군인부(VA)는 재향군인 사망자 명단을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 확실한 신원 확인: 121명
  • 실종: 90명
  • 잠정 신원 확인: 45명
  • VA 집계 총계: 256명

이 외에 각주에서 5명이 추가로 언급되었는데, 한 명은 기존 등재자의 오인, 두 명은 캠프 근무 주 직원, 두 명은 폭풍에 휩쓸린 무소속 재향군인이었다. 이를 포함하면 재향군인 사망자는 총 260명으로 추산된다.[58] 여기에 플로리다 응급 구호 행정부가 집계한 민간인 사망자 228명을 더하면, 총 사망자는 488명에 달하며, 이 중 12명은 "유색인(colored)"으로 기록되었다.[59]

어니스트 헤밍웨이는 키웨스트 자택에서 허리케인을 겪은 후, 직접 보트를 타고 재향군인 캠프를 방문했다. 그는 이후 진보 성향 잡지 뉴 매시스(The New Masses)에 "누가 재향군인을 죽였는가?(Who Murdered the Vets?)"라는 제목의 비판적인 기사를 기고했다. 헤밍웨이는 FERA 직원들과 그 가족들이 플로리다 허리케인 시즌의 위험을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으며, 재향군인들의 복지에 무관심해 보이는 시스템의 희생양이 되었다고 지적했다.[60]

같은 호 "뉴 매시스"에는 형사 과실 혐의를 제기하는 사설과 함께, 러셀 T. 림바흐가 그린 "신의 행위(An Act of God)"라는 제목의 만화가 실렸고, 이 만화는 불타는 시체 더미를 묘사하며 정부의 책임을 비판적으로 풍자했다.[61]

반면, 9월 5일 자 워싱턴 포스트 사설 "재향군인 캠프의 파멸(Doom of the Veterans' Camps)"은 당시 일부에서 퍼져 있던 재향군인들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사설은 "캠프는 보너스 행진자(Bonus Marchers)들을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뜨려 놓기 위해 고안된 휴식처였다... 이 재향군인들 중 다수는 부랑자, 정신 이상자, 또는 상습적인 문제아들이다... 신체적 또는 정신적 장애가 없는 사람들은 보너스 운동에 대한 특별한 보상을 받을 자격이 전혀 없다"고 주장했다.[62]

6. 2. 기념 사업

U.S. 1 고속도로 동쪽, 이슬라모라다의 82마일 지점 부근에 허리케인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비가 세워졌다. 이 기념비는 연방 예술 사업의 플로리다 지부에서 설계하고, 노동 진흥청(WPA)이 플로리다 키스 지역의 석회암(키스톤)을 사용하여 건설했다.[80]

1937년 11월 14일, 수백 명이 참석한 가운데 기념비 헌정식이 열렸다.[81] 루스벨트 대통령은 전보를 통해 "진심 어린 애도"를 표하며 개인적인 슬픔을 나타냈다.[81] 환영 위원회에는 키웨스트 시장 윌라드 M. 올버리 등이 참여했지만,[82] 재향군인 관리국(VA) 국장 프랭크 T. 하인스는 연설 초청을 거절하며 프로젝트에 대해 비협조적인 태도를 보였다. 그는 기념비가 "불행한 재앙을 지속적으로 상기시키는 역할"을 할 것이라며 우려를 표하기도 했다.[83][84]

기념비의 프리즈에는 바람에 휘는 야자과 나무와 파도가 묘사되어 있다. 앞쪽에는 키스 지역의 세라믹-타일 벽화가 있는데, 이는 임시 화장터에서 수습된 희생자들의 유골 일부를 안치한 석조 지하 묘지를 덮고 있다.[81] 그러나 이 기념비에는 희생자들의 이름이 전혀 새겨져 있지 않다. 약 228명의 민간인 사망자 중 신원이 확인되어 개별적으로 묻힌 55명을 제외하고,[59] 신원이 확인되지 않거나 화장된 170명의 참전용사들의 이름도 누락되었다. 이는 참전용사의 법적 권리[85]이자, 가족이 인수하지 않은 모든 참전용사 유해에 대해 완전한 군 예우를 갖춰 매장하라는 루스벨트 대통령의 지시에도 불구하고[91] VA가 이들을 기리지 않기로 결정했기 때문이다.

이 기념비는 1995년 3월 16일 미국 국립 역사 유적지에 등재되었다.[86] 기념비 앞에 설치된 명판에는 허리케인 피해 상황, 참전용사와 시민들의 희생, 기념비 건립 과정과 의미, 그리고 지역 참전용사, 생존자, 후손들에 의해 관리되고 있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87] 지역 주민들은 매년 노동절과 현충일에 이곳에서 추모 행사를 열어 희생자들을 기리고 있다.[88]

한편, 마이애미의 우드론 공원 묘지에도 허리케인 희생자들을 위한 기념비가 있다. 1936년 1월, 미국 재향군인회 마이애미 지부(하비 W. 시즈 포스트 제29지부)가 연방긴급구호국(FERA)으로부터 부지 소유권을 이전받아[89][90] 희생된 참전용사들을 매장하고 기념비를 세웠다. 기념비에는 "1935년 허리케인으로 플로리다 키스에서 목숨을 잃은 우리 전우들을 기억하며... 우리 잊지 맙시다"라는 비문이 새겨져 있다.[91]

하지만 이곳 역시 이슬라모라다 기념비처럼 희생자들의 이름이 없고, 신원이 확인된 참전용사 81명의 개별 묘지도 표시되지 않았다. VA는 신원 미상 유해를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하라는 대통령의 지시를 또다시 이행하지 않았다. 이후 가족들의 노력으로 4구의 유해가 발굴되어 이장되거나 묘지가 표시되었고, 묘지 관리자의 노력으로 71개의 묘지에 VA 표석이 설치되었다 (2024년 기준 1개 미표시).[92]

폭풍으로 사망한 참전용사 중 유일하게 알링턴 국립묘지에 안장된 사례는 다니엘 C. 메인이다.[93] 그는 캠프 의료 책임자였으며, 그의 시신은 생존자들에 의해 신속히 수습되어 금수 조치 이전에 가족에게 보내졌기 때문에 특별히 알링턴에 묻힐 수 있었다.[94][95]

2006년 2월 27일, 미국 지명 위원회는 상부 키 역사 보존 협회 회장인 제리 윌킨슨의 제안을 받아들여, 과거 캠프 #3이 위치했던 로어 마테컴베 키 남쪽의 작은 섬을 희생된 참전용사들을 기리기 위해 '''베테랑스 키'''(Veterans Key)로 명명했다.[96] 현재 이 섬에는 당시 다리 건설 프로젝트의 흔적인 콘크리트 말뚝 몇 개만 남아 있다.[97]

사우스 플로리다 국립 묘지에 있는 1935년 허리케인으로 사망한 퇴역 군인 기념 표지석


수십 년간 참전용사들의 묘지 표지석 설치는 더디게 진행되었다. 특히 2009년 VA 규정이 변경되어 묘비 신청 자격이 친족으로 제한되면서,[98] 연고가 없거나 오래전에 사망한 참전용사들의 묘지를 표시하는 데 큰 어려움이 생겼다.[99] 관련 단체들의 반대와 법안 발의 노력에도 불구하고[100] 규정 개정은 지지부진했다. 2016년 규정이 일부 개정되어 일반 묘비 신청 자격은 완화되었으나, 유해가 없어 기념 표지석만 세우는 경우는 여전히 친족만 신청 가능하도록 제한되었다.[101]

이에 대한 법적 소송이 제기되었고,[102] 2022년 미국 퇴역 군인 청구 항소 법원은 기념 표지석 신청 제한이 부당하다고 판결했다. VA는 연방 순회 항소 법원에 항소했으나 2024년 자진 철회했다.[103] 마침내 2023년, 노동절 허리케인으로 사망한 참전용사 166명을 기리는 기념 표지석이 사우스 플로리다 국립 묘지에 설치되었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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