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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시리아 쿠데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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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66년 시리아 쿠데타는 1963년 쿠데타 이후 바트당 내 권력 투쟁의 결과로 발생했다. 나세르주의 세력과 바트당 간 갈등, 군대 내 나세르주의자 숙청, 아민 알하피즈의 사회주의 정책 추진 등이 배경이 되었다. 1966년 2월, 살라 자디드가 쿠데타를 일으켜 아민 알하피즈를 축출하고, 미셸 아플라크 지지 세력을 제거했다. 이로 인해 바트당은 시리아와 이라크 파벌로 분열되었고, 살라 자디드 정부는 급진적인 정책을 추진하며 국가 테러와 전체주의적 조치를 강화했다. 쿠데타 이후, 드루즈 장교 살림 하툼의 반쿠데타 시도가 실패하고, 신바트주의가 등장하며 바트당의 이념적 변환이 이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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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6년 시리아 쿠데타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1966년 시리아 쿠데타
분쟁의 일부아랍 냉전
시리아 아랍군 참모총장 살라흐 자디드 장군 (쿠데타 주도)
날짜1966년 2월 21일~23일
장소시리아
결과아플라크주의자 축출
살라흐 자디드의 신바트주의 정부 수립
쿠데타 시도 실패 후 살림 하툼 처형
바트주의 내 분열 시작; 시리아 주도와 이라크 주도 파벌 간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흐 알딘 비타르에게 결석 재판으로 사형 선고
살라흐 자디드와 하페즈 알아사드 간 권력 투쟁
상태종료
교전 세력
교전 세력 1"[[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바트당 민족 지도부
시리아 정부
교전 세력 2"[[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
지휘관
지휘관 1"[[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미셸 아플라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민족 지도부의 주요 인물)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무니프 알라자즈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민족 지도부 사무총장)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 (시리아 총리)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아민 알하피즈 (시리아 대통령)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무함마드 움란 (국방부 장관)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시블리 알아이사미 (시리아 부통령)
지휘관 2"[[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살라흐 자디드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 지역 사령부 사무차장)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하페즈 알아사드 소장 (시리아 공군 사령관)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살림 하툼 소령 (시리아군 사령관)
"[[파일:Flag of the Ba'ath Party.svg|23px]]" 무스타파 틀라스 중령 (시리아군 사령관)
사상자
사망자400명 사망

2. 배경

1963년 시리아 쿠데타바트당이 정권을 잡은 후, 시리아가말 압델 나세르를 지지하는 나세르주의자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나세르주의자들은 아랍 연합 공화국의 재건을 원했지만, 바트당은 시리아를 단독 통치할 수 있는 느슨한 연방을 원하며 이에 회의적이었다.

나세르주의자들은 연합에 찬성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고,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자 대다수가 나세르를 지지했기에 바트당은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트당은 대중의 지지 대신 군부 내 권력 강화를 택했고, 수백 명의 나세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군에서 숙청되었다. 새로 임명된 바트주의 장교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거나 낮은 사회 계층 출신으로, "도시 수니파 중상류층" 장교단을 대체하여 수니파의 군 통제권을 약화시켰다.

시위 진압으로 바트당의 정당성은 약화되었고, 아민 알하피즈가 군사 독재자로 등장했다. 1965년, 아민 알하피즈는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산업과 민간 분야의 많은 부분을 국유화하고 중앙통제형 계획 경제를 수립했다.[16]

바트당의 정치 권력에서 밀려난 상류층 엘리트들은 사회주의 정책에 위협을 느꼈다.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의 세속주의에, 아크람 알호라니와 시리아 공산당은 바트당의 일당제에 반대했다. 다수의 수니파 무슬림들은 바트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소외감을 느꼈고, 알라위파, 드루즈, 이스마일파 등 소수 집단과 시골 출신이 주도한 바트당은 민족적 차이에 따른 도시와 농촌 간 갈등을 야기했다. 바트당은 도시의 반(反)바트주의 정서에 위협을 받았지만, 조직적이지 못하고 분열된 반대 세력 덕분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1963년 시리아 쿠데타 이후, 바트당 내에서는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 아플라크 지지자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와 느슨한 연합,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 시행, 언론의 자유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당제 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제6차 전국 바트당 대회에서 군사위원회와 그 지지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새로운 형태의 바트주의를 만들었다. 이들은 아랍 세계의 통일보다는 "한 국가의 혁명"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주의 혁명을 강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들은 노동 착취를 끝내고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경제 전체를 국가 계획에 따르게 하고, 경제와 대외 무역의 대부분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64년 하마 폭동 이후, 급진파가 잠시 물러나고 아플라크 지지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비타르는 국유화 과정을 중단하고 시민의 자유와 사유 재산을 존중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변화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상류층은 계속해서 자본을 해외로 유출했다. 바트당 좌파는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 없이는 부르주아 계급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바트당 전국 지도부를 장악한 온건파와 시리아 지역 지도부를 장악한 급진파 사이의 권력 투쟁은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이어졌다.[3]

2. 1. 권력 강화

1963년 시리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바트당나세르주의자들과 권력 투쟁을 벌였다. 나세르주의자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 시기(1958~1961) 존재했던 아랍 연합 공화국의 재건을 원했지만, 바트당은 이에 회의적이었다. 바트당은 자신들이 시리아를 단독 통치할 수 있는 느슨한 연방을 원했다.

나세르주의자들은 연합에 찬성하는 대규모 시위를 벌였다.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자 대다수가 나세르를 지지했기 때문에 바트당은 대응에 어려움을 겪었다.

바트당은 대중의 지지 대신 군부 내 권력 강화를 택했다. 수백 명의 나세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군에서 숙청되었고, 바트주의자들이 고위직을 차지했다. 새로 임명된 바트주의 장교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거나 낮은 사회 계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도시 수니파 중상류층" 장교단을 대체했고, "지도적인 소수 장교의 친족"인 시골 출신 장교단으로 바뀌었다. 이는 수니파의 군 통제권을 약화시켰다.

시위 진압으로 바트당의 정당성은 약화되었고, 아민 알하피즈가 군사 독재자로 등장했다. 1965년, 아민 알하피즈는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산업과 민간 분야의 많은 부분을 국유화하고 중앙통제형 계획 경제를 수립했다.[16]

바트당의 정치 권력에서 밀려난 상류층 엘리트들은 사회주의 정책에 위협을 느꼈다.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의 세속주의에 반발했고, 아크람 알호라니와 시리아 공산당은 바트당의 일당제에 반대했다.

대다수 수니파 무슬림들은 바트주의자가 아니었기에 소외감을 느꼈다. 바트당은 알라위파, 드루즈, 이스마일파 등 소수 집단과 시골 출신이 주도하여 민족적 차이에 따른 도시와 농촌 간 갈등을 야기했다. 바트당은 도시의 반(反)바트주의 정서에 위협을 받았지만, 조직적이지 못하고 분열된 반대 세력 덕분에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다.

2. 2. 아플라크 지지자들과의 충돌

1963년 시리아 쿠데타 이후, 바트당 내에서는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를 중심으로 하는 온건파와 군사위원회를 중심으로 하는 급진파 간의 갈등이 심화되었다.[3] 아플라크 지지자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이집트와 느슨한 연합을 추구하고,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시행하며, 언론의 자유사상의 자유를 포함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당제 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제6차 전국 바트당 대회에서 군사위원회와 그 지지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새로운 형태의 바트주의를 만들었다. 이들은 아랍 세계의 통일보다는 "한 국가의 혁명"에 중점을 두었고, 사회주의 혁명을 강조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이들은 노동 착취를 끝내고 자본주의를 없애기 위해 경제 전체를 국가 계획에 따르게 하고, 경제와 대외 무역의 대부분을 국유화하는 정책을 추진했다.

1964년 하마 폭동 이후, 급진파가 잠시 물러나고 아플라크 지지자들이 다시 권력을 잡았다. 비타르는 국유화 과정을 중단하고 시민의 자유와 사유 재산을 존중하는 새로운 정부를 구성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 변화는 대중의 지지를 얻지 못했고, 상류층은 계속해서 자본을 해외로 유출했다. 바트당 좌파는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 없이는 부르주아 계급을 이길 수 없다고 주장했다.

결국, 바트당 전국 지도부를 장악한 온건파와 시리아 지역 지도부를 장악한 급진파 사이의 권력 투쟁은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이어졌다.[3]

3. 권력 투쟁

1963년 시리아 쿠데타로 정권을 잡은 후, 혁명사령부 국가평의회(National Council for Revolutionary Command) 내에서 나세르주의자들과 바트당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1] 나세르주의자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 임기 동안 1958년부터 1961년까지 존속했던 시리아와 이집트의 연합체인 아랍 연합 공화국 재건을 목표로 했다. 그러나 바트주의자들은 나세르와의 새로운 연합에 회의적이었고, 바트당이 간섭 없이 시리아를 통치할 수 있는 느슨한 연방을 원했다.[1] 나세르주의자들은 연합에 찬성하는 대규모 거리 시위를 일으켰다.[2] 시리아 아랍 민족주의자들 대다수는 바트주의 지지자가 아니라 일반적으로 나세르를 지지하는 나세르주의자들이었기 때문에, 바트당은 이 문제에 어떻게 대응해야 할지 결정하는 데 시간이 걸렸다.[2]

바트당은 국민들의 지지를 얻으려 하기보다는 시리아군에서 권력을 공고히 하기로 결정했다.[2] 수백 명의 나세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군대에서 숙청되었고, 고위직을 채우기 위해 바트주의자들이 모집되었다. 새로 채용된 바트주의 장교들 대부분은 시골 출신이거나 낮은 사회 계층 출신이었다.[3] 이 바트주의 장교들은 주로 "도시 수니파 중상류층" 장교 군단을 대체했고, "지도적인 소수 장교의 친족"인 시골 배경을 가진 장교 군단으로 대체했다.[3] 이러한 변화는 수니파의 군사 시설에 대한 통제권 상실로 이어졌다.[3]

시위를 진압하는 데 드는 비용은 정당성 상실을 가져왔고, 아민 알하피즈가 최초의 바트주의 군사 독재자로 등장했다.[3] 1965년, 아민 알하피즈는 제6차 전국대표회의에서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였다. 이 채택으로 시리아의 산업과 민간 분야의 많은 부분이 완전히 국유화되었고, 중앙통제형 계획 경제가 자리잡게 되었다.[16] 바트당의 정치 권력에서 밀려난 상류층으로 구성된 전통적인 엘리트들은 바트당의 사회주의 정책에 위협을 느꼈다.[3]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 시리아 지부의 역사적 라이벌이었고, 바트당의 세속주의적 성격에 위협을 느꼈다.[3] 아크람 알호라니 및 그의 지지자들과 시리아 공산당은 바트당이 수립하고 있던 일당제에 반대했다.[3]

수니파 무슬림 대다수는 아랍 민족주의자였지만 바트주의자는 아니어서 소외감을 느끼게 되었다.[3] 바트당은 알라위파, 드루즈, 이스마일파와 같은 소수 집단과 일반적으로 시골 출신의 사람들에 의해 지배되었고, 이로 인해 주로 민족적 차이에 기초한 도시와 농촌 간의 갈등을 만들게 되었다.[4] 집권하면서 바트당은 도시 정치에서 주로 반 바트주의 정서로부터 위협을 받았는데, 아마도 바트당이 권력을 유지할 수 있었던 유일한 이유는 다소 조직적이고 분열적인 반대에 직면했기 때문일 것이다.[4]

1964년 폭동이 진압되기 전, 군사 위원회 내에서 국방부 장관 무함마드 움란과 살라 자디드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5] 위원회에서 가장 고위 위원이었던 움란은 폭도들과의 화해와 중산층과의 대립 종식을 원했지만, 자디드는 3월 8일 혁명 정신을 구하기 위해서는 시위자들을 강압하고 억압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5] 이것은 군사 위원회 내에서 처음으로 공개된 분열이었고, 앞으로의 사건에서 결정적인 것으로 증명되었다.[5] 하페즈 알 아사드의 지원으로 군사 위원회는 폭도들에 대한 폭력적인 반격을 시작했고,[6] 이는 움란의 몰락을 초래했다.[5] 움란은 바트당을 당 국가사령부에 넘겨주겠다는 군사위원회의 계획을 공개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5] 아플라크 국가사령부 사무총장은 시리아 지역 사령부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써 폭로에 대응했다.[5] 아플라크는 당의 평당원들이 반발하여 그의 명령을 철회할 수밖에 없었다.[5] 바트주의자 구세력 지지자가 아플라크에게 "그의 당이 여전히 정부에서 얼마나 큰 역할을 했느냐"고 조롱하듯 묻자, 아플라크는 "약 1%의 1천분의 1"이라고 대답했다.[5] 움란의 폭로는 그의 망명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국가사령부는 무력해졌다. 군사 위원회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를 통제한 뒤 부르주아에 대한 공격을 시작했고, 석유 유통, 목화 생산, 그리고 외국 무역의 70%가 포함된 것으로 추정되는 국유화 사업을 재개했다.[7]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시리아의 대통령이었던 아민 알하피즈.


움란이 실각한 뒤에도 국가사령부와 군사위원회는 바트당을 장악하기 위해 각자의 투쟁을 계속했다.[8] 국가 사령부가 군사위원회를 상대로 당규와 규정을 발동했지만, 투쟁의 주도권은 처음부터 군사위원회에 있음이 분명했다.[8] 군사 위원회가 성공한 이유는 1958년 아플라크의 시리아 지역 지부 해산 명령을 고수하지 않았던 지부 그룹인 지역주의자들과의 동맹 때문이었다.[8] 지역주의자들은 아플라크를 싫어했고 그의 지도력에 반대했다.[8] 아사드는 지역주의자들을 "당의 진정한 세포"라고 불렀다.[8]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의 연합이 국가사령부를 상대로 벌인 권력 경쟁은 당 구조 내에서 이어졌다. 그러나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은 당의 구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9] 1965년 3월 개최된 제2차 지방의회에서는 지역 사령부의 장관을 당연직 국가원수로 하는 원칙을 승인하기로 결정하였고, 지역 사령부는 국무총리, 내각, 참모총장, 군 최고사령관 등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하였다.[9] 이 변화는 시리아 내정에 대한 발언권이 거의 없었던 국가사령부의 권한을 축소했다.[9] 1965년 4월 제8차 국가회의에서 아플라크는 원래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에 대한 공격을 시작할 계획이었으나, 레바논 의원 지브란 마즈달라니와 사우디아라비아 의원 알리 간남은 이라크 지역 지부에서 발생한 것처럼 당의 민간 지도부가 제거될 수 있기 때문에 아플라크에게 공격을 하지 말라고 설득했다.[9] 이 결정으로 인해 아플라크의 뒤를 이어 같은 국가 사령부 소속이었던 무니프 알라자즈가 바트당의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9] 라자즈는 시리아 태생의 요르단인으로, 그의 휘하에서 여러 차례 국가 및 지역 사령부의 합동 회의가 열렸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위기를 해결할 만큼 정당 정치에 뿌리를 두고 있지 않았다.[9] 아플라크가 실각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하피즈 지역 사령부 장관은 국가 사령부를 지지하며 지지 세력을 변경했다.[9] 지역 사령부 비서, 대통령 직무회의 의장, 총리, 총사령관을 맡은 하피즈가 시리아의 법적 지도자였지만, 시리아의 실질적 지도자는 지역사령부 사무차장이었던 살라 자디드였다.[10]

1963년 아플라크와 군사위원회가 마련한 합의는 정권의 군사 부문과 민간 부문의 매우 긴밀한 상호 관여로 이어졌고, 1965년 말까지 시리아 군대의 정치는 바트당의 정치와 거의 동일해졌다.[11] 이 시기의 주요 군사 주역인 하피즈, 자디드, 움란은 더 이상 군 복무를 하지 않았으며, 그들의 권력은 군대와 당 내의 중간 지지자들에게 달려 있었다.[11] 1965년 11월, 전국 지휘부는 지역 지휘부가 전국 지휘부의 동의 없이 군 장교를 전출시키거나 해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12] 이 결의안을 들은 자디드는 즉시 반란을 일으켰고, 무스타파 뜰라스 대령에게 홈스 주둔군 사령관과 부사령관(둘 다 전국 지휘부 지지자)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12] 이에 라자즈는 전국 지휘부의 긴급 회의를 소집하여 지역 지휘부를 해산하고, 비타르를 총리로 임명했다.[12] 하피즈는 새로운 대통령 평의회 의장이 되었고, 시블리 알아사미가 부의장이 되었다. 움란은 망명에서 소환되어 국방부 장관 겸 사령관으로 재임명되었고, 만수르 알아트라쉬는 새롭게 확대된 국가 혁명 평의회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2]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전국 지휘부에 전쟁을 걸어 대응했다.[12] 아플라크주의자를 싫어했고 동정도 하지 않았던 아사드는 무력을 통한 대결을 지지하지 않았다.[12] 쿠데타가 다가오자 아사드는 나지 자밀, 후세인 믈힘, 유수프 사이그와 함께 런던으로 떠났다.[13]

1966년 2월 21일, 움란은 자디드의 주요 지지자 3명(아흐메드 수이다니 소장, 이자드 자디드 대령, 살림 하툼 소령)의 전출을 명령하면서 국방부 장관으로서의 권위를 시험했다.[14] 군사위원회는 다음 날 대응했지만, 그 전에 전국 지휘부의 균형을 무너뜨리는 술책을 벌였다.[14] 그 술책은 이스라엘과 대치하고 있는 전선의 알라위 사령관 압드 알-가니 이브라힘이 본부에 전선 지휘관들 사이에 싸움이 벌어졌고 총기가 사용되었다고 보고한 것이다.[14] 움란, 알-하피즈, 참모총장은 그곳 장교단과 장시간 토론을 하기 위해 서둘러 골란 고원으로 떠났고, 2월 23일 오전 3시에 돌아왔을 때는 지쳐 있었다.[14] 두 시간 후인 오전 5시에 자디드가 쿠데타를 시작했다.[14] 얼마 지나지 않아 살림 하툼과 리파아트 알-아사드가 이끄는 알-하피즈의 사저 공격이 시작되었고, 이자드 자디드가 이끄는 전차 부대의 지원을 받았다.[14] 격렬한 방어에도 불구하고 하피즈의 군대는 모든 탄약을 소진한 후 항복했다. 하피즈의 딸은 공격으로 눈을 잃었다.[15] 알-하피즈의 경호대 사령관 마흐무드 무사는 이자드 자디드에 의해 거의 살해될 뻔했지만 하툼에 의해 구출되어 시리아에서 밀반출되었다.[15] 다마스쿠스 밖에서도 저항이 있었다. 하마에서는 뜰라스가 홈스에서 봉기를 진압하기 위해 병력을 파견해야 했고, 알레포에서는 아플라크 충성파가 잠시 라디오 방송국을 장악했으며, 라타키아데이르에조르에서도 일부 저항이 보고되었다.[15] 군사적 패배 이후 저항은 거의 붕괴되었다. 라자즈는 군사적 패배 이후 조직적인 저항을 한 유일한 전국 지휘부 구성원이었으며, 숨어 다니면서 정부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5]

4. 쿠데타

1964년 폭동이 진압되기 전, 군사 위원회 내에서 국방부 장관 무함마드 움란과 살라 자디드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 움란은 폭도들과의 화해와 중산층과의 대립 종식을 원했지만, 자디드는 시위자들을 강압하고 억압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 하페즈 알아사드의 지원으로 군사 위원회는 폭도들에 대한 폭력적인 반격을 시작했고,[1] 이는 움란의 몰락을 초래했다. 움란은 바트당을 당 국가사령부에 넘겨주겠다는 군사위원회의 계획을 공개함으로써 이에 대응했다. 국가사령부 사무총장 아플라크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의 해산을 명령함으로써 폭로에 대응했지만, 당원들의 반발로 철회했다. 움란의 폭로는 그의 망명으로 이어졌고, 이로 인해 국가사령부는 무력해졌다. 군사 위원회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를 통제한 뒤 국유화 사업을 재개했다.[2]

움란이 실각한 뒤에도 국가사령부와 군사위원회는 바트당 장악을 위해 투쟁했다.[3] 군사 위원회는 1958년 아플라크의 시리아 지역 지부 해산 명령을 고수하지 않았던 지역주의자들과 동맹을 맺어 성공했다.[3] 아사드는 지역주의자들을 "당의 진정한 세포"라고 불렀다.[3]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의 연합은 당 구조 내에서 권력 경쟁을 벌였고, 당 구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4] 1965년 3월 개최된 제2차 지방의회에서는 지역 사령부의 장관을 당연직 국가원수로 하는 원칙을 승인했고, 지역 사령부는 국무총리, 내각, 참모총장, 군 최고사령관 등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4] 1965년 4월 제8차 국가회의에서 아플라크는 공격을 계획했으나, 레바논 및 사우디아라비아 의원들의 설득으로 포기했다.[4] 아플라크의 뒤를 이어 무니프 알라자즈가 바트당의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하피즈 지역 사령부 장관은 국가 사령부를 지지하며 지지 세력을 변경했다.[4] 지역 사령부 비서, 대통령 직무회의 의장, 총리, 총사령관을 맡은 하피즈가 시리아의 법적 지도자였지만, 실질적 지도자는 지역사령부 사무차장이었던 살라 자디드였다.[5]

1965년 말까지 시리아 군대의 정치는 바트당의 정치와 거의 동일해졌다.[6] 1965년 11월, 국가사령부는 지역사령부가 국가사령부의 동의 없이 군 장교를 전보하거나 해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자디드는 즉시 반란을 일으켰고, 무스타파 틀라스 대령에게 홈스 수비대의 지휘관들과 그의 부관들 모두 국가 사령부의 지지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7] 라자즈는 지역 사령부를 해산하고 비타르를 총리로 임명하는 국가 사령부의 긴급 회의를 요청했다.[7] 하피즈는 새로운 대통령 평의회의 의장이 되었고 시블리 알아이사미는 그의 대리가 되었다.[7] 움란은 망명에서 소환되어 국방부 장관과 총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만수르 알아트라쉬는 새롭고 확장된 국가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7]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국가 사령부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에 대응했다.[7] 아사드는 무력 사용을 통한 결전을 지지하지 않았다.[7] 다가오는 쿠데타에 대응하여 아사드는 런던으로 떠났다.[8]

쿠데타는 1966년 2월 21일 움란이 국방부 장관으로서 자디드의 핵심 지지자였던 아흐메드 수이다니 소장, 이자드 자디드 대령, 살림 하툼 소장을 전출시키면서 시작되었다.[9] 군사위원회는 다음날 대응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국가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계략을 꾸몄다.[9] 이스라엘과 대치 중인 알라위 전선의 압드 알 가니 이브라힘 사령관이 일선 장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총이 사용됐다고 본부에 보고한 것이 계략이었다.[9] 움란, 알하피즈 및 참모총장은 골란고원으로 떠났고 2월 23일 새벽 3시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지친 상태였다.[9] 두 시간 후, 새벽 5시에 자디드는 쿠데타를 일으켰다.[9] 얼마 후, 이자드 자디드가 이끄는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은 살림 하툼과 리파아트 알아사드가 알하피즈의 사저에 공격을 시작했다.[9] 하피즈의 군대는 모든 탄약이 소모된 후 항복했다.[10] 알하피즈의 경호대장 마흐무드 무사는 이자드 자디드에게 살해당할 뻔했지만, 하툼에 의해 구출되어 시리아 밖으로 밀반출되었다.[10] 다마스쿠스 외곽에서 저항이 있었고, 하마에서는 틀라스가 반란을 진압하기 위해 홈스에서 군대를 보내야 했고, 알레포에서는 아플라크 충성파가 라디오 방송국을 잠시 통제했고, 라타키아데이르에조르에서 일부 저항이 보고되었다.[10] 군사적으로 패배한 이후 정부군의 저항은 거의 무너졌다. 라자즈는 군사적 패배 이후 조직적 저항을 한 유일한 국가 사령부 구성원이었고, 다른 은신처에서 정부에 반대하는 성명을 발표했다.[10]

5. 여파

1966년 시리아 쿠데타는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가 군국주의적 "신바트" 조직으로 완전히 이념적으로 변환된 사건으로, 원래 바트당의 바트당 전국 지도부와는 독립적인 조직이 되었다.[4] 약 400명의 사망자를 낸 이 쿠데타로,[1]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 등 구시대 바트주의 지도자들은 숙청되었다.[5] 이 쿠데타는 바트당의 시리아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이라크 지역 지부 사이에 영구적인 분열을 초래했으며, 많은 시리아 바트주의 지도자들이 이라크로 망명했다.[6]

아브라함 벤-추르는 쿠데타 이후 시리아에서 설파된 바트주의 이념은 아플라크, 비타르 등이 옹호했던 이념의 고전적인 형태와는 아무런 관련이 없으므로 신-바트주의라고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니프 알-라자즈는 1961년부터 두 개의 바트당, 즉 "군사 바트당"과 바트당이 존재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 바트당에 있었다고 말했다. 비타르는 1966년 쿠데타가 "시리아에서 바트주의 정치의 종말을 고했다"고 했으며, 아플라크는 "나는 더 이상 내 당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쿠데타 직후 아플라크와 무함마드 움란 지지파 장교들은 숙청되어 메제 감옥에 투옥되었다. 살라 자디드 정권은 하페즈 알아사드를 국방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아사드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훗날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아사드는 "군의 개입은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바트당은 민주적인 정당이었으며, 분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었어야 했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민족 지도부의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필요했다는 견해도 제시했다.

자디드 정권은 시리아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부로 평가받는다. 자디드는 급진적인 국내외 정책을 펼쳐 시리아 사회를 변혁하려 했다. 아사드는 자디드와 이념적으로는 동조했지만, 정책 실행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군사 위원회는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젊은 장교들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이었지만, 아플라크 지지 세력과의 싸움에서 승리하면서 그 역할이 희미해졌다.

자디드는 수상이나 대통령 직에 오르지 않고 지역 지도부 차관 지위를 통해 통치했지만,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시리아의 실질적인 지배자였다. 쿠데타 이전에는 장교 사무국 국장으로서 군을 지배했지만, 1966년 이후에는 아사드에게 군 관리를 맡겼다. 이는 훗날 1970년 쿠데타로 자디드 정권이 붕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아플라크의 실각은 바트당의 분열을 초래하여 당 조직은 시리아파와 이라크파로 분열되었다. 시리아파 바트당은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하며, 1940년대에 다른 바트 운동을 이끌었던 알수지를 바트당 사상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반면 이라크파 바트당은 바크르사담 후세인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플라크를 바트 사상 창시자로 취급했다.

5. 1. 새로운 정부

1964년 폭동 진압 이후, 군사 위원회 내에서 무함마드 움란 국방장관과 살라 자디드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움란은 폭도들과의 화해와 중산층과의 대립 종식을 원했지만, 자디드는 시위대를 억압하는 것이 혁명 정신을 지키는 길이라고 믿었다. 이는 군사 위원회 내 첫 분열이었고, 하페즈 알아사드의 지원으로 군사 위원회는 폭도들에 대한 폭력적인 반격을 시작해 움란의 몰락을 초래했다. 움란은 군사위원회의 계획을 폭로하며 대응했고, 미셸 아플라크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 해산을 명령했지만 당원들의 반발로 철회했다. 움란의 폭로는 그의 망명으로 이어졌고, 군사 위원회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를 장악하고 국유화 사업을 재개했다.

국가사령부와 군사위원회는 바트당 장악을 위해 계속 투쟁했지만, 주도권은 군사위원회에 있었다. 군사위원회는 지역주의자들과의 동맹으로 성공했는데, 이들은 아플라크의 지도력에 반대했다. 아사드는 이들을 "당의 진정한 세포"라고 불렀다.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은 당 구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 1965년 제2차 지방의회에서 지역 사령부 장관을 당연직 국가원수로 하는 원칙이 승인되었고, 지역 사령부는 총리, 내각 등을 임명할 권한을 획득했다. 이는 국가사령부의 권한을 축소했다. 1965년 제8차 국가회의에서 아플라크는 공격을 계획했으나, 다른 의원들의 설득으로 무니프 알라자즈가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 하피즈는 지역 사령부 장관, 대통령 직무회의 의장, 총리, 총사령관을 맡았지만, 실질적 지도자는 살라 자디드였다.

1965년 말까지 시리아 군대의 정치는 바트당의 정치와 거의 동일해졌다. 1965년 11월, 국가사령부는 지역사령부의 군 장교 인사권 행사를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고, 자디드는 즉시 반란을 일으켜 국가 사령부 지지자들을 체포했다. 라자즈는 지역 사령부를 해산하고 비타르를 총리로 임명하는 긴급 회의를 요청했고, 하피즈는 새로운 대통령 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움란은 국방장관과 총사령관으로 복귀했고, 만수르 알 아트라쉬는 국가혁명위원회 의장이 되었다.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국가 사령부에 전쟁을 일으켰고, 아사드는 무력 사용을 통한 결전을 지지하지 않았다.

1966년 2월 21일, 움란이 자디드의 핵심 지지자들을 전출시키면서 쿠데타가 시작되었다. 군사위원회는 계략을 꾸며 국가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렸고, 움란과 알하피즈는 골란고원으로 떠났다. 2월 23일 새벽, 자디드는 쿠데타를 일으켰고, 살림 하툼과 리파아트 알아사드가 알하피즈의 사저를 공격했다. 하피즈의 군대는 항복했고, 알하피즈의 경호대장은 살해당할 뻔했지만 구출되어 시리아 밖으로 밀반출되었다. 다마스쿠스, 하마, 알레포, 라타키아, 데이르에조르에서 저항이 있었지만, 군사적 패배 이후 정부군의 저항은 무너졌다. 라자즈는 조직적 저항을 한 유일한 국가 사령부 구성원이었다.

쿠데타 직후, 움란과 아플라크 지지파 장교들은 군대에서 숙청되었고, 메제 감옥에 수감되었다. 자디드 정부는 아사드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지만, 아사드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다. 아사드는 인터뷰에서 군부 개입이 유감스러웠지만, 국가 사령부의 독재를 종식시켰기 때문에 필요했다고 주장했다.

자디드 정부는 시리아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부로 평가받는다. 자디드는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고, 시리아 사회를 뒤집으려 했다. 아사드와 자디드는 이념적으로는 동의했지만, 실행 방법에 대해서는 동의하지 않았다. 군사 위원회는 아플라크 지지세력과의 싸움이 끝났기 때문에 권한을 잃었다. 자디드는 총리나 대통령직을 차지하지 않았지만,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시리아의 통치자였다. 자디드는 군대를 통제하는 임무를 아사드에게 맡겼고, 이는 1970년 수정 혁명에서 자디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자디드는 누레딘 알아타시를 대통령, 지역 사령부의 지역 장관, 국가 사령부의 사무총장으로 임명했고, 유수프 주아인은 다시 총리가 되었고, 브라힘 마쿠스는 외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아흐메드 수이다니는 참모총장, 무함마드 라바 알타윌 대령은 노동부 장관 및 인민저항군 수장, 압드 알 카림 알 준디 대령은 농업개혁부 장관, 후에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

1966년 시리아 대통령 아민 알 하피즈를 체포한 쿠데타 작전을 이끈 살림 하툼은 하페즈 알아사드 및 살라 자디드에 불만을 품고 반격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다.[17] 하툼은 새 정권의 종파적 성격을 비판하고 내전에 대해 경고했다.[17] 1967년 하툼은 신바트주의 정권에 체포되어 사살당했다.[17]

1966년 시리아 쿠데타는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가 군국주의적 "신-바트" 조직으로 변환된 사건으로, 원래 바트당의 바트당 전국 지도부와 독립되었다.[4] 신-바트주의 군사 위원회는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와 같은 구시대 지도자들을 숙청했다.[5] 이 쿠데타는 바트당의 시리아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이라크 지역 지부 사이에 영구적인 분열을 초래했으며, 많은 시리아 바트주의 지도자들이 이라크로 망명했다.[6]

아브라함 벤-추르는 쿠데타 이후 시리아에서 설파된 바트주의 이념은 신-바트주의라고 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니프 알-라자즈는 1961년부터 두 개의 바트당, 즉 "군사 바트당과 바트당이 존재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전자에 있었다"고 말했다. 비타르 역시 1966년 쿠데타가 "시리아에서 바트주의 정치의 종말을 고했다"고 동의했다. 아플라크도 "나는 더 이상 내 당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왼쪽부터: 내무부 장관 무하마드 라바 알 타윌, 참모총장 무스타파 뜰라스, 골란 전선 사령관 아흐마드 알-미르, 그리고 살라 자디드
]

5. 2. 바트당의 분열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 및 그 추종자들은 나세르이집트와 느슨한 연합을 구축하고 온건한 형태의 사회주의를 구현하며, 언론과 사상의 자유를 용인하면서 개인의 권리를 존중하는 일당제 국가를 원했다. 그러나 이러한 "고전적인" 바트주의는 빠르게 지지를 잃었다.[1] 제6차 전국 바트당 대표대회에서 군사 위원회와 그 지지자들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강하게 받은 새로운 형태의 바트주의를 만드는 데 성공했다.[1] 이들은 아랍 세계 통일보다는 "한 나라의 혁명"에 중점을 두었고, 시리아에서 사회주의 혁명을 강조하는 결의안을 시행했다.[1]

이러한 사회주의 아래에서 경제는 전체적으로 국가 계획을 따르고, 경제와 외국 무역의 대부분은 국유화될 예정이었다.[1] 신바트주의 지지자들은 이러한 정책이 노동 착취를 끝내고 자본주의를 사라지게 할 것이며, 농업에서는 "토지를 경작하는 사람에게" 토지를 주는 계획을 구상했다.[1] 그러나 소매 무역, 건설, 관광, 소규모 산업 등에는 민간 기업이 여전히 존재할 것이었다.[1] 이러한 변화는 바트당을 레닌주의 정당으로 재탄생시킬 예정이었다.[2]

1964년 하마 폭동 이후 급진주의자들은 잠시 물러났고, 아플라크 지지자들이 짧은 기간 동안 지배권을 되찾았다.[2] 비타르는 국유화 과정을 중단하고 시민 자유사유재산 존중을 재확인하는 새 정부를 구성했다.[2] 그러나 이러한 정책 변화는 충분한 지지를 얻지 못했고, 일반 국민들은 여전히 바트당 통치에 반대했다.[2] 상류층들은 계속해서 자본을 나라 밖으로 빼돌렸고, 이에 대한 유일한 해결책은 국유화를 계속하는 것이었다.[2] 바트당 좌파는 부르주아 계급에게 경제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주지 않으면 승리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2] 1966년 쿠데타는 바트당 국가사령부를 장악한 온건파와 시리아 지역사령부를 장악한 급진파 사이의 권력 투쟁으로 인해 발생했다.[2]

1964년 폭동 진압 전, 군사 위원회 내에서 국방장관 무함마드 움란과 살라 자디드 사이에 권력 투쟁이 시작되었다.[3] 움란은 폭도들과의 화해와 중산층과의 대립 종식을 원했지만, 자디드는 시위자들을 억압하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믿었다.[3] 이는 군사 위원회 내의 첫 공개 분열이었고, 이후 사건에서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3] 하페즈 알아사드의 지원으로 군사 위원회는 폭도들에 대한 폭력적인 반격을 시작했고,[4] 이는 움란의 몰락을 초래했다.[3] 움란은 군사위원회의 계획을 공개하며 대응했고, 아플라크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 해산을 명령했지만, 당원들의 반발로 철회해야 했다.[3] 움란의 폭로는 그의 망명으로 이어졌고, 국가사령부는 무력해졌다. 군사 위원회는 시리아 지역 사령부를 통제한 뒤 국유화 사업을 재개했다.[3]

국가사령부와 군사위원회는 바트당 장악을 위해 계속 투쟁했다.[4] 군사위원회가 성공한 이유는 1958년 아플라크의 시리아 지역 지부 해산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지역주의자들과의 동맹 때문이었다.[4] 지역주의자들은 아플라크를 싫어했고 그의 지도력에 반대했다.[4] 아사드는 지역주의자들을 "당의 진정한 세포"라고 불렀다.[4]

군사위원회와 지역주의자들의 연합은 당 구조 내에서 권력 경쟁을 벌였고, 결국 당 구조를 뒤집는 데 성공했다.[4] 1965년 3월 제2차 지방의회에서는 지역 사령부 장관을 당연직 국가원수로 하는 원칙을 승인했고, 지역 사령부는 국무총리, 내각, 참모총장, 군 최고사령관 등을 임명할 수 있는 권한을 획득했다.[4] 이는 국가사령부의 권한을 축소시켰다.[4] 1965년 4월 제8차 국가회의에서 아플라크는 공격을 계획했으나, 레바논과 사우디아라비아 의원들의 설득으로 공격을 포기했다.[4] 이로 인해 아플라크의 뒤를 이어 무니프 알라자즈가 바트당 사무총장에 선출되었다.[4] 얼마 지나지 않아 하피즈 지역 사령부 장관은 국가 사령부를 지지하며 지지 세력을 변경했다.[4] 지역 사령부 비서, 대통령 직무회의 의장, 총리, 총사령관을 맡은 하피즈가 시리아의 법적 지도자였지만, 실질적 지도자는 지역사령부 사무차장이었던 살라 자디드였다.[4]

쿠데타 직후, 움란과 아플라크 지지세력은 군대에서 숙청되어 메즈 감옥에 수감되었다.[5] 자디드 정부는 아사드를 국방부 장관으로 임명했다.[5] 아사드는 쿠데타를 지지하지 않았고, 자디드의 행동을 지지하지 않는다고 말했다.[5] 그는 르몽드와의 인터뷰에서 군부 개입이 유감스러웠으며, 분쟁은 민주적인 방식으로 해결되었어야 했다고 주장했다.[5] 그러나 아사드는 국가 사령부의 독재를 종식시켰기 때문에 그 행동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5]

자디드 정부는 시리아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부로 평가받는다.[5] 자디드는 대내외적으로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고, 시리아 사회를 위에서 아래로 뒤집으려 했다.[5] 아사드와 자디드는 이념적으로는 동의했지만, 실제 정책 실행 방법에는 동의하지 않았다.[5] 1963년부터 1966년까지 장교들의 주요 의사 결정 과정이었던 군사 위원회는 자디드 아래서 중앙 기관의 권한을 잃었다.[6] 자디드는 총리나 대통령직을 차지한 적이 없었지만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시리아의 통치자였다.[6] 1966년 쿠데타 이전에는 장교국의 수장이라는 직책을 통해 군대를 통제했지만, 이후에는 국가 운영에 집중했고, 아사드가 군대 통제 임무를 맡았다.[6] 이는 1970년 수정 혁명에서 자디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6]

자디드는 누레딘 알아타시를 대통령, 지역 및 국가 사령부 요직에 임명했고, 유수프 주아인은 다시 총리가 되었고, 브라힘 마쿠스는 외무부 장관이 되었다.[6] 아흐메드 수이다니는 참모총장, 무함마드 라바 알타윌은 노동부 장관 및 인민저항군 수장, 압드 알 카림 알 준디는 농업개혁부 장관 및 내무부 장관으로 임명되었다.[6]

1966년 쿠데타를 이끈 드루즈 장교 살림 하툼은 알아사드와 자디드에게 불만을 품고 반격을 계획했지만 실패하고 요르단으로 망명했다.[7] 그는 새 정권의 종파적 성격을 비판하고 내전을 경고했다.[7] 1967년 하툼은 신바트주의 정권에 체포되어 사살당했다.[7]

에이브러햄 벤추르는 1966년 쿠데타 이후 시리아에서 설파된 바트주의 이념은 아플라크, 비타르 등이 지지하는 고전적 형태와 관련이 없기 때문에 신바트주의로 지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8] 무니프 알라자즈는 1961년부터 두 개의 바트당, 즉 군사 바트당과 바트당이 존재했으며, 실질적인 권력은 군사 바트당에 있었다고 말했다.[9] 비타르는 1966년 쿠데타가 "시리아에서 바트주의 정치의 종말"을 의미한다고 말했고, 아플라크도 "나는 더 이상 내 당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9]

1966년 시리아 쿠데타는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가 군국주의적 "신바트" 조직으로 완전히 이념적으로 변환된 사건이다.[10] 약 400명의 사망자를 낸 권력 장악 이후,[11] 신바트주의 군사 위원회는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 같은 구시대 지도자들을 숙청했다.[12] 이 쿠데타는 바트당의 시리아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이라크 지역 지부 사이에 영구적인 분열을 초래했으며, 많은 시리아 바트주의 지도자들이 이라크로 망명했다.[13]

아플라크의 실각은 바트당의 분열을 초래하여 당 조직은 시리아파와 이라크파로 분열되었다. 시리아파 바트당은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하며, 알수지를 바트당 사상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반면 이라크파 바트당은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플라크를 바트 사상 창시자로 취급했다.[14] 쿠데타 직후의 제9차 당대회에서 아플라크파는 추방되었고, 이라크 대표단은 시리아 바트당과 결별했다. 이라크 바트당은 베이루트에서 "진정한" 제9차 당대회를 개최하여,[15] 아플라크를 민족지도부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16] 이때, 비타르는 탈당하고 바트 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17]

5. 2. 1. 당대당 관계

1966년 쿠데타 이후 이라크로 망명한 미셸 아플라크가 1968년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 이라크 대통령과 만나고 있다. 1966년 쿠데타 이후, 바트당은 시리아 중심파와 이라크 중심파로 분열되었고, 많은 바트당 지부들은 시리아 중심파 대신 이라크 중심파를 지지했다.


이라크가 주도한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전국 사령부 구성원: 왼쪽부터 사무총장 미셸 아플라크, 이라크 부통령 사담 후세인 (두 번째 줄), 사무차장 시블리 알-아이사미 (가운데 왼쪽) 및 이라크 대통령 바크르 (가운데 오른쪽) 등


아플라크, 비타르, 그리고 전국 지휘부의 축출은 바트 운동 역사상 가장 심각한 분열이었다.[1] 1966년 쿠데타는 이전 지도자들과 다른 목표를 가진 새로운 세대의 지도자들을 권력으로 이끌었지만, 바트당 내에는 많은 분열과 분파가 있었고 아플라크와 비타르는 항상 승리하여 당 지도자로 남았다.[1] 아플라크와 비타르는 시리아와 시리아 이외의 지역 지부에도 지지자들이 있었지만, 1963년부터 그들을 지원해 온 시리아 지역 지부의 재정적 지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시리아 국가를 마음대로 할 수 있었고, 이론적으로는 새로운 당 조직을 설립하거나 친 아플라크 여론을 강요할 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지역 지부가 바그다드에 충성을 맹세했기 때문에 이는 실패했다.[2] 1966년 후반에 첫 번째 아플라크 추종자 이후의 전국 회의가 열렸고, 공식적으로 제9차로 지정되어 새로운 전국 지휘부가 선출되었다.[2] 시리아 지역 지부와 새로운 전국 지휘부의 이념적 방향은 또 다른 변화였다. 아플라크 추종자들은 범 아랍 바트당과 아랍 세계의 통일을 믿었던 반면, 시리아의 새로운 지도자들은 이를 비현실적인 것으로 여겼다.[3] 쿠데타 이후 전국 지휘부는 명목상 시리아 지역 지휘부에 종속되었고 아랍 또는 시리아 정치에서 실질적인 역할을 수행하지 못했다.[3]

전국 지휘부가 추방된 후, 하피즈를 포함한 일부 구성원들은 제9차 바트 전국 회의(시리아의 "제9차 전국 회의"와 구별하기 위해)를 소집하여 회의에 참석하지 않은 아플라크를 전국 지휘부의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4] 비타르와 라자즈와 같은 사람들에게 시리아에서의 추방은 너무 가혹했고, 그들은 당을 떠났다.[4] 아플라크는 브라질로 이주하여 196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4]

1966년 전국 사령부가 전복되었을 때, 이라크 지역 지부는 적어도 말로는 아플라크의 "합법적인 지도부"를 지지했다.[5] 이라크 지역 지부가 1968년 7월 17일 혁명에서 권력을 되찾았을 때, 아랍 통일이라는 그들의 목표를 달성하거나 시리아 바트당과의 화해를 이루기 위한 합병 시도는 이루어지지 않았다.[6] 이라크에 바트당 통치가 수립된 후, 시리아가 주도하는 바트당 운동의 많은 구성원들이 이라크 측으로 망명했으며, 이라크에 충성하는 바트당원 중 시리아로 충성을 바꾸려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7] 그 이유는 다마스쿠스에서 망명한 사람들이 오래된 아플라크파 전국 사령부에 충성했기 때문이다.[8] 비타르, 하피즈, 시블리 알-아이사미, 엘리아스 파라와 같은 여러 원로 구성원들은 이라크를 방문하거나 아흐메드 하산 알-바크르(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이라크 지역 사령부 지역 사령부의 지역 서기)에게 축전을 보냈다.[8] 아플라크는 1969년까지 이라크를 방문하지 않았지만, 1970년 말부터 그는 이라크 바트당의 주요 인물이 되었으나,[8] 어떠한 의사 결정 권한도 얻지 못했다.[9]

처음부터 다마스쿠스 정부는 압도적인 반 이라크 바트당 선전 운동을 시작했고, 바그다드 측에서도 이에 대응했다.[7] 그러나 이라크 바트당원들은 시리아 지역 지부의 제4차 지역 회의에서 바트당의 재통일을 요구했던 아사드를 자디드로부터 권력을 장악하려는 시도를 도왔다.[10] 아사드는 아플라크의 역사적 지도력을 인정하겠다고 이라크인들에게 약속한 것으로 알려졌다.[10] 이라크 외무 장관 압둘 카림 알-셰이클리는 심지어 아사드가 이끄는 시리아 국방부 내에 개인 사무실을 가지고 있었다.[10] 그러나 이를 오해해서는 안 되며, 이라크 지역 지부는 이름뿐인 아랍 민족주의자였고, 실제로는 이라크 민족주의자였다.[11]

시리아 지역 지부는 아플라크를 "도둑"이라고 비난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그가 자키 알-아르수지로부터 바트당 이념을 훔쳐 자신의 것으로 선포했다고 주장했으며,[12] 아사드는 아르수지를 바트당 사상의 주요 창시자로 칭송했다.[13] 그러나 이라크 지역 지부는 여전히 아플라크를 바트주의의 창시자로 선포했다.[13] 아사드는 아르수지를 "당시 가장 위대한 시리아인"이라고 언급했고 그를 "바트당을 정치 운동으로 구상한 최초의 인물"이라고 주장했다.[14] 비타르는 1969년에 "부재 중" 상태에서 사형 선고를 받았고,[15][16] 아플라크는 1971년에 아사드 정부에 의해 "부재 중" 상태에서 사형을 선고받았다.[17] 시리아 지역 지부는 1966년 쿠데타 직후 아르수지를 기리는 동상을 세웠다.[18]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리아 외부의 대다수 바트당 추종자들은 아르수지가 아닌 아플라크를 바트주의의 주요 창시자로 보고 있다.[19]

이라크 지역 지부가 권력을 장악했을 때, 시리아 지역 지부는 보도 자료에서 바트당 조직이 이라크에서 권력을 잡았다는 사실을 언급하지 않는 것으로 대응했다. 예를 들어, 바크르가 대통령으로 임명되었다고 언급했지만, 그의 당적은 언급하지 않고 사건을 군사 쿠데타로 언급했다. 시리아 바트당은 이라크 바트당에 어떠한 정당성도 부여하는 것을 부인했지만, 이라크 바트당은 더욱 유화적이었다. 예를 들어, 바크르는 이라크 지역 지부가 권력을 장악한 직후 "그들은 바트당원이고, 우리는 바트당원입니다"라고 말했다. 셰이클리 외무 장관은 얼마 지나지 않아 "우리[즉, 이라크와 시리아] 사이의 협력을 막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라고 말했다. 아사드가 당과 국가 내에서 자신의 입지를 강화하는 동시에 시리아 내에서 반 이라크 선전이 새로운 수준에 도달했다. 자디드가 1970년 교정 운동 (시리아) 동안 아사드에 의해 전복되었을 때, 그것은 태도의 변화를 의미하지 않았고, 시리아가 주도하는 전국 사령부와 시리아 지역 사령부의 첫 번째 공동 성명은 이라크 바트당을 "우익 파벌"이라고 언급했다.

아플라크의 실각은 바트당의 분열을 초래하여 당 조직은 시리아파와 이라크파의 두 개로 분열되었다. 시리아파 바트당은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을 중심으로 하며, 1940년대에 다른 바트 운동을 이끌었던 알수지를 바트당 사상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반면 이라크파 바트당은 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을 중심으로 하였으며, 이전과 마찬가지로 아플라크를 바트 사상 창시자로 취급했다. 쿠데타 직후의 제9차 당대회에서 아플라크파는 추방되었고, 이라크 대표단은 시리아 바트당과 결별했다. 한편 이라크 바트당은 같은 달 베이루트에서 "진정한" 제9차 당대회를 개최하여, 아플라크를 민족지도부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9] 이때, 오랜 동지인 비타르는 탈당을 선언하고, 바트 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떼게 되었다.

5. 3. 정부 전복 시도

1965년 11월, 국가사령부는 지역사령부가 국가사령부의 동의 없이 군 장교를 전보하거나 해임하는 것을 금지하는 결의안을 발표했다. 이에 살라 자디드는 즉시 반란을 일으켰고, 무스타파 틀라스 대령에게 홈스 수비대의 지휘관들과 그의 부관들 모두 국가 사령부의 지지자들을 체포하라고 명령했다.[17] 이에 대응하여 라자즈는 지역 사령부를 해산하고 비타르를 총리로 임명하는 국가 사령부의 긴급 회의를 요청했다.[17] 아민 알하피즈는 새로운 대통령 평의회의 의장이 되었고 시블리 알 아이사미는 그의 대리가 되었다.[17] 무함마드 움란은 망명에서 소환되어 국방부 장관과 총사령관으로 다시 임명되었고 만수르 알 아트라쉬는 새롭고 확장된 국가혁명위원회의 의장으로 임명되었다.[17] 자디드와 그의 지지자들은 국가 사령부에 전쟁을 일으킴으로써 이에 대응했다.[17]

쿠데타는 1966년 2월 21일 움란이 국방부 장관으로서 자디드의 핵심 지지자였던 아흐메드 수이다니 소장, 이자드 자디드 대령, 살림 하툼 소장을 전출시키면서 시작되었다.[17] 군사위원회는 다음날 대응할 예정이었지만, 그 전에 국가 사령부를 혼란에 빠뜨리는 계략을 꾸몄다.[17] 이스라엘과 대치 중인 알라위 전선의 압드 알 가니 이브라힘 사령관이 일선 장교들 사이에 다툼이 벌어져 총이 사용됐다고 본부에 보고한 것이 계략이었다.[17] 움란, 알하피즈 및 참모총장은 그곳의 장교단과 긴 토론을 한 뒤 서둘러 골란고원으로 떠났고 그들이 2월 23일 새벽 3시에 돌아왔을 때 그들은 지친 상태였다.[17] 두 시간 후, 새벽 5시에 자디드는 쿠데타를 일으켰다.[17] 얼마 후, 이자드 자디드가 이끄는 전차부대의 지원을 받은 살림 하툼과 리파아트 알아사드가 알하피즈의 사저에 공격을 시작했다.[17] 적극적인 방어에도 불구하고, 하피즈의 군대는 모든 탄약이 소모된 후 항복했다.[17]

드루즈 장교 살림 하툼은 1966년 살라 자디드와 하페즈 알 아사드 정권을 전복하기 위해 반쿠데타를 시도했다.


드루즈 장교 살림 하툼은 1966년 쿠데타 작전을 지휘하여 시리아 대통령 아민 알하피즈를 체포했지만, 이후 하페즈 알아사드와 살라 자디드에게 실망하여 같은 해에 반쿠데타를 계획했다. 그는 살라 자디드를 일시적으로 구금할 수 있었지만, 그의 음모는 군대에 의해 저지되었고 도주해야 했다.[10] 요르단에서 망명을 얻은 후 하툼은 기자 회견에서 새 정권의 종파적 성격을 비판하며 내전을 경고했다.

5. 4. 신바트주의

1963년 시리아 쿠데타 이후, 민족혁명사령부 내 나세르주의자들과 바트당 사이에 권력 투쟁이 벌어졌다. 나세르주의자들은 가말 압델 나세르 임기 동안 이집트와 시리아의 연합체인 아랍 연합 공화국 재건을 원했으나, 바트당은 새로운 연합에 회의적이었다. 바트당은 시리아를 단독으로 통치할 수 있는 느슨한 연방을 원했다.

바트당은 대중의 지지를 얻기보다 시리아군의 권력을 공고히 하려 했다. 수백 명의 나세르주의자와 보수주의자들이 군에서 숙청되었고, 바트주의자들이 고위직을 채웠다. 새로 채용된 바트주의 장교들은 대부분 시골 출신이거나 낮은 사회 계층 출신이었다. 이들은 "도시 수니파 중상류층" 장교단을 대체했고, "지도적인 소수 장교의 친족"인 시골 출신 장교단으로 대체했다. 이는 수니파의 군사 시설 통제권 박탈로 이어졌다.

아민 알하피즈는 최초의 바트주의 군사 독재자로 등장했다. 1965년, 그는 사회주의 정책을 채택하여 산업과 민간 분야의 많은 부분이 국유화되고 중앙통제형 계획 경제가 자리잡게 되었다.[16] 바트당의 정치 권력에서 밀려난 상류층들은 위협을 느꼈다. 시리아 무슬림 형제단은 바트당의 세속주의적 성격에, 아크람 알호라니와 시리아 공산당은 바트당의 일당제에 반대했다.

수니파 무슬림 대다수는 아랍 민족주의자였지만 바트주의자는 아니어서 소외감을 느꼈다. 바트당은 알라위파, 드루즈, 이스마일파와 같은 소수 집단과 시골 출신이 주로 지배하여 도시와 농촌 간 갈등을 야기했다.

미셸 아플라크와 그 추종자들은 "고전적인" 바트주의를 구현하려 했으나, 군사 위원회는 마르크스-레닌주의의 영향을 받은 새로운 형태의 바트주의를 만들었다. 이 신바트주의는 "한 나라의 혁명"에 중점을 두었고, 경제는 국가 계획을 따르고, 노동 착취를 끝내고, 자본주의를 사라지게 할 것이라 믿었다. 그러나 민간 기업은 소매 무역, 건설, 관광, 소규모 산업에 여전히 존재했다.

1964년 폭동 이후, 아플라크 지지자들이 잠시 지배권을 되찾았으나, 상류층의 자본 유출로 국유화가 계속되었다. 1966년 쿠데타는 바트당 내 권력 투쟁의 결과였다.

1966년 시리아 쿠데타는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부가 군국주의적 "신바트" 조직으로 변환된 사건이다.[4] 미셸 아플라크와 살라 알딘 알비타르 등 구시대 지도자들은 숙청되었고,[5] 바트당은 시리아와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 이라크 지역 지부로 분열되었다.[6]

아브라함 벤-추르는 쿠데타 이후 시리아의 바트주의 이념을 신바트주의라 칭했다. 무니프 알-라자즈는 1961년부터 "군사 바트당"과 바트당이 존재했으며, 실권은 군사 바트당에 있었다고 주장했다. 비타르는 1966년 쿠데타가 "시리아에서 바트주의 정치의 종말"이라고 했고, 아플라크는 "나는 더 이상 내 당을 알아보지 못하겠다!"라고 말했다.

쿠데타 직후, 아플라크와 움란 지지파 장교들이 숙청되어 메즈 감옥에 투옥되었다. 자디드 정권은 하페즈 알아사드를 국방 장관으로 임명했다. 아사드는 군 개입을 유감스럽게 생각했지만, 민족 지도부의 독재를 종식시키는 데 필요하다고 보았다.

자디드 정권은 시리아 역사상 가장 급진적인 정부였다. 그는 급진적인 정책을 펼쳤고, 군사 위원회는 권한을 잃었다. 자디드는 1966년부터 1970년까지 시리아의 통치자였고, 아사드에게 군 통제를 맡겼다. 이는 1970년 수정 혁명에서 자디드의 몰락으로 이어졌다.

참조

[1] 웹사이트 Syria (1946–present) http://uca.edu/polit[...] University of Central Arkansas 2013-08-12
[2] 논문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
[3] 서적 Creating Consent in Ba'thist Syria: Women and Welfare in a Totalitarian State I.B. Tauris
[4] 논문 The Neo-Ba'th Party of Syria 1968
[5] 논문 The Neo-Ba'th Party of Syria 1968
[6] 서적 The Truth About Syria Palgrave Macmillan
[7] 서적 World Armies Gale
[8] 서적 Creating Consent in Ba'thist Syria: Women and Welfare in a Totalitarian State I.B. Tauris
[9] 서적 Creating Consent in Ba'thist Syria: Women and Welfare in a Totalitarian State I.B. Tauris
[10] 서적 Destroying a Nation: The Civil War in Syria I.B. Tauris
[11] 서적 Destroying a Nation: The Civil War in Syria I.B. Tauris
[12] 서적 Destroying a Nation: The Civil War in Syria I.B. Tauris
[13] 서적 Asad: The Struggle for the Middle Eas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4] 서적 Human rights in Syria Human Rights Watch
[15] 웹인용 Syria (1946–present) http://uca.edu/polit[...] University of Central Arkansas 2013-08-12
[16] 저널 The Soviet Union and the Syrian Ba'th regime: From hesitation to Rapprochement https://www.jstor.or[...] 2000-04
[17] 서적 Destroying a Nation: The Civil War in Syria https://archive.org/[...] I. B. Tauris
[18] 서적 Asad: The Struggle for the Middle East University of California Press
[19] 서적 Human rights in Syria https://archive.org/[...] Human Rights Watc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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