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셸 아플라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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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미셸 아플라크는 1910년 시리아 다마스쿠스에서 태어난 아랍 민족주의 사상가로, 바트당의 창시자 중 한 명이다. 그는 소르본 대학교에서 철학을 공부하며 마르크스주의와 아랍 민족주의에 영향을 받았고, 1940년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와 함께 아랍 부활 운동을 결성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민족의 단결, 자유, 사회주의를 핵심 가치로 하는 바트주의를 주창했으며, 1947년 아랍 바트당 창당에 참여하여 당의 지도자가 되었다. 그는 1960년대 바트당 내 권력 투쟁에서 밀려나 망명 생활을 했고, 1968년 이라크 바트당 사무총장으로 재선되었으며, 1989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사회주의와 세속주의를 옹호했지만, 그의 사상은 비판과 논란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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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셸 아플라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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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도 정보 | |
기본 정보 | |
이름 | 미셸 아플라크 |
출생일 | 1910년 1월 9일 |
출생지 | 다마스쿠스, 시리아 빌라예트, 오스만 시리아 |
사망일 | 1989년 6월 23일 (향년 79세) |
사망지 | 파리, 프랑스 |
안장지 | 바그다드 |
국적 | 시리아, 이라크 |
학력 | |
모교 | 파리 대학교 |
정치 활동 | |
소속 정당 | 아랍 바트 운동 (1940년–1947년)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1947년–1966년) 이라크 바트당 (1968년–1989년) |
직책 | 이라크 바트당 국가 지도부 사무총장 |
임기 시작 | 1968년 2월 8일 |
임기 종료 | 1989년 6월 23일 |
직책2 |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국가 지도부 사무총장 |
임기 시작2 | 1954년 6월 |
임기 종료2 | 1965년 4월 |
직책3 |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국가 지도부 구성원 |
임기 시작3 | 1947년 4월 6일 |
임기 종료3 | 1966년 2월 23일 |
전임자 | 직책 신설 |
후임자 | 사담 후세인 |
전임자2 | 직책 신설 |
후임자2 | 무니프 알라자즈 |
부관 | 시블리 알아이사미 |
2. 일생
미셸 아플라크는 시리아 다마스쿠스의 중산층 가정에서 태어나 소르본 대학에서 공부했고, 그곳에서 미래의 정치적 동반자인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를 만났다. 1932년 시리아로 돌아와 공산주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지만,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이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끊었다. 1940년 아플라크와 알 비타르는 아랍 바트 운동을 설립했다. 이 운동은 성공적이었고, 1947년 자키 알아르수지의 아랍 바트 조직과 합병하여 아랍 바트당을 창당했다. 아플라크는 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아미드'(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아랍 바트당은 1952년 아크람 알하우라니가 이끌던 아랍사회당과 통합하여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을 창당하였고, 1954년 아플라크는 당 대표로 선출되었다. 1950년대 중후반 동안 이 당은 이집트의 대통령인 가말 압델 나세르와 관계를 발전시켜 아랍 연합 공화국(UAR)을 설립했다. 그러나 나세르는 아플라크에게 당을 강제로 해산시켰는데, 아플라크는 당원들과 상의하지 않고 그렇게 했다. UAR이 해체된 직후, 아플라크는 바트당 국가사령부 사무총장으로 재선되었다. 1963년 3월 8일 혁명 이후, 1965년 아플라크는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날 정도로 당 내에서의 입지가 약해졌다.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이로 인해 바트당은 분열되었다. 아플라크는 레바논으로 탈출했지만, 후에 이라크로 갔다. 1968년 아플라크는 이라크가 이끄는 바트당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그의 재임 기간 동안 그는 사실상 실권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는 1989년 6월 23일 사망할 때까지 그 자리를 지켰다.[1]
2. 1. 초기 생애 (1910년 ~ 1939년)
1910년 1월 9일, 미셸 아플라크는 다마스쿠스에서 중산층 정교회 가정의 자녀로 태어났다.[16] 그의 아버지 조셉은 곡물 상인이었다. 아플라크는 프랑스 통치하의 시리아와 레바논 위임통치령에서 서구화된 교육을 받았다.[17] 1929년, 그는 시리아를 떠나 파리의 소르본 대학에서 철학을 공부했고, 그곳에서 훗날 정치적 동반자가 되는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를 만났다.[18] 아플라크는 소르본 대학에 아랍 학생 연합을 설립하고 칼 마르크스의 저술을 접했다. 1932년 시리아로 돌아와 공산주의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아플라크는 공산주의 운동가가 되었지만, 시리아-레바논 공산당이 프랑스의 식민지 정책을 지지하면서 공산주의 운동과의 관계를 끊었다. 이후 1940년 아플라크와 알 비타르는 아랍 이야 운동(자키 알-아르수지의 그룹에서 같은 이름으로 이름을 따 아랍 바트 운동으로 이름을 바꾸었다)을 설립했다.2. 2. 아랍 바트 운동 (1940년 ~ 1947년)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 후 귀국한 아플라크는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와 함께 1940년에 아랍 이흐야 운동이라는 정당을 설립했다. 1941년에는 당 활동에 전념했으며, 1942년에는 "극적인 침묵"을 효과적으로 활용하는 "강력한 연설가"로서의 능력을 보여주었다. 당시 이라크 총리였던 라시드 알리 알가일라니가 영국의 지배에 저항하는 상황에서, 이들은 당명을 아랍 바트 운동으로 변경했다. 이는 중동 지역의 급진적인 변화를 반영한 것이었다.1941년 영국-이라크 전쟁 중에는 이라크 지원 시리아 위원회를 설립하여 알가일라니 정부를 지원했다.[1] 그러나 다른 아랍 바트 운동 지도자인 자키 알 아르수지는 이 위원회에 회의적이었다.[2]
1942년 10월 24일, 아플라크와 알비타르는 교사직을 사임하고 정치 투쟁에 전념하기로 했다.[3] 1945년 프랑스 위임 통치 당국에 정당 허가를 요청했지만, 아랍 바트 운동은 1947년 자키 알 아르수지의 아랍 바트 조직과 합병하여 아랍 바트당을 설립할 때까지 공식 정당이 되지 못했다.[4]
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아랍 바트당 창립 대회에서 아플라크는 '아미드'('원로' 또는 '지도자'로 번역됨)로 선출되었고,[5] 4인 집행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다.[6] 알비타르는 국가 사령부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6] 아플라크는 이념 담당, 알비타르는 당의 일상 업무를 담당했다.[7]
2. 3. 아랍 바트당 창당과 초기 활동 (1947년 ~ 1963년)
소르본 대학에서 유학하며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를 만난 미셸 아플라크는 1940년 자키 알-아르수지의 그룹에서 이름을 따온 아랍 이야 운동(이후 아랍 바트 운동으로 개칭)을 설립했다. 이 운동은 성공적이었고, 1947년 아랍 바트 운동은 알-아르수지의 아랍 바트 조직과 합병하여 아랍 바트당을 창당하였다. 아플라크는 당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아미드'(당 대표)로 선출되었다.1947년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아랍 바트당 창당 대회에서 아플라크는 '아미드'라는 최고위직에 선출되었고, 4인으로 구성된 집행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당 헌법에 따라 그는 당의 실질적인 지도자가 되었으며, 알비타르는 국가 사령부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 아랍 바스당의 지도자였던 자키 알아르수지는 어떤 직책이나 당원 자격도 부여받지 못했다. 아플라크는 '아미드'로서 이념 업무를 담당하며 당의 멘토가 되었고, 알비타르는 당의 일상 업무를 관장했다.[1]
1940년대 후반, 아플라크와 알비타르는 바트당 사상에 대한 무료 강의를 제공했고, 1948년에는 신문 ''알바스(al-Ba'ath)''를 창간했다. 1948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 시리아의 초기 패배 후, 아플라크는 슈크리 알쿠왓리 대통령이 이끄는 정부에 반대하는 시위를 주도했다. 그는 알쿠왓리가 부패하고 자본주의적인 정치인이며 시리아군의 패배에 책임이 있다고 주장하며 그의 사임을 촉구했고, ''알바스''에 그를 비판하는 글을 썼다. 아플라크는 알쿠왓리 정부에 의해 체포되었다가, 후스니 알자임이 주도한 쿠데타로 알쿠왓리 정부가 무너지자 석방되었다. 그러나 알자임은 모든 정당을 금지했고, 아플라크는 다시 체포되어 메제 교도소(Mezzeh Prison)에 수감되었다. 1949년 8월 알자임이 축출되고 하심 알아타시(Hashim al-Atassi)가 대통령이 되자, 아플라크는 연립정부의 시리아 교육부 장관(Ministry of Education (Syria))에 임명되어 1949년 8월부터 12월까지 재임했다. 1951년 아디브 시샤클리(Adib Shishakli)가 쿠데타로 권력을 장악하자, 아플라크는 처음에는 그와 협력할 수 있다고 믿었으나, 시샤클리가 바트당을 포함한 모든 정당을 금지하면서 바트당 지도부와 주요 당원들은 레바논으로 탈출했다.[2]
레바논에서 아플라크와 알비타르는 악람 알하우라니(Akram al-Hawrani)가 이끄는 아랍 바트당과 아랍 사회당(Arab Socialist Party) (ASP)의 합병에 합의하여 1952년 아랍 사회주의 바트당을 설립했다. 이 당은 시샤클리 통치에 맞서는 작전 기지로 활동했고, 1954년 2월 시샤클리가 축출된 후 시리아는 5년 만에 최초의 민주적 선거를 실시했다. 아플라크, 알-비타르, 알-하우라니가 이끄는 바트당은 의회에 22명의 의원을 배출했다.[3] 아플라크는 당의 제2차 전당대회에서 국가 지도부의 사무총장으로 선출되었다.[4]

1950년대 중후반, 바트당은 가말 압델 나세르 이집트 대통령과 관계를 발전시켜 아랍 연합 공화국(UAR)을 설립했다. 그러나 나세르는 아플라크에게 당 해산을 강요했고, 아플라크는 당원들과 상의 없이 당을 해산했다. UAR 해체 직후, 아플라크는 바트당 국가사령부 사무총장으로 재선되었다. 1963년 3월 8일 혁명으로 시리아에 바트당 정부가 수립되었으나, 1965년 아플라크는 당내 입지가 약해져 당 대표 자리에서 물러나야 했다.[5]
2. 4. 권력 투쟁과 분열 (1963년 ~ 1968년)
1958년 시리아는 이집트와 아랍 연합 공화국을 결성했지만, 이집트의 가말 압델 나세르 대통령에 의해 아플라크는 당의 해산을 강요받았다. 아플라크는 당대회에서 논의하는 대신 스스로 해산했다.[16] 바트 운동은 나세르 정권에 의해 소외되었다.[15] 소수의 전 바트당원만이 아랍 연합 공화국의 공직을 얻을 수 있었고, 알-하우라니는 부통령이 되었고, 알-비타르는 문화지도부 장관이 되었다.[17][18] 일부 젊은 활동가들은 당대회의 결정 없이 해산을 결정한 아플라크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여 아플라크에 대한 비난의 목소리가 높아졌다. 결국, 하페즈 알아사드와 살라흐 자디드 등이 당의 전멸을 막기 위해 군사위원회를 설립했다.[15] 1959년 제3차 당대회에서는 아플라크의 해산 결정이 지지되었지만, 1960년 당대회에서는 자디드가 당시 알려지지 않았던 군사위원회 대표로 참가하여 결정을 뒤집고 당의 재건을 요구했다. 대회에서는 아랍 연합 공화국의 민주화를 통해 나세르와의 관계 개선을 결정했다. 또한, 알-하우라니파는 시리아의 탈퇴를 요구했다.[16] 1961년 아랍 연합 공화국의 해체가 결정되었을 때, 알-비타르를 포함한 일부 회원들은 박수를 보냈다.[17]1961년 선거에서는 20석을 확보했다. 1962년, 홈스에서 제5차 당대회가 개최되었는데, 4년 만에 아플라크가 주최했다. 알-하우라니는 초대받지 못했고, 아플라크에 반항적인 활동을 하는 자, 아랍 연합 공화국 시대에 나세르주의자로 변절한 자들도 초대받지 못했다. 아플라크는 국가 지도부 사무총장에 재선되었고, 시리아 지역 바트 조직의 재건을 명령했다. 당대회 중에 아플라크와 군사위원회는 무함마드 움란을 통해 처음으로 접촉했다. 군사위원회는 쿠데타 허가를 요청했고, 아플락은 그것을 지원했다.[19] 바트당 이라크 지역 지부가 라마단 혁명을 성공시킨 것을 계기로 군사위원회는 나짐 알쿠드시 대통령에 대한 쿠데타를 서둘러 준비했다. 1963년 3월 8일 혁명이라는 군사 쿠데타를 성공시켜 시리아에서 바트당 정권이 수립되었다. 쿠데타 지도자들의 첫 명령은 혁명 지도부 국가 평의회(NCRC) 설치였는데, 바트당원과 나세르주의자들로 구성되었지만, 처음부터 시민이 아닌 군인 주도였다.

바트당과 나세르주의자들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바트당이 이라크와 시리아에서 정권을 장악함으로써 나세르의 아랍 지도자로서의 위상이 약화되었다. 나세르는 바트당에 대한 신랄한 선전 공세를 시작했다. 아플라크는 나세르에 의해 "로마 황제의 꼭두각시"나 "키프로스인 기독교도" 등으로 선전되었다. 아플라크는 분노를 드러내며 반나세르주의자가 되었다. 그 결과, 나세르와의 관계 회복을 목표로 하는 알-비타르와 불화하게 되었다.
나세르와의 대립은 바트당의 기존 지도부를 약화시키고 군사위원회에 확장의 여지를 주었다. 군사위원회는 이론적 지도를 모색하기 위해 예전처럼 아플락에게로 향하지 않고, 함무드 알 슈피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파와 연락을 취했다. 바트당 시리아 지역 대회에서 군사위원회는 아플락과 기존 지도부의 온건한 사회경제 정책에 반대하며 지도부와 동등한 지위에 있음을 증명했다. 특히 아플락에 대해서는 구세대로 취약해져 지도자 자리에서 물러나야 한다고 생각했다. 1963년 10월 제6차 당 대회가 열리고 아플락은 간신히 사무총장직을 유지했지만, 알-슈피와 알리 살리흐 알 사디가 이끄는 마르크스주의 세력이 최대 세력이 되었다. 또한 아플락의 동료들은 직책을 얻지 못했고, 예를 들어 알-비타르는 국가 지도부 자리를 잃었다. 옛 시민 중심의 지도층을 대신하여 군인 중심의 지도층이 점차 성장해갔다. 시리아에서는 자디드와 아민 알 하피즈, 이라크에서는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와 살리흐 마흐디 아마쉬가 국가 지도부에 선출되었다. 군사위원회는 시민 지도자들을 대체해 가고 있었지만, 그에 대한 비판에도 민감했고, 선전 책자에는 사회주의 재건이 달성된다면 시민과 군인의 공존이 중요하다고 적었다.
당시 외부에서는 바트 운동이 시리아와 이라크 양국에서 성공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이라크 바트당은 이미 권력을 잃어가고 있었다. 나세르주의자 압둘 살람 아리프 대통령과 군과의 대립이 발생하여 1963년 11월 이라크 쿠데타로 이라크 바트당은 정권에서 축출되었다.
군사위원회와 결별한 전 위원 움란이 아플라크에게 위원회의 시민 지도층을 축출하고 바트당을 장악하려는 극비 계획을 폭로했다. 곧이어 움란은 아플라크파 지원을 위해 스페인 대사로 망명했다. 아플라크는 이 위협에 대응하여 국가 지도부에 지역 지도부 해산을 요구했다. 그러나 당원 대다수의 반대에 부딪혀 요구 철회를 강요당했다. 또한 당의 규율을 강화하여 그들을 규제했다. 군사위원회는 여기에 더욱 대항하여 "지역주의자"를 자처하는 반아플라크파 시민들을 단호하게 지원했다.
1965년 3월, 바트당 시리아 지부 지역 당대회가 열려 국가 지도부에서 지역 지도부로 권력 이양이 이루어졌다. 그 이후 지역 지도부가 시리아의 사실상 최고 권력 기구가 되었다. 지역 서기장이 총리, 내각, 군 사령관을 지명할 권한을 가졌다. 아플라크는 제8차 당대회를 열어 대결을 시도했지만 아무런 성과도 거두지 못했다. 그러나 레바논과 사우디 선출의 일부 국가 지도부 구성원들이 군사위원회를 너무 억누르면 오히려 당 전체를 지배하려 들고 이라크와 같은 상황이 될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이 조언을 받아들여 아플라크는 침묵을 지켰다. 그러나 놀랍게도 침묵이 화근이 되어 사무총장직을 잃고 시리아계 레바논인 무니프 알-라자즈가 계승했다. 그러나 두 진영은 예상치 못한 형태로 뒤바뀌었다. 알-하피즈 대통령이 아플라크파로 전향했다. 알-하피즈의 가담으로 아플라크파는 재기했고, 알-비타르와 움란이 스페인에서 돌아와 신정부에 참여했다.
2. 5. 이라크 주도 바트당 활동과 죽음 (1968년 ~ 1989년)
1966년 시리아 쿠데타로 살라흐 자디드와 하페즈 알아사드가 정권을 잡으면서 아플라크는 시리아에서 도망쳐 다시는 조국으로 돌아가지 못했다.[1] 이 쿠데타로 바트당은 시리아파와 이라크파로 분열되었다.[2] 시리아파 바트당은 자디드와 아사드를 중심으로 자키 알아르수지를 바트주의 사상의 아버지로 받들었다. 반면 이라크파 바트당은 아흐마드 하산 알바크르와 사담 후세인을 중심으로, 이전처럼 아플라크를 바트주의 사상 창시자로 여겼다.[3] 쿠데타 직후 열린 제9차 당대회에서 아플락파는 추방되었고, 이라크 대표단은 시리아의 바트당과 결별했다.[4] 이라크 바트당은 같은 달 베이루트에서 "진정한" 제9차 당대회를 개최하고,[5] 아플라크를 민족지도부 사무총장으로 선출했다.[6] 오랜 동지였던 살라흐 알딘 알비타르는 이때 바트당을 탈당하고 바트 운동에서 완전히 손을 뗐다.[7]
아플라크는 제9차 당대회 이후 바그다드로 거처를 옮겼다. 1970년까지 머물렀으나, 검은 9월 사건 이후 이라크 정부의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 지원 부족을 비난했다.[6] 아플라크는 이라크 정부에 내전 개입을 요구했지만, 바크르는 이를 거부했다. 이에 반발한 아플라크는 레바논으로 돌아갔다.[6] 1971년에는 시리아 정부가 아플락에게 궐석재판으로 사형을 선고하기도 했다.[8] 1974년 이라크로 돌아왔지만,[9] 이라크 정치에는 개입하지 않았다. 이라크로 이주한 후에는 몇 권의 책을 출판했는데, 그중 가장 유명한 것은 1975년에 출판된 《아랍 혁명 운동의 왜곡에 대한 투쟁》이다. 1979년에 대통령이 된 후세인을 돕기도 했다.[6] 이란-이라크 전쟁 당시 이란 정부는 아플락을 "기독교인 이단자"로 규정하고, 후세인이 기독교인의 영향 아래 있다고 비난했다.[6] 실제로 이라크에서 아플락은 바트 운동 창시자로서 모든 명예를 누렸지만, 정책 결정에서는 거의 무시되었다.[9]
1989년 사망 후에는 국장이 치러졌다. 그를 위한 사당으로 대규모 묘와 능이 세워졌다. 이라크 건축가 차다지(Chadagee)가 설계한 묘는 예술적 가치가 매우 높다고 평가받으며, 알킨디 거리(Al-Kindi street)와 카디시야 고가도로 교차점에 있는 바트당 전범 아랍 본부 서쪽 부지에 위치했다. 2003년 이라크 전쟁 중 묘가 파괴되었다는 소문과 비난이 있었지만, 매장실과 그 위의 건물은 손상되지 않았다. 푸른 타일로 장식된 돔은 캠프 주변을 둘러싼 콘크리트 T자 벽 위로 보인다.[10][11][12][13]
3. 사상
미셸 아플라크의 사상은 바트당의 이념적 기반이 되었으며, 아랍 민족주의, 아랍 사회주의, 세속주의를 주요 특징으로 한다. 1966년 시리아 쿠데타 이후 바스당은 시리아 주도 바스당과 이라크 주도 바스당으로 분열되었지만, 양측 모두 아플라크를 바트주의의 주요 창시자로 인정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을 연결하여 이슬람이 아랍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았다. 그는 아랍 국가들이 통합되지 않으면 쇠퇴할 것이며, 봉건제, 종파주의, 지역주의와 같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이러한 문제 해결을 위해 혁명 운동이 필요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위당이 아랍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바스당의 슬로건 "단결, 자유, 사회주의"에서 '단결'은 아랍 국가의 통합, '자유'는 사상의 다원주의를 지지했지만 투표 형태의 다원주의는 반대, '사회주의'는 서구와 다른 아랍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사회주의가 무함마드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아랍인들을 억압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개인을 만드는 체제라고 보았다.
아플라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에 모두 반대했지만, 냉전 시대 두 강대국 간 균형이 권력 분립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을 혁명적 운동으로 보고, 아랍의 각성과 확장이 종교적 메시지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아랍인들의 영성이 이슬람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모든 아랍 종교 공동체는 이슬람의 정신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무함마드를 숭배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아랍인이 무함마드를 본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아플라크는 이슬람이 국가와 사회에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으며, 바스당은 무신론과 근본주의 모두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속 정부를 지지하며, 바스 국가는 종교 대신 "아랍 민족주의, 그리고 도덕 – 자유"에 기반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3. 1. 아랍 민족주의
아플라크는 바스당의 주요 이념 중 하나인 아랍 민족주의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와 이슬람을 연결하여, 이슬람이 아랍 정체성의 중요한 부분이라고 보았다.아플라크는 아랍 국가들이 통합되지 않으면 쇠퇴할 것이며, 봉건제, 종파주의, 지역주의, 지적인 반동주의와 같은 문제들을 겪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혁명 운동이 필요하며,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전위당이 아랍 국가를 이끌어야 한다고 생각했다.[12]
바스당의 슬로건인 "단결, 자유, 사회주의"에서 '단결'은 아랍 국가의 통합을 의미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국가의 건설이 아랍의 부흥(바스)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믿었다. '자유'는 자유민주주의와는 다른 의미로, 사상의 다원주의를 지지했지만 투표 형태의 다원주의는 반대했다. 그는 당이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기 때문에 과도기에는 국민과 상의 없이 통치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사회주의'는 서구의 사회주의와는 다른 아랍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아플라크는 아랍 사회주의가 무함마드 시대에 기원을 두고 있으며, 아랍인들을 억압과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개인을 만드는 체제라고 보았다.
아플라크는 변증법적 유물론을 비판하고 공산주의와 자본주의 모두에 반대했지만, 냉전 시대에 두 강대국 간의 균형이 권력 분립에 바람직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이슬람을 혁명적인 운동으로 보았고, 아랍의 각성과 확장이 종교적 메시지에 기인한다고 믿었다. 따라서 아랍인들의 영성이 이슬람과 직결되어 있다고 보았으며, 모든 아랍 종교 공동체는 이슬람의 정신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아플라크는 무함마드를 숭배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아랍인이 무함마드를 본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아플라크는 이슬람이 국가와 사회에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으며, 바스당은 무신론과 근본주의 모두에 반대한다고 말했다. 그는 세속 정부를 지지하며, 바스 국가는 종교 대신 "아랍 민족주의, 그리고 도덕 – 자유"에 기반한 국가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13] 아플라크는 종교를 "대중의 아편"으로 보고, 사회주의 혁명의 발전 노력을 훼손하는 것으로 보았다. 1956년 아플락은 종교가 기존 사회 질서의 엘리트들이 사회의 약자 계층의 억압과 착취를 용이하게 하는 부패한 시스템을 유지하는 데 사용하는 도구라고 주장했다.[14] 아플락은 "피 사빌 알-바아스"에서 "억압받는 사람들이 이 시대에 종교를 억압자들이 의존하는 무기로 본다... 부패한 상황을 악용하는 사람들은 이 부패를 악용하는데, 그것은 사람들을 마약으로 만들고, 억압자와 노예 소유자에 대한 혁명을 막기 때문이다."라고 썼다.[15]
3. 2. 아랍 사회주의
"단결, 자유, 사회주의"라는 아랍 사회주의 바스당의 슬로건은 아플라크와 바스주의의 핵심 원칙이다. 단결은 아랍 민족을 하나의 국가인 아랍 국가로 통합하는 것을 의미했다. 아랍 국가의 건설은 아랍 발전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것이었다. 이 새로운 국가의 건설은 아랍 바스(문자 그대로 "부흥"을 의미함)로 이어질 것이었다.[1] 그의 시대의 아랍 국가들은 통합되지 않으면 점진적으로 "쇠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들 국가는 "봉건제, 종파주의, 지역주의, 지적인 반동"과 같은 여러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아플라크에 따르면 아랍 국가들을 "치료"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혁명 운동을 통해서였다. 아플라크는 마르크스주의의 영향을 받아 아랍 국가를 무기한 기간 동안 통치할 전위 정당의 필요성을 보았다(이 기간은 옛 체제에서 새 체제로의 과도기가 될 것입니다).[2]자유의 필요성은 바스주의의 특징 중 하나였다.[3] 그러나 이것은 자유민주주의에서 사용되는 의미와 같은 자유가 아니었다.[4] 아플라크는 사상의 다원주의를 강하게 믿었지만, 투표 형태의 다원주의에는 반대했다. 이론적으로 바스당은 과도기에 국민과 상의하지 않고 국민을 통치하고 인도할 것이다.[4] 왜냐하면 당이 무엇이 옳은지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5]
마지막 원칙인 '사회주의'는 서구에서 정의된 사회주의가 아니라 아플라크가 만든 용어인 독특한 형태의 아랍 사회주의를 의미했다. 아플라크에 따르면, 아랍 세계에서 사회주의는 원래 형태로 무함마드의 통치하에 처음 등장했다. 아랍 사회주의의 요점은 국가 통제의 필요성이나 경제적 평등과 같은 질문에 답하는 것이 아니라, 아랍인들을 압제와 노예 상태에서 해방시켜 독립적인 개인을 만드는 체제였다.[6]
아플라크는 변증법적 유물론이 유일한 진리라는 마르크스의 견해에 반대했지만, "삶에서 물질적 경제적 조건의 중요성"은 근대사에서 가장 위대한 발견 중 하나라고 믿었다.[7]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플락은 자본주의와 공산주의 모두를 비판했으며, 냉전 중 두 강대국 중 어느 하나도 붕괴되기를 원하지 않았다. 냉전이 그들의 권력에 대한 일종의 균형 장치라고 믿었기 때문이다.[8] 20년 이상 미셸 아플라크의 수필 모음집인 ''Fi Sabil al-Ba'ath''(번역: "부흥으로 가는 길")는 바스당의 주요 이데올로기 책이었다.[12]
3. 3. 세속주의
미셸 아플라크는 이슬람교에서 혁명적인 운동을 발견했다. 그는 다른 국적과 달리 아랍의 탄생과 확장은 종교적 메시지에 기인한다고 생각했으며, 아랍의 정신성은 이슬람교와 연결되어 있어 이슬람교를 배제하고는 아랍을 논할 수 없다고 믿었다. 아플라크는 아랍 민족주의가 정신적 혁명 운동이며, 무함마드 이븐 압드 알라(무함마드 이븐 아브드 알라)의 이슬람 운동에 이은 아랍 세계 제2의 혁명 운동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아랍의 모든 종교 공동체가 이슬람교의 정신성을 존중해야 한다고 생각했으며, 아플라크 자신은 이슬람교를 존경하는 기독교인이었다.[13] 아플라크는 무함마드를 반드시 숭배할 필요는 없지만, 모든 아랍인이 무함마드를 본받도록 노력해야 한다고 믿었다. 그는 무함마드 시대에는 무슬림과 아랍이 동의어였다고 주장하며, 예수 그리스도는 종교 지도자였지만 정치 지도자는 아니었던 반면, 무함마드는 양쪽 모두였으며 이슬람교의 지도자이자 아랍 세계 최초의 지도자였다고 강조했다.그러나 아플라크가 주목한 것은 이슬람의 정신성이었으며, 이슬람교는 국가나 사회에 “강요되어서는 안 된다”고 강조했다. 아플라크는 무신론에 반대했지만, 근본주의에도 부정적이었으며, “천박한 허위의 신앙”이라고 표현했다. 바아스주의 이데올로기는 모든 종교가 평등하다고 주장했다. 아플라크는 반무신론적 입장이었지만, 세속 국가를 강력히 지지했으며, “바아스당 국가는 종교를 대신하여 아랍 민족주의와 윤리, 자유를 기반으로 한 국가를 목표로 한다”고 주장했다.[14]
4. 평가와 유산
푸아드 아자미(Fouad Ajami)는 아플락의 사상에 실질적인 내용이 부족하다고 비판하며, "거의 300페이지에 달하는 텍스트에서 무엇이 잘못되었고 무엇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그의 통찰력은 찾아볼 수 없으며, 단어에 대한 눈에 보이는 열정만 있을 뿐이다"라고 말했다. 또한 "아플락은 당에 권력을 포기하고 '순수한 본질'로 돌아갈 것을 촉구한다. 이 비판에는 어느 정도 사실이 있다"라고 덧붙였다.[1] 아플락은 아랍 민족의 미래와 과거, 그리고 아랍 세계의 통합에 대해 많은 시간과 노력을 기울여 글을 썼다. 카난 마키야(Kanan Makiya)는 "아플락에게 현실은 당의 내면 세계에 국한되어 있다"고 지적했다.[2] 칼 마르크스나 존 로크와 같은 다른 철학자들과는 달리, 아플락의 세계관은 인류의 물질적 또는 사회경제적 행동에 대해 명확한 입장을 취하지 않는다.[3] 다른 철학자들이 실재와 비실재, 즉 규범적 분석과 기술적 분석 사이의 차이점을 구분하는 반면, 아플락은 일반적으로 '있는 것'과 '되어야 하는 것'을 명확히 정의하지 않았다. 그의 사상에서 둘 다 동일한 범주, 즉 '달성 가능한 것'으로 융합된다.[4]
살라 알딘 알 비타르와는 달리, 아플락은 "정치 생활에 적합하지 않은 비전가이자 몽상가"였다.[5] 그는 동료들에게 "금욕적인, 수줍고 강렬한 인물로서 단순하고 겸손한 삶을 살았다"고 묘사되었다.[6] 아플락은 자신의 목표를 스스로 또는 자신이 이끄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달성하는 대신 다른 사람들의 도움을 구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그는 1958년에 가말 압델 나세르, 압드 알 카림 카심, 압둘 라만 아리프와, 1963년에는 아흐메드 하산 알 바크르와 알리 살리 알 사디(Ali Salih al-Sadi), 그리고 1970년대에는 사담 후세인과 협력했다.[7] 대부분 시리아 주도 바스당 출신인 여러 바스당원들은 아플락이 바스당 이념을 자키 알 아르수지로부터 훔쳤다고 비난하며, 그를 "도둑"으로 규정했다.[8]
아플락은 자신의 저서에서 언론의 자유와 다른 인권, 그리고 하층민에 대한 지원을 강력히 옹호했다. 시리아에서 군사위원회가 점차 권력을 장악하는 과정에서 아플락은 그가 계획했던 민주주의 대신 군사 독재가 수립되는 것을 반대했다.[9] 그러나 그의 이념을 사용한 정부들은 이러한 이상을 결코 실현하지 못했다. 대부분의 학자들은 시리아의 아사드 정권과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 정권이 아플락의 이념을 독재의 구실로만 사용했다고 본다.[10]
5. 저작
- On the Way of Resurrection영어, 1947년 출판
- Unity Between Syria and Egypt영어, 1958년 출판
- The Battle for One Destiny영어, 1958년 출판
- The Starting Point영어, 1971년 출판
- The Ba'ath and Arab Unity영어, 1972년 출판
- The Ba'ath and Socialism영어, 1973년 출판
- The Struggle Against Distorting the Movement of Arab Revolution영어, 1975년 출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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