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스타파 틀라스
1. 개요
무스타파 틀라스는 1932년 시리아에서 태어난 군인이자 정치인으로, 2004년까지 시리아 국방부 장관을 역임했다. 그는 1952년 홈스 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바트당에 가입하여 하페즈 알아사드와 인연을 맺었다. 1970년 알아사드의 집권 이후 국방부 장관에 임명되어 반체제 인사를 탄압하는 등 권력을 강화했다. 그는 여러 저서를 출판하고 논란이 되는 발언을 하여 비판을 받기도 했다. 2011년 시리아 내전 발발 후 프랑스로 떠났으며, 2017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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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명 | 무스타파 압둘 카디르 틀라스 |
|---|---|
| 원어 이름 | مصطفى عبد القادر طلاس |
| 로마자 표기 | Musṭafā ʿAbd al-Qādir Ṭalās |
| 출생일 | 1932년 5월 11일 |
| 출생지 | 알-라스타 (프랑스 위임통치령 시리아) |
| 사망일 | 2017년 6월 27일 |
| 사망지 | 보비니, 프랑스 |
| 국적 | 시리아 |
| 가족 | 나헤드 틀라스 (딸) 마나프 틀라스 (아들) 피라스 틀라스 (아들) 압둘 라자크 틀라스 (조카) 아크람 오제 (사위) 만수르 오제 (손자 사위) |
| 소속 정당 | 바트당 (1966년 이전) 바트당 시리아 지부 (1966년 이후) |
|---|
| 직책 1 | 국방부 장관 |
|---|---|
| 임기 시작 1 | 1972년 3월 22일 |
| 임기 종료 1 | 2004년 5월 12일 |
| 대통령 1 | 누레딘 알아타시 (1968–1970) 아흐마드 알-카티브 (1970–1971) 하페즈 알아사드 (1971–2000) 바샤르 알아사드 (2000–2004) |
| 전임자 1 | 하페즈 알아사드 |
| 후임자 1 | 하산 투르크마니 |
| 직책 2 | 육군 참모총장 |
| 임기 시작 2 | 1968년 |
| 임기 종료 2 | 1972년 |
| 대통령 2 | 누레딘 알아타시 (1968-70) 아흐마드 알카티브 (1970-71) |
| 전임자 2 | 아흐마드 수와디니 |
| 후임자 2 | 유수프 샤쿠르 |
| 직책 3 | 바트당 시리아 지부 지역 사령부 위원 |
| 임기 시작 3 | 1968년 9월 28일 |
| 임기 종료 3 | 2005년 6월 9일 |
| 임기 시작 4 | 1965년 4월 4일 |
| 임기 종료 4 | 1965년 12월 |
| 소속 | 시리아군 |
|---|---|
| 복무 기간 | 1952–2004년 |
| 계급 | |
| 참전 | 6일 전쟁 욤 키푸르 전쟁 레바논 내전 시리아 이슬람 반란 걸프 전쟁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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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반유대주의 -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
안티오코스 4세 에피파네스는 셀레우코스 왕조의 왕으로, 로마 인질 생활 후 왕위를 찬탈하여 사치스러운 통치와 이집트 원정, 유대교 탄압으로 마카베오 반란을 일으키는 등 유대교 전통에서 부정적인 인물로 기억된다. -
시리아의 반유대주의 -
알로이스 브루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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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군인 -
바셀 알아사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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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리아의 군인 -
알바이 아메드 베리
알바이 아메드 베리는 시리아 내전과 관련된 인물로서, 아크라브 학살 지역과 연관되어 ISIL에 체포되었다가 이드리브 군사위원회의 개입과 석방 촉구 시위로 풀려난 사건은 시리아 내전의 복잡한 세력 관계와 무력 단체의 영향력을 보여준다. -
홈스주 출신 -
이브라힘 알마
이브라힘 알마는 시리아 축구 선수로, 시리아 리그와 이란 리그에서 활약하며 여러 클럽에서 우승을 경험했고, 시리아 축구 국가대표팀으로도 활동하며 WAFF 챔피언십 우승에 기여했으나, 정부 지지 의사 표명으로 이적에 어려움을 겪기도 했다. -
홈스주 출신 -
칼레드 알아사드
칼레드 알아사드는 팔미라 유적의 수석 관리자로서 40년간 유적 발굴과 복원에 헌신하고 유네스코 세계 유산 지정에 기여했으나, ISIL에 의해 참수당해 팔미라 유적 보호에 헌신한 그의 죽음은 비극적인 사건으로 기록되었다.
2. 어린 시절 및 교육
무스타파 틀라스는 1932년 5월 11일 홈스 근처 라스탄의 수니파 유력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압둘 카디르 틀라스는 오스만 제국 시절 터키 수비대에 무기를 팔았던 수니파 귀족이었다. 그의 가족은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프랑스 점령군을 위해 일하기도 했다. 그의 조모는 체르케스인이었고, 어머니는 튀르크인 후손이었다. 틀라스는 어머니를 통해 알라위파 가문과도 연관이 있다고 알려져 있다. 그는 홈스에서 초등 및 중등 교육을 마친 후, 1952년 홈스 사관학교에 입학했다.
3. 군 경력
틀라스는 15세에 바트당에 가입했고, 홈스 사관학교 재학 중에 하페즈 알아사드를 만났다. 1960년대, 하페즈 알아사드는 바트당이 지원한 1963년 시리아 쿠데타 이후 시리아 정부 내에서 권력을 잡았고, 틀라스의 군 계급과 당에서의 지위를 높여주었다. 1965년 홈스의 바트당 사령관이었을 때, 무스타파 틀라스는 친정부 성향의 전우를 체포하기도 했다.
1969년, 틀라스는 군 사절단을 이끌고 베이징으로 가서 중국 정부와 무기 협상을 체결하는 데 성공했다. 당시 소련이 시리아 내부의 권력 승계 분쟁에서 발을 빼고 있어서 적대감이 커져가던 와중에, 무스타파 틀라스는 마오쩌둥의 마오 주석 어록을 흔드는 사진을 찍기도 했다.
1970년 시리아 수정운동 이후 하페즈 알아사드가 집권하면서, 무스타파 틀라스는 1972년 국방부 장관으로 승진했고, 30년 간의 1인 통치 기간 동안 알아사드가 가장 신임하는 인물이 되었다. 아사드 아부카일리는 틀라스가 "어떠한 권력 기반도 없고, 정치적 기술도 없으며 평범했지만, 그의 대통령에 대한 충성심은 완벽했다"는 이유로 하페즈 알아사드가 그를 국방부 장관에 임명하는데 제격이었다고 설명했다. 그가 국방부 장관에 있을 동안 모든 반체제 인사가 숙청되었으며, 이는 이슬람인이건 민주주의자건 상관없었다.
1999년 10월 19일, 중국 국방부 장관인 치하오티엔이 시리아-중국 간의 군사적 관계를 증대시키기 위해 다마스쿠스에서 무스타파 틀라스와 논의한 이후, 곧바로 이스라엘로 향해 에후드 바라크와 만나 군사 관계에 대해 논의했다. 중국은 1000 규모의 이스라엘 전투기를 구매한다고 이스라엘과 합의했다.
2000년대 초, 틀라스는 국방부 장관과 부총리를 겸임하고 있었다. 그는 바트당 중앙위원회의 회원이기도 했다. 그는 군 보도부의 부장이자, 군사위원회의 의장이기도 했다.
4. 논란
틀라스는 여러 저서를 출판하고, 언론 인터뷰 등을 통해 논란이 되는 발언을 일삼았다. 그는 국제적으로 비판을 받는 출판사 '틀라스 서적'을 운영하기도 했다.
1998년 시리아 국방부 장관이었던 틀라스는 알바얀지와의 인터뷰에서 자신이 레바논의 "저항" 세력에게 미국 해병대 241명과 프랑스 공수부대원 58명을 공격하고 살해하라고 지시했다고 자랑했다. 그러나 그는 젊은 시절부터 지나 롤로브리지다를 사랑했기 때문에 다국적군의 이탈리아 군인에 대한 공격은 막았다고 말했다. 같은 해 10월, 틀라스는 요르단이라는 나라는 존재하지 않고 단지 "남 시리아"만 있다고 주장했다.
틀라스는 욤 키푸르 전쟁에서 포로로 잡힌 이스라엘 군인들에 대한 식인 행위에 대해 자랑하기도 했다. 그는 알레포 출신 병사가 도끼로 유대인 병사 28명을 죽이고 그들 중 한 명의 목을 먹었다고 말하며, 그에게 공화국 영웅 훈장을 수여했다고 밝혔다.
1982년 레바논 전쟁 이후 베카 계곡에서 3명의 이스라엘 군인이 실종되었을 때, 틀라스는 사우디아라비아 잡지에 "우리는 이스라엘에 개의 뼈를 보냈고, 이스라엘은 아무리 항의해도 좋다."라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1991년 걸프 전쟁 당시 시리아가 연합군 측에 참여했을 때, 그는 사담 후세인이 스커드 미사일을 이스라엘로 발사했을 때 "넘치는 기쁨"을 느꼈다고 말했다. 1998년 8월, 틀라스는 팔레스타인 지도자 야세르 아라파트를 "육만 명의 창녀의 아들"이라고 비난했다.
2000년, 1996년 2월 하마스 자살 폭탄 테러로 사망한 이라 와인스타인의 미망인과 자녀들은 틀라스와 레바논 주재 시리아 군사 정보부 수장 가지 카난을 상대로 소송을 제기했다. 그들은 범죄자들에게 물질적 자원과 훈련을 제공한 책임이 있다는 이유였다.
2009년 6월 8일 RT에서 방송된 인터뷰에서 틀라스는 지나 롤로브리지다가 자신에게 "내 인생의 유일한 사랑"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또한 다이애나비가 자신에게 "사랑과 감사의 마음이 가득한" 편지를 썼고, 찰스 3세가 금도금 스털링 기관단총을 선물했다고 주장했다.
5. 시리아 내전 이후
시리아 내전 발발 이후, 무스타파 틀라스는 치료를 목적으로 프랑스로 떠났다고 밝혔다. 그의 아들인 사업가 피라스 틀라스는 2011년에 이집트로 떠났으며, 두바이에 있다는 보도도 있었다. 무스타파의 또 다른 아들인 마나프 틀라스는 시리아군 장교였으나, 2012년 아사드 정부에서 퇴출되어 터키를 거쳐 프랑스로 망명했다.
6. 사생활
틀라스는 1958년 알레포 귀족 출신인 라미아 알 자비리와 결혼했다. 이 결혼으로 그는 전통적인 엘리트 계층과 유대를 이어가며 사회적으로 진출할 수 있었다. 슬하에 나히드(1958년생), 피라스(1960년생), 마나프(1964년생), 사리야(1978년생) 등 네 자녀를 두었다. 그의 딸 나히드는 사우디아라비아의 백만장자이자 무기 판매상인 아크람 오제와 결혼했다. 나히드 틀라스는 시리아 내전 이후 파리에 거주하고 있다. 막내딸 사리야는 레바논에서 결혼했다.
틀라스는 바트당 정부에서 시리아의 전통적 사회 체제와 좋은 관계를 유지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그의 취미는 승마, 테니스, 수영이었다.
8. 훈장
| 국가 | 훈장 |
|---|---|
| 우마이야 훈장 (1등급) | |
| 시민 공로 훈장 (1등급) | |
| 군사 훈장 (1등급) | |
| 용맹 훈장 (1등급) | |
| 헌신 훈장 (특별 등급) | |
| 장기 근속 훈장 (특별 등급) | |
| 준비 훈장 | |
| 연방 훈장 | |
| 3월 8일 기념 훈장 | |
| 10월 6일 기념 훈장 | |
| 오스트리아 공화국 공로 훈장 대성장 | |
| 공로 훈장 기사 | |
| 샤른호르스트 훈장 | |
| 국민과 조국에 대한 공로 훈장 (금) | |
| 명예 훈장 대십자 | |
| 우호 훈장 (1등급) | |
| -- 레바논 | 국립 레바논 삼나무 훈장 대수장 |
| 국기훈장 (1등급) | |
| 국기훈장 (3등급) | |
| -- 파키스탄 | 니샨-에-임티아즈 (1등급) |
| 우호 훈장 | |
| 주코프 훈장 | |
| 위대한 조국 전쟁 승리 50주년 기념 메달 1941–1945 | |
| 인민 우호 훈장 | |
| 위대한 조국 전쟁 승리 20주년 기념 메달 1941-1945 | |
| 위대한 조국 전쟁 승리 40주년 기념 메달 1941–194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