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하페즈 알아사드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시리아 북부의 알라위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나, 1970년 쿠데타로 집권하여 2000년 사망할 때까지 시리아를 통치한 인물이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워 이스라엘에 강경한 입장을 고수하며,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련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30년간의 독재 정치로 반대파를 탄압하기도 했으며,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 후 그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대통령직을 승계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라타키아주 출신 - 아도니스 (시인)
    아도니스는 1930년 시리아에서 태어난 아랍 시인이자 문학 평론가로, 현대 아랍 시의 혁신을 주도하고 아랍 문화와 사회에 대한 비판적 시각을 제시하며 아랍 문학에 큰 영향을 미쳤고, 문학 잡지 창간 및 편집을 통해 아랍 현대시 운동의 발전에 기여했다.
  • 바트당 (시리아)의 정치인 - 미셸 아플라크
    미셸 아플라크는 아랍 민족주의 사상가이자 바트당 창시자 중 한 명으로, 아랍 민족의 단결, 자유, 사회주의를 핵심 가치로 하는 바트주의를 주창하며 아랍 바트당을 이끌었고, 말년에는 이라크 바트당 사무총장을 역임했다.
  • 바트당 (시리아)의 정치인 - 바샤르 알아사드
    바샤르 알아사드는 2000년부터 2024년까지 시리아 대통령를 역임한 정치인이었으나, 권위주의 통치와 시리아 내전 관련 인권 침해 등으로 국제적 비난을 받았으며, 2024년 정권 붕괴 후 러시아로 망명했다.
  • 시리아의 대통령 - 가말 압델 나세르
    가말 압델 나세르는 이집트 혁명을 이끌고 초대 대통령이 된 정치가이자 혁명가로, 범아랍주의와 반제국주의를 내세워 아랍 세계의 지도자로 부상했으며, 수에즈 운하 국유화, 경제 개발, 사회주의 정책 추진 등의 업적과 권위주의적 통치, 6일 전쟁 패배 등의 비판을 동시에 받으며 이집트 근현대사에 큰 영향을 미쳤다.
  • 시리아의 대통령 - 압둘 할림 하담
    압둘 할림 하담은 시리아의 정치인으로, 외무부 장관, 부통령을 역임하고 하페즈 아사드 사망 후 임시 대통령을 지냈으나 바샤르 알 아사드와 갈등을 겪고 프랑스로 망명하여 반정부 활동을 하다 사망했다.
하페즈 알아사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공식 초상화, 1987년경
이름하페즈 알아사드
원어 이름حافظ الأسد
로마자 표기Ḥāfiẓ al-ʾAsad
출생일1930년 10월 6일
출생지카르다하, 알라위트 국가, 프랑스 시리아
사망일2000년 6월 10일
사망지다마스쿠스, 시리아 아랍 공화국
매장지하페즈 알아사드 영묘, 카르다하, 시리아 아랍 공화국
정당바트당 (1966년부터)
다른 정당아랍 바트당 (1946–1947), 바트당 (1947–1966)
배우자아니사 마클루프 (1957년 결혼)
친척자밀 알아사드(형), 리파트 알아사드(형)
자녀부시라 알아사드, 바셀 알아사드, 바샤르 알아사드, 마지드 알아사드, 마헤르 알아사드
아버지알리 알아사드
어머니나사 샬리시
학력홈스 군사 아카데미
충성시리아
군 복무시리아 공군, 시리아군
복무 기간1952–2000년
계급장군
지휘시리아 공군, 시리아군
전투6일 전쟁, 소모전, 검은 9월, 욤 키푸르 전쟁
시리아 대통령
순서18대
직책시리아 대통령
임기 시작1971년 3월 14일
임기 종료2000년 6월 10일
부통령마흐무드 알아유비 (1971–1976), 리파트 알아사드 (1984–1998), 압둘 할림 카담 (1984–2000), 주하르 마샤르카 (1984–2000)
총리자신
압둘 라만 클라이파위
마흐무드 알아유비
압둘 라만 클라이파위
무함마드 알리 알할라비
압둘 라우프 알카슴
마흐무드 알주비
무함마드 무스타파 메로
이전 대통령누레딘 알아타시, 아흐마드 알카티브 (대행)
다음 대통령압둘 할림 카담 (대행), 바샤르 알아사드
시리아 총리
순서55대
직책시리아 총리
임기 시작1970년 11월 21일
임기 종료1971년 4월 3일
대통령아흐마드 알카티브, 자신
이전 총리누레딘 알아타시
다음 총리압둘 라만 클라이파위
시리아 국방부 장관
순서11대
직책국방부 장관
임기 시작1966년 2월 23일
임기 종료1972년 3월 22일
대통령누레딘 알아타시, 아흐마드 알카티브, 자신
총리유수프 주아인, 누레딘 알아타시, 자신, 압둘 라만 클레이파위
이전 장관무함마드 움란
다음 장관무스타파 틀라스
바트당 국가 사령부 서기장
직책아랍 사회주의 바트당 국가 사령부 서기장
부서기장압둘라 알 아흐마르
임기 시작1971년 9월 12일
임기 종료2000년 6월 10일
이전 서기장누레딘 알아타시
다음 서기장바샤르 알아사드
바트당 시리아 지역 사령부 서기장
직책시리아 지역 지부 지역 사령부 서기장
부서기장모하마드 자베르 바즈부즈, 주하르 마샤르카, 술라이만 카다
임기 시작1970년 11월 18일
임기 종료2000년 6월 10일
이전 서기장누레딘 알아타시
다음 서기장바샤르 알아사드
바트당 시리아 지역 사령부 구성원
직책시리아 지역 지부 지역 사령부 구성원
임기 시작1966년 3월 27일
임기 종료2000년 6월 10일
임기 시작1963년 9월 5일
임기 종료1965년 4월 4일

2. 생애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에서 알라위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알라위파의 칼비야 부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알리 알아사드는 1920년대에 지역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프랑스 통치에 반대했지만 나중에 협력하여 공직에 임명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그를 "알-아사드"(사자)라고 불렀고, 1927년 그는 이 별명을 성으로 삼았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전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으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를 탄압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미리 후계자로 지목했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윗줄은 왼쪽부터 그의 자식 마헤르 알아사드, 바샤르 알아사드, 바셀 알아사드, 마지드 알아사드, 부쉬라 알아사드와 그의 아내 아니사 마클루프, 하페즈 알아사드

2. 1. 초기 생애 및 교육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시리아와 레바논 위임 통치령 (현재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라타키아 주)의 카르다하에서 알라위파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알라위파의 칼비야 부족 출신이었다. 그의 아버지 알리 알아사드는 1920년대에 지역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프랑스 통치에 반대했지만 나중에 협력하여 공직에 임명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그를 "알-아사드"(사자)라고 불렀고, 1927년 그는 이 별명을 성으로 삼았다.

1946년 프랑스가 시리아를 떠난 후, 많은 시리아인들은 알라위파가 프랑스와 협력했기 때문에 그들을 불신했다. 아사드는 9세에 수니파가 지배하는 라타키아에서 교육을 시작했고, 그의 가족 중 고등학교에 진학한 첫 번째 사람이었다. 그는 뛰어난 학생이었고, 약 14세에 여러 상을 수상했다.

그는 알라위파를 환영하는 정당에 접근했는데, 그중 아랍 바스당에 1946년 입당했다. 바스당은 범아랍주의적이고, 사회주의적 이념을 주장했다. 아사드는 바스당 학생 조직을 조직하고 당의 메시지를 전달함으로써 당에 기여했다. 그는 무슬림 형제단의 반대에 직면하기도 했지만, 많은 수니파 친구들을 사귀었고, 그들 중 일부는 나중에 그의 정치적 동맹이 되었다. 1949년부터 1951년까지 그의 학교 학생회 위원장이자 시리아 학생 연합 회장으로서 당에서 점점 더 두각을 나타냈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

2. 2. 군 경력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난 하페즈 알아사드는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바트당에 가입했다. 1963년 바트당이 집권한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하기 전까지 군에서 주요 경력을 쌓았다.

고등학교 졸업 후, 하페즈 알아사드는 의사가 되기를 희망했지만, 그의 아버지는 학비를 감당할 수 없었다. 대신 1950년 그는 시리아군에 입대하여 호므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비행을 하고 싶어 알레포의 비행학교에 입학했고, 1955년 졸업하여 시리아 공군 소위로 임관되었다. 비행학교 졸업 후 최우수 조종사 트로피를 수상했고, 다마스쿠스 근처 메제 공군기지에 배치되었다. 1957년에는 유력 가문인 막흘루프 가문의 먼 친척인 아니사 막흘루프와 결혼했다.

비행기 옆에 서 있는 군인들
하페즈 알-아사드(위)는 1951~1952년 시리아 공군사관학교(알레포 외곽)에서 동기생들과 함께 피아트 G.46-4B의 날개 위에 서 있다.


1955년, 군부는 아디브 시샤클리 대통령에 대한 반란으로 분열되었고, 하심 알-아타시가 다시 대통령으로 복귀하여 시리아는 민정 통치를 받게 되었다. 그러나 1955년 선거 결과 슈크리 알-쿠와틀리가 대통령이 되면서 아타시의 집권은 불안정해졌다. 사관학교에서 아사드는 미래의 국방장관 무스타파 틀라스를 만났다. 같은 해, 아사드는 추가 훈련을 위해 이집트로 파견되었다. 1956년 가말 압델 나세르가 수에즈 운하를 국유화하자 시리아는 영국의 보복을 두려워했고, 아사드는 방공 임무에 투입되었다. 그는 시리아의 이집트에 대한 충성을 보여주기 위해 카이로로 날아간 시리아 조종사들 중 한 명이었다. 수에즈 위기 동안 그는 시리아 북부와 동부 상공의 정찰 임무도 수행했다. 1957년, 아사드는 비행대장으로서 MiG-17 조종 훈련을 위해 소련으로 파견되었다.

1958년 시리아와 이집트는 아랍연합공화국(UAR)을 결성했다. 모든 시리아 정당(바트당 포함)이 해산되었고, 고위 장교들이 시리아군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아사드는 군에 남아 빠르게 승진하여 대위 계급에 오른 후 이집트로 전근되어 호스니 무바라크와 함께 군사 교육을 계속했다.

아사드는 시리아 공군을 지휘했으며, 1964년 말까지 소장 계급으로 공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그는 공군 장교들에게 특권을 부여하고, 자신의 심복들을 요직에 임명했으며, 효율적인 정보망을 구축했다.

2. 3. 바트당 내 권력 투쟁

하페즈 알아사드는 1963년 쿠데타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쿠데타 당시, 그는 소규모 부대를 이끌고 다마스쿠스 북동쪽 40km에 있는 두마이르 공군기지를 점령했다. 그의 부대는 저항에 부딪힌 유일한 부대였으나, 기지 사령관과의 협상을 통해 항복을 받아냈다.

1963년 쿠데타 이후, 제1차 지역대회에서 아사드는 시리아 지역 지도부로 선출되었다. 1964년 하마 폭동 당시 아사드는 필요하다면 폭력적으로 진압하는 데 찬성표를 던졌다.

1966년 시리아 쿠데타에서 군사위원회는 국가지도부를 전복했다. 이 쿠데타는 바트당 운동의 영구적인 분열과 신바스주의의 출현을 야기했다. 쿠데타 이후 아사드는 국방장관에 임명되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골란 고원을 상실하자, 바트당 내에서는 살라 자디드가 이끄는 급진파와 온건파 간의 대립이 격화되었다. 아사드는 온건파의 지도자가 되어 1969년 2월 28일 정변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1970년 9월 요르단 내전이 발발하자, 누레딘 알아타시 대통령은 팔레스타인 해방기구(PLO)를 지원하기 위해 시리아 육군 부대를 요르단 영토에 침입시켰다. 그러나 아사드는 출병 명령을 거부했다. 1970년 11월, 자디드는 아사드와 무스타파 탈라스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지만, 아사드는 쿠데타(교정 운동)로 자디드와 아타시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전권을 장악했다. 아사드는 총리 겸 국방장관, 바트당 시리아 지역 지도부 서기장에 취임했으며, 1971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83년 아사드가 심장병으로 입원하는 동안, 그의 동생 리파트 알아사드가 쿠데타를 계획했다. 군부는 아사드파와 리파트파로 나뉘어 내전 직전에 이르렀으나, 아사드는 리파트를 회유하고 그의 세력을 약화시킨 후, 1984년 프랑스와 스페인으로 추방했다.

3. 대통령 재임 (1971년 ~ 2000년)

## 권력 강화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여러 남성들이 줄지어 앉아 있는 모습
1971년 3월 아사드의 인민평의회에서의 첫 대통령 취임식.


아사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 전쟁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으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를 탄압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고란 고원을 상실하자, 바트당 내에서는 자디드 당 지역 지도부 서기장이 이끄는 급진파와 온건·현실주의파가 대립했고, 아사드(당시 국방장관)가 지도자가 된 온건파가 1969년 2월 28일 정변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아사드는 자디드를 지지한 소련의 간섭에 격분하여 심복인 무스타파 탈라스를 중소 국경 분쟁을 일으킨 직후의 중화인민공화국에 파견하여 무기 지원을 확보하고, 마오쩌둥의 어록을 내걸게 했다.

1970년 11월, 자디드는 아사드와 탈라스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지만, 아사드는 쿠데타(矯正運動)로 자디드와 아타시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전권을 장악했다. 아사드는 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았고, 서기장에 취임했으며, 이듬해인 1971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고, 또한 이슬람교 수니파가 대다수인 시리아에서 약 10% 정도에 불과한 소수파인 이슬람교 알라위파를 우대했기 때문에 국내 최대 종파인 수니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국내에서 무슬림 형제단 등의 대두가 보이는 등 정권 기반의 불안정화가 나타났다. 이란 혁명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초에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 격화되었고, 1982년에는 중부 도시 하마 등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아사드 정권은 이를 무력 진압했다(하마 학살). 이로써 시리아에서의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 외교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워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 간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이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 등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렸다.

### 중동 전쟁과 레바논 내전

{{Quote box

| width = 25em

| align = left

| bgcolor = #ACE1AF

| quote = 우리는 레바논에 어떤 지역적 야망이나 이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동기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경제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희생하면서 했습니다.

| source = —아사드, 레바논 개입에 대한 논평

}}

1975년에 시작된 내전 중 시리아는 1976년 레바논에 개입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후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유일한 이웃 국가였다. 시리아는 처음에 갈등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실패하자 아사드는 시리아에 주둔하고 시리아 장교들이 있는 정규군인 팔레스타인 해방군(PLA)을 레바논에 파병하여 질서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이 무렵 이스라엘 정부는 지역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레바논의 마론파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했다. 시리아에 충성하는 PLA와 무장세력 간의 충돌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1976년 초 아사드는 레바논의 기독교 레바논 대통령인 술레이만 프랑지에의 사임을 강요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레바논 정치인들의 접근을 받았다. 아사드는 변화에 개방적이었지만, 일부 레바논 정치인들이 프랑지에의 축출에 그를 가담시키려는 시도에는 저항했다. 레바논 민족 운동(LNM)의 지도자인 카말 준블라트는 자신의 강력한 군사적 위치가 프랑지에의 사임을 강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사드는 팔레스타인의 입지를 강화할 좌파의 레바논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의 승리도 원하지 않았고, 대신 레바논과 지역을 안전하게 지킬 중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준블라트가 1976년 3월 27일 아사드와 만났을 때, 그는 그에게 전쟁에서 "이기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아사드는 1976년 대통령 선거를 보장하기 위해 휴전이 발효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한편, 아사드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는 국제적인 승인 없이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PLO는 공식적으로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러 PLO 구성원이 LNM과 함께 싸웠다. 아사드는 아라파트와 PLO를 레바논에서 멀리하려고 시도하면서 시리아의 지원 중단을 위협했다.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프랑지에가 1976년에 사임하자 시리아는 레바논 국회의원들에게 엘리아스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76년 5월 31일 시리아는 레바논에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개입 전 아사드와 시리아 정부는 레바논의 여러 이해관계자 중 하나였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레바논 정치의 주요 결정 요인이 되었다. 아사드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군 병력은 천천히 3만 명으로 증가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의 팔레스타인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개입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시리아의 개입 후 일주일 만에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76년 6월 8일 시리아군은 시돈에서 후퇴했고, 베이루트에서는 LNM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나 아사드의 행동은 아랍 세계의 많은 부분을 분노하게 했고, 시리아가 PLO를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은 그에게 비판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에서 아사드의 마론파와의 동맹에 대한 상당한 적대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리아 정부는 아랍 연맹에 갈등 해결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랍 연맹은 평화유지를 위해 아랍 억제군(ADF)을 설립하여 중재를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시리아의 전략은 기독교 민병대를 계속 지원하면서 LNM과 그 팔레스타인 협력자들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아사드는 테러와 협박을 사용하여 레바논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다. 카말 준블라트는 1977년 암살로 사망했고, 1982년 시리아 요원들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중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레바논 대통령 바시르 게마엘을 암살했다. 준블라트와 게마엘은 레바논을 지배하려는 아사드의 시도에 저항했다. 아사드는 1983년 레바논-이스라엘 협정의 실패를 초래했고, 대리 게릴라전을 통해 이스라엘 방위군1985년 레바논 남부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 냉전 시기 외교

국제 관계에서 하페즈 알아사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었다.

### 걸프 전쟁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아사드는 쿠웨이트 편에 서서 이라크의 침략을 시리아의 이익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오랫동안 서로 혐오했으며,[1] 아사드는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승리할 경우 시리아가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 결과적으로 시리아는 미국 주도 연합군에 합류하여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사우디아라비아 방어에 파병했다.[2]

## 국내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집권 후 알라위파의 안보 및 정보 부문 장악력을 거의 독점적인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강압적인 체제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고, 국가와 당을 약화시켰다. 아사드 주변의 알라위파 장교들은 대통령의 친족이나 고객으로서 그에게 특권적인 접근 권한을 가지면서 동시에 당 내 직책과 강압 수단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의 주요 인물들은 가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리파트 알-아사드는 투쟁 부대를 통제했고, 아사드의 매형인 아드난 마클루프는 대통령 경호대 사령관으로 그의 2인자였다. 다른 주요 인물로는 알리 하이달(특수부대 사령관), 이브라힘 알-알리(인민군 사령관), 무하마드 알-쿨리(1970년~1987년 아사드의 공군 정보국 국장), 그리고 군 정보국장 알리 두바가 있었다. 아사드는 샤피크 파야드(제3사단 사령관), 이브라힘 사피(제1사단 사령관), 아드난 바드르 하산(제9사단 사령관) 등 알라위파 장군들을 통해 군을 통제했다. 1990년대 아사드는 수니파 장군 히크마트 알-시하비를 알라위파 장군 알리 아슬란으로 대체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함으로써 알라위파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양복을 입은 네 명의 남성
1971년 하페즈 알-아사드와 수니파 정치 엘리트


집권 초기 아사드의 엘리트 중 일부는 비종파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진 수니파 인물로는 압둘 할림 카담, 시하비, 나지 자밀, 압둘라 알-아흐마르, 무스타파 틀라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아사드와는 별개의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경제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1970년 집권 후 시리아의 농업 및 산업 부문을 현대화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1974년 유프라테스 강에 타브카 댐을 완공하여 관개, 전기 공급, 산업 및 기술 개발을 장려했다.

위성사진, 호수와 댐
타브카 댐(중앙), 1974년 건설


그러나 1977년에 이르러 그의 경제 정책은 여러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 정부, 공공 및 민간 부문의 비효율성, 부패, 문맹, 열악한 교육, 인플레이션, 무역 적자 증가, 소비재 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1976년 이후 레바논 개입으로 인한 재정 부담은 경제 문제를 악화시키고 부패와 암시장을 조장했다. 특히, 아사드의 형 리파트 알아사드를 포함한 고위 군 장교들이 레바논에서의 밀수에 연루되어 정부 수입에 악영향을 미치고 부패를 심화시켰다.

1980년대 초 시리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1984년 중반에는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정부는 밀수 단속을 시도했지만, 리파트 알아사드의 부패 연루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초, 시리아 경제는 5~7% 성장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1991년 5월, 아사드 정부는 경제 자유화 정책을 통해 국내외 민간 투자를 활성화했다. 그러나 바트당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국영 기업 민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시리아는 다시 불황에 빠졌다. 낮은 경제 성장률과 국유화된 대외 무역은 경제 위기의 징후였다. 1998년 유가 하락과 1999년 가뭄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 종교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집권 후 알라위파의 안보 및 정보 부문 장악력을 거의 독점적인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강압적인 체제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고, 국가와 당을 약화시켰다. 아사드 주변의 알라위파 장교들은 대통령의 친족이나 고객으로서 그에게 특권적인 접근 권한을 가지면서 동시에 당 내 직책과 강압 수단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의 주요 인물들은 가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리파트 알-아사드는 투쟁 부대를 통제했고, 아사드의 매형인 아드난 마클루프는 대통령 경호대 사령관으로 그의 2인자였다. 다른 주요 인물로는 알리 하이달(특수부대 사령관), 이브라힘 알-알리(인민군 사령관), 무하마드 알-쿨리(1970년~1987년 아사드의 공군 정보국 국장), 그리고 군 정보국장 알리 두바가 있었다. 아사드는 샤피크 파야드(제3사단 사령관), 이브라힘 사피(제1사단 사령관), 아드난 바드르 하산(제9사단 사령관) 등 알라위파 장군들을 통해 군을 통제했다. 1990년대 아사드는 수니파 장군 히크마트 알-시하비를 알라위파 장군 알리 아슬란으로 대체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함으로써 알라위파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집권 초기 아사드의 엘리트 중 일부는 비종파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진 수니파 인물로는 압둘 할림 카담, 시하비, 나지 자밀, 압둘라 알-아흐마르, 무스타파 틀라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아사드와는 별개의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 후계 문제

1983년 11월, 당뇨병을 앓던 하페즈 알아사드는 심근 경색과 함께 정맥염을 앓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85년 축출될 때까지 리파트 알아사드는 시리아 국민들에게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고위 관리 중 리파트 알아사드를 지지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대부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형의 위엄과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부패 혐의에 취약했다.

포스터 전쟁 직후, 리파트 알아사드의 모든 측근들이 권력에서 물러났다. 이 조치는 1984년 2월 27일 국방기업과 공화국 경비대 간의 충돌을 거의 일으킬 뻔했지만, 3월 11일 리파트 알아사드가 세 명의 부통령 중 한 명으로 임명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있었다.

아사드의 후계자 1순위는 그의 형인 리파트 알아사드였으며, 그는 1980년 초에 이러한 생각을 밝혔다. 그의 형의 쿠데타 시도는 그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제도화된 권력 구조를 약화시켰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시리아 외무장관을 지낸 압둘 할림 카담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왕조적 계승에 반대했다. 카담은 아사드가 지역 사령부 구성원들과 계승에 대한 의도를 논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지도부의 수니파는 고령화되었고, 알라위파는 아사드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시리아로 돌아온 바샤르 알아사드는 홈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급속히 준장으로 승진하여 한때 공화국 근위대에서 복무했다.

아사드의 왕조적 계승 계획에 대한 회의론은 정부 안팎에 널리 퍼져 있었고, 비판가들은 시리아가 군주국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1998년까지 바샤르는 바트당에 진출하여 카담의 레바논 담당 부문을 인수했다(그는 1970년대부터 이 직책을 맡았다).

1990년대 후반 아사드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아사드가 회의 중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피곤해 보였다고 말했다.

2000년 6월 10일, 69세의 나이로 하페즈 알아사드는 레바논 총리 살림 알후스와 전화 통화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하페즈 알아사드 사후 바트당 충성파의 지지로 그의 아들 바샤르에게 권력이 이양되어 시리아는 최초로 왕조 체제를 수립한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1984년 다마스쿠스에서 열린 군사식典에 참석한 하페즈 알아사드(오른쪽)와 그의 형 리파트 알아사드.


아사드 묘소 파괴 전 카르다하


3. 1. 권력 강화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아사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전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으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를 탄압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패트릭 실(Patrick Seale)에 따르면, 아사드의 통치는 "즉각적이고 상당한 이점으로 시작되었다. 그가 대체한 정부는 너무나도 혐오스러워서 어떤 대안이라도 안도감을 주었다." 그는 먼저 아플락과 자디드의 지도력 하에서 상실되었다고 생각한 국가 통합을 확립하려고 시도했다. 아사드는 처음부터 전임자와 달리 지방 마을을 방문하여 시민들의 불만을 경청했다. 시리아 국민들은 아사드의 집권이 변화를 가져올 것이라고 느꼈다. 그가 통치자로서 취한 첫 번째 조치 중 하나는 술탄 알-아트라시를 방문하여 대 아랍 혁명 중 그의 노력에 경의를 표하는 것이었다. 그는 작가 연합에 접근하여 급진적 바트당원들이 반동 세력이라고 부른 것을 대표했다는 이유로 지하로 숨어들거나 투옥되거나 추방당했던 사람들을 복권시켰다. 아사드는 나라를 민주화하지는 않았지만, 정부의 억압적인 정책을 완화했다.

그는 기본 식료품 가격을 15% 인하하여 일반 시민들의 지지를 얻었다. 자디드의 정보 기관은 숙청되었고, 일부 군사 범죄 수사권은 경찰로 이관되었으며, 자디드 시대의 재산 몰수는 역전되었다. 레바논으로의 여행 및 무역 제한이 완화되었고, 아사드는 민간 부문의 성장을 장려했다.

1970년대 후반부터 경제 상황이 악화되었고, 또한 이슬람교 수니파가 대다수인 시리아에서 약 10% 정도에 불과한 소수파인 이슬람교 알라위파를 우대했기 때문에 국내 최대 종파인 수니파의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국내에서 무슬림 형제단 등의 대두가 보이는 등 정권 기반의 불안정화가 나타났다. 이란 혁명의 영향을 받은 1980년대 초에는 이슬람주의자들에 의한 정권에 대한 반항이 격화되었고, 1982년에는 중부 도시 하마 등에서 이슬람주의 세력에 의한 폭동이 일어났지만, 아사드 정권은 이를 무력 진압했다(하마 학살). 이로써 시리아에서의 무슬림 형제단의 활동은 쇠퇴의 길을 걷게 되었다.

아사드는 자신이 최종 결정권을 가지는 체제를 제도화하여 국가와 당의 합의 기관의 권력을 약화시켰다. 그의 대통령직 후반기에 이념적 신념을 대신하여 지도자에 대한 충성심이 자리 잡으면서 부패가 만연하게 되었다. 국가가 후원하는 개인숭배가 널리 퍼졌다. 동료들의 희생하에 아사드의 권력이 강해짐에 따라 그는 정부의 유일한 상징이 되었다.

1967년 제3차 중동 전쟁에서 고란 고원을 상실하자, 바트당 내에서는 자디드 당 지역 지도부 서기장이 이끄는 급진파와 온건·현실주의파가 대립했고, 아사드(당시 국방장관)가 지도자가 된 온건파가 1969년 2월 28일 정변으로 실권을 장악했다. 아사드는 자디드를 지지한 소련의 간섭에 격분하여 심복인 무스타파 탈라스를 중소 국경 분쟁을 일으킨 직후의 중화인민공화국에 파견하여 무기 지원을 확보하고, 마오쩌둥의 어록을 내걸게 했다.

1970년 11월, 자디드는 아사드와 탈라스에 대한 반격을 시도했지만, 아사드는 쿠데타(矯正運動)로 자디드와 아타시 대통령을 실각시키고 전권을 장악했다. 아사드는 총리 겸 국방장관을 맡았고, 서기장에 취임했으며, 이듬해인 1971년 국민투표를 통해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3. 2. 외교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세워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 간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이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 등에도 불구하고,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했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고 불렸다.

=== 중동 전쟁과 레바논 내전 ===

{{Quote box

| width = 25em

| align = left

| bgcolor = #ACE1AF

| quote = 우리는 레바논에 어떤 지역적 야망이나 이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동기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경제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희생하면서 했습니다.

| source = —아사드, 레바논 개입에 대한 논평

}}

1975년 레바논 내전 발발 후, 시리아는 1976년 레바논에 개입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후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유일한 이웃 국가였다. 시리아는 내전 초기 중재를 시도했으나 실패하자, 팔레스타인 해방군(PLA)을 레바논에 파병하여 질서 회복을 시도했다. 이스라엘은 레바논의 마론파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하며 지역적 영향력을 강화하려 했다.

1976년 초, 아사드는 레바논 레바논 대통령 술레이만 프랑지에의 사임을 돕기 위해 레바논 정치인들의 접근을 받았으나, 프랑지에 축출 시도에는 저항했다. 레바논 민족 운동(LNM) 지도자 카말 준블라트는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프랑지에를 사임시키려 했으나, 아사드는 팔레스타인의 입지 강화를 우려하여 중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1976년 대통령 선거 보장을 위해 휴전을 요구했고, 국제적 승인 없이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PLO는 공식적으로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일부 PLO 구성원이 LNM과 함께 싸웠다. 아사드는 아라파트와 PLO를 레바논에서 멀리하려고 시도하며, 시리아의 지원 중단을 위협했다. 프랑지에 사임 후, 시리아는 레바논 국회의원들에게 엘리아스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1976년 5월 31일, 시리아는 레바논에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개입 전에는 레바논의 여러 이해관계자 중 하나였지만, 이후 레바논 정치의 주요 결정 요인이 되었다. 시리아는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팔레스타인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개입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시리아 개입 일주일 후,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1976년 6월 8일, 시리아군은 시돈에서 후퇴했고, 베이루트에서는 LNM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아사드의 행동은 아랍 세계의 많은 부분을 분노하게 했고, 시리아 내에서도 마론파와의 동맹에 대한 상당한 적대감이 있었다. 아랍 연맹은 아랍 억제군(ADF)을 설립하여 중재를 시작했고, 시리아는 기독교 민병대를 지원하면서 LNM과 팔레스타인 협력자들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는 전략을 취했다. 1976년 12월과 1977년 1월까지 대부분의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그룹은 중화기를 처분했다. 찰스 윈슬로에 따르면 레바논 내전의 "주요 단계"는 1977년에 끝났다.

아사드는 테러와 협박을 사용하여 레바논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다. 1977년 카말 준블라트 암살, 1982년 바시르 게마엘 레바논 대통령 암살 등이 시리아의 소행으로 추정된다. 아사드는 1983년 레바논-이스라엘 협정 실패를 초래했고, 이스라엘 방위군1985년 레바논 남부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 냉전 시기 외교 ===

국제 관계에서 하페즈 알아사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었다.

=== 걸프 전쟁 ===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쿠웨이트 침공 당시, 아사드는 쿠웨이트 편에 서서 이라크의 침략을 시리아의 이익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오랫동안 서로 혐오했으며,[1] 시리아는 미국 주도 연합군에 합류하여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사우디아라비아 방어에 파병했다.[2]

3. 2. 1. 중동 전쟁과 레바논 내전

{{Quote box

| width = 25em

| align = left

| bgcolor = #ACE1AF

| quote = 우리는 레바논에 어떤 지역적 야망이나 이기적이거나 기회주의적인 동기로 간 것이 아닙니다. 오히려 우리 경제와 우리의 일용할 양식을 희생하면서 했습니다.

| source = —아사드, 레바논 개입에 대한 논평

}}

1975년에 시작된 내전 중 시리아는 1976년 레바논에 개입했다.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 이후 시리아는 이스라엘을 위협하는 유일한 이웃 국가였다. 시리아는 처음에 갈등을 중재하려고 시도했다. 그 시도가 실패하자 아사드는 시리아에 주둔하고 시리아 장교들이 있는 정규군인 팔레스타인 해방군(PLA)을 레바논에 파병하여 질서를 회복하도록 명령했다. 이 무렵 이스라엘 정부는 지역적 영향력을 강화하기 위해 레바논의 마론파 난민들에게 국경을 개방했다. 시리아에 충성하는 PLA와 무장세력 간의 충돌이 전국적으로 발생했다. 시리아의 지원과 카다암의 중재에도 불구하고 라시드 카라미(레바논의 수니파 총리)는 내각을 임명할 만큼 충분한 지지를 받지 못했다.

1976년 초 아사드는 레바논의 기독교 레바논 대통령인 술레이만 프랑지에의 사임을 강요하기 위해 도움을 요청하는 레바논 정치인들의 접근을 받았다. 아사드는 변화에 개방적이었지만, 일부 레바논 정치인들이 프랑지에의 축출에 그를 가담시키려는 시도에는 저항했다. 압둘 아지즈 알 아흐다브 장군이 권력 장악을 시도했을 때 시리아군은 그를 저지했다. 한편, 급진적인 레바논 좌파는 군사적 갈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었다. 레바논 민족 운동(LNM)의 지도자인 카말 준블라트는 자신의 강력한 군사적 위치가 프랑지에의 사임을 강요할 것이라고 믿었다. 아사드는 팔레스타인의 입지를 강화할 좌파의 레바논 승리를 원하지 않았다. 그는 우파의 승리도 원하지 않았고, 대신 레바논과 지역을 안전하게 지킬 중도적 해결책을 모색했다. 준블라트가 1976년 3월 27일 아사드와 만났을 때, 그는 그에게 전쟁에서 "이기도록" 허락해 달라고 설득하려고 했다. 아사드는 1976년 대통령 선거를 보장하기 위해 휴전이 발효되어야 한다고 답했다. 한편, 아사드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는 국제적인 승인 없이 레바논에 군대를 파병했다.

야세르 아라파트와 PLO는 공식적으로 갈등에 개입하지 않았지만, 여러 PLO 구성원이 LNM과 함께 싸웠다. 아사드는 아라파트와 PLO를 레바논에서 멀리하려고 시도하면서 시리아의 지원 중단을 위협했다. 양측은 합의에 이르지 못했다. 프랑지에가 1976년에 사임하자 시리아는 레바논 국회의원들에게 엘리아스 사르키스를 대통령으로 선출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레바논 국회의원 3분의 1(주로 레이몽 에드의 지지자들)은 미국과 시리아의 간섭에 항의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다.

1976년 5월 31일 시리아는 (시리아 공식 발표에 따르면) 쿠바야트와 아안드카트 마론파 도시에 대한 폭격을 종식시키기 위해 레바논에 대대적인 개입을 시작했다. 개입 전 아사드와 시리아 정부는 레바논의 여러 이해관계자 중 하나였지만, 그 이후로 그들은 레바논 정치의 주요 결정 요인이 되었다. 아사드의 명령에 따라 시리아군 병력은 천천히 3만 명으로 증가했다. 시리아는 레바논의 팔레스타인군을 물리치는 데 도움을 주기 위해 미국과 이스라엘로부터 개입에 대한 승인을 받았다. 바아스당 그룹인 아스-사이카와 PLA의 힛틴 여단은 LNM 편에 선 팔레스타인인들과 싸웠다.

시리아의 개입 후 일주일 만에 기독교 지도자들은 지지 성명을 발표했다.

아스-사이카를 제외한 모든 팔레스타인 그룹의 공동 사령부가 무슬림 지도자들에 의해 설립되었고, PLO는 주요 공항 근처의 거점으로 몰아냈다. 그 직후, 아스-사이카와 다른 좌파 다마스쿠스 세력은 시리아 군에 흡수되었다. 1976년 6월 8일 시리아군은 시돈에서 후퇴했고, 베이루트에서는 LNM의 강력한 저항에 직면했다. 그러나 아사드의 행동은 아랍 세계의 많은 부분을 분노하게 했고, 시리아가 PLO를 제거하려고 하는 모습은 그에게 비판을 초래했다. 시리아 내에서 아사드의 마론파와의 동맹에 대한 상당한 적대감이 있었다. 결과적으로 시리아 정부는 아랍 연맹에 갈등 해결을 지원해 줄 것을 요청했다. 아랍 연맹은 평화유지를 위해 아랍 억제군(ADF)을 설립하여 중재를 시작했다. 이 시점에서 시리아의 전략은 기독교 민병대를 계속 지원하면서 LNM과 그 팔레스타인 협력자들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는 것이었다. 그러나 시리아는 아랍 연맹이 10월 17일 휴전을 요청하기 전에 LNM의 거점인 알레이를 점령할 수 없었다. 아랍 연맹은 ADF를 대부분 시리아군인 3만 명으로 강화했다. 일부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지만, 1976년 12월과 1977년 1월까지 대부분의 팔레스타인과 레바논 그룹은 중화기를 처분했다. 찰스 윈슬로에 따르면 레바논 내전의 "주요 단계"는 1977년에 끝났다. 1990년대 초까지 대부분의 폭력은 지역, 대리, 종파 간 및 국가 전쟁에 기인했다.

아사드는 테러와 협박을 사용하여 레바논에 대한 통제권을 확대했다. 준블라트는 시리아가 명령한 것으로 추정되는 1977년 암살로 사망했고, 1982년 시리아 요원들은 1982년 레바논 전쟁 중 이스라엘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은 레바논 대통령 바시르 게마엘을 암살했다. 준블라트와 게마엘은 레바논을 지배하려는 아사드의 시도에 저항했다. 아사드는 1983년 레바논-이스라엘 협정의 실패를 초래했고, 대리 게릴라전을 통해 이스라엘 방위군1985년 레바논 남부로 철수하도록 강요했다. 1980년대 중반 팔레스타인과 요르단 목표물에 대한 테러는 요르단 후세인 국왕과 PLO 간의 관계 개선을 방해하여 요르단 강 서안에서 요르단-이스라엘 협력을 늦추었다.

3. 2. 2. 냉전 시기 외교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 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 전쟁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다.

3. 2. 3. 걸프 전쟁

1990년 8월 사담 후세인쿠웨이트를 침공하자, 아사드는 쿠웨이트 편에 서서 이라크의 침략을 시리아의 이익에 대한 심각한 위협으로 간주했다. 아사드와 후세인은 오랫동안 서로 혐오했으며,[1] 아사드는 후세인이 쿠웨이트에서 승리할 경우 시리아가 다음 목표가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1] 결과적으로 시리아는 미국 주도 연합군에 합류하여 최대 2만 명의 병력을 사우디아라비아 방어에 파병했다.[2]

3. 3. 국내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집권 후 알라위파의 안보 및 정보 부문 장악력을 거의 독점적인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강압적인 체제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고, 국가와 당을 약화시켰다. 아사드 주변의 알라위파 장교들은 대통령의 친족이나 고객으로서 그에게 특권적인 접근 권한을 가지면서 동시에 당 내 직책과 강압 수단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고,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결과를 형성하는 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의 주요 인물들은 가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리파트 알-아사드는 투쟁 부대를 통제했고, 아사드의 매형인 아드난 마클루프는 대통령 경호대 사령관으로 그의 2인자였다. 다른 주요 인물로는 알리 하이달(특수부대 사령관), 이브라힘 알-알리(인민군 사령관), 무하마드 알-쿨리(1970년~1987년 아사드의 공군 정보국 국장), 그리고 군 정보국장 알리 두바가 있었다. 아사드는 샤피크 파야드(제3사단 사령관), 이브라힘 사피(제1사단 사령관), 아드난 바드르 하산(제9사단 사령관) 등 알라위파 장군들을 통해 군을 통제했다. 1990년대 아사드는 수니파 장군 히크마트 알-시하비를 알라위파 장군 알리 아슬란으로 대체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함으로써 알라위파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알라위파는 친족 관계와 호의에 따라 임명 및 승진되었지 전문적인 능력에 따라 임명 및 승진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으로 알라위파 엘리트가 등장했다. 그의 알라위파 정권의 반 수니즘 성향은 또한 아사드가 시아파 이란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밀어붙였다.

집권 초기 아사드의 엘리트 중 일부는 비종파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진 수니파 인물로는 압둘 할림 카담, 시하비, 나지 자밀, 압둘라 알-아흐마르, 무스타파 틀라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아사드와는 별개의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니파들이 1971년부터 1994년까지 공군 사령관(자밀, 수비 하다드, 알리 말라하피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총정보국장(아드난 다바그, 알리 알-마다니, 나지흐 주하이르, 후아드 알-압시, 바시르 안-나자르),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시리아 육군 참모총장(시하비), 아사드 사후까지 국방장관(틀라스)직을 역임했지만, 아사드 또는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과는 별개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밀이 공군을 이끌었을 때 그는 쿨리(알라위파 공군 정보국장)의 지식 없이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 실패 이후 아사드는 친척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 이전에는 수니파 동료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사드 정부의 망명자는 "틀라스는 군에 있지만 동시에 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결박하거나 풀지 않고 짐승의 꼬리 역할 이외의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예로 시하비는 가끔 아사드를 대표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 알리 아슬란(그의 임기 대부분 동안 작전 담당 제1참모차장)이 병력 기동을 담당했다. 수니파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권력은 알라위파가 가지고 있었다.

3. 3. 1. 경제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1970년 집권 후 시리아의 농업 및 산업 부문을 현대화하는 경제 정책을 추진했다. 1974년 유프라테스 강에 타브카 댐을 완공하여 관개, 전기 공급, 산업 및 기술 개발을 장려했다. 농민과 노동자들은 소득 증가, 사회 보장, 보건 및 교육 서비스 개선 혜택을 받았고, 도시 중산층도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얻었다.

그러나 1977년에 이르러 그의 경제 정책은 여러 문제로 인해 실패했다. 정부, 공공 및 민간 부문의 비효율성, 부패, 문맹, 열악한 교육, 인플레이션, 무역 적자 증가, 소비재 부족 등의 문제가 발생했다. 1976년 이후 레바논 개입으로 인한 재정 부담은 경제 문제를 악화시키고 부패와 암시장을 조장했다. 특히, 아사드의 형 리파트 알아사드를 포함한 고위 군 장교들이 레바논에서의 밀수에 연루되어 정부 수입에 악영향을 미치고 부패를 심화시켰다.

1980년대 초 시리아 경제는 더욱 악화되었고, 1984년 중반에는 식량 위기가 발생했다. 정부는 밀수 단속을 시도했지만, 리파트 알아사드의 부패 연루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1990년대 초, 시리아 경제는 5~7% 성장하며 회복세를 보였다. 1991년 5월, 아사드 정부는 경제 자유화 정책을 통해 국내외 민간 투자를 활성화했다. 그러나 바트당의 사회주의 이념으로 인해 국영 기업 민영화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1990년대 중반, 시리아는 다시 불황에 빠졌다. 낮은 경제 성장률과 국유화된 대외 무역은 경제 위기의 징후였다. 1998년 유가 하락과 1999년 가뭄은 경제에 큰 타격을 주었다. 아사드 정부는 긴급 조치를 시행했지만, 그 효과는 제한적이었다.

아사드 정부는 인구 증가를 억제하고 EU와의 협력을 추진하려 했으나, 경제 개방과 개혁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해 실패했다. 외신은 시리아의 경제 자유화 거부를 비판했고, 아사드 정부는 은행 시스템 현대화, 사립 은행 허용, 증권 거래소 개설을 거부했다.

3. 3. 2. 종교 정책

하페즈 알아사드는 집권 후 알라위파의 안보 및 정보 부문 장악력을 거의 독점적인 수준으로 증가시켰다. 강압적인 체제는 그의 통제하에 있었고, 국가와 당을 약화시켰다. 아사드 주변의 알라위파 장교들은 대통령의 친족이나 고객으로서 그에게 특권적인 접근 권한을 가지면서 동시에 당 내 직책과 강압 수단을 통제하는 위치에 있었기 때문에 중요했다. 따라서 그들은 정치적 중개자 역할을 할 수 있는 독보적인 위치에 있었고, 특히 위기 상황에서는 결과를 형성하는 데 독특한 위치를 차지했다.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의 주요 인물들은 가족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었다. 리파트 알-아사드는 투쟁 부대를 통제했고, 아사드의 매형인 아드난 마클루프는 대통령 경호대 사령관으로 그의 2인자였다. 다른 주요 인물로는 알리 하이달(특수부대 사령관), 이브라힘 알-알리(인민군 사령관), 무하마드 알-쿨리(1970년~1987년 아사드의 공군 정보국 국장), 그리고 군 정보국장 알리 두바가 있었다. 아사드는 샤피크 파야드(제3사단 사령관), 이브라힘 사피(제1사단 사령관), 아드난 바드르 하산(제9사단 사령관) 등 알라위파 장군들을 통해 군을 통제했다. 1990년대 아사드는 수니파 장군 히크마트 알-시하비를 알라위파 장군 알리 아슬란으로 대체하여 참모총장직에 임명함으로써 알라위파의 지배력을 더욱 강화했다. 높은 지위에 있던 알라위파는 친족 관계와 호의에 따라 임명 및 승진되었지 전문적인 능력에 따라 임명 및 승진되지 않았다. 따라서 이러한 정책으로 알라위파 엘리트가 등장했다. 그의 알라위파 정권의 반 수니즘 성향은 또한 아사드가 시아파 이란과의 관계를 더욱 강화하도록 밀어붙였다.

집권 초기 아사드의 엘리트 중 일부는 비종파적인 것으로 보였다. 그의 초기 통치 기간 동안 두드러진 수니파 인물로는 압둘 할림 카담, 시하비, 나지 자밀, 압둘라 알-아흐마르, 무스타파 틀라스가 있었다. 그러나 이들 중 누구도 아사드와는 별개의 권력 기반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수니파들이 1971년부터 1994년까지 공군 사령관(자밀, 수비 하다드, 알리 말라하피지), 1970년부터 2000년까지 총정보국장(아드난 다바그, 알리 알-마다니, 나지흐 주하이르, 후아드 알-압시, 바시르 안-나자르), 1974년부터 1998년까지 시리아 육군 참모총장(시하비), 아사드 사후까지 국방장관(틀라스)직을 역임했지만, 아사드 또는 알라위파가 장악한 안보 시스템과는 별개의 권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자밀이 공군을 이끌었을 때 그는 쿨리(알라위파 공군 정보국장)의 지식 없이 명령을 내릴 수 없었다. 이슬람주의자들의 반란 실패 이후 아사드는 친척에 대한 의존도를 높였다. 그 이전에는 수니파 동료들이 어느 정도 자율성을 가지고 있었다. 아사드 정부의 망명자는 "틀라스는 군에 있지만 동시에 군에 속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결박하거나 풀지 않고 짐승의 꼬리 역할 이외의 다른 역할을 하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또 다른 예로 시하비는 가끔 아사드를 대표했다. 그러나 그는 시리아 군대를 통제하지 못했다. 알리 아슬란(그의 임기 대부분 동안 작전 담당 제1참모차장)이 병력 기동을 담당했다. 수니파들이 전면에 나섰지만 권력은 알라위파가 가지고 있었다.

3. 4. 후계 문제

1983년 11월, 당뇨병을 앓던 하페즈 알아사드는 심근 경색과 함께 정맥염을 앓게 되었고, 이로 인해 후계 문제가 발생했다. 11월 13일, 병원에 있는 형을 방문한 후 리파트 알아사드는 대통령 출마를 선언했다고 알려졌다. 그는 하페즈가 더 이상 통치할 수 없다고 믿었다. 하페즈의 측근으로부터 지지를 얻지 못하자, 역사학자 한나 바타투에 따르면 "극도로 사치스러운" 약속을 통해 그들을 설득하려 했다.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85년 축출될 때까지 리파트 알아사드는 시리아 국민들에게 부패의 상징으로 여겨졌다. 국방기업 사령관으로 고액의 연봉을 받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설명할 수 없는 부를 축적했다. 바타투에 따르면, "그가 시리아, 유럽, 미국에서 부동산 투자에 필요한 막대한 자금을 합법적으로 축적했을 가능성은 없다"고 한다.

고위 관리 중 리파트 알아사드를 지지한 사람이 있었는지는 불분명하지만, 대부분 지지하지 않았다. 그는 그의 형의 위엄과 카리스마가 부족했고, 부패 혐의에 취약했다. 그의 5만 명의 병력을 가진 국방기업은 고위 지도부와 사회 전반에서 의심을 받았다. 그들은 부패하고 훈련이 부족하며 인간의 고통에 무관심한 것으로 여겨졌다. 리파트 알아사드는 군사적 지원도 부족했다. 장교와 병사들은 국방기업의 다마스쿠스 안보 독점, 별도의 정보기관과 감옥, 그리고 더 높은 급여에 불만을 품었다. 그는 형을 계승하려는 희망을 버리지 않고 국방기업 사령관직을 통해 국가를 장악하려 했습니다. "포스터 전쟁"으로 알려진 사건에서 국방기업 소속 인원들은 다마스쿠스에 있는 하페즈 알아사드의 포스터를 리파트 알아사드의 포스터로 바꿔 붙였다. 하페즈에게 충성하는 보안기관은 리파트 알아사드의 포스터를 하페즈의 포스터로 다시 바꿔 붙였다. 이 포스터 전쟁은 하페즈의 건강이 호전될 때까지 일주일 동안 지속되었다.

포스터 전쟁 직후, 리파트 알아사드의 모든 측근들이 권력에서 물러났다. 이 조치는 1984년 2월 27일 국방기업과 공화국 경비대 간의 충돌을 거의 일으킬 뻔했지만, 3월 11일 리파트 알아사드가 세 명의 부통령 중 한 명으로 임명되면서 갈등은 피할 수 있었다. 그는 하페즈 지지자에게 국방기업 사령관직을 넘겨줌으로써 이 자리를 얻었다. 리파트 알아사드의 사위가 국방기업의 새로운 수장이 되었다. 3월 30일 밤, 리파트는 국방기업 충성파에게 다마스쿠스를 봉쇄하고 도시로 진격할 것을 명령했다. 다마스쿠스에 있는 공화국 경비대는 경계 태세에 들어갔고, 제3기갑사단 사령관 샤피크 파야드(Shafiq Fayadh)는 다마스쿠스 외곽의 부대에 도시로 들어오는 길을 봉쇄하도록 명령했다. 특수부대 사령관 알리 하이다르가 리파트를 지지했다면 그의 계획은 성공했을 수도 있었지만, 하이다르는 대통령 편에 섰다. 하페즈는 리파트를 추방하는 형벌을 내렸고, 나중에 정치적 역할 없이 돌아올 수 있도록 허락했다. 국방기업은 3만~3만 5천 명 감축되었고, 그들의 역할은 공화국 경비대가 맡았다. 공화국 경비대 사령관 마클루프는 소장으로 승진했고, 당시 육군 소령이었던 하페즈의 아들 바셀 알아사드(Bassel al-Assad)는 경비대에서 영향력 있는 인물이 되었다.

아사드의 후계자 1순위는 그의 형인 리파트 알아사드였으며, 그는 1980년 초에 이러한 생각을 밝혔다. 그의 형의 쿠데타 시도는 그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제도화된 권력 구조를 약화시켰다. 아사드는 정책을 바꾸는 대신, 자신의 정부 모델을 갈고 닦아 권력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계획된 후계자로 알려진 바셀 알아사드에게 더 큰 역할을 부여했는데, 이는 정부 내에서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1994년 군사 회의에서 참모총장 시하비는 아사드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하기 때문에 시리아 군대가 골란 고원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달은 "우리는 무력해졌습니다. 우리와 상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분노하며 대답했다. 아사드는 하이달의 폭발적인 발언을 듣고 특수부대 사령관 하이달을 알라위트 출신 알리 하빕 소장으로 교체했다. 하이달은 또한 왕조적 계승에 반대했으며, 1994년 바셀의 죽음(아사드가 바샤르 알아사드를 후계자로 선택했을 때) 이후까지 자신의 견해를 비밀로 유지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아사드의 계승 계획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시리아 외무장관을 지낸 압둘 할림 카담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왕조적 계승에 반대했다. 카담은 아사드가 지역 사령부 구성원들과 계승에 대한 의도를 논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지도부의 수니파는 고령화되었고, 알라위파는 아사드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수니파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왕조적 계승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시리아로 돌아온 바샤르 알아사드는 홈스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했다. 그는 급속히 준장으로 승진하여 한때 공화국 근위대에서 복무했다. 그는 "전차 대대장, 지휘 및 참모"를 포함한 대부분의 군사 과목을 공부했다. (후자의 두 가지는 시리아군 고위 지휘관에게 필요한 것이었다.) 바샤르 알아사드는 1997년 7월 중령으로, 1999년 1월 대령으로 승진했다. 공식 자료에 따르면 바샤르의 급속한 승진은 "참모 장교 과정에서의 전반적인 우수성과 지휘 및 참모 과정의 일환으로 제출한 뛰어난 최종 프로젝트" 때문이라고 한다. 아사드는 바샤르의 훈련을 바탕으로 새로운 세대의 알라위트 보안 장교들을 임명하여 그의 계승 계획을 확보했다. 1998년 7월 1일 시하비가 아슬란으로 참모총장이 교체된 것은(시하비는 외부 세계에서 잠재적인 후계자로 여겨졌다) 장기적인 보안 기구 개편의 종식을 의미했다.

아사드의 왕조적 계승 계획에 대한 회의론은 정부 안팎에 널리 퍼져 있었고, 비판가들은 시리아가 군주국이 아니라는 점을 지적했다. 1998년까지 바샤르는 바트당에 진출하여 카담의 레바논 담당 부문을 인수했다(그는 1970년대부터 이 직책을 맡았다). 1998년 12월까지 바샤르 알아사드는 레바논 총리이자 카담의 후원자 중 한 명인 라피크 알하리리를 살림 알후스로 교체했다. 1970년 이전부터 봉직했던 여러 아사드의 후원자들이 1998년부터 2000년 사이에 해임되었다. 그들은 아사드에 대한 충성심이 부족해서 해임된 것이 아니라 아사드가 그들이 바샤르 알아사드의 계승을 완전히 지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퇴직자"에는 무하마드 알쿨리, 나시르 카이르 베크, 알리 두바가 포함되었다. 새로 임명된 사람들(바샤르의 충성스러운 지지자들) 중에는 바자트 술레이만, 하산 칼릴 소장, 아세프 샤우카트 소장(아사드의 사위)이 있었다.

1990년대 후반 아사드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아사드가 회의 중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피곤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국정 참여가 점점 줄어들면서 정부는 그의 일상적인 업무 참여 없이도 업무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의 거의 모든 행정 업무와 심지어 중요한 의사 결정의 많은 부분이 그의 딸 부슈라에게 위임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녀는 대통령궁에 아버지 옆에 자신의 사무실을 설치했다. 오랫동안 아사드의 가장 총애받는 자녀로 여겨졌고, 성별이 아니었다면 후계자로 선호되었을 부슈라는 바샤르의 하페즈 계승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하페즈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축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대변인은 이러한 추측을 무시했고, 1999년 아사드의 공식 일상은 이전 10년과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아사드는 계속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때때로 해외 여행을 갔으며, 1999년 7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2000년 3월 26일, 아사드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을 만나기 위해 제네바로 또 다른 드문 해외 여행을 떠났다.

2000년 6월 10일, 69세의 나이로 하페즈 알아사드는 레바논 총리 살림 알후스와 전화 통화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리아에서는 40일간의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그 후 레바논에서는 7일간 애도 기간이 있었다. 그의 장례식은 사흘 후 열렸다. 아사드는 그의 아들 바셀과 함께 고향 카르다하에 있는 묘소에 묻혔다. 하페즈 알아사드 사후 바트당 충성파의 지지로 그의 아들 바샤르에게 권력이 이양되어 시리아는 최초로 왕조 체제를 수립한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4. 사망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미리 후계자로 지목했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전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으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를 탄압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

리파트 알아사드와 하페즈 알아사드, 1980년


아사드의 후계자 1순위는 그의 형인 리파트 알아사드였으며, 그는 1980년 초에 이러한 생각을 밝혔다. 그의 형의 쿠데타 시도는 그가 통치의 기반으로 삼았던 제도화된 권력 구조를 약화시켰다. 아사드는 정책을 바꾸는 대신, 자신의 정부 모델을 갈고 닦아 권력을 보호하려고 노력했다. 그는 그의 아버지의 계획된 후계자로 알려진 바셀 알아사드에게 더 큰 역할을 부여했는데, 이는 정부 내에서 질투를 불러일으켰다. 1994년 군사 회의에서 참모총장 시하비는 아사드가 이스라엘과의 관계 정상화를 원하기 때문에 시리아 군대가 골란 고원에서 철군해야 한다고 말했다. 하이달은 "우리는 무력해졌습니다. 우리와 상의조차 하지 않았습니다."라고 분노하며 대답했다. 아사드는 하이달의 폭발적인 발언을 듣고 특수부대 사령관 하이달을 알라위트 출신 알리 하빕 소장으로 교체했다. 하이달은 또한 왕조적 계승에 반대했으며, 1994년 바셀의 죽음(아사드가 바샤르 알아사드를 후계자로 선택했을 때) 이후까지 자신의 견해를 비밀로 유지했다고 한다. 그 후 그는 아사드의 계승 계획을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1970년부터 1984년까지 시리아 외무장관을 지낸 압둘 할림 카담은 그것이 사회주의적이지 않다는 이유로 왕조적 계승에 반대했다. 카담은 아사드가 지역 사령부 구성원들과 계승에 대한 의도를 논의한 적이 없다고 말했다. 1990년대에 이르러 지도부의 수니파는 고령화되었고, 알라위파는 아사드의 도움으로 새로운 세대가 등장했다. 수니파는 많은 사람들이 어떤 종류의 왕조적 계승에도 반대했기 때문에 불리한 입장에 있었다.

시리아 건물에 걸린 하페즈 알아사드의 초상화, 1992년


1990년대 후반 아사드의 건강은 악화되었다. 미국 외교관들은 아사드가 회의 중에 집중력을 유지하는 데 어려움을 겪고 피곤해 보였다고 말했다. 그는 하루에 두 시간 이상 일할 수 없는 것으로 여겨졌다. 그의 국정 참여가 점점 줄어들면서 정부는 그의 일상적인 업무 참여 없이도 업무를 처리하는 데 익숙해졌다. 그의 거의 모든 행정 업무와 심지어 중요한 의사 결정의 많은 부분이 그의 딸 부슈라에게 위임된 것으로 알려졌는데, 그녀는 대통령궁에 아버지 옆에 자신의 사무실을 설치했다. 오랫동안 아사드의 가장 총애받는 자녀로 여겨졌고, 성별이 아니었다면 후계자로 선호되었을 부슈라는 바샤르의 하페즈 계승 능력에 대해 부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었고, 하페즈의 후계자가 되기 위해 자신의 권력을 축적하려는 시도를 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의 대변인은 이러한 추측을 무시했고, 1999년 아사드의 공식 일상은 이전 10년과 기본적으로 변함이 없었다. 아사드는 계속해서 회의를 주재하고 때때로 해외 여행을 갔으며, 1999년 7월에는 모스크바를 방문했다. 2000년 3월 26일, 아사드는 미국 대통령 빌 클린턴을 만나기 위해 제네바로 또 다른 드문 해외 여행을 떠났다.[3]

2000년 6월 10일, 69세의 나이로 하페즈 알아사드는 레바논 총리 살림 알후스와 전화 통화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시리아에서는 40일간의 애도 기간이 선포되었고, 그 후 레바논에서는 7일간 애도 기간이 있었다.[4] 이집트, 이란, 요르단, 오만, 팔레스타인, 리비아, 모로코, 아랍에미리트, 예멘, 쿠웨이트, 카타르는 3일간의 국가 애도를 선포했다.[5][6][7][8][9][10][11][12][13] 그의 장례식은 사흘 후 열렸다. 아사드는 그의 아들 바셀과 함께 고향 카르다하에 있는 묘소에 묻혔다. 하페즈 알아사드 사후 바트당 충성파의 지지로 그의 아들 바샤르에게 권력이 이양되어 시리아는 최초로 왕조 체제를 수립한 아랍 공화국이 되었다.

2024년 12월 11일, 아사드 정권 붕괴 후 반군은 바샤르의 타도 이후 시리아 내전에서 아사드 묘소 안에 있는 그의 석관과 묘에 불을 질렀다.[14][15]

[[File:https://cdn.onul.works/wiki/source/194f9f69b2d_fd7f4853.jpg|thumb|다마스쿠스의 하피즈 알-아사드 가족 묘소]

만성 심장병을 앓고 있었지만, 말년에도 활발하게 국정을 수행했으나, 2000년 6월 10일 레바논의 살림 알-후스 총리와의 전화 회담 중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향년 69세. 예정대로 차남 바샤르가 후임 대통령에 취임했다.

사망 24년 후인 2024년 12월, 2024년 시리아 반정부군 공세로 인해, 대통령이었던 바샤르가 러시아로 망명하고, 아사드 정권이 붕괴되었다. 이로 인해 각지에 세워졌던 하피즈와 바샤르 등 아사드 가문의 동상이 민중에 의해 끌어내려지거나, 초상화가 벗겨졌다.[28][29]

또한, 고향 다마스쿠스의 아사드 묘소에 안치되었던 하피즈의 유해는 정권 붕괴 후 소각되었고, 묘소도 파괴되었다.[30]

5. 평가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북부 해안도시 카르다하의 농부의 아들로 태어났다. 1955년 공군사관학교를 졸업한 뒤 바트당에 가입, 바트당이 집권한 1963년 쿠데타에서 요직을 맡았으며 1965년 공군사령관, 국방장관에 임명, 1970년 무혈쿠데타로 집권했다.

그는 아랍 민족주의를 내걸고 수십 년간 이스라엘-아랍간의 적대 구도를 이끌어온 중심 인물로 이집트-이스라엘 평화협정과 1993년 이스라엘-팔레스타인의 오슬로 평화협정 체결 등의 배후에서도 항상 아랍의 단결을 외치며 이스라엘에 강경 입장을 고수해왔다. 또한 뛰어난 정치적 감각과 책략으로 ‘아랍의 비스마르크’라 불렸다. 국제 관계에서는 구 소비에트 연방과 친밀한 관계를 유지해 원조를 얻고 걸프전 때는 연합군의 편을 드는 등 철저한 실리파였다. 이러한 이유로 아랍권의 대부로 존경을 받기도 했으나, 30년간 독재정치를 하며 반대파를 탄압하여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2000년 심장마비로 사망했고, 미리 후계자로 지목했던 아들 바샤르 알아사드가 후임 대통령이 되었다.

사후, 국내 각지에 동상이 건립되어 왔지만, 2024년 12월 8일, 반정부 세력이 주요 도시 호므스를 점령했을 때 시내에 있던 동상은 모두 파괴되었다.[31]

6. 가족

하페즈 알아사드는 1930년 10월 6일 시리아 북서부 알라위트 지역의 카르다하 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카르다하는 프랑스령 시리아와 레바논 위임 통치령(현재는 시리아 아랍 공화국의 라타키아 주에 속함)에 속해 있었으며, 그는 알라위파의 칼비야 부족 출신이었다. 그의 외조부인 술레이만 알-와히시는 힘 때문에 '알-와히시'(야수)라는 별명을 얻었다. 하피즈 알-아사드의 부모는 나사 샬리시와 알리 알-아사드였다. 그의 아버지는 두 번 결혼하여 11명의 자녀를 두었다. 하피즈는 아홉 번째 아들이자 두 번째 부인 사이에서 넷째 아들이었다. 1920년대에 알리는 지역적으로 존경받는 인물이었으며, 1923년 공식적으로 설립된 프랑스령 국제 연맹 위임 통치인 시리아와 레바논 위임 통치령에 처음에는 반대했다. 그러나 알리 술레이만은 나중에 프랑스 행정부와 협력하여 공직에 임명되었다. 지역 주민들은 그의 업적을 기려 그를 "알-아사드"(사자)라고 불렀고, 1927년 그는 이 별명을 성으로 삼았다.

하피즈 알아사드는 아내 아니사 마흐루프와 사이에 5명의 자녀를 두었다. 장녀 부슐라는 약사이자 아버지의 비서를 오랫동안 역임했다. 아버지 하피즈와 오빠 바실의 뜻에 반하여 아시프 샤우카트 준장과 결혼했다. 아시프 샤우카트는 하피즈 사후 군사정보국장, 국방차관, 군 참모차장 등을 역임하며 처남 바샤르 알아사드의 정권을 지지해왔으나, 시리아 내전 발발 후인 2012년 반체제파 무장 조직의 폭탄 공격으로 암살당했다. 장남 바실은 대학을 졸업하고 토목기사 자격을 얻은 후 군인이 되어 1984년 망명한 리파트의 후임 혁명방위대 사령관에 취임했다. 처음에는 사실상의 후계자로 여겨졌으나, 1994년 자동차 사고로 사망했다. 차남 바샤르는 안과의사였으나 형의 사망 후 아버지의 후계자가 되어 공화국 방위군에서 근무했다. 2024년까지 시리아 대통령을 역임했다. 삼남 마지드는 전기기술자였으나 형제들과 달리 정치의 전면에는 전혀 나서지 않았다. 긴 투병 생활 끝에 2009년 12월 사망했다. 사남 마헬은 시리아 육군 소장이다. 1996년 소좌로 임관했다. 누나 부슐라의 남편 샤우카트와 사이가 좋지 않았으며, 언쟁 끝에 샤우카트를 총격하는 사건을 일으킨 적이 있다. 공화국 방위군에서 일시적으로 근무한 후 제4기갑사단 예하 여단장 직으로 이동했다. 2024년 12월 정권 붕괴 이후 행방이 불명하다.

7. 역대 선거 결과

wikitable

선거명직책명대수정당득표율득표수결과당락
1971년 선거시리아의 대통령2대바트당99.20%1,919,609표1위
25px
1978년 선거시리아의 대통령2대바트당99.88%3,975,729표1위
1985년 선거시리아의 대통령2대바트당99.99%6,200,428표1위
1991년 선거시리아의 대통령2대바트당99.99%6,726,843표1위
1999년 선거시리아의 대통령2대바트당100.00%8,960,011표1위


참조

[1] 뉴스 Hafez al-Assad https://www.theguard[...] 2000-06-12
[2] 뉴스 Coalitions in Iraq: '91 vs. Now https://www.brooking[...] 2004-10-19
[3] 뉴스 In Geneva, Clinton Bet That Assad Would Bend, and Lost https://www.nytimes.[...] 2000-03-28
[4] 웹사이트 Bashar Al_Assad - THE FUNERAL OF PRESIDENT HAFEZ ASSAD http://www.president[...]
[5] 웹사이트 KUNA :: EGYPT MOURNS THE DEATH OF AL-ASSAD 10/06/2000 https://www.kuna.net[...]
[6] 웹사이트 KUNA : OMAN DECLARES THREE DAYS MOURNING FOR SYRIA - Politics - 10/06/2000 https://www.kuna.net[...]
[7] 웹사이트 BBC NEWS {{!}} Middle East {{!}} Assad: Mourned by friends and foes http://news.bbc.co.u[...]
[8] 웹사이트 Libya Declares Three-Day National Mourning For Assad https://allafrica.co[...] 2000-06-11
[9] 웹사이트 KUNA : IRAN ANNOUNCES 3 DAYS OF MOURNING FOR ASSAD - General - 11/06/2000 https://www.kuna.net[...]
[10] 웹사이트 KUNA : MOROCCO DECLARES THREE DAYS MOURNING ON AL-ASSAD'S DEATH - Politics - 11/06/2000 https://www.kuna.net[...]
[11] 웹사이트 KUNA : YEMEN MOURNS THE DEATH OF AL-ASSAD - Politics - 10/06/2000 https://www.kuna.net[...]
[12] 웹사이트 KUNA :: KUWATI DECLARES THREE DAYS OF MOURNING ON ASSAD'S DEATH 10/06/2000 https://www.kuna.net[...]
[13] 웹사이트 KUNA : QATAR MOURNS DEATH OF AL-ASSAD - Politics - 10/06/2000 https://www.kuna.net[...]
[14] 웹사이트 Tomb of Assad's father set on fire in Syria hometown: AFP https://www.lbcgroup[...]
[15] 웹사이트 Syria rebels burn tomb of Bashar al-Assad's father Hafez https://www.bbc.com/[...]
[16] 뉴스 65.761 (!) Orden an Strasser, Grasser & Co. https://www.oe24.at/[...] 2012-05-06
[17] 웹사이트 Československý řád Bílého lva https://www.prazskyh[...]
[18] 서적 Polskie ordery i odznaczenia (Vol. I) https://books.google[...] Wydawnictwo Interpress
[19] 저널 Свечана вечера у част Тита http://istorijskenov[...] 1974-02-07
[20] 서적 Political Leaders of the Contemporary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A Biographical Dictionary Greenwood Publishing Group
[21] 서적 The Middle East: a political and economic survey https://books.google[...] Oxford University Press
[22] 서적 Revolutions and Military Rule in the Middle East: The Arab states pt. I: Iraq, Syria, Lebanon and Jordan, Volume 2 https://books.google[...] R. Speller
[23] 서적 The Middle East and North Africa, Volume 43 https://books.google[...] Europa Publications
[24] 서적 The Soviet Policy Toward the Middle East Since 1970 https://books.google[...] Praeger
[25] 서적 Moscow and the Middle East: Soviet policy since the invasion of Afghanistan https://books.google[...] CUP Archive
[26] 뉴스 シリアのバース党左派 クーデター未遂 レバノン介入で不満 朝日新聞 1976-04-28
[27] 웹사이트 ホスニ・ムバラクの功罪 https://web.archive.[...]
[28] 뉴스 アサド政権崩壊を反政府勢力が宣言 シリア https://www.afpbb.co[...] AFPBB News 2024-12-08
[29] 뉴스 あ、落ちた! 大統領の兄弟像引き倒される シリア・アレッポ https://times.abema.[...] ABEMA TIMES 2024-12-04
[30] 웹사이트 Syria rebels burn tomb of Bashar al-Assad's father Hafez https://www.bbc.com/[...]
[31] 뉴스 シリアのアサド政権崩壊 アサド氏は空路首都離れる 父の代から50年以上の強権体制に幕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24-12-08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