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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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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은 1990년 크로아티아 총선 이후 고조된 민족 갈등과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의 개입으로 시작되었다. 세르비아의 지원을 받은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 보안군의 무장 해제를 시도했고, 세르비아계의 반란이 일어나면서 분쟁이 격화되었다. 유고슬라비아 연방의 붕괴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개입으로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의 영향력 아래 놓였고, 크로아티아는 군사력을 강화했다. 1991년 9월 유고 인민군의 공세는 막사 전투를 거치며 수정되었고, 크로아티아는 반격에 나섰다. 전투는 교착 상태로 마무리되었고, 밴스 계획과 유엔 평화유지군(UNPROFOR) 배치를 통해 휴전이 이루어졌다. 이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인 6천 명이 사망하고, 수십만 명이 실향민이 되었으며,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수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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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 [전쟁]에 관한 문서
분쟁 개요
분쟁1991년 크로아티아의 유고슬라비아 전역
전체크로아티아 독립 전쟁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당시 문서를 확인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의 모습
(왼쪽 위부터 시계방향으로) 두브로브니크 포위전 당시 문서를 확인하는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장교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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날짜1991년 9월 20일 ~ 1992년 1월 3일
장소크로아티아 지역
영토크로아티아 내 세르브인의 독립 국가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의 수립
결과유고슬라비아 인민군의 승리
교전 세력
교전국 1
SAO 크라이나
SAO 동슬라보니아 바라냐 서시르미아
SAO 서시르미아
지휘관
지휘관 1벨코 카디예비치
블라고예 아지치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지휘관 2프라뇨 투지만
고이코 슈샤크
마르틴 슈페겔
안톤 투스
병력
군대 1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유고슬라비아 육군
유고슬라비아 공군
유고슬라비아 해군
세르비아 공화국 영토방위군
몬테네그로 공화국 영토방위군
세르비아 의용방위군
세르비아 방위군
흰 독수리
권능의 두샨
군대 2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1991년 11월)
크로아티아 육군 (1991년 11월~)
크로아티아 경찰
크로아티아 해군
크로아티아 방위군
병력 1(1991년 9월 기준): 병력 145,000명
전차 1,100대
장갑차 700대
포 1,980문
병력 2(1991년 9월 기준): 병력 58,000명
(1992년 1월 기준): 병력 155,772명
전차 216대
장갑차 127대
포 1,108문
사상자
사상자 11,279명 사망
사상자 23,761명 사망
관련 항목

2. 배경

1990년 크로아티아의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선거에 패배하자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다.[1]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했다.[1] 1990년 8월 17일, 민족 긴장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공개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으며,[2] 이 반란은 크닌 주변 달마티아고원,[3]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등 세르브계 주민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4]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안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유고 인민군 파병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에 두 차례 승인 요청했으나 실패했다.[5] 3월에는 세르브계 게릴라와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6] 세르비아와 그 동맹의 지지를 받은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3월 15일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9] 1991년 여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면서 유고 인민군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7]

밀로셰비치는 연방 대통령직을 장악하고, 벨코 카디예비치 국방장관과 블라고예 아지치 참모총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유고 인민군의 사실상 총지휘관이 되었다.[8] 그는 유고슬라비아 존속보다는 세르비아 확장을 선호하며,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 군대로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 확장을 위해 유고슬라비아 존속을 포기하기 시작했다.[9] 3월 말, 첫 사망자가 발생하며 분쟁이 격화되었다.[10] 유고 인민군은 게릴라를 지원하고 크로아티아의 경찰 개입을 막기 시작했다.[9]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계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제 지역을 세르비아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분리독립 시도로 간주했다.[11]

세르브인의 반란에서 유고 인민군의 역할에 대한 크로아티아 측 견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초기 계획은 유럽 공동체(EC)와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고, 유고 인민군 막사 점령 조언을 무시했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유고 인민군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유고 인민군의 행동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 군사와 조율된 것처럼 보였음에도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방어적인 역할만 수행했다.[13] 유고 인민군은 세르브계 군사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대부분은 세르비아 영토방위군과 유고슬라비아 내무부 비축 물자를 통해 지원되었다.[14]

2. 1. 민족 갈등 고조

1990년 크로아티아의 총선에서 크로아티아 사회주의 공화국 정부가 선거에 패배하자 민족 갈등이 고조되었다.[1]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은 저항을 최소화하기 위해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의 무기를 압수했다.[1] 1990년 8월 17일, 민족 긴장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의 공개적인 반란으로 확대되었으며,[2] 이 반란은 크닌 주변 달마티아고원,[3] 리카, 코르둔, 바노비나, 크로아티아 동부 등 세르브계 주민 밀집 지역을 중심으로 일어났다.[4]

1991년 1월, 몬테네그로와 세르비아의 보이보디나, 코소보 메토히야 자치주의 지원을 받은 세르비아는 크로아티아 보안군의 무장 해제를 위한 유고 인민군 파병을 유고슬라비아의 대통령직에 두 차례 승인 요청했으나 실패했다.[5] 3월에는 세르브계 게릴라와 크로아티아 특수경찰 사이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6] 세르비아와 그 동맹의 지지를 받은 유고 인민군은 연방 대통령직에게 전시 권한을 부여하고 국가비상사태를 선포해 달라고 요구했으나, 3월 15일 이 요청은 거부되었다.[9] 1991년 여름, 유고슬라비아 연방이 붕괴되면서 유고 인민군은 슬로보단 밀로셰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의 영향력 아래 놓이게 되었다.[7]

밀로셰비치는 연방 대통령직을 장악하고, 벨코 카디예비치 국방장관과 블라고예 아지치 참모총장에게 영향력을 행사하여 유고 인민군의 사실상 총지휘관이 되었다.[8] 그는 유고슬라비아 존속보다는 세르비아 확장을 선호하며, 유고 인민군을 세르비아 군대로 만들겠다고 공개적으로 위협하고 연방 대통령직의 권위를 더 이상 인정하지 않겠다고 선언했다. 이로 인해 유고 인민군은 세르비아 확장을 위해 유고슬라비아 존속을 포기하기 시작했다.[9] 3월 말, 첫 사망자가 발생하며 분쟁이 격화되었다.[10] 유고 인민군은 게릴라를 지원하고 크로아티아의 경찰 개입을 막기 시작했다.[9] 4월 초, 크로아티아 내 세르브계 반군 지도자들은 자신들의 통제 지역을 세르비아에 합병하겠다고 선언했으며, 크로아티아 정부는 이를 분리독립 시도로 간주했다.[11]

세르브인의 반란에서 유고 인민군의 역할에 대한 크로아티아 측 견해는 시간이 지나면서 변화했다. 프라뇨 투지만 대통령의 초기 계획은 유럽 공동체(EC)와 미국의 지지를 얻는 것이었고, 유고 인민군 막사 점령 조언을 무시했다. 이는 크로아티아가 유고 인민군과의 전쟁에서 이길 수 없다는 생각에서 비롯되었다. 유고 인민군의 행동은 세르브계 크로아티아 군사와 조율된 것처럼 보였음에도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방어적인 역할만 수행했다.[13] 유고 인민군은 세르브계 군사에게 무기를 제공했으며, 대부분은 세르비아 영토방위군과 유고슬라비아 내무부 비축 물자를 통해 지원되었다.[14]

2. 2. 슬로보단 밀로셰비치의 개입

2. 3. 크로아티아의 군사력 강화

3. 전조

1991년 7월 초, 유고 인민군은 오시예크 북쪽의 크로아티아 버러녀 지역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15] 8월 1일에는 에르두트, 알마시, 달에서, 8월 22일에는 버러녀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을 밀어냈다.[15] 같은 달, 세르브계는 유고 인민군의 작전 통제하에[19] 동슬라보니아의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에서 국가방위군과 충돌했다. 서슬라보니아에서는 세르브계 민병대가 다루바르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오쿠차니 인근과 파크라츠 남쪽에서 국가방위군에게 저지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이 곳에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이 전투 이후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와 슬라보니아 사이 주요 교통로 사용이 봉쇄되었다. 달마티아 북부에서는 유고 인민군과 국가방위군 사이 여러 충돌이 있었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이에 공조해 진격했다. 이 공격으로 8월 26일 키예보가 점령되고 9월 11일에는 마슬레니차 다리가 세르브계에게 점령되어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 사이 남아있던 최후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20]

1991년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의 작전 계획 지도


1991년 여름,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하나의 정부로 합병했다. 바노비나와 글리나는 7월 26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점령했다. 같은 날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 인근의 크로아티아 경찰서 두 곳이 점령되면서 마을이 고립되었다.[19] 스틴거 작전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된 이 공격은 드라간 바실코비치가 이끄는 크닌 특수경찰 제7바라냐사단이 수행했다.[16] 코지브로드 경찰서를 점령한 세르비아군은 최초의 대량학살을 저질러[17] 포로로 잡은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17명을 총살했다.[18]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9월 초까지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를 방어했다.

1991년 9월 1일, 투지만 대통령은 유고 인민군에게 전부 막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으나, 이후 EC가 제안한 휴전 및 평화 협상 회담 요청을 수락했다.[21] 9월 7일부터 회담이 시작되었고, 4일 후 스테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에 전부 막사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21] 9월 14일, 국가방위군과 크로아티아 경찰은 접근 가능한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하고 인프라를 차단하면서 막사 전투가 시작되었다.[23]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33개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를 봉쇄하고[24] 국경초소와 무기고, 탄약고를 포함한 수많은 시설도 봉쇄했다. 이를 통해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군단 전체 무기고를 포함해 대량의 무기를 노획했다.[23] 유고 인민군은 1개 기갑여단과 2개 기계화여단, 3개 포병연대 등 8개 여단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인민군 제5군구와 해안군구 등의 추가 병력 대부분이 포위되었다.[25] 9월에는 안톤 투스가 크로아티아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5]

3. 1. 유고 인민군의 초기 개입

1991년 7월 초, 유고 인민군은 오시예크 북쪽의 크로아티아 버러녀 지역에서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 8월 1일에는 에르두트, 알마시, 달에서, 8월 22일에는 버러녀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을 밀어냈다.[15] 1991년 여름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하나의 정부로 합병했다. 바노비나와 글리나는 7월 26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점령했다. 같은 날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 인근의 크로아티아 경찰서 두 곳이 점령되면서 마을이 고립되었다.[19] 스틴거 작전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된 이 공격은 드라간 바실코비치가 이끄는 크닌 특수경찰 제7바라냐사단이 수행했다.[16] 코지브로드 경찰서를 점령한 세르비아군은 최초의 대량학살을 저질러[17] 포로로 잡은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17명을 총살했다.[18]

8월 세르브계는 유고 인민군의 작전 통제하에[19] 동슬라보니아의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에서 국가방위군과 충돌했다. 서슬라보니아에서는 세르브계 민병대가 다루바르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오쿠차니 인근과 파크라츠 남쪽에서 국가방위군에게 저지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이 곳에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이 전투 이후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와 슬라보니아 사이 주요 교통로 사용이 봉쇄되었다. 달마티아 북부에서는 유고 인민군과 국가방위군 사이 여러 충돌이 있었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이에 공조해 진격했다. 이 공격으로 8월 26일 키예보가 점령되고 9월 11일에는 마슬레니차 다리가 세르브계에게 점령되었다. 마슬레니차 다리 점령으로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 사이 남아있던 최후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20]

1991년 9월 1일, 투지만 대통령은 유고 인민군에게 막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으나, 이후 EC가 제안한 휴전 및 평화 협상 회담 요청을 수락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통령단도 이에 응한 후 9월 7일부터 회담이 시작되었다. 4일 후 스테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에 전부 막사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21] 9월 14일 국가방위군과 크로아티아 경찰은 접근 가능한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하고 인프라를 차단하면서 막사 전투가 시작되었다.[23]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33개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를 봉쇄하고[24] 국경초소와 무기고, 탄약고를 포함한 수많은 시설도 봉쇄했다. 국가방위군은 고립된 시설과 초소는 물론 여러 주요 인민군 기지를 신속하게 점령하고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군단 전체 무기고와 크로아티아 영토방위군에게서 압수했던 거의 모든 무기를 포함해 대량의 무기를 노획했다.[23] 유고 인민군은 1개 기갑여단과 2개 기계화여단, 3개 포병연대 등 8개 여단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인민군 제5군구와 해안군구 등의 추가 병력 대부분이 포위되었다.[25] 막사 전투의 중요성은 9월 25일 유엔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13호에 따른 무기 금수 조치로 더욱 올라갔다.[26] 9월에는 안톤 투스가 크로아티아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5]

3. 2. 세르비아계의 영토 확장

1991년 여름,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하나의 정부로 합병하고자 했다.[15] 7월 26일에는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글리나를 점령했다. 같은 날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 인근의 크로아티아 경찰서 두 곳이 드라간 바실코비치가 이끄는 크닌 특수경찰 제7바라냐사단에게 점령되면서 마을이 고립되는 스틴거 작전이 일어났다.[16][19] 코지브로드 경찰서를 점령한 세르비아군은 포로로 잡은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17명을 총살하는 등 최초의 대량학살을 저질렀다.[17][18]

유고 인민군은 7월 초 오시예크 북쪽의 크로아티아 버러녀 지역에 직접 개입, 8월 1일에는 에르두트, 알마시, 달에서, 8월 22일에는 버러녀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을 밀어냈다.[15] 8월 세르브계는 유고 인민군의 작전 통제 하에[19] 동슬라보니아의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에서 국가방위군과 충돌했다. 서슬라보니아에서는 세르브계 민병대가 다루바르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오쿠차니 인근과 파크라츠 남쪽에서 국가방위군에게 저지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이 곳에 완충지대를 설정하여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와 슬라보니아 사이 주요 교통로를 봉쇄당했다. 달마티아 북부에서는 유고 인민군과 국가방위군 사이 여러 충돌이 있었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이에 공조해 진격, 8월 26일 키예보가 점령되고 9월 11일에는 마슬레니차 다리가 세르브계에게 점령되어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 사이 최후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20]

1991년 9월 1일, 투지만 대통령은 8월 31일까지 유고 인민군에게 전부 막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으나, 이후 EC가 제안한 휴전 및 평화 협상 회담 요청을 수락했다. 유고슬라비아 대통령단도 이에 응한 후 9월 7일부터 회담이 시작되었다. 4일 후 대통령직의 크로아티아 측 대표이자 대통령직 의장인 스테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에 전부 막사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21] 9월 14일, 국가방위군과 크로아티아 경찰은 접근 가능한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하고 인프라를 차단하면서 막사 전투가 시작되었다.[23] 국가방위군은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군단 전체 무기고를 포함,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33개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와[24] 국경초소와 무기고, 탄약고를 포함한 수많은 시설을 봉쇄하고 대량의 무기를 노획했다.[23] 유고 인민군은 1개 기갑여단과 2개 기계화여단, 3개 포병연대 등 8개 여단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인민군 제5군구와 해안군구 등의 추가 병력 대부분이 포위되었다.[25] 9월 25일 유엔의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13호에 따른 무기 금수 조치로 막사 전투의 중요성은 더욱 커졌다.[26] 9월에는 안톤 투스가 크로아티아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5]

3. 3. 전선 확대

1991년 7월 초, 유고 인민군은 오시예크 북쪽의 크로아티아 버러녀 지역에 직접 개입하기 시작했다.[15] 8월 1일에는 에르두트, 알마시, 달에서, 8월 22일에는 버러녀 지역에서 크로아티아군을 밀어냈다.[15] 같은 달, 세르브계는 유고 인민군의 작전 통제하에[19] 동슬라보니아의 오시예크, 부코바르, 빈코브치에서 국가방위군과 충돌했다. 서슬라보니아에서는 세르브계 민병대가 다루바르로 진격을 시도했으나 오쿠차니 인근과 파크라츠 남쪽에서 국가방위군에게 저지되었고 유고 인민군은 이 곳에 완충지대를 설정했다. 이 전투 이후 크로아티아는 자그레브와 슬라보니아 사이 주요 교통로 사용이 봉쇄되었다. 달마티아 북부에서는 유고 인민군과 국가방위군 사이 여러 충돌이 있었고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이에 공조해 진격했다. 이 공격으로 8월 26일 키예보가 점령되고 9월 11일에는 마슬레니차 다리가 세르브계에게 점령되어 달마티아와 크로아티아 다른 지역 사이 남아있던 최후의 교통로가 차단되었다.[20]

1991년 여름, 세르브계 크로아티아군은 통제 하에 있는 영토를 하나의 정부로 합병했다. 바노비나와 글리나는 7월 26일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점령했다. 같은 날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 인근의 크로아티아 경찰서 두 곳이 점령되면서 마을이 고립되었다.[19] 스틴거 작전라는 작전명으로 진행된 이 공격은 드라간 바실코비치가 이끄는 크닌 특수경찰 제7바라냐사단이 수행했다.[16] 코지브로드 경찰서를 점령한 세르비아군은 최초의 대량학살을 저질러[17] 포로로 잡은 경찰관 10명과 민간인 17명을 총살했다.[18]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9월 초까지 흐르바트스카코스타이니차를 방어했다.

1991년 9월 1일, 투지만 대통령은 유고 인민군에게 전부 막사로 돌아갈 것을 요구하는 최후통첩을 했으나, 이후 EC가 제안한 휴전 및 평화 협상 회담 요청을 수락했다.[21] 9월 7일부터 회담이 시작되었고, 4일 후 스테판 메시치는 유고 인민군에게 48시간 내에 전부 막사로 복귀할 것을 명령했다.[21] 9월 14일, 국가방위군과 크로아티아 경찰은 접근 가능한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을 봉쇄하고 인프라를 차단하면서 막사 전투가 시작되었다.[23]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 내에 있는 33개 대규모 유고 인민군 주둔지를 봉쇄하고[24] 국경초소와 무기고, 탄약고를 포함한 수많은 시설도 봉쇄했다. 이를 통해 유고 인민군 제32(바라주딘)군단 전체 무기고를 포함해 대량의 무기를 노획했다.[23] 유고 인민군은 1개 기갑여단과 2개 기계화여단, 3개 포병연대 등 8개 여단의 통제권을 상실했고 인민군 제5군구와 해안군구 등의 추가 병력 대부분이 포위되었다.[25] 9월에는 안톤 투스가 크로아티아 공화국군 참모총장에 임명되었다.[25]

4. 전투 서열

1991년 9월 초,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은 정규군 8천 명과 예비군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정규군으로 구성된 4개 근위여단은 소화기를 완벽하게 갖춘 유일한 부대였으나 중화기가 부족했다. 기존의 특수경찰 부대에서 근위여단으로 이동한 인원을 대체하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신규 특수 경찰 부대가 수립되었다.[12] 9월 당시 크로아티아의 소화기 비축량은 경찰이 보유했던 15,000정과 해외에서 구입한 3만 정이었다.[12] 막사 전투를 통해 국가방위군의 무기 보유량이 크게 늘면서 부대 무장이 가능해졌고, 40~42개 여단을 추가 증원하여 연말까지 총 20만 명의 병력과 4만 명의 경찰을 배치했다.[25] 국가방위군은 전차 250대, 중포 400~500문, 소화기 18만 정, 탄약 2백만 롱톤(22만 숏톤)을 확보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인 국적의 유고 인민군 장교 3천 명이 인민군을 떠나 국가방위군에 합류했다.[27]

1991년 9월부터 1992년 1월까지 동슬라보니아 지역의 전황도


1991년,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인 권리당의 당군인 크로아티아 국방군(HOS)의 지원을 받았다. 국방군은 3천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밝혔지만, 경찰은 무장 민병대 250명 규모로 추정했다.[28]

유고 인민군은 2단계 병력 동원을 계획했다. 첫 동원령은 7월에 실시되었으며 실제 공세를 개시하지 않으면서 크로아티아를 위협하고 핵심 부대를 적시에 배치하기 위해 발령했다.[29] 1단계 동원으로 크로아티아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9월 15일에 두 번째 동원령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동원된 병력이 지정된 부대로 신고하길 거부하는 사태가 집단으로 발생했고 탈영, 전역에 대한 전반적인 병력의 열의 부족까지 겹쳤다.[32] 동원령에 대한 반응은 특히나 중앙세르비아에서 더 좋지 않았으며 소집된 인원의 26%만이 복무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럼에도 1991년 9월 유고 인민군은 복무 기간을 마친 징집병을 제대시켰고 계획된 병력 수준의 73%에 미치지 못했다.[30] 동원 문제는 인민군 병력과 지휘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인민군 총사령부가 밀로셰비치에게 병력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총동원령을 요구했으나 밀로셰비치는 전역 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요구를 거부했다.[32] 이러한 동원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역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된 유고 인민군과 영토방위군 부대는 145,000명의 병력, 전차 1,100대, 기타 장갑차 700대, 포 1,980문으로 무장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지원도 받았다.[31]

4. 1.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

1991년 9월 초,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ZNG)은 정규군 8천 명과 예비군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정규군으로 구성된 4개 근위여단은 소화기를 완벽하게 갖춘 유일한 부대였으나 중화기가 부족했다. 기존의 특수경찰 부대에서 근위여단으로 이동한 인원을 대체하기 위해 1만 명 규모의 신규 특수 경찰 부대가 수립되었다.[12] 9월 당시 크로아티아의 소화기 비축량은 경찰이 보유했던 15,000정과 해외에서 구입한 3만 정이었다.[12] 막사 전투를 통해 국가방위군의 무기 보유량이 크게 늘면서 부대 무장이 가능해졌고, 40~42개 여단을 추가 증원하여 연말까지 총 20만 명의 병력과 4만 명의 경찰을 배치했다.[25] 국가방위군은 전차 250대, 중포 400~500문, 소화기 18만 정, 탄약 2백만 롱톤(22만 숏톤)을 확보했다. 또한, 크로아티아인 국적의 유고 인민군 장교 3천 명이 인민군을 떠나 국가방위군에 합류했다.[27]

1991년,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크로아티아인 권리당의 당군인 크로아티아 국방군(HOS)의 지원을 받았다. 국방군은 3천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고 밝혔지만, 경찰은 무장 민병대 250명 규모로 추정했다.[28]

4. 2. 유고 인민군

1991년 9월 초,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정규군 8천 명과 예비군 4만 명의 병력을 보유했다. 정규군으로 구성된 4개 근위여단은 소화기를 완벽하게 갖춘 유일한 부대였으나 중화기가 부족했다.[12] 막사 전투로 국가방위군의 무기 보유량이 크게 늘어나면서 기존 부대의 완전 무장이 가능해지고 40~42개 여단을 추가로 증원하여 연말까지 총 20만 명의 병력과 4만 명의 경찰을 배치했다.[25] 또한 대부분 크로아티아인 국적으로 구성된 유고 인민군 장교 3천 명이 인민군을 떠나 국가방위군에 합류했다.[27]

유고 인민군은 2단계 병력 동원을 계획했다. 첫 동원령은 7월에 실시되었으며 실제 공세를 개시하지 않으면서 크로아티아를 위협하고 핵심 부대를 적시에 배치하기 위해 발령했다.[29] 1단계 동원으로 크로아티아군을 저지하는 데 실패하자 9월 15일에 두 번째 동원령이 실시되었다. 하지만 이 시기에는 동원된 병력이 지정된 부대로 신고하길 거부하는 사태가 집단으로 발생했고 탈영, 전역에 대한 전반적인 병력의 열의 부족까지 겹쳤다.[32] 동원령에 대한 반응은 특히나 중앙세르비아에서 더 좋지 않았으며 소집된 인원의 26%만이 복무하겠다고 응답했다. 그럼에도 1991년 9월 유고 인민군은 복무 기간을 마친 징집병을 제대시켰고 계획된 병력 수준의 73%에 미치지 못했다.[30] 동원 문제는 인민군 병력과 지휘관의 사기를 떨어뜨렸다. 인민군 총사령부가 밀로셰비치에게 병력 수준을 높이기 위하여 총동원령을 요구했으나 밀로셰비치는 전역 작전이 반드시 필요하거나 실현 가능하다고 생각하지 않아 이 요구를 거부했다.[32] 이러한 동원 문제에도 불구하고 전역을 지원하기 위해 배치된 유고 인민군과 영토방위군 부대는 145,000명의 병력, 전차 1,100대, 기타 장갑차 700대, 포 1,980문으로 무장했으며 유고슬라비아 해군과 유고슬라비아 공군의 지원도 받았다.[31]

5. 전개

1991년 9월, 유고 인민군은 크로아티아를 군사적으로 패배시키고 유고슬라비아를 유지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이 유고 인민군 주둔지를 포위하면서 수정되었다. 주요 공격 축선은 그라디슈카-비로비티차, 비하치-카를로바츠-자그레브, 크닌-자다르, 모스타르-스플리트 방면이었다. 동슬라보니아에서는 기갑 및 기계화부대가 자그레브와 바라주딘 방면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다.[29] 두브로브니크 지역 봉쇄와 함께 네레트바강 서쪽으로 진격하여 스플리트 방면 진격을 지원하는 계획도 포함되었다.[29] 이 계획에는 크로아티아 내 세르비아인 거주 지역이나 크로아티아 전역에서 유고 인민군 철수 제안도 포함되었을 수 있으나, 출처에 따라 주장이 엇갈린다.[33]

1991년 9월에서 1992년 1월 사이 서슬라보니아 지역의 전황도


1991년 10월에서 1992년 1월 사이 바노비나, 코르둔, 리카 지역의 전황도


1991년 10월에서 1992년 1월 사이 두브로브니크 지역의 전황도


9월 14일,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 주둔군을 포위한 국가방위군에 대응하여 병력을 배치했다.[34] 원래 9월 21일 시작 예정이었던 주요 공세는[35] 9월 20일로 앞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제1근위기계화사단은 준비 없이 전투에 투입되어 교통 체증을 겪었고, 여러 부대가 아군 포격 사건으로 해체되기도 했다.[37] 바냐루카 군단은 오쿠차니에서 서슬라보니아의 다루바르, 비로비티차, 쿠티나 방면으로 진격했으나,[38] 사기 저하와 탈영 문제로 어려움을 겪었다. 제130기계화여단은 9월 29일 280명 규모의 대대로 축소되었다.[39]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은 노브스카, 노바그라디슈카, 파크라츠 사이 지역에서 유고 인민군의 진격을 저지했다.[40]

9월 16일, 크닌 군단은 달마티아 북부와 리카 남부에서 전역을 시작했다.[34] 드르니시를 점령했지만, 시베니크 점령 시도는 실패했다.[41] 9월 22일, 고스피치 전투에서 패배한 후 로비나츠를 점령했다.[41] 두브로브니크 배후지의 유고 인민군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동원 문제로 9월 말까지 진격하지 못했다.[34][42] 바노비나에서는 9월 21일 페트리냐를 점령했지만 더 이상 진격하지 못했다.[39] 코르둔 지역 작전은 카를로바츠 인근 부대 통합으로 제한되었다.[34][43] 9월 15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아드리아해 방면 항구를 일주일간 봉쇄했다.[44][45]

9월 30일, 유고 인민군 참모진은 초기 계획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역 목표를 축소했다.[42][46] 새로운 작전은 달마티아와 동슬라보니아의 크로아티아군 격퇴 및 포위된 인민군 시설 철수 동의를 위한 기반 시설 공격에 집중되었다.[42]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대표는 연방 대통령 대행을 자처하며 유고 인민군을 장악했다.[47] 10월 9일, 인민군은 밀로셰비치가 강요한 역할을 받아들였고, 전략적 목표를 세르브계 인구 밀집 지역 보호로 수정했다.[32][49]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 전투에 집중했으나, 장기화된 포위전으로 인해 병력 이동이 지연되었다. 부코바르는 11월 중순 점령되었지만, 전체 전역은 피로스의 승리였다. 유고 인민군은 준군사조직 자원군을 승인하여 병력을 보충했다.[46] 흰 독수리세르비아 의용방위군(SVG) 등이 포함되었다.[50] 부코바르 점령 이후, 인민군 제12군단과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은 서쪽으로 진군했으나, 크로아티아군에게 저지당했다.[52][53] 지보타 파니치 장군은 오시예크와 주파냐를 단기 목표로 설정했다.[54]

바노비나에서는 인민군이 쿠파강에 도달하여 강 남안 전체를 점령했으나, 추가 진격은 없었다.[55] 코르둔에서는 10월 4일 공세가 시작되어 슬룬 지역으로 국가방위군을 밀어붙였다. 11월 17일 슬룬, 11월 29일 체틴그라드를 점령하여 코르둔 지역 포위망을 제거했다.[57] 리카에서의 활동은 고스피치와 오토차츠 지역 포격 및 공습으로 제한되었다.[55] 서슬라보니아에서는 10월 8일 노브스카, 노바그라디슈카, 야세노바츠를 점령했으나, 전역은 추진력을 잃었다.[58][59]

북달마티아에서는 10월 4일 유고 인민군 크닌 군단이 자다르를 공격해 외곽에 도달했다. 10월 7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이틀 후 자다르 내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 철수에 합의했다.[55] 남쪽에서는 10월 1일 두브로브니크 동쪽과 서쪽을 밀어내고 월말에는 도시를 포위했다.[60] 유고 인민군은 몬테네그로 영토방위군의 지원을 받았다.[61] 이 포위전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외교적, 경제적으로 고립시켰다.[63]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두브로브니크와 자다르 공격을 지원하며 해안을 봉쇄했다. 11월 15일 스플리트와 브라치섬 공격에 실패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57]

1991년 10월 8일,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66] 전날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자그레브의 대통령궁을 폭격했지만,[67] 크로아티아 정부는 전쟁 상황이 더 이상 위태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10월 12일 반격 계획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다.[68]

반격 계획에는 오시예크 남부 봉쇄, 야세노바츠 및 오쿠차니-리피크 도로 탈환, 페트리냐, 글리나, 슬룬 방면 진격, 두브로브니크 공세 저지 등이 포함되었다.[69] 서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은 10월 31일 그루비슈노폴레에서 리피크 방향으로, 11월 12일에는 노바그라디슈카에서 오쿠차니 방향으로 유고 인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70] 리피크는 12월 7일 크로아티아군이 탈환했다. 파크라츠 북쪽의 세르브계 민병대는 크로아티아의 점령 하에 놓였다.[59]

12월 11일, 휠윈드 작전이 시작되었으나, 작은 교두보만을 구축하고 실패했다.[59] 리카 지방에서는 개별 마을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측 모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72] 유고 인민군은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 오시예크 남쪽 4개 마을을 점령했으나, 이후 전반적인 전선은 고착화되었다.[15][72] 12월 26일, 투지만 대통령이 공세 중단 명령을 내렸다.[71]

5. 1. 9월 공세

유고 인민군은 1991년 9월 14일 부코바르 주둔군을 향한 국가방위군의 포위에 대응하여 병력을 배치해 막사를 구조했다.[34] 크로아티아에 대한 주요 작전 공세는 원래 9월 21일에 시작될 예정이었다.[35] 남부작전집단은 빈코브치의 유고 인민군 막사를 포위한 국가방위군의 포위망을 뚫고 나시체와 슬라본스키브로드에 도달하기로 계획했다. 이후 자코보-포제가 도로와 자그레브-베오그라드 고속도로를 통해 오쿠차니-수호폴레 선에 도달할 예정이었다. 북부작전집단은 오시예크에서 나시체까지 진격한 다음 서쪽으로 돌아 벨로바르로 진격할 예정이었다.[35] 2개 작전집단엔 약 57,000명의 병력과 5천명의 지원병력이 배속되었다.[36] 제17(투즐라)군단은 사바강을 도하해 슬라본스키브로드와 슬라본스키샤마츠를 점령할 예정이었으나, 실제 도하는 일어나지 않았다.[34]

전역은 9월 20일로 앞당겨졌다. 갑작스러운 일정 변경으로 유고 인민군 제1근위기계화사단은 사전 정찰이나 준비 없이 동슬라보니아에 도착해 바로 전투에 투입되었다. 이 때문에 시드-토바르니크-스타리얀코브치 도로에 교통 체증이 발생했고, 부교부대가 제때 보수트강 어귀로 진격하지 못했다. 결국 제1근위사단은 강을 도하하지 못하고 빈코브치 동쪽의 보수트강과 다뉴브강 사이 지역에 머물렀다. 노비사드 군단의 여러 부대도 아군 포격 사건 이후 사기가 급감하여 해체되었다.[37]

바냐루카 군단은 오쿠차니에서 서슬라보니아의 다루바르와 비로비티차로 진격하는 주공과 오쿠차니에서 쿠티나로 진격하는 조공으로 나누어 진격을 맡았다.[38] 군단은 이미 오쿠차니 근처에 제265기계화여단의 전투집단을 배치해 9월 21일 시작된 진격을 지원하며 파푸크산까지 도달했다. 군단이 진격하는 동안 2개 차량화여단과 1개 포병여단을 증원받았지만 동슬라보니아에서 일어난 사기 저하와 탈영 문제는 바냐루카 군단에서도 나타났다. 제130기계화여단은 9월 29일에는 280명 규모의 대대로 축소되었다.[39] 일부 세르브계 민병대가 유고 인민군의 지원 없이 비로비티차 인근 파크라츠 북쪽의 빌로고라산과 파푸크산, 슬라티나를 점령했지만, 노브스카, 노바그라디슈카, 파크라츠 사이 지역에 있던 크로아티아 국가방위군에게 유고 인민군의 진격이 저지되었다.[40]

이미 완전히 동원되어 배치된 인민군 크닌 군단은 1991년 9월 16일 달마티아 북부와 리카 남부에서 전역을 시작했다.[34] 9월 18일 인민군은 드르니시를 점령했지만 이틀 후 파코보셀로에서, 9월 22일에는 시베니크 근처에서 시가지 점령을 시도했으나 실패했다. 이 패배 이후 군단은 리카 지역의 고스피치 인근을 제외하고선 나머지 1달간 공격을 중지했다. 유고 인민군과 세르비아 방위군이 9월 22일 고스피치 전투에서 패퇴한지 5일 후 크닌 군단이 로비나츠를 점령했다.[41] 두브로브니크 배후지에 모인 유고 인민군 부대는 우지체와 티토그라드 군단 부대로만 구성되었다. 이들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동원 문제로 9월 말까지 크로아티아 내로 진격하지 못했다.[34][42] 바노비나의 유고 인민군은 9월 21일 페트리냐를 점령했지만 더 이상 전진하지 못했다.[39] 인민군 동원의 실패로 코르둔 지역에서 계획되었던 작전안은 카를로바츠 인근에 있던 부대를 통합하는 것으로 제한되었다.[34][43] 9월 15일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일주일간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방면 항구인 풀라, 리예카, 자다르, 스플리트, 두브로브니크 등을 일주일간 봉쇄했다.[44][45]

5. 2. 목표 축소

9월 30일, 유고 인민군 참모진은 초기 계획의 달성이 어렵다고 판단하여 전역 목표를 축소했다.[42][46] 새로운 공격 및 방어 작전은 달마티아와 동슬라보니아의 크로아티아군에게 결정적인 패배를 안기고, 포위된 인민군 시설 철수에 대한 동의를 얻기 위해 크로아티아의 주요 기반 시설을 공격하는 방향으로 전환되었다. 지상군 일부는 같은 날부터 새 명령을 수행하기 시작했지만, 10월 4일까지 완전히 적용되지는 않았다.[42]

10월 3일, 유고슬라비아 대통령직의 세르비아 및 몬테네그로 대표는 자신들이 연방 대통령 대행이 되어 유고 인민군을 장악했다고 선언했다.[47] 이틀 후 유고 인민군은 병력 동원을 요청했으나 밀로셰비치는 거부했다.[48] 10월 9일, 인민군의 작전 실패가 명확해지자 지휘관들은 밀로셰비치가 강요한 역할을 공식적으로 받아들였고, 크로아티아에서의 전략적 목표를 세르브계 인구 밀집 지역 보호로 수정했다.[32][49]

유고 인민군은 부코바르 전투에 집중했으나, 장기화된 포위전으로 인해 자그레브와 바라주딘으로 진격할 예정이었던 36,000명의 병력과 상당수의 기갑부대 이동이 지연되었다. 부코바르는 11월 중순 인민군이 점령했지만, 전체 전역은 완전히 망쳐 피로스의 승리였다. 이 과정에서 유고 인민군은 준군사조직 자원군을 공식 승인하여 병력을 보충했다.[46] 여기에는 흰 독수리세르비아 의용방위군(SVG) 등이 포함되었다.[50] 10월 12일 연방 대통령은 약 15만 명의 자원군 입대를 승인했고, 많은 이들이 징집을 피해 피난을 떠났다.[51] 부코바르 점령 이후, 인민군 제12군단과 세르비아 의용방위군은 11월 15~16일에 보수트 서남쪽으로,[15] 11월 20일에는 빈코브치와 오시예크 사이 서쪽으로 진군했으나, 크로아티아군에게 저지당했다.[52][53] 지보타 파니치 장군은 오시예크와 주파냐를 단기 목표로 설정했다.[54]

바노비나에서는 인민군이 쿠파강에 도달하여 9월 30일 네보얀, 수냐, 시사크 지역의 국가방위군 교두보를 제외한 강 남안 전체를 점령했으나, 추가 진격은 없었다.[55] 10월 17~18일 노비파르카시치를 통한 네보얀 교두보 진격 시도와 11월 2일 수냐 방면 진격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56] 코르둔의 카를로바츠 지역에서는 10월 4일 공세가 시작되어 이틀 후 국가방위군을 슬룬 지역으로 밀어붙였다. 10월 8일 인민군이 쿠파강과 코라나강 유역에 도달하면서 전투 강도가 줄어들었다.[55] 11월 4~5일 로고리슈테 전투에서 유고 인민군이 카를로바츠 교외 포위망을 돌파하고 도시 동쪽 진지로 도달했다. 인민군은 11월 17일 슬룬을, 11월 29일 체틴그라드를 점령하여 코르둔 지역의 국가방위군 포위망을 제거했다.[57] 리카에서의 인민군 활동은 고스피치와 오토차츠 지역 포격 및 공습으로 제한되었으며, 10월 4일에 절정에 달했다.[55]

서슬라보니아에서는 10월 1일 바냐루카 군단이 정찰성 공격을 시작했고, 3일 후 대대적인 공격을 통해 10월 8일 노브스카, 노바그라디슈카, 야세노바츠를 점령했다. 리피크와 파크라츠 일부 지역은 4일 후 점령되었으나,[58] 이 무렵 전역은 추진력을 잃었다.[59]

북달마티아에서는 10월 4일 유고 인민군 크닌 군단이 자다르를 공격해 외곽에 도달했고, 다음 날 셰푸리네 막사 포위망을 풀었다. 국가방위군이 인민군의 진격을 막아 10월 7일 휴전이 선언되었고, 이틀 후 자다르 내 모든 유고 인민군 시설 철수에 합의했다.[55] 남쪽에서는 인민군 티토그라드 군단과 해양군구 병력이 헤르체고비나 동부와 코토르만에서 진격하여 10월 1일 두브로브니크 동쪽과 서쪽을 밀어내고 월말에는 도시를 포위했다.[60] 유고 인민군은 몬테네그로 영토방위군의 지원을 받았다.[61] 소수의 크로아티아군은 12월 7일 휴전 합의까지 포격, 해군 포격, 공습을 견디며 도시를 지켜냈다. 이 포위전은 국제사회의 관심을 끌어 세르비아와 유고슬라비아를 외교적, 경제적으로 고립시키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고,[63] 침략국으로 인식하게 만들었다.[64]

유고슬라비아 해군은 두브로브니크와 자다르 공격을 지원하며 해안을 봉쇄했다.[57] 10월 3일 파그섬크바르네르만 섬 페리 노선을 제외한 모든 해상 운송이 중단되었고, 두브로브니크를 제외한 봉쇄는 10월 11일 해제되었다. 11월 8일 리예카, 자다르, 시베니크, 스플리트 접근을 제외한 최종 봉쇄가 시작되었다.[65] 11월 15일 스플리트와 브라치섬 공격에 실패하며 큰 피해를 입었다.[57] 북아드리아해 봉쇄는 11월 22일, 남아드리아해 봉쇄는 두브로브니크를 제외하고 12월 3일에 해제되었다.[65]

5. 3. 크로아티아의 역공세

1991년 10월 8일, 크로아티아는 유고슬라비아로부터의 완전한 독립을 선언했다.[66] 전날 유고슬라비아 공군이 자그레브의 대통령궁을 폭격했지만,[67] 크로아티아 정부는 전쟁 상황이 더 이상 위태롭지 않다고 판단했다. 이에 따라 10월 12일 반격 계획을 준비하라는 명령을 내렸고, 11월 20일까지 공세 작전을 개시하라는 추가 명령이 세 차례 내려졌다.[68]

반격 계획에는 오시예크 남부의 인민군 봉쇄, 빈코브치 남쪽 보수트강으로의 진격, 야세노바츠 및 오쿠차니-리피크 도로 탈환, 파푸크산과 프순산 탈환, 페트리냐, 글리나, 슬룬, 코레니차, 그라차츠 방면으로 진격, 마슬레니차 다리와 오브로바츠-그라차츠 도로 탈환, 서북쪽으로 향하는 인민군의 두브로브니크 공세 저지 등의 목표가 포함되었다.[69]

가장 중요한 공세는 서슬라보니아에서 이뤄졌다. 크로아티아군은 10월 31일 그루비슈노폴레에서 리피크 방향으로, 11월 12일에는 노바그라디슈카에서 오쿠차니 방향으로 유고 인민군을 밀어내기 시작했다.[70] 11월 중순 노브스카-오쿠차니 축선을 따라 또 다른 공세가 시작되어 12월 9일까지 여러 마을을 탈환했고, 리피크는 12월 7일 크로아티아군이 탈환했다. 파크라츠 북쪽 파푸크산과 빌로고라산의 세르브계 민병대는 유고 인민군의 지원을 받지 못하고 밀려났으며, 같은 기간 크로아티아의 점령 하에 놓였다.[59] 오쿠차니 지역 탈환을 위한 크로아티아 육군의 허리케인-91 작전은 10월 마지막 날 개시되었으나, 노바그라디슈카 서쪽을 제외하고는 큰 진전이 없었다.[15]

12월 11일에는 쿠파강을 가로질러 휠윈드 작전이 시작되었다. 크로아티아 육군은 글리나 방면으로 진격했으나, 이틀 만에 작은 교두보만을 구축하고 작전은 실패했다.[59] 리카 지방에서는 개별 마을을 두고 전투가 벌어졌지만 양측 모두 별다른 진전은 없었다.[72] 유고 인민군은 11월 21일부터 12월 16일까지 오시예크 남쪽 4개 마을을 점령했으나, 이후 전반적인 전선은 고착화되었다.[15][72]

결국 국제적인 압력에 따라 12월 26일 투지만 대통령이 공세 중단 명령을 내렸다.[71]

6. 여파

크로아티아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전역은 교착 상태로 끝났고, 양측은 국제사회의 감독하에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다.[73] 1991년 말까지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인 6천 명이 사망하고, 23,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만 명 이상이 국내실향민이 되었다.[76] 일부 출처에서는 국내실향민의 수를 최대 60만 명까지 추정하기도 한다.[17][77] 1991년에서 1992년 초까지 약 18,000명의 크로아티아 시민이 실종되거나 유고 인민군 혹은 그 동맹군에게 구금되었다.[82]

1992년 1월 기준 크로아티아의 주요 도시 점령 상황. 빨간색은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이 장악한 영토이다.


전장의 교착 상태에서 유엔 사무총장 특사 사이러스 밴스미국국무장관은 평화안인 밴스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외교관 허퍼트 S. 오쿤[88]과 유엔 특별정치담당 사무차장이었던 마라크 굴딩의 도움[89]을 받았다. 밴스 계획은 크로아티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확실하게 종식시킨다는 목표를 가졌다.[88] 밴스 계획에는 휴전, 유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특정 지역의 민간인 보호, 크로아티아 내 유엔 평화유지군인 유엔보호군(UNPROFOR) 배치 등이 포함되었다.[88] 밀로셰비치, 카디예비치, 투지만은 이 계획을 승인했고[88], 세 사람은 1991년 11월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협정에 서명했다.[89] 제네바 협정에는 크로아티아의 유고 인민군 막사 봉쇄 종료,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의 병력과 장비 철수, 휴전 이행 및 인도주의적 지원 제공 촉진 등이 담겼다.[90]

이후 평화 유지 임무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제출한 유엔 평화 유지군 배치 공식 요청에 따라[91] 11월 27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21호에서 승인받았다.[89] 평화유지군 배치에 필요한 휴전을 보장하는 이행협정은 1992년 1월 2일 크로아티아의 국방부 장관 고이코 슈샤크와 유고 인민군 제5군구 사령관인 안드리야 라셰타가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의 사라예보에서 만나 서명했다.[92][93] 휴전은 1992년 1월 3일 오후 6시부터 발효되었으나,[92][93] 두브로브니크 지역은 1992년 7월까지 유고 인민군이 두브로브니크와 코나블레 마을 주변에 계속 주둔하며[94] 분쟁이 계속되었다.[95] 두브로브니크의 해상 봉쇄는 1992년 5월 26일에 해제되었다.[96] 조직 문제와 정전 협정 위반 때문에 3월 8일이 되어서야 크로아티아에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시작했다.[97] 역사학자 마르코 아틸라 화레는 밴스 계획이 세르브계 반군을 패배로부터 구해냈다고 평가했다.[98]

6천 명의 사망자에는 군인 사망자 3,761명도 포함된다.[78] 유고 인민군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1,279명이지만, 실제 사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79] 서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의 반격 작전으로 세르브인 2만 명이 난민이 되어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인 버러녀 지역에 정착했다.[80][81]

1991년에서 1992년 초, 크로아티아 시민 약 18,000명이 실종되거나 유고 인민군 혹은 그 동맹군에게 구금되었다. 이 중 약 8천 명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또는 유고 인민군이 통제하는 크로아티아 영토 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유고 인민군이 운용한 대표적인 수용소로는 베게이치 수용소, 스타이체보 수용소,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 니시 수용소, 알렉시나츠 수용소, 마냐차 수용소, 바냐루카 수용소, 크닌 수용소, 부체 수용소, 벨리마나스티르 수용소, 네고슬라브치 수용소, 벨레프로메트 수용소, 모린 수용소 등이 있다. 수용소에 구금되었던 죄수 중 약 300명이 사망했으며, 수감자 대부분은 1992년 8월에 석방되었다.[82] 2013년 5월 기준으로 1991년 전역 과정에서 발생한 1,703명은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이다.[83]

양 측은 분쟁 기간 많은 잔학 행위를 일으켰다. 크로아티아군이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고스피치 학살이다. 세르비아계의 잔학 행위는 그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다. 가장 큰 학살이 발생한 곳으로는 키예보 마을 학살, 부코바르 학살, 두브로브니크 포격 등이 있다.[84] 이런 전쟁범죄를 일으킨 피의자는 이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7호에 따라 1993년 설립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기소되었다.[85]

독일은 세르비아계가 일으킨 여러 잔학 행위 때문에 1991년 11월 중순 크로아티아와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으며, 12월 23일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로아티아를 독립국으로 정식 인정했다.[47][86] 1992년 1월 15일에는 다른 유럽 공동체 회원국도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세르비아계 크로아티아인은 1991년 12월 21일 크로아티아 영토의 약 30%를 차지하는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을 자칭 독립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영토라고 선언했다.[47][86]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경제적, 재정적으로 모국 세르비아에 의존했다.[87]

6. 1. 밴스 계획과 유엔 평화유지군

크로아티아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JNA) 전역은 교착 상태로 끝났고, 양측은 국제사회의 감독하에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다.[73] 1991년 말까지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인 6천 명이 사망하고, 23,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만 명 이상이 국내실향민이 되었다.[76] 1991년에서 1992년 초까지 약 18,000명의 크로아티아 시민이 실종되거나 유고 인민군 혹은 그 동맹군에게 구금되었다.[82]

전장의 교착 상태에서 유엔 사무총장 특사 사이러스 밴스미국의 국무장관은 평화안인 밴스 계획을 입안하였다. 이 과정에서 미국 외교관 허퍼트 S. 오쿤[88]과 유엔 특별정치담당 사무차장이었던 마라크 굴딩의 도움[89]을 받았다. 밴스 계획은 크로아티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확실하게 종식시킨다는 목표를 가졌다.[88] 밴스 계획에는 휴전, 유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특정 지역의 민간인 보호, 크로아티아 내 유엔 평화유지군인 유엔보호군(UNPROFOR) 배치 등이 포함되었다.[88] 밀로셰비치, 카디예비치, 투지만은 이 계획을 승인했고[88], 세 사람은 1991년 11월 23일 스위스 제네바에서 제네바 협정에 서명했다.[89] 제네바 협정에는 크로아티아의 유고 인민군 막사 봉쇄 종료, 크로아티아 내 유고 인민군의 병력과 장비 철수, 휴전 이행 및 인도주의적 지원 제공 촉진 등이 담겼다.[90]

이후 평화 유지 임무는 유고슬라비아 정부가 제출한 유엔 평화 유지군 배치 공식 요청에 따라[91] 11월 27일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721호에서 승인받았다.[89] 평화유지군 배치에 필요한 휴전을 보장하는 이행협정은 1992년 1월 2일 크로아티아의 국방부 장관 고이코 슈샤크와 유고 인민군 제5군구 사령관인 안드리야 라셰타가 사라예보에서 만나 서명했다.[92][93] 휴전은 1992년 1월 3일 오후 6시부터 발효되었으나,[92][93] 두브로브니크 지역은 1992년 7월까지 유고 인민군이 두브로브니크와 코나블레 마을 주변에 계속 주둔하며[94] 분쟁이 계속되었다.[95] 조직 문제와 정전 협정 위반 때문에 3월 8일이 되어서야 크로아티아에 평화유지군이 배치되기 시작했다.[97] 역사학자 마르코 아틸라 화레는 밴스 계획이 세르브계 반군을 패배로부터 구해냈다고 평가했다.[98]

6. 2. 인명 피해와 난민

1991년 말까지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인 6천명이 사망했고, 23,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만명 이상이 국내실향민이 되었다.[76] 6천명의 사망자에는 군인 사망자 3,761명도 포함된다.[78] 유고 인민군의 공식적인 사망자는 1,279명이지만, 실제 사상자 수는 이보다 훨씬 높을 것으로 추정된다.[79] 서슬라보니아에서 크로아티아군의 반격 작전으로 세르브인 2만명이 난민이 되어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인 버러녀 지역에 정착했다.[80][81]

1991년에서 1992년 초, 크로아티아 시민 약 18,000명이 실종되거나 유고 인민군 혹은 그 동맹군에게 구금되었다. 이 중 약 8천명은 세르비아, 몬테네그로, 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또는 유고 인민군이 통제하는 크로아티아 영토 내 강제수용소에 구금되었다. 유고 인민군이 운용한 대표적인 수용소로는 베게이치 수용소, 스타이체보 수용소, 스렘스카미트로비차 감옥, 니시 수용소, 알렉시나츠 수용소, 마냐차 수용소, 바냐루카 수용소, 크닌 수용소, 부체 수용소, 벨리마나스티르 수용소, 네고슬라브치 수용소, 벨레프로메트 수용소, 모린 수용소 등이 있다. 수용소에 구금되었던 죄수 중 약 300명이 사망했으며, 수감자 대부분은 1992년 8월에 석방되었다.[82] 2013년 5월 기준으로 1991년 전역 과정에서 발생한 1,703명은 현재까지도 실종 상태이다.[83]

양 측은 분쟁 기간 많은 잔학 행위를 일으켰다. 크로아티아군이 저지른 가장 큰 규모의 학살은 고스피치 학살이다. 세르브인의 잔학 행위는 그 규모가 이보다 훨씬 컸다. 가장 큰 학살이 발생한 곳으로는 키예보 마을 학살, 부코바르 학살, 두브로브니크 포격 등이 있다.[84] 이런 전쟁범죄를 일으킨 피의자는 이후 유엔 안전 보장 이사회 결의 제827호에 따라 1993년 설립된 구유고슬라비아 국제형사재판소(ICTY)에 기소되었다.[85]

6. 3. 국제사회의 인정과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

크로아티아에서의 유고슬라비아 인민군 전역은 교착 상태로 끝났고, 양측은 국제적인 감독하의 휴전 협상을 받아들였다.[73] 1991년 말까지 분쟁으로 크로아티아인 6천명이 사망했고, 23,000명이 부상을 입었으며, 40만명 이상이 국내실향민이 되었다.[76] 1991년에서 1992년 초까지 크로아티아 시민 약 18,000명이 실종되었거나 유고 인민군 혹은 그 동맹군에게 구금되었다.[82]

독일은 세르브인이 일으킨 여러 잔학 행위 때문에 1991년 11월 중순 크로아티아와 정식으로 수교를 맺었으며, 12월 23일에는 영국, 프랑스, 미국의 반대를 무릅쓰고 크로아티아를 독립국으로 정식 인정했다.[47][86] 1992년 1월 15일에는 다른 유럽 공동체 회원국도 크로아티아의 독립을 인정했다. 세르브계 크로아티아인은 1991년 12월 21일 크로아티아 영토의 약 30%를 차지하는 유고 인민군 점령 지역을 자칭 독립국인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RSK)의 영토라고 선언했다.[47][86] 세르비아 크라이나 공화국은 경제적, 재정적으로 모국 세르비아에 의존했다.[87]

전장의 교착 상태로 유엔 사무총장 특사 허퍼트 S. 오쿤[88]과 유엔 특별정치담당 사무차장 마라크 굴딩의 도움[89]을 받아 미국의 국무장관 사이러스 밴스가 만든 평화안인 밴스 계획이 입안되었다.[88] 밴스 계획은 크로아티아에서의 적대 행위를 확실하게 종식시킨다는 목표를 가졌다. 밴스 계획에서는 휴전, 유엔 보호구역으로 지정된 특정 지역의 민간인 보호, 크로아티아 내 유엔 평화유지군인 유엔보호군 배치 등이 담겼다.[8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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