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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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711년은 서기 연호, 각국의 연호, 간지, 기년 등으로 표시될 수 있는 해이다. 주요 사건으로는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 멸망, 과달레테 전투, 무어인의 이베리아 반도 침입, 동로마 제국의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 사망 등이 있다. 또한, 일본 호류지 사찰 재건, 후시미이나리타이샤 건립 등의 문화적 사건도 있었으며, 말리크 이븐 아나스, 당나라 숙종 등이 이 해에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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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년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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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11년 | |
연도 | 711년 |
세기 | 8세기 |
십년대 | 710년대 |
달력 | |
율리우스력 | 711 |
로마 숫자 | DCCXI |
간지 | 신해(辛亥)년 (돼지) |
히브리력 | 4471 – 4472 |
이슬람력 | 92 – 93 |
페르시아력 | 89 – 90 |
일본 (和暦) | |
연호 | 와도(和銅) 4년 |
주요 사건 | |
이베리아 반도 |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서고트 왕국을 침공하여 과달레테 전투에서 승리하고 이베리아 반도 정복을 시작함. |
비잔티움 제국 | 필리피코스 바르다네스가 유스티니아노스 2세를 폐위시키고 비잔티움 제국의 황제가 됨. 유스티니아노스는 처형됨. |
탄생 | |
시라오카 천황 (일본 천황) | (사망: 781년) |
사망 | |
유스티니아노스 2세 | 비잔티움 제국 황제 (669년 출생) |
루드릭 | 서고트 왕국의 왕 |
킨레드 (머시아) | 머시아 왕국의 왕 |
카힐 막 라가일 | 코나하트 왕국의 왕 |
2. 연호
3. 기년
4. 사건
- 이베리아 반도의 서고트 왕국이 멸망하였다.
- 필리피쿠스가 하자르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켜, 비잔틴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를 처형하고 황제로 선포되었다. 이로써 헤라클리우스 왕조(비잔틴 제국)가 멸망하였다.
- 12월 –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들 티베리우스가 콘스탄티노폴리스 블라케르나이 성모 마리아 교회 밖에서 살해당했다.
- 아스티 공작 안스프란트가 이탈리아로 돌아왔고, 아리페르트 2세는 티치노 강에서 익사하였다.
- 헤르스탈의 피핀의 아들 그리모알드 2세와 라드보드왕의 딸 테오데신다의 결혼으로 프랑크족과 프리지아족 간의 평화로운 관계가 공고해졌다.
- 4월 23일 – 킬데베르트 3세가 사망하고, 다고베르트 3세가 오스트라시아의 통치자가 되었으며, 헤르스탈의 피핀은 그의 섭정이 되었다.
- 둑스 베르트프리드가 픽트족에 대항하는 노섬브리아 원정을 이끌었다.
- 4월 27일 –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가 지브롤터에 상륙하여 이베리아 반도 침공을 시작했다.
- 7월 19일 – 과달레테 전투: 무슬림 아랍인들이 서고트족 군대를 격파하고,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코르도바와 세비야(안달루시아)를 점령했다.
- 무함마드 빈 카심 휘하의 우마이야 아랍군은 중세 인도를 침략하여 신드에 술탄국을 세웠다.
- 무함마드 빈 카심은 물탄을 점령하고 펀자브 지역을 약탈했다.
- 팔렌케는 토니나에 정복되었다.
- 일본에서 호류지 사찰의 재건이 완료되었다.
- 후시미이나리타이샤가 건립되었다.
- 고즈케 국에 타고 군이 설치되었다.
4. 1. 서유럽
무어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알람브라 언덕을 점령하고 정착했다.[1] 같은 해, 서고트 왕국이 우마이야 왕조에 멸망했다.[1]4. 2. 동로마 제국
11월 4일 - 동로마 제국 황제 유스티니아누스 2세가 필리피쿠스가 일으킨 반란으로 처형되면서, 610년부터 동로마 제국을 통치해 온 헤라클리우스 왕조가 멸망한다. 필리피쿠스는 케르소네소스 주민들을 선동하여 하자르의 도움을 받아 반란을 일으켰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는 반란군에 맞서기 위해 콘스탄티노폴리스에서 크림반도로 진격했으나, 필리피쿠스는 아나톨리아 북부에서 비잔틴군을 격파하고 수도를 점령하여 황제로 선포되었다.[1]12월 –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사망 소식을 들은 그의 어머니 아나스타시아는 6살 된 아들 티베리우스와 함께 콘스탄티노폴리스 블라케르나이 성모 마리아 교회의 성역으로 피신했다. 그러나 필리피쿠스의 부하들에게 쫓기게 되었고, 티베리우스는 제단에서 끌려나와 교회 밖에서 살해당했다. 유스티니아누스 2세의 아내 테오도라의 행방은 알려지지 않았다.[2]
4. 3. 유럽
- 아스티 공작 안스프란트가 대규모 바이에른 군대를 이끌고 망명에서 이탈리아로 돌아왔다. 많은 오스트리아인들( 베네토 군대 포함)이 그를 지지하며 합류하였다. 701년에 찬탈자가 되어 왕위를 찬탈한 아리페르트 2세는 패배하여 파비아에서 골로 재무부를 가지고 도망치려 했지만, 티치노 강에서 익사하였다. 그는 마지막으로 롬바르디아의 철관을 쓴 바이에른인이 되었다(대략적인 날짜).[1]
- 프랑크족과 프리지아족 간의 평화로운 관계는 헤르스탈의 피핀의 아들 그리모알드 2세가 라드보드왕의 딸 테오데신다와 결혼함으로써 공고해졌다.[1]
- 4월 23일 – 킬데베르트 3세가 16년간의 통치 후 사망하고, 그의 아들 다고베르트 3세가 오스트라시아의 통치자로 계승되었다. 헤르스탈의 피핀은 그의 섭정이 되었다.[1]
- 무어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알람브라 언덕을 점령하고 정착했다.[1]
- 서고트 왕국이 우마이야 왕조에 멸망했다.[1]
4. 4. 브리튼
둑스 베르트프리드가 픽트족에 맞서 노섬브리아 원정을 이끌어 마나우 고도딘(오늘날의 스코틀랜드)에서 그들을 격파했다.[1]4. 5. 아시아
- 4월 27일 – 히스파니아 우마이야 왕조 정복: 타리크 이븐 지야드가 이끄는 무슬림 군대(7,000명)가 지브롤터에 상륙하여 이베리아 반도(현재의 스페인과 포르투갈) 침공을 시작했다. 타리크는 이 시기에 이슬람 정복을 시작하여 10년 동안 서고트 왕국을 점령하고 우마이야 칼리파조의 주권 하에 두었다.
- 7월 19일 – 과달레테 전투: 무슬림 아랍인들이 로데릭 왕이 이끄는 서고트족 군대(33,000명)를 격파하고, 로데릭 왕은 전투에서 사망했다. 서고트 왕국의 수도인 톨레도가 도시 문을 열었고, 타리크 이븐 지야드는 무어인 부대를 보내 코르도바와 세비야(안달루시아)를 점령했다.
- 파키스탄 인더스강 어귀 근처에서 해적들이 아랍 선박을 약탈한 후, 무함마드 빈 카심 휘하의 우마이야 아랍군은 10,000명의 병력과 6,000마리의 말을 이끌고 중세 인도를 침략하여 신드에 술탄국을 세웠다. 카심은 사우라슈트라로 원정대를 보내 라스트라쿠타 왕조와 평화 조약을 맺는다.[1]
- 무함마드 빈 카심은 오랜 공성전 끝에 물탄의 요새 도시를 점령하고, 병력을 이끌고 펀자브 지역을 약탈했으며, 무슬림 측의 경미한 사상자만 발생했다.[2]
- 무어인이 지브롤터 해협을 건너 이베리아 반도에 침입하여 알람브라 언덕을 점령하고 정착했다.
- 서고트 왕국이 우마이야 왕조에 멸망했다.
- 후시미이나리타이샤 건립.
- 고즈케 국에 타고 군이 설치되었다(일본 3대 고비 중 하나인 타고비 건립).
4. 6. 메소아메리카
토니나가 팔렌케를 정복했다.5. 문화
6. 탄생
7. 사망
참조
[1]
간행물
Part I: The Umayyad Caliphate (661–750 CE), "The First Muslim Incursion into the Indian Subcontinent"
2007-09-11
[2]
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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