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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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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아스티는 이탈리아 피에몬테주에 있는 도시로, 신석기 시대부터 사람이 거주했다. 로마 시대에는 중요한 도시로 발전했으며, 중세 시대에는 자유 코뮌으로 번영을 누렸다. 아스티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팔리오 경마 축제인 팔리오 디 아스티와 음식 축제, 와인 생산지로 유명하다. 주요 명소로는 아스티 대성당, 산 세콘도 컬리지아타, 중세 시대 탑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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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티 - [지명]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아스티 전경
왼쪽 상단: 메디치 광장과 트로야나 탑; 오른쪽 상단: 알피에리 광장의 비토리오 알피에리 기념비; 왼쪽 중앙: 로마 광장과 코멘티나 탑; 오른쪽 상단 중앙: 몽가르디노의 포도밭; 오른쪽 하단 중앙: 9월의 팔리오 디 아스티 축제; 하단: 시청과 산 세콘도 교회
공식 명칭아스티 코무네
현지 명칭아스트
위치이탈리아 피에몬테주 아스티도
면적151.31 km²
고도123 m
인구74,348 명 (2021년 1월 1일 기준)
인구 밀도491.3 명/km²
시간대CET (UTC+1)
여름 시간대CEST (UTC+2)
지역 번호0141
우편 번호14100
ISO 3166-2IT-AT
ISTAT 코드005005
세무 코드A479
주민 애칭아스티지아노(i)
수호 성인아스티의 성 세쿤두스
기념일5월 첫 번째 화요일
웹사이트아스티 시 공식 웹사이트
정치
시장마우리치오 라세로
시장 소속 정당중도우파
행정 구역
분할 구역참조
지리
인접 코무네참조
자매 도시
자매 도시정보 없음
기타

2. 역사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의 아스티 지역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기원전 174년 로마인에게 패배하기 전에 리구리아인 부족인 스타티엘리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지명은 고대 켈트어로 ‘언덕’을 의미하는 ''Ast''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기원전 124년에 로마인들은 카스트룸 또는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으며, 결국 하스타라는 이름의 완전한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89년에 이 도시는 콜로니아의 지위를 받았고, 기원전 49년에는 무니키피움의 지위를 받았다. 아스티는 타나로 강과 데르토나(토르토나)와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토리노)을 연결하는 풀비아 가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이탈리아 제9구역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른 도로들은 오늘날 스위스프랑스로 가는 주요 통로와 도시를 연결했다.

이 도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안 이탈리아를 휩쓴 야만족 침략의 초기 단계에서 매우 중요했다. 서기 402년 초, 서고트족은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메디올라눔(현대 밀라노)으로 진격했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그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약속된 지원군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갈리아아를로 안전하게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의 호송대가 밀라노를 떠나 포 강을 건너자마자 그의 탈출 경로는 고트족 기병대에 의해 알프스 산맥을 통해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더 많은 로마 군대가 이탈리아에 집결할 때까지 하스타에서 긴급 대피해야 했다. 고트족은 3월까지 하스타를 포위했고, 라인 강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스틸리코 장군이 폴렌티아 전투에서 그들과 싸워 격퇴했다. 이 첫 번째 승리 덕분에 거대한 성벽이 세워졌지만, 하스타는 서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를 휩쓴 야만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6세기 후반,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36개의 공국으로 분할했을 때, 아스티는 그 중 하나의 수도로 선택되었다. 아스티의 영토는 알벤가와 마리티메 알프스까지 뻗어 있는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774년 프랑크족이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때 백작의 칭호와 함께 유지되었다.

카롤링거 시대 말기에 아스티는 이 지역의 주요 지주였던 주교들이 직접 통치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우닥스(904-926)와 브루니구스(937-966)로, 그들은 주교좌를 카스텔 베키오("구 성")로 옮겼고, 1409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아스티 주교구는 11세기까지 강력한 실체로 남아 있었고, 피에트로 2세는 하인리히 2세 황제로부터 막대한 특권을 받았다. 11세기 후반, 오토 주교는 강력한 수사 여백작 아델라이드의 목표에 저항하려 했고, 그녀는 여러 차례 도시에 피해를 입혔다. 오토의 통치 기간 동안, 코뮌과 집정관 행정관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1095년).

아스티는 이탈리아 최초의 자유 코뮌 중 하나였으며, 1140년에 콘라트 2세로부터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받았다. 그러나 코뮌이 주교와 다른 지역 봉건 영주들의 토지를 침식하기 시작하자, 후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1155년 2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도시 성벽 앞에 나타났다. 짧은 포위 공격 후 아스티는 함락되어 불태워졌다. 이후 아스티는 독일 황제에 대항하여 롬바르드 동맹(1169년)에 가담했지만, 1174년에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츠 평화 조약(1183년) 이후 도시는 더 많은 특권을 얻었다.

13세기는 아스티 시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의 정점을 맞이했으며, 알바, 알레산드리아, 사보이아, 밀라노 (1230년에 도시를 포위) 그리고 몬페라토 후작과 살루초와의 전쟁으로 잠시 방해를 받았다. 특히 코뮌은 리구리아 항구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장악하려 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이끈 전쟁 동안 도시는 그의 편을 선택했다. 아스티는 콰토르디오와 클라마드라나에서 알레산드리아의 구엘프에게 패했지만, 제노바의 도움으로 쉽게 회복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 이후 사보이아의 토마스 2세와의 투쟁은 치열해졌다. 아스티 시민들은 1255년 2월 23일 몬테브루노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지만, (포로로 잡힌) 토마스는 아스티 출신 모든 상인들을 사보이아와 프랑스에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던 앙주의 샤를 1세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몇 차례의 게릴라 작전 이후 아스티는 파비아, 제노바 및 몬페라토의 빌헬름 7세와 동맹 조약을 맺었다. 1274년 아스티 군대는 카사노 전투에서 패했지만, 1275년 12월 12일, 로카비오네 전투에서 앙주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피에몬테에서 확장을 시도한 샤를의 노력을 종식시켰다. 1290년대에 빌헬름 7세가 또한 패배한 후 아스티는 피에몬테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 그러나 무역 및 은행 사업 통제를 둘러싼 내부 투쟁으로 곧 도시가 파벌로 분열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파벌은 강력한 솔라리 가문의 은행가였으며, 1314년에 그들은 도시를 나폴리의 로베르토 왕에게 넘겨주었다. 아스티의 자유 공화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339년 기벨린 망명자들은 도시를 탈환하여 솔라리와 그 동맹을 추방했다. 그러나 1342년 솔라리의 반격 위협으로 인해 새로운 통치자들은 밀라노의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복종했다. 비스콘티는 성채와 도시의 새로운 부르크를 보호하기 위한 두 번째 성벽을 건설했다. 1345년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기벨린 아스티와 몬페라토의 조반니 2세는 다시 나폴리 군대를 격파했다. 조반니는 1372년까지 아스티를 통치했지만, 7년 후 시의회는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의 권위에 복종했다. 갈레아초는 차례로 이를 오를레앙 공작 루이에게 할당했다.

아스티는 이탈리아 최초의 자유 코뮌 중 하나였으며 1140년에 콘라드 2세로부터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그러나 코뮌이 주교와 다른 지역의 약탈자들의 땅을 침식하기 시작하자 1155년 2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짧은 포위 공격 끝에 아스티는 불탔다. 그 후 아스티는 롬바르디아 동맹 (1169)을 고수 했지만 1174년에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츠 조약 (1183) 이후 도시는 더 많은 특권을 얻었다.

비스콘티, 몬페라토, 그리고 스포르차의 통치를 받던 몇몇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아스티는 발루아 가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결국에는 프랑스 왕가의 직할령이 되었다. 상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16세기 초에 바뀌었다. 1526년에는 카를 5세의 용병대장 파브리치오 마라마르도가 아스티를 헛되이 포위했다. 3년 후 캉브레 조약에 의해 아스티는 독일 황제에게 할당되었고, 황제는 다시 나폴리 부왕에게 넘겼다. 이후 아스티는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체가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3세와 결혼할 때 지참금에 포함되었다.

아스티는 이후 전쟁에서 사보이아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1616년에는 밀라노의 스페인 총독에 의해 포위되었지만, 카를 에마누엘 1세 공작이 직접 방어했다. 1630–31년에는 흑사병 발병으로 인해 도시의 사망률이 높았다. 몇 년 후 아스티는 스페인에 정복당했지만, 1643년에 사보이아가 다시 탈환했다. 또 다른 실패한 스페인 포위 공격이 1650년에 발생했다. 1703년 11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아스티는 다시 프랑스에 함락되었고, 1705년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1745년 프랑스 군대가 다시 도시를 침공했지만 이듬해 해방되었다.

1797년, 잦은 군사 작전과 그로 인한 열악한 경제 상황에 분노한 아스티 시민들은 사보이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7월 28일 아스티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이틀 만에 진압되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듬해 사보이아는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피에몬테에서 축출되었고, 아스티는 몽리샤르 장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짧은 반전 이후, 프랑스는 알레산드라 근처 마렝고 전투 (1800)에서 승리한 후 다시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1805년 4월 29일 아스티를 방문했지만, 시민들로부터 다소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도시는 격하되었고 마렝고 주 산하 알레산드라와 통합되었다. 프랑스 제국이 멸망한 후, 아스티는 1814년에 피에몬테로 돌아왔다. 도시는 1861년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피에몬테의 역사를 따랐다.

2. 1. 고대와 중세 초기

신석기 시대부터 지금의 아스티 지역과 그 주변에서 사람들이 살았다. 기원전 174년 로마인에게 패배하기 전에 리구리아인 부족인 스타티엘리가 이 지역을 지배했으며, 지명은 고대 켈트어로 ‘언덕’을 의미하는 ''Ast''에서 유래했을 것이다.

기원전 124년에 로마인들은 카스트룸 또는 요새화된 진영을 건설했으며, 결국 하스타라는 이름의 완전한 도시로 발전했다. 기원전 89년에 이 도시는 콜로니아의 지위를 받았고, 기원전 49년에는 무니키피움의 지위를 받았다. 아스티는 타나로 강과 데르토나(토르토나)와 아우구스타 타우리노룸(토리노)을 연결하는 풀비아 가도에 위치한 전략적 요충지로서 아우구스투스 시대의 이탈리아 제9구역의 중요한 도시가 되었다. 다른 도로들은 오늘날 스위스프랑스로 가는 주요 통로와 도시를 연결했다.

이 도시는 서로마 제국의 멸망 동안 이탈리아를 휩쓴 야만족 침략의 초기 단계에서 매우 중요했다. 서기 402년 초, 서고트족은 북부 이탈리아를 침략하여 당시 제국의 수도였던 메디올라눔(현대 밀라노)으로 진격했다. 호노리우스 황제는 그 도시에 거주하고 있었는데, 약속된 지원군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어서 갈리아아를로 안전하게 도망쳐야 했다. 그러나 그의 호송대가 밀라노를 떠나 포 강을 건너자마자 그의 탈출 경로는 고트족 기병대에 의해 알프스 산맥을 통해 차단되었다. 이로 인해 그는 더 많은 로마 군대가 이탈리아에 집결할 때까지 하스타에서 긴급 대피해야 했다. 고트족은 3월까지 하스타를 포위했고, 라인 강에서 지원군을 이끌고 온 스틸리코 장군이 폴렌티아 전투에서 그들과 싸워 격퇴했다. 이 첫 번째 승리 덕분에 거대한 성벽이 세워졌지만, 하스타는 서제국이 멸망한 후 이탈리아를 휩쓴 야만족의 침략으로 고통을 겪었고 경제적으로 쇠퇴했다.

6세기 후반, 롬바르드족이 이탈리아를 36개의 공국으로 분할했을 때, 아스티는 그 중 하나의 수도로 선택되었다. 아스티의 영토는 알벤가와 마리티메 알프스까지 뻗어 있는 넓은 지역을 포함했다. 이는 774년 프랑크족이 북부 이탈리아를 정복했을 때 백작의 칭호와 함께 유지되었다.

카롤링거 시대 말기에 아스티는 이 지역의 주요 지주였던 주교들이 직접 통치했다. 가장 중요한 인물은 아우닥스(904-926)와 브루니구스(937-966)로, 그들은 주교좌를 카스텔 베키오("구 성")로 옮겼고, 1409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아스티 주교구는 11세기까지 강력한 실체로 남아 있었고, 피에트로 2세는 하인리히 2세 황제로부터 막대한 특권을 받았다. 11세기 후반, 오토 주교는 강력한 수사 여백작 아델라이드의 목표에 저항하려 했고, 그녀는 여러 차례 도시에 피해를 입혔다. 오토의 통치 기간 동안, 코뮌과 집정관 행정관이 처음으로 언급되었다(1095년).

2. 2. 자유 코무네 시대

아스티는 이탈리아 최초의 자유 코뮌 중 하나였으며, 1140년에 콘라트 2세로부터 자체적으로 화폐를 주조할 권리를 받았다. 그러나 코뮌이 주교와 다른 지역 봉건 영주들의 토지를 침식하기 시작하자, 후자는 프리드리히 1세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그는 1155년 2월 거대한 군대를 이끌고 도시 성벽 앞에 나타났다. 짧은 포위 공격 후 아스티는 함락되어 불태워졌다. 이후 아스티는 독일 황제에 대항하여 롬바르드 동맹(1169년)에 가담했지만, 1174년에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츠 평화 조약(1183년) 이후 도시는 더 많은 특권을 얻었다.

13세기는 아스티 시민들의 경제적, 문화적 번영의 정점을 맞이했으며, 알바, 알레산드리아, 사보이아, 밀라노 (1230년에 도시를 포위) 그리고 몬페라토 후작과 살루초와의 전쟁으로 잠시 방해를 받았다. 특히 코뮌은 리구리아 항구에서 북쪽으로 이어지는 수익성 있는 무역로를 장악하려 했다. 북부 이탈리아에서 프리드리히 2세 황제가 이끈 전쟁 동안 도시는 그의 편을 선택했다. 아스티는 콰토르디오와 클라마드라나에서 알레산드리아의 구엘프에게 패했지만, 제노바의 도움으로 쉽게 회복했다. 프리드리히 2세의 죽음 이후 사보이아의 토마스 2세와의 투쟁은 치열해졌다. 아스티 시민들은 1255년 2월 23일 몬테브루노 전투에서 그를 격파했지만, (포로로 잡힌) 토마스는 아스티 출신 모든 상인들을 사보이아와 프랑스에서 체포하라고 명령했다.

이러한 상황은 당시 이탈리아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었던 앙주의 샤를 1세의 개입으로 이어졌다. 몇 차례의 게릴라 작전 이후 아스티는 파비아, 제노바 및 몬페라토의 빌헬름 7세와 동맹 조약을 맺었다. 1274년 아스티 군대는 카사노 전투에서 패했지만, 1275년 12월 12일, 로카비오네 전투에서 앙주군을 상대로 승리하여 피에몬테에서 확장을 시도한 샤를의 노력을 종식시켰다. 1290년대에 빌헬름 7세가 또한 패배한 후 아스티는 피에몬테에서 가장 강력한 도시였다. 그러나 무역 및 은행 사업 통제를 둘러싼 내부 투쟁으로 곧 도시가 파벌로 분열되었다. 가장 두드러진 파벌은 강력한 솔라리 가문의 은행가였으며, 1314년에 그들은 도시를 나폴리의 로베르토 왕에게 넘겨주었다. 아스티의 자유 공화국은 더 이상 존재하지 않았다. 1339년 기벨린 망명자들은 도시를 탈환하여 솔라리와 그 동맹을 추방했다. 그러나 1342년 솔라리의 반격 위협으로 인해 새로운 통치자들은 밀라노의 루키노 비스콘티에게 복종했다. 비스콘티는 성채와 도시의 새로운 부르크를 보호하기 위한 두 번째 성벽을 건설했다. 1345년 가메나리오 전투에서 기벨린 아스티와 몬페라토의 조반니 2세는 다시 나폴리 군대를 격파했다. 조반니는 1372년까지 아스티를 통치했지만, 7년 후 시의회는 갈레아초 2세 비스콘티의 권위에 복종했다. 갈레아초는 차례로 이를 오를레앙 공작 루이에게 할당했다.

2. 3. 외세의 지배와 통일

아스티는 이탈리아 최초의 자유 코무네 중 하나였으며 1140년에 콘라드 2세로부터 자체적으로 주화를 주조할 수 있는 권리를 받았다. 그러나 코무네 주교와 다른 지역의 약탈자들의 땅을 침식하기 시작하자 1155년 2월 프리드리히 바르바로사에게 도움을 요청했고, 짧은 포위 공격 끝에 아스티는 불탔다. 그 후 아스티는 롬바르디아 동맹 (1169)을 고수 했지만 1174년에 다시 패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콘스탄스 조약 (1183) 이후 도시는 더 많은 특권을 얻었다.

비스콘티, 몬페라토, 그리고 스포르차의 통치를 받던 몇몇 짧은 기간을 제외하고 아스티는 발루아 가문의 지배 하에 있었다. 결국에는 프랑스 왕가의 직할령이 되었다. 상황은 신성 로마 제국 황제 카를 5세와 프랑스의 프랑수아 1세 사이의 전쟁이 벌어진 16세기 초에 바뀌었다. 1526년에는 카를 5세의 용병대장 파브리치오 마라마르도가 아스티를 헛되이 포위했다. 3년 후 캄브레 조약에 의해 아스티는 독일 황제에게 할당되었고, 황제는 다시 나폴리 부왕에게 넘겼다. 이후 아스티는 포르투갈의 베아트리체가 사보이아 공작 카를로 3세와 결혼할 때 지참금에 포함되었다.

아스티는 이후 전쟁에서 사보이아 가문의 주요 거점 중 하나였다. 1616년에는 밀라노의 스페인 총독에 의해 포위되었지만, 카를 에마누엘 1세 공작이 직접 방어했다. 1630–31년에는 흑사병 발병으로 인해 도시의 사망률이 높았다. 몇 년 후 아스티는 스페인에 정복당했지만, 1643년에 사보이아가 다시 탈환했다. 또 다른 실패한 스페인 포위 공격이 1650년에 발생했다. 1703년 11월, 스페인 왕위 계승 전쟁 중 아스티는 다시 프랑스에 함락되었고, 1705년 사보이아의 비토리오 아메데오 2세에 의해 재탈환되었다. 1745년 프랑스 군대가 다시 도시를 침공했지만 이듬해 해방되었다.

1797년, 잦은 군사 작전과 그로 인한 열악한 경제 상황에 분노한 아스티 시민들은 사보이아 정부에 반란을 일으켰다. 7월 28일 아스티 공화국이 선포되었지만, 이틀 만에 진압되었다. 혁명 지도자들은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이듬해 사보이아는 프랑스 혁명군에 의해 피에몬테에서 축출되었고, 아스티는 몽리샤르 장군에 의해 점령되었다. 짧은 반전 이후, 프랑스는 알레산드라 근처 마렝고 전투 (1800)에서 승리한 후 다시 돌아왔다. 나폴레옹은 1805년 4월 29일 아스티를 방문했지만, 시민들로부터 다소 냉담한 반응을 받았다. 도시는 격하되었고 마렝고 주 산하 알레산드라와 통합되었다. 프랑스 제국이 멸망한 후, 아스티는 1814년에 피에몬테로 돌아왔다. 도시는 1861년 이탈리아 통일 때까지 피에몬테의 역사를 따랐다.

3. 지리

아스티 현 개략도


아스티는 아스티현의 중부에 있다. 아스티 시는 알레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32km, 주도인 토리노에서 남동쪽으로 45km, 제노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밀라노에서 남서쪽으로 약 99km에 위치한다.

인접한 코무네는 다음과 같다.

  • 아차노 다스티
  • 발디키에리 다스티
  • 칼리아노
  • 카스타뇨레 몬페라토
  • 카스텔알페로
  • 카스텔로 디 안노네
  • 체레 에노몬도
  • 키우자노 다스티
  • 치나리오
  • 코손브라토
  • 이솔라 다스티
  • 모나레
  • 몬갈디노
  • 포르타코마로
  • 레프랑코레
  • 레빌리아스코 다스티
  • 로카 다라초
  • 산 다미아노 다스티
  • 세티메
  • 틸리오레
  • 빌리아노 다스티


로마 광장.


아스티는 지중해와 인접해 있어 온건한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4]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토리노 보다 시원하다. 비는 주로 봄과 가을에 내린다. 가장 더운 달 동안 비는 덜 내리지만, 비가 올 때 일반적으로 뇌우가 더 강하게 친다.[4] 특히 11월과 12월에 아스티 마을은 안개가 발생하기 쉬우며, 주변의 고지대에서는 덜 일반적이다.[4]

이탈리아의 지진 위험 등급이탈리아의 지진 위험 등급/Classificazione sismica dell'Italiait에서는 4등급으로 분류된다.[9]

3. 1. 위치

아스티는 아스티현의 중부에 있다. 아스티 시는 알레산드리아에서 서쪽으로 약 32km, 주도인 토리노에서 남동쪽으로 45km, 제노바에서 북서쪽으로 약 80km, 밀라노에서 남서쪽으로 약 99km에 위치한다.

인접한 코무네는 다음과 같다.

  • 아차노 다스티
  • 발디키에리 다스티
  • 칼리아노
  • 카스타뇨레 몬페라토
  • 카스텔알페로
  • 카스텔로 디 안노네
  • 체레 에노몬도
  • 키우자노 다스티
  • 치나리오
  • 코손브라토
  • 이솔라 다스티
  • 모나레
  • 몬갈디노
  • 포르타코마로
  • 레프랑코레
  • 레빌리아스코 다스티
  • 로카 다라초
  • 산 다미아노 다스티
  • 세티메
  • 틸리오레
  • 빌리아노 다스티

3. 2. 기후

아스티는 지중해와 인접해 있어 온건한 대륙성 기후를 가지고 있다.[4] 겨울은 따뜻하고, 여름은 토리노 보다 시원하다. 비는 주로 봄과 가을에 내린다. 가장 더운 달 동안 비는 덜 내리지만, 비가 올 때 일반적으로 뇌우가 더 강하게 친다.[4] 특히 11월과 12월에 아스티 마을은 안개가 발생하기 쉬우며, 주변의 고지대에서는 덜 일반적이다.[4]

이탈리아의 지진 위험 등급에서는 4등급으로 분류된다.[9]

4. 문화

4. 1. 팔리오 디 아스티

아스티에서 열리는 가장 유명한 행사 중 하나는 아스티 팔리오(Palio di Asti)이다. 이 행사는 ‘리오니’(Rioni)와 ‘보르기’(Borghi)라고 불리는 모든 구시가지와 인근 마을이 맨손으로 경마를 펼치는 방식으로 진행된다. 중세 시대에 라이벌 도시인 알바와의 전투에서 승리한 것을 기념하며, 승리한 전투 후 알바 성벽 주변에서 경주가 열렸고, 그 이후 매년 아스티에서 열리고 있다. 아스티의 팔리오는 이탈리아에서 가장 오래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현대에는 9월 셋째 주 일요일에 구시가지를 통과하는 중세 미인 대회가 선행된 후 삼각형 모양의 알피에리 광장(Piazza Alfieri)에서 열린다.

아스티 팔리오(Palio di Asti).

4. 2. 아스티 축제 (Sagre)

아스티는 9월에 팔리오가 열리기 일주일 전에 열리는 아스티 축제 축제로 유명하다. 축제 기간 동안 아스티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은 "캄포 델 팔리오(Campo del Palio)"라는 큰 광장에 모여, 그곳에서 그들이 알려진 전형적인 음식과 와인을 제공한다. 사그레(Sagre) 일요일에는 관련된 모든 마을이 전통 농업을 묘사하는 수레와 함께 퍼레이드를 개최하며, 모든 사람들은 의상을 입고 아스티의 도로를 따라 "캄포 델 팔리오" 광장에 도착한다.

아스티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흰 송로 버섯(tartufo bianco) 시즌인 때 미식가들의 기쁨이 된다. 이웃 알바는 10월 트러플 박람회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최고의 트러플 중 일부는 아스티의 언덕 주변에서 발견되며 매주 주말마다 지역 트러플 축제가 열린다.

4. 3. 음식과 와인

아스티는 쿠네오, 알레산드리아와 인접한 주이며, 피에몬테 중심부에 위치한 랑게와 몬페라토 언덕 지역을 포함한다. 이 지역은 약 5백만 년 전 물러간 아드리아 해에 의해 퇴적된 석회암사암 퇴적층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이탈리아에서 가장 유명한 적포도주와 일부 백포도주가 생산된다.

아스티는 스파클링 와인인 아스티 (DOCG, 흔히 "아스티 스푸만테"로 알려짐)의 생산 중심지이다. 아스티는 일반적으로 달콤하며 알코올 함량이 낮다(종종 8% 미만). 이는 순전히 ''모스카토 비앙코'' 백색 머스캣 포도로 만들어진다. 다른 와인으로는 모스카토 다스티 (DOCG)로 알려진 프리미엄 버전과 적포도주 바르베라가 있다. 아스티 지방에서 국제적으로 알려지게 된 최초의 제품은 마르티니 앤 로시, 간치아 및 리카도나로, 아스티 스푸만테와 같은 상업용 와인을 만들었다. 바르베라 다스티, 프레이사 다스티, 그리놀리노 다스티, 보나르다, 그리놀리노 및 루케 디 카스타뇰레 몬페라토와 같은 적포도주도 전 세계적으로 널리 퍼지고 있다. 프레이사 다스티 품종에 대한 최초의 문서는 16세기 초부터 존재한다.

9월에는 팔리오(Palio)가 열리기 일주일 전에 아스티 축제 축제가 열린다. 축제 기간 동안 아스티 지방에 있는 대부분의 마을은 캄포 델 팔리오(Campo del Palio)라는 큰 광장에 모여 전형적인 음식과 와인을 제공한다. 사그레(Sagre)의 일요일에는 관련된 모든 마을은 캄포 델 팔리오 광장에 도달하기 위해 아스티의 도로를 따라 의상을 입은 모든 사람들과 함께 전통 농업을 묘사하는 수레와 함께 퍼레이드를 개최한다.

아스티 지방은 10월부터 12월까지 흰 송로 버섯 또는 "타르투포 비안코(tartufo bianco)" 시즌이 되면 미식가의 즐거움이 된다. 이웃 알바(Alba)가 10월의 송로 버섯 박람회로 더 잘 알려져 있지만, 최고의 송로 버섯 중 일부는 아스티의 언덕 주변에서 발견되며, 매 주말마다 현지 송로 버섯 축제가 열린다.

5. 교통

아스티역은 1849년에 개장하여 토리노-제네바 철도 및 카스타뇰레-아스티-모르타라 철도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 역은 또한 제노바키바소로 가는 다른 두 노선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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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1. 철도

아스티역은 1849년에 개장하여 토리노-제네바 철도 및 카스타뇰레-아스티-모르타라 철도의 일부를 형성한다. 이 역은 또한 제노바키바소로 가는 다른 두 노선의 분기점이기도 하다.

6. 행정



아스티에는 다음과 같은 분리 집락 (프라치오네)이 있다.


  • Beccati, Bramairate, Bricco Fassio, Bricco Roasio, Ca' dei Coppi, Caniglie, Canova, Casabianca, Castiglione, Migliandolo, Mombarone, Mongardino Stazione, Montegrosso Cinaglio, Montemarzo, Palucco, Poggio d'Asti, Portacomaro Stazione, Quarto Inferiore, Quarto Superiore, Revignano, Rioscone, San Grato di Sessant, San Marzanotto, San Marzanotto Piana, Santo Spirito, San Vito - Poggio, Serravalle, Sessant, Torrazzo, Trincere, Vaglierano, Vaglierano Basso, Valenzani, Valfea, Valgera, Valleandona, Valle Tanaro, Valmaggiore, Valmairone, Valmanera, Valterza, Variglie, Valbella, Viatosto


아스티는 다음과 같은 도시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6. 1. 자매 도시

아스티는 다음과 같은 도시와 자매 도시 관계를 맺고 있다.

7. 인물


  • 간돌피노 다스티 또는 간돌피노 다 로레토(1493–1518 활동) 르네상스 화가이다.
  • 비토리오 알피에리(1749–1803)는 "이탈리아 비극의 창시자"로 묘사되는 극작가이다.
  • 이사크 아르톰(1829–1900)은 작가, 외교관, 정치인이다.
  • 미켈란젤로 피타토레(1825–1903)는 초상화가이다.
  • 움베르토 카니(1863–1932)는 극지 탐험가이자 제독이다.
  • 카를로 알베르토 카스틸리아노(1847–1884)는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다.
  • 미하일 츠베트(미하일 세묘노비치 츠베트/Михаил Семёнович Цветru, 1872–1919)는 러시아-이탈리아 식물학자이자 크로마토그래피 발명가이다.
  • 에토레 데스데리(1892–1974)는 종교 음악으로 가장 잘 알려진 작곡가이다.
  • 파올로 콘테(1937년 출생)는 화가, 시인, 작사가이다.
  • 조반니 고리아(1943–1994)는 기독교 민주당 정치인으로, 1987년부터 1988년까지 이탈리아 총리를 역임하였다.
  • 조르조 팔레티(1950–2014)는 작가, 배우, 싱어송라이터이다.
  • 마우리치오 로비나(1973년 출생)는 댄스 음악가이자 세계적으로 유명한 댄스 음악 밴드 에펠 65 멤버이며, 블룸 06의 전 멤버이다.
  • 마테오 파로(1983년 출생)는 축구 선수이다.
  • 리날도 카펠로(1964년 출생)는 르망 24시 3회 우승 드라이버이다.
  • 파비오 멩고치(1980년 출생)는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이다.
  • 프란치스코 교황의 사촌 중 한 명이 아스티 출신이며, 프란치스코 교황의 아버지는 아스티 교구 영토에서 아르헨티나로 이민을 갔다.

분류:아스티 출신 인물

8. 주요 명소

도시 북쪽에 고대 도시 성벽의 일부가 남아 있으며, 20세기 후반 건축 공사로 도시 중심부에서 로마 시대 성벽의 일부가 발견되었다.

도시의 북서쪽, 중심부와 대성당 사이 지역에는 중세 시대 궁전과 상인들의 저택이 풍부하며, 많은 건물에 기념비적인 탑이 있다. 아스티는 100개의 탑의 도시(총 120개)로 알려져 있으며, 그중 몇 개가 아직 남아 있는데, 그중에는 ''코멘티니 탑''(13세기), 팔각형의 ''레기부스 탑''과 ''트로야나 탑''(13세기), 그리고 로마 황제 아우구스투스 치세에 지어진 고대 ''로사 탑'' 등이 있다.

아스티에는 여러 오래된 교회가 있다.


  • ''산타 마리아 아순타 대성당''(13세기에 다른 대성당 위에 지어짐)은 피에몬테에서 가장 큰 로마네스크-고딕 양식의 성당 중 하나이다. 종루는 1266년에 만들어졌다. 정면은 각각 큰 장미 창으로 덮인 세 개의 포털로 특징지어진다. 본당과 두 개의 통로가 있는 내부는 18세기 프레스코 연작, 간돌피노 다스티의 제단화, 15-16세기 귀중한 공예품을 소장하고 있다. 성가대석에는 기존 교회에서 가져온 주목할 만한 모자이크 바닥이 있다. 본당의 마지막 기둥 옆에는 14세기 예술 작품 두 점, 발드라코 말라바일라 주교의 장례 인장과 아리치노 모네타의 기마 초상화가 있다.
  • ''콜레지아타 디 산 세콘도''(13세기)는 팔라초 치비코 옆, 오래된 중세 시대 중심부에 위치해 있다. 이 교회는 도시의 수호 성인인 아스티의 세군두스에게 헌정되었다. 지하 묘지는 6세기부터 존재한다. 정면에는 세 개의 주목할 만한 고딕 양식 포털이 있으며, 내부는 간돌피노 다스티의 다폭 제단화와 다른 작품을 소장하고 있다.
  • ''산타 마리아 누오바''(11세기).
  • ''산 마르티노''는 886년에 처음 언급되었으며, 오래된 고딕 양식 건물은 1696년에 해체되어 1736년에 바로크 양식으로 재건되었다.
  • ''산타나스타시오''(8-12세기) 박물관에는 고대 기둥머리와 조각품이 있다.
  • ''산타 카테리나'' 바로크 교회
  • ''산 피에트로 세례당''(12세기)은 도시의 중세 시대 건물이다. 넓은 돔이 있는 팔각형 평면을 가지고 있다.
  • ''산 피에트로 인 콘사비아''(15세기)는 우아한 외부 장식이 특징이다. 로마 시대 및 이집트 시대 작품을 소장한 고고학 박물관이 있다.


812년부터 존재가 기록된 아스티 유대인 공동체의 역사를 보여주는 회당과 박물관이 있다.

참조

[1] American Heritage Dictionary Asti 2019-05-24
[2] 웹사이트 Asti https://www.collinsd[...] HarperCollins 2019-05-24
[3] dictionary Asti http://www.lexico.co[...] Oxford University Press
[4] 웹사이트 Clima - Asti (Piemonte) https://www.climievi[...] Climi e viaggi 2024-06-29
[5] 웹사이트 Asti (AT) https://www.tuttital[...]
[6] 웹사이트 Tavola: Popolazione residente - Asti (dettaglio loc. abitat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03
[7] 웹사이트 Tavola: Superficie territoriale (Kmq) - Asti (dettaglio comunale) - Censimento 2001. http://dawinci.istat[...] 2013-04-03
[8] 웹사이트 Total Resident Population on 1st January 2020 by sex and marital status http://demo.istat.it[...] 2021-02-13
[9] 웹사이트 classificazione sismica 1 dicembre 2020 http://www.protezion[...] 2021-0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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