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00호대 증기 기관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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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900호대 증기 기관차는 1930년대 초 조선철도의 황해선 수송 능력 확대를 위해 개발된 762mm 협궤용 2-8-2 텐더 기관차이다. 좁은 궤도와 저품질 갈탄 사용이라는 제약 속에서, 일본의 기술을 활용하여 세계 최대 크기의 협궤 기관차로 설계되었다. 1937년부터 운행을 시작하여, 250톤 이상의 열차를 50km/h의 속도로 견인할 수 있었다. 해방 이후에는 대한민국과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으로 분리되어 운용되었으며, 현재 대한민국에는 5량이 보존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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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카형 증기 기관차는 조선총독부 철도국이 화물 수송 능력 증대를 위해 1910년대 말부터 도입한 증기 기관차로, 여러 모델이 생산되어 해방 후에도 사용되었으며 현재는 대한민국의 철도 역사를 상징하는 유산으로 남아있다.
| 900호대 증기 기관차 | |
|---|---|
| 기본 정보 | |
![]() | |
| 이름 | 조선철도 900형 증기 기관차 |
| 한국국철 | 한국국철 혁11 (혀기11) |
| 설계자 | 다카오 다카다 (Takao Takada) |
| 제작사 | 기샤 세이조 니폰샤료 히타치 |
| 제작 년도 | 1937년, 1944년 |
| 총 생산량 | 15량 |
| 축 배치 | 2-8-2 |
| 기술 정보 | |
| 변장치 | 와르샤트식 |
| 제동 장치 | 자동 공기 브레이크 |
| 운영 정보 | |
| 운영 기관 | 조선철도 조선총독부 철도 한국철도청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 |
| 기관차 분류 | 조선철도: 900형 한국국철: 혁11 |
| 차량 번호 | 조선철도: 900-914 |
| 인도 날짜 | 1937년: 900-909 1944년: 910-914 |
2. 역사적 배경
1932년 예성강 다리가 완공되면서, 황해선은 경성과 황해도 해주시를 잇는 중요한 노선이 되었다. 이로 인해 쌀, 철광석, 석회석 등의 물동량이 급증하였다. 이에 따라 협궤 노선의 수송 능력 증대가 필요해졌으며, 표준궤로의 개축도 고려되었으나 막대한 비용과 시간이 소요되어 협궤 기관차의 성능을 향상시키는 방향으로 결정되었다. 이러한 배경에서 1937년에 762mm 협궤용으로서는 세계 최대 크기의 2-8-2 텐더 기관차인 혀기형 증기 기관차가 개발되었다.[2]
900호대 증기 기관차는 762mm 협궤용으로 설계된 세계 최대 크기의 2-8-2(1D1) 텐더 기관차이다.[2] 1932년 예성강 다리 완공 후, 황해도 지역의 교통량이 급증하면서 좁은 궤도의 수송 능력을 늘리기 위해 개발되었다.[2]
3. 구조 및 특징
이 프로젝트는 타카오 타카다가 담당했으며, 저품질 갈탄(열량 4500kcal)을 사용할 수 있도록 화격자 면적을 2.1m2로 넓게 설계했다. 이는 일본국유철도의 9600형 기관차와 비슷한 크기였다.[2] 협궤의 한계로 보일러 중심선을 높일 수 없어, 주강 크로스 빔을 삽입하는 등 일본 제조사가 처음 시도하는 기술을 적용했다.[2]
긴 휠베이스에도 불구하고 반경 40m의 곡선을 통과할 수 있도록 선두 대차는 각 측면으로 140mm, 첫 번째 동륜은 10mm의 측면 이동 범위를 가졌고, 세 번째 동륜의 플랜지는 다른 동륜보다 5mm 더 좁게 설계했다. 이러한 설계를 검증하기 위해 실물 크기 목업을 제작하여 곡선 철로에서 테스트를 진행했다.[2]
900형은 물과 석탄 소비가 적었고 250ton 이상의 열차를 50km/h의 속도로 원활하게 견인할 수 있었다.[1]
3. 1. 기술 제원
광복과 분단 이후, 이 기관차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와 대한민국 국유철도로 분리되었다. 히타치 제작 3량은 대한민국 국유철도에서 운행한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이들은 '''혀기11'''형으로 분류되어 혀기11-12, 혀기11-13, 혀기11-14로 번호가 부여되었으며, 세 대 모두 보존되어 있다.
4. 운용
900형 증기 기관차는 1937년 기샤세이조에서 7량(900~906)이 처음 제작되었고, 같은 해 닛폰차량제조에서 3량(907~909)이 추가되었다.[1] 1944년에는 기샤세이조에서 2량(910~911), 히타치 제작소에서 3량(912~914)이 추가로 만들어졌다.[2]
당초 함북선에 투입될 예정이었으나, 표준궤로의 개궤가 진행되면서 황해선에 투입되었다. 900형은 250ton 이상의 열차를 50km/h의 속도로 견인할 수 있었고, 물과 석탄 소비량이 적어 운행 효율이 높았다.[1]
1944년 4월 1일, 조선철도가 조선총독부에 매수(국유화)되면서 900형은 조선총독부 철도 소속이 되었다.
5. 해방 이후
광복과 분단 이후, 900호대 증기 기관차는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와 대한민국 국유철도로 분리되었다. 히타치에서 제작한 3량(912~914)은 대한민국 국유철도에서 '''혀기11형'''으로 분류되어 혀기11-12, 혀기11-13, 혀기11-14로 번호가 부여되었다.[14][15][16][17]
한국 전쟁 때 미군으로부터 2량이 추가 반입되었다. 일본차량제조에서 제작한 혀기US7과 미쓰비시에서 제작한 혀기US8(제조 번호 722)이다. 이들은 나중에 번호 그대로 한국철도 소속이 되었다.[18][19][20]
한국철도에 소속된 900호대 증기 기관차는 폐차 후 5량 모두 보존되어 있다. 구체적인 보존 장소는 다음과 같다.
| 기관차 번호 | 보존 장소 |
|---|---|
| 혀기11-12 | 삼성교통박물관 |
| 혀기11-13 | 철도박물관 (한국)[21] |
| 혀기11-14 | 용평 리조트 |
| 혀기US7 (현차 표기 혀기-7) | 인천광역시 남동구 |
| 혀기US8 (현차 표기 혀기-8)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 |
6. 대만에서의 운용
혀기형 증기 기관차와 유사한 설계의 기관차가 타이완 총독부 철도(현 타이완 철로 관리국)에서 LD50형(LDT100형)으로 운용되었다. 일본 차량 제조에서 1942년 이후 총 7량이 제작되었으나, 3량은 수송 중 침몰 등의 이유로 타이완에 도착하지 못했다.[22]
1942년에 4량(LD501 - LD504, 제조 번호 958, 1063 - 1065), 1943년에 3량(LD505 - LD507, 제조 번호 1190, 1191, 1260)이 발주되었다. LD505 - LD507은 타이완에 도착하지 않았는데, LD505와 LD506은 수송 중 수송선이 미국 해군에 의해 폭격되어 침몰했고, LD507은 일본에 남겨진 후 한국 전쟁 때 재생되어 미군에 의해 대한민국으로 수송되어 한국 국철혀기US7이 되었다.[22]
태평양 전쟁 후, 타이완 철로 관리국에 인계된 기관차는 LDT100형(LDT101 - LDT104)으로 변경되어 타이둥 선에서 운용되었다.
폐차 후 LDT103은 화롄 철로 문화원구에 보존되어 있다.[23]
7. 보존
대한민국에는 총 5량의 900호대 증기 기관차가 보존되어 있다.
| 차량 번호 | 보존 위치 |
|---|---|
| 혀기11-12 | 삼성교통박물관[14][15][16][17] |
| 혀기11-13 | 철도박물관 (한국)[14][15][16][17][21] |
| 혀기11-14 | 용평 리조트[14][15][16][17] |
| 혀기US7 (현차 표기 혀기-7) | 인천광역시 남동구[18][19][20] |
| 혀기US8 (현차 표기 혀기-8) | 전라남도 신안군 흑산도[18][19][20] |
참조
[1]
서적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Korea Rolling Stock Technical Corp.
1999
[2]
서적
汽車会社蒸気機関車製造史
Kōyūsha
1972
[3]
문서
Father of [[Hideo Shima]]
[4]
문서
この鉄橋の橋桁自体、汽車製造が納入したものである。
[5]
문서
日本国鉄の蒸気機関車は戦中戦後の混乱期以外は1kgあたり6,000 - 6,500kcal/h、[[朝鮮総督府鉄道]]でも同じく5,250kcal/h程度の熱量を基準に設計されており、本形式が前提とする石炭は非常に熱量の少ない[[褐炭]]である。
[6]
문서
これは[[国鉄9600形蒸気機関車|鉄道省9600形]]の2.32 m2に匹敵する。一方、燃料の熱量が少ない割に炭水車容量が小さいのは、これまでタンク式機関車を多用してきた朝鮮鉄道の762 mm 軌間線では随所に給炭水設備があり、こまめに補充できたことによる。
[7]
문서
後台枠が接続点からなだらかに広がる鉄道省制式機とは異なり、この接続部分直後で直角に横に大きく拡げてあり、火室の収まる空間を稼ぎ出している。後台枠は従台車担いばねをも内側に抱えるほどに拡げられている
[8]
문서
[[国鉄C12形蒸気機関車|C12]]・[[国鉄C56形蒸気機関車|56]]両形式とほぼ同等のボイラー径である。また煙管長は4,300 mm とC12・56より1 m 以上長い。
[9]
문서
[[国鉄D51形蒸気機関車|D51]]では第1 - 第3動輪の軸重が軽く第4動輪の軸重が一番重いため牽き出し時に粘着重量が従台車へ逃げてしまうことで深刻な空転リスクを抱え、また[[国鉄C59形蒸気機関車|C59]]では従台車そのものの軸重が幹線機関車の動輪並みの軸重となりタイヤ割損のリスクを抱えた
[10]
문서
これを設計したのは汽車製造の技師で、本形式が処女作となった[[髙田隆雄]]である。髙田は後に[[国鉄D52形蒸気機関車|D52形]]の設計にも関与し、[[国鉄C62形蒸気機関車|C62形]]などのデルタ式[[従輪|従台車]]の採用可能性を示唆したと評されている。
また髙田が関与したD52では本形式と同様に煙室とボイラ胴を前に寄せる手法で軸重配分を是正している。
[11]
문서
当時の汽車製造社長[[島安次郎]]の案によるとされる。
[12]
문서
1944年製の913・914は[[戦時設計]]が適用されているため、砂箱・蒸気溜めのドームが角型化されるなど全般に工作が簡素化されている。後述の現存機関車(혀기11-13・혀기11-14)はこのグループである。
[13]
문서
1930年の630形の竣工写真・出荷風景の写真では従前の装備であったが、この後1937年までの間に装備されたものと考えられる。なお黄海線の自動連結器はナックルの中央部に切れ込みとピンが装備された、一種の両用連結器であった。
[14]
문서
혀기(カナ転写「ヒョウキ」)は漢字で狭機。'''狭'''軌'''機'''関車の略。
[15]
웹사이트
https://donsdepot.do[...]
[16]
웹사이트
https://donsdepot.do[...]
[17]
문서
韓国継承機の運用先は[[水仁線]]と[[水驪線]]。
[18]
웹사이트
https://donsdepot.do[...]
[19]
웹사이트
https://donsdepot.do[...]
[20]
문서
혀기US7は後述の通り台湾総督府鉄道LD507の未送品を再生したもの。
[21]
문서
大韓民国登録文化財418号
[22]
문서
再生品だが新規に製造番号が振られており、元のLD507の1260から혀기US7は1567に改められている。
[23]
문서
LDT101・102・104の3両については日本の大手私鉄が購入し日本へ戻されたが、再生プランの不調のため結局解体処分となっている。
[24]
문서
공차중량.
[25]
서적
한국철도차량 100년사
철도차량기술검정단
19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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