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해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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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황해선은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제철소에서 개인 산업 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개통한 협궤 노선으로, 이후 여러 철도 회사에 인수되어 확장되었다. 사리원, 해주 등을 연결하는 노선으로, 조선철도가 황해선 네트워크를 크게 확장했다. 1944년 조선총독부 철도에 매각되어 분할되었으며, 광복 이후에는 대부분이 북한에 위치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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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해선 | |
---|---|
노선 정보 | |
이름 | 황해선 (黃海線) |
로마자 표기 | Hwanghae Seon |
종류 | 여객/화물 |
운영 상태 | 1944년 분단 |
위치 | 황해도 |
기점 | 사리원 |
종점 | 해주 |
역 수 | 63 |
개통 | 1919년–1937년 |
소유주 | 조선 철도 |
운영자 | 조선 철도 |
노선 성격 | 중량 철도 지역 철도 |
노선 길이 | 294.3km |
선로 수 | 단선 |
최소 곡선 반지름 | 알 수 없음 |
최대 경사 | 알 수 없음 |
노선 번호 | 알 수 없음 |
전철화 | 알 수 없음 |
최고 속도 | 알 수 없음 |
2. 역사
황해선은 일제강점기에 건설된 철도 노선으로, 여러 회사의 인수, 합병, 노선 연장 과정을 거쳤다.
1919년 5월 20일, 미쓰비시 제철소가 상해(삼강)-내토 (화산까지) 구간을 산업 철도로 개통했다.[2] 1920년 4월 21일, 서선개발철도가 이 노선을 인수했다.[3]
서선개발철도는 사리원-재령-상해(21.5km, 1920년 12월 21일),[4] 재령-신천(13.6km, 1921년 11월 16일) 구간을 건설했다.[5]
1923년 4월 1일, 서선개발철도는 조선철도에 합병되었고, 조선철도는 상해-내토, 사리원-상해-신천 노선을 묶어 '''황해선'''이라 칭했다.[6]
이후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확장했다. 주요 내용은 아래 표와 같다.
날짜 | 구간 | 길이 | 최초 건설자 |
---|---|---|---|
1919년 5월 20일 | 상해–내토 | 15km | 미쓰비시 제철소 |
1920년 12월 21일 | 사리원–재령 | 21.5km | 서선개발철도 |
1921년 11월 16일 | 재령–신천 | 13.6km | 서선개발철도 |
1924년 9월 1일 | 화산–미력 | 8km | 조선철도 |
1925년 9월 1일 | 미력–하성 | 15.2km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일 | 신천–수교 | 29km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2일 | 신원–학현 | 22.6km | 조선철도 |
1930년 12월 11일 | 학현–동해주 | 6.4km | 조선철도 |
1931년 11월 12일 | 동해주–해주항 | 7.5km | 조선철도 |
1931년 12월 21일 | 동해주–연안 | 45.1km | 조선철도 |
청단–덕달 | 12.7km | 조선철도 | |
1932년 9월 1일 | 연안–토성 | 34.1km | 조선철도 |
1933년 7월 1일 | 해주–동해주 | 2.3km | 조선철도 |
1936년 12월 11일 | 해주–취야 | 19.3km | 조선철도 |
1937년 1월 21일 | 수교–장연 | 17.7km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0일 | 동포–정도 | 0.7km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9일 | 취야–옹진 | 24.2km | 조선철도 |
1944년 4월 1일, 조선철도의 황해선은 국유화되어 여러 노선으로 분할되었다.[17] 1944년 10월 1일에는 사리원-하성 간 표준궤 노선 (황해본선)이 건설되었고, 기존 하성역은 '구하성역'으로 개칭되었다.[18]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한반도 분단으로 황해선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이 인수했다.[19] 도해선 일부는 대한민국 (미군정)에 속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구 황해선 전체가 북한에 위치하게 되었다.[19]
황해선은 경의선의 경성과 평양 중간 지점인 토성(개풍)에서 분기, 서해안 해주(해주청년)을 거쳐 북상하여 경의선 사리원(사리원청년)을 잇는 155km 정도의 본선(762mm 궤간)이었다. 최고 70km/h의 쾌속·급행 열차와 석탄, 광석을 실은 중량 화물 열차가 운행되었다.[23]
2. 1. 일제강점기
미쓰비시 제철은 1919년 5월 20일 상해(삼강)에서 내토를 거쳐 화산까지 15km 구간을 산업 철도로 개통했다.[2] 서선개발철도는 이 노선을 1920년 4월 21일에 인수했다.[3]서선개발철도는 사리원에서 재령을 거쳐 상해까지 21.5km 구간(1920년 12월 21일 개통),[4] 재령에서 신천까지 13.6km 구간(1921년 11월 16일 개통)을 건설했다.[5]
1923년 4월 1일, 서선개발철도는 5개 철도 회사와 합병하여 조선철도를 설립, 모든 노선과 운영을 인수했다.[6] 조선철도는 상해-내토 노선과 사리원-상해-신천 노선을 묶어 '''황해선'''이라 칭했다.
이후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대폭 확장했다. 주요 확장 내용은 다음과 같다:
날짜 | 구간 | 길이 |
---|---|---|
1924년 9월 1일 | 화산-미력 | 8km[7] |
1925년 9월 1일 | 미력-신원-하성 | 15.2km |
1929년 11월 1일 | 신천-수교 | 29km[8] |
1929년 11월 12일 | 신원-학현 | 22km[8] |
1930년 12월 11일 | 학현-동해주 | 6.4km[8] |
1931년 11월 12일 | 동해주-해주항(룡당포) | 7.5km[9] |
1931년 12월 21일 | 동해주-연안 | 45.1km[9] |
1932년 9월 1일 | 연안-토성 | 34.1km (\례성강 다리 건설)[10] |
1933년 7월 1일 | 동해주-해주 | 2.3km[11] |
1934년 5월 11일 | 서변역(동포) 개업 | [12] |
1935년 8월 11일 | 신덕역 개업 | [12] |
1936년 12월 11일 | 해주-취야 | 19.3km |
1937년 1월 21일 | 수교-장연 | 17.7km[14] |
1937년 5월 10일 | 동포-정도 | 0.7km (지선)[15] |
1937년 5월 19일 | 취야-옹진 | 24.2km[16] |
1944년 4월 1일,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선철에 매각했고, 선철은 이를 흡수하여 여러 노선으로 분할했다:[17]
- 덕달선: 청단-덕달 (12.7km)
- 하성선: 신원-하성 (0.4km)
- 장연선: 삼강-장연 (68.9km)
- 청도선: 동포-정도 (0.7km)
- 내토선: 화산-내토 (2.1km)
- 옹진선: 해주-옹진 (43.5km)
- 사해선: 사리원-화산-신원-해주 (89.8km)
- 도해선: 동해주-토성 (79.7km)
1944년 10월 1일, 선철은 사리원-하성 간 41.7km의 표준궤 노선 (황해본선)을 건설했다. 하성에 새 역이 개통되면서 기존 역은 '구하성역'으로 개칭되었다.[18]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한반도 분단으로 구 황해선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속하게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이 인수했다.[19] 도해선 일부는 대한민국 (미군정)에 속했으나, 한국 전쟁 이후 구 황해선 전체가 북한에 위치하게 되었다.[19]
황해선은 경의선의 경성과 평양 중간 지점인 토성(개풍)에서 분기, 서해안 해주(해주청년)을 거쳐 북상하여 경의선 사리원(사리원청년)을 잇는 155km 정도의 본선(762mm 궤간)이었다. 최고 70km/h의 쾌속·급행 열차와 석탄, 광석을 실은 중량 화물 열차가 운행되었다.[23]
2. 1. 1. 조선철도 이전
미쓰비시 제철이 개인 산업 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상해(후에 삼강)에서 내토를 거쳐 화산까지 15km의 762mm 협궤 노선을 1919년 5월 20일에 개통하였다.[2] 그 직후, 서선개발철도가 이 노선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다음 해 4월 21일에 인수하였다.[3]서선개발철도는 사리원에서 재령을 거쳐 상해까지 21.5km 노선 공사를 시작하여 1920년 12월 21일에 개통했으며,[4] 다음 해 11월 16일에는 재령에서 신천까지 13.6km 구간을 연장하였다.[5]
1923년 4월 1일, 서선개발철도는 다른 5개의 철도 회사와 합병하여 조선철도를 결성하고 이전 회사의 모든 노선과 운영을 인수하였다.[6] 조선철도는 이후 상해-내토 노선을 서선개발철도에서 인수한 사리원-상해-신천 노선과 함께 묶어 '''황해선'''이라 불렀다.
2. 1. 2. 조선철도 시대
미쓰비시 제철소(Mitsubishi Ironworks)가 1919년 5월 20일 개인 산업 철도로 사용하기 위해 상해 (후에 삼강)에서 내토를 거쳐 화산까지 협궤 노선을 개통했다.[2] 그 직후, 서선개발철도(West Chōsen Development Railway)가 이 노선을 인수하기 위해 설립되었고, 1920년 4월 21일에 인수했다.[3]얼마 지나지 않아 서선개발철도는 사리원에서 재령을 거쳐 상해까지 구간의 협궤 노선 공사를 시작하여 1920년 12월 21일에 개통했으며,[4] 1921년 11월 16일에는 재령에서 신천까지 구간을 연장했다.[5]
1923년 4월 1일, 서선개발철도는 다른 5개의 철도 회사와 합병하여 조선철도(Chōsen Railway)를 설립하고 이전 회사의 모든 노선과 운영을 인수했다.[6] 조선철도는 이후 상해-내토 노선을 서선개발철도에서 인수한 사리원-상해-신천 노선과 함께 묶어 '''황해선'''이라 불렀다.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크게 확장했으며, 첫 번째 확장은 1924년 9월 1일에 화산에서 미력까지 연장한 것이었다.[7] 1년 후 조선철도는 미력-신원-하성 노선을 개통했다.
이후 4년 동안 네트워크는 변경되지 않았지만, 이후 일련의 확장이 이루어졌다. 먼저, 사리원-신천 노선은 1929년 11월 1일에 신천에서 수교까지 연장되었고, 1929년 11월 12일에는 신원-학현 구간이, 1930년 12월 11일에는 학현-동해주 구간이 연장되었다.[8] 1년도 채 되지 않아 조선철도는 다시 노선을 연장하여, 1931년 11월 12일에는 동해주에서 해주항역(룡당포)까지 구간을 건설했다.[9]
조선철도는 해주 주변의 네트워크를 확장하기 시작했다. 1931년 11월 12일에 동해주에서 룡당포의 해주항까지 노선을 개통한 후, 해주의 동쪽에서 건설을 시작하여 경의선과의 남쪽 연결을 만들었다. 이 새로운 협궤 노선의 첫 번째 구간은 동해주에서 연안까지로, 1931년 12월 21일에 개통되었다.[9]
두 번째 구간은 례성강에 다리를 건설해야 했기 때문에 훨씬 더 집중적인 작업이 필요했다. 일본의 기관차 제조업체 기차제작(Kisha Seizō)에서 35개의 거더를 공급했고,[10] 노선은 1932년 9월 1일에 개통되어 연안에서 새로운 다리를 건너 토성 (후에 개풍으로 개칭)에서 경의선과 연결되었다. 동해주에서 해주까지 서쪽 연장은 1933년 7월 1일에 개통되었다.[11] 조선철도는 1934년 5월 11일에 동해주에서 남쪽에 서변역 (후에 동포로 개칭, 현재는 왕신), 1935년 8월 11일에 신원과 하성 사이에 신원에서 떨어진 신덕역을 개통했다.[12]
확장은 1936년 12월 11일에 해주에서 취야까지 새로운 선로가 개통되면서 서쪽으로 향했다. 1937년 1월 21일에는 수교에서 장연까지 연장이 개통되었다.[14] 1937년 5월 10일에 동포에서 정도까지 지선이 개통되었고,[15] 9일 후 취야에서 옹진까지 연장이 이어졌다.[16]
날짜 | 구간 | 길이 | 최초 건설자 |
---|---|---|---|
1919년 5월 20일 | 상해–내토 | 15km | 미쓰비시 제철소 |
1920년 12월 21일 | 사리원–재령 | 21.5km | 서선개발철도 |
1921년 11월 16일 | 재령–신천 | 13.6km | 서선개발철도 |
1924년 9월 1일 | 화산–미력 | 8km | 조선철도 |
1925년 9월 1일 | 미력–하성 | 15.2km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일 | 신천–수교 | 29km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2일 | 신원–학현 | 22.6km | 조선철도 |
1930년 12월 11일 | 학현–동해주 | 6.4km | 조선철도 |
1931년 11월 12일 | 동해주–해주항 | 7.5km | 조선철도 |
1931년 12월 21일 | 동해주–연안 | 45.1km | 조선철도 |
청단–덕달 | 12.7km | 조선철도 | |
1932년 9월 1일 | 연안–토성 | 34.1km | 조선철도 |
1933년 7월 1일 | 해주–동해주 | 2.3km | 조선철도 |
1936년 12월 11일 | 해주–취야 | 19.3km | 조선철도 |
1937년 1월 21일 | 수교–장연 | 17.7km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0일 | 동포–정도 | 0.7km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9일 | 취야–옹진 | 24.2km | 조선철도 |
조선철도는 1944년 4월 1일에 황해선 네트워크를 선철에 매각했고, 선철은 황해선 네트워크를 흡수하여 분할하여 각 구간에 새로운 이름을 부여했다:[17]
- 청단–덕달 (12.7km) → 덕달선
- 신원–하성 (0.4km) → 하성선
- 삼강–장연 (68.9km) → 장연선
- 동포–정도 (0.7km) → 청도선
- 화산–내토 (2.1km) → 내토선
- 해주–옹진 (43.5km) → 옹진선
- 사리원—화산—신원—해주 (89.8km) → 사해선
- 동해주–토성 (79.7km) → 도해선
교통량이 표준궤 노선의 건설을 정당화한다고 판단하여, 선철은 사리원에서 하성까지 41.7km의 새로운 노선을 건설하여 황해본선이라고 불렀다. 하성에 새로운 역이 개통되면서 신원에서 협궤 노선의 기존 역은 "구하성역"으로 개칭되었다.[18]
태평양 전쟁 종전과 그에 따른 한반도 분단 이후, 구 황해선 네트워크의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위치하게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에 의해 인수되었다.[19] 그러나 도해선의 대부분은 대한민국이 된 미군정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선은 장방과 갈산 사이의 38선에 의해 분할되었으며, 한국철도공사는 1950년까지 토성과 청단 사이의 노선에서 여객 열차를 운행했다.[20] 한국 전쟁 종전 후, 구 황해선 네트워크 전체가 북한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19]
황해선은 조선철도국(鮮局) 경의본선의 경성에서 평양의 거의 중간 지점에 위치한 토성(현재의 개풍)에서 분기하여 북위 38도선 부근을 따라 서해안의 해주(해주청년)에 이르며, 여기서 북상하여 경의선 사리원(사리원청년)을 잇는 것이 155km 정도의 본선(그 외는 지선)이며, 762mm 궤간이면서 당시 내지의 국철 지방 간선과 비슷한 설비와 규모를 갖추어 최고 70km/h의 쾌속·급행 열차와 석탄, 광석을 탑재한 중량 화물 열차가 운행되었다[23]。
조선 철도의 762mm 궤간 노선에서는, 810형(1D 텐더 기관차)이 1929년 함북선에 도입되기 전까지는 탱크 기관차만을 사용했기 때문에 짧은 구간에 급탄수 설비를 배치하고 있었으며, 이 때문에 텐더 기관차가 도입된 후에도 장거리 주행을 고려한 텐더를 부착할 필요가 없어 고정 2축의 작은 것을 사용했다[24]。
2. 2. 해방 이후
1945년 8.15 광복과 그에 따른 한반도 분단 이후, 구 황해선 네트워크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위치하게 되었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이 인수하였다.[19] 그러나 도해선 대부분은 미군정 지역에 위치해 있었고, 이 노선은 장방과 갈산 사이의 38선에 의해 분할되었다. 한국철도공사는 1950년까지 토성과 청단 사이 노선에서 여객 열차를 운행했다.[20] 한국 전쟁 종전 후, 구 황해선 네트워크 전체가 북한 내에 위치하게 되었다.[19]3. 노선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단계적으로 확장했다. 1919년 5월 20일 미쓰비시 제철소가 상해(후에 삼강) - 내토 구간을 개통했고, 1920년 4월 21일 서선개발철도가 인수했다.[2][3]
이후 서선개발철도는 사리원-재령-상해(1920년 12월 21일), 재령-신천(1921년 11월 16일) 구간을 개통했다.[4][5] 1923년 4월 1일, 서선개발철도는 다른 5개 철도 회사와 합병하여 조선철도가 되었고, 이 노선들은 조선철도의 소유가 되었다.[6] 조선철도는 이 노선들을 묶어 황해선이라 불렀다.
조선철도는 1924년 9월 1일 화산-미력 구간,[7] 1925년 9월 1일 미력-신원-하성 구간을 개통했다.[7] 1929년 11월 1일 신천-수교, 1929년 11월 12일 신원-학현, 1930년 12월 11일 학현-동해주 구간이 차례로 개통되었다.[8]
1931년 동해주-해주항(룡당포) 구간,[9] 경의선 연결을 위해 동해주-연안 구간이 개통되었다.[9] 례성강 다리 건설 후 1932년 9월 1일 연안-토성(개풍) 구간이 개통되어 경의선과 연결되었고,[10] 1933년 7월 1일 동해주-해주 구간이 개통되었다.[11]
이후 1934년 5월 11일 서변역(동포, 현재 왕신), 1935년 8월 11일 신덕역이 개통되었다.[12] 1936년 12월 11일 해주-취야, 1937년 1월 21일 수교-장연,[14] 1937년 5월 10일 동포-정도,[15] 1937년 5월 19일 취야-옹진 구간이 개통되었다.[16]
1944년 4월 1일, 조선철도는 황해선 네트워크를 조선총독부 철도(선철)에 매각했고, 선철은 이를 여러 노선으로 분할했다.[17]
태평양 전쟁 종전 후 한반도 분단으로 구 황해선 대부분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위치,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철도성이 인수했다.[19] 도해선 대부분은 미군정 지역에 위치, 장방과 갈산 사이 38선에 의해 분할, 한국철도공사는 1950년까지 토성-청단 간 여객 열차를 운행했다.[20] 한국 전쟁 후 구 황해선 전체가 북한에 위치하게 되었다.[19]
황해선 건설 연표는 다음과 같다.
날짜 | 구간 | 최초 건설자 |
---|---|---|
1919년 5월 20일 | 상해–내토 | 미쓰비시 제철소 |
1920년 12월 21일 | 사리원–재령 | 서선개발철도 |
1921년 11월 16일 | 재령–신천 | 서선개발철도 |
1924년 9월 1일 | 화산–미력 | 조선철도 |
1925년 9월 1일 | 미력–하성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일 | 신천–수교 | 조선철도 |
1929년 11월 12일 | 신원–학현 | 조선철도 |
1930년 12월 11일 | 학현–동해주 | 조선철도 |
1931년 11월 12일 | 동해주–해주항 | 조선철도 |
1931년 12월 21일 | 동해주–연안 | 조선철도 |
청단–덕달 | 조선철도 | |
1932년 9월 1일 | 연안–토성 | 조선철도 |
1933년 7월 1일 | 해주–동해주 | 조선철도 |
1936년 12월 11일 | 해주–취야 | 조선철도 |
1937년 1월 21일 | 수교–장연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0일 | 동포–정도 | 조선철도 |
1937년 5월 19일 | 취야–옹진 | 조선철도 |
3. 1. 사해선 (삼강-해주항)
(km)(1944년 당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