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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 (첩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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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KLO (Korea Liaison Office)는 1948년 미국 극동군사령부 정보국에 의해 창설된 대북 첩보 부대이다. 한국 전쟁 발발 전 북한 지역에서 첩보 활동을 수행했으며, 백의사 등 민간 첩보 조직을 통합하여 조직되었다. KLO는 스파이 침투, 정보 수집, 게릴라 작전 등을 수행했으며, 인천 상륙 작전 지원에도 참여했다. 한국 전쟁 중 8240부대로 통합되었으며, 이후 정보 활동에 대한 엇갈린 평가와 보상 문제로 논란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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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LO (첩보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명칭한국 연락 사무소
영문 명칭Korea Liaison Office
활동 기간1949년 6월 1일 – 1951년 7월
국가미국
부대 정보
종류군사 정보 부대
역할비밀 작전
특수 정찰
게릴라전
규모1,000명에서 6,000명으로 추정
명령 체계미국 극동사령부
참전
전투한국 전쟁:
인천 상륙 작전

2. 역사적 배경

한국 전쟁이 발발하면서 KLO의 활동은 본격화되었다. 미 제8군 G-2 부서의 감독 아래 KLO 파견대원 20명과 제441CIC 분견대가 함께 훈련을 받았고, 이들은 미 제1(I), 제9(IX), 제10(X)의 3개 군단을 지원하기 위한 "제8177부대, 전술 연락국(Tactical Liaison Office (TLO), 8177th Army Unit(Tactical Intelligence)eng)"으로 편성되어 활동했다.

KLO 부대원들은 전쟁 기간 동안 북한 지역에서의 게릴라 및 첩보 작전 외에도 다양한 임무를 수행했다. 예를 들어, 5명의 대원이 미 육군 제187연대전투단에 파견되어 작전을 지원하기도 했다. 특히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는 결정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1950년 9월 1일, 미 해군 유진 F. 클라크 대위가 지휘하고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 등 국군 장교 및 KLO 부대원이 포함된 한미 연합 첩보부대가 인천 앞바다에 잠입하여 영흥도를 거점으로 작전 지역 정보를 수집했다. 이들은 수집한 정보를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했으며, 작전 당일인 9월 15일 새벽에는 팔미도 등대를 밝혀 연합군의 성공적인 상륙을 도왔다. 이 작전은 'Operation Trudy Jacksoneng'으로 알려져 있다.[9][10][11][12]

1951년 7월, KLO는 미군이 지원하고 운용하던 다른 여러 한국인 유격 부대들과 통합되어 8240부대에 흡수되었다.

2. 1. 한국 분단과 미군정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 한반도는 38도선을 경계로 남과 북으로 나뉘었다. 북쪽에는 소련의 지원을 받는 소련 민정청이 들어섰고, 이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수립되었다. 남쪽에는 미국의 지원 아래 미군정(USAMGIK)이 세워졌으며, 이는 대한민국 건국으로 이어졌다.[3]

1940년대 후반, 미국은 대한민국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다고 판단하여 점령군인 제24군단을 철수시키기 시작했다. 1949년 1월 25일, 제24군단은 한반도를 떠났고, 그 자리에는 제5연대전투단과 주한미군 고문단(KMAG)이 남았다. 주한미군 고문단의 주된 임무는 한국 정부와 대한민국 육군을 지원하는 것이었지만, 일부 정보 활동에도 관여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북한의 군사적 움직임이 증가하자, 이에 대한 감시와 정보 수집 능력을 강화해야 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3]

이러한 상황에서 미국 극동사령부(FECOM)의 정보국장(G-2)인 찰스 A. 윌로비 소장이 북한에 대한 정보 수집 강화를 주도하게 되었다. 1949년 2월경, 윌로비는 우익 단체인 백의사의 지도자 염동진과 접촉하여 정보 조직 결성에 대한 도움을 요청했다. 이후 백의사의 많은 구성원들이 KLO 창설에 참여하게 된다.[4] 이러한 배경 속에서 KLO의 설립이 추진되었다.

2. 2. 찰스 A. 윌로우비와 백의사

극동사령부(FECOM) 정보국(G-2) 국장이었던 찰스 A. 윌로우비 소장은 북한 내부에서의 첩보 활동 강화를 위해, 당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반공 청년 단체이자 우익 성향이 강했던 백의사(白衣社)를 비롯하여 정의사(正義社) 등 여러 민간 대북 첩보 조직과의 협력을 모색했다.

1948년 8월 24일, 윌로우비는 이들 조직을 통합하여 Korea Liaision Office|코리아 리에이전 오피스eng(KLO)를 창설하고, 서울 반도호텔 2층 202호실에 본부를 두었다. 특히 백의사는 KLO의 창설 과정과 초기 활동에 중요한 기반을 제공했으며, 많은 백의사 단원들이 KLO 요원으로 합류하여 활동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KLO는 1949년 6월 1일에 정식 부대로 발족했다.[4] 공식적인 초대 책임자는 레너드 애벗 중령이었지만, 실질적으로는 윌로우비가 부대 내 주요 인맥을 관리하며 배후에서 영향력을 유지했다.

3. KLO 부대의 창설과 활동

극동사령부는 한국 전쟁 이전부터 북한 내부의 첩보 활동을 위해 민간 대북 첩보 조직이었던 정의사(正義社)와 백의사(白衣社) 등을 통합하여 1948년 8월 24일 Korea Liaison Office|코리아 리에존 오피스영어(KLO)를 창설했다. 초기 본부는 서울 반도호텔에 있었으며, 1949년 6월 1일 정식 부대로 발족했다.[4]

KLO는 극동사령부(FECOM)의 지시에 따라 남한 민간인을 스파이로 모집하고 훈련시켜 북한으로 침투시키는 임무를 수행했다. 요원 중에는 여성과 어린이도 포함되었으나, 위험한 침투 방식 등으로 인해 임무 성공률은 낮았고 많은 요원들이 희생되었다.[5] 그럼에도 불구하고 KLO는 북한 내부의 군사 정보, 김일성의 비밀 연설 내용 등 중요한 정보를 수집했으며, 특히 한국 전쟁 발발 직전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여러 차례 경고하기도 했다.[3]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KLO는 북한 지역에서의 게릴라 및 첩보 작전을 본격적으로 수행했다. 대표적인 활약으로는 인천 상륙 작전 당시 트루디 잭슨 작전을 통해 상륙에 필요한 핵심 정보를 제공하고 팔미도 등대를 밝혀 연합군의 성공적인 상륙을 도운 것을 꼽을 수 있다.[9][10][11][12] 또한 미국 육군 제187연대전투단 등 미군 부대에 파견되어 협력 작전을 수행했으며, 미국 제8군 산하의 전술 연락국(Tactical Liaison Office|택티컬 리에존 오피스영어, TLO)으로 편성되어 각 군단을 지원하기도 했다.

전쟁 중 KLO는 정보 수집뿐만 아니라 점차 전술 작전의 비중을 늘려나갔다. 그러나 1951년 7월, 미군이 지원하던 다른 여러 한국인 유격 부대들과 함께 8240부대로 통합되면서 KLO라는 이름의 독자적인 활동은 마무리되었다.

3. 1. 창설

극동사령부찰스 A. 윌로우비는 북한 내부에서의 첩보 활동을 강화할 목적으로, 당시 북한 지역에서 활동하던 정의사(正義社)와 백의사(白衣社) 등 민간 대북 첩보 조직들을 통합했다. 1948년 8월 24일, Korea Liaison Office|코리아 리에존 오피스영어 (한국 연락 사무소, KLO)라는 이름으로 조직되었으며, 본부는 서울 반도호텔 2층 202호실에 마련되었다. KLO는 1949년 6월 1일에 정식 부대로 승격되었다.[4]

초대 책임자로는 레너드 애벗 중령이 임명되었으나, 조직 창설을 주도한 윌로우비가 계속해서 주요 인맥을 관리하며 영향력을 유지했다. 극동사령부(FECOM)는 한국의 고등정보부에 KLO를 위한 첩보원 모집과 훈련을 지시했고, 이에 따라 주로 남한 농민들이 선발되어 북한 침투 훈련을 받았다. KLO는 이들의 활동 거점이자 훈련 장소로 여러 안가를 운영했다. 부대원의 약 20%는 여성이었으며, 정보 수집의 용이성을 위해 어린이들도 요원으로 활용되었다.[5]

그러나 초기 KLO의 첩보 활동은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북한으로 침투하는 방식은 주로 공중 투하(일명 "조류 작전")나 삼엄한 경계의 38선을 직접 넘는 방식이었는데, 두 방법 모두 위험성이 높고 비효율적이었다. 공중 투하는 목표 지점에서 멀리 벗어나는 경우가 잦았고, 육로 침투는 발각될 위험이 컸다. 이로 인해 임무 성공률은 매우 낮았고, 작전 요원의 약 80%가 임무 중 사망하는 높은 희생을 치렀다.[5] 1950년 8월에는 해군 함정을 이용한 침투 방안을 모색했으나 해군의 비협조로 무산되기도 했다.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KLO 요원들은 북한의 군대 이동 상황, 주요 시설 정보, 심지어 김일성이 군 간부들에게 행한 비밀 연설 녹취록 등 구체적이고 중요한 정보를 수집하여 보고했다. 특히 한국 전쟁 발발 직전, KLO는 북한의 남침 가능성이 임박했다는 징후를 포착하고 여러 차례 경고 보고를 올렸다. 한 미국인 KLO 요원이 이러한 사실을 상부에 보고했으나, 당시 정보기관들은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3] KLO는 1950년 6월 1일부터 24일까지 총 1,195건의 정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훗날 연구에 따르면 이 보고서들은 다른 정보기관의 보고서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정확도를 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KLO의 경고는 무시되었고, 이는 한국 전쟁 초기 미국의 정보 실패 요인 중 하나로 지적되기도 한다.[3]

3. 2. 초기 임무와 한계

극동사령부(FECOM)는 한국의 고등정보부에 KLO를 위해 남한 농민들을 스파이로 모집하고 훈련하여 북한에 침투시키도록 지시했다.[4][5] KLO는 이러한 스파이들의 기지 및 훈련장으로 사용할 여러 안가를 설립했다.[5] 요원 중 약 20%는 여성이었으며, 어린이들도 위장에 용이하다는 이유로 요원으로 활동했다.[5]

그러나 임무 성공률은 매우 낮았고,[5] 작전 요원의 약 80%가 임무 중 사망하는 등 희생이 컸다.[5] 낮은 성공률의 주요 원인 중 하나는 침투 방식의 문제였다. 공중 투하("조류 작전") 방식은 목표 지점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착륙하는 경우가 많았고, 육로 침투는 당시 삼엄하게 경비된 국경을 넘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5] 1950년 8월, 해상 침투를 위해 해군의 지원을 요청했지만 거절당했고, 결국 9월에 이 계획은 포기되었다.[5]

이러한 어려움 속에서도 KLO 요원들은 북한의 군대 이동과 기반 시설 상황, 심지어 김일성이 자신의 장교들에게 한 비밀 연설의 녹취록 등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4] KLO는 수집된 정보를 바탕으로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파악하고 한국 전쟁 발발 직전까지 지속적으로 경고했다.[3][4] 실제로 1950년 6월 1일부터 24일까지 1,195건의 정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1998년 박명림 학자는 이 보고서들이 다른 기관의 보고서보다 정확도가 높았다고 평가했다.[4] 하지만 KLO 소속 미국인 요원이 북한의 임박한 침공 징후를 포착하여 보고했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보고서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등 이러한 경고는 대부분 무시되었다.[3][4] KLO의 정확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정보 기관에 대한 불신이라는 한계 속에서 그들의 경고는 제대로 활용되지 못했다.[3]

3. 3. 한국 전쟁 발발과 KLO

극동사령부(FECOM)는 한국의 정보기관에 KLO를 위해 남한 농민들을 스파이로 모집하고 훈련하여 북한에 침투시키도록 지시했다. KLO는 이들 스파이의 기지와 훈련 장소로 사용할 여러 안가를 설립했다. 구성원의 약 20%는 여성이었으며, 아이들도 요원으로 활동했는데, 이는 아이들이 북한 사회에 더 자연스럽게 섞일 수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5] 그러나 임무 성공률은 매우 낮았고, 작전 요원의 약 80%가 임무 중 사망하는 등 큰 희생이 따랐다.[5]

스파이 침투는 주로 공중 투하(일명 "조류 작전") 방식이나, 경비가 삼엄한 38선을 직접 넘는 방식으로 이루어졌다. 두 방법 모두 결함이 많았다. 공중 투하는 목표 지점에서 수 마일 떨어진 곳에 착륙하는 경우가 잦았고, 국경은 넘기 매우 위험했다. 1950년 8월, KLO는 해군에 선박 지원을 요청하여 해상 침투를 시도하려 했으나, 해군은 협력을 거부했다. 결국 9월에는 이 노력을 포기해야 했다. 이러한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KLO 스파이들은 북한으로부터 상당한 양의 구체적인 정보를 수집하는 데 성공했다. 그들은 북한의 군대 이동과 기반 시설 상황, 김일성이 장교들에게 한 비밀 연설 녹취록까지 입수하여 전달했다.

한국 전쟁 발발 직전, KLO의 미국인 구성원 중 한 명은 북한의 남침이 임박했음을 파악하고 상부에 보고했지만, 그의 보고서는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KLO는 1950년 6월 25일 한국 전쟁 발발 직전까지 침공 경고를 계속 보냈는데, 이는 일반적으로 미국이 북한의 공격을 기습으로 받아들인 것과 대조된다.[3] 6월 1일부터 24일까지 KLO가 작성한 정보 보고서는 총 1,195건에 달했다. 1998년, 학자 박명림은 이 시기 KLO 보고서 일부를 조사하여 다른 정보 기관 보고서보다 정확도가 더 높다는 사실을 확인했다. 다만, 박명림은 전쟁 발발 이후의 보고서에는 접근할 수 없었다. 이처럼 KLO의 정확한 예측에도 불구하고, 당시 KLO와 다른 정보 기관들은 계속해서 미군 상부로부터 회의적인 대우를 받았으며, 이는 전쟁 초기 대응에 영향을 미쳤을 가능성이 있다.[3]

3. 4. 한국 전쟁 중 활약

한국 전쟁이 발발하자 KLO 부대는 북한 지역에서의 게릴라 및 첩보 작전을 수행하며 전쟁에 기여했다. 1950년 8월 당시 KLO 대원은 약 1,000명에서 6,000명에 달했다.[6]

KLO 부대의 가장 큰 활약 중 하나는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에 기여한 것이다. 1950년 9월 1일, 미국 해군 유진 F. 클라크 대위가 지휘하고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 등 국군 출신 장교와 KLO 부대원들이 포함된 한미 연합 첩보부대는 인천 앞바다 덕적도 근처에 잠입했다. 이들은 영흥도를 거점으로 삼아 인천항 주변의 지형, 조선인민군의 방어 태세, 기뢰 매설 위치 등 핵심 정보를 수집하여 도쿄의 맥아더 사령부로 타전하는 트루디 잭슨 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9][10][11][12] 또한, 상륙 작전 당일인 9월 15일 새벽 0시 50분에는 팔미도 등대에 불을 밝혀 어둠 속에서 연합군 함대가 안전하게 인천으로 진입할 수 있도록 길을 안내하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9][10][11][12]

이 외에도 KLO 부대원들은 다양한 전선에서 활동했다. 미국 육군 제187연대전투단에 5명이 파견되어 작전을 지원했으며, 1950년 12월에는 한국인 어선을 이용해 적 후방 해안으로 침투하는 살라만더 작전(Salamander영어)을 수행하기도 했다.

미 제8군 G-2 부서는 KLO 파견대원 20명과 제441CIC 분견대를 통합 훈련시켜 제1군단, 제9군단, 제10군단 등 3개 군단을 지원하는 '제8177부대 전술 연락국(Tactical Liaison Office (TLO), 8177th Army Unit(Tactical Intelligence)영어)'으로 편성하여 운용하기도 했다.

1950년 10월 중국인민지원군이 전쟁에 개입하여 유엔군이 후퇴하게 되자, 유엔군 사령부는 KLO를 포함한 정보 기관에 긴급 정보 지원을 요청했다. 하지만 당시 KLO는 해당 지역에 구축된 정보망이나 무전기가 부족하여 정보 수집에 큰 어려움을 겪었다. 급박한 상황 속에서 적군의 위치를 알리기 위해 연막탄을 소지한 2인 1조의 팀을 적진에 공중 투하하는 작전을 시도하기도 했으나, 소수의 신호만 관측되는 등 큰 성과를 거두지는 못했다.

전황 변화에 따라 KLO의 지휘 및 임무 체계에도 변화가 있었다. 1950년 12월 20일, 미 육군은 제442 방첩대 대대를 활성화하여 KLO와 사단급 전술 연락소(TLO)에 대한 작전 통제권을 부여했다. 제442 방첩대 대대는 KLO의 작전 수행에 필요한 보트를 조달하는 등 지원 역할을 담당했다.

이어 1951년 1월, 극동사령부(FECOM)는 미 제8군의 존 H. 맥기 대령에게 KLO의 임무를 기존의 정보 수집 중심에서 전술 작전 중심으로 전환하도록 지시했다.[3] 이에 따라 미 제8군은 여러 지역에 전술 연락소(TLO)를 설치하고 초기에는 공격 작전 요원을 주로 훈련시켰으나, 전쟁 후반으로 가면서 다시 정보 수집 역할이 강화되는 방향으로 조정되었다.[3]

3. 5. 8240부대로의 통합

1951년 7월에 미군이 지원/운용하던 여러 한국인 유격부대들과 통합되어 '''8240부대'''에 흡수되었다.

4. 조직 구성

'''1948년 (추정)'''

초기 조직 구성 (추정)
구분위치/담당자
본부반도호텔 202호
Whisky영어 부대박태현
Goat영어 부대최규봉 (崔圭峰)
Sun영어 부대전훈



각 부대에는 200~300명의 대원이 배치되어 있었다.

'''1951년'''

1951년 재편성 후 조직 구성
구분위치/담당자
본부서울 용산 선린상업고등학교
본부 부서
공작과최규봉
군수보급과전훈
연락과박태현
예하 부대
유격부대이영순 (대령)
첩보부대계인주 (대령)


5. 주요 작전

인천 상륙 작전을 앞두고 한미 연합 첩보부대가 1950년 9월 1일 영흥도를 거점으로 인천 앞바다의 정보를 수집하여 도쿄 맥아더 사령부로 보고하는 Operation Trudy Jackson|오퍼레이션 트루디 잭슨영어을 수행했다. 이 부대는 미국 해군 유진 F. 클라크(Eugene F. Clarke) 대위가 지휘했으며, 계인주 대령, 연정 대위 등 국군 출신 장교와 KLO부대원들이 포함되었다. 작전 중 9월 15일 0시 50분에는 팔미도 등대를 점등하여 상륙작전을 지원했다.[9][10][11][12]

1950년 12월에는 한국인 어선을 이용하여 해안으로 침투하는 Salamander|살라만더영어 작전을 개시했다. 이 작전은 이후 KLO의 후신 조직 중 하나인 극동사령부 연락 파견대 한국지부(FEC/LD (K))와 미 제8군에 의해 개선되어, 1951년 가을부터는 한국 서해안의 섬들에 기지를 설치하고 보트를 이용해 특수요원들을 배치하고 회수하는 방식으로 수행되었다.

이 외에도 KLO는 북한 지역에서의 게릴라 및 첩보 작전을 수행했으며, 미국 육군 제187연대전투단에 5명의 부대원을 파견하기도 했다. 또한 적진 근처에 특수요원을 배치하고 북한군으로 위장시키는 전술을 사용하는 에비어리(Aviary) 작전도 수행했다.

6. KLO 부대의 유산과 논란

KLO 부대는 한국 전쟁 당시 북한 지역에서 첩보 및 유격 활동을 수행하며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지만, 그 활동 성과와 역사적 의미에 대해서는 다양한 평가가 존재한다. 전쟁 중 KLO가 수집한 정보의 가치와 작전 수행 능력에 대한 긍정적 시각과 함께, 작전의 한계와 희생에 대한 비판적 분석이 공존한다. 또한, 전쟁 이후 부대원들에 대한 합당한 보상이 이루어지지 않아 오랫동안 논란이 되어 왔으며, 이는 KLO 부대의 역사적 평가와 함께 중요한 쟁점으로 남아 있다.

6. 1. 엇갈린 평가

미국의 군사 역사학자 피네건(Finnegan)은 KLO와 미 극동사령부(FECOM) 정보처(FECOMLDK)가 생산한 정보의 가치를 "very mixed value|매우 혼합적eng"이라고 평가했다.[3] 그는 정보 활동이 전무한 것보다는 나았다고 보았으며, 특히 한국 전쟁이 교착 상태에 빠진 이후에는 KLO의 업무가 향상되었다고 덧붙였다.

KLO는 한국 전쟁 발발 직전까지 북한의 남침 가능성을 지속적으로 경고했으나[3], 이러한 보고는 미국 정보 당국 내에서 회의적으로 받아들여졌다. 1950년 6월 1일부터 24일까지 KLO는 1,195건의 정보 보고서를 작성했는데, 학자 박명림은 이 보고서들이 다른 기관의 보고서보다 정확도가 높았다고 평가했다. 또한 북한의 군대 이동 및 기반 시설 상황, 심지어 김일성의 비밀 연설 녹취록까지 수집하는 성과를 거두기도 했다.

그러나 KLO의 활동에는 여러 문제점과 한계가 명확했다. 작전 요원의 약 80%가 임무 중 사망할 정도로 성공률이 매우 낮았으며[5], 요원 침투 방식에도 결함이 있었다. 공중 투하("조류 작전")는 목표 지점에서 벗어나는 경우가 많았고, 국경을 통한 침투는 북한의 삼엄한 경계로 인해 어려움을 겪었다. 해군과의 협조도 원활하지 않아 해상 침투 시도 역시 좌절되었다.

피네건은 이러한 문제의 원인으로 한국인들의 현대 정보 활동 경험 부족, 요원들에 대한 불충분한 훈련, 그리고 전쟁 전부터 심각했던 한국어 및 중국어 통역관 부족 문제를 지적했다. 미국의 북한 침공과 중국의 한국 전쟁 개입 예측 실패는 KLO뿐만 아니라 당시 미국 정보기관 전반의 한계를 드러내는 사례로 분석된다.

6. 2. 보상 논란

많은 KLO 부대원들은 임금을 제대로 받지 못했고,[6][5] 임금을 받은 경우에도 매우 적은 액수였다. 전사한 요원들의 가족들 역시 보상을 받지 못했으며,[6][5] 임무 수행 중 사망한 요원들은 한국 정부로부터 공식적인 명예나 인정을 받지 못했다.[5] 이러한 문제는 2000년 국회에서 논의되면서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지게 되었다.[5]

2004년, KLO 참전 용사들은 미국 정부에 보상을 청원했으나, 법적으로 미국 군대의 일원으로 간주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 같은 해 1월, 한국 정부는 한국 소속 비정규군 요원들에게 보상하기 위한 법률을 제정했지만, 미군 소속으로 분류되었던 KLO 참전 용사들은 이 법의 적용 대상에서 제외되었다.[6]

오랜 시간이 흐른 뒤인 2021년 4월, 한국 정부는 마침내 한국 전쟁 중 비정규군으로 복무한 사람들에 대한 보상법을 통과시켰다. 이 법에 따라 생존 참전 용사 또는 그 가족 약 4,800명에게 각각 1000만 (당시 약 8,900달러)이 지급되었고, 전사한 참전 용사들에게는 명예가 부여되었다. 하지만 보상이 너무 늦게 이루어졌고 지급된 금액 또한 충분하지 않다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법 통과 시점에서 생존 참전 용사는 약 100명에 불과했고, 그들 중 다수는 80세 이상의 고령이었다.[5][7]

참조

[1] 웹사이트 The Combined Command for Reconnaissance Activities, Korea (CCRAK) https://arsof-histor[...]
[2] 웹사이트 The Army’s Guerrilla Command in Korea https://arsof-histor[...]
[3] 웹사이트 Tactical Liaison Office (TLO) https://arsof-histor[...] 2023-08-01
[4] 웹사이트 김일성 간담 서늘케 한 전설적 백색 테러리스트|신동아 https://shindonga.do[...] 2023-08-02
[5] 웹사이트 KLO members to finally receive compensation, but not much https://koreajoongan[...] 2023-08-01
[6] 웹사이트 Human Rights body says gov't must pay special Korean War troops https://www.hani.co.[...] 2023-08-02
[7] 웹사이트 S. Korea to offer compensation to spy agents during Korean War https://en.yna.co.kr[...] 2023-08-02
[8] 웹사이트 켈로부대 처형 장면에 北서 희생된 아버지가… https://www.dailynk.[...]
[9] 웹사이트 팔미도 등대 가동시키고「킬로이 다녀간다」고 낙서까지 했다! http://monthly.chosu[...]
[10] 웹인용 팔미도 등댓불 밝힌 최규봉, 전세 역전 희망불 밝혀 https://kookbang.dem[...] 2023-09-12
[11] 웹사이트 美 클라크 대위 “팔미도 등댓불 내가 밝혔다” 주장 https://kookbang.dem[...]
[12] 웹사이트 어느 전쟁 영웅의 '인천상륙작전' https://n.news.nav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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