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S특무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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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SS특무부대는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Waffen-SS)의 전신으로, 1934년 다양한 나치 준군사 조직의 병합으로 창설되었다. 초기에는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부대인 라이프슈탄다르테, 정치 예비대, 강제 수용소 경비를 담당하는 해골 부대 등이 있었으며, 이 중 정치 예비대가 SS 특무 부대의 직접적인 전신이 되었다. SS 특무 부대는 독일 육군의 보병 연대를 모델로 훈련받았으며, 점차 확대되어 1939년에는 사단으로 편성되었다. 폴란드 침공 등 초기 작전에 참여했으나, 훈련 부족과 잔혹 행위로 비판받았다. 1940년 무장 친위대로 개편되었으며, 이후 여러 SS 사단이 창설되어 제2차 세계 대전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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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S특무부대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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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명칭 | SS-Verfügungstruppe (SS 특무 부대) |
존속 기간 | 1934년 – 1940년 |
국가 | 독일 |
충성 대상 | 아돌프 히틀러 |
종류 | 기계화보병 |
소속 | [[파일:Flag Schutzstaffel.svg|23px]] SS |
역할 | 근접 경호 대게릴라전 기동전 기습 |
규모 | 사단 |
주둔지 | 베를린 |
별칭 | 해당사항 없음 |
후원자 | 해당사항 없음 |
모토 | 해당사항 없음 |
색상 | 검정, 하양, 빨강 |
군가 | 해당사항 없음 |
마스코트 | 해당사항 없음 |
장비 | 해당사항 없음 |
전투 | 해당사항 없음 |
기념일 | 해당사항 없음 |
훈장 | 해당사항 없음 |
해체 | 해당사항 없음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파울 하우서 펠릭스 슈타이너 제프 디트리히 |
이전 명칭 | |
이전 명칭 | SS-Sonderkommando (SS 특별 지휘 부대) |
후신 | |
후신 | 무장친위대 |
2. 역사적 배경
1933년 나치당의 정권 장악 이후, 무장SS의 전신이 되는 무장화된 SS 부대가 출현했다.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부대인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SSAH)에 영감을 받아, 1933년 봄 함부르크 등지에 SS 정치 예비대를 창설했다.[9][10][11][12] 정치 예비대는 좌익의 내란 준비 분쇄를 명목으로 조직되었으며, 보조 경찰의 특별 사령부로서 무장이 정당화되어 일반 경찰보다 강력한 화력을 갖췄다.[13][14]
1934년 6월 30일부터 7월 2일까지 벌어진 장검의 밤 사건에서 SS는 돌격대(SA) 간부 숙청을 주도했다. SS의 무장 부대인 정치 예비대, LSSAH, SS 해골 부대(SS-TV)는 숙청 실행 부대로 활동했다.[16][17][18][19] 이후 히틀러는 SS를 SA에서 독립시켰다.[20]
히틀러는 SS의 군대화를 서둘렀지만, "국군이야말로 독일 유일의 무장 담당자"라며 SS 무장화를 국군에 인정받으려 했다.[23] 1934년 9월 24일,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는 3개 보병 연대, 1개 통신 대대로 구성된 '''SS 특무 부대'''(SS-VT) 설치를 인정했다.[24][25][26] 힘러는 정치 예비대와 LSSAH를 통합하여 SS 특무 부대를 창설했다.[27] 특무 부대 근무는 병역과 동등하게 규정되었고,[28] 특무 부대원은 병사 급료나 군인 연금 대상이 되었다.[29]
1935년 3월 16일, 히틀러는 베르사유 조약 파기를 선언하고 SS 사단 창설도 발표했지만,[31][32][33] 군의 반발로 1939년 개전 후까지 SS 사단은 편성되지 않았다.[36]
1934년 10월, 바트 퇼츠(de)에 SS 장교 학교가 창설되었고, 다음 해 브라운슈바이크에도 개설되었다.[37] 파울 하우서가 교장으로 임명되어 훈련을 맡았다.[38] 1936년 10월 1일, 친위대 본부 산하에 SS 특무부대 총감부가 설치되었고, 하우서가 특무부대 총감에 취임했다.[43][44][45] SS 특무부대는 "도이칠란트" 연대와 "게르마니아" 연대로 구성되었고,[46][47]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데어 퓌러" 연대가 창설되었다.[44][48][49]
SS 특무부대 입대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신장, 연령, 인종 등의 조건이 요구되었고,[54][55] 엄격한 훈련이 실시되었다. 1939년에는 영국군 코만도, 미국군 레인저 부대에 필적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59]
1938년 8월 17일, 히틀러는 비밀 총통 포고를 발표하여 SS특무부대를 항구적인 전력으로 인정했다.[76][77] 특무부대는 "국방군의 일부도 경찰의 일부도 아닌, 나의 뜻대로 움직이는 독립된 무장 부대"로 정의되었다.[78][79]
SS 특무부대는 라인란트 진주,[33][85][86] 오스트리아 병합,[87][33] 주데텐란트 및 체코슬로바키아 점령에 독일 국방군과 함께 참전했다. 1939년 폴란드 침공에는 "도이칠란트" 연대, "게르마니아" 연대, LSSAH가 참전했다.[93] SS 특무부대는 큰 전과를 거두지 못했지만,[105][106] 손실은 막대했다.[107][108]
폴란드 침공 이후, SS 특무부대는 사단 편성을 위해 독일로 귀환했다. 1939년 10월 10일, SS 특무사단이 창설되었고, 파울 하우서가 사단장에 취임했다.[115] 1939년 10월 17일, SS 특무부대원의 재판권은 SS 특별 법원에 귀속되어 국방군의 재판권에서 벗어났다.[116] 이후 SS 산하 무장 세력을 합쳐 "무장 친위대"라고 부르게 되었다.
2. 1. 전신
1933년 1월 30일 나치당의 정권 장악 이후, 무장SS의 전신이 되는 무장화된 SS 부대가 나타났다. 이들은 다음과 같다.-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Leibstandarte SS Adolf Hitler, 약칭 LSSAH): 아돌프 히틀러의 경호 부대
- SS 정치 예비대(SS-Politische Bereitschaft)
- SS 해골 부대(SS-Totenkopfverbände, 약칭 SS-TV): 강제 수용소(KZ) 경비 부대[5]
이 중 SS 정치 예비대와 라이프슈탄다르테가 SS 특무 부대의 전신이었다.[6] 특히 정치 예비대가 직접적인 전신이다.[7][8] 해골 부대는 테오도어 아이케의 지휘 아래 SS 특무 부대와는 별도로 발전했으며, 전시가 되어서야 무장 SS로서 특무 부대와 합류했다.
친위대 전국 지도자 하인리히 힘러는 아돌프 히틀러의 주도로 창설된 최초의 무장 SS 부대인 라이프슈탄다르테에서 영감을 받아, 1933년 봄 함부르크, 드레스덴, 뮌헨, 엘방겐(de), 아롤젠(de) 등에 정치 예비대를 창설했다.[9][10][11][12] 정치 예비대는 좌익의 내란 준비를 분쇄한다는 명목으로 조직되었으며, 보조 경찰(프로이센 주 내무장관 헤르만 괴링이 돌격대(SA)나 친위대로부터 조직한 경찰)의 특별 사령부로서 무장이 정당화되었다. 이들은 일반 경찰보다 강력한 화력을 갖췄으며, 상당 부분 자동차화되었다.[13][14] 정치 예비대는 곧 독일 전역에 배치되었다.[15]
1934년 6월 초 장검의 밤 사건에서 국군과 대립했던 SA 간부는 숙청되었다. 이 숙청을 주도한 것은 SS였으며, 정치 예비대, 라이프슈탄다르테, 해골 부대와 같은 SS의 무장 부대는 숙청 실행 부대로 활동했다.[16][17][18][19]

2. 2. 창설
1934년 7월 26일, 히틀러는 장검의 밤 사건 이후 SS를 돌격대(SA)에서 정식으로 독립시켰다.[20] 같은 해 8월 1일 파울 폰 힌덴부르크 대통령이 사망하자, 전 독일군은 즉시 히틀러에게 충성 선서를 했다.[21] 히틀러는 군부를 신뢰하지 않았기 때문에 SS의 군대화를 서둘렀다.[22]히틀러는 "국군이야말로 독일 유일의 무장의 담당자이며, SS의 무장화는 예외에 불과하다"는 점을 강조하면서, SS의 무장화를 국군에 인정받으려 했다.[23] 이를 받아들여 국방장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상급대장은 9월 24일에 3개 보병 연대, 1개 통신 대대로 구성된 '''SS 특무 부대'''(SS-VT)의 설치를 인정했다.[24][25][26]
SS-VT는 SS 특수 부대(''SS-존더코만도'') 및 본부 경비대(''SS-슈타브바헤'')와 같은 다양한 나치 및 준군사 조직의 병합으로 결성되었다.[1] SS-VT는 독일 육군의 보병 연대와 규정을 모델로 한 3개 연대로 구성되었으며, 각 연대는 3개 보병 대대, 1개 오토바이 중대, 1개 박격포 중대로 구성되었다. 이 부대는 공식적으로 ''SS-Verfügungstruppe''(처분 부대, 즉, 총통의 개인적인 처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부대)로 지정되었다.[1] 이들은 ''제국 노동 봉사(RAD)''에서 복무를 마친 지원병이어야 했다.[3]
히믈러는 정치 예비대와 라이프슈탄다르테를 통합하여 SS 특무 부대를 창설했다.[27] 특무 부대에의 근무는 병역과 동등하게 규정되었다.[28] 즉, 특무 부대 대원에게는 급여 지급 장부(Soldbuch)와 군 경력 수첩(Wehrpaß)의 소지가 인정되었고, 병사 급료나 군인 연금의 대상이 되었다.[29] 또한 이 이후, 특무 부대 이외의 SS 대원은 일반 SS(Allgemeine SS)라고 불리게 되었다.[30]
1935년 3월 16일, 히틀러는 국회 연설에서 ''SS-Verfügungstruppe''(SS-VT)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선언하고,[34][35] 베르사유 조약의 독일 군비 제한 조항 파기와 육군 및 해군 증강, 공군 재건, 징병제 도입을 선언했다.[31][32][33] 그러나 SS 사단 편성에 대한 군의 반발로 인해 1939년 개전 후까지 SS 사단은 편성되지 않았다.[36]
SS-VT는 무기와 군사 훈련 공급을 독일 육군에 의존해야 했고, 육군은 징집병을 독일 고위 사령부(''Oberkommando der Wehrmacht'' 또는 OKW)가 정한 할당량을 충족하기 위해 Wehrmacht의 다른 부대에 할당하는 책임을 맡은 지역 징병 위원회를 통해 징집 시스템을 통제했다. 그 결과, SS는 징집병에 대한 최저 우선 순위를 받았고, 이로 인해 규모가 제한되었다.[2]
1936년, 히믈러는 전 중장 파울 하우서를 ''여단지도자'' 계급의 SS-VT 감찰관으로 선택했다. 하우서는 SS-VT를 정규군에 필적하는 신뢰할 수 있는 군사력으로 전환하기 위해 노력했다.[3][4]

2. 3. 운영과 확대
SS-VT는 1934년 9월 24일, SS 특수 부대(SS-존더코만도) 및 본부 경비대(SS-슈타브바헤)와 같은 다양한 나치 준군사 조직들이 합쳐져 만들어졌다. 이 부대는 독일 육군(Heer)의 보병 연대와 비슷한 구조로, 3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다. 각 연대는 3개의 보병 대대, 1개의 오토바이 중대, 1개의 박격포 중대로 이루어졌다. SS-VT는 '총통의 처분에 따라 사용할 수 있는 부대'라는 뜻으로 공식 지정되었으며, 제국 노동 봉사(RAD) 복무를 마친 지원병들로 구성되었다.[1]1935년 3월 16일, 히틀러는 국회(국회) 연설에서 SS-VT의 존재를 공개적으로 발표했다. SS-VT는 무기와 군사 훈련을 독일 육군에 의존해야 했다. 그러나 육군은 징집병을 다른 부대에 우선적으로 할당했기 때문에 SS는 징집병을 확보하는 데 어려움을 겪었고, 그 결과 부대 규모가 제한되었다.[2]
1936년, 하인리히 힘러는 전직 중장 파울 하우서를 SS-VT의 감찰관(여단지도자)으로 임명했다. 하우서는 SS-VT를 정규군에 버금가는 강력한 군사력으로 만들기 위해 노력했다. SS-VT는 히틀러의 개인 경호 부대인 LSSAH와 함께 훈련을 받았다. LSSAH는 제프 디트리히의 지휘 아래 히틀러의 개인 경호와 명예 경비 임무를 수행했다.[3]
1937년까지 SS는 일반 SS(알게마이네-SS), SS-VT, 그리고 나치 강제 수용소를 관리하는 SS-TV의 세 개 지부로 나뉘었다.[4] 1938년 8월 17일, 히틀러는 SS 군사 부대를 전시에 육군의 지휘 아래 두도록 명령했다. 히틀러는 힘러의 요청에 따라 SS-VT 복무를 군 복무 의무로 인정했다. 또한 전시에는 SS-TV 부대가 SS-VT의 예비군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밝혔다. 이로 인해 무장 친위대와 나치 강제 수용소 사이에 지속적인 인력 이동이 발생했다.[5]
1939년 9월 1일, 힘러의 지휘 아래 있는 군사 부대는 다음과 같이 구성되었다.
- 히틀러의 경호 부대인 제프 디트리히 휘하의 LSSAH.[6]
- 파울 하우서 휘하의 ''Verfügungstruppe'' 감찰관은 ''도이칠란트'', ''게르마니아'' 및 ''데어 퓌러'' 연대를 지휘했다.
- 테오도어 아이케 휘하의 강제 수용소 감찰국은 4개의 군사화된 데스 헤드 ''슈탄다르텐''을 배치하여 ''SS-Totenkopfverbände''의 수용소 경비병으로 구성되었다.[7] ''SS-토텐코프'' 사단은 원래 1939년 10월 SS-TV의 ''슈탄다르텐''(연대)과 ''SS 하이베어 단치히''의 강제 수용소 경비병으로 형성되었다. 그런 다음 1940년 8월에 무장 친위대에 통합되었다.[8] 이 부대는 SS-VT "SS" 룬 대신 SS-TV 해골과 해골 뼈를 착용했다.
- 오버그루펜퓌러 쿠르트 달뤼게의 ''질서 경찰(오르둥스폴리차이)''의 전투 훈련을 받은 비 SS 경찰 부대가 있었으며, 이들은 독일 경찰청장의 자격으로 히믈러에게 보고했다. 1940년 작전을 위해 이들은 또한 사단을 형성했으며, 1941년 1월 무장 친위대의 통제하에 배치되어 1942년 2월에 병합되었다.

특무부대의 편성과 훈련은 국군의 협력을 받아 진행되었다. 1934년 10월에는 바이에른 주 바트 퇼츠(de)가 창설되었고, 다음 해 초에는 브라운슈바이크에도 SS 장교 학교가 개설되었다.[9] 파울 하우서가 이 장교 학교의 교장으로 임명되어 훈련을 맡았다.[10] 히믈러는 장교 학교 입학 자격으로 인종적, 신체적, 정치적 요구 사항을 제시했지만, 지적, 학력적 요구 사항은 없었다. 그 결과 1938년 이전의 SS 장교 학교는 최종 학력이 초등학교인 자가 40%를 차지했고,[11][12] 농민 가정 출신이 많았다.[13]
1936년 4월 1일, 특무부대와 해골 부대는 국가 기관으로 인정받아 내무성의 경찰 예산에서 경비를 받게 되었다.[14]
1936년 10월 1일, 친위대 본부 산하에 SS 특무부대 총감부가 설치되었고, 하우서가 특무부대 총감에 취임했다.[15][16][17] SS 특무부대는 뮌헨의 "도이칠란트" 연대와 함부르크의 "게르마니아" 연대, 두 개의 연대로 구성되었다.[18][19] 1938년 오스트리아 합병 이후에는 빈과 클라겐푸르트에 주둔하는 제3SS 연대 "데어 퓌러"가 창설되었다.[20][21][22] 그러나 하우서는 친위대 지구와의 지휘권 다툼, 제프 디트리히의 비협조 등으로 어려움을 겪었다.[23][24][25][26]
SS 특무부대 입대는 엄격한 선발 과정을 거쳤다. 입대 조건은 178cm 이상(LSSAH는 180cm)의 신장,[27] 23세 이하, "순수한 북방 인종"이거나 "압도적으로 북방 인종 또는 팔렌 인종"이어야 했다.[28]
입대 후에는 육상 경기, 복싱, 보트 등의 스포츠 신체 훈련을 포함한 엄격한 훈련이 실시되었다. 장교, 하사관, 병사 모두에게 훈련이 실시되어 강한 동료 의식이 형성되었다.[29] 특무부대는 소규모 부대였기 때문에 육군 보병 부대보다 높은 수준의 훈련을 받을 수 있었다. 1939년에는 영국군의 코만도 부대, 미국군의 레인저 부대에 필적하는 훈련을 받았다고 한다.[30] 실탄 훈련과 포병의 탄막 사격까지 실시되었으며,[31] 훈련 중 사상자가 발생하기도 했다. 히믈러는 "평시에 흐른 피 한 방울은 전시에 흐르는 피의 바다를 구한다"라고 말했다.[32]
특무부대 대원 수는 1939년 8월 19일까지 1만 8000명에 달했다.[33]
국방군은 SS를 "아스팔트 병사"라고 얕잡아 보았지만, 점차 SS를 적대시하고 압력을 가하기 시작했다.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는 SS특무부대의 세력 확장에 대해 히틀러에게 항의했다. 국방군은 특무부대에 대해서는 병역 면제를 인정했지만, SS 해골 부대와 SS 사관학교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았다.
1938년 블롬베르크-프리치 해임 사건으로 국방상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육군 총사령관 프리치가 해임되었다. 히틀러 자신이 국방상을 겸임하고, 국방성은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로 개편되었다. 빌헬름 카이텔이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장관에, 발터 폰 브라우히치가 육군 총사령관에 취임했다. 그러나 히틀러는 국방군과 SS의 대립을 중재하지 않았다.
2. 4. 1938년 8월 17일의 총통 포고
1938년 8월 17일, 히틀러는 SS 군사 부대를 전시에 육군의 "처분"에 맡기도록 포고했다.[1] 히틀러는 힘러의 요청에 따라 SS-VT에서의 복무가 군 복무 의무를 충족한다고 말했다. 또한 전시에는 SS-TV 부대가 SS-VT의 예비군으로 사용될 것이라고 말했다.[1] 전쟁 기간 동안 이로 인해 무장 친위대와 나치 강제 수용소 사이에 지속적인 인력 이동이 발생했다.[1]국방군으로부터의 통제 요구도 있어서, 히틀러는 같은 날 비밀 총통 포고를 발표했다. 이는 SS특무부대와 국방군의 역할을 구분하는 동시에 SS특무부대를 항구적인 전력으로 인정하는 것이었다.[76][77]
이 안에서 히틀러는 특무부대에 대해 "국방군의 일부도 경찰의 일부도 아닌, 나의 뜻대로 움직이는 독립된 무장 부대이다"라고 정의했다.[78][79] 또한 "SS는 기본적으로 정치 조직이어서 무장하지 않지만, SS특무부대, SS사관학교, SS해골부대는 내정에 특별한 임무를 맡고 있으며, 또한 전시에는 육군의 지휘 하에 전시 동원되므로 무장·훈련·편성을 할 필요가 있다"라고 했다.[48][78] 이로 인해, 지금까지 군사 조직으로 인정되지 않았던 SS사관학교와 SS해골부대도 군사 조직으로 인정받게 되었다.[80]
SS특무부대는 상비 부대였지만 예비 부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히틀러는 "전시에는 SS해골부대의 특정 부대를 이데올로기에 적합한 예비 부대로서 SS특무부대로 이적시킨다"라고 정했다.[81]
특무부대의 지휘권에 관해서는, 전시의 전장 출동의 경우에는 육군에, 평시의 치안 출동의 경우에는 친위대 전국 지도자 겸 독일 경찰 장관(힘러)에게 있다고 했다.[82] 평시에는 국방군과 SS특무부대에 조직상의 연관성은 없다고 했으며, 지금까지 군과 마찰을 빚어온 특무부대의 인원 확보 문제에 대해 재가권은 히틀러에게 있다는 것이 확인되었다.[83][84]
2. 5. 제2차 세계 대전 이전의 군사 작전
SS 특무부대(SS-VT)는 라인란트 진주[33][85][86], 오스트리아 병합[87][33], 주데텐란트 및 체코슬로바키아 점령 기간 동안 독일 국방군과 함께 복무했으며, 이 작전들에서 SS-VT는 육군 지휘를 받았다. SS-VT는 또한 이 기간 동안 포병 연대를 편성하여 여러 육군 부대의 공백을 메웠다.[4]1936년 3월 라인란트 진주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가 국방군에 종군했다.[33][85][86] 1938년 3월 11일 오스트리아 병합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의 자동차화 대대가 육군 제16군 지휘 아래 종군했다.[87][33]
1938년 10월 주데텐란트 진주 (주데텐 병합)에는 라이프슈탄다르테 뿐만 아니라 "도이칠란트" 연대와 "게르마니아" 연대, 그리고 해골 부대의 "오버바이에른" 연대도 종군했다.[88][89] 주데텐란트 진주 시의 교훈으로 SS 특무 부대의 자동차화가 빠르게 진행되어, 1939년 3월 체코슬로바키아 병합 시에는 SS 특무 부대의 4개 연대가 종군했지만, 육군의 기계화 사단에 뒤지지 않고 프라하에 진주할 수 있었다.[82]
2. 6. 폴란드 침공
SS-VT 연대 ''도이칠란트''와 ''게르마니아'', 그리고 ''라이프슈탄다르테''는 폴란드 침공에 참여했으며, ''데어 퓌러''(오스트리아 합병 이후 오스트리아에서 모집)는 프라하에서 예비대로 대기했다.[93] 1939년 9월, SS-VT와 육군 병력으로 구성된 연합 부대는 기갑사단 ''켐프''로 함께 작전을 수행했다.[93][94][95] 이 부대는 로잔 전투, 모들린 전투, 워메자, 그리고 크미친에서 육군 부대와 함께 싸웠다. 이 사단은 1939년 10월 7일 폴란드 도시 니지차 근처에서 해산되었다.[98][99]
1939년 5월, 특무부대의 "도이칠란트" 연대가 뮌스터 육군 훈련장에서 돌격 훈련을 실시하여 히틀러와 국방군 장군들을 놀라게 했다.[82][90][91] 그 결과, 히틀러는 SS 특무부대의 사단 편성을 인정했다.[85][92]
1939년 8월 10일, SS "도이칠란트" 연대와 SS 포병 연대는 육군 전차 부대와 함께 기갑사단 "켐프"(de)(사단장 베르너 켐프 소장)를 편성했다.[96] 이 사단은 북방군집단(사령관 페도어 폰 보크 상급 대장) 예하 제3군(사령관 게오르크 폰 퀴흘러 대장) 예하 제1군단(de)(군단장 발터 페토첼 중장)에 배속되어[97] 폴란드 북방 동프로이센 남부에 배치되었다.[96]
기갑사단 "켐프"는 1939년 9월 1일 개전과 동시에 동프로이센에서 남진하여 므와바 전투(de)와 루잔 전투(en)에 참가하여 큰 손실을 입었지만, 해당 지역의 폴란드군을 철수시켰다.[98] 이어서 부크 강을 도하하여 남하, 수도 바르샤바를 방어하려는 폴란드 예비군의 진로 차단에 기여했다.[99] 이후 9월 27일 폴란드 항복 시까지 모들린 전투(de)에 참전했다.[99]
한편,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남방군집단(게르트 폰 룬트슈테트 상급 대장) 예하 제8군(사령관 요하네스 블라스코비츠 대장) 예하 제13군단 예하 연대 전투단으로 폴란드 전에 참전했다.[99] 9월 1일 그라에서 처음 실전을 치렀고, 이후 제17사단에 배속되어 우치 점령에 기여했다.[100] 제4기갑사단으로 전속된 후에는 부즈라 전투(de)에서 활약하여 폴란드 회랑에서 철수하는 폴란드군이 바르샤바로 향하는 것을 막았다.[100] 9월 21일부터는 모들린 요새 공격에 참가하여 폴란드 항복 시까지 전투를 이어갔다.[100]
"게르마니아" 연대는 남방군집단 예하 제14군(사령관 빌헬름 리스트 대장) 예하로 참전했다.[101]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국경을 넘어 진군하여 폴란드 공업 지대와 렘베르크를 공격했다.[102][103] "데어 퓌러" 연대는 훈련 미완료로 폴란드 전에 참전하지 않았다.[104]
폴란드 침공에서 발생한 사건들은 SS-VT의 전투 효과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국방군 최고 사령부(OKW)는 SS-VT 부대가 불필요한 위험을 감수했으며 육군보다 높은 사상자율을 기록했다고 보고했다.[107][108] 또한 SS-VT의 훈련 부족과 장교들의 전투 지휘 부적합을 주장했다. OKW는 ''라이프슈탄다르테''가 파비아니체에서 폴란드군에 포위된 후 육군 연대에 의해 구출되어야 했던 사례를 지적했다.[109][110][111] 반면, SS는 자신들이 조각조각 싸워야 했고 육군으로부터 부적절한 장비를 받았기 때문에 방해받았다고 주장했다. 힘러는 SS-VT가 자체 지휘관 아래 자체 부대로 싸워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OKW는 SS-VT 완전 해산을 시도했다.[112][113][114]
아이케의 SS-TV 야전 부대는 군대가 아니었으며, 폴란드 침공 기간 동안 민간인을 공포에 떨게 하는 데 사용되었다.[2]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보우니에에서 50명의 폴란드 유대인을 살해하고, 200명의 민간인을 기관총으로 학살한 즈워체프 학살을 포함, 여러 마을에서 잔학 행위를 저질렀다. 즈워체프에서는 아이들까지 희생되었으며, SS 대원들은 소총 개머리판으로 아기들의 두개골을 부수는 만행을 저질렀다.[2]
2. 7. SS 특무 사단 창설
폴란드 침공 이후, SS 특무부대는 사단 편성을 위해 독일로 귀환했다. 1939년 10월 10일, 라이프슈탄달레를 제외한 SS 특무부대가 사단으로 편성되면서 SS 특무사단이 창설되었다. 파울 하우서가 초대 사단장으로 임명되었다.[115]이 시기, 폴란드 전역에서 SS 포병 연대 대원이 유대인을 불법 총살한 사건이 발생하여, 육군은 해당 SS 대원을 군기 위반으로 군사 재판에 회부했다. 이에 하인리히 힘러는 격분하여 아돌프 히틀러에게 SS 대원의 재판권을 군으로부터 빼앗아 달라고 요청했다. 히틀러는 이를 허가하여 1939년 10월 17일 국방 각료 회의 포고를 통해 SS 특무부대원의 재판권은 SS 전국 지도자의 조언에 따라 총통이 임명한 재판관으로 구성된 SS 특별 법원에 귀속되었다. 이로써 SS 특무부대는 국방군의 재판권에서 벗어났다. 다만, 특무부대는 국방군의 군기를 따르도록 의무화되었다.[116]
2. 8. 무장 친위대로의 개편
1939년 10월, SS-VT 연대 "도이칠란트"(Deutschland), "게르마니아"(Germania), "데어 퓌러"(Der Führer)는 SS-사단으로 편성되었고, 파울 하우서가 사령관이 되었다. LSSAH는 기계화 연대로 확장되었다.[117]토텐코프 사단은 "토텐코프슈탄다르텐"(Totenkopfstandarten)과 "SS-Heimwehr Danzig"을 아이케의 지휘하에 편성한 것이고, 경찰 사단은 오르둥스폴리차이에서 창설되었다. 이 부대들은 1940년 황색 작전을 위해 육군 지휘하에 전투 훈련을 받았다.[117]
SS-VT와 LSSAH는 네덜란드 침공 지상전에 참여했다. LSSAH는 네덜란드 수비군과 여러 차례 충돌 후 육군, 공수 부대와 연결되었다. 로테르담 항복 후 LSSAH는 헤이그로 이동, 3,500명의 네덜란드 군인을 전쟁 포로로 잡았다.[117]
5월 16일, SS "토텐코프" 사단은 프랑스로 이동, 북부 "선봉"을 형성하는 육군 사단에 배속되었다. 프랑스 공방전에서 SS "토텐코프"는 유일한 연합군 전차 공격에 연루되었다. 5월 21일, 영국 제1 전차 여단은 아라스 전투에 참여했다. SS "토텐코프"는 압도당했으며, 3.7 cm PaK 36은 영국 마틸다 전차에 대항할 수 없었다.[117]
네덜란드 항복 후, LSSAH는 프랑스로 이동했다. 5월 24일, LSSAH는 SS-VT 사단과 됭케르크 주변 방어선을 유지하여 영국 원정군과 프랑스군을 포함하는 고립된 지역을 줄였다. 5월 27일, "토텐코프"의 제4 중대는 르 파라디 학살을 저질렀다. 제2 로열 노퍽 연대 대대 소속 97명이 기관총에 맞아 살해되었고, 생존자는 총검으로 마무리되었다. 5월 28일, "SS-라이프슈탄다르테"는 보름후트를 점령, 제2대대 병사들은 80명의 영국군과 프랑스군을 살해한 보름후트 학살에 책임이 있었다.[117]
프랑스 공방전 이후, SS-VT는 1940년 7월 19일 아돌프 히틀러의 연설에서 공식적으로 무장친위대로 개명되었다.[117] 힘러는 무장친위대가 자체 최고 사령부인 ''Kommandoamt der Waffen-SS''(무장친위대 사령부)를 SS-지도본부''(FHA) 내에 설립하는 것을 승인받았고, 1940년 8월 한스 쥐트너 지휘하에 창설되었다. "토텐코프" 사단은 "토텐코프-슈탄다르텐"과 함께 FHA 통제하에 배치되었다.[117] 1940년 6월에는 SS 특무부대 총감부가 무장SS 사령부(Kommandoamt-Waffen SS)로 명칭을 변경하고, SS 본부로부터의 독립이 허가되었다.[121]
고틀로프 베르거는 힘러에게 독일계 및 게르만족 인구로부터 자원병을 모집하는 계획을 제안했다. 히틀러는 외국인 모집에 의문을 품었지만, 힘러와 베르거의 설득으로 승인했다.[117]

1940년 12월, "게르마니아" 연대는 제5 SS 사단 "게르마니아"의 핵심이 되었다. 이 사단은 덴마크인, 노르웨이인, 네덜란드인, 플람스인 등 "북유럽" 자원병으로 구성되었다. 1941년 초, "게르마니아"는 "비킹"으로 개명되었으며, 지휘는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맡겨졌다. "베르퓌궁스" 사단은 "라이히"(1942년 "다스 라이히")로 개명되었다. "경찰" 사단은 무장친위대 관할로 편입되었다. "라이프슈탄다르테"도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사단으로 확장되었다.[117]
무장친위대 사단에 늦게 번호가 지정되었을 때,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폴리차이", "비킹"은 SS 사단 1에서 5로 인정되었다.[117]
1939년 11월 말, 힘러는 공식적으로 3개 사단, 14개 해골 연대, 2개의 SS 장교 학교로 구성된 무장SS의 발족을 선언했다.[119] 1940년 3월 8일에는 국방군 최고사령부(OKW)도 무장SS를 승인했다.[120] 1940년 8월 15일에는 무장SS 사령부와 SS 본부의 병력 보충 이외의 부문이 통합되어 SS 작전 본부가 창설되었다.[122][123]
3. 초기 작전 (Early Op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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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무장 친위대의 발전 (Development of the Waffen-SS)
무장친위대는 초기 몇몇 부대를 중심으로 시작하여 점차 규모가 확대되고 재편되었다. 1940년 12월에는 제5 SS 사단 "게르마니아"가 창설되었는데, 이 부대는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플람스인 등 새롭게 점령된 지역 출신의 "북유럽" 자원병들로 구성되었다.[14] 1941년 초, "게르마니아"는 "비킹"으로 이름이 바뀌었고, 펠릭스 슈타이너가 지휘를 맡게 되었다.[14]
"베르퓌궁스" 사단은 "라이히"(1942년 "다스 라이히")로 개칭되었고,[14] "경찰" 사단은 무장친위대 소속으로 변경되었다.[14]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도 사단 규모로 확대되었다.[14] 이후 무장친위대 사단에 번호가 부여되었다.[14] (하위 섹션에서 자세한 사단별 번호 지정 내용이 이어진다.)
4. 1. 사단 확장과 개편
1940년 12월, 제5 SS 사단 "게르마니아"가 창설되었다. 이 사단은 "게르마니아" 연대를 주축으로,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플람스인 등 새로 정복된 영토 출신의 "북유럽" 자원병들로 구성되었다.[14] 1941년 초, "게르마니아"는 "비킹"으로 개명되었고, 펠릭스 슈타이너가 지휘를 맡았다.[14] "베르퓌궁스" 사단은 "라이히"(1942년 "다스 라이히")로 개명되었고,[14] "경찰" 사단은 무장친위대 관할로 편입되었다.[14]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라이프슈탄다르테"도 사단으로 확장되었다.[14]무장친위대 사단에 번호가 지정되었을 때, "라이프슈탄다르테", "다스 라이히", "토텐코프", "폴리차이", "비킹"은 각각 SS 사단 1번에서 5번으로 인정받았다.[14]
4. 2. 번호 지정
초기 무장친위대 사단들은 전쟁 후반기에 번호를 부여받았는데, 그 순서는 다음과 같다.사단명 | 번호 |
---|---|
라이프슈탄다르테 | 1 |
다스 라이히 | 2 |
토텐코프 | 3 |
폴리차이 | 4 |
비킹 | 5 |
이 사단들은 1940년 프랑스 침공 이후 무장친위대가 공식적으로 창설되면서 그 핵심을 이루었다.
- '''"라이프슈탄다르테"'''는 바르바로사 작전을 위해 사단으로 확장되었다.
- '''"다스 라이히"'''는 원래 "베르퓌궁스" 사단으로 불렸다가 "라이히"로, 1942년에는 "다스 라이히"로 개칭되었다.
- '''"토텐코프"'''는 1939년 10월 테오도어 아이케의 지휘 하에 창설되었으며, 아라스 전투에서 영국 마틸다 전차에 고전하기도 했다.[1] 르 파라디 학살과 같은 전쟁범죄를 저지르기도 했다.[1]
- '''"폴리차이"'''는 질서경찰에서 창설되었으며, 이후 무장친위대 관할로 편입되었다.
- '''"비킹"'''은 "게르마니아" 연대를 기반으로 창설되었으며, 덴마크, 노르웨이, 네덜란드, 플람스인 등 "북유럽" 자원병들로 구성되었다.
5. 편제
1938년 당시 친위대 특무부대의 연대(슈탄다르테) 편제는 다음과 같다.[44][46][47][48][49]
연대명 | 소재지 | 비고 |
---|---|---|
Leibstandarte-SS "Adolf Hitler" | 베를린-리히터펠데 | 제1군관구(동프로이센), 제2군관구(메클렌부르크), 제3군관구(알트마르크, 노이마르크, 브란덴부르크), 제4군관구(작센, 오스트-튀링겐), 제8군관구(슐레지엔, 수데텐란트)에 거주하는 입대 지원자 신장이 178cm를 초과하는 응모자는 어느 군관구에서든 응모 가능. |
1. SS-Standarte "Deutschland" | 뮌헨 | 제5군관구(엘자스, 바덴, 뷔르템베르크), 제7군관구(남부 바이에른), 제12군관구(라인란트 남부, 로트링겐, 팔츠)에 거주하는 지원자 |
2. SS-Standarte "Germania" | 함부르크-페델 | 제6군관구(베스트팔렌), 제9군관구(헤센, 베스트-튀링겐), 제10군관구(슐레스비히-홀슈타인, 하노버 북부), 제11군관구(브라운슈바이크, 안할트, 하노버 남부)에 거주하는 지원자 |
3. SS-Standarte "Der Führer" | 빈 | 오스트마르크(오스트리아)에 거주하는 지원자 |
참조
[1]
서적
Organisationsbuch der NSDAP
1937
[2]
간행물
Zbrodnie Wehrmachtu w Polsce – wrzesień 1939
Biuletyn IPN
2004-08
[3]
문서
Polizei division members continued to wear Ordnungspolizei insignia and the division did not include "SS" in its n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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