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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슈타이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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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펠릭스 슈타이너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그는 무장친위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기갑 부대를 지휘했고, 쿠를란트 전투와 베를린 공방전에 참여했다. 1945년 엘베 강에서 미군에 항복한 후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혐의가 기각되어 석방되었다. 이후 회고록과 군사 저작을 집필했으며, 서독 재무장을 위한 싱크탱크 설립에 관여했다. 그는 HIAG 단체에서 활동하며 전 무장 친위대원의 명예 회복을 위해 노력했다.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받지만, 무장친위대의 전쟁범죄에 대한 침묵으로 비판을 받기도 한다.

2. 어린 시절

펠릭스 슈타이너는 1896년 5월 23일 동프로이센 슈탈루푀넨에서 태어났다.[2] 1914년 프로이센 육군에 사관 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2] 동부 전선서부 전선에서 모두 복무했으며, 1급 및 2급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2]

3. 초기 군 경력

1896년 동프로이센 슈탈루푀넨(Stallupönen)에서 태어난 슈타이너는 1914년 사관 후보생으로 프로이센 장교단에 합류하여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급 철십자장을 수훈하고 중위로 종전을 맞았다.[2]

전후 1919년에는 독일 혁명 기간 중 동프로이센메멜에서 자유군단을 이끌었다.[2] 1921년에는 국방군에 편입되었고, 1933년 소령 계급으로 군을 떠났다.[2]

4. 나치당과 무장친위대

1933년, 슈타이너는 나치당에 입당(당원 번호 4,264,295)하여 돌격대(SA) 교육부장으로 활동했다. 그는 돌격대를 제2국군으로 만들기 위한 군사 훈련 교서를 작성했다. 1935년에는 친위대(SS)로 전임했고, 1936년에는 친위대 대령으로 친위대 특무 부대 "도이칠란트" 연대 지휘관이 되었다. 같은 해 10월, 그는 바트 퇼츠에 있는 친위대 사관학교 교관으로 임명되어 Cassius Freiherr von Montigny 남작과 함께 무장 친위대의 전술 교관을 담당했다.[3]

슈타이너는 제1차 세계 대전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훈련 방식을 도입하여 무장 친위대를 정예 부대로 만들고자 했다. 그는 침투 전술과 기동전을 중시했으며, 집단 훈련보다는 개인의 육체 단련을 위한 스포츠 훈련을 강조했다. 또한 실탄 훈련과 위장복 도입 등 선구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

5.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펠릭스 슈타이너는 SS-상급지도자(준장)로서 무장 친위대 연대 ''SS-도이칠란트''를 지휘했다. 그는 이 연대를 이끌고 폴란드 침공프랑스 공방전에 참전했으며, 이 공로로 1940년 8월 15일 기사십자 철십자 훈장을 수여받았다.[3]

초기 전역이 끝난 후, 슈타이너는 SS제국지도자 하인리히 힘러에게 발탁되어 신규 SS 의용 사단인 비킹의 편성과 지휘를 맡게 되었다. 비킹 사단은 비독일 국적의 의용병들로 구성되었고, 창설 당시에는 덴마크 의용병들을 포함해 네덜란드인, 발룬인, 스칸디나비아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슈타이너는 이질적인 부대원들을 통합하여 강력한 부대를 만들었으며, 1941년부터 1943년 제3 SS 기갑 군단장으로 승진하기 전까지 동부 전선에서 비킹 사단을 지휘하며 수많은 격전을 치렀다. 일부 역사가들은 비킹 사단이 전쟁범죄에 가담해 몇 건의 학살사건을 저질렀다고 주장하지만, 사단의 공식 기록에는 뚜렷한 혐의점이 발견되지 않는다.

1943년 4월, 슈타이너는 신설된 III SS 기갑군단의 지휘를 맡게 되었다. 이 부대는 유고슬라비아에서 유격대 소탕 작전에 참여했다. 1943년 11월/12월에 그의 군단은 동부 전선으로 이동하여 북부 집단군 휘하의 레닌그라드 북부 지역에 배치되었다. 슈타이너의 기갑 군단은 나르바 전투와 탄넨베르크 선 전투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이후 그의 부대는 북부 집단군의 나머지 병력과 함께 쿠를란트 반도로 철수했다.

1945년 1월, 슈타이너의 제3 SS 기갑 군단은 쿠를란트 방위에서 독일 본토 방어 임무로 전환되었다. 동 군단은 바익셀 집단군으로 전속되어 제11 SS 기갑군에 배속되었으나, 이는 서류상으로만 존재하는 부대였다. 소련군이 오데르강으로 진출한 이후 제11 SS 기갑군은 실질적인 기능을 상실했고, 제3 SS 기갑 군단은 베를린 공방전 당시 제3 기갑군의 예비대로 배속되었다.

슈타이너는 어떤 상황에서도 임무를 완수하려는 의지와 프로이센 장교단이 아닌 무장 친위대에 대한 충성심으로 인해 히틀러의 신임을 받는 지휘관 중 한 명이었다. 요제프 괴벨스는 1945년 3월 1일 자신의 일기에 "그는 정력적이고 과감할 뿐만 아니라 자신의 임무에 열정을 가지고 임하고 있다"라고 기록하며 슈타이너를 극찬했다.

5. 1. 베를린 공방전

1945년 4월 21일,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소련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젤로 고지의 독일군 방어선을 돌파했다. 상황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아돌프 히틀러는 펠릭스 슈타이너에게 제1 벨로루시 전선군에 의해 발생한 거대 돌출부의 북익을 공격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 공격에는 남익에서 테오도르 부세 보병대장의 제9군이 협공할 예정이었다.[7][8]

이 공격을 위해 슈타이너는 제9군 제101 군단 소속의 제4 SS 경찰 기갑척탄병 사단, 제5 경보병 사단, 제25 기갑척탄병 사단 3개 사단을 배속받았다. 이들은 핀로 운하 북쪽에 위치해 있었고, 헬무트 바이틀링 포병대장의 제56 기갑 군단 또한 이 공격에 참가했다.[7][8]

제101 군단에서 차출된 3개 사단은 제56 기갑 군단을 향해 핀로 운하가 위치한 에버스발데에서 남쪽으로 공격해 나갈 예정이었다. 이들은 베를린 동쪽 24킬로미터 지점에 위치해 있었고, 제1 벨로루시 전선군이 형성한 돌출부를 분단할 가능성이 있었다.

그러나 슈타이너는 제2 해군 사단이 도착하기 전까지는 제5 경보병 사단과 제25 기갑척탄병 사단을 방어 임무에서 빼낼 수 없으며, 작전에 동원 가능한 병력은 무장조차 제대로 갖추지 못한 제4 SS 경찰 기갑척탄병 사단의 2개 대대뿐이라고 보고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상급대장은 슈타이너의 의견을 바탕으로 한스 크렙스 보병대장에게 계획의 불가함을 알리고 히틀러에게 재고를 요청했지만, 총통이 바쁘다는 이유로 거절당했다.[7][8]

4월 22일 오후 작전 회의에서 히틀러는 슈타이너가 공격을 가하지 않을 것임을 확신하고 격분하여 눈물까지 흘렸다. 그는 전쟁에 패배했다고 선언하고 장군들을 비난했으며, 종말이 올 때까지 베를린에 머물겠으며, 그 후에는 자살하겠다고 밝혔다.[10]

같은 날, 루돌프 홀스테 중장은 슈타이너 휘하의 소수 기동 부대를 가지고 베를린 구원 작전을 시도했다. 발터 벵크 기갑대장이 서쪽에서, 테오도르 부세 보병대장이 남쪽에서 공격을 가했고, 홀스테 중장은 북쪽에서 공격을 감행했다. 그러나 이 공격은 실패했고, 1945년 4월 27일 소련군에 의해 베를린은 완전히 포위되었다.

6. 종전 이후

펠릭스 슈타이너는 1945년 5월 3일 미군에 항복하여 1948년까지 투옥되었으며, 뉘른베르크 재판에 기소되었으나 혐의가 없어 석방되었다.[11]

항복 후 슈타이너와 SS 베테랑 운토 파르빌라티(우)와 아르네 로이하(좌)의 사진


1953년, 슈타이너는 미국 중앙정보국(CIA)의 요청으로 전 독일군 장교들로 구성된 '방위 연구 협회'(Gesellschaft für Wehrkunde)를 설립하여 서독 재무장을 위한 선전 도구이자 군사적 싱크탱크 역할을 수행했다.[4]

슈타이너는 파울 하우서, 헤르베르트 길레, 오토 쿰과 함께 1951년 서독에서 전직 고위 무장 친위대 장교들이 결성한 로비 단체인 HIAG(구 무장 친위대원 상호 부조 협회)의 창립 멤버로서,[5][6] 전 무장 친위대원들의 명예 회복과 생활 보장을 위해 활동했다.

그는 회고록과 군사 저작을 집필하며 무장 친위대를 변호했다. 1958년에는 ''무장 친위대 의용군: 아이디어와 희생''(Die Freiwilligen der Waffen-SS: Idee und Opfergang)을 출판했고, 1963년에는 ''추방된 군대''(Die Armee der Geächteten)를 출판했다. 역사학자 찰스 시드너는 슈타이너의 저서를 쿠르트 마이어의 ''척탄병'' 및 파울 하우서의 ''행동하는 무장 친위대''와 함께 "가장 중요한 변호 문학 작품" 중 하나로 평가했다.

슈타이너는 1966년 5월 12일 뮌헨에서 70세의 나이로 사망했다.[11]

7. 슈타이너에 대한 평가

펠릭스 슈타이너는 유능한 야전 지휘관으로 평가받는다. 파울 하우서와 함께 무장친위대를 단순한 친위대의 군사조직이 아닌, 독립적인 정예 부대로 발전시키고 육성하는데 크게 기여한 인물이다.[3]

슈타이너는 제1차 세계 대전에서의 경험을 바탕으로 혁신적인 훈련 방법을 고안하여 무장친위대를 더욱 세련된 엘리트 부대로 만들려고 했다. 침투 전술을 사용한 기동전을 중시했으며, 독일 국방군과는 달리 개인의 육체 단련을 위한 스포츠 훈련을 강조했다. 또한 실탄 훈련과 위장복 도입 등 선구적인 시도를 많이 했다.[3]

하지만 슈타이너는 무장친위대가 나치즘의 범죄 행위에 연루되어 있다는 점과, 상부의 명령을 받아 수많은 전쟁범죄에 가담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침묵했다.[3]

8. 진급 내역


  • 1934년: 슈투름반퓌러, 오버슈투름반퓌러
  • 1936년 6월 1일: SS-슈탄다르텐퓌러 (SS-특수부대)
  • 1939년: SS-오버퓌러
  • 1940년 11월 9일: SS-여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소장
  • 1942년 1월 1일: SS-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중장
  • 1943년 7월 1일: SS-상급집단지도자 및 무장친위대 대장

9. 서훈 내역

서훈 내역


참조

[1] 서적
[2] 서적 Twilight of the Gods: A Swedish Volunteer in the 11th SS Panzergrenadier Division "Nordland" on the Eastern Front Stackpole Books 2009-05-28
[3] 웹사이트 Steiner, Felix https://www.deutsche[...] Neue Deutsche Biographie
[4] 간행물 U.S. intelligence and the nascent transatlantic security architecture of the Cold War – the case of the 'Gesellschaft für Wehrkunde' https://www.tandfonl[...] 2021-02-06
[5] 서적 Svenskarna som stred för Hitler Bokförlaget Forum 2015-11-02
[6] 서적 The Darkest Sides of Politics, I: Postwar Fascism, Covert Operations, and Terrorism Routledge 2017-09-04
[7] 서적
[8] 서적
[9] 서적 히틀러 최후의 14일 교양인 2006
[10] 서적
[11] 서적 Waffen-SS Encyclopedia The Aberjona Press 20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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