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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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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1944년 6월 10일,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에서 일어난 대량 학살 사건이다. 독일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소속 부대가 마을을 봉쇄하고 주민들을 학살하여, 남성 190명, 여성 247명, 어린이 205명이 사망했다. 학살 이후 샤를 드 골은 마을을 재건하는 대신 나치 점령의 잔혹성을 기리는 기념관으로 남겨두었으며, 현재는 기념관과 박물관이 운영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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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개요
명칭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발생일1944년 6월 10일
위치오라두르쉬르글란, 프랑스
희생자프랑스 민간인
사망자 수643명
가해자무장친위대
가해자 목록아돌프 디크만
하인츠 라머딩
사건 배경
관련 사건카엠페 납치 사건
기타

2. 배경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프랑스 전역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활동이 격화되었다. 이에 대응하여 나치 독일군은 점령지에 대한 통제를 강화하고 레지스탕스 활동에 대한 보복 작전을 빈번하게 수행했는데,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이러한 배경 속에서 발생했다.

당시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동부 전선에서의 전투 후 프랑스 남부에서 재편성 중이었으나, 노르망디 상륙 작전 발발 후 연합군의 진격을 저지하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12][13] 이동 과정에서 이 사단은 프랑스 레지스탕스의 공격에 직면했으며, 이에 대한 보복으로 여러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학살의 직접적인 계기는 사단 소속 장교 납치 사건이었다. 1944년 6월 9일, 제2 SS 기갑 정찰 대대 지휘관인 SS-슈투름반퓌러 헬무트 켐페가 마키 뒤 리무쟁(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에 의해 납치되었다.[14] 다음 날인 6월 10일, 제4 SS 기갑척탄병 연대 제1대대 지휘관인 SS-슈투름반퓌러 아돌프 디에크만은 켐페가 인근 마을인 오라두르쉬르바이에르에 억류되어 있다는 정보를 비시 프랑스의 준군사 조직인 ''밀리시''로부터 입수했다.[13][14] 이 정보는 디에크만이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보복 작전을 실행하는 직접적인 구실이 되었다.

2. 1.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

아돌프 디에크만, 제4 SS 기갑척탄병 연대 지휘관


1944년 2월,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툴루즈 북쪽 남프랑스의 발랑스다장에 주둔하며 새로운 장비와 신병을 보충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2]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사단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부대 중 하나가 제4 SS 기갑척탄병 연대 "데어 퓌러"였다. 연대 참모진에는 연대장인 SS-슈탄다르텐퓌러 실베스터 슈타들러, 제1 대대를 지휘하는 SS-슈투름반퓌러 아돌프 디에크만, 그리고 슈타들러의 후임자로 임명되어 연대에 적응 중이던 SS-슈투름반퓌러 오토 바이딩거가 있었다. 지휘권은 6월 14일에 바이딩거에게 넘어갔다.[13]

1944년 6월 10일 이른 아침, 디에크만은 바이딩거에게 비시 프랑스의 준군사 조직인 ''밀리시''의 두 구성원이 접근하여 정보를 제공했다고 알렸다. 그들은 인근 마을인 오라두르쉬르바이에르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무장 친위대''(Waffen-SS) 장교를 포로로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포로로 잡힌 장교는 제2 SS 기갑 정찰 대대(역시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의 지휘관인 SS-슈투름반퓌러 헬무트 켐페로 알려졌다. 켐페는 전날 제네바 협약에 따라 보호받는 구급차로 표시된 독일군 차량을 타고 이동하던 중 마키 뒤 리무쟁에게 체포되었다.[14]

2. 2. 헬무트 켐페 소령 납치 사건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의 직접적인 계기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의한 독일군 장교 납치 사건이었다.

1944년 2월, 제2 SS 기갑사단 다스 라이히는 툴루즈 북쪽 남프랑스의 발랑스다장에 주둔하며 새로운 장비와 신병을 보충받기를 기다리고 있었다.[12] 1944년 6월 노르망디 상륙 작전 이후, 사단은 연합군의 진격을 막기 위해 북쪽으로 이동하라는 명령을 받았다. 이 부대 중 하나가 제4 SS 기갑척탄병 연대 "데어 퓌러"였다. 당시 연대 참모진에는 연대장인 SS-슈타르텐퓌러 실베스터 슈타들러, 제1 대대를 지휘하는 SS-슈투름반퓌러 아돌프 디에크만, 그리고 슈타들러의 후임자로 연대에 새로 합류하여 적응 중이던 SS-슈투름반퓌러 오토 바이딩거가 있었다. 지휘권은 6월 14일에 바이딩거에게 넘어갈 예정이었다.[13]

1944년 6월 10일 이른 아침, 디에크만은 상관인 바이딩거에게 비시 프랑스의 준군사 조직인 ''밀리시'' 소속원 두 명이 찾아와 정보를 제공했다고 보고했다. 그들은 인근 마을인 오라두르쉬르바이에르에서 프랑스 레지스탕스가 무장 친위대(Waffen-SS) 장교 한 명을 포로로 잡고 있다고 주장했다. 포로로 잡힌 장교는 제2 SS 기갑 정찰 대대(역시 "다스 라이히" 사단 소속)의 지휘관인 SS-슈투름반퓌러 헬무트 켐페였다. 켐페는 바로 전날, 제네바 협약에 따라 보호받는 구급차로 표시된 독일군 차량으로 이동하던 중 마키 뒤 리무쟁(프랑스 레지스탕스 조직)에게 붙잡혔다.[14] 이 켐페 소령 납치 사건은 디에크만이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보복 작전을 감행하는 직접적인 빌미가 되었다.

3. 학살

1944년 6월 10일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당시의 사건 순서


1944년 6월 10일, 디크만이 이끄는 친위대 부대는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을 봉쇄하고 모든 주민을 마을 광장으로 소집하여 신분증 검사를 실시했다. 이 과정에는 당시 우연히 마을을 지나던 비거주자 6명도 포함되었다. 이후 여성과 아이들은 교회에 감금되었고, 남성들은 여러 헛간으로 끌려가 학살당했으며 마을은 약탈당했다.

3. 1. 남성 학살



1944년 6월 10일, 디크만 부대는 오라두르쉬르글란을 봉쇄하고 마을 광장에 모든 사람을 소집하여 신분증 검사를 명령했다. 여기에는 당시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던 비거주자 6명도 포함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이 교회에 갇힌 후 마을이 약탈당하는 동안, 남자들은 여섯 개의 헛간과 창고로 끌려갔다. 이 장소들에는 이미 기관총이 준비되어 있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친위대(SS) 대원들은 먼저 남성들의 다리를 겨냥하여 총격을 시작했다. 희생자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친위대원들은 그들에게 연료를 덮어씌우고 헛간에 불을 질렀다. 이 과정에서 단 6명의 남자만이 탈출에 성공했지만, 그중 한 명은 나중에 길에서 발각되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총 190명의 남성이 이날 학살되었다.

3. 2. 여성과 어린이 학살

SS 병력은 남성들을 학살한 후 교회로 이동하여 교회 옆에 소이탄을 설치했다. 이미 교회 안에는 여성과 아이들이 갇혀 있는 상태였다. 소이탄에 불이 붙자 여성과 아이들은 문과 창문을 통해 필사적으로 탈출하려 했지만, SS 병력은 이들을 향해 기관총 사격을 가했다. 이 공격으로 여성 247명과 어린이 205명이 목숨을 잃었다.

이 끔찍한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사람은 당시 47세였던 마르그리트 루팡슈였다. 그녀는 교회의 뒤편 성구실 창문을 통해 탈출을 시도했다. 젊은 여성 한 명과 아이 한 명이 그녀를 뒤따랐으나, 세 사람 모두 총에 맞았고 루팡슈를 제외한 두 명은 치명상을 입었다.[15] 루팡슈는 총상을 입은 채 근처 완두콩 덤불까지 기어가 다음 날 아침 구조될 때까지 밤새 숨어 있었다.

SS 병력은 여성과 아이들을 교회로 몰아넣기 전에 성체를 일부러 흩뜨리는 등 교회를 모독하는 행위도 저질렀다.

3. 3. 마을 파괴



6월 10일, 디크만 부대는 오라두르쉬르글란을 봉쇄하고 마을 광장에 모든 사람을 소집하여 신분증을 검사하도록 명령했다. 여기에는 친위대 부대가 도착했을 때 우연히 자전거를 타고 마을을 지나가던 비거주자 6명도 포함되었다. 여성과 아이들은 교회에 갇혔고, 마을은 약탈당했다. 남자들은 여섯 개의 헛간과 창고로 끌려갔는데, 그곳에는 이미 기관총이 설치되어 있었다.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친위대원들은 먼저 희생자들의 다리를 겨냥하여 총격을 시작했다. 사람들이 움직일 수 없게 되자 친위대원들은 그들에게 연료를 덮어씌우고 헛간에 불을 질렀다. 단 6명의 남자만이 탈출에 성공했으나, 그중 한 명은 나중에 길에서 발각되어 총에 맞아 사망했다. 이 과정에서 총 190명의 남자가 목숨을 잃었다.

4. 학살 이후

학살 직후, 소수의 생존자들은 폐허가 된 마을에서 희생자들의 시신을 수습하고 매장하는 참혹한 과정을 감당해야 했다. 이후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면서 학살의 진상을 밝히고 책임자를 처벌하려는 노력이 시작되었다. 이 과정에서 목격자 증언 확보, 독일군 내부 조사 시도, 그리고 전범 재판 등이 이어졌으나, 복잡한 정치적 상황과 관련자들의 사망 및 소재 불명, 알자스 출신 강제 징집병 문제(말그레-누) 등 여러 요인으로 인해 완전한 책임 규명과 처벌에는 어려움이 따랐다. 특히 학살을 지휘했던 고위 책임자 중 일부는 법의 심판을 피하기도 했다. 이후에도 관련자들에 대한 추적과 재판이 간헐적으로 이루어졌지만, 시간의 흐름 속에서 사건의 완전한 법적 해결은 더욱 요원해졌다.

4. 1. 머피 보고서

탈출 및 회피 보고서 제866호, 프랑스 탈출, 레이먼드 J. 머피 소위, 항법사, 제324 폭격 비행대대, 제91 폭격 비행단(H), 1944년 8월 15일


레이먼드 J. 머피는 1944년 4월 말 프랑스 아보르 상공에서 격추된 20세의 미국 B-17 항법사로, 학살 사건 이후의 현장을 목격했다.[18] 머피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에 의해 숨겨진 후 8월 6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후 심문 과정에서 8월 7일에 설문지를 작성하고 공식 보고서 초안을 여러 차례 작성했다.[18] 8월 15일에 최종 제출된 보고서에는 다음과 같은 내용의 수기 부록이 첨부되어 있었다.[17]

: 약 3주 전, 저는 게르보 저택 [레지스탕스 지도자 카미유 게르보의]에서 자전거로 4시간 거리에 있는 마을에서 독일군에 의해 약 500명의 남녀와 어린이들이 살해된 것을 보았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힌 아기를 한 명 보았습니다.

머피의 보고서는 미국 법무부 국가안보부 변호사인 그의 손자가 정보 공개법에 따라 요청하여 2011년에 공개되었다.[18] 이 보고서는 아기가 십자가에 못 박혔다는 내용을 언급하는 유일한 기록이다.[18] 셰인 해리스는 이 부록이 머피의 진술이며, 보고서에 명시되지 않은 해당 마을이 오라두르쉬르글란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분석했다.[18]

4. 2. 독일군의 대응

디에크만의 독단적인 행동에 대해 에르빈 롬멜 원수, 리모주 지역 독일 사령관 발터 글라이니거 장군, 그리고 비시 정부 등 여러 곳에서 항의가 이어졌다. 심지어 디에크만의 상관인 슈타들러조차 디에크만이 명령 범위를 크게 벗어났다고 판단하여 조사를 시작했다. 그러나 디에크만은 얼마 지나지 않아 노르망디 상륙작전 중에 사망했고, 학살을 주도했던 제3중대 병력 상당수도 전투에서 목숨을 잃었다. 결국 이 사건에 대한 조사는 중단되었다.

4. 3. 알자스 출신 독일군 문제

1953년 1월 12일, 프랑스 보르도의 군사 재판소는 학살에 관련된 약 200명의 SS 대원 중 생존한 65명에 대한 재판을 시작했다. 그러나 실제로 법정에 선 피고는 21명에 불과했는데, 이는 많은 관련자들이 서독동독에 있었고 이들 정부가 신병 인도를 거부했기 때문이다. 법정에 출석한 피고 중 7명은 독일 국적이었으나, 14명은 알자스 출신의 프랑스 국적자였다. 알자스는 1940년 독일에 점령된 후 독일 제국에 병합된 지역이었다.

이 알자스 출신 피고들은 한 명을 제외하고는 모두 자신들이 무장친위대에 강제로 징집되었다고 주장했다. 알자스로렌 지역에서 이렇게 강제로 징집된 이들은 스스로를 'Malgré-nous|말그레-누fra'(우리의 의지에 반하여라는 뜻)라고 불렀다.

1953년 2월 11일, 재판 결과 피고 20명 중 19명이 유죄 판결을 받았다. 이 중 5명은 징역형을, 2명은 사형을 선고받았다.[19] 그러나 이 판결은 알자스 지역에서 격렬한 반발을 불러일으켰고, 심지어 자치 요구까지 제기되었다. 결국 프랑스 의회는 알자스 지역의 거센 반발과 정치적 압력 속에서 1953년 2월 19일, 모든 '말그레-누'에 대한 사면법을 통과시켰다. 유죄 판결을 받았던 알자스 출신 전 SS 대원들은 곧바로 석방되었지만, 이는 학살이 일어났던 리무쟁 지역 주민들의 거센 항의를 불러일으키며 프랑스 내 갈등을 심화시켰다.

한편, 재판에 불출석했던 독일 국적 피고인들은 1958년까지 모두 석방되었다. 학살 명령을 내린 책임자였던 다스 라이히 사단의 하인츠 람머딩 장군은 전후 서독뒤셀도르프(당시 영국 점령 지역)에서 성공한 사업가로 살다가 프랑스 정부의 인도 요구에도 불구하고 처벌받지 않은 채 1971년에 사망했다.[20]

이후에도 관련자들에 대한 재판이 간헐적으로 열렸다. 1983년에는 동독에서 추적된 전 ''SS-상급돌격지도자'' 하인츠 바르트가 학살 당시 ''데어 퓌러'' 연대 소대장으로 45명의 SS 대원을 지휘하고 차고에서 20명의 남성을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혐의 등으로 베를린 시 법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는 독일 통일 후 1997년에 석방되어 2007년 8월에 사망했다.

2014년 1월 8일, ''데어 퓌러'' 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전 멤버였던 88세의 베르너 크리스투카트[21]쾰른 주 법원에 의해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관련하여 25건의 살인 혐의와 수백 건의 살인 방조 혐의로 기소되었다.[22] 베르너 C.로만 밝혀진 용의자는 2014년 3월 31일까지 혐의에 답변해야 했다. 만약 재판이 열렸다면, 용의자가 당시 19세에 불과했기 때문에 소년 법원에서 열렸을 수도 있었다. 그의 변호사 라이너 폴렌에 따르면, 용의자는 마을에 있었던 것을 인정했지만 어떤 살인에도 연루되지 않았다고 부인했다.[23] 2014년 12월 9일, 법원은 용의자가 학살에 참여하지 않았다는 주장을 반증할 수 있는 증언이나 신뢰할 만한 문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건을 기각했다.[24] 크리스투카트는 2020년에 사망했다.[25]

4. 4. 하인츠 바르트 재판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관련된 무장 친위대(SS) 대원의 마지막 재판은 1983년에 열렸다. 전 ''SS-오버슈투름퓌러'' 하인츠 바르트는 동독에서 추적되었다. 바르트는 학살 당시 "''데어 퓌러''" 연대의 소대장으로 학살에 참여하여 45명의 SS 대원을 지휘했으며, 차고에서 20명의 남자를 사살하라는 명령을 내린 혐의 등으로 기소되었다. 베를린 시 법원 제1 상은 바르트에게 종신형을 선고했다. 그는 통일된 독일에서 1997년에 석방되었고, 2007년 8월에 사망했다.

4. 5. 베르너 크리스투카트 재판

2014년 1월 8일, 나치 독일의 무장 친위대 ''데어 퓌러'' 연대 제1대대 제3중대 소속이었던 베르너 크리스투카트(Werner Christukat)[21]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관련하여 독일 쾰른 주 법원에 의해 기소되었다. 당시 88세였던 그는 25건의 살인 혐의와 수백 건의 살인 방조 혐의를 받았다.[22] '베르너 C.'(Werner C.)로만 알려졌던 그는 2014년 3월 31일까지 혐의에 대해 답변해야 했다. 만약 재판이 진행되었다면, 학살 당시 그의 나이가 19세였기 때문에 소년 법원에서 열릴 수도 있었다. 그의 변호인 라이너 폴렌(Rainer Pohlen)은 크리스투카트가 학살 당시 마을에 있었다는 사실은 인정했지만, 살인 행위에 직접 가담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23] 그러나 2014년 12월 9일, 법원은 크리스투카트가 학살에 참여했다는 주장을 입증할 만한 증언이나 신뢰할 수 있는 문서 증거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사건을 기각했다.[24] 베르너 크리스투카트는 2020년에 사망했다.[25]

5. 기념 및 추모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샤를 드 골 당시 프랑스 임시정부 수반의 결정에 따라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은 재건되지 않고 나치 점령기 잔혹성의 증거이자 추모의 공간으로 보존되었다. 원래 마을의 폐허는 희생자들을 기리는 기념물로 남아 있으며, 인근에는 새로운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이 건설되어 현재에 이르고 있다.

학살의 기억을 보존하고 후세에 교훈을 전달하기 위해 1999년에는 자크 시라크 당시 프랑스 대통령 주도로 '오라두르 메모리 센터'(Centre de la mémoire d'Oradour프랑스어)가 마을 입구 근처에 세워졌다. 이 센터는 학살 관련 자료와 유물을 전시하며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되고 있다. 또한, 독일과 프랑스의 정상들이 이곳을 함께 방문하여 희생자들을 추모하고 과거사에 대한 반성의 뜻을 표하는 등[26], 오라두르쉬르글란은 전쟁의 비극을 기억하고 평화와 화해를 상징하는 중요한 장소로 자리매김했다.

5. 1. 오라두르 메모리 센터

기념관


전쟁 이후, 샤를 드 골 장군은 마을을 재건하는 대신 나치 점령의 잔혹성을 보여주는 기념관으로 남기기로 결정했다. 학살 현장 북서쪽에는 새로운 오라두르쉬르글란 마을(2012년 기준 인구 2,375명)이 세워졌다. 원래 마을의 폐허는 희생자들을 기리고 비슷한 비극을 기억하기 위한 기념 공간으로 보존되고 있다.

1999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순교자 마을' 입구 근처에 기념 박물관인 ''오라두르 메모리 센터''(Centre de la mémoire d'Oradour프랑스어)를 세웠다. 이 박물관에는 불탄 건물에서 수습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예를 들어, 주인이 산 채로 불타 숨졌을 때 멈춘 시계, 뜨거운 열에 녹아내린 안경, 다양한 개인 물품 등이 있다.

"시계. 일부는 화재의 열로 멈췄다. 이 시계들은 남성들이 희생된 시간인 오후 4시에서 5시 사이를 가리키고 있다."


2004년 6월 6일, 에서 열린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에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독일이 나치의 만행을 잊지 않을 것이라고 약속하며 특히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언급했다.

2013년 9월 4일,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와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가 오라두르쉬르글란의 폐허가 된 마을을 함께 방문했다. 두 정상의 방문 후 공동 기자회견이 열렸다.[26] 이는 독일 대통령이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진 제2차 세계 대전 당시 최대 규모의 학살 현장 중 하나를 방문한 첫 사례였다.[26]

2017년 4월 28일, 당시 프랑스 대통령 후보였던 에마뉘엘 마크롱은 오라두르쉬르글란을 방문하여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로베르 에브라를 만났다.[27] 학살 당시 18세였던 에브라는 2023년 97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28][29]

5. 2. 독일의 사과와 추모

1999년, 프랑스 대통령 자크 시라크는 학살 현장 인근에 기념 박물관인 ''오라두르 메모리 센터''(Centre de la mémoire d'Oradour프랑스어)를 헌정했다. 이 박물관에는 학살 당시 불에 탄 건물에서 수습된 유품들이 전시되어 있는데, 예를 들어 희생자들이 산 채로 불에 타 숨졌을 때 멈춘 시계, 고열에 녹아내린 안경, 그리고 여러 개인 물품들이 포함된다.

독일 정부 차원에서의 추모와 사과 표명도 이어졌다. 2004년 6월 6일, 에서 열린 노르망디 상륙 작전 기념식에 참석한 독일 총리 게르하르트 슈뢰더는 연설 중 오라두르쉬르글란을 직접 언급하며 독일이 나치의 만행을 결코 잊지 않을 것임을 강조했다.

이후 2013년 9월 4일에는 독일 대통령 요아힘 가우크가 프랑스 대통령 프랑수아 올랑드와 함께 오라두르쉬르글란의 폐허가 된 마을을 직접 방문했다. 이는 제2차 세계 대전 중 프랑스 영토에서 벌어진 최대 규모의 학살 현장 중 한 곳에 독일 국가원수가 방문한 첫 사례였다. 두 정상은 방문 후 공동 기자회견을 열어 추모의 뜻을 밝혔다.[26]

2017년 4월 28일에는 프랑스 대통령 후보였던 에마뉘엘 마크롱이 오라두르쉬르글란을 찾아 학살의 유일한 생존자였던 로베르 에브라를 만났다.[27] 당시 18세의 나이로 참극에서 살아남았던 에브라는 2023년 97세로 세상을 떠났다.[28][29]

6. 대중문화 속 오라두르쉬르글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은 텔레비전, 영화, 문학, 음악, 뮤지컬 등 다양한 대중문화 매체에서 중요한 소재로 다루어져 왔다. 각 매체는 이 비극적인 사건을 재조명하고 기억하려는 노력을 보여준다.

6. 1. 텔레비전

1973년부터 1974년까지 영국에서 방영된 다큐멘터리 텔레비전 시리즈 ''The World at War''에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이야기가 소개되었다. 이 시리즈의 내레이션은 로렌스 올리비에가 맡았다. 첫 번째 에피소드("새로운 독일", 1편)와 마지막 에피소드("기억", 26편)에서는 파괴된 마을의 모습을 헬리콥터 시점에서 보여주며, 희생자들의 사진이 묘비에 나타나는 장면도 포함되었다.

또한, 2010년 1월 7일에 방영된 시리즈 ''World War II in Colour''의 "오버로드" 에피소드에서도 이 학살이 언급되었다. 2015년 11월 27일에 방영된 ''히틀러의 죽음의 군대'' 2부에서도 학살을 다루었으며, 당시의 이미지와 현재의 폐허 모습을 함께 보여주었다.[30]

6. 2. 영화

1963년 체코슬로바키아 영화 Ikarie XB-1는 이 학살을 언급한다. 영화 속 한 등장인물은 20세기 인간 승무원을 “아우슈비츠, 오라두르, 히로시마를 뒤에 남겨둔 인간 쓰레기”라고 부른다.

1975년 프랑스 영화 Le vieux fusil은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31]

1989년 영국 영화 Souvenir 역시 이 학살을 소재로 한다. 영화는 나치가 저지른 만행에 가담했던 전직 독일 군인이 미국인으로 위장하고 오라두르쉬르글란으로 돌아가는 이야기를 다룬다. 학살 당시 그의 프랑스인 연인이 살해당했다는 설정이다. 이 영화는 데이비드 휴즈가 1984년에 출판한 소설 The Pork Butcher를 원작으로 한다.

장편 영화 ''Une Vie avec Oradour''는 2011년 9월 프랑스에서 개봉되었다.[32]

6. 3. 문학

1947년 소련의 작가이자 스탈린상 수상자인 일야 에렌부르크는 소설 ''The Storm''에서 실제 장소와 SS 부대를 언급하며 학살을 상세하게 묘사했다. 이 소설은 1948년 모스크바에서 영어로 출판되었고, 1949년 뉴욕에서도 출판되었다.[33]

1984년, 영국의 소설가 데이비드 휴즈는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과 폐허가 된 마을의 추모를 바탕으로 한 소설 The Pork Butchereng를 출판했다. 이 책은 1989년 영화 Souvenir의 원작이 되었다.

스코틀랜드 작가 이언 랭킨의 1998년 소설 The Hanging Garden|더 행잉 가든eng에서는 존 리버스 형사가 오라두르쉬르글란을 모델로 한 가상의 마을 빌프랑슈 달바레데 학살을 주도한 혐의를 받는 전쟁 범죄자 용의자를 조사한다.[34]

웨일스국가 시인인 길리안 클라크는 2009년 시집 A Recipe for Watereng에 수록된 "오라두르쉬르글란"과 "싱어"라는 두 편의 시를 통해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기렸다.[35]

2013년, 헬렌 와츠는 1944년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단편 소설 One Day in Oradoureng를 출판했다. 이 소설에서는 몇몇 등장인물과 지명의 이름이 변경되었으며, 일부 등장인물은 여러 실제 인물을 혼합하여 만들어졌다.

2015년, 에단 모덴은 1944년의 사건을 바탕으로 한 단편 소설 One Day in Franceeng를 출판했다. 이야기는 24시간 동안 오라두르와 인근 리모주를 오가며 진행되며, 허구의 등장인물을 역사적 기록에 맞춰 묘사한다.

미국 작가 케이트 퀸의 2017년 역사 소설 The Alice Networkeng의 줄거리에는 이 학살에 대한 언급이 포함되어 있으며, 실제 생존자인 마거릿 루팡셰가 조연으로 등장한다.

6. 4. 음악

Silent Planet의 2014년 노래 "Tiny Hands (Au Revoir)"는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을 다룬다. 이 노래는 교회 학살에서 유일하게 살아남은 마담 마거릿 루팡셰의 시각에서 학살을 묘사하고 있다.[36]

6. 5. 뮤지컬

2015년, 프리츠 슈티글러(대본)와 마티아스 랑게(음악)가 만든 독일 뮤지컬 ''마드모아젤 마리''가 공개되었다. 이 작품은 제2차 세계 대전 종전 후인 1955년을 배경으로, 오라두르쉬르글란 학살 생존자 후손들이 독일인에 대해 가지는 적대적인 감정과 그 속에서 피어나는 사랑 이야기를 다룬다. 독일 바이에른주의 카돌츠부르크 성 앞에서 열린 2015년 야외 공연에는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 온 관람객들도 참석했으며, 이들은 뮤지컬을 "화해와 관용의 메시지"라고 평가했다.[37] 2017년에는 오라두르쉬르글란의 새 마을에서 동일한 (대부분) 아마추어 극단에 의해 공연이 열렸다. 프랑스 관객들은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으며, 이 공연은 국제적 이해를 증진하는 행위로 칭찬받았다.[38]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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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Victime du Massacre (Mort pour la France) (643) https://gw.geneanet.[...]
[3] 웹사이트 Memorial to the kidnapping of Kämpfe on the N141 https://www.oradour.[...] 2023-07-05
[4] 서적 Oradour-sur-Glane, vision d'épouvante, ouvrage officiel du Comité national du souvenir et de l'Association nationale des familles de martyrs d'Oradour-sur-Glane Charles-Lavauzelle & Cie 1945
[5] 서적 Oradour Liana Levi 2001
[6] 서적 Petite histoire d'Oradour-sur-Glane : de la préhistoire à nos jours Imprimerie A. Bontemps 1989
[7] 웹사이트 Ramona Domínguez Gil, la 643e victime du massacre d'Oradour-sur-Glane ne sera plus jamais oubliée https://www.lepopula[...] Le Populaire du Centre 2023-02-12
[8] 서적 Comprendre Oradour. L'intégrale du parcours de mémoire : documentation, iconographie, témoignages. Centre de la Mémoire d'Oradour-sur-Glane 2000
[9] 서적 Enzyklopädie des Nationalsozialismus Klett-Cotta 1997
[10] 뉴스 Robert Hébras, dernier survivant du massacre d'Oradour-sur-Glane, est mort https://www.lemonde.[...] 2023-02-11
[11] 뉴스 Robert Hébras, Last Survivor of a 1944 Massacre in France, Dies at 97 https://www.nytimes.[...] 2023-02-26
[12] 문서 « Rubrique Valence d'Agen » Archives du Tarn-et-Garonne 2011-06-11
[13] 웹사이트 Order of Battle for Das Reich as of June 1944 http://www.oradour.i[...] Oradour.info 2012-1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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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웹사이트 Oradour-sur-Glane | France, Massacre, Map, & World War II | Britannica https://www.britanni[...] 2023-06-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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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7] 뉴스 Le Pen Aide Is Fired Over Holocaust Comments https://www.nytimes.[...] 2017-04-29
[28] 뉴스 Les 23 heures France Info 2023-0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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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 웹사이트 Hitlers Death Army – Das Reich https://www.natgeotv[...]
[31] 웹사이트 The Old Gun https://www.imdb.com[...] 2018-06-29
[32] 웹사이트 Une Vie avec Oradour http://www.allocine.[...]
[33] 웹사이트 Search results http://www.bookfin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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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5] 문서 A Recipe for Water Carcanet 2009
[36] 웹사이트 HM Exclusive: Silent Planet premieres 'Tiny Hands' https://hmmagazine.c[...] 2023-09-02
[37] 웹사이트 Mademoiselle Marie https://www.cadolzbu[...] 2023-07-17
[38] 웹사이트 Cadolzburger Musical rührt die Franzosen https://www.nordbaye[...] 2023-07-17
[39] 뉴스 Martyred Village https://www.nytimes.[...] 1999-01-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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