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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이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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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테오도어 아이케는 독일의 군인이자 나치 친위대(SS)의 고위 간부로,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한 후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경찰관으로 근무했다. 나치당에 가입하여 돌격대(SA)와 친위대에서 활동했으며, 1934년 '장검의 밤' 사건에 연루되어 SA 지도부를 숙청했다. 이후 다하우 강제 수용소 소장과 강제 수용소 감찰관을 역임하며 수용소 시스템을 개편했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사단을 지휘했으며, 1943년 하르코프 전투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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테오도어 아이케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테오도르 아이케
테오도르 아이케 친위대 대장, 1942년 4월 20일 이후 사진
본명테오도르 아이케
출생1892년 10월 17일
출생지알자스-로렌 앙퐁 (후딩겐), 독일 제국
사망1943년 2월 26일
사망 장소소련, 로조바 근처
사망 원인전투 중 사망
국적독일
군사 경력
소속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군종바이에른 육군
친위대
복무 기간1909년–1919년 (바이에른)
복무 기간 (친위대)1930년–1943년 (친위대)
최종 계급친위대 상급집단지도자
참전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주요 전투프랑스 공방전
바르바로사 작전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
지휘 경력다하우 강제 수용소
친위대 해골 부대
제3SS기갑사단 "해골"
서훈
주요 훈장백엽 기사 철십자 훈장
나치 당원 정보
나치 당원 번호114,901
친위대 번호2,921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아이케는 제1차 세계 대전에 참전하여 바이에른 왕국군 소속으로 여러 전투에서 활약했다.

기간내용
1909년 ~ 1913년란다우팔츠 지방바이에른 왕국군 제23 보병 연대에 지원병으로 입대
1913년 ~ 1914년바이에른 제3 기병 연대 배속, 주계관 견습(Zahlmeister Aspirant)
1914년 ~ 1916년바이에른 제22 보병 연대
1916년 ~ 1917년바이에른 제2 보병 포병 연대
1917년 ~ 1919년제2 바이에른 군단 제6 기관총 중대 배속, 주계관으로 근무, 1916년 하급 주계관(Unterzahlmeister) 승진



제1차 세계 대전철십자 훈장 2급을 받았고,[1] 1914년 12월 26일 베르타 슈베벨(Bertha Schwebel)과 결혼했다.[2] 1919년 제대 후 경찰관이 되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반감으로 나치당에 입당했다.

2. 1. 초기 생애

테오도어 아이케는 1892년 10월 17일, 당시 독일 제국의 엘자스-로트링겐 영토였던 샤토살랭 근처의 함퐁(1915년에 '후딩겐'으로 개명)에서 11명의 자녀를 둔 하위 중산층 가정의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역장이었다. 아이케는 학교에서 부진하여 졸업 전에 17세의 나이로 중퇴했다. 이후 바이에른 육군에 지원병으로 입대했고, 1913년에는 바이에른 제3 보병 연대로 전속되었다.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이케는 로렌 전역에 참전하여 1914년 제1차 이프르 전투와 1915년 제2차 이프르 전투에 모두 참전했으며, 1916년 베르됭 전투에서는 제2 바이에른 야포 연대에 배속되었다. 아이케는 서기, 군수참모 조수, 최전선 보병으로 복무했으며, 전쟁 중 철십자 훈장 2급을 받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이케는 전쟁의 대부분을 연대 군수참모로 후방에서 보냈다.

1914년 말, 아이케는 일메나우의 베르타 슈베벨과 결혼하기 위해 일시적으로 귀향 휴가를 가는 것이 허가되었고, 1914년 12월 26일에 결혼했다. 그와 베르타 슈베벨 사이에는 두 자녀가 있었는데, 1916년 4월 5일에 딸 이르마, 1920년 5월 4일에 아들 헤르만이 태어났다.

제1차 세계 대전이 끝난 후, 아이케는 바이마르 공화국의 국방군(Reichswehr)에서 육군 군수참모로 남아 있다가 1919년에 사임했다. 일메나우의 기술학교에서 공부를 시작했지만, 자금 부족으로 인해 곧 중퇴해야 했다. 1920년부터 경찰관으로서 경력을 쌓았으며, 처음에는 정보원으로, 나중에는 정규 경찰관으로 일했다. 아이케의 경찰 경력은 바이마르 공화국에 대한 공개적인 혐오와 폭력적인 정치 시위에 반복적으로 참여한 혐의로 1923년에 끝났다. 1923년 루트비히스하펜IG 파르벤에서 일자리를 얻어 1932년까지 "보안 담당자"로 그곳에 머물렀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1914년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아이케는 로렌 전역에 참전하여 1914년 제1차 이프르 전투1915년 제2차 이프르 전투에 모두 참전했으며, 1916년 베르됭 전투에서는 제2 바이에른 야포 연대에 배속되었다.[1] 아이케는 서기, 군수참모 조수, 최전선 보병으로 복무했으며, 전쟁 중 그의 용감함으로 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1]

기간내용
1909년 ~ 1913년란다우팔츠 지방을 기지로 삼았던 바이에른 왕국군 제23 보병 연대에 지원병으로 입대
1913년 ~ 1914년바이에른 제3 기병 연대에 배속, 주계관 견습(Zahlmeister Aspirant)이 됨
1914년 ~ 1916년바이에른 제22 보병 연대
1916년 ~ 1917년바이에른 제2 보병 포병 연대
1917년 ~ 1919년제2 바이에른 군단 제6 기관총 중대에 배속, 주계관으로 근무, 1916년에 하급 주계관(Unterzahlmeister)으로 승진



제1차 세계 대전철십자 훈장 2급을 수여받았다.[1] 대전 초기인 1914년 12월 26일에 베르타 슈베벨(Bertha Schwebel)과 결혼했다.[2]

3.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후 1919년 군에서 제대한 아이케는 경찰관이 되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 정책에 불만을 품고 극우 정당인 나치당에 가입했다. 1928년 2월 1일 에른스트 룀과 함께 돌격대(SA)에 합류했다.

1930년 8월 무장 친위대(SS)로 옮겨 1931년 말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SS 대령으로 승진했다. 1932년 바이에른에서 정적에게 폭탄 테러를 가해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치에 우호적인 변호사 프란츠 귀르트너의 도움으로 사면되었다.

1919년 제대 후, 일메나우 단과대학(Hochschule)에서 공학 기술을 배웠으나 경제적 이유와 과격한 정치 활동으로 쫓겨났다. 1919년 12월부터 1920년 7월까지 일메나우 경찰의 정보 업무를 보조했고, 1920년 7월부터 1921년까지 코트부스 도시 경찰학교(Schutzpolizeischule)에서 경부(Polizeikommissar) 시험에 "우수" 성적으로 합격했으나, 바이마르 공화국 타도를 목표로 하는 과격 시위에 참여하여 임용이 거부되었다.

바이마르 도시 경찰, 조라우(Sorau) 형사 경찰, 루트비히스하펜 경찰에서도 근무했지만, 반(反) 바이마르 공화국 활동으로 해고되었다. 1923년 2월 1일부터 루트비히스하펜IG 파르벤(IG Farben)사에서 정보 조사부 부장 대리로 산업 스파이 적발 업무를 담당하다 1932년 3월 6일 경찰에 체포되었다.

4. 나치당과 친위대 활동

1934년 1월 30일 SS 소령으로 승진했으며,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에서 요제프 디트리히의 SS 친위대와 함께 돌격대(SA) 지도부를 체포하고 7월 1일 SA의 총지도자였던 에른스트 룀을 총살했다.[1]

1935년부터는 소규모 강제수용소들을 설립하여 오스트리아 등지로 확대했으며, 1939년 3 SS기갑사단 토텐코프를 창설하고 자신이 지휘관이 되었다.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후, 토텐코프 사단은 바르샤바 전투와 바르바로사 작전동부 전선에서 활약했다.

1943년 2월 26일 제3차 하르코프 전투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오룔 남서부 1km 지점에서 전장을 정찰하다가 소련 공군기의 공격으로 격추되어 전사했다. 사후 조종사들과 SS가 시체를 발견했고, 아이케는 영웅으로 묘사되었다.

4. 1. 나치당 입당 및 초기 활동

제1차 세계 대전 때 제22바이에른 보병 연대에 입대해 철십자장을 받았으며 1919년 군대에서 나와 경찰관이 되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 정책에 불만을 품고 극우 우익 정당인 나치당에 1928년 12월 1일 당원 번호 114,901번으로 입당하였고, 에른스트 룀이 이끄는 나치당의 준군사 조직인 돌격대(SA)에도 가입했다.[3]

1930년 8월 무장 친위대(SS)로 전입해 2,921번으로 가입하여, 새로운 당원을 모집하고 바이에른 팔라티네이트에서 친위대 조직을 구축한 후 빠르게 승진했다. 1931년 말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SS 슈탄다르텐퓌러(대령) 계급으로 진급했다.[3] 1932년 바바리아에서 정치적 적에 대한 폭탄 테러 공격을 준비하다 2년 징역형을 선고받았으나, 나중에 아돌프 히틀러 밑에서 법무부 장관을 지낸 나치 동조자인 바이에른 법무부 장관 프란츠 귀르트너의 보호를 받아 형을 면하고 하인리히 히믈러의 명령에 따라 이탈리아로 도망갈 수 있었다.[3]

1932년 초, 그의 정치 활동은 고용주인 IG 파르벤의 관심을 끌었고, 이에 따라 그는 해고되었다. 당시 이탈리아는 베니토 무솔리니의 통치하에 이미 파시스트 국가였으며, 아이케는 힘믈러로부터 가르다 호수에서 "오스트리아 나치를 위한 테러 훈련소"를 운영하는 임무를 받았고, 심지어 "이탈리아 독재자 베니토 무솔리니를 안내"하는 특권을 누리기도 했다. 1932년 10월 28일, 그는 로마 진군 10주년을 기념하여 새로 건설된 볼차노 승전 기념비에서 이탈리아 파시스트들과 공식적으로 만났다.

4. 2. 독일 귀환 및 다하우 강제 수용소장 임명

1933년 3월, 아돌프 히틀러가 권력을 잡은 지 3개월도 채 되지 않아 아이케는 독일로 돌아왔다. 귀국 후 아이케는 가울라이터 요제프 뷔르켈과 정치적 갈등을 겪었고, 뷔르켈은 아이케를 체포하여 뷔르츠부르크의 정신 병원에 몇 달 동안 구금했다.[1] 정신 병원에 있는 동안 아이케는 명예를 훼손한 혐의로 하인리히 힘러에 의해 계급과 친위대원 자격을 박탈당했다.[2] 같은 달 힘러는 최초의 공식적인 강제 수용소다하우에 설립했는데, 히틀러는 이곳이 단순한 감옥이나 구류소가 아니기를 바란다고 밝혔다.[3] 1933년 6월, 정신 병원장이 힘러에게 아이케가 "정신적으로 불안정하지 않다"고 알린 후, 힘러는 아이케의 석방을 주선하고 그의 가족에게 선물로 200RM를 지급했으며, 그를 친위대에 복귀시키고 SS-''오버퓌러'' (선임 대령에 해당)로 승진시켰다.[4] 1933년 6월 26일, 힘러는 "처벌을 가장한" 몇몇 수감자 살해 사건 이후 다하우 수용소의 초대 소장인 SS-''슈투름반퓌러'' 힐마르 베커레를 상대로 제기된 불만 사항 및 형사 소송을 이유로 아이케를 다하우 강제 수용소소장으로 임명했다.[5] 아이케는 정규 부대를 요청했고 힘러는 이 요청을 수락하여 ''SS-보흐베르반데''(경비대)를 창설했다.[6]

4. 3. 장검의 밤 사건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으로 돌격대(SA) 참모총장 에른스트 룀이 체포되어 뮌헨의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투옥되었다. 7월 1일, 총통 아돌프 히틀러는 다카우 강제 수용소 소장이었던 아이케에게 룀을 처형하라는 명령을 내렸다.[1]

아이케는 부하인 미하엘 리펠트를 데리고 슈타델하임 형무소에 있는 룀의 독방을 찾아갔다. 이들은 히틀러의 지시에 따라 "룀 체포"를 알리는 나치당 기관지 『푈키셔 베오바흐터』와 자결용 탄알 한 발이 든 권총을 룀에게 건네주고 독방을 떠났다. 그러나 얼마 지나도 총성이 들리지 않자, 아이케와 리펠트는 다시 룀의 독방으로 돌아갔다.[1]

아이케는 리펠트에게 룀을 쏘라고 명령했고, 리펠트는 룀을 향해 두 발을 발사했다. 총에 맞은 룀이 바닥에 쓰러지면서 "나의 총통..."이라고 말하자, 아이케는 "당신은 더 빨리 그렇게 말했어야 했다..."라고 대답했다고 한다. 룀은 아직 숨이 붙어 있었고, 아이케 또는 리펠트가 룀의 가슴에 총알 한 발을 더 쏘아 확인 사살했다.[1]

5. 강제 수용소 감찰관

1933년 6월 26일, 하인리히 힘러다하우 강제 수용소의 초대 소장이었던 힐마르 베커레가 수감자 살해 혐의로 기소되자 아이케를 새 소장으로 임명했다.[1] 아이케는 정규 부대를 요청했고, 힘러는 이를 승인하여 ''SS-보흐베르반데''(경비대)를 창설했다.[1]

1934년 1월 30일, 아이케는 SS-여단지도자(독일 육군의 소장 및 미국 육군의 준장에 해당)로 진급하여 다하우 수용소를 재편성했다. 그는 독일 전역의 수용소 모델이 되는 시스템을 고안했는데, 엄격한 규율과 복종, 강화된 수용소 규정 및 처벌 규정을 확립했다.[1] 수감자와 경비병에게는 제복이 지급되었으며, 특히 청색과 흰색 줄무늬 파자마는 나치 강제 수용소의 상징이 되었다.[1] 수용소 경비병의 제복에는 특별한 "해골" 문장이 부착되었다.[1]

아이케의 개혁은 수용소의 무차별적인 잔혹 행위를 종식시켰지만, 새로운 규정은 매우 비인도적이었다. 사소한 범죄에도 가혹한 징계가 시행되었고, 아이케는 잔혹함으로 악명을 떨쳤다.[1] 그는 부하들에게 "부드러운 마음을 가진 SS 대원은 즉시 수도원으로 은퇴해야 한다"고 지시했다.[1] 역사학자 니콜라우스 바흐스만은 히믈러가 SS 수용소 시스템의 방향을 설정했지만, "그 강력한 동력이 된" 것은 아이케였다고 평가한다.[1]

1934년 초, 에른스트 룀 SA 참모총장의 쿠데타 우려가 제기되자, 히틀러는 룀과 SA 지도부를 제거하기로 결정했다. 1934년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에서 아이케는 제프 디트리히의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를 지원하여 SA 지휘관들을 체포하고 투옥하는 데 참여했다.[1] 룀이 체포된 후, 아이케는 룀에게 자살을 권유했으나 룀이 거부하자 1934년 7월 1일 아이케와 그의 부관 미하엘 리퍼트가 룀을 사살했다.[1]

1934년 7월 4일, 힘러는 아이케를 ''강제 수용소 감찰관''(Konzentrationslager, CCI)으로 임명하고, ''SS-Wachverbände''를 지휘하는 SS-''Gruppenführer'' 계급으로 진급시켰다.[1] 장검의 밤 사건 이후, SA가 운영하던 수용소는 SS에 의해 인수되었고, 1935년 다카우는 강제 수용소 서비스의 훈련 센터가 되었다.[1]

1935년, 아이케는 수용소 재편성을 시작했다. 1936년 3월 29일, 수용소 경비대와 행정 부대는 공식적으로 ''SS-토텐코프버밴데''(SS-TV, 해골 부대)로 지정되었고, 강제 노동 도입으로 수용소는 SS의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1] 아이케는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와 갈등했지만, 힘러의 지원으로 우위를 점했다.[1] 1936년 4월, 아이케는 ''SS-토텐코프버밴데''(해골 부대) 사령관으로 임명되었고, 병력은 3,222명으로 증가했다. 그는 히틀러 유겐트에서 미래 병력을 모집할 수 있었으며, 수용소 신병들에 대한 이념 및 군사 훈련을 강화했다.[1]

아이케는 소규모 수용소들을 해체하고 다하우 강제 수용소,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부헨발트, 라벤스브뤼크 등 대규모 수용소로 대체했다. 안슐루스 이후에는 마우트하우젠-구센 강제 수용소 등 새로운 수용소가 오스트리아에 세워졌다.[1] 1938년 8월경, 아이케의 지원 직원은 오라니엔부르크로 이동했고, 감찰 사무소는 1945년까지 그곳에 있었다.[1] 아이케의 역할은 그를 하이드리히의 SD 비밀 국가 경찰의 틀 안에 두었지만, 해골 부대 지휘는 그를 SS의 국가보안본부(RSHA)에 책임을 지게 했다.[1] 경비대와 수감자를 위한 SS 운영 수용소 규정은 아이케가 다하우에서 확립한 모델을 따랐다.[1]

아이케는 전국 강제 수용소를 다하우 강제 수용소, 작센하우젠 강제 수용소, 부헨발트 강제 수용소, 리히텐부르크 강제 수용소(:de:KZ Lichtenburg)에 집중 통합시켰다.[2] 또한 친위대 해골 부대를 확장하여 1937년 4월에 3개 해골 연대로 재편성했고, 1938년 오스트리아 병합 이후에는 오스트리아 강제 수용소 경비 부대로 4번째 해골 연대를 설립했다.[2]

아이케는 "반사회적"인 자들을 해골 부대원으로 널리 채용했다. 이들은 아이케의 명령에만 따랐으며, 친위대 규율은 거의 신경 쓰지 않았다.[3] 아이케는 군대적인 것을 싫어했기 때문에, 친위대 해골 부대는 친위대 내에서도 특수한 존재가 되었다.[4]

아이케는 해골 부대원들에게 죄수에게 엄격하게 대하도록 훈시했다. 루돌프 페르디난트 회스는 "국가의 적에게 동정심을 가진 자는 SS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아이케의 훈시를 받았다고 증언했다.[5] 한편, 독일 내무성과 보안 경찰은 SS의 과도한 행동을 경계했고, 아이케도 1937년 2월 죄수 학대 금지 명령을 내렸다.[6]

아이케는 제2차 세계 대전 개전 전까지 하인리히 힘러의 직속으로 강제 수용소를 자율적으로 운영했다.

6. 제2차 세계 대전과 무장친위대

제1차 세계 대전 때 제22바이에른 보병 연대에 입대해 철십자장을 받았으며 1919년 군에서 나와 경찰관이 되었다. 하지만 바이마르 공화국의 사회 정책에 불만을 품고 극우 우익 정당인 나치당에 들어가 1928년 2월 1일 에른스트 룀과 함께 돌격대(SA)에 합류했다.

1930년 8월 무장 친위대(SS)로 전입해 1931년 말까지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SS 대령으로까지 승진했다. 1932년 바바리아의 정적에 대한 폭탄 테러 공격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았으나 나치에 호의적이던 변호사 프란츠 귀르트너의 도움으로 사면되었다.

1933년 3월 다시 SS로 와 권력 싸움을 하다 체포되어 정신 병동에 감기기도 했으나 히믈러의 도움으로 1934년 1월 30일 SS 소령이 되고 6월 30일 장검의 밤 사건을 통해 본격적으로 등장했다. 요제프 디트리히의 SS 친위대와 함께 SA의 지도부들을 체포하고 7월 1일 SA의 총지도자던 에른스트 룀을 총으로 쏴 살해했다.

1940년까지 오스발트 폴 휘하 ''SS-하웁트암트 페르발퉁 운트 비르츠샤프트''(SS 행정 및 비즈니스 사무소)의 행정 통제를 받았다. 1942년, 폴 휘하 통합된 ''SS-경제행정본부''(SS Economic and Administrative Department; WVHA)의 ''Amt D''(사무소 D)가 되었다. 전체 강제 수용소 시스템은 WVHA의 권한 하에 놓였고, 강제 수용소 감찰관은 WVHA 책임자의 부하가 되었다. 폴은 아이케에게 그가 도입한 지휘 구조가 게슈타포 또는 SD의 관할에 속하지 않을 것이라고 확신했다. CCI와 ''Amt D''는 수용소 수용 및 석방에 관해서만 SD와 게슈타포에 종속되었으며, 수용소 내의 일은 ''Amt D''의 지휘를 받았다.

SS 토텐코프 사단은 동부 전선에서 가장 효과적인 독일 부대 중 하나가 되었으며, 1941년 소련 침공, 1942년 하계 공세, 하르코프 점령, 데미얀스크 포위전, 비스툴라-오데르 공세, 1945년 부다페스트 전투 등에서 전투를 치렀다. 아이케와 그의 사단은 효과뿐만 아니라 잔혹함과 전쟁 범죄로도 알려졌는데, 1940년 서부 전선 르 파라디 학살에서 영국 전쟁 포로 97명을 살해한 사건이 포함된다. 또한 이 사단은 포로가 된 소련 군인들을 자주 살해하고 소련 마을에서 광범위한 약탈을 자행한 것으로 알려졌다.

6. 1.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 사단장

1935년부터 아이케는 작은 강제수용소들을 설립하여 오스트리아 등지로 확대했다. 1939년 제3SS기갑사단 토텐코프를 창설하고 자신이 지휘관이 되었다.[6] 제2차 세계 대전의 발발로 토텐코프 사단은 바르샤바 전투와 바르바로사 작전동부 전선에서 활약하게 된다.

1941년 소련에서 아이케와 SS 토텐코프 사단.


1939년 제2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토텐코프의 자매 부대인 SS-기계화보병연대 (mot) "라이프슈탄다르테 SS 아돌프 히틀러"와 SS-''Verfügungstruppe'' (SS-VT)의 세 개 슈탄다르테의 성공으로 1939년 10월까지 세 개의 추가 무장친위대 사단이 창설되었다. 아이케는 제1(''오버바이에른''), 제2(''브란덴부르크'') 및 제3(''튀링겐'') ''슈탄다르텐'' (연대)의 강제 수용소 경비병과 SS 하이무어 ''단치히''의 병력으로 구성된 새로운 사단인 SS 토텐코프 사단의 사령관이 되었다. 아이케가 전투 임무를 맡게 되자, 그의 부관 리하르트 글뤽스가 하인리히 히믈러에 의해 새로운 CCI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1943년 2월 초, 에리히 폰 만슈타인 원수의 남부 집단군에 합류하여 동부 전선에 복귀했다. 그러나 제3차 하르코프 전투 개전 직후 오룔 근교를 정찰 비행 중 탑승했던 Fi 156가 격추되어 전사했다.

6. 2. 죽음

1943년 2월 26일 제3차 하르코프 전투 당시 소비에트 연방의 오룔 남서쪽 1km 지점에서 전장을 정찰하다가 소련 공군기들의 공격으로 격추되어 전사했다. 사후 조종사들과 SS가 시신을 발견했고 그는 영웅으로 묘사되었다.[6]

테오도어 아이케는 1943년 2월 26일, 제3차 하르코프 전투 초반에 피젤러 Fi 156 슈토르히 정찰기가 적군의 대공포에 의해 격추되면서 사망했다. 당시 그는 하르코프 남쪽 105km 떨어진 로조바 인근의 아르틸네와 미콜라이우카 마을 사이에서 사망했다. 아이케는 추축국 언론에서 영웅으로 묘사되었으며, 사망 직후 그의 업적을 기리기 위해 토텐코프의 보병 연대 중 하나가 "테오도어 아이케"라는 완장을 받았다. 아이케는 처음에는 우크라이나 하르키우주의 오디흐네(Оддихне) 마을 근처 독일 군 묘지에 묻혔다. 독일군이 적군의 반격으로 후퇴하게 되자, 하인리히 히믈러는 아이케의 시신을 우크라이나 헤게발트의 지토미르 남쪽에 있는 묘지로 옮겼다. 아이케의 시신은 우크라이나에 남겨졌으며, 소련군이 독일군 묘지를 파괴하는 것이 관례였으므로 소련군에 의해 불도저로 밀렸을 가능성이 높다.

7. 유산 및 평가

아이케는 거칠고 냉담한 성격이었지만, 경력을 고려하면 의외로 전투 지휘 능력이 뛰어났으며, 부하들로부터는 "파파"라는 애칭으로 친근하게 불렸다. 신장은 173cm였다.[7]

8. 계급 변천

날짜계급
1928년 8월 28일돌격대 조장 (SA-Truppführer)
1930년 7월 29일친위대 이등병 (SS-Mann)
1930년 8월 20일친위대 조장 (SS-Truppführer)
1930년 11월 27일친위대 소위 (SS-Sturmführer)
1931년 2월 15일친위대 소령 (SS-Sturmbannführer)
1931년 11월 15일친위대 대령 (SS-Standartenführer)
1932년 10월 21일친위대 상급대령 (SS-Oberführer)
1933년 4월 3일친위대 이등병 (SS-Mann)
1933년 6월 26일친위대 상급대령 (SS-Oberführer)
1934년 1월 30일친위대 소장 (SS-Brigadeführer)
1934년 7월 11일친위대 중장 (SS-Gruppenführer)
1939년 11월 14일친위대 특무부대 중장 (Generalleutnant der Verfügungstruppe)
1942년 4월 20일친위대 대장 및 무장친위대 대장 (SS-Obergruppenführer und General der Waffen-SS)


9. 수훈 내역

수여일훈장 및 약장
1914년Eisernes Kreuz|철십자장de 2급[8]
1940년 5월 26일Spange zum Eisernen Kreuz|철십자장 부장de (1939) 2급[8]
1940년 5월 31일Eisernes Kreuzde (1939) 1급[8]
1941년 12월 26일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기사철십자장de[8]
1942년 4월 20일Eichenlaub zum Ritterkreuz des Eisernen Kreuzes|백엽 기사철십자장de[8]
1941년Verwundetenabzeichen|부상장de 은장[8]
1942년Winterschlacht im Osten 1941/42|1941/1942년 동계 동부 전선 종군 메달de[8]
?Medaille zur Erinnerung an den 13. März 1938|1938년 3월 13일 기념 메달de[8]
?Medaille zur Erinnerung an den 1. Oktober 1938|1938년 10월 1일 기념 메달de[8]
?Bayerische Militärverdienstkreuzes|바이에른 군공 십자장de 3급 (제1차 세계 대전 중)[8]
?Bayerische Militärverdienstkreuzes|바이에른 군공 십자장de 2급 (제1차 세계 대전 중)[8]
?Braunschweigisches Kriegsverdienstkreuz|브라운슈바이크 전쟁 공로 십자장de 2급 (제1차 세계 대전 중)[8]
1934년Ehrenkreuz für Frontkämpfer|명예 십자장de 전선 참전자장[8]
1937년 12월 1일Totenkopfring der SS|친위대 명예 링de[8]
1937년 12월 1일Ehrendegen des Reichsführers-SS|친위대 전국 지도자 명예 장검de[8]
1940년 1월 30일Goldenes Parteiabzeichen der NSDAP|황금 나치 당원 배지de[8]
?SA-Sportabzeichen|SA 스포츠 배지de 동장[8]
?Dienstauszeichnung der NSDAP|나치당 근속장de 동장[8]
?Dienstauszeichnung der NSDAP|나치당 근속장de 은장[8]
?SS-Dienstauszeichnung|친위대 근속장de[8]


참조

[1] 서적 SSの歴史 髑髏の結社
[2] 서적 武装親衛隊1935-45 リイド社
[3] 서적 SSの歴史 髑髏の結社
[4] 서적 SSの歴史 髑髏の結社
[5] 서적 SSの歴史 髑髏の結社
[6] 서적 武装親衛隊1935-45 リイド社
[7] 서적 Leaders of the SS & German Police, Volume I
[8] 서적 Leaders of the SS & German Police, Volume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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