게오르크 폰 퀴흘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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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게오르크 폰 퀴흘러는 독일의 군인으로, 제1차 세계 대전과 제2차 세계 대전에 참전했다. 1881년에 태어나 제1차 세계 대전에서 포병대대 지휘관으로 복무했으며, 솜 전투, 베르됭 전투, 샹파뉴 전투 등에 참전하여 철십자 훈장을 받았다. 제2차 세계 대전 중에는 독일 제3군 사령관으로 폴란드 침공에 참여했고, 네덜란드 침공, 독소 전쟁에 참전하여 북방 집단군 사령관을 역임했다.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원수로 진급했다. 전쟁 범죄 혐의로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고, 1953년 석방 후 196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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게오르크 폰 퀴흘러 - [인물]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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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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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생명 | 게오르크 카를 빌헬름 프리드리히 폰 퀴흘러 |
출생 | 1881년 5월 30일 |
출생지 | 독일 제국 프로이센 왕국 헤센나사우 하නා우 필립스루에 성 |
사망 | 1968년 5월 25일 |
사망지 | 서독 바이에른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 |
군사 경력 | |
소속 | 독일 제국 바이마르 공화국 나치 독일 |
복무 기간 | 1900년 – 1944년 |
최종 계급 | 원수 |
지휘 | 제18군 북부 집단군 |
참전 | 제1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 네덜란드 전투 프랑스 전투 바르바로사 작전 레닌그라드 포위전 류반 공세 작전 시냐비노 공세 |
수상 | |
훈장 | 1914년 철십자 훈장 1급 호엔촐레른 가 훈장 프리드리히 훈장 철십자 약장 한자 십자장 함부르크 기사 철십자 훈장 |
2. 초기 생애 및 제1차 세계 대전
게오르크 폰 퀴흘러는 1881년 5월 30일 슐로스 필립스루에에서 프로이센 융커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1900년 독일 제국군에 포병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제25야전포병연대에 배속되었고, 이듬해 중위로 임관되었다. 1907년 군 기마학교에 배속될 때까지 연대에 남아 있었으며, 1910년 소위로 진급하여 3년 동안 프로이센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 1913년 졸업 후 베를린 대본영에 합류했다.[1]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퀴흘러는 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대위로서 포병대대 지휘를 맡았다.[1] 솜 전투, 베르됭 전투, 샹파뉴 지방 전투에 참전했으며,[2] 서부 전선 도착 몇 달 만에 1급 및 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3]
전선 복무 후 제4군단과 제8군단에서 참모 임무를 수행했고, 1916년 말 제206보병사단 작전 참모 장교였다. 전쟁 후반 독일로 돌아와 제8예비사단에서 비슷한 직책을 맡았다. 종전 무렵 발트해 사단 사령관 루디거 폰 데어 골츠의 참모로 복무했고,[2] 휴전 후에도 발트 지역에 남아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폴란드에서 적군과 싸웠다.[2]
2. 1. 초기 생애
게오르크 폰 퀴흘러는 1881년 5월 30일 슐로스 필립스루에에서 프로이센 융커 가문 출신으로 태어났다. 1900년 독일 제국군에 포병 사관후보생으로 입대하여 제25야전포병연대에 배속되었고, 이듬해 중위로 임관했다.[1] 1907년까지 연대에 남아 군 기마학교에 배속되었다가, 1910년 소위로 진급하여 3년 동안 프로이센 군사학교에서 수학했다.[1] 1913년 졸업 후 베를린의 대본영에 합류했다.[1]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퀴흘러는 서부 전선으로 파견되어 포병대대 지휘를 맡았다. 그는 솜 전투, 베르됭 전투, 샹파뉴 지방 전투에 참전했으며,[2] 서부 전선 도착 몇 달 만에 1급 및 2급 철십자훈장을 받았다.[3]
전선 복무 후 퀴흘러는 제4군단과 제8군단에서 참모 임무를 수행했고, 1916년 말에는 제206보병사단의 작전 참모 장교였다.[2] 전쟁 후반에는 독일로 돌아와 제8예비사단에서 비슷한 직책을 맡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 발트 해 사단 사령관 루디거 폰 데어 골츠의 참모로 복무했고,[2] 휴전 후에도 발트 지역에 남아 자유군단에 합류하여 폴란드에서 적군과 싸웠다.[2]
19세에 제1 헤센 대공 야전포병연대에 입대하여 이듬해 소위로 임관하고 하노버의 기병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1910년에 중위로 진급했고, 프로이센 육군대학교에서 수학한 후 1914년 초 베를린의 프로이센 참모본부 부속으로 전속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에서는 중대장을 역임하여 1급 철십자훈장을 수훈하고 대위로 진급했다. 그 후 참모본부 부속을 거쳐 종전까지 제206보병사단과 제9예비보병사단의 참모장을 역임했다.
종전 직후에는 "쿠를란트" 여단 참모로서 발트 3국에서의 분쟁에 참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에서도 군에 남아 제1군단 참모로 전속되었다. 1920년에 국방성 교육부에 단기간 근무한 후, 1920년대를 다양한 교육 부문의 직책에서 보냈다. 1923년에 소좌, 1929년에 중좌, 1931년에 대좌로 진급했다. 1932년 10월, 동프로이센의 포병 사령관에 취임했다. 1934년 4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후, 사관학교 감찰관을 역임했다.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년간 군사재판소 부총재를 거쳐, 1937년에 포병대장으로 진급하고 동프로이센 제1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위협하여 할양받은 클라이페다(메멜) 지역으로 진주했다.
2. 2.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퀴흘러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서부 전선에 배치되었다. 대위로서 포병 대대를 지휘했으며, 솜 전투, 베르됭 전투, 샹파뉴 지방 전투에 참전했다.[1][2] 서부 전선에 도착한 지 몇 달 만에 1급과 2급 철십자 훈장을 모두 받았다.[3]전선 복무 후, 퀴흘러는 제4군단과 제8군단에서 참모 임무를 수행했다. 1916년 말에는 제206보병사단의 작전 참모 장교였다.[1] 전쟁 후반에는 독일로 돌아와 제8예비사단에서 비슷한 직책을 맡았다. 전쟁이 끝날 무렵에는 발트해 사단 사령관 루디거 폰 데어 골츠의 참모로 복무했다.[1]
3. 전간기
퀴흘러는 제1차 세계 대전 이후에도 군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군에서 복무했다. 동프로이센 군관구에서 복무하다가 제5포병연대의 포대장을 맡았고, 1924년 소령으로 진급한 후 뮌스터 사령관, 국방부 학교 감찰관 등을 역임했다. 1931년 상급대좌로 진급했고, 이듬해 제1보병사단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소장으로 진급하여 사단장이 되었고, 다음 해에는 중장으로 진급하여 육군학교 감찰관을 맡았다.
1938년 퀴흘러는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베르너 폰 프리치를 실각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이후 포병대장으로 진급하여 동프로이센을 관할하는 제1군관구 사령관이 되었다. 이 지역은 폴란드에 거의 둘러싸여 있어 방어가 어려운 곳이었다. 1939년 3월, 퀴흘러의 부대는 리투아니아의 메멜(현재 클라이페다)로 진군했다. 메멜은 과거 독일 제국의 영토였으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리투아니아에 속하게 되었는데,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리투아니아는 이 도시를 다시 독일에 할양했다.[1]
3. 1. 바이마르 공화국 시기
전쟁 후 퀴흘러는 전후 라이히스베어(Reichswehr)에 남았다. 그는 처음에는 동프로이센 군관구(Wehrkreis I)에서 복무하다가 제5포병연대의 포대장을 맡았다. 1924년 소령(Major)으로 진급한 그는 한때 뮌스터의 사령관을 역임한 후 국방부에서 학교 감찰관으로 근무했다. 1931년까지 그는 상급대좌(Oberst) 계급에 올랐고, 이듬해에는 나중에 제1보병사단(1st Infantry Division)이 될 사단의 부사령관이 되었다. 1934년 10월에는 사단장으로 승진하여 사단장을 역임했다. 소장(Generalmajor) 계급은 미국 육군의 준장(brigadier general)에 해당하는 계급이었다. 다음 해에는 중장(Generalleutnant)으로 승진하여 육군학교 감찰관이라는 새로운 보직을 맡았다.1938년 퀴흘러는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베르너 폰 프리치를 실각시키는 것을 지지했다.[1] 이 시기에 퀴흘러는 포병대장(General of Artillery)이자 제1군관구 사령관이었다.[1] 이곳은 동프로이센을 관할하고 폴란드에 거의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직책이었다.[1] 그의 업무는 대부분 지역 방어력 향상에 있었지만 1939년 3월 그의 부대는 리투아니아의 메멜(현재 클라이페다(Klaipėda))로 진군했다.[1] 이전에 독일 제국에 속했던 메멜은 제1차 세계 대전 후 리투아니아에 할양되었지만,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 도시를 할양했다.[1]
종전 직후에는 "쿠를란트" 여단 참모로서 발트 3국에서의 분쟁에 참전했다. 바이마르 공화국 하에서도 군에 남아 제1군단 참모로 전속되었다. 1920년에 국방성 교육부에 단기간 근무한 후, 1920년대를 다양한 교육 부문의 직책에서 보냈다. 1923년에 소좌, 1929년에 중좌, 1931년에 대좌로 진급했다. 1932년 10월, 동프로이센의 포병 사령관에 취임했다. 1934년 4월에 소장으로 진급한 후, 사관학교 감찰관을 역임했다. 이듬해 중장으로 진급했다. 반년간 군사재판소 부총재를 거쳐, 1937년에 포병대장으로 진급하고 동프로이센 제1군단 사령관에 임명되었다. 1939년 3월, 나치 독일이 리투아니아를 위협하여 할양받은 클라이페다(메멜) 지역으로 진주했다.[2]
3. 2. 나치 독일 시기
1938년 퀴흘러는 아돌프 히틀러가 베르너 폰 블롬베르크와 베르너 폰 프리치를 실각시키는 것을 지지했다. 이 시기에 퀴흘러는 포병대장이자 제1군관구 사령관이었다. 제1군관구는 동프로이센을 관할하고 폴란드에 거의 둘러싸여 있었기 때문에 어려운 직책이었다. 그의 업무는 대부분 지역 방어력 향상에 있었지만, 1939년 3월 그의 부대는 리투아니아의 메멜(현재 클라이페다)로 진군했다. 메멜은 이전에 독일 제국에 속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후 리투아니아에 할양되었지만, 나치 독일의 압력으로 리투아니아 정부는 이 도시를 할양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퀴흘러는 제3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어 폴란드 침공 작전에 참여했고, 이후 제18군을 이끌고 네덜란드 침공과 독소 전쟁 초기 바르바로사 작전에 참전했다. 그는 빌헬름 폰 레프의 뒤를 이어 북방군 집단 사령관이 되어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지휘하기도 했다.
퀴흘러는 나치의 인종 정책을 지지했으며, 소련에 대한 말살전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그는 점령지에서 정신 장애인을 학살하는 데 직접적으로 관여하기도 했다.[1] 1940년 2월 22일, 퀴흘러는 "총독부에서 벌어지고 있는 인종 투쟁, 예를 들어 폴란드 소수 민족, 유대인, 그리고 교회 문제와 관련된 것들에 대한 비판"을 중단하라는 명령을 내렸다. 그의 명령은 "최종 인종 해결책"이 독특하고 가혹한 조치를 필요로 한다고 설명했다.
퀴흘러의 부대는 이후 벨기에 왕국으로 이동하여 1940년 5월 18일 앤트워프를 점령했다.
1944년 1월, 소련군이 레닌그라드 포위망을 돌파하자 히틀러에 의해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이후 군 지휘를 맡는 일은 없었다.
4. 1. 폴란드 침공
제2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퀴흘러의 사단 사령부는 제3군으로 지정되었다. 그는 7개의 보병 사단, 켐프 기갑사단(Panzer Division Kempf)과 4개의 여단 규모 사령부를 지휘하게 되었다.[1] 폴란드 침공 당시 퀴흘러의 일부 부대는 단치히를 점령했고, 그의 주력 부대는 폴란드 모들린 군을 공격했다. 약 1만 명의 포로를 확보한 켐프 기갑사단은 바르샤바 근처 50마일 이내에 있었지만, 제3군의 다른 부대와 함께 폴란드 동부로 이동했다. 퀴흘러의 부대는 그 지역의 폴란드 부대를 격파한 후 소련군과 합류했다. 폴란드 전역이 끝난 후 폴란드에 주둔하고 있던 퀴흘러는 북부 국경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며, 이 공로로 기사철십자장을 수훈했다.[1]퀴흘러는 유대인과 폴란드 민간인을 박해하는 데 병사들을 사용하는 것을 거부하며 동프로이센의 가우라이터(Gauleiter) 에리히 코흐에게 "독일군은 살인 집단을 위한 공급자는 아니다"라고 설명했다.[1] 이로 인해 하인리히 힘러는 격분했고 퀴흘러는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1] 9월 22일 바르샤바 외곽에서 전 육군 총사령관 베르너 폰 프리치가 전사하여 장례식이 거행되었을 때, 프리치의 해임(프롬베르크 사건)을 비판하는 발언을 했기 때문에 다시 한번 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다. 그러나 육군 총사령관 발터 폰 브라우히치의 개입으로 곧 제18군 사령관으로 임명되었다.
4. 2. 네덜란드 침공
1940년 5월 10일, 독일군은 펠 황색 작전의 일환으로 네덜란드를 침공했다. 육군 총사령관 브라우히치가 침공 명령을 내렸으며, 선전포고는 없었다.[2] 독일 공군은 네덜란드 비행장과 기타 목표물에 폭격을 가했고, 특히 로테르담은 4일간의 파괴적인 공격으로 구시가지 전체가 파괴되었다. 독일 지상군은 폭격 직후 낙하산 부대를 선두로 네덜란드에 진입했다.[3]페도어 폰 보크 장군 휘하의 제18군을 지휘한 퀴흘러는 모어다이크, 로테르담, 헤이그에서 네덜란드군을 격파했다.[4] 며칠 간의 전투 후, 1940년 5월 14일 네덜란드 육군 총사령관 앙리 제라르트 윙켈만 장군은 스헬데 강 북동쪽 지역, 즉 네덜란드 대부분 지역의 군대를 항복시켰다. 퀴흘러는 레이스오르트에서 윙켈만이 이끄는 네덜란드 군사 대표단을 만나 베어마흐트를 대표하여 네덜란드 항복 문서에 서명하는 것을 지켜보았다.[5]
4. 3. 독소 전쟁
퀴흘러는 소련에 대한 계획된 말살전(Vernichtungskrieg)을 적극 지지했다. 1941년 3월 히틀러와 만나 바르바로사 작전을 계획한 후, 1941년 4월 25일 사단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우리는 사상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러시아와 깊은 심연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러시아는 영토 규모만으로도 아시아 국가입니다…총통은 독일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금년 안으로 러시아와의 분쟁을 강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이 동쪽의 위협적인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여러 세대 동안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러시아를 약간 밀어붙이는 것, 또는 수백 킬로미터를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목표는 유럽 러시아를 말살하고 유럽에서 러시아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Wir sind von Rußland durch einen tiefen Abgrund der Weltanschauung und der Rasse getrennt. Rußland ist schon allein durch die Weite seines Raumes ein asiatischer Staat… Der Führer wünscht nicht, die Verantwortung für Deutschlands Dasein auf spätere Geschlechter abzuwälzen, sondern hat sich entschlossen, den Kampf noch in diesem Jahr zu erzwingen. Wenn Deutschland viele Generationen in Sicherheit und Ruhe vor der drohenden Gefahr aus dem Osten leben will, so kann es sich nicht darum handeln, Rußland ein Stück, etwa ein paar hundert Kilometer, zurückzudrängen, sondern das Ziel muß die Vernichtung des europäischen Rußlands, die Auflösung des russischen Staates in Europa sein.de [5]
퀴흘러는 계속해서 적군 정치장교들을 "범죄자"라고 부르며 모두 사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바르바로사 작전 기간 동안, 제18군은 북서부 전선의 소련군이 레닌그라드로 후퇴한 후 오스트로프, 프스코프로 진격했다. 1941년 7월 10일 오스트로프와 프스코프가 함락되었고 제18군은 나르바와 킹기세프에 도달하여 루가 강 방어선에서 레닌그라드로의 진격을 계속했다. 이로 인해 핀란드만에서 라도가 호까지 포위 지점이 형성되어 결국 레닌그라드를 모든 방향에서 고립시키는 것을 목표로 했다.[6]
퀴흘러는 점령된 소련에서 정신 장애인 살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1941년 12월 그의 명시적인 동의하에 SD 부대가 러시아 마카리예보 마을에서 정신병 환자 240명을 사살했다.
1942년 1월 17일 퀴흘러는 레브 원수가 지휘관직에서 해임된 후 북방군 집단 사령관으로 그를 계승했다. 퀴흘러는 1941년 12월부터 1944년 1월까지 북방군 집단을 지휘하며 레닌그라드 포위전을 유지했다. 1942년 6월 30일 히틀러는 퀴흘러를 원수로 승진시켰다.
1944년 1월 31일 히틀러 본부로 소환된 퀴흘러는 지휘관직에서 해임되었고 발터 모델 대장이 그를 대신했다. 모델은 3월까지 상황을 안정시켰지만, 그것은 제18군의 잔여 병력을 페촐 호수 서쪽으로 철수시킨 것에 불과했다. 한편 퀴흘러는 은퇴했다. 그는 칼 프리드리히 괴르델러와 요하네스 포피츠의 반 히틀러 운동 참여 제안을 거절했다.
4. 4. 전쟁 범죄
퀴흘러는 소련에 대한 계획된 말살전(Vernichtungskrieg)을 적극 지지했다. 1941년 3월 히틀러와 만나 바르바로사 작전을 계획한 후, 1941년 4월 25일 사단장들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Wir sind von Rußland durch einen tiefen Abgrund der Weltanschauung und der Rasse getrennt. Rußland ist, schon durch die Weite des Raumes, ein asiatischer Staat… Der Führer wünscht nicht, die Verantwortung für Deutschlands Dasein auf spätere Geschlechter abzuwälzen; er hat sich zum Handeln, zum Kampf mit Rußland noch in diesem Jahr, entschlossen. Wenn Deutschland für viele Generationen, sicher vor der drohenden Gefahr aus dem Osten, leben will, so darf es sich nicht darum handeln, Rußland ein Stück, etwa nur um einige hundert Kilometer, zurückzudrängen. Das Ziel muß sein: Vernichtung des europäischen Rußlands, Auflösung des russischen Staates in Europa.de
우리는 사상적으로나 인종적으로 러시아와 깊은 심연으로 분리되어 있습니다. 러시아는 영토 규모만으로도 아시아 국가입니다…총통은 독일의 존재에 대한 책임을 다음 세대에게 떠넘기기를 원하지 않습니다. 그는 금년 안으로 러시아와의 분쟁을 강행하기로 결정했습니다. 독일이 동쪽의 위협적인 위험으로부터 안전하게 여러 세대 동안 평화롭게 살기를 원한다면, 러시아를 약간 밀어붙이는 것, 또는 수백 킬로미터를 밀어붙이는 것만으로는 안 됩니다. 목표는 유럽 러시아를 말살하고 유럽에서 러시아 국가를 해체하는 것이어야 합니다.한국어
퀴흘러는 계속해서 적군 정치장교들을 "범죄자"라고 부르며 모두 사살해야 한다고 말했다.
퀴흘러는 점령된 소련에서 정신 장애인 살해에 직접적으로 관여했다. 1941년 12월 그의 명시적인 동의하에 SD 부대가 러시아 마카리예보 마을에서 정신병 환자 240명을 사살했다.
전후 퀴흘러는 전쟁 범죄자로서 뉘른베르크 후속 재판 중 하나인 국방군 최고 사령부 재판에 회부되어 징역 20년형을 선고받았다. 나중에 12년으로 감형되어 1953년 바이에른주의 란츠베르크 교도소에서 출소했다.
5. 전후
퀴흘러는 1953년 2월 석방된 후 가르미슈 지역에서 아내와 함께 여생을 보냈다. 1968년 5월 25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사망했다.[3]
5. 1. 재판 및 수감
제2차 세계 대전이 끝나자 퀴흘러는 미군에 체포되었다. 그는 뉘른베르크 계속 재판의 일부인 최고 사령부 재판을 받았다. 소련군 포로 학대에 대한 증언에서 퀴흘러는 포로수용소의 상황이 열악했음을 인정했지만, 주된 원인은 1941년에서 1942년의 혹독한 겨울이었으며, 이를 "신의 뜻"이라고 주장했고, 군대가 포로들에게 더 많은 물자를 받기 위해 포로 사망자 수를 과장했다고 주장했다.[1]1948년 10월 27일, 퀴흘러는 소련에서 저지른 전쟁 범죄 및 반인륜 범죄로 20년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형은 "펙 패널"에 의해 재검토되어 1951년 12년으로 감형되었다.[2] 그는 1953년 2월에 석방되어 가르미슈 지역에서 아내와 함께 살았다. 그는 1968년 5월 25일 가르미슈파르텐키르헨에서 사망했다.[3]
6. 서훈 내역
수여 국가 | 훈장 이름 | 등급 | 수여 날짜 | 비고 |
---|---|---|---|---|
프로이센 왕국 | 철십자훈장 | 2급 | 1914년 11월 20일 | [11] |
프로이센 왕국 | 철십자훈장 | 1급 | 1915년 1월 8일 | [11] |
프로이센 왕국 | 호엔촐레른 왕가 훈장 | 검이 달린 기사십자훈장 | 1917년 7월 11일 | [7] |
프로이센 왕국 | 성 요한 훈장(브란덴부르크 관구) | 명예기사 | 1917년 3월 10일 | [7] |
안할트 공국 | 프리드리히 십자훈장 | 1916년 6월 1일 | [7] | |
함부르크 | 한자 십자훈장 | 1917년 8월 6일 | [7] | |
헤센 대공국 | 용감한 자를 위한 훈장 (헤센 총훈장) | 1915년 1월 5일 | [7] | |
뷔르템베르크 왕국 | 프리드리히 훈장 | 검이 달린 1급 기사훈장 | 1916년 8월 | [7] |
바이마르 공화국 | 발트 십자훈장 | 1919년 7월 | [7] | |
나치 독일 | 1914/1918년 세계 대전 명예 십자훈장 | 전투원용 | 1935년 1월 15일 | [7] |
나치 독일 | 국방군 근무장 | 4급~1급 | 1936년 10월 2일 | |
나치 독일 | 철십자훈장 | 2급 클래스프 | 1939년 9월 11일 | [11] |
나치 독일 | 철십자훈장 | 1급 클래스프 | 1939년 9월 22일 | [11] |
나치 독일 | 참나무잎장이 달린 기사철십자훈장 | 기사십자훈장 | 1939년 9월 30일 | 포병대장 및 제3군 사령관[12] |
나치 독일 | 참나무잎장이 달린 기사철십자훈장 | 참나무잎장 (273번째) | 1943년 8월 21일 | 원수 및 북부군사령부 사령관[13] |
이탈리아 왕국 | 이탈리아 왕관 훈장 | 대십자훈장 | 1940년 8월 27일 | [10] |
나치 독일 | 1939년 3월 22일 메멜 반환 기념 메달 | |||
나치 독일 | 1941년/1942년 동부 전선 동계 전투 기장 |
- 1941년 10월 21일, 1943년 8월 12일에 에서 언급됨.
참조
[1]
서적
Hitler's war and the Germans : public mood and attitude during the Second World War
Ohio University Press
[2]
논문
International Military Tribunal 11-28-1947: High Command Case
https://commons.und.[...]
University of North Dakota
2023-04-29
[3]
서적
Mei 1940 — De Strijd op Nederlands grondgebied
Sdu Uitgevers
[4]
웹사이트
Georg Karl Friedrich Wilhelm von Küchler
https://www.wehrmach[...]
2023-04-29
[5]
Youtube
Beginning of the German occupation of The Netherlands during WW-II
https://www.youtube.[...]
[6]
서적
ru:История 24-й танковой дивизии ркка
http://www.soldat.ru[...]
BODlib
[7]
문서
Personalakte von Georg von Küchler
German Federal Archives (Bundesarchiv)
[8]
서적
[9]
서적
[10]
문서
Generalskartei von Georg von Küchler
German Federal Archives (Bundesarchiv)
[11]
서적
[12]
서적
[13]
서적
[14]
서적
Die Wehrmachtberichte 1939-1945 Band 2
[15]
웹사이트
Lexikon der Wehrmacht
http://www.lexiko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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