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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콜로라도 (185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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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USS 콜로라도 (1856년)는 1856년에 건조된 미국 해군 목조 증기 프리깃함이다. 남북 전쟁 발발 전 쿠바 해역을 순항하며 영국 순양함의 수색 행위를 억제했고, 전쟁 기간에는 북군의 만 봉쇄 전단에 참여하여 사략선을 나포하고 포트 피셔 전투에 참전했다. 전쟁 후에는 유럽 전대와 아시아 전대에서 기함으로 활동하며, 1871년 신미양요에 참전했다. 1876년 퇴역 후 수용선으로 사용되다 해체되었으며, 해체 과정에서 화재로 다른 해군 선박들과 함께 침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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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SS 콜로라도 (1856년) - [배(Ship)]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USS 콜로라도
함명 유래콜로라도 강
기공1856년
진수1856년 6월 19일
취역1858년 3월 13일
퇴역1876년 6월 8일
최종 운명1885년 2월 18일 매각
건조 조선소노퍽 해군조선소
명명자N. S. Dornin 여사
선박 종류
함종스크류 프리깃 증기선
함급없음
제원
배수량3,425 톤
길이80.37 미터
16 미터
흘수6.73 미터
추진증기 기관, 3개의 돛
속력9 노트 (시속 17 km/h)
승무원674명 (장교, 수병)
무장 (1864년)
무장1 × 150파운더 라이플
1 × 11인치 (280mm) 활강포
46 × 9인치 (230mm) 활강포
4 × 12파운더 곡사포
무장 (1871년)
무장2 × 100파운더 (45 kg) 라이플
1 × 11 인치 (280 mm) 활강포
42 × 9 인치 (230 mm) 활강포
2 × 20 파운더 (9.1 kg) 곡사포
6 × 12 파운더 (5.4 kg) 곡사포

2. 남북전쟁 이전

1858년 5월 12일 보스턴에서 취역한 ''콜로라도''는 쿠바 해역을 순항하며, 8월 6일까지 영국 순양함의 수색 행위를 억제했다.[1] 이후 보스턴으로 귀환하여 1861년까지 예비 상태로 있었다.[1]

3. 남북전쟁

콜로라도 호는 1861년 6월 3일 재취역하여 북군의 해상 봉쇄 작전에 참여하였다.[2] 1862년 뉴올리언스 전투에는 흘수가 깊어 참전하지 못했지만, 이후 포트 피셔 전투에서 활약하였다. 조지 듀이 제독이 콜로라도 호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4]

3. 1. 남부 연합과의 교전

1861년 6월 18일, ''콜로라도''는 보스턴을 출발하여 미국 연방 해군의 걸프 봉쇄 전대에 합류, 준장 윌리엄 마빈의 기함으로 활약했다.[2] 9월 14일, 소위 J. H. 러셀이 이끄는 원정대는 펜사콜라 해군 기지에서 사략선으로 사용될 예정이던 스쿠너 ''유다''를 나포하고 대포 한 문을 무력화했다. 이 과정에서 3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2] 12월 11일에는 또 다른 원정대가 파일럿 타운에서 작은 스쿠너 한 척과 남부 연합군 2명을 포획했다. 1862년 1월 23일, ''콜로라도''는 미시시피 강 어귀의 사우스 웨스트 패스에서 증기선 ''캘훈''(또는 ''쿠바'') 나포를 지원했고, 일주일 후 네 척의 남부 연합 증기선과 교전했다.[2]

1862년 4월, ''콜로라도''는 흘수가 너무 깊어 뉴올리언스 전투에 직접 참여하지 못했다. 대신 19문의 대포와 1문의 곡사포를 제거하여 함대에 분산시켰다.[4]

3. 2. 포트 피셔 전투

1864년 말, 노스캐롤라이나주 윌밍턴은 남부 연합에 남은 유일한 항구였다. 이 항구는 케이프 피어 강 어귀에 위치한 포트 피셔에 의해 보호받고 있었다.[4]

12월에 육군과 해군이 합동으로 공격을 시도했지만 실패했다.[4]

1865년 1월, 두 번째 공격이 이루어졌다. ''콜로라도''는 이 전투에 참전하여 큰 역할을 수행했다. 조지 듀이는 ''콜로라도''의 활약에 중요한 역할을 한 인물 중 하나였다.[4]

''콜로라도''는 목재로 만들어진 배였기 때문에 모니터나 다른 장갑선들 바깥쪽에 배치되었지만, 전투에서 중요한 역할을 수행했다. 전투가 끝날 무렵, 포터 제독은 대처 제독에게 특정 부분을 공격하라는 신호를 보냈다. ''콜로라도''는 이미 상당한 피해를 입은 상태였기 때문에 장교들은 반대했다. 그러나 뛰어난 전술 능력을 가진 듀이는 이 공격의 이점을 빠르게 파악했고, 15분 만에 작전이 성공적으로 수행되었다. 뉴욕 타임스는 이 작전을 "전쟁에서 가장 아름다운 결투"라고 칭찬했다. 포터 제독이 대처 제독에게 축하 인사를 전했을 때, 대처 제독은 "듀이 소위님께 감사해야 합니다. 그의 작전이었습니다."라고 말했다. 이 공로로 대처 제독은 소장으로 진급했고, 듀이 또한 중령으로 진급했다.[4]

''콜로라도''는 1월 13일부터 15일까지 이어진 포격과 포트 피셔 함락에 참여했다. 이 과정에서 적의 포격으로 6발을 맞았고, 한 명이 사망하고 두 명이 부상을 입었다.[2]

4. 남북전쟁 이후

''콜로라도''는 남북 전쟁 이후 유럽 전대와 아시아 전대에서 기함으로 활동했다. 1871년에는 존 로저스 해군 소장의 기함으로서 미국 공사를 중국조선에 외교 임무를 위해 동반하기도 했다.[1]

1871년 6월, 미국 해군 장교들이 조선 원정 전에 ''콜로라도'' 함에서 군사 회의를 하는 모습의 연출된 사진. 함선의 지휘관인 대령 조지 H. 쿠퍼가 중앙에 앉아 있으며, 아시아 함대 사령관인 소장 존 로저스가 오른쪽 테이블에 기대어 있다.

4. 1. 유럽 전대 (1865-1867)

1865년 6월 11일, ''콜로라도''는 유럽 전대의 기함 임무를 수행하기 위해 출항하여 잉글랜드(영국), 포르투갈, 스페인, 지중해, 아드리아해를 항해하며 미국의 해군력을 과시했다.[1] 1867년 7월 23일 셰르부르를 떠나 뉴욕으로 귀환했다.[1] 이 기간 동안 듀이 중령은 1867년과 1868년에 ''콜로라도''의 부장으로 근무했다.[1]

4. 2. 아시아 전대 (1870-1873)

콜로라도 호는 아시아 전대의 기함이었다. 당시 미국의 외교 정책은 프랑스, 러시아, 영국과 같은 유럽 열강에 대항하여 중국, 일본, 조선에 무역권을 확립하는 데 중점을 두고 있었다.[1]

1870년 4월 9일부터 1873년 3월 15일까지 콜로라도 호는 아시아 기지를 순항했다.[1] 1871년 4월, 존 로저스 해군 소장의 기함으로서 미국 공사를 중국조선에 외교 임무를 위해 동반했다.[1]

1872년 11월 21일, 홍콩을 출발한 콜로라도 호는 싱가포르케이프타운을 거쳐 뉴욕으로 향했고, 1873년 3월 11일 도착했다.[1]

4. 2. 1. 신미양요 (1871)

1871년 6월 1일, 콜로라도 호 전단 중 2척의 배가 조선 광성진 등에 설치된 해안 포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1] 조선 측이 이 공격에 대해 해명하지 않자, 미국은 신미양요라고 불리는 징벌적 원정을 감행했다.[1] 미군은 기지를 파괴하고, 조선인들에게 무차별 포격을 가하여 많은 사상자를 냈다.[1]

4. 3. 북대서양 전대 (1873-1876)

1873년 12월 12일 뉴욕에서 출항하여 북대서양 해역을 순항하였고, 1874년 8월 27일 북대서양 전대의 기함이 되었다.

5. 퇴역

1876년 5월 30일 뉴욕으로 돌아온 콜로라도는 6월 8일 퇴역했다. 1876년부터 1884년까지 뉴욕 해군조선소에서 수용선으로 사용되었다.[2] 1885년 2월 14일, 사기업에 매각되어 부품을 활용하기 위해 해체되었고, 일부는 구리 고정물을 얻기 위해 녹여졌다.[7]

롱아일랜드 포트 워싱턴 근처 플럼 비치에서 선박이 해체되는 동안, 갑판 앞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곳에서는 철제 스파이크를 위해 판자가 태워지고 있었다. 이 화재는 잔해 처리를 위해 해체될 예정이었던 인근의 다른 여러 척의 해군 선박으로 번졌으며, 이들은 Minnesota|미네소타영어, Susquehanna|서스쿼해나영어, South Carolina|사우스캐롤라이나영어, 아이오와, Congress|콩그레스영어였다. 콜로라도와 함께, 이 다른 선박들도 불에 탄 후 침몰했다. 당시 선박을 해체하고 있던 회사인 Stannard & Co.는 화재로 인해 100000USD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5]

6. 유산

''콜로라도''는 1876년 5월 30일 뉴욕으로 돌아와 6월 8일 퇴역했다. 1876년부터 1884년까지 뉴욕 해군 조선소에서 수용선으로 사용되었다. 1885년 2월 14일, 사기업에 매각되어 잔해 처리와 구리 부품을 얻기 위해 소각되었다.[2]

롱아일랜드 포트 워싱턴 근처 플럼 비치에서 배를 해체하던 중 갑판 앞에서 화재가 발생했는데, 그곳에서는 철제 스파이크를 얻기 위해 판자를 태우고 있었다. 이 화재는 근처에 있던 다른 해군 선박들(USS 미네소타, USS 서스쿼해나, USS 사우스캐롤라이나, USS 암모누숙, USS 콩그레스)로 번졌다. ''콜로라도''를 포함한 이 배들은 불에 탄 후 침몰했다. 당시 선박 해체 회사였던 Stannard & Co.는 화재로 인해 10만달러 이상의 손실이 발생했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5]

참조

[1] 서적 Warships
[2] 웹사이트 USS Colorado Early History http://usscolorado.o[...]
[3] 웹사이트 Taking a look at the USS Colorado – All of them https://www.navytime[...] 2018-08-09
[4] 서적 The Photographic History of the Civil War, Volume 6, The Navies https://books.google[...] Review of Reviews Company 2015-01-28
[5] 뉴스 OLD GOVERNMENT SHIPS BURNED.; THEY CATCH FIRE WHILE THE WORKMEN ARE BREAKING THEM UP. https://timesmachine[...] 2017-06-21
[6] 서적 Warships
[7] 웹인용 USS Colorado Home Page http://usscolorado.o[...] 2016-01-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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