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마쿠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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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가마쿠라부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아시카가 다카우지가 간토 지역 통치를 위해 설치한 기관으로,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거쳐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초대 가마쿠라 쿠보가 되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 가마쿠라부는 간토 지방과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에 해당하는 지역을 관할했으며, 가마쿠라 공방, 간토 간레이, 봉공중, 도자마 등으로 구성되었다. 가마쿠라부는 처음에는 무로마치 막부의 지방 통치 기관이었으나, 점차 자립적인 성향을 띠며 독자적인 권한을 행사했다. 14, 15세기에 걸쳐 가마쿠라부의 자립화 경향이 강해지면서 막부의 간섭에서 벗어나려 했으나, 오에이의 난과 에이쿄의 난 등을 거치며 쇠퇴, 교토쿠의 난 이후 고가로 이전하며 붕괴되었다. 가마쿠라부에 대한 평가는 연구자에 따라 다르며, 독립적인 국가, 동국 정권, 아시카가-우에스기 씨의 독재 권력 등으로 다양하게 해석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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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마쿠라부 | |
|---|---|
| 개요 | |
| 정부 유형 | 지방 정부 |
| 존속 기간 | 1349년 ~ 1455년 |
| 위치 | 간토 지방 |
| 정치 | |
| 수도 | 가마쿠라 |
| 수장 | 가마쿠라 구보 |
| 부통령 | 간토 간레이 |
| 역사 | |
| 설립 | 1349년 |
| 폐지 | 1455년 |
| 기타 명칭 | |
| 별칭 | 간토 부 (Kantō-fu, 関東府) |
| 별칭 | 하슈 (Hasshū, 八州) |
2. 역사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직후,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아들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보냈다. 이때, 실질적인 권력은 어린 친왕을 보좌한 아시카가 타다요시에게 있었다.[5]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동생 타다요시를 사가미국 수호로 임명하고, 세이라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로 내려보내 가마쿠라부의 전신인 가마쿠라 쇼군부를 성립시켰다.[10]
고다이고 천황은 중앙 집권을 지향했기에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방 행정 기관 설치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간토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견제하기 위해 오우(오늘날의 도호쿠 지방)에 무쓰국부 설치를 인정하자, 타카우지는 이를 역이용하여 간토에도 가마쿠라 쇼군부 설치를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11]
간오의 혼란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후 장관인 가마쿠라 구보는 모토우지와 그 자손, 이를 보좌하는 간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는 가마쿠라 부가 되었다.
가마쿠라부는 사가미, 무사시, 아와, 가즈사, 시모사, 히타치, 고즈케, 시모쓰케의 관동 팔주와 이즈, 가이를 관할했다.[6] 1392년에는 무쓰와 데와가 추가되어 총 12개국을 다스렸으나, 1400년 오슈 탄다이 설치로 무쓰와 데와에 대한 권한은 사실상 축소되었다.[10]
가마쿠라 구보와 간토칸레이는 점차 대립했고, 1439년 에이쿄의 난에서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배하며 가마쿠라부는 일시적으로 장관 부재 상태가 되었다.[8] 이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가마쿠라 구보가 되었으나, 교토쿠의 난으로 무로마치 막부 및 우에스기 씨와 다시 대립했다. 결국 시게우지는 고가 성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가마쿠라부는 고가 구보로 계승되었다.[7] 한편, 막부는 새 가마쿠라 구보로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파견했으나, 그는 우에스기 씨와의 갈등으로 호리고에 고쇼에 머물렀다.[2]
겐코 3년(1333년) 12월,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세이라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로 내려와 가마쿠라 쇼군부를 성립시켰다.[10] 이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불안정한 간토 정세 속에서 아시카가 세력의 가마쿠라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겐무 2년(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으로 가마쿠라 쇼군부는 붕괴되었고,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의 대립을 시작했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중심으로 하는 새 체제가 필요했고, 타다요시는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교토 조정으로부터 자립성이 강한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12] 그러나 1336년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에 설치되면서 새로운 방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와 5년(1349년), 요시아키라를 대신하여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초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면서 가마쿠라부가 성립되었다. 초기 가마쿠라부의 권한은 군사 지휘권에 집중되었고, 영토 지배 관련 권한은 교토 막부에 있었다. 그러나 분와 2년(1353년), 타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물며 모토우지에게 영토 지배 관련 권한을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10]
건무 3년(1336년) 건무식목 제정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었으나, 건무식목에는 막부 설치 장소에 대해 가마쿠라와 교토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13]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가마쿠라를, 고노 모로나오는 교토를 지지했으며, 결국 교토에 막부가 설치되었다.
분와 2년(1353년), 타카우지는 모토우지에게 소령 안도권, 아테유키켄(宛行権), 재판권을 부여했다. 이는 가마쿠라부 자립화의 기반이 되었다. 제2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우지미쓰 시기(1367년~)와 제3대 아시카가 미쓰카네 시기(1398년~1409년)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가마쿠라부는 관할 국가 슈고에 대한 지휘권, 슈고 보임권, 소령 안도권을 행사하며 막부로부터 점차 자립해 나갔다.[21]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 시대(오에이 16년, 1409년 ~)에 붕괴로 향한다. 오에이 23년(1416년) 10월 우에스기 젠슈의 난을 계기로 모치우지를 지지한 신흥 세력과 젠슈를 지지한 전통적 호족층, 구니진층의 대립이 심해지고, 가마쿠라부의 권력 기반이 약화되었다.
우에스기 젠슈의 난에서 젠슈에 가담한 간토 무사들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탄압을 피해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교토 부지슈를 형성했다. 모치우지는 가마쿠라부 관할 밖이었던 에치고, 시나노, 스루가에 간섭하여 "가마쿠라 부지슈(간토 부지슈)"를 형성하면서 가마쿠라부와 막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0]
오에이 35년(1428년)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쇼초 2년(1429년)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새로운 쇼군이 되었다. 가마쿠라 쿠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자신이 쇼군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막부 요시노리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에이쿄 10년(1438년) 에이쿄의 난에서 모치우지는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 토벌을 시도했으나 실패하고 항복했다. 요시노리는 모치우지와 아들 요시히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가키츠 원년(1441년) 요시노리 암살(가키츠의 난) 이후, 분안 4년(1447년) 가마쿠라부는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 아래에서 재흥되었다. 그러나 시게우지는 막부 및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씨와 대립하여, 교토쿠 3년(1454년) 교토쿠의 난에서 가마쿠라를 떠나 시모사 고가로 옮겨갔다.[10]
2. 1. 가마쿠라 쇼군부 (전신)
1333년 가마쿠라 막부가 멸망한 직후,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아들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보냈다. 이때, 실질적인 권력은 어린 친왕을 보좌한 아시카가 타다요시에게 있었다.[5]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동생인 타다요시를 사가미국 수호로 임명하고, 세이라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로 내려보내 가마쿠라부의 전신인 가마쿠라 쇼군부를 성립시켰다.[10]고다이고 천황은 중앙 집권을 지향했기에 강력한 권한을 가진 지방 행정 기관 설치에 소극적이었다. 그러나 간토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아시카가 타카우지를 견제하기 위해 오우(오늘날의 도호쿠 지방)에 무쓰국부 설치를 인정하자, 타카우지는 이를 역이용하여 간토에도 가마쿠라 쇼군부 설치를 인정받았다고 전해진다.[11]
간오의 혼란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후 장관인 가마쿠라 구보는 모토우지와 그 자손이, 이를 보좌하는 간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는 가마쿠라 부가 되었다.
2. 2. 가마쿠라부 성립과 발전
1333년 가마쿠라 막부 멸망 직후, 고다이고 천황은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간토 지방 통치를 위해 아들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보냈다. 이때 아시카가 타다요시가 어린 친왕을 보좌하며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했는데, 이것이 가마쿠라 쇼군부의 기원이다.[5] 간오의 혼란 발생 후,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후 모토우지와 그 자손이 가마쿠라 구보를, 우에스기 씨가 간토칸레이를 세습하며 가마쿠라부를 이끌었다.[7]가마쿠라부는 사가미, 무사시, 아와, 가즈사, 시모사, 히타치, 고즈케, 시모쓰케의 관동 팔주와 이즈, 가이를 관할했다.[6] 1392년에는 무쓰와 데와가 추가되어 총 12개국을 다스렸으나, 1400년 오슈 탄다이 설치로 무쓰와 데와에 대한 권한은 사실상 축소되었다.[10]
가마쿠라 구보와 간토칸레이는 점차 대립했고, 1439년 에이쿄의 난에서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배하며 가마쿠라부는 일시적으로 장관 부재 상태가 되었다.[8] 이후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가마쿠라 구보가 되었으나, 교토쿠의 난으로 무로마치 막부 및 우에스기 씨와 다시 대립했다. 결국 시게우지는 고가 성으로 근거지를 옮겼고, 가마쿠라부는 고가 구보로 계승되었다.[7] 한편, 막부는 새 가마쿠라 구보로 아시카가 마사토모를 파견했으나, 그는 우에스기 씨와의 갈등으로 호리고에 고쇼에 머물렀다.[2]
겐코 3년(1333년) 12월,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세이라 친왕을 받들어 가마쿠라로 내려와 가마쿠라 쇼군부를 성립시켰다.[10] 이는 가마쿠라 막부 멸망 후 불안정한 간토 정세 속에서 아시카가 세력의 가마쿠라 점령을 합법화하기 위한 조치였다. 고다이고 천황은 중앙 집권을 지향했으나, 간토에서 세력을 확장하는 타카우지를 견제하기 위해 무쓰국부 설치를 인정했고, 타카우지는 이를 역이용하여 가마쿠라 쇼군부 설치를 인정받았다.[11]
겐무 2년(1335년) 나카센다이의 난으로 가마쿠라 쇼군부는 붕괴되었고, 타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의 대립을 시작했다. 이후 아시카가 요시아키라를 중심으로 하는 새 체제가 필요했고, 타다요시는 가마쿠라에 막부를 설치하여 교토 조정으로부터 자립성이 강한 체제를 구축하려 했다.[12] 그러나 1336년 무로마치 막부가 교토에 설치되면서 새로운 방책이 필요하게 되었다.
조와 5년(1349년), 요시아키라를 대신하여 아시카가 모토우지가 가마쿠라로 내려와 초대 가마쿠라 구보가 되면서 가마쿠라부가 성립되었다. 초기 가마쿠라부의 권한은 군사 지휘권에 집중되었고, 영토 지배 관련 권한은 교토 막부에 있었다. 그러나 분와 2년(1353년), 타카우지는 가마쿠라에 머물며 모토우지에게 영토 지배 관련 권한을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이는 통치가 어려운 간토에서 가마쿠라부에 권한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10]
건무 3년(1336년) 건무식목 제정으로 무로마치 막부가 성립되었으나, 건무식목에는 막부 설치 장소에 대해 가마쿠라와 교토 두 가지 의견이 있었다.[13] 아시카가 타다요시는 가마쿠라를, 고노 모로나오는 교토를 지지했으며, 결국 교토에 막부가 설치되었다. 무로마치 막부 설치 후에도 타카우지와 타다요시 형제는 쇼군 권력을 분담하여 각각 교토와 가마쿠라의 수장으로서 정치를 행했다. 그러나 간오의 혼란으로 양자는 대립했고, 삿타 산 체제를 거쳐 무로마치 막부-가마쿠라부 체제가 확립되었다.
분와 2년(1353년), 타카우지는 모토우지에게 소령 안도권, 아테유키켄(宛行権), 재판권을 부여했다. 이는 가마쿠라부 자립화의 기반이 되었다. 제2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우지미쓰 시기(1367년~)와 제3대 아시카가 미쓰카네 시기(1398년~1409년)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가마쿠라부는 관할 국가 슈고에 대한 지휘권, 슈고 보임권, 소령 안도권을 행사하며 막부로부터 점차 자립해 나갔다.[21]
2. 3. 가마쿠라부의 갈등과 쇠퇴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고다이고 천황과의 갈등으로 동부에 머물 필요성을 느껴, 결국 아시카가는 교토에 영구적으로 거주하게 되었다. 가마쿠라는 대신 사가미국, 무사시국, 아와, 카즈사국, 시모사국, 히타치국, 고즈케국, 시모쓰케국 (소위 '핫슈'), 가이국, 이즈국을 포함하는 가마쿠라부|鎌倉府일본어의 수도가 되었다. ''가마쿠라부''는 오늘날의 간토 지방과 시즈오카현, 야마나시현에 해당했다.[6]아시카가 모토우지는 아버지인 쇼군 아시카가 타카우지에 의해 파견되었는데, 이는 타카우지가 간토 지방을 통제하는 것이 중요함을 이해하고 그곳에 아시카가 통치자를 두고자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가마쿠라의 행정은 처음부터 반항적인 특징을 보였고, 쇼군의 생각은 실제로 효과가 없었고 오히려 역효과를 낳았다.[8] 1439년,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폐위되고 ''가마쿠라부''는 무력으로 탈환되었다.[7]
10년 후,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아버지 모치우지의 자리를 대신하기 위해 파견되었다.[7] ''구보''와 막부, 우에스기 ''간레이'' 사이의 긴장은 즉시 재발했고, 1455년 시게우지는 가마쿠라에서 이바라키현 고가로 도망쳐 다시는 돌아오지 못했다.[7]
분화 2년(1353년),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초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소령 안도권, 아테유키켄(宛行権), 재판권을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이는 교토보다 가마쿠라에서 간토를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가마쿠라부 자립화의 기반이 되었다.
제2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우지미쓰(조지 6년, 1367년~)와 제3대 미쓰카네(오에이 5년, 1398년~오에이 16년, 1409년) 시기에 가마쿠라부의 자립화 경향이 명확해졌다. 가마쿠라부 관할 국가의 슈고 지휘권은 모토우지 시기까지는 교토의 막부에 있었지만, 우지미쓰 시기 이후 가마쿠라부로 옮겨졌다. 조지 연간(1362-1367년)까지 가마쿠라 공방이 안도 추천장을 막부 간레이에게 발송했지만, 오에이 6년(1399년) 오에이의 난 전후를 계기로 가마쿠라 공방이 직접 소령 안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제4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 시대(오에이 16년, 1409년 ~)에 붕괴로 향한다. 오에이 23년(1416년) 10월 우에스기 젠슈의 난을 계기로 모치우지를 지지한 신흥 세력과 젠슈를 지지한 전통적 호족층, 구니진층의 대립이 심해지고, 가마쿠라부의 권력 기반이 약화되었다.
우에스기 젠슈의 난에서 젠슈에 가담한 간토 무사들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치우지의 탄압을 피해 막부와의 관계를 강화하여 교토 부지슈를 형성했다. 모치우지는 가마쿠라부 관할 밖이었던 에치고, 시나노, 스루가에 간섭하여 "가마쿠라 부지슈(간토 부지슈)"를 형성하면서 가마쿠라부와 막부의 대립이 심화되었다.[10]
오에이 35년(1428년) 정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쇼초 2년(1429년) 3월, 제비뽑기로 선출된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새로운 쇼군이 되었다. 가마쿠라 쿠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자신이 쇼군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교토의 막부 요시노리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에이쿄 10년(1438년) 8월, 모치우지는 교토와의 조정 역할을 하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 토벌을 시작했다. (에이쿄의 난) 그러나 막부가 군사 개입을 하자, 모치우지에게서 이반하는 자들이 잇따랐고, 노리자네 토벌에 실패하여 항복했다. 요시노리는 노리자네의 구명 탄원도 무시하고, 에이쿄 11년(1439년) 2월, 모치우지와 아들 요시히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가키츠 원년(1441년) 6월 요시노리 암살(가키츠의 난) 이후, 분안 4년(1447년) 3월, 가마쿠라부는 모치우지의 아들 아시카가 시게우지 아래에서 재흥되었다. 그러나 시게우지는 막부 및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씨와 대립하여, 교토쿠 3년(1454년) 12월에 시작된 교토쿠의 난에서 가마쿠라를 떠나 시모사 고가로 옮겨갔다.[10]
이후 ''가마쿠라부''의 조직은 크게 바뀌어 우에스기 씨의 손에 맡겨졌다.[2] 우에스기 씨는 자신들의 이익을 위해 권력을 행사했고, 교토의 이익을 위해서는 하지 않았으며, ''가마쿠라부''는 사실상 존재를 잃게 되었다.
2. 4. 가마쿠라부 붕괴 이후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관동 통치를 목적으로 황자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내려보내 창설한 가마쿠라 쇼군부가 기원이다. 실권은 어린 친왕을 보좌한 아시카가 타다요시에게 있었다. 간오의 혼란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로부터 장관인 가마쿠라 구보는 모토우지와 그 자손, 이를 보좌하는 간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는 가마쿠라 부가 되었다.가마쿠라 부의 관할 국가는 관동 팔주 8개국(사가미, 무사시, 아와, 가즈사, 시모사, 히타치, 고즈케, 시모쓰케)와 이즈, 가이이며, 1392년에 무쓰, 데와가 추가되었다. 단, 1400년에 오슈 탄다이가 설치되면서 무쓰, 데와 양국에 대한 가마쿠라 부의 권한은 사실상 삭감된다. 가마쿠라 구보·아시카가 씨와 간토칸레이·우에스기 씨는 이윽고 대립하여, 1439년 에이쿄의 난에서는 간토칸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 막부·아시카가 요시노리와 싸운 제4대 가마쿠라 구보 아시카가 모치우지가 패사하여, 가마쿠라 부는 장관이 일시 부재하게 되었다.
그 후, 모치우지의 유아 아시카가 시게우지가 가마쿠라 구보가 되지만, 교토쿠의 난에서 무로마치 막부·우에스기 씨와 다시 대립하였다. 우에스기 씨 원군의 이마가와 노리타다 군세에 가마쿠라를 점령당하자, 본거지를 시모사·고가 성으로 옮기고, 가마쿠라 부는 고가 구보·시게우지의 고가 부로 계승되었다. 막부는 새로운 가마쿠라 구보로 아시카가 마사토모 (요시노리의 아들)를 파견했지만, 우에스기 씨와의 갈등으로 이즈의 호리고에 고쇼에 근거를 정하고 (호리고에 구보), 미나모토노 요리토모 시대부터 동국 정치의 중심이었던 가마쿠라에는 들어가지 못했다.
오에이 35년(1428년) 정월, 쇼군 아시카가 요시모치가 후계자 없이 사망하고, 쇼초 2년(1429년) 3월, 제비뽑기로 선출된 아시카가 요시노리가 새로운 쇼군이 되었다. 가마쿠라 쿠보 아시카가 모치우지는 자신이 쇼군이 되려는 야심을 품고 있었기 때문에, 교토의 막부・요시노리와의 관계는 더욱 악화되었다. 에이쿄 10년(1438년) 8월, 모치우지는 교토와의 조정 역할을 하던 간토 간레이 우에스기 노리자네 토벌을 시작했다. (에이쿄의 난) 그러나 막부가 군사 개입을 하자, 모치우지에게서 이반하는 자들이 잇따랐고, 노리자네 토벌에 실패하여 항복했다. 게다가 요시노리는 노리자네의 구명 탄원도 무시하고, 에이쿄 11년(1439년) 2월, 모치우지와 적자 요시히사를 공격하여 멸망시켰다.
이때 모치우지에 대해 엄격한 태도를 보인 요시노리도, 가마쿠라부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다. 새로운 가마쿠라 쿠보로서, 자신의 아들을 가마쿠라에 하향시켜 가마쿠라부를 재흥시키려 했다. 이 구상은, 가키츠 원년(1441년) 6월의 요시노리 암살(가키츠의 난)로 백지화되었지만, 분안 4년(1447년) 3월, 가마쿠라부는 모치우지의 유복자 아시카가 시게우지 아래에서 재흥되었다. 에이쿄의 난과 그 후의 유우키 전투를 거치면서, 우에스기 씨와 전통적 호족층・구니진층과의 대립이 현저해지자, 양자 모두 각자의 의도에서 새로운 가마쿠라 쿠보를 필요로 했다. 그러나 대립은 해소되지 않은 채, 시게우지는 막부 및 간토 간레이・우에스기 씨와 대립하여, 교토쿠 3년(1454년) 12월에 시작된 교토쿠의 난에서, 가마쿠라를 떠나 시모사・고가로 옮겨갔다[10]。 붕괴된 가마쿠라부는 고가 쿠보・고가 부에 계승된다.
3. 구조
분와 2년(1353년),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초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소령의 안도권, 아테유키켄(宛行権), 재판권을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원격지인 교토보다 가마쿠라에서 간토를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인데, 이는 가마쿠라부 자립화의 기반이 되었다. 제2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우지미츠 시기(조지 6년, 1367년~)와 제3대 가마쿠라 공방 미츠카네 시기(오에이 5년, 1398년~오에이 16년, 1409년)에 이러한 경향은 더욱 뚜렷해졌다.
가마쿠라부 관할 국가의 슈고 지휘권은 모토우지 시기까지는 교토의 막부에 있었으나, 우지미츠 시기부터는 가마쿠라부로 이관된 것으로 보인다.[21] 쇼군과 간레이가 각국 슈고에게 보낸 문서는 사라지고, 가마쿠라부와 사찰에 보낸 문서만 남게 되었다. 슈고 보임권 역시 간토 칸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를 제외하면 가마쿠라 공방이 장악했고, 막부는 추천권만 보유했다.
여러 나라 쿠니진의 소령 안도에 관해서도, 조지 연간(1362년~1367년)까지는 가마쿠라 공방이 안도 추천장을 막부 간레이에게 보내 막부가 이를 관리했지만, 오에이 6년(1399년) 오에이의 난을 전후하여 가마쿠라 공방이 직접 안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로써 소령 안도권을 가진 가마쿠라 공방과 간토 무사 간의 주종 관계가 확립되었고, 막부는 가마쿠라부에 대한 지령 권한을 상실하게 되었다.[21]
3. 1. 조직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황자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에 보내 창설한 가마쿠라 쇼군부가 가마쿠라부의 기원이다. 실권은 어린 친왕을 보좌한 아시카가 타다요시에게 있었다.[12] 간오의 혼란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후 장관인 가마쿠라 구보는 모토우지와 그 자손, 이를 보좌하는 간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게 되었다.가마쿠라부의 수장인 가마쿠라 공방과 이를 보좌하는 간레이(간토 간레이) 아래에는 다음과 같은 기관들이 설치되어 있었다.[10]
초기 가마쿠라부의 권한은 군사 지휘권이 중심이었고, 영토 지배에 필요한 소령의 안도권, 아테가이권, 재판권은 교토의 무로마치 막부에 있었다. 그러나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간오의 교란으로 동생 아시카가 다다요시와 싸운 뒤 분와 2년(1353년) 7월까지 가마쿠라에 머물며 다다요시파를 숙청하고, 소령의 안도권, 아테가이권, 재판권을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 통치가 어려운 간토에서는 가마쿠라부에 권한을 집중할 필요가 있었기 때문이다. 엔분 4년(1359년) 간토 간레이 하타케야마 구니키요가 간토 무사들의 불만으로 간토 간레이직을 잃고 추방된 사례에서도 통치의 어려움을 엿볼 수 있다.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가마쿠라부를 막부의 지방 통치 기관으로 삼으려 했지만, 다카우지 사후 조지 2년(1363년) 7월, 가마쿠라 쿠보 아시카가 모토우지는 다카우지의 구상을 부정하고, 간오의 교란으로 숙청된 다다요시파의 우에스기 노리아키를 간토 간레이로 복귀시켰다.[10] 그 결과, 다다요시의 구상에 가까운 가마쿠라부를 목표로 하게 되었다.
관할 국가는 관동 팔주 8개국(사가미, 무사시, 아와, 가즈사, 시모사, 히타치, 고즈케, 시모쓰케)와 이즈, 가이이며, 1392년에 무쓰, 데와가 추가되었다. 단, 1400년에 오슈 탄다이 설치로 인해 무쓰, 데와 양국에 대한 가마쿠라부의 권한이 사실상 삭감되었다.
3. 2. 구성원
고다이고 천황이 겐무 신정의 일환으로 황자 나리요시 친왕을 가마쿠라로 내려보내 창설한 가마쿠라 쇼군부가 기원이다. 실권은 어린 친왕을 보좌한 아시카가 다다요시에게 있었다. 간오의 혼란이 발생하자, 아시카가 다카우지는 아들 아시카가 모토우지를 가마쿠라로 파견했고, 이후 장관인 가마쿠라 구보는 모토우지와 그 자손, 이를 보좌하는 간토칸레이는 우에스기 씨가 세습하는 가마쿠라 부가 되었다.『가마쿠라 연중행사』·『전중 이하 연중행사』에 따르면, 가마쿠라부는 가마쿠라 공방을 중심으로 간레이, 봉공중, 도자마의 3자로 구성되었다. 『가마쿠라 연중행사』는 가마쿠라부가 안정된 제3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미쓰카네 시기의 실태를 나타내는 것으로 생각된다.
- 가마쿠라 공방: 가마쿠라부의 수장. 아시카가 다카우지의 아들 모토우지의 자손이 세습했다. 교토의 쇼군과 마찬가지로 "천자노미다이칸"으로 여겨졌다.
- 간레이(간토 간레이): 가마쿠라 공방의 보좌역. 간토 간레이로 임명된 우에스기 씨는 본래 공방의 직신이지만, 『가마쿠라 연중행사』에서는 "공방님노미다이칸", 즉 공방으로부터 독립한 세력으로 기술된다. 공방을 보좌할 뿐만 아니라, 교토의 막부 간레이로부터 연락을 받아 막부의 지시를 간토 지역에 전달했다. 모토우지 시기에는 다카 시후유와 우에스기 겐켄 두 사람이 임명되었고, 2인 체제는 간오 2년/쇼헤이 6년 (1351년)까지 이어졌지만, 그 후에는 우에스기 씨가 독점했다.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 타쿠마 우에스기 씨, 이누가케 우에스기 씨의 3가문에서 담당했지만, 우에스기 젠슈의 난 이후에는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가 독점했다.
- 봉공중: 가마쿠라 공방 직속의 무사단. "효조슈"와 "히키쓰케슈"로 나뉜다. 효조슈는 가마쿠라 공방·간토 간레이와 함께 효조라고 불리는 회의에 참가한 최상층의 봉공중이다. 이에 다음가는 계층이 히키쓰케슈라고 불렸다. 당초에는 아시카가 씨 일문과 근본 피관으로 구성되었지만, 점차 각지의 구니진이 합류하면서 공방 세력이 성장하게 되었다.
- 도자마: 간토의 다이묘. 시모사의 치바 씨·유키 씨, 히타치의 사타케 씨, 시모츠케의 오야마 씨·우츠노미야 씨·나스 씨·나가누마 씨 등이다. 각국의 슈고로 임명된 자도 있었지만, 가마쿠라부의 정권 중추에서는 배제되었던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제2대 가마쿠라 공방 우지미쓰 시대에 가와고에 합전·시모츠케 오야마 요시마사·와카이누마의 난을 거친 후에는 "간토 팔옥형"으로서 가마쿠라 공방의 번병을 형성하고, 공방 권력을 직접적으로 지지해왔다. 따라서 가마쿠라부 안에서 특정 지위를 얻었다고도 생각되며, 향후 연구 과제이다.
특히 가마쿠라 공방 자신의 군사력을 지원한 봉공중(奉公衆)에 대해서는, 복수의 사료 분석으로부터 이하의 74명의 이름이 확인되었다[25]。
| 분류 | 가문 |
|---|---|
| 아시카가 씨 일문(一門) | 키라 씨・시부카와 씨・잇시키 씨・이마가와 씨・카시 씨・하타케야마 씨 |
| 아시카가 씨 근본 피관(被官) | 숙로(宿老)인 노다 씨・키도 씨, 후의 고가 공방기에 필두 중신이 되는 야나다 씨, 아시카가 가문 필두 가신의 다카 씨와 그 방계인 미토 씨・히코베 씨・오타카 씨・오히라 씨・다카미나미 씨, 그 외 테라오카 씨・카지와라 씨・에비나 씨・시타라 씨. 관동 관령이 되는 우에스기 씨도 원래 이 분류에 포함되었다. |
| 가마쿠라 막부 관료 출신 | 니카이도 씨、나가이 씨、마치노 씨 |
| 코쿠진 영주 출신 | 시나노 국의 오가사와라 씨, 스루가 국의 오모리 씨, 가이 국의 다케다 씨・헤미 씨, 이즈 국의 이토 씨・카와즈 씨, 사가미 국의 혼마 씨・아이코 씨・미우라 씨・자마 씨・이다 씨・카가와 씨・소가 씨, 무사시 국의 에도 씨・시나가와 씨・히라코 씨, 코즈케 국의 사토미 씨・야마나 씨・닛타 씨・다나카 씨・나바 씨・타카야마 씨, 시모츠케 국의 사노 씨・야쿠시지 씨・나가누마 씨, 히타치 국의 시시도 씨・쓰쿠바 씨・오다 씨・시마자키 씨・다이죠 씨, 시모사 국의 가이조 씨・인토 씨・류자키 씨・키우치 씨・칸자키 씨, 카즈사 국의 시이즈 씨・타카타키 씨, 출신지 불명의 조호지 씨 |
| 기타 | 사사키 씨、쇼쿠노 씨、요시하라 씨、사토 씨、레이제이 씨、소노다 씨、이타쿠라 씨、코타키 씨、카지마 씨、누마타 씨、나즈카 씨、나카사하 씨、미모리 씨 |
3. 3. 직할령
분화 2년(1353년) 7월, 아시카가 타카우지는 초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모토우지에게 소령의 안도권과 아테유키켄(宛行権), 재판권을 부여하고 교토로 돌아갔다.[21] 원격지인 교토보다 가마쿠라에서 간토를 직접 통치하는 것이 안정적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지만, 가마쿠라부 자립화의 기반이 되었다. 제2대 가마쿠라 공방 아시카가 우지미츠 시기(조지 6년, 1367년~)와 제3대 미츠카네 시기(오에이 5년, 1398년~오에이 16년, 1409년)에 그 경향이 명확해진다. 예를 들어, 가마쿠라부 관할 국가의 슈고에 대한 지휘권은 모토우지 시기까지는 교토의 막부에 있었지만, 우지미츠 시기 이후는 가마쿠라부로 옮겨졌다고 생각된다.[21] 쇼군 간레이가 각국 슈고에게 보낸 문서가 보이지 않게 되고, 가마쿠라부와 사찰에 보낸 문서만 남게 된다. 슈고의 보임권에 대해서도, 간토 칸레이 야마노우치 우에스기 씨 이외에는 가마쿠라 공방이 파악하고 있으며, 막부가 가지고 있던 것은 추천권이었다. 여러 나라의 쿠니진에 대한 소령 안도에 대해서도, 조지 연간(1362년~1367년)까지는 가마쿠라 공방이 안도 추천장을 막부 간레이에게 발송했고, 막부가 장악하고 있었음을 알 수 있지만, 오에이 6년(1399년)의 오에이의 난 전후를 계기로, 가마쿠라 공방이 직접 안도권을 행사하게 된다. 이 무렵에는 소령 안도권을 가진 가마쿠라 공방과 간토 무사 사이에 주종 관계가 확립됨과 동시에, 막부는 가마쿠라부에 대해 지령하는 권한을 잃은 상태가 되었다.[21]가마쿠라부의 직할령은 가마쿠라 공방 자신의 경제적 기반이 되었다. 주로 2곳에 집중적으로 분포하고 있었으며, 하나는 가마쿠라와 그 주변의 사가미 중부・동부, 무사시 남단, 또 하나는 시모사 북서부와 무사시 북동부에 걸쳐 있는 구 도네가와 와타라세가와 (태일천) 주변의 간토 중앙부이다.[26]
사가미와 그 주변의 도카이도에서는 이즈국부・하코네미즈노미・하코네아시카와・유모토・오다와라・고즈에 관문이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가마쿠라부가 관문의 수입을 자의적으로 가마쿠라 사찰에 기부하고 있었던 것으로부터, 도카이도는 가마쿠라부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 무사시 방면의 가마쿠라 가도 (중도)에 대해서도, 길목의 야마노우치 장원・오야마다 보・요시토미 향이 직할령과 준직할령이 되어 있었으며, 더욱 북쪽의 후추・이루마가와(입간천)・무라오카도 직할령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사가미 동부・무사시 남단의 해안에서는, 가마쿠라・무쓰우라・가나가와・시나가와라는 중요 항만도 가마쿠라부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10]
간토 중앙부에서는 무사시의 아다치군・오타 장원과 시모사의 시모카베 장원이라는 광대한 지역이 직할령으로 지정되었고, 인접하는 시모사의 카사이 미쿠리야・시모고시마 장원이 우에스기 씨에게 주어져 준직할령이 되었다. 가마쿠라에서 에도・이와쓰키를 경유하여 고가에 이르는 가마쿠라 가도(하도)는 이러한 직할령을 통과한다. 구 도네가와・와타라세가와(태일천) 수계의 하천 교통도 가마쿠라부의 지배하에 있었다고 생각된다.[10]
그 외에도, 가즈사 북서부나 시모쓰케의 아시카가 장원 등, 간토 각지에 많은 소령이 널리 분포하고 있었다.[10]
다음은 현존하는 사료에서 검출된 직할령 목록이다. 고료쇼와 가마쿠라부(가마쿠라 쿠보)가 지토 직을 갖는 "직할령", 아시카가 씨에서 우에스기 씨에게 주어진 "우에스기령", 가마쿠라 쿠보에서 호코슈에게 주어진 "호코슈령"으로 분류한다.[27]
4. 평가와 연구 동향
가마쿠라부는 무로마치 막부의 단순한 지방 기관이 아니라, 상당한 자립성을 가진 권력 체제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사토 신이치의 "동국 국가론"은 가마쿠라부를 자립적인 동국 국가의 통치 기관으로 강조한다.
- 사토 히로노부는 가마쿠라부가 독자적인 국가 권력을 행사한 "동국 국가"라고 평가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제약은 있었지만, 가마쿠라 공방을 중심으로 독자적인 신분 질서를 구축하고, 잘 갖춰진 관료 기구를 통해 재판권, 군사 지휘권, 토지 처분권 등을 행사했으며, 독자적인 의례 체계도 갖추고 있었다는 점을 중시했다.[10]
- 아미노 요시히코는 일본에 "동국 국가"와 "서국 국가"라는 두 개의 국가가 존재했다고 주장했다. 가마쿠라 시대에 가마쿠라를 중심으로 한 동국 국가(가마쿠라 막부)와 교토 중심의 서국 국가(조정)가 등장했고, 이후 '''가마쿠라부'''가 동국 국가를 계승하여 고가 공방(고가 부), 오다와라의 고호조 씨를 거쳐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 이토 요시요시는 "동국 국가론"에서 কিছুটা 벗어나, 가마쿠라부가 천황에게서 정무를 위임받은 "천자의 어대관"으로 인식되었기 때문에 동국을 담당하는 "동국 정권"이지만 왕권에서 독립하지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교토・무로마치 막부로부터의 자립 의지를 가지고 있었으며, 적어도 오에이 연간(1394~1427년) 이후에는 막부의 지방 통치 기관이 아닌 "지역 블록 권력"으로 간주했다. 이는 "권문 체제론"과 유사한 관점이다.
사쿠라이 에이지는 이마가와 료슌의 아시카가 가문에 대한 충성심은 "교토냐 가마쿠라냐 하는 선택지에서는 전혀 상대화되어 있다"고 언급하며, 교토의 쇼군이 잘못된 길을 갈 때 "쇼군의 스톡"으로서 간토 공방이 등장한다고 지적했다. 무가의 성지인 가마쿠라에 위치한 가마쿠라부는 간토 칸레이, 사무라이도코로, 만도코로 등 무로마치 막부와 동일한 조직을 갖추고, 동국에서는 독자적인 은상 급여권, 재판권, 징세권을 인정받았다. 무로마치 막부의 예비 및 백업으로서의 특성 때문에 남조의 위협이 사라진 후에는 교토 막부에게 가장 큰 위협으로 여겨졌다.
나가하라 게이지는 가마쿠라부를 "아시카가=우에스기 씨의 독재 권력"으로, 전통적 호족(동국 다이묘)을 억압적으로 지배한 체제로 평가했지만, 사토 히로노부와 같이 가마쿠라부와 동국 다이묘의 협조 관계를 중시하는 시각도 존재한다. "가마쿠라 공방과 동국 다이묘 사이의 주종 관계"를 밝히는 것은 가마쿠라부 연구의 향후 과제 중 하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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