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제온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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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간제온지는 일본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에 위치한 사찰로, 덴지 천황이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건립을 발원하여 746년에 완공되었다. 간제온지 자재장은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으며, 7세기 말에 사찰의 골격이 갖춰졌을 것으로 추정된다. 헤이안 시대 이후 여러 차례 화재와 태풍으로 인해 건물이 소실되었으나, 에도 시대에 재건되었고, 메이지 시대 이후 천태종 사찰이 되었다. 주요 문화재로는 국보 범종과 간제온지 자재장, 다양한 불상, 조각상 등이 있으며, 사찰 경내 및 자원지는 국가 사적으로 지정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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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제온지 | |
|---|---|
| 지도 | |
| 기본 정보 | |
| 이름 | 간제온지 |
| 원어 이름 | 観世音寺 (간제온지) |
| 로마자 표기 | Kanzeon-ji |
| 종교 | 불교 |
| 종파 | 천태종 |
| 본존 | 관세음보살 (쇼-간논 보사쓰, Āryāvalokiteśvara) |
| 국가 | 일본 |
| 현 | 후쿠오카현 |
| 시 | 다자이후시 |
| 주소 | 후쿠오카현 다자이후시 간제온지 5-6-1 |
| 웹사이트 | 간제온지 공식 웹사이트 |
| 지정 | 국가 사적 |
| 이미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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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 |
| 창건자 | 덴지 천황 |
| 완공 시기 | 746년경 |
| 문화재 | |
| 국보 | 범종 |
| 중요 문화재 (국가 지정) | 목조 관음보살 좌상 등 17건 |
| 사적 (국가 지정) | 경내 및 자원지 |
| 문화재 (후쿠오카현 지정) | 금당, 강당 |
| 추가 정보 | |
| 산호 | 시미즈산 |
| 순례 | 규슈 서국 33관음 33번 |
2. 역사
간제온지(観世音寺)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905년(엔기 5년)에 작성된 "간제온지 자재장"(観世音寺資財帳)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4]
《속일본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이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제온지 건립을 발원했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 아사쿠라 궁에서 사망했는데, 절 건립 발원도 이 시점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사전인 《니추레키》에도 간제온지 창건을 하쿠호 연간(661년-683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속일본기》 와도 2년(709년) 기사에는 해당 시점까지도 절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완공은 발원 후 약 80년이 지난 덴표 18년(7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4]
경내에서 발굴된 기와 중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로지(老司) I식(式)이라 불리며, 아스카의 가와라지나 후지와라쿄의 기와와 같은 계통으로 복변팔변(複弁八弁)의 연꽃무늬가 있는 수막새와 편행(偏行) 당초무늬가 있는 수막새들이다. 이 기와는 현재 후쿠오카시 미나미구에 있는 가마에서 구워진 것으로 7세기 것이다. 간제온지에 현존하는 범종은 교토 묘신지의 범종과 같은 나무틀로 주조되었으며, 698년이라는 명문이 새겨져 있다. 7세기 말에는 이미 사찰의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추정된다.[4]
현재 건물은 모두 근세에 재건된 것으로, 옛 모습은 없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가와라지와 같은 가람 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덴표호지 5년(761년) 간진에 의해 계단원이 세워져, 승려가 상경하지 않고도 수계를 받을 수 있었다.[4]
헤이안 시대 이후 잦은 화재와 태풍으로 창건 당시 모습은 사라졌다. 고헤이 7년(1064년) 화재로 강당과 탑 등이 소실되었고, 고와 4년(1102년) 태풍으로 금당과 난다이몬(南大門) 등이 무너졌다. 금당은 복구되었지만, 고지 2년(1143년) 다시 화재로 소실되었다.[4]
에도 시대 간에이 7년(1630년) 폭풍우로 금당이 붕괴되어 폐찰 직전까지 이르렀으나, 간에이 8년(1631년) 금당, 겐로쿠 원년(1688년) 강당(본당)이 구로다 가에 의해 재건되어 고찰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5]
헤이안 시대 이후 도다이지의 말사였던 간제온지는 메이지 이후 천태종 사찰이 되었다. 1913년(다이쇼 2년)부터 2년간 불상 수리가 이루어졌고, 1959년 철근 콘크리트 보물창고가 완성되어 문화재 수장고로 사용되고 있다.[5]
2. 1. 창건
간제온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은 905년(엔기 5년)에 작성된 "간제온지 자재장"(観世音寺資財帳)이며, 현재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4]《속일본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이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제온지 건립을 발원했다고 한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에 규슈의 아사쿠라 궁에서 사망했는데, 절 건립 발원도 이 시점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사전인 《니추레키》에도 간제온지 창건을 하쿠호 연간(661년-683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속일본기》 와도 2년(709년) 기사에는 해당 시점까지도 절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완공은 발원 후 약 80년이 지난 덴표 18년(746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4]
간제온지 경내에서 발굴된 기와 가운데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로지(老司) I식(式)이라 불리며, 아스카의 가와라지나 후지와라쿄의 기와와 같은 계통으로 복변팔변(複弁八弁)의 연꽃무늬가 있는 수막새와 편행(偏行) 당초무늬가 있는 수막새들이다. 이 로지 I식이라는 분류명이 붙은 수막새 기와는 현재 후쿠오카시 미나미구에 있는 동명의 가마에서 구워진 것으로 7세기의 것이다. 또한 간제온지에 현존하는 범종도 정확한 주조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무술년"(698년)에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있는 교토 묘신지의 범종과 같은 나무틀로 주조된 형제뻘 되는 범종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들어 7세기 말 무렵에는 이미 어느 정도 사찰의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추정된다.[4]
현재 남아있는 간제온지 건물은 모두 근세에 재건된 것으로,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회랑으로 둘러싸인 내측 동쪽에 탑이 있고 서쪽에 금당이 동향으로 지어져 있는, 가와라지와 같은 가람 배치였다. 이후 덴표호지 5년(761년)에 간진에 의해 이 절에 계단원이 세워졌다. 이것은 승려가 되려는 자가 수계를 받기 위해 일일이 상경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간제온지에서 수계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4]
2. 2. 가람 배치
간제온지의 가람 배치는 가와라데라를 본떠 남문, 중문, 서쪽에 금당(본당), 동쪽에 탑, 중앙에 강당, 그리고 회랑이 있는 구조였다.[4] 761년, 승려 간진은 계단원을 건설하여 이 절에서 훈련받은 승려들이 수도까지 가지 않고도 정식으로 수계받을 수 있게 했다.과거에 존재했던 문, 회랑 등은 사라졌다. 현도에서 가로수길 참도를 북쪽으로 진행하여 남문 자리를 지나면, 약간 높은 광장이 있으며, 왼쪽에는 금당, 정면에는 강당이 세워져 있다. 이 외에도 광장 동쪽에는 탑터와 종루, 그 안쪽에는 보장, 강당 뒤편에 승방터가 있다. 또한 절 서쪽에 인접하여 계단원이 세워져 있다. "천하 삼계단"의 하나로 여겨졌던 계단원의 후신이지만, 현재의 계단원은 관세음사(觀世音寺)와 별개의 법인이며, 종파도 임제종이다.
발굴 조사 결과, 창건 당시의 가람은 동서 93미터, 남북 78미터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부지의 동쪽에 오중탑, 서쪽에 금당이 세워졌으며, 회랑의 남쪽 중앙에 중문, 북쪽 중앙에 강당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 중심 가람의 남쪽에는 남대문, 북쪽에는 동서로 긴 승방이 세워져 있었으며, 많은 부속 건물이 있어 경내지는 사방 3정에 달했다. 금당은 남쪽이 아닌 동쪽을 정면으로 하여 오중탑과 마주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금당을 동쪽을 향하게 짓는 점은 아스카의 가와라데라와도 공통점을 보인다. 가와라데라는 관세음사와 마찬가지로 사이메이 천황과 관련된 절이며, 앞서 언급한 출토 기와의 형식 등으로 보아 두 절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오중탑은 불에 탄 심초만 남아 있으며, 탑은 한 변이 6m로 추정된다.
; 남대문터
: 참도 양 옆에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초석 자체는 창건 당시의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래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 중문터
: 금당, 강당이 있는 광장 앞의 돌계단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초석 등의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 금당
: 입모양의 기와를 덮은 간소한 건물로, 1631년에 재건되었다. 경내 서쪽, 창건 당시 금당의 자리에 동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1959년에 보장(수장고)이 생기기 전까지는, 건물 안쪽(서쪽) 벽을 등지고 중앙에 본존 아미타여래 좌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사천왕상을 2체씩 안치했으며, 이들 앞에 석조 고마이누 한 쌍이 있었다. 또한 건물 안 북쪽 벽 가장자리에는 본존에 가까운 쪽부터 차례로 십일면관음입상, 대흑천입상, 지장보살반가상, 아미타여래입상, 남쪽 벽 가장자리에는 본존에 가까운 쪽부터 차례로 길상천입상, 지장보살입상, 두발비사문천입상, 성관음입상이 안치되어 있었다.[31] 현재 이들 상은 보장 등으로 옮겨져, 건물 안에는 부동명왕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 강당
: "본당"이라고도 한다. 경내 정면 안쪽의 한 단 높은 위치에 남쪽을 향해 세워진, 입모양의 기와를 덮은 2중 지붕의 불당. 1688년 재건. 1959년에 보장(수장고)이 생기기 전까지는, 높이 5미터 전후의 거상 3체를 포함한 5체의 관음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즉, 건물 안쪽(북쪽) 벽을 등지고 중앙에 본존 성관음 좌상을 안치하고, 그 왼쪽에는 십일면관음입상(상고 5미터), 오른쪽에 불공견삭관음입상이 안치되었으며, 건물 안 동쪽 벽을 등지고 십일면관음입상(상고 3미터), 서쪽 벽을 등지고 마두관음입상이 안치되어 있었다.[32] 현재 이들 상은 보장으로 옮겨져, 건물 안에는 원래 금당에 있던 성관음입상을 안치한다. 건물 주변에 남아 있는 초석은, 과거에는 창건 당시의 것으로 여겨졌지만, 발굴 조사 결과, 현재 지표에 보이는 초석은 헤이안 시대 이후의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 왼편 앞에는 나라 시대의 것이라고 전해지는 돌절구(碾磑)가 있다. 돌절구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며, 한 단에 400kg의 무게가 있다.
; 탑터
: 종루 앞에 탑의 심초가 남아 있으며, 직경 약 90cm의 기둥 구멍이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심초는 원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 승방터
: 강당 뒤에 있다. 905년의 "자재장"에 보이는 승방의 터로, 남북 10m, 동서 100m의 규모였다. 현재 지표에 있는 초석은 실물이 아닌 레플리카이다.[33]
; 전 겐보 묘
: 강당 서쪽, 도로를 사이에 둔 민가 옆에 서 있는 부조 보협인탑으로, 나라 시대의 승려 겐보의 묘라고 전해지지만, 탑 자체는 중세의 것이다.
2. 3. 중세 이후
905년(엔기 5년)에 성립된 「간제온지 자재장」(観世音寺資財帳)은 간제온지에 대한 가장 오래된 기록으로,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도쿄 예술대학에 소장되어 있다.[4]속일본기에 따르면, 덴지 천황이 어머니 사이메이 천황의 명복을 빌기 위해 간제온지 건립을 발원했다. 사이메이 천황은 661년에 규슈의 아사쿠라 궁(朝倉宮)에서 사망했는데, 절 건립 발원도 이 시점에서 멀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 가마쿠라 시대 초기의 사전인 니추레키(二中歴)에도 간제온지 창건을 하쿠호(白鳳) 연간(661년-683년)의 일로 기록하고 있다. 한편, 속일본기 와도(和銅) 2년(709년) 기사에는 해당 시점까지도 절이 아직 완공되지 않았고, 완공은 발원 후 약 80년이 지난 덴표(天平) 18년(746년)의 일이라고 기록되어 있다.[4]
간제온지 경내에서 발굴된 기와 중 창건 당시의 것으로 보이는 것은 로지(老司) I식(式)이라 불리며, 아스카(飛鳥)의 가와라지(川原寺)나 후지와라쿄(藤原京)의 기와와 같은 계통으로 복변팔변(複弁八弁)의 연꽃무늬가 있는 수막새와 편행(偏行) 당초무늬가 있는 수막새들이다. 이 로지 I식이라는 분류명이 붙은 수막새 기와는 현재 후쿠오카 시 미나미 구(南区)에 있는 동명의 가마에서 구워진 것으로 7세기의 것이다. 또한 간제온지에 현존하는 범종은 정확한 주조 시기를 알 수는 없지만, 「무술년」(698년)에 제작되었다는 명문이 있는 교토(京都) 묘신지(妙心寺)의 범종과 같은 나무틀로 주조된 형제뻘 되는 범종으로 보인다. 이러한 점을 들어 7세기 말 무렵에는 이미 어느 정도 사찰의 골격이 갖추어져 있었다고 추정된다.[4]
현재 남아있는 간제온지 건물은 모두 근세에 재건된 것으로, 옛 모습은 남아있지 않지만 발굴조사를 통해 회랑으로 둘러싸인 내측 동쪽에 탑이 있고 서쪽에 금당이 동향으로 지어져 있는, 가와라지와 같은 가람 배치였음을 알 수 있다. 이후 덴표호지(天平宝字) 5년(761년)에 간진에 의해 이 절에 계단원이 세워졌다. 이것은 승려가 되려는 자가 수계를 받기 위해 일일이 상경해야 하는 번거로움 없이 간제온지에서 수계를 받을 수 있다는 의미였다.[4]
헤이안 시대 이후 간제온지는 거듭되는 화재나 태풍 피해로 창건 당시의 모습은 하나하나 사라져갔다. 고헤이(康平) 7년(1064년)에는 화재로 강당과 탑 등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법당 경내의 불상은 대부분 이 화재 이후의 것이다. 고와(康和) 4년(1102년)에 다시 태풍이 불어 금당과 난다이몬(南大門) 등이 무너져 버렸다. 금당은 다시 복구되었지만, 고지(康治) 2년(11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고 만다.[4]
에도 시대인 간에이 7년(1630년)에 폭풍우로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금당이 붕괴되어, 간제온지는 폐찰된 것이나 다름없는 지경에까지 이른다. 그러나 이듬해인 간에이 8년(1631년)에 금당이, 겐로쿠 원년(1688년)에 강당(본당)이 당시의 번주(藩主) 구로다 가(黒田家)에 의해 재건되었고, 간신히 고찰로써의 구색은 갖출 수 있었다.[5]
헤이안 시대 이후 도다이지(東大寺)의 말사(末寺)였던 간제온지는 메이지(明治) 이후 천태종 사찰이 되었다. 1913년(다이쇼 2년)부터 2년에 걸쳐 심하게 훼손된 여러 불상들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패전 뒤인 1959년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보물창고가 완성되었는데 이는 사찰의 문화재 수장고로써 이른 시기에 지어졌던 것이었다. 보물창고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세 구의 불상(마두관음, 불공견삭관음, 십일면관음)을 비롯해 금당과 본당(강당)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들이 수장 ・ 공개되어 있다.[5]
2. 4. 근현대
헤이안 시대 이후 간제온지는 거듭되는 화재나 태풍 피해로 창건 당시의 모습을 잃었다. 고헤이 7년(1064년)에는 화재로 강당과 탑 등이 소실되었다. 현존하는 법당 경내의 불상은 대부분 이 화재 이후의 것이다. 고와 4년(1102년)에는 태풍으로 금당과 난다이몬(南大門) 등이 무너졌다. 금당은 다시 복구되었지만, 고지 2년(1143년)에 화재로 다시 소실되었다.에도 시대인 간에이 7년(1630년) 폭풍우로 당시 유일하게 남아있던 금당이 붕괴되어, 간제온지는 폐찰과 다름없는 상황에 이르렀다. 그러나 이듬해인 간에이 8년(1631년)에 금당이, 겐로쿠 원년(1688년)에 강당(본당)이 당시의 번주(藩主) 구로다 가에 의해 재건되어 고찰로써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헤이안 시대 이후 도다이지의 말사(末寺)였던 간제온지는 메이지 이후 천태종 사찰이 되었다. 1913년(다이쇼 2년)부터 2년에 걸쳐 심하게 훼손된 여러 불상들의 수리가 이루어졌다. 1959년에는 철근 콘크리트로 된 보물창고가 완성되었는데, 이는 사찰의 문화재 수장고로써 이른 시기에 지어진 것이었다. 보물창고에는 높이 5미터에 달하는 세 구의 불상(마두관음, 불공견삭관음, 십일면관음)을 비롯해 금당과 본당(강당)에 안치되어 있던 불상들이 보관, 전시되어 있다.
3. 주요 문화재
간제온지에는 국보와 다수의 조각상, 기타 중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7] 1959년 경내에 철근 콘크리트조 보장(보물 창고)이 완성된 이후 대부분의 불상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간제온지 소유의 불상 중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5건(18구)에 달하며, 이 중 성관음 입상은 강당에 안치, 아미타여래 입상은 규슈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으며, 나머지 13건(16구)은 보장으로 옮겨졌다.
| 시대 | 명칭 | 비고 |
|---|---|---|
| 나라 시대 | 범종 | 국보[7] |
| 헤이안 시대 | 木造阿弥陀如来坐像|목조아미타여래좌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阿弥陀如来立像|목조아미타여래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坐像|목조관음보살좌상일본어 | 1066년[10]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吉祥天立像|목조길상천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四天王立像|목조사천왕입상일본어 세트 | [14] |
| 헤이안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1069년[16]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1242년[17] |
| 헤이안 시대 | 木造大黒天立像|목조대흑천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地蔵菩薩半跏像|목조지장보살반가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地蔵菩薩立像|목조지장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馬頭観音立像|목조마두관음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毘沙門天立像|목조비사문천입상일본어 |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不空羂索観音立像|목조불공견삭관음입상일본어 | 1222년[23]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舞楽面|목조무악면일본어 3점 | [24] |
| 가마쿠라 시대 | 石造狛犬|석조고마이누일본어 | |
| 나라 시대 | 銅製天蓋光心|동제천개광심일본어 | [26] |

간제온지에 있는 불상들의 특징으로는 지방색이 옅은 도풍(都風, 수도풍)의 작풍을 가진 상이 많고, 녹나무 재를 사용하는 상이 많은 것(헤이안 시대 이후의 일본 목조 불상은 일반적으로 노송나무 재가 많다)에 더해, 장륙상(丈六像)이 5구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장륙상이란, 경전에 석가모니의 신장이 1장 6척이라고 기록된 데서, 이 높이를 기준으로 제작된 불상을 말한다(입상의 경우 상고 약 4.8m, 좌상의 경우 절반인 약 2.4m).
- 목조 성관음 좌상: 원래 강당 본존. 중요 문화재 지정 명칭은 "목조 관음보살 좌상"이다.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나무 조각들을 조합하여 만든 기법). 상고는 3.21m이다. 1066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4.98m이다. 1069년에 조립한 것을 알 수 있다.
- 목조 성관음 입상: 원래 금당 안치, 현 강당 안치. 중요 문화재 지정 명칭은 "목조 관음보살 입상".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1.68m이다. 11세기의 작품.
- 목조 마두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5.03m이다. 사면 팔비(前後左右에 얼굴이 있고, 8개의 팔을 가짐)로 분노상을 나타낸다. 12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원래 금당 본존. 정인(じょういん)을 맺는다(무릎 앞에서 양손을 모아, 각 손의 제1·2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고, 다른 3손가락을 뻗음).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 2.2m이다.
- 목조 불공견삭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5.17m이다. 삼안 육비, 머리 위에 11개의 소면을 가짐. 1222년에 제작된 상이다.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3.03m이다. 1242년에 만들어졌다.
헤이안 시대의 観世音寺資財帳|관세음사자재장일본어(905년)은 도쿄에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었다.[27]
3. 1. 국보
간제온지에는 국보와 다수의 조각상, 기타 중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범종(공예품)
- : 나라 시대. 교토 묘심사의 종, 나라 다이마데라의 종 등과 함께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범종 중 하나로 여겨진다. 이 종의 정확한 주조 연대는 불명확하지만, 무술년(서기 698년)의 명문이 있는 묘심사 종과 같은 목형을 사용하여 주조된 형제 종으로 추정된다. 묘심사 종과 간제온지 종은 용두(최상부의 고리 부분)와 상대·하대(상대·하대)의 당초문 디자인이 다르지만, 종신의 전체 치수와 형태 등 세부 사항까지 일치한다. 간제온지 종에는 명문이 없지만, 갓 모양의 윗면에는 "天滿(천만)", 입술부 아래면에는 "上三毛(상삼모)" 등의 글자가 음각되어 있다. 종은 현재도 종루에 걸려 있다[34]。1897년 2월 18일, 당시 고사사 보존법에 의거하여 구 국보(현행법의 중요 문화재에 해당)로 지정, 1953년 11월 14일, 문화재 보호법에 의거하여 국보로 지정[35]。종소리는 일본의 소리 풍경 100선에도 선정되었다. 또한 스가와라노 미치자네가 다자이후에서 쓴 시에서 "都府の楼には纔に瓦の色を看る 観音寺にはただ鐘の声をのみ聴く(도부의 누각에는 겨우 기와의 색을 보고, 관음사에서는 다만 종소리만을 듣는다)"라고 읊었다[36]。
3. 2. 중요문화재
간제온지에는 국보와 다수의 조각상, 기타 중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7] 1959년 경내에 철근 콘크리트조 보장(보물 창고)이 완성된 이후 대부분의 불상이 그곳으로 옮겨졌다. 간제온지 소유의 불상 중 국가의 중요 문화재로 지정된 것은 15건(18구)에 달하며, 이 중 성관음 입상은 강당에 안치, 아미타여래 입상은 규슈 국립 박물관에 기탁되어 있으며, 나머지 13건(16구)은 보장으로 옮겨졌다.| 시대 | 명칭 | 비고 |
|---|---|---|
| 나라 시대 | 범종 | 국보[7] |
| 헤이안 시대 | 木造阿弥陀如来坐像|목조아미타여래좌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阿弥陀如来立像|목조아미타여래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坐像|목조관음보살좌상일본어 | 1066년[10]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吉祥天立像|목조길상천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四天王立像|목조사천왕입상일본어 세트 | [14] |
| 헤이안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1069년[16]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1242년[17] |
| 헤이안 시대 | 木造大黒天立像|목조대흑천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地蔵菩薩半跏像|목조지장보살반가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地蔵菩薩立像|목조지장보살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馬頭観音立像|목조마두관음입상일본어 | |
| 헤이안 시대 | 木造毘沙門天立像|목조비사문천입상일본어 |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不空羂索観音立像|목조불공견삭관음입상일본어 | 1222년[23] |
| 가마쿠라 시대 | 木造舞楽面|목조무악면일본어 3점 | [24] |
| 가마쿠라 시대 | 石造狛犬|석조고마이누일본어 | |
| 나라 시대 | 銅製天蓋光心|동제천개광심일본어 | [26] |
간제온지에 있는 불상들의 특징으로는 지방색이 옅은 도풍(都風, 수도풍)의 작풍을 가진 상이 많고, 녹나무 재를 사용하는 상이 많은 것(헤이안 시대 이후의 일본 목조 불상은 일반적으로 노송나무 재가 많다)에 더해, 장륙상(丈六像)이 5구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장륙상이란, 경전에 석가모니의 신장이 1장 6척이라고 기록된 데서, 이 높이를 기준으로 제작된 불상을 말한다(입상의 경우 상고 약 4.8m, 좌상의 경우 절반인 약 2.4m).
- 목조 성관음 좌상: 원래 강당 본존. 중요 문화재 지정 명칭은 "목조 관음보살 좌상"이다.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나무 조각들을 조합하여 만든 기법). 상고는 3.21m이다. 1066년 무렵에 제작된 것으로 보인다.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4.98m이다. 1069년에 조립한 것을 알 수 있다.
- 목조 성관음 입상: 원래 금당 안치, 현 강당 안치. 중요 문화재 지정 명칭은 "목조 관음보살 입상".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1.68m이다. 11세기의 작품.
- 목조 마두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5.03m이다. 사면 팔비(前後左右에 얼굴이 있고, 8개의 팔을 가짐)로 분노상을 나타낸다. 12세기 전반의 작품으로 판단된다.
-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원래 금당 본존. 정인(じょういん)을 맺는다(무릎 앞에서 양손을 모아, 각 손의 제1·2 손가락으로 고리를 만들고, 다른 3손가락을 뻗음).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 2.2m이다.
- 목조 불공견삭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녹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5.17m이다. 삼안 육비, 머리 위에 11개의 소면을 가짐. 1222년에 제작된 상이다.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원래 강당 안치. 노송나무 재의 요세기즈쿠리. 상고는 3.03m이다. 1242년에 만들어졌다.
아래는 보장(宝蔵)에 안치된 불상들이다.
- 목조 관음보살 좌상 (성관음 좌상)
- 목조 마두관음 입상
- 목조 불공견삭관음 입상 (부: 상 내 납입품, 지본 묵서 불공견삭신주심경, 감지 금자 법화경 권 제7, 소상(塑像) 두부 잔편 4개, 소상 심목)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부(附) 지본 묵서 닌지 3년(1242년) 9월 27일 조립기 1권
- 목조 아미타여래 좌상
- 목조 십일면관음 입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사천왕 입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대흑천 입상 - 헤이안 시대. 대흑천상으로서는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에 속한다.
- 목조 길상천 입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둔발 비사문천 입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지장보살 입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지장보살 반가상 - 헤이안 시대.
- 목조 관음보살 입상 (성관음 입상)
- 목조 아미타여래 입상 - 헤이안 시대. 규슈 국립박물관에 기탁.
- 석조 고마이누(狛犬) 2구 - 가마쿠라 시대.
- 목조 무악면(舞楽面) 3면 (료오 1, 나소리 2)
- 천개 광심(天蓋光心) - 규슈 국립박물관에 기탁
3. 3. 국가 사적
간제온지에는 국보와 다수의 조각상, 기타 중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 종류 | 명칭 | 제작 시기 | 비고 |
|---|---|---|---|
| 범종 | 梵鐘|범종일본어 | 나라 시대 | [7] |
| 조각상 | 木造阿弥陀如来坐像|목조아미타여래좌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阿弥陀如来立像|목조아미타여래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観音菩薩坐像|목조관음보살좌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1066년[10] |
| 조각상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観音菩薩立像|목조관음보살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吉祥天立像|목조길상천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四天王立像|목조사천왕입상일본어 세트 | 헤이안 시대 | [14] |
| 조각상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1069년[16] |
| 조각상 | 木造十一面観音立像|목조십일면관음입상일본어 | 가마쿠라 시대 | 1242년[17] |
| 조각상 | 木造大黒天立像|목조대흑천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地蔵菩薩半跏像|목조지장보살반가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地蔵菩薩立像|목조지장보살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馬頭観音立像|목조마두관음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毘沙門天立像|목조비사문천입상일본어 | 헤이안 시대 | |
| 조각상 | 木造不空羂索観音立像|목조불공견색관음입상일본어 | 가마쿠라 시대 | 1222년[23] |
| 가면 | 木造舞楽面|목조무악면일본어 3점 | 가마쿠라 시대 | [24] |
| 석상 | 石造狛犬|석조코마이누일본어 | 가마쿠라 시대 | |
| 거울 | 銅製天蓋光心|동제천개광심일본어 | 나라 시대 | [26] |
헤이안 시대의 観世音寺資財帳|관세음사자재장일본어(905년)은 도쿄에 있으며, 국보로 지정되었다.[27]
3. 4. 후쿠오카현 지정 유형문화재
간제온지에는 국보와 다수의 조각상, 기타 중요 문화재가 소장되어 있다.[7][10][14][16][17][23][24][26]금당 및 강당은 1957년 8월 13일에 지정되었다.[39]
4. 현대의 간제온지
현대에 이르러 간제온지는 과거의 문, 회랑 등이 사라지고 가람의 형태도 많이 변화하였다. 현재 경내에는 금당, 강당, 탑터, 종루, 보장, 승방터 등이 남아 있으며, 서쪽에는 계단원이 인접해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창건 당시 가람은 동서 93미터, 남북 78미터의 회랑으로 둘러싸여 있었으며, 동쪽에 오중탑, 서쪽에 금당이 배치된 독특한 구조였다. 이는 사이메이 천황과 관련된 가와라데라와도 공통점을 보이는 것으로, 두 절의 연관성을 짐작하게 한다.
현재 금당은 1631년에 재건된 건물로, 창건 당시 금당 자리에 동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강당은 1688년에 재건되었으며, "본당"이라고도 불린다. 강당 앞에는 나라 시대의 것으로 전해지는 돌절구가 있는데,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며, 한 단에 400kg이다.
탑터에는 탑 심초가 남아 있으며, 발굴 조사 결과 원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승방터는 강당 뒤에 위치하며, 남북 10미터, 동서 100미터 규모였다.
간제온지는 니시테쓰 다자이후선 니시테쓰 고조역에서 도보 약 10분 거리에 있으며, 버스나 자가용으로도 접근이 가능하다.
4. 1. 가람
과거 문, 회랑 등은 사라졌다. 현도에서 가로수길 참도를 북쪽으로 진행하여 남문 자리를 지나면, 약간 높은 광장이 있으며, 왼쪽에는 금당, 정면에는 강당이 세워져 있다. 이 외에도 광장 동쪽에는 탑터와 종루, 그 안쪽에는 보장, 강당 뒤편에 승방터가 있다. 또한 절 서쪽에 인접하여 계단원이 세워져 있다. "천하 삼계단" 중 하나로 여겨졌던 계단원의 후신이지만, 현재의 계단원은 관세음사(觀世音寺)와 별개 법인이며, 종파도 임제종이다.발굴 조사 결과, 창건 당시 가람은 동서 93미터, 남북 78미터의 회랑으로 둘러싸인 부지 동쪽에 오중탑, 서쪽에 금당이 세워졌으며, 회랑 남쪽 중앙에 중문, 북쪽 중앙에 강당이 세워져 있었다. 이들 중심 가람 남쪽에는 남대문, 북쪽에는 동서로 긴 승방이 있었으며, 많은 부속 건물이 있어 경내지는 사방 3정에 달했다. 금당은 남쪽이 아닌 동쪽을 정면으로 하여 오중탑과 마주보는 형태로 지어졌다. 금당을 동쪽으로 향하게 짓는 점은 아스카의 가와라데라와도 공통점을 보인다. 가와라데라는 관세음사와 마찬가지로 사이메이 천황과 관련된 절이며, 출토 기와 형식 등으로 보아 두 절의 연관성을 추정할 수 있다. 오중탑은 불에 탄 심초만 남아 있으며, 탑은 한 변이 6m로 추정된다.
; 남대문터
: 참도 양 옆에 몇 개의 초석이 남아 있다. 초석 자체는 창건 당시 것으로 추정되지만, 원래 위치를 유지하고 있지는 않다.
; 중문터
: 금당, 강당이 있는 광장 앞 돌계단 부근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지만, 초석 등 유구는 남아 있지 않다.
; 금당
: 입모양 기와를 덮은 간소한 건물로, 간에이 8년(1631)에 재건되었다. 경내 서쪽, 창건 당시 금당 자리에 동쪽을 향해 세워져 있다. 1959년 보장(수장고)이 생기기 전까지, 건물 안쪽(서쪽) 벽을 등지고 중앙에 본존 아미타여래 좌상을 안치하고, 그 좌우에 사천왕상 2체씩 안치했으며, 이들 앞에 석조 고마이누 한 쌍이 있었다. 또한 건물 안 북쪽 벽 가장자리에는 본존에 가까운 쪽부터 차례로 십일면관음입상, 대흑천입상, 지장보살반가상, 아미타여래입상, 남쪽 벽 가장자리에는 본존에 가까운 쪽부터 차례로 길상천입상, 지장보살입상, 두발비사문천입상, 성관음입상이 안치되어 있었다[31]。현재 이들 상은 보장 등으로 옮겨져, 건물 안에는 부동명왕 좌상이 안치되어 있다.
; 강당
: "본당"이라고도 한다. 경내 정면 안쪽 한 단 높은 위치에 남쪽을 향해 세워진, 입모양 기와를 덮은 2중 지붕 불당. 겐로쿠 원년(1688년) 재건. 1959년 보장(수장고)이 생기기 전까지, 높이 5미터 전후 거상 3체를 포함한 5체 관음상을 안치하고 있었다. 즉, 건물 안쪽(북쪽) 벽을 등지고 중앙에 본존 성관음 좌상을 안치하고, 그 왼쪽에 십일면관음입상(상고 5미터), 오른쪽에 불공견삭관음입상이 안치되었으며, 건물 안 동쪽 벽을 등지고 십일면관음입상(상고 3미터), 서쪽 벽을 등지고 마두관음입상이 안치되어 있었다[32]。현재 이들 상은 보장으로 옮겨져, 건물 안에는 원래 금당에 있던 성관음입상을 안치한다. 건물 주변에 남아 있는 초석은, 과거 창건 당시 것으로 여겨졌지만, 발굴 조사 결과, 현재 지표에 보이는 초석은 헤이안 시대 이후 것으로 확인되었다. 건물 왼편 앞에는 나라 시대 것이라고 전해지는 돌절구(碾磑)가 있다. 돌절구도 일본에서 가장 오래된 것이라고 하며, 한 단에 400kg이다.
; 탑터
: 종루 앞에 탑 심초가 남아 있으며, 직경 약 90cm 기둥 구멍이 있다. 발굴 조사 결과, 이 심초는 원래 위치에서 움직이지 않은 것으로 확인되었다.
; 승방터
: 강당 뒤에 있다. 엔기 5년 "자재장"에 보이는 승방 터로, 남북 10미터, 동서 100미터 규모였다. 현재 지표에 있는 초석은 실물이 아닌 레플리카이다[33]。
; 전 겐보 묘
: 강당 서쪽, 도로를 사이에 둔 민가 옆에 서 있는 부조 보협인탑. 나라 시대 승려 겐보 묘라고 전해지지만, 탑 자체는 중세 것이다.
4. 2. 교통
- 철도
- * 니시테쓰 다자이후선 니시테쓰 고조역에서 도보 약 10분 (800m)
- * 니시테쓰 다자이후선 다자이후역에서 도보 약 16분 (1300m)
- * 니시테쓰 덴진오무타선 도후로마에역에서 도보 약 15분 (1500m)
- 버스
- * 도후로마에역에서 마호로바호 기타타니 순환, 우치야마행, 혹은 다자이후역, 니시테쓰 고조역에서 마호로바호 도후로마에역행을 타고 "간제온지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후 바로
- * 하카타역에서 니시테쓰 버스 (400계통)로 "추요 학원 앞" 버스 정류장에서 하차, 도보 8분 (700m)
- 자가용
- * 규슈 자동차도다자이후 인터체인지에서 3.8k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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