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고당융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고당융은 삼국 시대 위나라의 관료로, 조조, 조비, 조예를 섬기며 간언을 통해 명성을 얻었다. 태산 태수 설제에게 임용되어 관직을 시작했으며, 조조의 초빙을 받아 승상군 연이 되었고, 조예의 치세에는 궁궐 건축을 비판하며 검소함을 강조했다. 그는 자연 재해와 관련된 상소를 여러 차례 올렸으며, 마지막 상소에서는 황족 번왕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 237년에 사망했으며, 아들 고당침이 작위를 이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237년 사망 - 경애황후
    경애황후는 촉한 소열제의 황태자비이자 후주 유선의 황후로, 223년 황후로 책봉되었으며 장비와 하후련의 딸이고 동생 또한 유선의 황후가 되었다.
  • 237년 사망 - 가범
    가범은 요동의 공손연의 부하로, 공손연의 반역을 간하다가 살해당했으며, 사마의가 공손연의 난을 평정한 후 그의 무덤을 후하게 받들고 후손에게 관직을 내렸다.
  • 조위의 시중 - 동소
    동소는 후한 말부터 위나라 초까지 활동한 정치가이자 책사로서, 원소 휘하에서 활동하다 조조에게 천거된 후 헌제 천도, 관도대전, 오환 정벌 등 중요한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며 위나라 건국과 안정에 공헌했다.
  • 조위의 시중 - 사마의
    후한 말기부터 삼국 시대 위나라의 정치가이자 군사가였던 사마의는 조조, 조비, 조예 3대에 걸쳐 중용되며 위나라의 권력을 장악했으나, 고평릉의 변을 일으켜 정권을 찬탈했다는 비판도 받는다.
  • 생년 미상 - 손니 알리
    손니 알리는 송가이 제국의 군주로서 니제르 강 유역을 장악한 후 팀북투와 젠네를 정복하고 군사력을 강화하여 제국을 확장했으며, 전통 신앙과 이슬람교 조화, 법에 의한 국가 통제, 무역 확립 등 내치에도 힘썼다.
  • 생년 미상 - 김조국
    김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정치인으로, 2019년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겸 당 중앙군사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었으며, 당 조직지도부 제1부부장으로 임명되었다.
고당융
기본 정보
이름고당융
원 이름고당륭
승평(升平)
시호정(貞)
출생153년
사망237년
시대삼국 시대
소속조위
직책의랑(議郞)
태자중서자(太子中庶子)
산기상시(散騎常侍)
중산태수(中山太守)
위위(衛尉)
광록훈(光祿勳)
사공(司空)
봉호현향정후(顯鄉亭侯)
아버지고당표(高堂表)

2. 생애

고당융은 젊은 시절 유학생이 되어, 태산 태수 설제에게 독우로 임명되었다. 213년조조에게 불려가 역성 으로 조조의 아들 조휘를 섬겼다. 조조가 죽었을 때 조휘가 아버지의 중에 수렵을 즐기자 심하게 간하였다. 이후 조예가 평원왕이던 시절 그의 를 맡았고, 조예즉위급사중, 박사, 부마도위, 산기상시, 시중, 광록훈을 역임했다. 조예가 궁전 건축을 성대하게 하는 것에 대해 여러 차례 간언하였다.

사망 연도는 불분명하지만, "삼국지" 위서 고당륭전에 "장제봉선을 실시하도록 조예에게 진언했고, 조예가 고당륭에게 봉선의 의례를 작성하게 하던 중 고당륭이 사망하자 '하늘이 나의 사업을 이루어주지 않으려는 것인가'라고 황제가 탄식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조예 재위 기간(239년 이전)에 사망한 것으로 보인다.[4]

위서 방기전에 인용된 마균의 기사에는, 마균이 지남차를 완성하기 전에 고당융과 진랑이 "지남차 등은 옛 기록을 적당히 쓴 것 뿐이다"라고 주장하며 마균을 조롱했다고 기록되어 있다.[1]

2. 1. 관직 생활

태산 태수 설제에게 임용되어 관직 생활을 시작했는데, 독군과 태수가 싸우자 독군을 꾸짖고 관직을 버리고 제남으로 피난했다.[4]

건안 18년(213년), 조조의 초빙을 받아 승상군의연이 되었고, 역성후문학이 되었다가 상으로 전임했다. 문제가 즉위한 후인 황초 연간에 당양장을 지내고 평원왕 조예를 맡았다. 평원왕이 황제가 된 후(명제) 급사중·박사·부마도위를 맡았다.[4]

명제는 청룡 연간 이후 궁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차례 궁궐 역사를 일으켰다. 고당융은 자연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인간의 행동과 연관지어 해석하고, 명제의 행동이 법도를 지나쳐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때문에 이러한 재해가 일어나는 것이라 주장하며 궁궐을 검소하게 하고 건축에 지나치게 힘쓰지 말 것을 주장했다.[4] 또 당시 법률이 매우 엄격하여 상소를 올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근본적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법률에만 의지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4]

광록훈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명제는 고당융의 간언을 따르지 않고 더욱 궁전을 성대하게 지었으며 각지에 또 건축 역사를 일으켰다. 고당융은 물난리가 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하늘의 이치와 당시의 위급한 정세를 논하였다. 질병이 위독해지자 마지막 상소를 올렸으며, 자연 재해와 연관하여 신하들이 병권을 쥐는 것을 경계하여 황족 번왕들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4]

경초 원년(237년)[5], 고당융은 위의 상소를 올리고 죽었다. 아들 고당침(高堂琛)이 작위를 이었다.[4]

2. 2. 조예와의 관계

조예가 평원왕이던 시절에 그의 를 맡았다.[4] 조예가 황제가 된 후(명제)에는 급사중·박사·부마도위를 맡았다.[4]

명제는 청룡 연간 이후 궁전을 대대적으로 수리하고 여러 차례 궁궐 역사를 일으켰다. 고당융은 자연 재해가 일어날 때마다 이러한 현상들을 인간의 행동과 연관지어 해석하고, 명제의 행동이 법도를 지나쳐 화려하고 사치스럽기 때문에 이러한 재해가 일어나는 것이라 주장하며 궁궐을 검소하게 하고 건축에 지나치게 힘쓰지 말 것을 주장했다.[4] 또 당시 법률이 매우 엄격하여 상소를 올려 유교의 가르침에 따라 근본적으로 체제를 정비하고 법률에만 의지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4]

광록훈으로 승진했다. 그러나 명제는 고당융의 간언을 따르지 않고 더욱 궁전을 성대하게 지었으며 각지에 또 건축 역사를 일으켰다. 고당융은 물난리가 나자 다시 상소를 올려 하늘의 이치와 당시의 위급한 정세를 논하였다. 질병이 위독해지자 마지막 상소를 올렸으며, 자연 재해와 연관하여 신하들이 병권을 쥐는 것을 경계하여 황족 번왕들을 세울 것을 주장했다.[4]

경초 원년(237년)[5], 고당융은 위의 상소를 올리고 죽었다.

2. 3. 죽음

경초 원년(237년)[5], 고당융은 상소를 올리고 죽었다. 아들 고당침(高堂琛)이 작위를 이었다.[4]

3. 일화

도의 독군이 설제와 논쟁했을 때, 설제를 이름으로 부르며 호통을 쳤다. 고당융은 칼자루에 손을 대고 독군을 꾸짖으며 말했다. "옛날 노 정공이 모욕당했을 때, 중니(공자)는 계단을 올라가 꾸짖었고, 조 혜문왕이 진나라거문고를 연주하게 되었을 때, 인상여진왕에게 항아리(옹기. 타악기로 사용)를 치게 했습니다.[2] 아랫사람 앞에서 주군을 이름으로 부르는 것은, 도의상으로 쳐 죽여야 할 일입니다." 독군은 새파랗게 질렸고, 설제는 황급히 일어나 그를 말렸다.

배송지는 위나라의 대(상서성)에서 "물고(物故)"의 의미에 대한 질문이 있었을 때, 고당융은 다음과 같이 대답했다고 생각한다. "이 말의 의미는 선사로부터 들었는데, '''물'''은 '''무'''의 뜻이고, '''고'''는 '''사'''의 뜻이니, 두 번 다시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의미입니다."[3]

참조

[1] 서적 三国志
[2] 문서 소焼きの器。瓦盆
[3] 서적 三国志 蜀志「劉二牧伝」の注
[4] 서적 삼국지 권25 신비양부고당륭전 중 고당륭전
[5] 서적 한진춘추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