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레카와 긴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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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고레카와 긴조는 일본의 사업가이자 투자가로, 주식 시장에서 시세 조작으로 이름을 알렸다. 가난한 어부의 아들로 태어나, 어린 시절부터 무역, 광업 등 다양한 사업 분야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에는 주식 투자를 시작하여 큰 성공을 거두었고, 1980년대에는 스미토모 금속 광산 주식 투자를 통해 막대한 이익을 얻어 '고액 납세자' 순위 1위에 오르기도 했다. 그는 '실천파 이코노미스트'를 자처하며, 검소한 생활과 사회 기부를 실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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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카와 긴조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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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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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름 | 고레카와 긴조 |
원어 이름 | 是川 銀蔵 |
로마자 표기 | Korekawa Ginzō |
출생 | 1832년 |
사망 | 1919년 |
국적 | 일본 |
직업 | 투자가 |
생애 | |
출생지 | 데와국아키타현가즈노군 하나와 |
상세 정보 | 어린 시절에는 간장, 술 등을 취급하는 상점에서 일함. 1877년 주식 회사 조직을 설립하여 광산 개발에 참여. 닛폰유센, 오사카 쇼센, 홋카이도 탄광 철도 등의 주식을 매입하여 거액의 이익을 얻음. 러일 전쟁에서 일본의 승리를 예측하고 관련 주식을 대량 매입하여 막대한 재산을 축적함. 1907년 공황으로 인해 큰 손실을 입었으나,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주식 시장이 회복되면서 다시 재산을 회복함. "광산왕", "주식의 신" 등으로 불림. |
2. 약력
효고현 아코시에서 가난한 어부 집안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야마(小山) 가문은 아코시에서 유명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했다. 고등소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 요시모토(好本) 상회에서 견습 점원으로 일했다. 1914년 요시모토 상회가 도산하자, 중국 칭다오에서 일본군 관련 상인이 되었다.[2][3][4]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함석판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1933년 오사카시 도지마(堂島)에 '쇼와 경제연구소(昭和經濟硏究所)'를 설립하고, 도서관에서 투자 이론을 독학했다.[7][8] 1938년 조선에 고레카와광업을 설립, 종업원 1만 명을 거느린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해방 후 몰수되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과 교류하며 1944년 고이소 내각 출범 시 입각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했다.[13]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면서도 인맥을 통해 자금을 융통받아 사업가로 재기하였다.
전후 1960년 오사카부 센보쿠 뉴타운 개발 과정에서 토지 투기로 3억엔을 벌었다.
만년인 1970년대부터 일본 시멘트(1976년), 도와 광업(1979년), 후지야(不二屋)(1982년), 마루젠 석유(1983년), 헤이와 부동산 주식을 매입하며 투기전에서 이름을 알렸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스미토모 금속 광산 투기가 가장 유명하다.
2. 1. 초기 생애
효고현 아코시에서 가난한 어부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그의 구성(舊姓)은 고야마(小山)였는데,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하기 전까지 아코에서 유명한 집안이었다.[2] 3살 때 가족이 고베로 이사했고, 심상소학교를 졸업한 후 14살에 무역상 요시모토(好本) 상회의 견습생이 되었다.[3] 1914년 요시모토 상회가 도산하자, 런던을 목표로 출국했지만 중계지인 중국 다롄에 도착했을 때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했다. 일본군이 산둥반도 룽커우에 상륙하자, 군과의 거래를 목표로 룽커우로 이사했다. 군이 칭다오로 향하자 걸어서 따라갔다. 도중에 돈이 떨어져 생사를 헤매면서도 군의 출입 상인이 되었고, 무역 회사 코야마 요코를 설립했다. 식료품과 오동나무를 취급하여 이익을 올렸지만, 군 고관에게 향응을 제공한 혐의로 1915년에 뇌물 제공 혐의로 헌병에 체포되었지만, 미성년자였다는 이유 등으로 무죄가 되어 일본으로 귀국했다.[4]약 반년 후, 다시 칭다오로 건너가 현지 통화인 일린전을 환전하여 금속 자원으로 판매하는 사업을 시작했다. 일린전은 아연, 구리, 납의 합금으로, 전쟁으로 인한 금속 자원 가격 폭등으로 2배 이상의 가치로 팔렸기 때문에 큰 이익을 올렸다. 그러나 1916년에 쑨원을 지원하는 일본군에게 빌려준 30000JPY을 변제받지 못했고, 12월에 독일로부터의 강화 타진으로 시세 하락의 영향으로 도산했다.[5]
일본으로 돌아와 매형의 인연으로 타츠노시에서 조개 단추 공장을 경영했지만, 자유롭게 활동하기 위해 공장을 형에게 양도하고 1919년에 오사카로 이사했다. 철강 공장을 만들고, 아연 도금 공장을 인수하여 오사카 신테츠 아연 도금 주식회사를 설립, 260명의 직원을 고용하게 되었다.[6] 1923년에 관동 대지진의 소식을 듣자 판자집 수요를 예상하고 함석판과 못을 사재기하여 거액의 이익을 얻었다. 이 거래로 얻은 이익은 타인의 불행에 의한 것이라며, 절반을 오사카부에 기부했다.[7]
1927년에 쇼와 금융 공황이 발생하고, 예금했던 은행이 파탄나는 등의 이유로 도산해 버렸다. 채권자들은 이해심이 있었고, 사업의 지속을 지지했지만 코레카와는 경영을 채권자에게 맡기고 은퇴했다. 공황을 경험한 것에서 자본주의에 대해 회의적이 되어, 3년간 도서관에 다니면서 세계 정세, 투자 이론을 독학했다. 그 위에 공황은 경기 순환에 의해 발생하는 예측 가능한 변동이라고 보고, 자본주의의 구조는 쇠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8]
1931년, 34세에 70JPY을 밑천으로 오사카 증권 거래소에서 주식 투자를 시작하여, 연말까지 7000JPY으로 늘렸다.[9][10] 1933년에 오사카 도지마에 '쇼와 경제 연구소'(후의 코레카와 경제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와 지도를 했다. 상품 선물을 취급하는 오사카 삼품 거래소에서는 1935년에 면화의 세계적인 흉작을 예상하고 면화를 사들여 판매하는 쇼와 면화 주식회사 코마무라 시헤이와 작전을 수개월 동안 계속했다. 매수세가 우세하여 약 300만엔의 이익이 있었지만, 합의 해소를 거절한 후에 시세가 반전되어, 오히려 1만 수천 엔의 손실을 입었다.[11]
각국의 경제 동향 조사에서, 미국, 영국, 소련이 수면 아래에서 극동을 향한 군비 확장을 하고 있음을 예측하고, 군, 재계, 언론에 경고를 했다. 당시에는 미영과의 친선 외교가 주류였고 헌병대 등으로부터 조사를 받았지만, 기획원의 누마타 타카조의 이해를 얻어 육군에 진언하게 되었다.[12]
2. 2. 청년 사업가
효고현 아코시에서 가난한 어부의 7형제 중 막내로 태어났다. 고야마(小山) 가(家)는 아코에서 유명한 집안이었지만 메이지 유신으로 몰락하였다. 고등소학교 졸업 후, 무역회사인 요시모토(好本) 상회의 견습 점원이 되었다. 1914년 요시모토 상회가 도산하자, 중국 칭다오에서 일본군 출입 상인이 되었다.[2][3][4]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함석판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 1933년 오사카시 도지마(堂島)에 '쇼와 경제연구소(昭和經濟硏究所)'를 설립, 도서관에서 투자이론을 독학하였다.[7][8] 1938년 조선에 고레카와광업을 설립, 종업원 1만 명을 거느린 조선 유수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해방 후 몰수되었다.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과 교류하며 1944년 고이소 내각 출범 시 내각의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3]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면서도 인맥을 통해 자금을 융통받아 사업가로 재기하였다.
전후 1960년 오사카부 센보쿠 뉴타운 개발에서 토지 투기로 3억엔을 벌었다.
만년인 1970년대부터 일본 시멘트(1976년), 도와 광업(1979년), 후지야(不二屋)(1982년), 마루젠 석유(1983년), 헤이와 부동산 주식을 매입하며 투기전에서 이름을 알렸다. 1981년부터 1982년까지 스미토모 금속 광산 투기가 가장 유명하다.
2. 3. 투자가로서의 성공
1923년 관동대지진 직후 함석판 장사로 큰돈을 벌었다.[7] 1933년 오사카시 도지마(堂島)에 '쇼와 경제연구소(昭和經濟硏究所)'를 설립하였다.[8] 도서관에 다니며 투자이론을 독학으로 공부했다고 한다.[8] 1938년 조선에 고레카와 광업을 설립, 종업원 1만 명을 거느린 조선 유수의 대기업으로 성장했지만 해방 후에 몰수되었다.[13]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과 교류하며 1944년 고이소 내각 출범 시 내각의 요청을 받았으나 거절하였다.[13] 여러 번 실패를 겪으면서도 인맥을 이용하여 자금을 융통받아 사업가로서 다시 일어난 인물로 알려져 있다.전후 1960년 오사카부 센보쿠(泉北)뉴타운 개발에서 토지 투기로 3억엔을 벌었다.
만년인 1970년대에 들어 1976년 니혼(日本) 시멘트, 1979년 도와(同和) 광업, 1982년 후지야(不二屋), 1983년 마루젠(丸善) 석유, 헤이와(平和) 부동산 주식을 사들여 투기전에서 이름이 알려졌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친 스미토모 금속 광산 투기였다.
1981년 9월 금속광업사업단(현 독립행정법인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이 가고시마현 히시카리(菱刈) 광산에서 금광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고레카와는 조선에서 광산 경영 경험을 바탕으로 재빨리 주목하여 현지 시찰 후,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을 사들였다. 8월 하한가 203JPY부터 시작된 주가는 투기전 양상을 보이며 다음 해 3월 대폭락했다가, 고레카와가 가진 인접 광구를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인수하고 광업 개발에 착수한다고 발표한 후 4월 상한가 1230JPY으로 뛰어올랐다.
고레카와는 약 1500만 주(본인에 따르면 명의 개서를 한 주식 수는 1400만 주)를 사들여 200억엔의 거액의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출전: 니혼게이자이신문 1982년 5월 14일 자) 1982년 3월 말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 720만 주를 보유해 제7위 주주가 되었고(그 밖에 소유한 법인 명의로는 약 650만 주), 1983년 고액 납세자 명단(조자반즈케(長者番付))에서 신고액 28.990000000000002억엔으로 전국 1위에 올랐다.
2. 4. 스미토모 금속 광산 투자
1981년 9월, 금속광업사업단(현 독립행정법인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이 가고시마현 히시카리 광산에서 금 광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고레카와는 조선에서 광산을 경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재빨리 주목하여 현지를 시찰한 뒤,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을 사들였다. 주식 매입 전인 8월 최저가 203JPY에서 시작된 주가는 투기전 양상을 보이며 이듬해 3월에 대폭락했다. 이후 고레카와가 가진 인접 광구를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인수하여 광업 개발에 착수한다고 발표한 뒤, 4월 최고가 1230JPY으로 주가는 뛰어 올랐다.고레카와는 약 1500만 주(본인에 따르면 명의 개서를 한 주식 수는 1400만 주였다)를 사들여 200억엔이라는 거액의 이익을 챙겼다고 한다[14].1982년 3월 말에는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 720만 주를 보유해 제7위 주주가 되었다.(그 밖에 소유한 법인 명의로는 약 650만 주) 1983년에 발표된 고액 납세자 순위(조자반즈케라고도 한다)에서는 신고액 28억 9090만 엔으로 전국 1위에 올랐다.
3. 인물 및 평가
고레카와 긴조는 '실천파 이코노미스트'를 자처했으며, '고레긴(是銀)'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는 검소한 생활을 했고, 젊은 시절을 보낸 오사카시에 고액을 기부했다. 1979년에는 사재 14억엔을 들여 고레카와 장학재단(오사카 부)을 설립하기도 했다.[1]
만년인 1991년에는 소득세 6.8억엔을 체납하여 자서전 '파란에 산다(波乱を生きる)'(한국에서는 '일본 주식시장의 신, 고레카와 긴조'라는 이름으로 출간)의 인세가 오사카 국세국에 압류되기도 했다.[15] 그는 자서전에서 "주식의 이익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고 밝혔다.[16] 그는 마지막 시세 조종사로 불리기도 하지만, 스스로는 "실천파 이코노미스트"라고 자임했다. 주식 투자와 관련하여 많은 격언과 원칙을 남긴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는 초등학교 은사인 사사이 잇초가 중의원 의원이 되면서, 그 인연으로 고이소 구니아키 조선 총독과 친분을 쌓았다.[17]
3. 1. 가족 관계
고레카와 긴조는 아들 고레카와 마사아키 외에 다른 가족에 대한 언급은 없다. 고레카와 마사아키에 대한 정보는 다음과 같다.아들: 고레카와 마사아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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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조는 술과 여자 관계가 없었다고 전해진다.
4. 투자 철학
고레카와 긴조는 투기꾼으로 불리기도 했지만, 스스로는 '실천파 이코노미스트'라고 자칭했으며 '고레긴(是銀)'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그는 검소하게 생활했고, 젊은 시절 살았던 오사카 시에 고액을 기부하기도 했다. 1979년에는 사재 14억 엔을 털어 고레카와 장학재단(오사카 부)을 설립했다.[2]
주식 투자와 관련하여 그가 남긴 격언과 원칙은 많이 알려져 있다. 1927년 쇼와 금융 공황으로 도산한 후, 3년간 도서관에서 세계 정세와 투자 이론을 독학했다. 그는 공황이 경기 순환에 의해 예측 가능한 변동이며, 자본주의 구조는 쇠퇴하지 않는다고 판단했다.[8]
1931년 34세에 70엔으로 오사카 증권 거래소에서 주식 투자를 시작해 연말까지 7000엔으로 불렸다.[9][10] 1933년에는 오사카 도지마에 '쇼와 경제 연구소'(후의 고레카와 경제 연구소)를 설립하여 연구와 지도를 했다.[11]
만년에는 1976년 일본 시멘트, 1979년 도와 광업, 1982년 후지야, 1983년 마루젠 석유, 헤이와 부동산 등의 주식을 매입하며 시세 조작꾼으로 화제가 되었다. 특히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친 스미토모 금속 광산 주식 매집은 가장 잘 알려진 사례이다.
5. 저서
波乱万丈に生きて:相場に賭けた六十年|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시세에 건 60년일본어 고단샤, 1991년, ISBN 4-06-204047-6
相場師一代記|시세꾼 일대기일본어 쇼가쿠칸 문고, 1999년, ISBN 4-09-403471-4 ('파란만장한 삶을 살다: 시세에 건 60년'의 문고판)
6. 평가
투기꾼으로도 불리지만, 본인은 '실천파 이코노미스트'라고 자임했다고 한다. '고레긴(是銀)'이라는 애칭으로도 불렸다. 검소한 생활을 하였고, 젊은 시절 살았던 오사카시에 고액 기부를 하여 1979년에는 사재 14억엔을 털어 고레카와 장학재단(오사카부)을 설립하였다.[2]
만년인 1991년에는 소득세 6.8억엔을 체납하여 자서전 '파란을 살다(波乱を生きる)' (한국에서는 '일본 주식시장의 신, 고레카와 긴조'라는 이름으로 출간)의 인세를 오사카 국세국에 압류당했다는 보도(출처: 니혼게이자이신문 1991년 7월 22일자)도 있었으며, 자서전 내용대로 "주식의 이익은 한 푼도 남지 않았다"고 한다.[2] 그가 말했다고 전해지는 주식 투자 격언이나 원칙도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시세 조작꾼으로서 시장에서 화제가 된 것은 만년이 된 쇼와 50년대에 들어서였다. 1976년 일본 시멘트, 1979년 도와 광업, 1982년 후지야, 1983년 마루젠 석유, 헤이와 부동산 주식 매입 작전으로 이름이 알려졌다. 가장 잘 알려진 것은 1981년부터 1982년에 걸친 스미토모 금속 광산 작전이었다.[2]
1981년 9월, 금속광업사업단(현 독립행정법인 석유천연가스·금속광물자원기구)이 가고시마현 히시카리 광산에서 금 광맥을 발견했다고 발표했다. 고레카와는 조선에서 광업을 경영했던 경험을 바탕으로 가장 먼저 주목하여 현지 시찰 후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을 매입했다. 매입 전 8월 최저가 203JPY에서 작전주의 양상을 보이며 다음 해 3월 대폭락 후, 고레카와가 소유한 인접 광구를 스미토모 금속광산이 매입, 금광 개발에 착수한다고 발표한 후 4월 최고가 1230JPY까지 폭등했다. 고레카와는 약 1500만 주(본인 담화에서는 명의 변경을 한 것은 1400만 주)를 매입하여 200억엔의 거액을 벌었다고 한다.[14] 1982년 3월 말에는 스미토모 금속광산 주식 720만 주를 보유하여 제7위 주주가 되었다(그 외 소유 법인 명의로 약 650만 주). 1983년에 발표된 고액 납세자 순위에서는 신고액 2890.9억엔으로 전국 1위를 기록했다.
7. 고레카와 긴조를 모티브로 한 작품
쓰모토 아키라의 소설 《최후의 시세꾼》은 고레카와 긴조를 모델로 한 작품이다. 이 소설은 카도카와 문고에서 1988년에 출판되었으며(ISBN 4-04-171301-3), 2007년에 신장판(ISBN 978-4-04-171334-1)이 나왔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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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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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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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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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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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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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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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本経済新聞
1982-05-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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뉴스
日本経済新聞
1991-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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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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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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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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