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동 인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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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동 인씨는 중국 진나라 풍익대부 인서를 시조로 하는 한국의 성씨이다.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를 지낸 인빈을 통해 교동을 본관으로 삼았으며, 인공수는 원나라에 일본 정벌 중지를 요청하고 필도치가 되었고, 인당은 밀직사, 만호 등을 역임하며 왜구를 격퇴하고 석성부원군에 봉해졌다. 교동 인씨는 사직공파 등 여러 분파로 나뉘었으며, 국회의원 인태식, 인재근, 목사 인명진 등을 배출했다. 조선 시대에는 문과 1명, 무과 31명의 급제자를 냈고, 2015년에는 20,737명이 대한민국에 거주하는 것으로 조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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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동 인씨 - [성씨/가문]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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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한자 표기 | 喬桐 印氏 |
로마자 표기 | Gyodong In ssi |
주요 거주지 | 경기도 강화군 교동면 |
기원 | 한국 |
역사 | |
창시자 | 인서 |
인물 | |
관련 인물 | 인교진 인재근 |
기타 정보 | |
웹사이트 | 교동인씨대종회 |
2015년 인구 | 20,737명 |
2. 역사
33세손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 문하시사를 지내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지면서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였다. 인빈의 아들 인완(印完)은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인규(印珪)는 판이부상서를 역임했다. 증손 인현원(印玄元)은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현손 인정(印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5]
39세손 인공수와 41세손 인당 대에 가문이 크게 번성하였다. 인공수는 고려 충렬왕 때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건너가 일본 정벌 중지를 요청하였고, 인당은 충목왕 때 밀직사가 된 후 여러 관직을 거치며 왜구를 격퇴하고 원나라의 장사성 토벌에 참여하는 등 큰 공을 세웠다.[5]
인당의 아들 인안(印安)은 전리 판서를, 인해(印海)는 이부시랑을 지냈다. 손자 인원보(印原寶)는 서북면 체찰사, 인중보(印重寶)는 상장군을 각각 역임했다.[5]
조선시대에는 대장군 인저(印著), 절충장군 인철관(印鐵寬), 임진왜란 때 공을 세운 인발(印潑), 도총부 부총관 인이헌(印以憲), 참판을 역임한 인명조(印明朝), 인근영(印瑾永), 인석신(印錫信), 인상혁(印相赫) 등이 활약했다. 인석보(印錫輔)는 1892년(고종 28년)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 홍문관 교리 등을 지내고 규장각 부제학에 추증되었다.
2. 1. 시조 및 초기 역사
시조 인서(印瑞)는 중국 진(晉)나라 풍익대부로서 300년(기림이사금 3) 사신으로 신라에 들어와 정착하여 살면서 아찬의 벼슬을 지냈다.[5]33세손 '''인빈'''(印份)이 고려 인종 때 한림학사(翰林學士), 문하시사를 지내고 교수부원군(喬樹府院君)에 봉해짐으로써 후손들이 본관을 교동으로 하였다.[5] 인빈의 아들 인완(印完)은 형부상서를 거쳐 문하시중 평장사에 올랐으며, 손자 인규(印珪)는 판이부상서를 역임했다.[5] 증손 인현원(印玄元)은 응양위 대장군을 거쳐 호부상서를, 현손 인정(印貞)은 평장사를 역임하여 가문을 중흥시켰다.[5]
39세손 '''인공수'''(印公秀)는 1275년(충렬왕 1)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전함·병량(兵糧)을 마련하는 데 대한 애로를 진정하고, 일본정벌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며, 필도치(必闍赤)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5]
41세손 '''인당'''(印璫)은 1345년(충목왕 1) 밀직사가 되었고, 1351년(충정왕 3)에는 만호로서 서강(西江)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았다.[5] 1354년에는 전라도만호로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이해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져 원나라의 요구로 장사성(張士誠) 토벌군에 파견되었다.[5] 1356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서북면병마사로서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공파하였으며, 7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5] 묘소는 개성시에 있다.
인당의 아들 인안(印安)은 전리 판서를, 인해(印海)는 이부시랑을 지냈다.[5] 손자 인원보(印原寶)는 서북면 체찰사, 인중보(印重寶)는 상장군을 각각 역임했다.[5]
2. 2. 고려시대 주요 인물
- '''인공수(印公秀)''' : 1271년(원종 12) 장군으로 몽골에 가서 고려군이 진도에 있던 삼별초를 칠 때 몽골 장군 아해(阿海)가 후원하지 않은 사실을 고하여 그를 소환하게 하였다. 같은 해 보성천호(寶城千戶) 등과 함께 몽골에 가서 둔전(屯田)의 폐지와 왕의 친조(親朝)를 주청하고 돌아왔다. 또한, 같은 해 8월에는 삼별초의 위협으로 진도에 간 사람들을 본거지에 돌려보내라는 몽제(蒙帝)의 명을 따르지 않는 몽고원수 흔도(忻都)를 고발하러 몽골에 다녀왔다. 원종에게 원나라 풍속을 따라 복색을 고치도록 권했다. 1275년(충렬왕 1) 대장군으로 시중 김방경과 함께 원나라에 가서 전함·병량(兵糧)을 마련하는 데 대한 애로를 진정하고, 일본 정벌의 중지를 요청하였다. 뒤에 필도치(必闍赤)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6]
- '''인당(印璫)''' : 1343년(충혜왕 복위 4)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왕의 폐신(嬖臣)인 임신(林信) 등 9인을 원나라에 압송하였으며, 1345년(충목왕 1) 밀직사가 되었다. 1351년(충정왕 3) 만호로서 전 밀직 이권(李權)과 함께 자연도(紫燕島)와 삼목도(三木島)에 침입한 왜구를 서강(西江)에서 막았다. 1352년(공민왕 1) 포왜사(捕倭使)로서 왜구와의 결전을 회피하여 투옥되었다. 1354년 전라도만호로서 왜구를 격파하고, 같은 해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져 원나라의 요구로 장사성 토벌군에 파견되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1356년 첨의평리(僉議評理)가 되고, 이어 서북면병마사가 되어 동지밀직사사(同知密直司事) 강중경(姜仲卿) 등과 함께 압록강 서쪽 8참(站)을 공략하였는데, 이때 강중경이 술에 취하여 말을 듣지 않는다고 그를 베었으며, 이어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공파하였다. 같은 해 7월 관제 회복으로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 묘소는 개성시에 있다.[5]
- '''인해(印海)''' : 1377년(우왕 3) 양광도(楊廣道) 부원수가 되었고, 5월 왜구가 경양과 안성(安城)을 침범하니,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겁내고 나약하여 싸우지 못하므로, 부원수로서 양천(陽川) 원수 홍인계(洪仁桂)를 불러 후퇴하여 가천역(加川驛)에 주둔하게 하고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맞아 치려고 하였으나, 적이 알고 다른 길로 갔다. 11월 청주옥(淸州獄)에 갇혀 이산(伊山)에서 패배한 죄를 국문당하였다. 1383년 9월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을 침구하고, 또 회양부와 평강현을 함락시키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西海道)의 정병(精兵)을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며, 전정당상의(前政堂相議) 남좌시(南佐時) 등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김화에서 패전하였다.
- '''인원보(印原寶)'''( ? ~ 1388년) : 1379년(우왕 5) 서북면체찰사(西北面體察使)를 역임하고, 1388년(우왕 14)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7]
2. 3. 조선시대
인공수(印公秀)는 1275년(충렬왕 1) 대장군으로 원나라에 가서 전함·병량(兵糧)을 마련하는 데 대한 애로를 진정하고, 일본 정벌의 중지를 요청하였으며, 필도치(必闍赤)가 되어 기무(機務)에 참여하였다.[5] 1271년(원종 12) 장군으로 몽골에 가서 고려군이 진도에 있던 삼별초를 칠 때 몽골 장군 아해(阿海)가 후원하지 않은 사실을 고하여 그를 소환하게 하였다. 이 해에 다시 보성천호(寶城千戶) 등과 함께 몽골에 가서 둔전(屯田)의 폐지와 왕의 친조(親朝)를 주청하고 돌아왔다. 또한, 이 해 8월에는 삼별초의 위협으로 진도에 간 사람들을 본거지에 돌려보내라는 몽제(蒙帝)의 명을 따르지 않는 몽고원수 흔도(忻都)를 고발하러 몽골에 다녀왔다. 원종에게 원나라 풍속을 따라 복색을 고치도록 권했다.[6]인당(印璫)은 1345년(충목왕 1) 밀직사가 되었고, 1351년(충정왕 3)에는 만호로서 서강(西江)에서 침입한 왜구를 막았다. 1354년에는 전라도만호로서 왜구를 격파하였으며, 이해 석성부원군(碩城府院君)에 봉해져 원나라의 요구로 장사성(張士誠) 토벌군에 파견되었다. 1356년 첨의평리(僉議評理)를 거쳐 서북면병마사로서 압록강을 건너 파사부(婆娑府) 등 3참을 공파하였으며, 7월 참지정사(參知政事)가 되었다.[5] 1343년(충혜왕 복위 4) 충혜왕이 원나라에 잡혀갈 때 왕의 폐신(嬖臣)인 임신(林信) 등 9인을 원나라에 압송하였다. 1352년(공민왕 1)에는 포왜사(捕倭使)로서 왜구와의 결전을 회피하여 투옥되었다가 이듬해 귀국하였다. 묘소는 개성시에 있다.
인당의 아들 인안(印安)은 전리 판서를, 인해(印海)는 이부시랑을 지냈다. 인해는 1377년(우왕 3) 양광도(楊廣道) 부원수가 되었고, 5월 왜가 경양과 안성(安城)을 침범하니, 양광도 원수 왕안덕(王安德)이 겁내고 나약하여 싸우지 못하므로, 부원수로서 양천(陽川) 원수 홍인계(洪仁桂)를 불러 후퇴하여 가천역(加川驛)에 주둔하게 하고 적이 돌아가는 길에서 맞아 치려고 하였으나, 적이 알고 다른 길로 갔다. 11월 청주옥(淸州獄)에 갇혀 이산(伊山)에서 패배한 죄를 국문당하였다. 1383년 9월 왜적이 강릉부와 김화현을 침구하고, 또 회양부와 평강현을 함락시키니, 경성에 계엄을 실시하고 평양과 서해도(西海道)의 정병(精兵)을 징발하여 호위하게 하며, 전정당상의(前政堂相議) 남좌시(南佐時) 등과 함께 그들을 공격하였으나 김화에서 패전하였다.
인당의 손자 인원보(印原寶)는 서북면 체찰사를, 인중보(印重寶)는 상장군을 각각 역임했다. 인원보는 1379년(우왕 5) 서북면체찰사(西北面體察使)를 역임하고, 1388년(우왕 14) 판밀직사사(判密直司事)에 이르렀다.[7]
대장군을 지낸 인저(印著)와 절충장군 인철관(印鐵寬), 선략장군으로 임진왜란 때 정난원종 이등공신에 오른 인발(印潑), 도총부 부총관 인이헌(印以憲), 참판을 역임한 인명조(印明朝), 인근영(印瑾永), 인석신(印錫信), 인상혁(印相赫) 등이 가문을 빛냈다.
인석보(印錫輔, 1852년 ~ 1896년)는 1892년(고종 28)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 홍문관 교리(弘文館校理)등을 지내고 규장각 부제학(奎章閣副提學)에 추증되었다.
3. 분파
분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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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직공파 |
통훈공파 |
예공파 |
장령공파 |
승의랑공파 |
교위공파 |
선전관공파 |
직장공파 |
판관공파 |
송헌공파 |
참의공파 |
직무공파 |
첨정공파 |
선교랑공파 |
부사공파 |
정랑공파 |
대원공파 |
참봉공파 |
홍주파 |
4. 현대 인물
5. 과거 급제자
교동 인씨는 조선시대에 문과 급제자 1명, 무과 급제자 31명을 배출하였다.[8]
인석보 |
인광억 | 인광훈 | 인광흡 | 인국신 | 인대선 |
인대수 | 인두찬 | 인두표 | 인문주 | 인벌 |
인사익 | 인사헌 | 인선기 | 인시우 | 인언광 |
인영필 | 인완 | 인원개 | 인원방 | 인원서 |
인원침 | 인의길 | 인의방 | 인의종 | 인진 |
인찬기 | 인찬징 | 인창기 | 인초선 | 인충신 |
인후득 |
인월규 |
인기 | 인수창 | 인신언 | 인재현 |
6. 항렬자
O돈(敦)
용(庸)O
주(胄)O
O영(迎)
신(晨)O
O희(熙)
오(旿)O
O래(來)
연(連)O
O순(醇)
기(璣)O
O복(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