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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첼리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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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교황 마르첼리노는 296년부터 304년까지 재위한 로마 가톨릭교회의 교황이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 치하에서 기독교 박해가 시작되기 전, 그는 기독교 신자 수를 늘리는 등 비교적 자유로운 환경을 제공했다. 그러나 갈레리우스의 반 기독교 운동으로 인해 박해가 시작되었고, 마르첼리노는 배교 또는 순교의 기로에 놓였다. 일부 자료에서는 그가 순교했다고 주장하지만, 다른 자료에서는 배교했다는 주장이 제기되어 논란이 있다. 그의 사망 시기와 장소, 순교 여부에 대한 기록이 일치하지 않으며, 사후 그의 축일은 삭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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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황 마르첼리노 - [인물]에 관한 문서
교황 정보
존칭 접두사교황 성
이름마르첼리노
직함로마 주교
교회초기 기독교
임기 시작296년 6월 30일
임기 종료304년
선임자가이우스
후임자마르첼로 1세
출생일미상
출생지로마 제국 로마
사망일304년
사망지로마 제국 로마
축일4월 26일 (가톨릭)
6월 7일 (세르비아 정교회)
성 마르첼리노 교황의 순교
성 마르첼리노 교황의 순교를 보여주는 중세 채색 삽화

2. 생애

리베리안 목록에 따르면 로마 출신인 마르첼리노는 프로젝투스의 아들로, 296년 6월 30일 교황 가이우스의 뒤를 이어 로마 주교가 되었다.[1] 그의 재위 초기에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지 않아 신자 수가 증가했다. 그러나 302년경 카이사르 갈레리우스의 영향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는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했으며, 이는 점차 강화되어 신자들에게 배교나 사형을 강요하는 수준에 이르렀다.

마르첼리노가 이 박해 시기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그가 잠시 우상에게 제물을 바쳤다가 회개하고 순교했다고 전하지만,[1] 5세기 도나투스파 주교 페틸리아누스는 그가 성서를 넘기고 배교했다고 주장했다.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페틸리아누스의 주장을 반박했다.[1][2] 또한, 마르첼리노는 주요 순교 기록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으며, 그의 순교 사실 자체도 확실하지 않다.

사망 및 매장 기록 역시 불분명하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그가 304년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의 프리실라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한 반면, 리베리안 목록은 10월 25일을 매장일로 제시한다.[2] 그의 사후 상당 기간의 공석기를 거쳐 마르켈루스 1세가 교황직을 계승했으며, 이름이 비슷하여 두 사람은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2] 한편, 마르첼리노의 재위 기간 중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였다.

2. 1. 교황 선출과 초기 활동

리베리안 목록에 따르면 마르첼리노는 로마 출신으로 프로젝투스의 아들이었다. 그는 296년 6월 30일 교황 가이우스의 뒤를 이어 로마 주교가 되었다.[1] 마르첼리노의 교황 재위는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시작되었지만, 이때는 아직 디오클레티아누스 박해가 시작되지 않아 기독교는 비교적 자유로운 분위기 속에서 신자 수가 증가했다.

그러나 카이사르 갈레리우스는 기독교에 반대하는 이교 운동을 이끌었고, 302년경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를 부추겨 기독교인들을 박해하도록 만들었다. 박해가 시작되자 처음에는 기독교인 병사들이 군대에서 추방되었고, 이후에는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고 성경과 같은 기독교 서적이 파괴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궁전에서 두 차례 화재가 발생한 후, 황제는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여 기독교인들에게 배교하거나 사형을 당하도록 강요했다.

마르첼리노의 재위 중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받아들인 국가가 되었다.

2. 2.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던 시기에 마르첼리노의 교황 재위가 시작되었으나, 이때는 아직 그리스도교 박해가 시작되지 않아 신자 수가 증가하고 있었다. 그러나 카이사르 갈레리우스가 그리스도교에 반대하는 이교 운동을 이끌면서 상황이 변했다. 302년, 갈레리우스는 디오클레티아누스를 설득하여 그리스도교 박해를 시작했다.[1]

박해는 단계적으로 강화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병사들이 군대에서 추방되었고, 이후에는 교회의 재산이 몰수되고 성경을 포함한 서적들이 파괴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에서 두 차례 화재가 발생하자, 그는 더욱 강경한 조치를 취하여 그리스도교인들에게 배교하거나 사형을 당하도록 강요했다.

마르첼리노 교황 자신의 행적에 대해서는 상반된 기록이 존재한다. 그는 ''히에로니무스 순교록'', ''교황의 매장록'', ''순교자들의 매장록'' 등 주요 순교 기록에는 이름이 오르지 않았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분실된 ''성 마르첼리노 행전''을 인용하며, 마르첼리노가 박해 중에 우상에게 향을 바치는 등 잠시 배교했으나, 곧바로 회개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다시 고백하여 여러 동료와 함께 순교했다고 전한다. 반면, 다른 문헌들은 그의 배교 사실을 언급하며, 이것이 고대 전례력에서 그가 누락된 이유일 수 있다고 설명한다.[1]

5세기 초, 키르타도나투스파 주교 페틸리아누스는 마르첼리노와 그의 사제들이 박해 시기에 성서를 이교도들에게 넘겨주고 거짓 신들에게 향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주장을 부인했다.[1][2] 6세기 초에 작성된 조작된 시누에사 가짜 공의회 기록에 따르면, 마르첼리노가 배교한 후 공의회 앞에 섰으나, 공의회는 "첫 번째 교좌는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prima sedes a nemine iudicatur|프리마 세데스 아 네미네 유디카투르la)는 원칙을 내세워 그를 재판하기를 거부했다고 한다.[2]

마르첼리노의 죽음에 대한 기록 역시 불분명하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그가 304년 4월 26일, 순교한 지 25일 만에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프리실라의 묘지에 묻혔다고 기록했지만, 리베리안 목록은 매장일을 10월 25일로 다르게 기록하고 있다. 그의 순교 사실 자체도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다.[1][2]

마르첼리노 사후 상당 기간의 공석기를 거쳐 마르켈루스 1세가 교황직을 계승했는데, 이름이 비슷하여 두 사람은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2] 한편, 마르첼리노의 재위 기간 중 아르메니아가 세계 최초로 기독교를 국교로 선포했다.

2. 3. 배교 논란과 순교

로마 황제 디오클레티아누스가 집권하던 시기 초기에는 그리스도교 박해가 없었으나, 카이사르 갈레리우스가 주도한 이교 운동의 영향으로 302년부터 박해가 시작되었다. 처음에는 그리스도교 신자인 병사들을 군대에서 추방하는 것으로 시작하여, 점차 교회의 재산을 몰수하고 성경 등의 서적을 파괴하는 방향으로 강화되었다. 디오클레티아누스 황제의 궁전에서 두 차례 화재가 발생한 이후 박해는 더욱 거세져, 그리스도교인들은 신앙을 버리고 배교하거나 사형을 당해야 하는 상황에 놓였다.

마르첼리노 교황이 박해 시기에 어떻게 행동했는지에 대해서는 기록이 엇갈린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분실된 ''성 마르첼리노 행전''을 인용하며, 마르첼리노가 박해 중에 우상에게 향을 바치는 등 잠시 신앙을 저버렸으나, 곧바로 회개하고 그리스도 신앙을 다시 고백하여 여러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전한다.[1] 그러나 다른 문헌들은 그의 배교 사실을 언급하며, 이 때문에 그의 이름이 고대 전례력에서 빠졌을 가능성을 시사한다. 예를 들어, 5세기 초 키르타도나투스파 주교였던 페틸리아누스는 마르첼리노와 그의 사제들이 박해 시기에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넘겨주고 거짓 신들에게 향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히포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러한 페틸리아누스의 주장을 부인했다.[1][2] 또한 6세기 초에 조작된 문서로 알려진 시누에사 가짜 공의회 기록에는, 마르첼리노가 타락한 후 공의회 앞에 섰지만, 공의회는 "첫 번째 교좌는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prima sedes a nemine iudicaturla)는 원칙을 내세워 그를 재판하기를 거부했다고 기록되어 있다.[2]

마르첼리노의 이름은 ''히에로니무스 순교록'', ''교황의 매장록'', ''순교자들의 매장록'' 등 주요 순교 기록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그의 순교 여부 자체도 확실하지 않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에 따르면 마르첼리노는 순교한 지 25일 후인 304년 4월 26일에 비아 살라리아에 위치한 프리실라의 묘지에 묻혔다고 하지만, 리베리안 목록에는 매장일이 10월 25일로 기록되어 있어 차이를 보인다.[2] 마르첼리노 사후에는 상당 기간 교황좌가 비어 있다가 마르켈루스 1세가 그 뒤를 이었는데, 이름이 비슷하여 두 사람이 혼동되기도 한다.[2]

2. 4. 사망과 계승

마르첼리노는 ''히에로니무스 순교록'', ''교황의 매장록'' 또는 ''순교자들의 매장록''에는 언급되어 있지 않다. 리베르 폰티피칼리스는 분실된 ''성 마르첼리노 행전''을 바탕으로,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 동안 마르첼리노가 우상에게 향을 바쳤지만, 잠시 후 회개하여 그리스도의 신앙을 다시 고백하고 여러 동료들과 함께 순교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다른 문서들은 그의 배교를 언급하고 있으며, 아마도 이러한 논란이 고대 전례력에서 그를 기리지 않는 이유일 수 있다.[1]

5세기 초, 키르타도나투스파 주교 페틸리아누스는 마르첼리노와 그의 사제들이 박해 동안 이교도들에게 성서를 넘겨주고 거짓 신들에게 향을 바쳤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아우구스티누스는 이 주장을 부인했다.[1][2] 6세기 초에 작성된 조작된 시누에사 가짜 공의회 기록에 따르면, 마르첼리노가 타락한 후 공의회 앞에 나타났지만, 공의회는 "prima sedes a nemine iudicatur|프리마 세데스 아 네미네 유디카투르la"(첫 번째 교좌는 누구에게도 심판받지 않는다)라는 이유로 그를 재판하는 것을 거부했다고 한다.[2]

''리베르 폰티피칼리스''에 따르면, 마르첼리노는 순교 25일 후인 304년 4월 26일 비아 살라리아에 있는 프리실라의 묘지에 묻혔다고 한다. 반면, 리베리안 목록에는 그 날짜가 10월 25일로 기록되어 있다. 그의 순교 사실 자체도 확실하게 입증되지 않았다. 상당한 공석 기간을 거친 후, 교황 마르첼로 1세가 그의 뒤를 이었으며, 이름이 비슷하여 두 사람은 종종 혼동되기도 한다.[2]

3. 사후 평가 및 기념

마르첼리노는 로마 순교록에 언급되었으며, 13세기에 그의 축일이 성 클레투스와 함께 4월 26일에 추가되었다.[3] 그러나 두 인물 모두에 대한 불확실성 때문에, 이 공동 축일은 1969년 로마 가톨릭교회 전례력에서 삭제되었다.[3] 성 클레투스는 여전히 4월 26일 날짜로 로마 순교록에 등재되어 있지만, 성 마르첼리노는 공식 성인 목록에는 더 이상 언급되지 않는다.[4] 세르비아 정교회에서는 교황 마르첼리노를 교황 마르켈루스와 함께 율리우스력에 따라 6월 7일에 기념한다.[5]

참조

[1] 간행물 Pope Saint Marcellinus http://www.newadvent[...] Robert Appleton Company 2017-09-28
[2] 서적 Marcellinus, St
[3] 서적 Calendar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1969
[4] 서적 Martyrologium Romanum Libreria Editrice Vaticana 2001
[5] 웹사이트 Prologue from Ochrid http://www.stnichola[...]
[6] 문서 Pope Marcellinus https://en.wikisourc[...] Catholic Encyclopedia. New York: Robert Appleton Company 1913
[7] 서적 Liber Pontificali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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