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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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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구시네는 몬테네그로 북동부, 알프스 산맥에 위치한 도시로, 플라브-구시네 지방 자치 단체의 행정 중심지이다. 리므강 상류 계곡에 자리 잡고 있으며, 1,014m의 고도에 위치한다. 구시네는 슬라브어 '거위' 또는 일리리아어에서 유래되었다는 두 가지 어원 설이 있으며, 보스니아어, 알바니아어, 튀르키예어 등 다양한 언어로 불린다. 14세기부터 역사 기록에 등장하며, 오스만 제국 시대에는 상업적 요충지로서 중요성을 가졌다. 19세기 베를린 회의 이후 몬테네그로 공국에 편입되려 했으나, 알바니아인들의 반발로 프리즈렌 동맹이 결성되기도 했다. 현재는 보스니아인이 다수를 차지하며, 이슬람교가 주된 종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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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시네 - [지명]에 관한 문서
지도 정보
기본 정보
구시네의 전형적인 가옥
구시네의 전형적인 가옥 (19세기 초)
공식 명칭구시네
현지 이름
로마자 표기: Gusinje
별칭
국가몬테네그로
지방북부 몬테네그로
자치체구시네 자치체
표어없음
행정
시장사넬 발리치 (보스니아크당)
정치 체제시장-의회
지리
면적3.73 제곱킬로미터
고도1014 미터
기후해양성 기후 (Cfb)
인구
총 인구 (2011년)1673명
기타 정보
시간대CET (+1)
일광 절약 시간CEST (+2)
차량 번호판GS
우편 번호84326
지역 번호+382 51
웹사이트없음

2. 명칭

구시네(Gusinje)라는 지명의 어원에 대해 두 가지 가설이 있다. 하나는 슬라브어 "구스카"(guska, 거위)와 연관짓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일리리아어 용어 "게우시아"(Geusiae)에서 유래했으며, 여기서 도시의 알바니아어 이름인 "구치아"(Guci(a))가 파생되었다는 것이다.[5][1] 기록 보관소에는 베네치아 문서에서 "고우시노"(Гоусино), "구스티네"(Gustigne, 1614년), 오스만 튀르크어에서 "구스나"(گوسن) 및 "구시니예" 등으로 다양하게 기록되었다.[1][7]

보스니아어로는 구시니예, 알바니아어로는 Gucia|구치아sq, 튀르키예어로는 Gusna/گوسن|구스나/گوسنtr라고 불린다.

3. 지리

구시네는 해발 1,014m에 위치한 리므강 상류 계곡의 일부인 플라브-구시네 지역, 알프스 산맥에 있다. 몬테네그로에서 가장 높은 산인 즐라 콜라타는 프로클레티예 국립공원의 구시네에서 남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다.[2]

구시네는 플라브 방향으로 동쪽으로 흐르는 베르모쉬 강에 있다. 구시네 중심부에서 남쪽으로 약 2km 떨어진 곳에는 알리 파샤의 샘(''Alipašini izvori''/''Krojet e Ali Pashës'')인 브루야 개울의 수원지가 있다. 브루야 개울은 마을 동쪽 베르모쉬로 흘러 들어가며, 이 합류 지점과 플라브 사이는 현지에서 ''루카''라고 불린다. 베르모쉬 강은 플라브에 도달하기 직전에 플라브 호수로 흘러 들어간다. 베르모쉬 강은 리므강의 첫 번째 지류이다.

구시네는 동명의 지방 자치 단체의 소재지이다. 1953년부터 2014년까지 플라브 지방 자치 단체의 일부였다. 2014년에 다시 별도의 지방 자치 단체가 되었다. 마을의 경계는 지방 자치 단체의 총 면적 157km2 중 약 3.73km2를 형성한다. 지방 자치 단체의 많은 지역은 과거에 가축을 방목하는 데 사용되었던 산악 지대이다.

4. 역사

림강 유역의 플라브와 구시네 지역은 1330년 데차니의 금문서에서 "Hotina Gora"(호티 산)라는 지명으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호티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 원래 정착했던 지역으로 여겨진다.[3][4] 오늘날 구시네 지역에는 중세 정착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으며, 14세기에는 라구사-카타로-슈코더르-페치 노선을 잇는 대상(隊商)들의 역으로 언급되었다.[5]

1485년 스쿠타리 산자크의 데프테르(인구 조사 기록)에는 플라브 주의 마을로 나타나며, 오스만 술탄의 직할령인 "hass-ı hümayun"(제국 영지)이었다. 당시 96가구, 미혼 남성 21명, 미망인 4명이 거주하여 몬테네그로와 북부 알바니아의 다른 마을에 비해 큰 규모였다. 구전 전승에 따르면, 니카지 부족은 현재 위치로 이동하면서 마브리키 부족을 대체했다. 그들은 1416-1500년 사이에 슈코더르 근처 바유슈에서 기원하여 니카지 산에 정착했으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마브리키 부족은 구시네 지역으로 이주했다.[6]

구시네(앞)와 플라브(배경) 마을, 항공 사진.


구시네는 북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사이의 오스만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술탄과 오스만 관료들에게 많은 부를 안겨주었지만, 켈멘디 부족 공동체와 같은 반(反)오스만 세력의 끊임없는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마리아노 볼리차는 1612년 말 켈멘디의 길목에 위치한 구시네 요새 건설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7] 현대 구시네는 켈멘디 산에서 현대 산자크로 가는 길에서 서쪽으로 약 6km, 북쪽으로 약 10km 떨어져 있다. 서쪽과 남쪽의 주변 마을(부사네)은 켈멘디 정착지이다. 이 요새는 포드고리차의 오스만 베이인 세메 자우스의 요청으로 건설되었는데, 그는 켈멘디의 공격을 막고 자신의 영토를 자유롭게 여행하고자 했다. 1614년, 마리아노 볼리차는 이 마을에 100가구와 벨로 유바닌 휘하의 237명의 수비대가 있다고 보고했다.[7] 이 요새는 또한 상부 림 계곡에서 쿠치와 트리에시 부족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원정과 이주에도 불구하고 켈멘디, 쿠치, 트리에시, 샬라와 같은 부족들은 오늘날 구시네의 역사적인 지역(마할라)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18세기 중반까지 무슬림 인구의 특권을 얻기 위해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8세기 초, 구시네에 나타난 샬라 출신의 오메라가이(오늘날 오메라기치) 가문은 이후 형제단으로 발전하며 구시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구시네의 체카이 모스크는 1687년에 트리에시 출신의 체카이 형제단에 의해 지어졌고, 1899년에 지어진 새 모스크는 쿠치 출신의 라돈치치 형제단을 따라 '라돈치차'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초, 구시네는 지역 카딜루크의 중심지였으며, 군사 행정 측면에서는 1724년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일부였다. 중앙 오스만 행정부가 붕괴되면서 스코드라 파샬리크가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고, 1765년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가 시내 중심에 건설한 베지르 모스크는 상부 림 계곡에서 파샬리크의 영향력을 상징한다. 1831년 파샬리크의 몰락으로 오스만 통치가 부활했다. 1852년 코소보 빌라예트의 등록부에 따르면, 구시네에는 1,500가구, 350개의 상점, 8개의 마드라사와 5개의 모스크가 있는 개발 도시였다. 1869년 구시네의 캡틴지는 프리즈렌 산자크의 일부였다.[5]

플라브 자치시-구시네 자치시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그루에미리 출신의 렉제파가이는 1650년대 초에 플라브로 이주했으며, 샤바나가이(현재 샤바나기치)는 슈코드라의 부샤티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샤바나가이 가문은 베라네 자치시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했다.[8] 구시네의 알리 파샤, 프리즈렌 동맹의 사령관은 샤바나가이였고,[8] 코소보의 교육자인 야샤르 렉제파기치는 렉제파가이였다.

1675년 구시네를 방문한 에블리야 체레비는 구시네를 "활기찬 알바니아 도시"라고 묘사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구시네는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독립 몬테네그로 공국에 할당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시네의 알바니아인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며 열강 대사관에 항의 전보를 보냈다.[5] 베를린 회의와 최종 조약에서 이 결정이 확정되자, 구시네와 플라브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하여 저항했다.

The Albanian Question: Tusi, Gusinje와 교환 제안, 1880년 Illustrated London News에 게재된 판화


프리즈렌 동맹의 주요 인물인 알리 파샤 샤바나가이는 노브시체 전투에서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리즈렌 동맹의 사상자 약 300명 중 140명 이상이 구시네 출신이었다. 이스마일 오메라가는 플라브-구시네 방어를 위한 전투에서 사망한 구시네 의용군 지휘관으로, 그의 머리는 체티네 몬테네그로 수도로 운반되었다.[5] 전투 후 보고에 따르면 승리자들은 패배한 적의 머리 60개를 마을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 전투는 알바니아 민족 부흥의 중요한 사건으로, 무장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5] 비록 이 전투가 플라브에서 북쪽으로 약 4km 떨어진 노브시체 근처에서 일어났지만, 당시 오스만 언론에서는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구시니예 하디세시'(구시니예 사건)로 알려지게 되었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은 몬테네그로 공국에 구시네 소유권을 넘겼으나, 프리즈렌 동맹에 속한 이 지역 사람들은 이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프리즈렌 동맹과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몬테네그로에 알바니아인의 땅을 할양하지 않도록 강력히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베를린 조약에 대처하면서도 알바니아인들의 반란 가능성을 우려했다. 몬테네그로의 니콜라 1세는 군사 침공을 감행, 1879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페파이와 알즈하니체 두 마을을 습격했다. 주민들은 저항했고, 구시네와 플라브에 다른 지역에서 많은 알바니아 의용군이 결집했다. 같은 해 12월 4일,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은 노크시크 계곡을 공격했으나, 알리 파샤가 이끄는 프리즈렌 동맹은 그 침공을 막았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알바니아인의 결단은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 모두에게 경종을 울렸다. 1880년 1월 8일 양측은 충돌했고, 알바니아군이 승리했다. 이는 알바니아인의 국민 의식에 대한 국제적 이해를 높이는 계기가 되었다.[17][18]

1878년부터 1912년까지 플라브와 구시네는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 1912년 10월, 몬테네그로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플라브에 진입했다. 이후 가혹한 군사 행정 기간이 이어졌고, 1913년 3월까지 현지인 1,800명 이상이 살해되고 12,000명이 기독교 정교로 강제 개종되었다.[9]

1919년, 플라브, 구시네, 로자예 지역에서 알바니아 반란(플라브 반란)이 일어나 산자크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했다.[10][11] 세르비아군은 봉기를 진압하면서 약 450명의 지역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건으로 알바니아로 이주하는 알바니아인의 대규모 유입이 발생했다.[12][13]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구시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의해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후, 1913년 국경이 재확인되었고, 구시네의 별도 자치시 지위는 1953년에 폐지되었다. 2014년, 구시네는 다시 자치시 지위를 되찾았다.

4. 1. 초기 역사

림강 유역의 플라브와 구시네 지역은 1330년 데차니의 금문서에서 "Hotina Gora"(호티 산)라는 지명으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 이는 호티가 남쪽으로 이동하기 전 원래 정착했던 지역으로 여겨진다.[3][4]

오늘날 구시네 지역에는 중세 정착지가 있었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14세기에는 라구사-카타로-슈코더르-페치 노선을 잇는 대상(隊商)들의 역으로 언급되었다.[5] 1485년 스쿠타리 산자크의 데프테르(인구 조사 기록)에는 플라브 주의 마을로 나타나며, 오스만 술탄의 직할령인 "hass-ı hümayun"(제국 영지)이었다. 당시 96가구, 미혼 남성 21명, 미망인 4명이 거주하여 몬테네그로와 북부 알바니아의 다른 마을에 비해 큰 규모였다.

구전 전승에 따르면, 니카지 부족은 현재 위치로 이동하면서 마브리키 부족을 대체했다. 그들은 1416-1500년 사이에 슈코더르 근처 바유슈에서 기원하여 니카지 산에 정착했으며, 이로 인해 대부분의 마브리키 부족은 구시네 지역으로 이주했다.[6]

구시네는 북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사이의 오스만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의 중심지로 발전했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은 술탄과 오스만 관료들에게 많은 부를 안겨주었지만, 켈멘디 부족 공동체와 같은 반(反)오스만 세력의 끊임없는 약탈 대상이 되기도 했다.

베네치아 외교관 마리아노 볼리차는 1612년 말 켈멘디의 길목에 위치한 구시네 요새 건설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7] 현대 구시네는 켈멘디 산에서 현대 산자크로 가는 길에서 서쪽으로 약 6 km, 북쪽으로 약 10 km 떨어져 있다. 서쪽과 남쪽의 주변 마을(부사네)은 켈멘디 정착지이다. 이 요새는 포드고리차의 오스만 베이인 세메 자우스의 요청으로 건설되었는데, 그는 켈멘디의 공격을 막고 자신의 영토를 자유롭게 여행하고자 했다. 1614년, 마리아노 볼리차는 이 마을에 100가구와 벨로 유바닌 휘하의 237명의 수비대가 있다고 보고했다.[7] 이 요새는 또한 상부 림 계곡에서 쿠치와 트리에시 부족의 이동을 막기 위해 설계되었다.

오스만 제국의 원정과 이주에도 불구하고 켈멘디, 쿠치, 트리에시, 샬라와 같은 부족들은 오늘날 구시네의 역사적인 지역(마할라)의 많은 부분을 형성하게 되었다. 이들은 처음에는 기독교인이었지만, 18세기 중반까지 무슬림 인구의 특권을 얻기 위해 자발적 또는 강제적으로 이슬람으로 개종했다. 18세기 초, 구시네에 나타난 샬라 출신의 오메라가이(오늘날 오메라기치) 가문은 이후 형제단으로 발전하며 구시네의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오늘날 구시네의 체카이 모스크는 1687년에 트리에시 출신의 체카이 형제단에 의해 지어졌고, 1899년에 지어진 새 모스크는 쿠치 출신의 라돈치치 형제단을 따라 '라돈치차'로 알려져 있다.

18세기 초, 구시네는 지역 카딜루크의 중심지였으며, 군사 행정 측면에서는 1724년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일부였다. 중앙 오스만 행정부가 붕괴되면서 스코드라 파샬리크가 지역 강국으로 부상했고, 1765년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가 시내 중심에 건설한 베지르 모스크는 상부 림 계곡에서 파샬리크의 영향력을 상징한다. 1831년 파샬리크의 몰락으로 오스만 통치가 부활했다. 1852년 코소보 빌라예트의 등록부에 따르면, 구시네에는 1,500가구, 350개의 상점, 8개의 마드라사와 5개의 모스크가 있는 개발 도시였다. 1869년 구시네의 캡틴지는 프리즈렌 산자크의 일부였다.[5]

플라브 자치시-구시네 자치시 지역의 유력한 가문이었던 그루에미리 출신의 렉제파가이는 1650년대 초에 플라브로 이주했으며, 샤바나가이(현재 샤바나기치)는 슈코드라의 부샤티 가문과 혼인 관계를 맺었다. 샤바나가이 가문은 베라네 자치시에 대규모 토지를 소유했다.[8] 구시네의 알리 파샤, 프리즈렌 동맹의 사령관은 샤바나가이였고,[8] 코소보의 교육자인 야샤르 렉제파기치는 렉제파가이였다.

1675년 이 시기에 구시네를 방문한 에블리야 체레비는 구시네를 "활기찬 알바니아 도시"라고 묘사했다.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붕괴와 함께 구시네는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독립 몬테네그로 공국에 할당될 예정이었다. 그러나 구시네의 알바니아인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며 열강 대사관에 항의 전보를 보냈다. 베를린 회의와 최종 조약에서 이 결정이 확정되자, 구시네와 플라브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하여 저항했다.

프리즈렌 동맹의 주요 인물인 알리 파샤 샤바나가이는 노브시체 전투에서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을 격파했다. 이 전투에서 프리즈렌 동맹의 사상자 약 300명 중 140명 이상이 구시네 출신이었다. 이스마일 오메라가는 플라브-구시네 방어를 위한 전투에서 사망한 구시네 의용군 지휘관으로, 그의 머리는 체티네 몬테네그로 수도로 운반되었다. 전투 후 보고에 따르면 승리자들은 패배한 적의 머리 60개를 마을로 가져갔다고 한다. 이 전투는 알바니아 민족 부흥의 중요한 사건으로, 무장 투쟁의 필요성에 대한 선례를 세웠다. 비록 이 전투가 플라브에서 북쪽으로 약 4 km 떨어진 노브시체 근처에서 일어났지만, 당시 오스만 언론에서는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구시니예 하디세시'(구시니예 사건)로 알려지게 되었다.

4. 2. 오스만 제국 시기

1330년 림강 유역의 플라브와 구시네 지역의 "Hotina Gora"(호티 산)라는 지명은 데차니의 금문서에서 역사 기록에 처음 등장한다.[3][4] 14세기에는 구시네는 라구사-카타로-슈코더르-페치 노선의 대상 역으로 언급되었다.[5]

1485년 스쿠타리 산자크의 데프테르에 따르면, 구시네는 플라브 주의 마을로 오스만 술탄의 직할령인 "hass-ı hümayun"(제국 영지)이었다. 당시 구시네에는 96가구, 미혼 남성 21명, 미망인 4명이 있어 몬테네그로와 북부 알바니아의 다른 마을에 비해 큰 정착지였다.[5]

구시네는 북부 알바니아, 몬테네그로, 코소보 사이의 오스만 무역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위치하여 상업적으로 발전했다. 베네치아 외교관 마리아노 볼리차는 1612년에 구시네 요새 건설이 완료되었다고 보고했다.[7] 이 요새는 켈멘디 부족의 공격을 막기 위해 건설되었다. 1614년, 마리아노 볼리차는 이 마을에 100가구와 237명의 수비대가 있다고 보고했다.[7]

18세기 초, 구시네는 지역 카딜루크의 중심지였고, 군사 행정 측면에서 1724년 보스니아 에얄레트의 일부였다. 18세기 중반에는 베지르 모스크가 건설되어 상부 림 계곡에서 파샬리크의 영향력을 상징했다. 1852년 코소보 빌라예트의 등록부에 따르면, 구시네에는 1,500가구, 350개의 상점, 8개의 마드라사와 5개의 모스크가 있었다. 1869년 구시네의 캡틴지는 프리즈렌 산자크의 일부였다.[5]

플라브 자치시-구시네 자치시 지역의 유력 가문은 그루에미리에서 기원한 렉제파가이(현재 레제파기치-렉제피키) 가문과 샤바나가이(현재 샤바나기치) 가문이었다. 구시네의 알리 파샤는 샤바나가이 출신으로 프리즈렌 동맹의 사령관이었다.[8]

19세기 오스만 제국이 붕괴되면서 산 스테파노 조약에서 구시네와 플라브는 몬테네그로 공국에 할당되었다. 구시네 주민들은 이 결정에 반대하여 열강 대사관에 항의 전보를 보냈다.[9] 베를린 회의에서 이 결정이 확정되자, 알바니아인들은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하여 저항했다.

알리 파샤 샤바나가이가 이끄는 프리즈렌 동맹은 노브시체 전투에서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을 격파했다.[10] 이 전투는 알바니아 민족 부흥의 기준점이 되었다.[11]

1893년 구시네에는 1,600가구, 5개의 모스크, 240개의 상점이 있었다.[5] 1912년 10월까지 이 지역은 코소보 빌라예트의 노비 파자르 산자크의 일부였다.

4. 3. 베를린 회의와 몬테네그로

19세기 오스만 제국의 쇠퇴와 함께, 산 스테파노 조약에 따라 구시네와 플라브는 독립 몬테네그로 공국에 할당될 예정이었다. 당시 구시네는 상업 도시로 발전했지만, 오스만 법의 통치 밖에 있어 총기 소유가 만연했고 오스만 통치는 시행하기 어려웠다.[5] 이러한 환경은 합병에 대한 저항을 불러왔다. 구시네의 알바니아인들은 조약 결정에 반대하며 열강 대사관에 항의 전보를 보냈고,[5] 베를린 회의와 최종 조약에서 이 결정이 확정되자 두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합병 결정에 반발하여 프리즈렌 동맹을 결성했다.

프리즈렌 동맹의 주요 인물은 구시네 출신의 지주이자 군사 사령관인 알리 파샤 샤바나가이였다. 이후 노브시체 전투에서 샤바나가이가 이끄는 프리즈렌 동맹은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을 격파했다.[5] 이 전투에서 프리즈렌 동맹의 사상자 약 300명 중 140명 이상이 구시네 출신이었다. 이스마일 오메라가는 플라브-구시네 방어를 위한 전투에서 사망한 구시네 의용군 지휘관으로, 그의 머리는 체티네 몬테네그로 수도로 옮겨졌다.[5] 전투 후 보고에 따르면 승리자들은 패배한 적의 머리 60개를 마을로 가져갔다. 합병은 중단되었고 열강은 울친을 몬테네그로에 합병시켜 보상하는 협상을 시작했다. 이 전투는 알바니아 민족 부흥의 기준점이 되었고, 다른 지역 방어를 위한 무장 투쟁 필요성의 선례를 세웠다.[5] 전투는 플라브에서 북쪽으로 약 ~4 km 떨어진 노브시체 근처에서 일어났지만, 오스만 언론에서는 투쟁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했기 때문에 ''구시니예 하디세시''(구시니예 사건)로 알려졌다.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은 몬테네그로 공국의 구시네 소유권을 포기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에 많은 사람이 속한 이 지역에서는 이 결론이 좋지 않게 여겨졌다. 프리즈렌 동맹과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몬테네그로에 알바니아인의 땅을 할양하지 않도록 강력히 주장했다. 오스만 제국은 베를린 조약에 대처하면서도, 이 지역 다수를 차지하고 제국 율법에 순종한다고 여겨졌던 알바니아인들에게 새로운 반란 가능성을 주는 것을 피하려 했다. 몬테네그로의 니콜라 1세는 군사 침공을 감행, 1879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에 걸쳐 페파이와 알즈하니체 두 마을을 습격했다. 주민들은 저항했고, 구시네와 플라브에 다른 지역에서 많은 알바니아 의용군이 결집했다. 같은 해 12월 4일,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은 노크시크 계곡을 공격했으나, 알리 파샤가 이끄는 프리즈렌 동맹은 그 침공을 막았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알바니아인의 결단은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 모두에게 경종을 울려 장래의 혼란을 시사했다. 1880년 1월 8일 양측은 충돌했고, 알바니아군이 승리했다. 이는 알바니아인의 국민 의식에 대한 국제적 이해가 열강에게 대체안을 요구하게 했다.[17][18]

4. 4. 20세기 이후

1878년 베를린 회의에서 오스만 제국은 몬테네그로 공국에 구시네를 넘겨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프리즈렌 동맹을 중심으로 한 지역 알바니아인들은 몬테네그로에 알바니아인의 땅을 할양하는 것에 강력하게 반대했다. 오스만 제국은 베를린 조약을 따르면서도, 알바니아인들의 새로운 반란 가능성을 우려하여 평화 협상과 율법 준수를 강요하지 못했다.[17]

이에 몬테네그로의 니콜라 1세는 군사 침공을 감행하여 1879년 10월 31일부터 11월 1일까지 페파이와 알즈하니체 두 마을을 습격했다. 주민들은 저항했고, 구시네와 플라브에는 다른 지역에서 많은 알바니아 의용군이 모였다. 같은 해 12월 4일, 마르코 밀자노프가 이끄는 몬테네그로군은 노크시크 계곡을 공격했으나, 알리 파샤 샤바나가이가 이끄는 프리즈렌 동맹은 이를 막아냈다. 양측 모두 많은 사상자를 냈지만, 알바니아인의 저항은 유럽 열강과 오스만 제국 모두에게 경종을 울렸다.[17][18]

1880년 1월 8일, 양측은 다시 충돌했고, 알바니아군이 승리했다. 이는 알바니아인의 국민 의식에 대한 국제적 이해를 높여 열강에게 대체안을 요구하게 했다. 1878년부터 1912년까지 플라브와 구시네는 사실상 독립 상태였다.[17][18]

1912년 10월, 몬테네그로군은 이 지역을 점령하고 플라브에 진입했다. 이후 가혹한 군사 행정 기간이 이어졌고, 1913년 3월까지 현지인 1,800명 이상이 살해되고 12,000명이 기독교 정교로 강제 개종되었다.[9]

1919년, 플라브, 구시네, 로자예 지역에서 알바니아 반란(플라브 반란)이 일어나 산자크를 세르비아인, 크로아티아인, 슬로베니아인 왕국에 포함시키는 것에 반대했다.[10][11] 세르비아군은 봉기를 진압하면서 약 450명의 지역 민간인을 학살했다. 이러한 사건으로 알바니아로 이주하는 알바니아인의 대규모 유입이 발생했다.[12][13]

제2차 세계 대전 동안 구시네는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나치 독일에 의해 알바니아의 일부가 되었다. 전쟁 후, 1913년 국경이 재확인되었고, 구시네의 별도 자치시 지위는 1953년에 폐지되었다. 2014년, 구시네는 다시 자치시 지위를 되찾았다.

5. 인구

구시네 인구 변화[14]
연도인구
1948년2,402명
1953년2,555명
1961년2,756명
1971년2,695명
1981년2,625명
1991년2,472명
2003년1,704명
2011년1,673명
2023년2,225명



1913년 이후, 구시네는 20세기에 많은 이민을 겪어 21세기에는 인구가 감소했다. 구시네 시에 따르면, 구시네 출신 디아스포라(Gusinje area) 총 3만 명 중 18,400명이 구시네 마을을 기원으로 하며, 이들은 주로 미국에 거주하고 있다.

2003년 인구 조사 기준 민족 구성은 다음과 같다.

민족인구비율
보스니아인1,175명70.95%
보슈냐크인262명15.37%
알바니아인173명10.15%
몬테네그로인48명2.81%
세르비아인37명2.17%
크로아티아인1명0.05%
마케도니아인1명0.05%
기타7명0.45%
1,704명100%



2023년 인구 조사 기준으로 구시네 시(Gusinje Municipality) 주민의 57.1%가 보스니아인이며, 두 번째로 큰 민족 집단은 알바니아인 (34.4%)이다.

6. 종교

오스만 제국의 지배가 끝나자 많은 알바니아인들이 이슬람교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플라브-구시네의 대다수는 알바니아에 기원을 두고 있었기에, 일부 동방 정교회 가정을 제외하면 주민의 다수가 가톨릭으로 개종했다. 1700년까지 플라브-구시네의 75%가 이슬람교를 버렸다.

7. 문화

구시네 시내에 있는 비지어 모스크


구시네에는 몬테네그로의 여러 역사적인 모스크가 있다. 이 마을에서 가장 오래 보존된 모스크는 트리에프시의 체카이 형제단이 지은 체키차 자미야(Čekića džamija) 또는 자미아 에 체카예(xhamia e Cekajvesq)이다. 두 번째로 오래된 모스크는 1626년에 처음 지어진 다른 모스크 부지에 1765년 카라 마흐무드 부샤티가 지은 베지르 모스크(vezirova džamija/xhamia e vezirit)이다. 라돈치치 형제단이 1899년에 지은 새로운 모스크(nova džamija/xhamia e re)는 라돈치차라고도 불린다. 오늘날에는 폐허만 남아 있는 모스크도 여러 채 있다. 술탄 아흐메드 1세의 모스크는 1603년부터 1617년 사이에 그의 통치 기간 동안 지어졌다. 이 모스크는 1746-47년에 불에 탔다. 또 다른 폐허가 된 모스크는 베골리 가문의 분파인 귤베가이 가문이 지었다. 이 모스크는 1833년에 지어졌다.[1]

구시네의 지역 축구팀은 FK 구시네이며, 몬테네그로 3부 리그에서 활동한다. 홈 경기는 구시네 시립 경기장에서 열린다. 이 도시의 농구팀은 KK 스트르쉴렌이다. 제난 라돈치치가 소속되었던 축구 클럽 FK 구시니예도 이곳을 연고로 한다.

8. 주요 인물


  • 이스마일 니코치, 구시네 시장
  • 알리 파샤 구신스키, 프레젠 동맹의 지도자이자 알바니아 군 사령관
  • 하치 레자 베크테샤이, 알바니아계 반 유고슬라비아 카차크 전사
  • 알리야 구샤나츠 (1804년~1805년 활동), 쿠데타 이후 스메데레보 산자크를 지배한 반역적인 예니체리인 다히예를 섬긴 알바니아인 오스만 산적 (krdžalija)
  • 레조 뮬리치, 알바니아 작곡가
  • 제난 라돈치치, 몬테네그로 축구 선수
  • 파흐루딘 라돈치치, 사업가이자 정치인
  • 라모 콜레노비치, 카약 선수
  • 디노 라돈치치, 농구 선수
  • 알리 파샤 - 알바니아 정치인
  • 레조 뮬리치 - 알바니아 작곡가
  • 제난 라돈치치 - 축구 선수, 오이타 트리니타 소속
  • 파흐루딘 라돈치치 - Dnevni avaz지 창립자
  • 즈브디야 호드지치(Zuvdija Hodzic) - 작가
  • 베키 베키치(Beki Bekic) - 가수

9. 자매 도시

페야, 코소보[16]

참조

[1] Harvnb Loma 2013
[2] 웹사이트 NACIONALNI PARK PROKLETIJE http://www.nparkovi.[...] 2016-01-14
[3] 논문 TOPONYMY OF HOTI https://www.ceeol.co[...] 2007
[4] 서적 Srbi i Arbanasi: njihova simbioza u srednjem vijeku https://archive.org/[...] Izdanje seminara za arbanasku filologiju 1925
[5] Harvnb Opstina Gusinje 2012
[6] 서적 The Tribes of Albania,:History, Society and Culture https://books.google[...] Robert Elsie 2015-04-24
[7] Harvnb Elsie 2003
[8] Harvnb Bartl 1976
[9] Harvnb Milosević 2013
[10] 웹사이트 Less than Nations: Central-Eastern European Minorities after WWI, Volume 1 http://www.cambridge[...] Cambridge Scholars Publishing 2013
[11] 간행물 Region, Regional Identity and Regionalism in Southeastern Europe, Part 1 https://books.google[...] LIT Verlag Münster 2008
[12] 서적 Politics of Ethnic Cleansing: Nation-State Building and Provision of In/Security in Twentieth-Century Balkans https://books.google[...] Lexington Books 2008-02-22
[13] 서적 The National Question in Yugoslavia: Origins, History, Politics https://books.google[...] Cornell University Press 2015-06-09
[14] 서적 Slavic-Albanian Language Contact, Convergence, and Coexistence The Ohio State University
[15] 웹사이트 Montenegrin census (2023) https://www.monstat.[...] MONSTAT 2023-10-15
[16] 웹사이트 Marrëveshja për Binjakëzim https://kk.rks-gov.n[...] 2018-09-28
[17] 서적 The Crescent and the Eagle: Ottoman Rule, Islam, and the Albanians, 1874-1913 I.B. Tauris 2006
[18] 서적 Historia e Popullit Shqiptar, vol.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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