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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 분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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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국론 분열은 그리스 역사에서 중요한 시기로, 19세기 후반부터 제2차 세계 대전 직전까지 이어진 정치적, 사회적 갈등을 의미한다. 주요 원인은 국왕과 자유주의 세력 간의 권력 다툼, 발칸 전쟁에서의 갈등, 제1차 세계 대전 참전 여부를 둘러싼 대립 등이었다. 이러한 분열은 그리스 사회를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로 양분했으며, 군부의 정치 개입, 소아시아 전쟁 패배, 정치적 불안정, 사회적 트라우마를 야기했다. 이 갈등은 그리스 민주주의의 발전에 큰 시련을 안겨주었으며, 오늘날까지도 그 유산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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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론 분열 - [전쟁]에 관한 문서
개요
분쟁 명칭국론 분열
분쟁 일부제1차 세계 대전
시기1914/15년 – 1917년 7월
장소그리스 왕국
결과콘스탄티노스 1세 망명
알렉산드로스 즉위
그리스 왕국 재통합
베니젤로스 정부 하의 그리스 공식 참전 (1917년)
그리스, 제1차 세계 대전 연합국 합류 (1917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좌)와 [[콘스탄티노스 1세]] (우), 국론 분열 이전, 1913년경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좌)와 콘스탄티노스 1세 (우), 국론 분열 이전, 1913년경
교전 세력
왕당파그리스 왕국
지원 세력: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베니젤로스파민족 방위 임시 정부
지원 세력:

영국
지휘관
왕당파콘스탄티노스 1세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베니젤로스파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피해 규모
왕당파100명 이상
베니젤로스파200–300명
기타8,000명의 그리스 군인이 중앙 동맹국에 항복

2. 갈등의 배경

국론 분열의 배경에는 여러 복합적인 요인이 작용했다. 그리스의 권력을 둘러싼 베니젤로스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 간의 분쟁이 주요 원인이었으며, 국가 건설 이후에도 진정한 대의제 발전은 더뎠다. 1870년대까지 국왕은 의회 다수당 지도자에게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국왕의 뜻에 따라 통치할 수 있는 지도자 주변에 정치 집단이 형성되어 의원내각제가 군주 재량에 달려 있었다.

많은 개혁가와 자유주의자들은 정치에 대한 군주 개입을 해롭다고 여겼다.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에서 콘스탄티노스(당시 황태자)가 이끄는 그리스 군이 패배하면서 군주제에 대한 부정적인 여론이 강화되었다. 패배로 수치심을 느끼고 공화주의의 영향을 받은 헬레닉 육군의 젊은 장교들 사이에서도 개혁에 대한 기대가 커졌다.

군사 동맹이 결성되었고, 1909년 8월 15일 아테네 구디 병영에서 선언을 발표했다. 정부와 군사 문제 개혁을 요구한 이 운동은 대중의 광범위한 지지를 받았으며, 조지 국왕은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왕족의 군 복무 해임을 수락했다.

그러나 동맹의 지도부가 국가를 통치할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졌고, 반군주제적이며 기존 체제의 "구당파"에 물들지 않은 경험 있는 정치 지도자를 찾았다. 장교들은 크레타의 저명한 정치인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주목했는데, 그의 반군주제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자격이 확인되는 듯했다.

베니젤로스의 등장으로 동맹은 측면으로 밀려났고, 정력적인 젊은 정치인이었던 베니젤로스는 곧 그리스 정치 생활을 지배하게 되었다. 그의 정부는 개정 헌법 제정을 포함한 많은 개혁을 실시했다. 그러나 그는 국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개정 의회를 헌법 의회로 전환하라는 요구에 저항했으며, 콘스탄티노스 황태자를 감찰총장으로 임명하는 등 왕족을 군대에 복귀시켰다. 메탁사스(베니젤로스가 부관으로 임명)와 두스마니스와 같은 왕당파 장교들의 복귀는 군사 동맹 장교들의 항의를 야기했고, 프랑스의 그리스 군사 원정대 (1911-1914)의 등장은 황태자와 그의 독일식 훈련을 받은 주변 인물들에게 환영받지 못했다.

베니젤로스의 개혁은 글뤼크스부르크 왕가의 공무원에 대한 영향력을 깨뜨리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후원 체제를 만들었다.[1] 전통적인 씨족과 가족의 충성심이 종종 정치적 충성심을 결정하는 사회에서 자유당에 충성하는 후원 체제의 창출은 후원의 혜택을 받은 사람들과 그렇지 못한 사람들 사이에 그리스 사회를 양극화시켰다.[1] 또한,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자유당에 맞서기 위해 전통적인 후원 제공자인 왕실을 찾았다.[1]

이 분쟁은 베니젤로스 총리의 사임, 베니젤로스가 주도하는 테살로니키를 임시 수도로 하는 그리스 북부의 독립 국가 수립, 그리고 연합군의 개입에 의한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그리스 추방이라는 과정으로 진행되었다. 이 대립은 국내를 두 진영으로 나누어 그리스 사회에 매우 깊은 분열을 초래했으며, 그 영향은 1930년대 후반까지 남았다. 그 후의 소아시아 재난 역시 국민 분열의 영향이 크다고 주장하는 연구자도 있다.

2. 1. 정치적 요인

19세기 후반부터 그리스 정치는 왕당파와 자유주의 세력 간의 갈등이 지속되었다. 1909년 "군사 동맹"의 쿠데타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등장은 이러한 갈등을 심화시켰다.

1870년대까지 국왕은 의회에서 다수당의 지도자에게 정부 구성 권한을 부여해야 한다는 원칙을 받아들였지만, 실제로는 군주의 재량에 따라 정치 집단이 형성되었다. 많은 개혁가와 자유주의자들은 군주의 정치 개입을 해롭다고 여겼으며,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에서 그리스 군의 패배는 군주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강화시켰다.

1909년 8월 15일, "군사 동맹"은 아테네 구디 병영에서 정부와 군사 문제 개혁을 요구하는 선언을 발표했다. 이 운동은 대중의 지지를 받았고, 조지 국왕은 군부의 요구에 굴복하여 키리아쿨리스 마브로미할리스를 총리로 임명하고 왕족의 군 복무 해임을 수락했다.

그러나 동맹의 지도부는 국가 통치에 어려움을 겪었고, 반군주제적이며 기존 정치 세력에 물들지 않은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를 새로운 정치 지도자로 선택했다. 베니젤로스는 크레타의 저명한 정치인으로, 조지 왕자와의 충돌로 인해 반군주제적이고 공화주의적인 자격을 인정받았다.

베니젤로스는 개혁을 추진하고 헌법을 제정했지만, 국왕과의 관계가 악화되면서 정치적 긴장이 고조되었다. 그는 국왕과 긴밀한 관계를 맺고 왕족을 군대에 복귀시키는 등 왕당파 장교들의 반발을 샀다. 베니젤로스의 개혁은 글뤼크스부르크 왕가의 영향력을 약화시키고 자신에게 충성하는 후원 체제를 만들었으며, 이는 그리스 사회를 양극화시켰다.[1] 소외감을 느낀 사람들은 왕실을 중심으로 자유당에 맞섰다.[1]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2. 2. 발칸 전쟁 (1912-1914)

발칸 전쟁에서 그리스는 사란타포로 전투에서 승리하는 등 영토를 확장했지만, 이 과정에서 베니젤로스 총리와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 간의 갈등이 표면화되기 시작했다. 특히 테살로니키 점령을 둘러싼 의견 대립은 두 사람의 관계를 악화시키는 계기가 되었다.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가 테살로니키를 노리고 있다는 점을 들어 그리스 군이 동쪽으로 진군하여 테살로니키를 점령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반면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 군이 포위될 수 있다는 우려로 마케도니아의 모나스티르를 향해 북쪽으로 진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결국 베니젤로스의 주장이 받아들여져 그리스 군은 불가리아 군보다 먼저 테살로니키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다.

제2차 발칸 전쟁 이후 부쿠레슈티 조약 협상 과정에서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에 대해 너무 유화적이라는 비판을 받았다. 불가리아는 전쟁 중 그리스 군이 점령했음에도 불구하고 서트라키아 지역을 차지했고, 카발라 항구는 빌헬름 2세의 개입으로 그리스가 유지하게 되었다.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의 트라키아 확보가 그리스의 이익에 반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2. 3. 사회경제적 요인

전통적인 씨족 및 가족 중심의 사회 구조는 정치적 충성심을 결정하는 중요한 요인이었다.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은 새로운 후원 체제를 구축했지만, 이는 기존의 사회 질서에 대한 도전으로 여겨져 사회적 양극화를 심화시켰다. 소외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왕당파로 결집하여 베니젤로스에 맞섰다.

3. 갈등의 전개

제1차 세계 대전이 발발하자 그리스는 중립을 지킬 것인지, 아니면 연합국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선택해야 했다. 오스만 제국이 독일 편에 가담하면서, 그리스는 더욱 어려운 상황에 처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그리스의 이익을 위해 제1차 세계 대전에서 중립을 유지하는 것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


1915년 여름, 아테네에서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는 시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 편에 서서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중립을 고수하려 했다. 국왕은 친독일 성향이었으며, 불가리아의 위협을 경계했다.[1] 또한, 권위주의적인 성격으로 베니젤로스를 싫어했고, 군인들과의 관계를 선호했다.[1]

반면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참전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획득하고 메갈리 이데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다.[1]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재무장관과의 친분을 통해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으며, 소아시아 지역 영토 확장을 위해 불가리아에 일부 영토를 양보하는 방안도 고려했다.[1]

1915년,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가입을 추진했지만, 국왕과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갈리폴리 전투 이후,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했고, 의회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행했다.[1]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베니젤로스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맞섰다.[1]

테살로니키의 "국가방위 삼두정치". 좌측부터: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제독, 베니젤로스,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


1916년 9월, 테살로니키에서 베니젤로스 정부 선포


1916년 12월, 반베니젤로스 포스터 "파문"


11월 사건 당시 프랑스 전함 미라보호가 아테네를 포격하는 모습


1916년, 상황은 더욱 악화되었다. 베니젤로스는 테살로니키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에 가담했다. 이는 그리스가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 왕당파 정부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연합국은 베니젤로스 정부를 지지했다. 왕당파 준군사 조직인 "예비군"은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을 탄압했고, 아테네에서는 "노엠브리아나"로 불리는 유혈 충돌이 발생했다.[2] 정교회는 국왕을 지지하며 베니젤로스를 파문했고, 사회주의 운동은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했다.

3. 1. 제1차 세계 대전과 중립 문제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 왕국은 중립을 선언했지만, 연합국동맹국 양측으로부터 참전 압력을 받았다.[1]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1] 이러한 입장 차이는 두 사람의 갈등을 심화시키는 주요 원인이었다.

전쟁 초기, 오스만 제국은 중립을 유지했지만 1914년 10월 흑해 공격으로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연합국과 적대 관계가 되었다.[1] 오스만 제국의 참전은 연합국이 그리스에 '''메갈리 이데아''' 실현을 위한 영토 확장을 약속하며 참전을 더욱 적극적으로 권유하는 계기가 되었다.[1] 그러나 연합국은 불가리아의 중립 유지를 우선시했고, 베니젤로스는 이에 실망했다.[1]

콘스탄티노스 1세는 독일에서 군사 교육을 받았고 독일 문화를 존경했기에 친독일 성향을 보였다.[1] 그는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불가리아의 위협을 경계했으며, 독재적인 성격으로 베니젤로스와 개인적인 불화도 있었다.[1] 국왕은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장군 등 친독일적인 군부 인사들의 조언을 받아 중립 유지를 주장했다.[1]

반면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참전을 통해 새로운 영토를 얻고 '''메갈리 이데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확신했다.[1] 그는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영국 재무장관과의 친분을 통해 영국의 지원을 기대했다.[1] 베니젤로스는 불가리아에 영토 일부를 양보하는 대신, 소아시아 지역의 영토 확장을 기대하며 연합국 가입을 추진했다.[1]

1915년,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가입을 위한 법안을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했으나, 국왕과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1] 갈리폴리 전투 이후, 베니젤로스는 영국과 프랑스 군대가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했고, 의회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행했다.[1]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베니젤로스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하며 맞섰다.[1]

자유당은 선거를 보이콧했고, 왕당파 정부는 국민의 지지를 받지 못했다.[1] 양측의 갈등은 1916년 더욱 심화되었고, 베니젤로스의 초청으로 연합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자, 국왕 지지 세력은 이를 주권 침해로 간주했다.[1]

3. 2. 다르다넬스 해협 전투와 베니젤로스의 사임 (1915)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초기, 그리스는 세르비아와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중립을 유지하고자 했다. 그는 군사적 경험을 바탕으로 불가리아의 위협을 특히 우려했다. 또한, 국왕은 독재적인 성격으로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를 개인적으로 싫어했으며, 친독일적인 성향으로 독일의 승리를 믿었다.[1] 반면, 베니젤로스는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하기 위해 연합국 측 참전을 강력히 지지했다.

1915년 1월, 영국은 그리스에 소아시아 (현재 터키의 일부)의 전후 양보를 제안하며 참전을 요청했다. 베니젤로스는 이를 기회로 여겨 참전을 추진했지만, 국왕과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다. 특히, 당시 참모총장이었던 이오아니스 메탁사스는 독일이 다르다넬스 해협을 요새화했고 그리스가 불가리아의 공격에 취약해질 것이라며 반대하여 사임했다.

1915년 2월 19일, 영국과 프랑스 군함이 다르다넬스 해협에 진입하자(갈리폴리 전투), 베니젤로스는 오스만 제국의 멸망이 임박했다고 판단, 다시 참전을 주장했다. 그러나 국왕이 참전을 거부하자 베니젤로스는 1915년 3월 6일 사임했고, 디미트리오스 구나리스가 총리직을 계승했다.

3. 3. 테살로니키 정부 수립과 국가 분열 (1916)

베니젤로스는 1916년 테살로니키에 별도의 정부를 수립하고 연합국에 가담했다. 이는 그리스가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분열되는 결과를 초래했다.[2] 왕당파 정부는 중립을 유지했지만, 연합국은 베니젤로스 정부를 지지했다.

1916년 8월 30일, 테살로니키를 기반으로 한 친베니젤로스 비밀 군사 조직인 "국가방위"(Εθνική Άμυνα)가 왕당파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베니젤로스 장교들은 마케도니아 지역 방어를 목표로 했다.[3] 쿠데타의 주된 이유는 불가리아로부터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방어하기 위한 것이었고, 국왕이 이를 원하지 않자 직접 해결하기로 결정했다.[4] 쿠데타는 성공하여 테살로니키에 그리스의 두 번째 임시 정부가 수립되었다. 이 쿠데타는 베니젤로스의 사전 지식 없이 일어났으며, 그는 처음에는 그리스를 내전으로 몰아넣는 행동에 반대했다. 크레타와 그리스의 ''엔시스''(enosis, 합병)를 달성하기 위해 노력해 온 베니젤로스는 그리스를 분열시키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오랜 고심 끝에 그는 테살로니키의 운동에 합류하기로 결정했다.

협상국(Entente)의 지원을 받아 베니젤로스는 크레타에서 그리스 본토로 돌아와 1916년 10월 9일 삼두정치의 수장으로 새로운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그는 "우리는 국왕에 반대하는 것이 아니라 불가리아에 반대하는 것입니다."라고 선언했다. 베니젤로스와 함께 신정부를 이끈 사람은 파나기오티스 당글리스 장군과 파블로스 쿤투리오티스 제독이었다. 크레타, 사모스, 미틸리니, 키오스 섬 주민들은 즉시 베니젤로스를 지지했고, 곧 혁명 정부는 키클라데스 제도( "구 그리스"의 일부로 왕당파)를 제외한 에게해의 모든 섬을 장악했다. 크레타 출신 헌병들은 혁명 정부에 인력을 제공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했으며, 테살로니키에서는 "그리스의 안티고네"로 칭송받았다. 혁명 정부의 첫 번째 선언문은 다음과 같다.

> "지난 1년 반 동안, 그 동기는 검토하지 않겠지만, 그 정책은 너무나 많은 재앙을 가져왔기에 오늘날 그리스가 이전과 같은 국가인지 의문을 품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궁궐은 나쁜 조언자들의 말을 듣고 개인적인 정책을 적용하여 그리스가 전통적인 동맹국에서 멀어지고 전통적인 적에게 가까워지도록 했습니다."

테살로니키에 도착한 베니젤로스는 연설에서 이 전쟁이 자유를 위한 투쟁이며, 작은 국가들이 평화롭게 존재할 권리를 위한 투쟁이라고 주장했다. 베니젤로스는 섬과 마케도니아 일부의 자원만으로 정부를 조직하고 운영해야 하는 어려움에 직면했다. 예상과 달리 영국과 프랑스는 새로운 정부에 대한 지원이 더뎠고, 1916년 10월 20일에야 영국과 프랑스가 테살로니키 정부에 자금을 지원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베니젤로스가 온건한 모습을 보이려고 노력했음에도 불구하고, 특히 "구 그리스"의 많은 사람들은 혁명 정부를 사회 붕괴의 시작으로 보았다. 아테네의 국왕은 국가방위를 "공화국 프랑스의 지원을 받는" 반군주제 쿠데타로 간주했다.

1916년까지 그리스는 중립을 더 이상 유지할 수 없을 정도로 양극화되었고, 모든 사람들은 자신의 입장을 정해야 했다. 정교회가 국왕을 지지했기 때문에 베니젤로스 운동은 반교권적인 성격을 띠게 되었다. 그리스의 참전에 대한 반대는 사회주의 운동이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게 만들었다.

국가방위군단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연합군을 지원하기 위해 창설되었다. 이 군대는 대부분 자원병으로 구성되었지만, 많은 경우 국가방위의 베니젤로스 장교들은 자기 지역에서 탈영병이나 왕당파, 심지어 콘스탄티노스를 지지하는 성직자들에게까지 폭력을 행사하여 나크소스, 할키디키 등에서 유혈 사태를 초래했다.

한편 아테네의 왕당파 정부는 연합국과 계속 협상하여 전쟁에 참전할 가능성을 타진했고, 콘스탄티노스는 그들에게 베니젤로스 정부를 인정하지 말 것을 요청했지만, 테살로니키의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은 콘스탄티노스가 그들을 속이고 전쟁에 참전할 의사가 없다고 주장했다.

3. 4. 콘스탄티노스 1세 퇴위와 그리스의 참전 (1917)

1917년 6월, 콘스탄티노스 1세가 떠난 후 베니젤로스가 프랑스 군함을 타고 아테네에 도착하는 모습


연합국의 압력과 봉쇄,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의 노력으로 1917년 6월, 프랑스는 테살리아를 점령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가 왕위에 계속 머무를 경우 아테네를 폭격하겠다는 위협에, 결국 1917년 6월 14일 콘스탄티노스 1세는 그리스를 떠났고, 왕위는 그의 차남 알렉산드로스 1세에게 돌아갔다.[3] 콘스탄티노스 1세는 "구 그리스"에서 인기가 많았기에, 그의 퇴위는 아테네에서 많은 슬픔을 불러일으켰다.

베니젤로스는 아테네로 돌아와 정부를 장악하고 연합국에 대한 그리스의 지원을 약속했다. 1917년 6월 29일, 그리스는 독일,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불가리아, 오스만 제국과의 외교 관계를 단절했다.[3] 같은 해 7월, 그리스는 공식적으로 중앙 연합국에 선전포고했다.[3] 베니젤로스의 정치적 반대자들(메탁사스, 구나리스, 두스마니스 등)은 코르시카로 망명하거나, 내부 유배 또는 가택 연금을 당했다.[3]

4. 갈등의 결과

국론 분열은 그리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다. 주요 원인은 베니젤로스콘스탄티노스 국왕 간의 권력 다툼이었다. 1897년 그리스-튀르크 전쟁에서 그리스 군의 패배는 군주제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강화시켰다.[1]

1909년, 개혁을 요구하는 젊은 장교들이 "군사 동맹"을 결성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베니젤로스를 새로운 지도자로 추대했고, 베니젤로스는 개혁을 추진했지만 국왕과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후, 그리스는 중립과 연합국 가담 사이에서 갈등했다. 국왕은 중립을,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가담을 원했다. 베니젤로스는 연합국의 지원을 받아 '''메갈리 이데아'''를 실현하고자 했다.

4. 1. 정치적 분열과 불안정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할 것인지, 연합국에 가담할 것인지를 두고 극심한 갈등을 겪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독일과의 관계로 인해 중립을 선호한 반면,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 가담을 주장했다.[1]

국왕과 총리의 갈등은 1915년 베니젤로스의 해임과 의회 해산으로 이어졌다. 1915년 총선에서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승리했지만, 국왕은 새 정부 구성을 지연시켰다. 이후 불가리아가 동맹국에 가담하면서 그리스는 전쟁에 휘말릴 위기에 처했다. 베니젤로스는 연합군을 테살로니키에 상륙시키는 것을 허용했고, 의회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행했다. 그러나 국왕은 다시 베니젤로스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했다.

1916년,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군사 조직 국가방위가 테살로니키에서 왕당파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켰다. 베니젤로스는 크레타에서 돌아와 삼두정치의 수장으로 임시 정부를 이끌었다. 이로써 그리스는 아테네의 왕당파 정부와 테살로니키의 베니젤로스 임시 정부로 분열되었다.

왕당파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대령의 주도로 "예비군"이라는 준군사 조직을 결성하여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을 탄압했다. 아테네에서는 "11월 사건"이 발생하여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결국 연합군은 베니젤로스 정부를 인정하고 왕당파 정부를 압박했다.

4. 2. 소아시아 전쟁의 패배 (1919-1922)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리스는 연합국 측의 참전 제의를 받았으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와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의 의견 대립으로 중립을 유지했다. 베니젤로스는 연합국에 가담하여 소아시아 영토를 확장하려 했으나, 국왕은 이에 반대했다. 이러한 갈등은 베니젤로스의 사임과 그리스 북부에 별도의 임시 정부 수립으로 이어졌다.[1]

1916년, 베니젤로스를 지지하는 장교들은 테살로니키에서 "국가방위"라는 군사 조직을 결성하고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불가리아로부터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지키기 위해 독자적인 행동에 나섰다. 베니젤로스는 처음에는 반대했지만, 결국 삼두정치의 수장으로서 임시 정부를 이끌게 되었다.[2]

이후 그리스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나뉘었고, 연합군의 개입으로 콘스탄티노스 1세는 결국 추방되었다. 이러한 국내 분열은 소아시아 전쟁 패배의 한 원인으로 작용했다.

4. 3. 사회적 분열과 트라우마

국론 분열은 그리스 사회에 깊은 불신과 증오를 남겼다. 왕당파와 베니젤로스파의 갈등은 단순한 정치적 대립을 넘어 사회 전체를 분열시키는 결과를 초래했다.

특히, 1916년 8월 30일 테살로니키를 기반으로 한 친(親)베니젤로스 비밀 군사 조직 '국가방위'가 왕당파 정부에 대한 쿠데타를 일으키면서, 그리스는 사실상 두 개의 정부로 나뉘게 되었다.[2] 이들은 불가리아로부터 그리스 마케도니아를 방어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으며, 국왕이 이를 원하지 않자 직접 행동에 나섰다.[2] 이후 협상국의 지원을 받은 베니젤로스는 삼두정치의 수장으로 임시 정부를 이끌었고, 이는 그리스 사회의 분열을 더욱 심화시켰다.[2]

이러한 분열은 사회 곳곳에 영향을 미쳤다. 왕당파 준군사 조직인 '예비군'(Επίστρατοι)은 베니젤로스 지지자들을 탄압하고, 정교회는 베니젤로스를 파문하는 등 극심한 대립이 이어졌다.[2] 이러한 갈등 상황은 그리스 사회에 깊은 상처를 남겼으며, 그 영향은 1930년대 후반까지 지속되었다.

5. 갈등의 유산과 현대적 의미

제1차 세계 대전 당시 그리스는 중립 유지와 연합국 가담 사이에서 국론이 분열되었다.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중립을,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 총리는 연합국 가담을 주장하면서 그리스 사회는 둘로 나뉘었다.

이러한 역사적 사건은 오늘날에도 중요한 의미를 갖는다. 정치적 견해 차이가 심각한 갈등으로 이어질 수 있으며, 국가 지도자의 결정이 국가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또한, 민주주의 사회에서 합의를 도출하는 과정의 어려움과 중요성을 강조한다.

5. 1. 군부의 정치 개입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는 중립과 연합국 가담 사이에서 선택해야 했다. 중앙 강국 편에 서는 것은 영국 해군에 대한 취약성과 오스만 제국의 독일 편 가담으로 인해 불가능했다. 국왕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던 친독일적인 참모총장 등은 중립을 선호했다.[1]

1914년 10월, 오스만 제국이 러시아를 공격하면서 영국, 프랑스, 러시아는 오스만 제국에 선전포고했다. 오스만 제국의 참전 이후, 연합국은 '''메갈리 이데아''' 실현을 위한 약속을 제시하며 그리스의 참전을 더욱 적극적으로 유도했다. 그러나 연합국은 불가리아의 중립 유지를 우선시했고, 베니젤로스는 이에 크게 실망했다.[1]

콘스탄티노스 국왕의 친독일 성향은 연합국의 선전에서 과장된 측면이 있었다. 왕비 소피아가 독일 황제 빌헬름 2세의 여동생이었고, 콘스탄티노스 자신도 독일에서 교육받고 독일 문화를 존경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는 덴마크, 러시아 혈통이었고, 영국과도 친밀한 관계를 유지했다.[1]

그리스는 연합국인 세르비아와 상호 방위 조약을 맺고 있었지만, 콘스탄티노스는 중립 유지가 그리스의 이익에 부합한다고 판단했다. 그는 불가리아 군대의 위협을 특히 우려했고, 독재적인 성격으로 베니젤로스를 개인적으로 싫어했으며, 독일의 승리를 확신했다. 그는 군인들과의 거래를 선호하며 권위주의적인 정치 스타일을 추구했다.[1]

독일 황제의 반슬라브주의적 인종차별주의를 알고 있던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장군은 독일이 "슬라브주의에 맞선 헬레니즘"의 방어자라고 주장하며, 오스만 제국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그는 그리스의 물류 및 경제적 능력 부족을 이유로 들었지만, 영국 해군의 봉쇄에 대한 두려움이 없었다면 중앙 강국 편에 섰을 것이다.[1]

콘스탄티노스 1세는 1915년에 4천만 골드 라이히스마르크의 "대출"을 비밀리에 받아 스위스 은행 계좌에 입금했다.[1] 이는 중립 유지의 대가였으며, 왕실의 부패와 관련되었다는 주장이 제기되었다. 그러나 스테파노스 스쿨루디스와 군주주의 작가들은 이 대출이 중립 조항 없이 이루어졌으며, 연합국의 제안보다 이자가 더 좋았다고 주장한다.[1]

반면, 베니젤로스는 그리스가 '''메갈리 이데아'''를 달성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연합국 가담을 강력히 지지했다. 그는 불가리아와 오스만 제국의 위협을 경고하며,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더라도 "소아시아의 헬레니즘은 여전히 외국 지배하에 있을 것"이라고 주장했다.[1]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와의 우정은 베니젤로스의 친연합국 성향에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로이드 조지는 영국 내각 내에서 그리스를 위한 강력한 목소리였으며, '''메갈리 이데아'''에 대한 지지를 통해 베니젤로스에게 확신을 심어주었다.[1]

1915년 1월, 영국은 그리스에 소아시아의 전후 양보를 제안했다. 베니젤로스는 이를 위해 불가리아에 동부 마케도니아와 트라키아 지역을 양보하는 데 동의했다. 그는 카발라 주민들을 스미르나에 재정착시키는 인구 교환까지 계획했지만, 이는 대중의 반발을 불러일으켰다.[1]

베니젤로스는 왕립 평의회를 소집하여 연합국 가입을 주장했지만, 국왕과 군 장성들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메탁사스는 "아무도 그리스 땅을 줄 권리가 없다"고 말했다.[1]

베니젤로스의 사임은 정치적 불화를 야기했고, 1915년 6월 총선에서 자유당이 승리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는 새 정부 임명을 미루었다. 1915년 선거에서 왕당파는 "구 그리스"에서, 자유당은 "신 그리스"에서 좋은 성적을 거두었다.[1]

1915년 가을, 양측의 선전전이 격화되었다. 독일은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그리스의 중립 유지 시 북부 에피루스와 도데카니사 제도를 제공하겠다고 약속했다.[1]

불가리아가 세르비아에 선전포고하면서 그리스는 전쟁 직전에 놓였다. 베니젤로스는 콘스탄티노스 1세에게 군대 동원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무시하고 싶다고 발표했다. 베니젤로스는 "헌법을 제쳐두고 칙령에 따라 모든 책임을 지려고 결심한 경우가 아니라면" 불가리아의 확장을 막아야 한다고 주장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는 "하나님 앞에서 책임이 있다"며 외교 문제에 대한 자신의 권한을 강조했다.[1]

콘스탄티노스 1세를 설득하기 위해 영국은 키프로스 제공을 제안했지만, 국왕과 총리는 이를 거절했다.[1]

베니젤로스는 영국과 프랑스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했고, 의회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강행했다. 그러나 콘스탄티노스 1세는 베니젤로스를 해임하고 의회를 해산, 새로운 선거를 실시했다. 베니젤로스는 독일의 승리가 그리스에 재앙이 될 것이라고 경고하며 선거를 보이콧했다.[1]

자유당의 보이콧으로 새 왕당파 정부는 약화되었다. 세르비아를 돕지 않기로 한 결정은 일부 육군 장교들을 실망시켰다. 자유당 정치인 조지 카판다리스는 왕당파의 "왕권 신수설"을 비난하며, 입헌 군주제에서 국왕은 수동적인 도구라고 주장했다.[1]

1916년, 프랑스와 영국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면서 긴장은 더욱 고조되었다. 그리스 국민들은 연합군이 국가 주권을 침해했다는 국왕의 견해를 지지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는 외교적 노력을 기울였지만, 연합군은 마케도니아 전선을 유지하기로 결정했다.[1]

5. 2. 민주주의의 시련과 교훈



제1차 세계 대전 발발 당시, 그리스는 중립을 유지할 것인지, 아니면 연합국에 가담할 것인지 결정해야 했다. 콘스탄티노스 1세 국왕은 독일에서 교육받고 독일 문화를 존경했지만, 덴마크와 러시아 혈통을 이어받고 영국을 좋아했기에 중립이 최선이라고 판단했다.[1] 반면, 총리였던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는 연합국 편에 서서 '''메갈리 이데아'''를 달성하고자 했다.

1915년, 영국은 그리스가 연합국에 가담하면 소아시아(현재 터키)를 주겠다고 제안했다. 베니젤로스는 이를 의회에서 통과시키려 했으나, 국왕과 군부의 반대로 무산되었다. 베니젤로스는 사임했고, 이는 정치적 갈등을 일으켰다. 1915년 6월 총선에서 베니젤로스의 자유당이 승리했지만, 콘스탄티노스 1세는 새 정부 승인을 미뤘다.

1915년 가을, 불가리아세르비아를 공격하자 그리스는 세르비아와의 동맹에 따라 참전해야 할 상황에 놓였다. 베니젤로스는 국왕에게 동원을 요청했지만, 국왕은 이를 거부하고 세르비아와의 동맹을 무시했다. 베니젤로스는 국왕을 설득하려 했으나 실패했고, 결국 영국과 프랑스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는 것을 허용했다.

베니젤로스는 의회에서 불가리아에 대한 선전포고를 통과시켰지만, 국왕은 이를 무시하고 베니젤로스를 해임했다. 베니젤로스는 아테네를 떠나 크레타로 돌아갔고, 자유당은 새로운 선거를 보이콧했다.

1916년, 프랑스와 영국군이 테살로니키에 상륙하자, 그리스 국민들은 국왕의 견해를 지지하며 연합군이 주권을 침해했다고 생각했다. 양측의 갈등은 심화되었고, 그리스는 분열의 위기에 놓였다.

참조

[1] 웹사이트 Το μυστικο δάνειο της κυβερνήσεως Σκουλούδη από την Γερμανία κατά τον Α΄ παγκόσμιο πόλεμο και οι πολιτικές του επιπτώσεις (1915–1917) https://www.istorika[...]
[2] 웹사이트 Η επίθεση στην Απείρανθο της Νάξου https://www.mixanito[...]
[3] 웹사이트 O βασιλιάς Αλέξανδρος (1893– 1920) και το μοιραίο δάγκωμα https://www.eurohoop[...]
[4] 논문 ヴェニゼロスと近代ギリシャにおけるイレデンティズム : 英文による先行研究のレビュー https://cir.nii.ac.j[...] 2022-0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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