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귀스타브 샤를 마리 뮈텔은 1881년 조선에 파견되어 선교 활동을 시작한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다. 그는 조선 교구장으로 재직하며 신학교를 설립하고 명동성당 건립에 기여하는 등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공헌했다. 또한, 경향신문을 발간하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는 등 다양한 활동을 펼쳤다. 하지만, 뮈텔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적인 태도를 보였고, 안중근 의사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 당시 안중근을 출교하고 종부성사 요청을 거부하는 등 부정적인 평가도 받았다. 특히 3.1 운동 당시 독립운동을 탄압하고,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하며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막으려 했다는 비판도 존재한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로마 가톨릭 성직자 - 노기남
노기남은 한국 최초의 주교이자 서울대교구 초대 대주교로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기여했으나, 일제강점기 친일 행적에 대한 논란이 있는 인물이다. - 일제 부역자 - 그리고리 세묘노프
러시아 내전 당시 자바이칼 지역에서 활동한 코사크-부랴트 혼혈 출신의 백군 지도자 그리고리 세묘노프는 일본군의 지원을 받아 반공 세력을 규합하여 통치했으나, 무자비한 통치와 약탈로 악명을 떨치다 소련군에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 일제 부역자 - 향토방위의용군
향토방위의용군은 일본이 인도네시아 점령 기간 중 현지 주민을 무장시키기 위해 설립한 군사 조직으로, 반일 저항 운동에 연루되기도 했으며, 인도네시아 군사 형성에 영향을 미쳤다. - 한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마리니콜라앙투안 다블뤼
프랑스 출신 로마 가톨릭 주교이자 조선교구 사도대목구장이었던 안토니 다블뤼는 1845년 한국에 입국하여 선교 및 문서 선교에 기여, 주교 서품 후 사도대목구장을 이어받았으나 병인박해 때 순교, 1984년 시성되었고 그의 순교는 한국 천주교회 발전에 큰 영향을 미쳤다. - 한국에 거주한 프랑스인 -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
베르나르 루이 볼리외는 1866년 병인박해 때 순교한 프랑스인 천주교 사제이며, 1864년 사제 서품을 받고 조선 선교사로 활동하다가 체포되어 참수형을 받고 순교했으며, 1984년 성인으로 시성되었다.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 |
---|---|
기본 정보 | |
본명 | 귀스타브-샤를-마리 뮈텔 |
출생 | 1854년 3월 6일, 프랑스 블로네 |
사망 | 1933년 12월 22일 (향년 79세), 대한민국 서울특별시 |
국적 | 프랑스 |
직업 | 가톨릭 성직자, 선교사, 번역가 |
종교 활동 | |
소속 교단 | 로마 가톨릭교회 |
세례명 | 구스타보 |
직책 | 주교 |
주교 서품 | 1890년 5월 25일 |
임명 | 제4대 조선대목구장 |
주요 활동 | |
활동 분야 | 한국어 연구, 프랑스어-한국어 사전 편찬, 가톨릭 서적 번역 |
저서 | 한불자전 (1896), 불한사전 (1900) |
기타 | |
묘소 | 서울특별시 용산구 용산성당 성직자 묘지 |
2. 활동
1881년 조선에 와서 선교 활동을 했다.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프랑스로 돌아갔다가,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다시 조선에 왔다. 조선 가톨릭 교회의 확립을 위해 힘썼으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문에 능통했고, 순교자들의 업적을 조사했으며, 가톨릭 교회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06년 경향신문을 발간했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뮈텔 주교는 대한성공회와도 관련이 있는데, 성공회신문에 실린 뮈텔 주교의 글에 따르면 한국에 오는 배에서 대한성공회 3대 교구장인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 주교를 만났다고 한다.
뮈텔 주교는 조선 교구장으로서 한국 천주교회의 발전에 크게 공헌하였다.[4]
3. 긍정적 평가
3. 1. 교세 신장
뮈텔 주교는 1881년 조선에 와서 선교에 힘썼다. 1885년 파리 대학 학장이 되어 돌아갔다가, 1890년 제8대 조선 교구장이 되어 다시 조선에 왔다. 조선 천주교회의 확립을 위해 힘썼으며, 신학교를 창설하고, 명동성당 등을 건립하였다. 한문에 능하였고, 순교자의 공적을 조사하였으며, 천주교 관련 자료를 수집·보존하는 데 힘을 기울였다. 1906년 경향신문을 발간하였고, <황사영 백서>를 프랑스어로 번역하였다. 뮈텔 주교는 대한성공회와도 관련이 있는데, 성공회신문에 실린 뮈텔 주교의 글에 따르면 한국에 오는 배에서 대한 성공회 3대 주교인 마크 트롤로프(한국명 조마가) 주교를 만났다고 한다.[4]
4. 부정적 평가
뮈텔은 조선인에 대한 차별 의식과 일제 강점기 한국 독립운동에 대한 부정적인 태도로 비판받는다. 그는 조선인을 미개하다고 여겼으며, 안중근의 이토 히로부미 저격 사건을 '살인행위'로 규정하고 안중근을 출교하였다.[2][3] 또한 안중근과 그 일가족의 종부성사 요청을 외면하고, 자발적으로 안중근에게 종부성사를 집행한 니콜라조세프마리 빌렘 신부를 징계하였다.[2][3]
4. 1. 조선인 차별
한국교회사연구소 설립자이자 천주교회의 원로인 최석우 신부에 따르면, 뮈텔은 조선인들에 대해 차별적인 우월의식이 있었으며, 동양의 미개한 지역에 와서 봉사한다고 생각해 조선인 성직자마저 동역자로 인식하지 않았다고 한다.[1]2011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는 뮈텔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항일 의병들을 약탈자와 산적에 비유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대신학생들을 퇴학시키는 등 조선인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참여를 봉쇄하고 오직 신앙만을 강조했으나, 정작 자국의 국가적 위기인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다르게 행동했던 사실을 지적하였다.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수행할 당시,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으며, 처형을 앞두고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안중근과 그 일가족의 요청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종부성사를 집행한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조세프마리 빌렘을 징계하는 등의 행각을 벌인 사실이 그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2][3] 뮈텔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4. 2. 독립운동 탄압
2011년 한국교회사연구소가 개최한 심포지엄에서는, 뮈텔을 비롯한 프랑스 선교사들이 항일 의병들을 약탈자와 산적에 비유하고 3·1 운동에 참여하였던 대신학생들을 퇴학시키는 등 조선인 신자들의 독립운동 등 현실참여를 봉쇄하고 오직 신앙만을 강조했으나, 정작 자국의 국가적 위기인 제1차 세계 대전 때는 다르게 행동했던 사실을 지적하였다.[1]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하는 거사를 수행할 당시,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다. 또한 처형을 앞두고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안중근과 그 일가족의 요청을 외면하였을 뿐 아니라,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종부성사를 집행한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조세프마리 빌렘을 징계하는 등의 행각을 벌인 사실이 그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2][3] 뮈텔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
4. 3. 안중근 의사 관련 논란
1909년 안중근이 이토 히로부미를 저격했을 때, 뮈텔은 안중근을 일방적으로 출교하고 그와 로마 가톨릭교회의 관계를 전면 부정하였다.[2][3] 뮈텔은 처형을 앞둔 안중근과 그 일가족이 종부성사를 위해 프랑스인 사제를 보내달라는 요청을 외면하였다. 또한 자발적으로 안중근을 찾아가 종부성사를 집행한 프랑스 선교사 니콜라조세프마리 빌렘을 징계하는 등의 행각을 벌였는데, 이러한 사실은 그의 일기를 통해 밝혀졌다. 뮈텔은 안중근의 의거를 ‘살인행위’로 단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추모하는 모임에 참석하기도 했다.5. 정교분리 정책
뮈텔 주교는 정교분리 정책을 고수하면서 한국인의 독립운동을 막으려 한 인물이었다.[5]
참조
[1]
뉴스
1890~1933년 ‘천주교 조선 대목구장’ 뮈텔 일기는… 의병을 도적으로 폄하, 한국인 성직자마저 멸시
http://www.hani.co.k[...]
한겨레
[2]
뉴스
안중근의사 내용담은 <뮈텔 일기>와 <조선교구 통신문>
https://news.v.daum.[...]
연합뉴스
[3]
뉴스
안중근 의사 손도장 찍힌 유묵 ‘경천’, 천주교 품으로…
http://www.hani.co.k[...]
한겨레
[4]
웹인용
근대 > 46권 신문화운동 Ⅱ > Ⅱ. 근대 종교운동 > 3. 천주교
http://contents.hist[...]
국사편찬위원회
2024-03-28
[5]
저널
안중근과 천주교의 관계에 대한 비판적 검토 : 독립운동기를 중심으로
https://search.i815.[...]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1-04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