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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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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고대 로마의 정치가이자 군인으로, 기원전 53년에 집정관을 역임했다. 그는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를 지지하며 여러 전투에 참여했고,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군의 중앙을 지휘했다.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재직 중 파르나케스 2세에게 패배하기도 했지만, 카이사르 암살 후에는 옥타비아누스를 지지하며 제2차 삼두정치를 지원했다. 이후 두 번째 집정관을 역임하고 히스파니아 속주 총독으로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펼쳤으며, 기원전 20년까지 생존하며 고위 사제직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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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개요
Osca
OSCA 뒤, 헤르쿨레스 머리 오른쪽, 목걸이 착용
Osca
DOM. COS. ITER. IMP, 심풀룸, 아스페르길룸, 도끼, 아펙스
개인 정보
이름그나에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라틴어 표기Gnaeus Domitius Calvinus
가문노빌레스
씨족도미티우스 씨족
출생불명
사망불명
출생지불명
사망지불명
경력
호민관기원전 59년
법무관 (선거 위반 심문)기원전 56년
집정관기원전 53년
전(前) 집정관 또는 레가투스기원전 48년-기원전 46년
신기관기원전 45년경 - 기원전 20년 이후
예정 독재관 부관기원전 43년
집정관 (II)기원전 40년
전(前) 집정관기원전 39년-기원전 36년
속주 총독
아시아 속주기원전 48년-기원전 47년
히스파니아기원전 39년-기원전 36년
기타 정보
지휘 전쟁(정보 없음)
배우자(정보 없음)
후계자(정보 없음)

2. 생애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오래된 평민귀족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의 가문은 200년 넘게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는 악명 높은 선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카이사르의 내전이 발발하자 카이사르의 편에 서서 끝까지 그를 지지했으며,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군대의 중앙 부대를 지휘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승리 후 아시아 속주 총독으로 임명되었으나, 폰토스의 왕 파르나케스 2세의 침공을 막지 못하고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대패했다. 이후 카이사르가 직접 개입하여 젤라 전투에서 승리하면서 상황이 수습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카이사르의 신뢰를 유지했다.

카이사르 암살 이후에는 옥타비아누스의 충실한 지지자가 되어 제2차 삼두정치를 지원했다. 필리피 전투 직전에는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에게 해군으로 지원군을 보내는 임무를 맡았으나, 또다시 대패하여 2개 군단을 잃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40년에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했고, 이후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파견되어 성공적인 군사 활동을 수행하여 개선식을 거행하기도 했다. 아우구스투스가 황제로 즉위한 이후에도 생존하여 기원전 20년까지 고위 사제직인 아르발 형제단의 일원으로 활동하며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다.

칼비누스는 정치적인 면(부패 스캔들 연루)이나 군사적인 면(두 차례의 큰 패배)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여주지는 못했지만,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파벌을 초기에 지지했던 소수의 로마 귀족 중 한 명이었기에 로마 공화정 말기와 아우구스투스 시대 초기에 걸쳐 중요한 정치적 역할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2. 1. 초기 생애와 경력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오래된 평민귀족 가문인 도미티우스 칼비누스 가문 출신이었으나, 그의 가문은 200년 넘게 집정관을 배출하지 못했다. 그는 악명 높은 선거 스캔들에도 불구하고 기원전 53년에 집정관으로 선출되었다.

기원전 49년 카이사르와 폼페이우스의 내전이 발발하자, 칼비누스는 카이사르 편에 서서 끝까지 그를 지지했다. 그리스 원정 중, 카이사르는 칼비누스에게 2개 군단을 주어 시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려던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저지하는 임무를 맡겼다. 결정적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군대의 중앙 부대를 지휘하여 승리에 기여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승리 후, 칼비누스는 전략적 요충지인 아시아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내전을 틈타 폰토스 왕국의 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인 보스포루스 왕 파르나케스 2세가 소아시아를 침공하자, 칼비누스는 이에 맞섰으나 기원전 48년 12월 아르메니아의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큰 패배를 당했다. 이 분쟁은 이후 카이사르가 직접 개입하여 기원전 47년 젤라 전투에서 파르나케스 군대를 격파함으로써 빠르게 마무리되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칼비누스는 카이사르의 신뢰받는 측근으로 남았다.

2. 2. 카이사르 내전

기원전 53년 집정관으로 선출된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기원전 49년 발발한 카이사르의 내전에서 카이사르의 편에 서서 끝까지 그를 지지했다. 그리스 원정 중, 카이사르는 도미티우스에게 군단 두 개를 주어 시리아 군단을 이끌고 폼페이우스에게 합류하려던 메텔루스 스키피오를 저지하도록 명령했다. 기원전 48년 벌어진 결정적인 파르살루스 전투에서는 카이사르 군대의 중앙 부대를 지휘하며 승리에 기여했다.

파르살루스 전투 이후 도미티우스는 아시아 속주총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러나 로마의 내전 상황을 틈타 폰토스 왕국의 왕 파르나케스 2세(미트리다테스 6세의 아들)가 아시아 속주를 침공했다. 도미티우스는 이에 맞섰으나 기원전 48년 12월 아르메니아에서 벌어진 니코폴리스 전투에서 파르나케스 군대에게 큰 패배를 당했다. 이 분쟁은 기원전 47년 카이사르가 직접 개입하여 젤라 전투에서 파르나케스 군대를 격파하면서 빠르게 종결되었다. 도미티우스는 니코폴리스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카이사르의 신임을 잃지 않았고 처벌받지 않았으나, 이후 주요 전투에 다시 기용되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그는 내전 기간 동안 카이사르의 신뢰받는 동료로 남았다.

2. 3. 카이사르 암살 이후

카이사르기원전 44년 3월에 암살된 후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행적은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 43년부터는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었으며,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제2차 삼두정치를 결성하자 이를 지원하며 마르쿠스 유니우스 브루투스카시우스와의 내전에 참여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를 앞두고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위한 지원군을 해군으로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이오니아 해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반대파 함대에게 파괴되었고, 이 패배로 로마 군단 2개를 잃었다.

이러한 큰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옥타비아누스의 신임을 유지하여 기원전 40년에 두 번째 집정관직을 수행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기원전 39년부터 3년간 프로콘술로서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파견되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군사 활동은 성공적이어서, 휘하 군대로부터 ''임페라토르''로 추대되기도 했다.

기원전 36년 7월 15일, 히스파니아에서의 공적을 인정받아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이때 얻은 전리품으로 로마 포룸에 있는 ''레기아''를 재건했다. 이후 그의 정치 활동에 대한 자세한 기록은 많지 않지만, 기원전 20년비문 기록을 통해 그가 당시까지 생존했으며, 황제 일가나 최측근 지지자들에게만 허용되던 중요한 사제직인 아르발 형제단(Arval Brethren)의 일원이었음이 확인된다. 이를 통해 그는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음을 알 수 있다.

도미티우스 칼비누스는 부패 스캔들이 있었던 첫 집정관 선거나 두 차례의 큰 군사적 패배에서 볼 수 있듯 정치나 군사 분야에서 뛰어난 능력을 보인 인물은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화정 말기와 아우구스투스 시대 초기에 걸쳐 중요한 정치적 위치를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파를 일찍부터 지지했던 소수의 로마 귀족 중 한 명이었기 때문으로 평가된다.

2. 4. 두 번째 집정관과 히스파니아 총독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에서 옥타비아누스와 마르쿠스 안토니우스를 지원하기 위해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지원군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으나, 그의 함대는 이오니아 해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브루투스카시우스 연합 함대에게 파괴되어 2개의 로마 군단을 잃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옥타비아누스와의 관계 덕분인지 기원전 40년에 가이우스 아시니우스 폴리오와 함께 두 번째 집정관으로 선출되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기원전 39년부터 프로콘술로서 히스파니아 총독으로 파견되어 3년간(기원전 39년 ~ 기원전 36년) 그곳에 머물렀다. 히스파니아에서의 군사 활동은 이전의 실패와 달리 성공적이어서, 그는 휘하 군대에 의해 ''임페라토르''로 추대되기도 했다.

기원전 36년 7월 15일, 히스파니아에서의 승리를 기념하여 로마에서 개선식을 거행하였다. 그는 개선식에서 얻은 전리품을 사용하여 로마 포룸에 있는 레기아(Regia)를 재건했다.

그 이후의 정치 활동에 대해서는 자세히 알려진 바가 없으나, 기원전 20년에 작성된 비문에 그의 이름이 기록된 것으로 보아 최소한 그때까지는 생존했던 것으로 확인된다. 이 비문에 따르면 그는 당시 황제 아우구스투스와 그 측근들에게만 허용되었던 중요한 사제단인 아르발 형제단(Arval Brethren)의 일원이었다. 이는 그가 정치적, 군사적 능력 면에서는 다소 부족함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초기부터 카이사르와 옥타비아누스 파를 지지했던 소수의 로마 귀족 중 한 명이었기에 명예로운 말년을 보낼 수 있었음을 시사한다.

2. 5. 말년

카이사르기원전 44년 암살된 이후 도미티우스 칼비누스의 행적은 한동안 명확하지 않다. 그러나 기원전 43년에는 옥타비아누스의 강력한 지지자가 되어, 브루투스카시우스 등 카이사르 암살파와의 내전에 참여했다.

기원전 42년 필리피 전투를 앞두고는 이탈리아에서 그리스로 마르쿠스 안토니우스와 옥타비아누스의 군대를 위한 지원군을 수송하는 임무를 맡았다. 하지만 그의 함대는 이오니아 해에서 그나이우스 도미티우스 아헤노바르부스가 이끄는 공화정파 해군에게 파괴되었고, 이 과정에서 2개의 로마 군단을 잃는 큰 패배를 겪었다.

이러한 군사적 실패에도 불구하고, 그는 제2차 삼두정치의 핵심 인물인 옥타비아누스의 신임을 유지했다. 결국 기원전 40년에는 두 번째로 집정관에 오르는 영예를 안았다. 이후 옥타비아누스에 의해 히스파니아총독으로 파견되어 기원전 39년부터 기원전 36년까지 3년간 재임했다. 히스파니아에서의 군사 활동은 성공적이어서, 그의 군대는 그를 ''임페라토르''로 추대하기도 했다.

기원전 36년 로마로 귀환하여 7월 15일 개선식을 거행했으며, 이때 얻은 전리품으로 로마 포룸에 있는 레기아를 재건했다. 그 이후의 구체적인 정치 활동은 잘 알려져 있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20년에 작성된 비문에 그의 이름이 아르발 형제단의 사제 명단에 포함된 것으로 보아, 이때까지 생존했으며 황제 아우구스투스가 된 옥타비아누스 체제 하에서도 여전히 중요한 인물로 인정받았음을 알 수 있다. 아르발 형제단 사제직은 당시 황실 가족이나 황제의 핵심 측근에게만 주어지는 명예로운 자리였다. 이를 통해 그는 명예로운 말년을 보냈다고 평가된다.

2. 6. 가족

칼비누스는 루키우스 칼푸르니우스 비불루스와 결혼한 딸 도미티아 칼비나를 두었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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