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병대 (조슈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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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기병대는 1863년 다카스기 신사쿠의 제안으로 조슈 번에서 조직된 전투 부대이다. 요시다 쇼인의 서양 보병론을 배운 이들이 중심이 되어 편제와 훈련이 이루어졌으며, 신분 초월의 서양 병제를 통해 막부와 외세에 대응하고자 했다. 기병대는 교토에서의 정변과 막부의 공격 속에서 활약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신정부군에 배속되어 보신 전쟁에 참전했다. 이후 번의 해산 과정에서 불만을 품은 구 기병대 출신들이 탈대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사이고 다카모리의 세이난 전쟁에서도 기병대가 조직되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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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슈번 기병대 - 조슈 정벌
조슈 정벌은 에도 막부가 조슈 번의 세력 확장을 막고 권위를 회복하기 위해 두 차례에 걸쳐 감행한 군사 행동으로, 나마무기 사건과 금문의 변을 거치며 갈등이 심화되어 1864년과 1866년에 각각 1, 2차 정벌이 있었으며, 특히 2차 정벌에서 막부의 패배는 막부 쇠퇴를 가속화하고 메이지 유신의 발판을 마련했다. - 조슈번 기병대 - 탈대소동
탈대소동은 1870년 조슈번에서 판적봉환 후 군제 개편 과정에서 해고된 평민 출신 제대사들이 불만을 품고 일으킨 무력 항쟁으로, 하마다 재판소 습격, 야마구치번 의사당 포위 등의 사건으로 이어졌으나 야마구치 번 토벌군에 의해 진압되었으며, 메이지 유신 이후 소외된 계층의 불만을 드러낸 사례로 평가받는다. - 막말 제대 - 교토 미마와리구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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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이지 유신은 1868년부터 1880년대 후반 일본에서 일어난 정치, 경제, 사회의 급격한 개혁으로, 도쿠가와 막부 붕괴 후 천황 중심의 근대 국가를 건설하고 폐번치현, 징병제, 학제 개혁, 서구 문물 수용 등을 통해 근대화와 부국강병을 이끌었으나 사회적 혼란과 불평등을 야기하여 다양한 평가가 존재하는 시기이다. - 왕정복고 - 잉글랜드 왕정복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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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병대 (조슈번) - [군대/부대]에 관한 문서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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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요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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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칭 | 기병대 (奇兵隊) |
로마자 표기 | Kiheitai |
구분 | 자원병 민병대 |
창설 | 1863년 |
해산 | 1868년 |
소속 | 조슈번 |
규모 | 300명 (총 등록 인원: 622명) |
역할 | 불규칙 전투 |
관련 단체 | 쇼카손주쿠 |
지휘관 | |
주요 지휘관 | 다카스기 신사쿠 (1863–1863) 야마가타 아리토모 (1863–1868) |
전투 및 활동 | |
주요 전투 | 시모노세키 전쟁 제1차 조슈 정벌 제2차 조슈 정벌 보신 전쟁 |
2. 조슈 기병대
1863년(분큐 3년) 시모노세키 전쟁 이후 다카스기 신사쿠가 제안하여 조직된 전투 부대로, 부대 편제와 훈련은 쇼카손주쿠(松下村塾) 동문들이 주도했다. 이들은 요시다 쇼인의 '서양보병론'을 공부했으며, 당초 목적은 서양 배(이양선)로부터 나라를 지키는 것이었다. 첫 본거지는 가이센도이야(廻船問屋)의 아카시 쇼이치로 저택(白石正一郎)[5]이었고, 후에 아카마 신궁(赤間神宮)으로 이전했다. '기이할 기(奇)'자를 써서 기병대라 한 것은 다카스기 신사쿠가 스승 요시다 쇼인의 유지를 받들어, 신분을 초월한 총력적인 서양 병제라야 일본 일개 번에 불과한 조슈번이 막부의 압정과 외세의 침략을 버틸 수 있다고 올린 상소문에서 기인한다.
기병대원들이 신분 문제로 조슈 정규군인 선봉대(撰鋒隊)와 갈등을 겪은 끝에 '교호지 사건(教法寺事件)'을 일으켜 초대 기병대 총독 다카스기 신사쿠가 해임되었다. 이후 가와카미 야이치(河上弥市)와 타키 야타로(滝弥太郎) 2인 총독 체제로 임시 구성되었다가 아카네 타케토(赤根武人)가 정식 후임 총독에 올랐다. 군감(감시역)으로는 야마가타 쿄스케(훗날의 야마가타 아리토모)가 임명되었다. 1863년(분큐 3년) 교토에서는 8월 18일 정변이 일어나 일본 황궁에서 조슈 번사들이 모두 퇴출되었다.
1864년(겐지 원년) 신센구미가 존양파 조슈번사들을 습격한 이케다야 사건으로 많은 유신지사들이 죽었다. 수세에 몰린 조슈 번은 반격을 노리고 황궁으로 몰려갔으나 아이즈번, 구와나번으로 편성된 막부군과 사쓰마번에게 밀려 쫓겨갔다. 후일 금문의 변으로 알려진 이 사건으로 교토 시가지가 불타고 조슈번은 역적 신세(朝敵)가 되었다. 막부는 황궁의 조칙을 받들어 대규모 정벌군을 편성하고 조슈번으로 향했는데, 조슈 번의 기병대는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활약했다.
막부 군의 제1차 정벌에서 조슈번이 패배한 후, 전년도 '교호지 사건'으로 번에서 추방되었던 다카스기 신사쿠가 귀환했다. 조슈 번주인 모리 다카치카는 다카스기에게 전권을 주었고, 이에 조슈 번내 보수 인사들은 줄줄이 숙청되었다. 조슈 번은 타도 막부(도막: 倒幕)의 기치를 올리고 서양식 관제와 병제를 도입한다.
1865년(겐지 2년) 에도 막부가 2차 조슈 정벌군을 편성해 쳐들어와 기병대는 다시 전투를 계속했다.
1866년(게이오 2년) 조슈번은 사쓰마번과 삿초 동맹을 맺고, 이듬해인 1867년(게이오 3년) 10월 대정봉환을 달성하고 1868년 왕정복고(메이지 유신)를 선언한다. 기병대는 메이지 신정부군에 배속되어 막부군과 보신 전쟁에서 싸웠다. 이즈음 조슈 번(유신 후 스오 지구(周防地区)라 명명)에서는 제2 기병대(혹은 남기병대)가 새로 결성된다.
기병대는 신분 제도를 타파하여 농민이나 상민들과 혼성으로 구성되었으나, 제복 소매 끝에 출신 성분을 표시하는 장식(袖印:수인)이 있었다. 이들은 조슈 번청에서 월급을 받는 정식 부대였으며, 대원들은 막사에서 기거하면서 '난학자(蘭学者:서양 문물 연구가)' 오무라 마스지로에게 배웠다. 군사 훈련은 낮 2시간의 휴식 시간을 포함해 새벽 5시부터 저녁 8시까지 13시간에 달했으며, 새벽이나 야간 중 2시간 일과 외 공부까지 해야 했다.[6] 그래서 후대의 역사가들은 기병대를 단순 민병대가 아닌 정규군으로 본다. 기병대는 총독 휘하 보병 부대, 포병 부대로 구성되었다.
다카스기 신사쿠는 막부 치하에서 타락하고 안주하는 사무라이들보다 새로운 세상을 꿈꾸는 기병대원들이야말로 진짜 전력이 될 것으로 믿었다. 이들은 서양식 병제와 전술을 깊이 있게 공부하고 신식 미니에 총, 스나이들 총으로 무장하여 각지에서 전공을 올렸다. 특히 이들의 미니에 총은 유효 사거리가 500미터에 달한 데 반해, 막부군의 주력인 아이즈 번사들의 게벨 총은 유효 사거리가 100여 미터에 불과했다.[7]
2. 1. 탈대소동(혹은 탈퇴소동)
1869년(메이지 2년) 7월 판적봉환으로 조슈번의 점유지인 이시미 지방(현재 시마네현 서부)과 부젠 지방(규슈 북동부, 현 후쿠오카현 동남부와 오이타현 북부)을 국가에 반환해야 했다. 메이지 정부의 바뀐 관제에 따라 다이묘에서 도지사가 된 모리 모토노리는 번의 규모를 줄이고자 11월 25일 번정 개혁을 단행했다. 기병대를 포함해 조슈 정규군 5천여 명 중 2250명은 일본 육군으로 흡수되었고, 남은 3천 명은 보상 없이 해산되었다.[8] 이러한 처사에 불만을 품은 나가시마 요시스케(長島義輔) 등 구 기병대 출신 일부는 후지야마 스케쿠마(藤山佐熊)[9]와 토미나가 유린(富永有隣) 등 타 부대 출신 해직자 1200여 명과 함께 11월 30일 탈대소동을 일으켰다.1870년(메이지 3년) 1월 13일, 이들은 오모리 현(현 시마네현) 하마다 지방법원을 습격하고, 1월 24일에는 야마구치 현청을 포위하는 등 현지 방위군을 잇달아 격파했다. 이후 주변 농민 1800여 명과 합세하여 규모를 불렸다. 당시 번벌의 한 축이었던 조슈 번 출신들의 발언권 저하를 우려한 기도 다카요시는 직접 진압군을 이끌고 나섰다. 조슈 번 상비군 3백 명, 일본군 제4대대 250명, 오사카 병학자 80여 명, 우베 시 원군 100여 명 등 총 800명으로 구성된 진압군은 2월 9일 요로이가사키(鎧ヶ垰) 고개를 넘어와 반란군과 교전했다. 미기타가타케(右田ヶ岳)의 천덕사(天徳寺)에는 당시 반란군이 농성하여 소실된 절터 흔적이 남아있다.[11]
이 소동으로 반란군 전사자 60명, 부상자 73명, 진압군 전사 20명, 부상자 64명이 발생했다. 평민 출신 반란군 1300명은 집으로 돌려보내고, 나머지 600명에게는 메이지 유신 공로를 인정하여 쌀을 지급했다. 그러나 주동자 나가시마 외 25명을 시작으로 5월 6일까지 총 221명이 처형되었다. 이 중 참수 84명, 할복 9명, 물고문으로 2명이 사망했고, 33명이 옥사, 41명이 유배지에서 사망했으며, 근신 처분을 받은 45명이 사망했다. 연루 혐의자 133명도 함께 처형되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처벌 총책임자는 기병대 창설자 다카스기 신사쿠의 아버지 다카스기 고츄타였다.
탈퇴소동 주모자 중 하나로 여겨진 다이라쿠 겐타로(大楽源太郎)는 3월 5일 법원 출두 명령을 받았다. 그는 소동에 직접 참여하지 않았으나, 오무라 마스지로 암살사건[12]으로 그의 동문들이 탈대소동에 가담하여 투옥되고 고문으로 사망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다이라쿠는 규슈 붕고 지방(현 오이타현)과 이요 지방(현 에히메현) 등지를 전전하며 가와카미 겐사이의 집 등에서 은신했다. 그는 정부군에 쫓기는 사람들을 모아 재기를 도모했다.
1871년(메이지 4년) 3월, 메이지 정부가 히로사와 사네오미(広沢真臣) 암살사건을 수사하던 중 니쿄우 사건(二卿事件)[13]이 발생하면서 다이라쿠의 은신처가 발각되었다. 그는 존왕파 동지들의 입김이 강한 구루메 번의 응변대(応変隊)에 의탁했으나, 정부군과 싸울 의사가 없었던 구루메 번사들에게 처단되었다. 그를 숨겨준 가와카미도 범인은닉죄로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처벌을 피한 기병대원 일부는 각지 농민 봉기에 가담하거나 메이지 시대 초기에 빈번했던 사무라이 반란(사족 반란)에 영향을 주었다. 일부는 '붕고수도(豊後水道)'(오이타현 동부 해로)의 무인도를 점거하고 해적으로 활동하기도 했다. 과거 호쿠에쓰 전쟁에서 막부군을 몰아넣었던 기병대는 뿔뿔이 흩어져 사라졌다. 기병대 출신으로 메이지 정부 참의였던 마에바라 잇세이는 반란 주동자 처형에 반대하며 기도 다카요시 등 번벌(藩閥) 강경파와 대립하다 사표를 내고 칩거했다. 이후 옛 존양파 동지들을 규합하여 하기의 난을 일으켰다.
3. 사이고 다카모리의 기병대
세이난 전쟁 때 다카세・다하루 전투에서 패한 사이고 군은 구마모토성 포위를 풀고 야베하마 거리(矢部浜町)까지 퇴각했다. 사이고 다카모리는 손실된 부대를 모아 군 재편성에 들어갔다. 이때 신편대대 지휘관 노무라 오시스케가 자기 부대를 기병대라 명명하고 분고국(현 오이타현)에 진출해 세이난 전쟁 중후반 동안 활약했다.[1]
사쓰마 반란 당시 사이고 다카모리의 부대 역시 자신들을 지칭하는 용어로 '기병대'(Kiheitai)를 사용했다.[2]
고세・다하라에서 패배하여 구마모토 성 포위를 풀고 야베하마 마을로 퇴각한 사이고 다카모리의 군대가 대대를 중대로 편성했을 때 만들어진 부대로, 대장은 노무라 오시스케, 총군감은 사토 산지, 오비의 오구라 도모히라, 사가의 난에서 살아남아 사이고 군에 합류한 이시이 다케노스케가 맡았다. 분고 국(오이타현)으로 진출하여 서남 전쟁의 중기・후기에 활약했다.[3]
4. 그 외
- 2010년 간 나오토(菅直人) 일본 총리는 자신의 내각을 기병대 내각(奇兵隊内閣)에 비유했다.[14][15]
- 기병대는 크리에이티브 어셈블리의 토탈 워: 쇼군 2 확장팩 사무라이의 몰락에서 조슈 번의 특별 유닛으로 등장한다. 다른 후반부 엘리트 보병 유닛보다 능력치는 낮지만, 모집 및 유지 비용과 시간이 적게 들고, 다른 엘리트 유닛과 달리 무제한으로 모집할 수 있다는 특징이 있다.
- 바람의 검심에서는 주인공 켄신이 타카스기 신사쿠에 의해 기병대에 입대하는 내용의 회상 장면이 여러 번 나온다.
- 은혼에서는 긴토키의 옛 친구이자 적으로 변한 타카스기 신스케가 이끄는 테러리스트 집단으로 등장하며, 타카스기 신사쿠를 모티브로 하고 있다.
참조
[1]
문서
[2]
서적
幕末・維新
[3]
서적
幕末・維新
[4]
뉴스
奇兵隊、紆余曲折の軍服転換
https://www.sankei.c[...]
産経新聞
2018-05-11
[5]
문서
[6]
서적
幕末・維新
[7]
서적
幕末・維新
[8]
문서
[9]
간판
가츠자카 포대 유적 현지 설명
[10]
문서
미기타가타케(右田ヶ岳): 시마네 현 서부에 있는 표고 426m의 산.
[11]
간판
소도종 만년산 천덕사 소개
[12]
문서
[13]
문서
[14]
문서
[15]
뉴스
간 내각(菅内閣) 발족, '기병대 내각(奇兵隊内閣)으로 명명'
http://www.nikkei.co[...]
니케이신문(日本經濟新聞)
2010-06-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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