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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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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김달삼은 본명이 이승진이며, 가명으로 김달삼, 이상길을 사용한 인물로, 일제강점기 일본에서 유학하고 해방 후 대구에서 10.1 대구 폭동에 관여했다. 이후 제주도로 돌아와 남로당 제주도당 조직부장, 4·3 사건 당시 유격대 사령관을 역임하며 사건을 주도했다. 1948년 8월 북한으로 월북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에 참여했으며, 한국 전쟁 중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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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달삼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김달삼 초상
김달삼 초상
본명이승진
로마자 표기 본명I Seungjin
인물 정보
출생1923년, 제주도
사망1950년 3월 20일, 정선군
국적한국
직업정치 운동가, 혁명 게릴라, 학교 교사
활동 기간1945년–1950년
주요 활동제주 4.3 사건 주도
한국 이름
한글 표기김달삼
로마자 표기Gim Dalsam
한국 이름 (본명)
한글 표기이승진
로마자 표기I Seungjin
기타 정보
관련 항목제주 4.3 사건

2. 생애

김달삼은 1923년 제주도에서 이승진이라는 본명으로 태어났다.[1] 남제주군 대정면 영락리 출신으로, 어릴 적 부모를 따라 대구로 이주하여 대구 심상소학교를 졸업했다. 중학교 진학 후 아버지를 따라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에서 거주하며 교토 성봉중학교를 졸업하고, 도쿄 주오 대학에 재학 중 학병으로 징집되었다. 복지산 육군예비사관학교를 수료하고 일본군 소위로 임관하였다. 1945년 1월, 대정면 안성리 출신인 남로당 중앙당 선전부장 강문석의 딸 강영애와 결혼했다.[4]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김달삼은 제주도의 중학교에서 마르크스-레닌주의를 가르쳤다. 그는 1940년대 후반 남조선로동당 조직자이자 책임자로 활동하며 정치적으로도 활발했다. 김달삼은 일제강점기 당시 일본과 협력한 한국인들을 공개적으로 비판했고, 제주도의 정부 경찰에 대항하여 북한과의 통일을 요구하는 시위를 자주 벌였다.[1]

해방 후, 이승진(김달삼)은 대구의 형 집에 임시 거주하면서 1946년 10월 1일 대구 10.1 사건에 깊이 개입했다. 폭동 초기 시체사건의 주모자로, 조선공산당 대구시당 서부지역 세포책임자로 활동하다 경찰의 체포를 피해 연말쯤 고향인 제주도 대정면 하모리로 돌아왔다.[4]

이승진은 남로당 제주도 대정면당 조직부장을 맡았고, 동시에 모슬포 대정중학 사회과 교사로 재직하면서 학생들에게 변증법, 유물론 등 이념 교육을 시켰다. 당시 경비대 9연대와 대정중학은 일본군 병영을 나눠 쓰고 있었는데, 이승진은 제9연대 문상길 중위와 자주 어울렸다. 1947년 3·1절 사건 이후 남로당 제주도당으로 진출하여 조직부 차장을 거쳐 조직부장이 되었고, 1948년 2월 25일 신설된 군사부장이 되어 유격대 사령관을 겸임하며 4.3 사건을 사실상 주도하였다.[4]

2. 1. 4.3 사건 주도

1948년 초, 소련이 유엔의 "남북한 동시 선거를 통한 통일정부 수립" 제안을 거부하면서 남한만의 단독 선거가 결정되었다. 이에 남로당은 우익 정부 수립 시 자신들의 존립이 위태로워질 것을 우려하여, 월북해 있던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의 지시에 따라 2.7 폭동을 일으켜 단독 선거를 저지하려 했으나 경찰에 의해 진압되었다.[5] 경찰이 압수한 문건에 따르면, 제주도당에도 2월 중순에서 3월 5일 사이에 폭동을 일으켜 인민공화국을 수립하라는 지령이 내려왔으나, 폭동 준비 회의에 참석했던 남로당원 220여 명이 체포되었다.[6]

경찰의 체포를 피한 남로당 제주도당 간부 19명은 2월 22일 신촌회의에서 격론 끝에 단독선거 저지와 남로당 조직 방어를 위해 경찰에 대한 반격(폭동)을 결정했는데, 이때 폭동을 가장 먼저 제의한 사람이 강경파의 선봉인 조직부장 김달삼이었다.[7][8]

폭동 결정 직후, 제주도당 조직 개편에서 강경파가 전면에 등장했고, 김달삼은 신설된 군사부장이 되었다. 군사부장은 유격대사령관을 겸하게 되어 사실상 4.3 사건을 주도하게 되었다.

제주도당은 4월 3일 새벽, 경비대를 동원하여 제주읍의 경찰력을 분쇄하고 유격대로 하여금 각 면의 경찰지서를 공격하며, 경찰 가족, 우익 인사, 선거관리 위원들을 살해하는 계획을 세웠다.[9] 4월 3일 새벽, 12개 지서가 남로당 유격대의 공격을 받았고, 경찰, 경찰 가족, 우익인사, 선관위원들이 살해되었다. 그러나 경비대가 동원되지 않아 제주읍은 평온했는데, 이는 중앙당의 지시가 없었다는 경비대 내 프락치(문상길)의 변명이 있었으나, 실제로는 당일 경비대에 탄약이 없었기 때문이었다.[10]

미군정은 경찰이 남로당의 폭동을 진압하지 못하자 경비대를 투입하기로 하고, 4월 20일에 부산의 제5연대에서 1개 대대(대대장 오일균 소령)를 제주도로 이동시켰다. 김달삼은 경비대 내 남로당 프락치인 문상길 중위와 양자회담을 했고, 4월 말까지 김익렬-김달삼-오일균 3자 회담과 김익렬-김달삼 양자 회담을 하였다. 4월 28일의 김익렬-김달삼 양자 회담에서 김달삼은 "단선단정 반대, 경찰 무장해제와 토벌대 철수, 반동테러단체 해산 및 철수, 피검자 석방 및 불법 검거, 투옥 학살 중지" 등을 요구했다.[11] 김익렬은 폭도들의 정당성과 경찰의 불법성에 대해 의견 일치를 보았고, 사건의 평화적 해결을 위해 노력하겠다는 약속을 했다.[12] 그러나 이 회담은 5월 6일 김익렬이 연대장직에서 해임되면서 무산되었다.

5월 6일, 제9연대장이 박진경 중령으로 교체되자, 5월 7일 남로당 중앙당 지도원이 제주도당에 도착했고, 5월 10일 남로당 대표 김달삼-김양근, 경비대 프락치 대표 오일균 소령, 이윤락 중위 등 4명이 대책회의를 열어 신임 9연대장 박진경 중령을 숙청하기로 결정했다. 이 결정으로 인해 박진경 연대장은 6월 18일 새벽 경비대 내 남로당 프락치 문상길 중위 일당에게 암살되었다.

김달삼은 제주도 당 군사위원회의 지도자로서 1948년 3월, 4.3 사건을 계획했다. 봉기가 시작되었을 때, 김달삼의 군대는 400명의 게릴라 전투원과 섬 전체에 걸쳐 있는 4,000명의 "자위대" 구성원을 포함했다.[1]

1948년 4월 28일, 김달삼은 제주도 경찰 사령관 김익렬과 만나 휴전을 협상했다. 김달삼의 요구 사항은 "모든 경찰의 항복, 모든 무기 몰수, 만행을 저지른 경찰과 우익의 처벌, 우익 청년 단체의 철수, 5·10 선거 취소 보장"을 포함했다.[1] 김익렬은 김달삼의 요구를 거부했고, 사흘 뒤 다시 교전이 시작되었다.[1][2]

1948년 8월, 봉기가 절정에 달했을 때 김달삼은 조선 공산당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 북한의 국경 도시인 해주로 갔다. 회의에서 김달삼은 제주도의 긍정적인 상황 전개에 대해 보고했고, 다른 참석자들은 "우레와 같은 박수"로 화답했다.[1][2] 같은 회의에서 조선 공산당과 소련 관리들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DPRK)을 수립하기 위한 선거를 치렀다.[1] 김달삼은 9월 초에서 중순 사이에 제주도로 돌아왔다.[1][2]

2. 2. 월북 이후 행적

1948년 초 북한은 사실상 정부 수립 상태였으나, 남한이 정부 수립을 위하여 5월 10일에 제헌의원을 선출하자 북한도 정부 수립 절차를 밟기 시작하였다. 남한의 국회의원 격인 인민회의 대의원 선출을 위하여 북한은 1948년 8월 21일~25일에 해주에서 남조선 인민 대표자 회의를 개최했다. 김달삼은 이 회의 참석을 위하여 1948년 8월 2일 배로 제주도를 출발하였다. 김달삼은 월북해서 주석단과 최고인민회의 대의원으로 선출되었다. 김달삼은 연설에서 4.3 사건에 관해 "경찰의 탄압에 대한 저항과 단독 선거에 대한 분노가 폭발해서 벌어진 자연 발생적인 총궐기"라고 주장하고는 "통일정부를 거론한 후 스탈린 대원수 만세!"를 외쳤다.[13]

김달삼은 월북시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를 손수 작성하여 남로당 지도자 박헌영에게 보고하였는데, 4.3의 목적에 대해서 ⓵ 조직수호 ⓶단선 단정 반대라고 기록하고는 해주 연설에서는 경찰의 탄압과 단선에 대한 민중항쟁론을 주장한 것이다.

해주 대회를 마친 김달삼은 제주도로 귀환하지 않고 북한에 머물면서 북한의 인민공화국 건설에 적극 참여했으며, 1949년 1월 8일에는 김일성으로부터 국기훈장 2급을 직접 수여받았고,[14] 대남 무장간첩 양성소인 강동정치학원을 수료하고 1949년 8월 4일 게릴라 대원 300명을 이끌고 38선을 침투하여 경북 일대에서 대한민국 전복을 위하여 치열한 유격전을 전개하였다.

김달삼은 제3병단 제1부관을 겸하다가 사령관 이호재가 전사하자 제3병단 사령관이 되었고,[15] 6.25 전쟁 중인 1950년 9월 30일 국군에 의해 사살되었다. 김달삼의 죽음에 관해서는 몇 차례 신문 보도가 있었는데, 그중 1950년 3월 22일 정선군의 반론산 사살설이 대대적으로 보도되었다. 그런데 북한에 있던 소련 대사관 근무자는 김달삼이 3월 22일 반론산에서 사살되었다고 대한민국 언론에 보도되고 있으나, 실은 김달삼이 3월 말에 평양에 들어왔고 4월 3일에 북한 남로당중앙위원회 보고서를 제출했다고 함으로써 반론산 사살설을 부인하였다.[16]

북한 당국은 평양 근교 신미리의 애국렬사릉에 김달삼의 가묘를 만들었는데, 묘비에는 "남조선 혁명가, 1926년 5월 10일 생, 1950년 9월 30일 전사"라고 쓰여 있다.[17]

3. 평가

(요약 및 참조할 원문 소스가 제공되지 않았으므로, 이전 결과와 동일하게 '김달삼' 문서의 '평가' 섹션에 대한 내용을 빈칸으로 남겨둡니다.)

4. 논란

김달삼의 사망 경위에 대해서는 논란이 있다. 자세한 내용은 하위 문서를 참고.

4. 1. 김달삼의 사망 경위 논란

대한민국 국군이 1949년 3월 제주 봉기를 진압한 후, 김달삼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 들어가기 위해 제주도를 떠나 한반도로 향했다. 1950년 3월 20일, 한국 전쟁이 본격적으로 발발하기 전, 김달삼의 시신은 정선군에서 발생한 게릴라 전투 이후 사망자들 가운데서 발견되었다.

참조

[1] 논문 The Cheju-do Rebellion 1980
[2] 서적 The Massacres at Mt. Halla - Sixty Years of Truth Seeking in South Korea Cornell University Press
[3] 간행물 제주4.3사건 자료집 12권 북한자료 제주 4.3 위원회
[4] 서적 제주 4.3사건 문과답 2021-05-31
[5] 보고서 주한미 육군 971 방첩대 격주간 보고서 1948-02-01
[6] 보고서 주한미 육군사령부 일일 정보보고서 1948-02-06
[7] 서적 한라산은 알고 있다, 제주도 인민유격대 투쟁보고서 1995-08-15
[8] 증언 이삼용(당시 남로당 제주도당 정치위원, 2002.7.11. 양조훈,김종민 채록) 증언
[9] 서적 한라산은 알고있다. 1995-08-15
[10] 서적 4.3은 말한다. 1995
[11] 논문 조선사회 운동사 사전(제주도4.3 투쟁) 1981-05-25
[12] 서적 한라산은 알고 있다 1995-08-15
[13] 간행물 제주4.3사건 자료집 12권(김달삼 연설문) 제주4.3위원회
[14] 간행물 제주4.3사건 자료집 12권, 북한자료 제주4.3위원회
[15] 보고서 주한 美 임시 대리대사 드림라이트 보고서 1950-05-15
[16] 간행물 제주4.3사건 자료집 12권(러시아 자료, 웨 끼셀료프, "남조선에서의 팔치산 운동에 대한 조사보고" 1950.4.26.) 제주4.3위원회
[17] 서적 제주4.3사건 문과답 2016-0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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