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천애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천애는 1918년 평안남도 강서군 출생으로, 무사시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전공했다. 일제강점기에는 친일 음악 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에서 활동하며,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를 불러 명성을 얻었으나, 이 곡에 대한 상반된 평가가 존재한다. 해방 후에는 경성음악학교 교수로 임용되었고, 이승만 대통령 탄생 경축식에서 노래를 불렀으며, 숙명여자대학교 교수 및 음악대학 학장을 역임했다.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사망했으며, 2008년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교회음악 관련 활동을 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일제강점기의 성악가 - 현제명
현제명은 일제강점기 및 대한민국의 음악가로, 서양음악계에 영향을 끼치고 대한민국 음악 발전에 기여했으나, 친일 행적으로 논란이 있으며, 대표작으로 〈고향생각〉, 오페라 〈춘향전〉 등이 있다. - 일제강점기의 성악가 - 윤심덕
윤심덕은 일제강점기 한국 최초의 소프라노 가수이자 배우로, 극작가 김우진과의 비극적인 동반 자살과 함께 발매된 '사의 찬미'로 유명하며, 그녀의 삶은 다양한 예술 작품의 소재가 되었다. - 대한민국의 소프라노 가수 - 채선엽
채선엽은 이화여고, 이화여전, 줄리어드 음악학교를 졸업하고 이화여대 음악학과 과장, 예술대학 학장, 재단 이사장을 역임한 대한민국의 음악가이자 교육자이며, 피아니스트와 소프라노로 활동하며 1966년 이화여대에서 명예 문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 대한민국의 소프라노 가수 - 홍혜경
홍혜경은 1957년 서울 출생으로, 미국 줄리아드 음악학교에서 유학하고 메트로폴리탄 콩쿠르에서 우승한 후, 메트로폴리탄 오페라에서 다양한 배역을 소화하며 활동한 한국 3대 소프라노 중 한 명이다. - 남포시 출신 - 노광철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의 군인이자 정치인인 노광철은 조선인민군 총참모부 부총참모장, 제2경제위원회 위원장 등을 역임하고 인민무력부장에 임명되었으며, 북미정상회담 당시 김정은을 수행하고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조선로동당 중앙위원회 위원, 국무위원회 위원 등을 지냈다. - 남포시 출신 - 백선엽
백선엽은 일제강점기 만주군에서 복무하고 한국 전쟁에 참전하여 육군 대장까지 오른 군인으로, 다부동 전투 등을 지휘했으며 5·16 군사정변 이후 외교관과 장관을 역임하다가 2020년에 사망했다.
김천애 - [인물]에 관한 문서 | |
---|---|
기본 정보 | |
이름 | 김천애 |
본명 | 김천애 |
출생 | 1919년 |
출생지 | 평안남도 강서 |
사망 | 1995년 3월 30일 |
직업 | 성악가 |
장르 | 서양 고전음악 |
2. 생애
1918년 평안남도 강서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가 감리교 목사였기 때문에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 1931년 평양 정의여자고등보통학교에 입학하여 1935년 졸업하였다. 1936년부터 1940년까지 일본 무사시노 음악학교에서 성악을 공부하였다. 이후 평안북도 선천군 보성여자학교 음악 교원으로 임용되었으나, 1941년 음악 연구를 위해 사직하였다.
2. 1. 일제 강점기 활동
1940년 평안북도선천군 보성여자학교 음악교원으로 임용되었으나, 1941년 9월 음악 연구를 계속하기 위해 보성여자학교를 사직했다.[1] 1941년 조선음악협회가 음악보국을 위한 음악회를 개최했을 때 이 음악회에 참가했다.[1] 1942년 김생려를 중심으로 친일 음악단체인 경성후생실내악단이 결성되자 여기에 가입하여 전쟁 지원을 위한 지방 순회공연에 참여했다.[1] 테너 이인범과 함께 경성후생실내악단의 성악 분야를 대표하는 인물이었으며, 홍난파 작곡의 〈봉선화〉를 불러 전국적인 명성을 얻었다.[1]"울밑에 선 봉선화야 네 모습이 처량하다"라는 가사로 시작되는 〈봉선화〉는 김천애와 뗄 수 없는 관계를 가지는데, 이 노래에 대해서는 두 가지 상반된 시각이 있다.[1] 일제강점기의 민족적 애환을 봉선화에 빗대어 표현해 국민적인 애창곡이 되었으며 일제에 의해 금지된 노래였다는 주장[1]과, 관제 음악회에서 군국가요와 함께 불렸던 이 노래가 항일 음악일 수 없다는 주장[2]이다.
1943년 현제명이 대화숙 안에 경성음악연구원을 설치했을 때 성악 분야 교수로 임용되었고,[1] 징병제도 실시 축하행사에서 〈애국의 꽃〉, 〈출정항로〉를 독창하였다.[1] 1944년에는 강원도의 생산현장을 방문해 위문공연을 펼쳤고,[1] 1945년 5월에는 군사상 보급과 육군 위문을 위해 중국 화복에 파견하는 후생악단 장행연주회에 출연하였다.[1]
2. 2. 해방 이후 활동과 논란
해방 후 1945년 2월 경성음악연구원이 경성음악학교로 개칭되면서 교수로 임용되었다.[1] 1950년 3월 이승만 대통령 제76회 탄생 경축식 행사에 참가해 <우리의 지도자>를 주제로 노래를 불렀다.[1] 다음해인 1951년 3월에도 이승만 대통령의 제77회 생일 기념식에서 축하 독창을 선보였다.[1] 숙명여자대학교 교수를 거쳐 1962년 12월 음악대학 학장을 취임했고, 1972년 미국으로 이민을 떠나 그곳에서 사망했다.[1]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음악 관련 활동을 평생 꾸준히 벌였다.[1]2008년 발표된 민족문제연구소의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음악 부문에 포함되었다.[1] 음악 분야에 수록된 인물 가운데는 대중가요 가수인 장세정과 피아니스트 김원복, 그리고 김천애가 여성이다.[1] 태평양 전쟁 종전 당시 나이가 20대 중반에 불과하여, 전체 친일인명사전 수록예정자 명단 중 가장 젊은 편에 속하기도 했다.[1]
2. 3. 신앙 활동
김천애는 독실한 개신교 신자로서 한국과 미국에서 교회음악 관련 활동을 평생 꾸준히 하였다. 김천애의 아버지는 감리교 목사였기에 어릴 때부터 서양음악을 접할 수 있었다.[1]참조
[1]
뉴스
“악기잡혀 독립선언문 인쇄 홍난파가 어찌 친일파인가” - 원로·중진 음악인 세미나서 ‘親日명단’ 개탄
http://www.chosun.co[...]
조선일보
2005-11-14
[2]
뉴스
가곡 ‘희망의 나라로’를 함부로 부르지 말아야 하는 이유 - 현제명과 홍난파
http://www.woorihim.[...]
우리힘
2004-11-05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