맨위로가기

김환기

"오늘의AI위키"는 AI 기술로 일관성 있고 체계적인 최신 지식을 제공하는 혁신 플랫폼입니다.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김환기는 한국 근현대 미술을 대표하는 서양화가로, 1913년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일본 유학 후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을 역임하며 한국 미술계에 기여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등지에서 개인전을 열었고,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한 후 미국 뉴욕으로 이주하여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 그의 작품은 초기 기하학적 추상에서 동양적 정서를 담은 반추상을 거쳐, 점묘 기법을 활용한 전면 추상으로 변화했다. 대표작으로는 <론도>,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으며, 2019년에는 작품 이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를 기록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신안군 출신 - 유옥우
    유옥우는 자유당에서 정계 입문 후 야당에서 활동하며 여러 차례 국회의원을 지냈고, 한일협정 반대 운동 중 옥고를 치렀으며 정치 테러를 당하기도 했으나, 국가보위입법회의 참여 경력으로 비판받기도 한 정치인이다.
  • 신안군 출신 - 이세돌
    대한민국의 프로 바둑 기사 이세돌은 12세에 입단하여 2000년대 세계 바둑계를 이끌었고, 알파고와의 대국으로 주목받았으며, 공격적인 기풍으로 '비금도 소년', '쎈돌' 등으로 불렸고, 은퇴 후에는 텍사스 홀덤 플레이어 및 보드게임 작가로 활동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화가 - 나혜석
    나혜석은 한국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신여성, 작가, 여성운동가로서, 여성의 자기 결정권과 자유로운 삶을 주장하며 사회적 논란을 일으켰으나, 진보적인 사상과 예술적 업적은 최근 재평가되고 있다.
  • 일제강점기의 화가 - 김영기 (화가)
    김영기는 해강 김규진의 아들이자 전통 한국화 기법에 현대적 감각을 더해 독자적인 화풍을 구축한 동양화가로, 조선미술전람회 입선 후 여러 대학교에서 교수를 역임하며 한국 추상화 발전에 기여했고, 서울시민상과 은관문화훈장을 수상했다.
김환기 - [인물]에 관한 문서
기본 정보
본명김환기
한자 표기金煥基
로마자 표기Kim Hwangi
다른 이름호(號)는 수화(樹話)
출생일1913년 4월 3일
출생지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사망일1974년 7월 25일
사망지미국 뉴욕 시티
국적대한민국
가족
배우자김향안 (1944년-), ? (?-?)
자녀김화영, 김영숙, 김금자, 김충인 (모두 첫 번째 부인과의 사이에서)
친척구본웅, 윤형근, T.O.P (종손)
학력
학력일본 니혼 대학 대학원 미술학
경력
직업화가, 교수
사조추상 미술
소속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
작품 활동
분야회화
대표작값찾기
수상값찾기

2. 생애

김환기는 김해 김씨(金海 金氏)이며 호는 수화(樹話)이고,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 출생이다.[29] 1936년 일본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신사실파전에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 활약하고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브라질로 갔고, 동 국제전의 명예상을 받았으며, 그곳 현대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 김향안(金鄕岸, 본명 변동림)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작품 활동 중 그곳에서 사망했다.

김환기의 작품은 한국 미술품 경매 최고가 기록을 여러 차례 경신했다. 2015년에는 1971년작 <19-Ⅶ-71#209>가 47.21억에 낙찰되어 박수근의 <빨래터>를 제치고 최고가 기록을 세웠고,[30] 2019년에는 1971년작 가 132.36억에 낙찰되어 한국 미술품 최초로 100억 원을 넘겼다.[31]

2. 1. 초기 생애 (1913년 ~ 1932년)

김해 김씨(金海 金氏)로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읍동리에서 태어났으며, 호는 수화(樹話)이다.[29] 부유한 농부이자 지역 지주였던 아버지 김상현의 4남매 중 늦둥이 외아들이었다.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 안좌면 기좌도 읍동리에서 유복하게 자랐으며, 초등학교 졸업 후 서울로 가서 누나와 함께 살면서 중동중학교에 다녔다. 그 후 가족의 지원으로 일본 도쿄에서 유학하며 금성중학교에 다녔고, 5년간의 유학 생활 동안 바이올린을 배웠다. 1932년 김환기가 귀국하자 그의 아버지는 학업을 계속하려는 김환기의 뜻에 반대하여 그를 결혼시키려 했다.[4]

2. 2. 일본 유학 시기 (1932년 ~ 1937년)

1933년, 김환기는 20세의 나이로 니혼 대학교 예술과에 입학하여 3년 과정을 시작했다.[7] 2학년이 되자 유럽에서 생활하며 입체주의, 미래주의, 초현실주의를 접한 일본 화가들이 이끌던 전위 서양화 연구소(アヴァンギャルド洋画研究所, アヴァンギャルド洋画研究所|아방가르도 요가 겐큐조일본어)에 합류했다. 그의 스승으로는 동향 세이지와 후지타 츠구하루 등이 있었다.[8]

무제


1935년 김환기는 권위 있는 이과회(二科会, 二科会|니카카이일본어, 이과전, )에 처음 출품한 작품인 '종달새 노래할 때'로 입상하며 화가로서의 데뷔를 알렸다.[9] 이 그림은 한복을 입은 여성을 묘사하고 있는데, 인체의 형태는 기하학적이고 단순화된 형태로 표현되었다. 머리 위의 바구니는 불가능한 각도로 내용물을 보여주는 "투명"하게 표현되어, 김환기의 관심이 현실주의를 넘어 추상으로 향하고 있음을 보여준다.[9] 평면 위에 한국적 모티프를 단순화된 형태로 담아내는 실험은 '집'(1936)과 '장독대'(1936)에서도 계속되었다. 나무 대문, 창호지 문, 돌담, 계단, 도자기 등 한국 전통 가옥에서 흔히 볼 수 있는 특징들이 그의 그림에 질서와 반복의 느낌을 더하며, 순수한 추상으로의 발전을 더욱 잘 보여준다.[8]

이 시기에 김환기는 백일회, 광풍회, 자유미술가협회, 구실회, 백만회 등 일본의 여러 미술 단체가 주최하는 활동에 참여했다.[7] 1936년에는 전위 서양화 연구소가 폐쇄된 후 김환기와 길진섭을 포함한 5명의 회원이 백만회를 설립했다.[10] 1937년 1월, 한국으로 돌아가기 몇 달 전 도쿄의 아마기 화랑에서 첫 개인전을 열었다. 도쿄를 떠난 후에도 김환기는 1941년까지 일본의 자유미술가협회에 작품을 출품했으며, '론도'(1938)도 그 중 하나였다. 이 그림은 한국 근대 미술에서 가장 초기의 추상 미술 작품 중 하나로, 2013년 대한민국 정부에 의해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지정되었다.[9]

1937년 한국으로 돌아가기 전까지 그는 조수로 일본에서 1년을 더 머물렀다. 도쿄에서의 시간은 김환기가 추상 미술가로서의 정체성을 다지는 데 기여했다. 대학 시절 그는 앙리 마티스파블로 피카소의 작품에 매료되었다.[11] '론도', '아리아', '흰 갈매기'와 같은 1937년과 1938년의 그의 작품들은 반복적이고 리듬감 있는 원형과 타원형의 순수한 기하학적 형태와 교차하거나 겹쳐지는 사각형으로 구성되어 추상으로의 뚜렷한 전환을 보여주는 것으로 평가된다.[12]

2. 3. 한국 활동 시기 (1938년 ~ 1956년)

1936년 일본 니혼 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개최하였다. 1940년 군사적 긴장이 고조되면서 창작미술협회로 이름이 바뀐 전시회에 참여하였고, 1941년 협회를 떠나기 전 '섬 이야기', '정물', '풍경 1', '풍경 2', '아타미의 풍경', '실내악' 등 6점을 출품했다.[12]

1944년, 첫 번째 부인과 이혼한 김환기는 시인 이상의 미망인이자 작가인 변동림(卞東琳, 1916–2004)과 재혼했다. 변동림은 결혼 당시 김환기의 아호인 향안을 따랐고, 김환기는 아호를 수화(樹話)로 변경했다.

1946년-1949년 사이에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하고 유영국, 이규상(李揆祥, 1918–1967) 등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신사실파전(新寫實派展)에 출품했다. 신사실주의는 새로운 유형의 사실주의 회화를 추구하고, 일본의 직접적인 영향과 냉전 시대 한국을 지배했던 좌우 이념 갈등에서 벗어난 "새로운 현실 형성"에 기여하고자 했다.[8] 구상과 비구상을 넘나드는 이 그룹은 이후 한국 추상 미술의 선구자이자 한국 현대 미술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예술가 그룹 중 하나로 평가받는다.[13] 참여 작가로는 장욱진, 백영수(白榮洙, 1922–2018), 이중섭 등이 있다.[13]

1949년 제2회 신사실파 전시회에 김환기는 '백자와 꽃' (1949)을 출품했다. 이 작품은 김환기 작품 중 도자기를 주요 모티프로 활용한 초기 사례 중 하나로 평가받았다.[8] 김환기는 일본에서 귀국한 이후 한국 고미술품과 도자기, 특히 조선 시대에 제작된 달항아리로 널리 알려진 백색 백자에 대한 안목을 길렀다.[7] 그는 한국 도자기를 전시하고 감상하는 것을 즐겼으며, 그림에도 동일한 물건들을 묘사했다. 김환기의 그림에서 한국 도자기는 전통과 현대성을 조화시키는 미학적 해결책으로 활용되었다.[14]

1942년과 1950년 사이 김환기의 작품은 자연과 일상생활에서 영감을 얻었다. 순수한 구성과 단순화된 대상에 대한 그의 열망은 '숲'과 같은 작품에서 분명하게 드러난다.[12]

한국 전쟁 중 대한민국 정부는 부산으로 이전했다. 김환기 또한 서울을 떠나 남쪽으로 피신하여 3년 동안 피난민 수용소에 머물렀다.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으로는 《피난열차》(1951), 《진해 풍경》, 《판자촌》, 《항아리와 여인들》(1951) 등이 있다.[12]

1951년작 유화 《피난열차》는 한국 전쟁의 혼란 속에서도 밝은 색조와 단순한 형태를 사용하여 희망을 잃지 않는 피난민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김환기는 1953년 서울로 돌아온 후, 항아리에 대한 그의 집착은 이전보다 더욱 커졌다. 그는 ''항아리와 시,'' ''백자 항아리와 여인,'' ''항아리'', 그리고 ''항아리와 매화'' 등에서 항아리를 거듭해서 그렸다. 서울로의 귀환은 또한 그가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가르치고, 미국 문화원 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대한민국예술원 회원이 되는 것을 가능하게 했다.[12]

1952년 홍익대 미술학부 교수, 1954년에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으로도 활약했다.

2. 4. 프랑스 파리 시기 (1956년 ~ 1959년)

김환기는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비롯하여 1957년 파리, 니스, 브뤼셀 등에서 개인전을 가졌다.[29] 김환기의 일기에는 그가 파리로 떠나는 것을 오랫동안 계획했다는 내용이 나타나 있다. 1954년부터 남관, 김흥수, 김종하를 비롯한 많은 한국 예술가들이 이 여정을 떠났다. 현대 미술의 중심지인 파리일본에서 서양 미술을 접하며 느꼈던 열등감을 치유할 수 있는 곳이었다.[12] 많은 예술가들과 그들의 작품이 해외 여행을 통해 크게 변화했지만, 김환기는 의도적으로 자신의 예술적 스타일을 유지하며 항아리, 새, 산, 사슴, 매화 등의 모티프를 계속해서 묘사했다.[12] 프랑스에서 김환기는 한국과 한국 미술의 독특한 특성을 더 잘 이해하고 감상하게 되었다.

김환기는 새로운 예술 기법을 배우고 이를 작품에 통합하기 위해 새로운 장소를 자주 방문했으며, 그의 경력 전반에 걸쳐 "동양과 서양 미학의 경계 없는 통합"이라는 보편성에 도달하는 것을 목표로 했다. 그는 자신의 작품이 한국적 가치를 버린 것이거나 "진정한" 서양 미술을 약하게 모방한 것으로 여겨지는 것에 지쳐 있었다. 파리로 여행하면서 그의 그림은 색상 팔레트가 주로 파란색으로 바뀌고 얼룩덜룩한 도자기 표면을 모방하는 등 격렬한 변화를 겪었다. 1950년대에 김환기는 푸른 달, 산, 매화와 같은 한국 풍경의 전통적인 모티프를 통합하기 시작했다. 김환기의 항아리(1958)는 평평하고 조각난 붓 터치에서 층을 쌓아 올리는 방식으로의 전환을 보여주었다. 이 작품의 질감은 분명히 두껍고 얼룩덜룩하며 전통적인 한국 도자기와 유사하다. 또한, 항아리는 주변에 참조할 객체가 없기 때문에 공간 감각이 없다. 달의 크기는 항아리만큼 커서 "줌인" 효과를 내고 작품의 추상성을 더한다. 이러한 한국적 모티프를 작품에 추가하면서 김환기는 끊임없는 여행 속에서 자신의 한국 정체성에 대해 더 잘 인식하게 되었다. 파리 방문은 김환기에게 변혁적인 경험이었으며, 그는 루오의 그림에서 스테인드 글라스 효과를 실험하여 분청 항아리의 3차원적인 본질과 질감을 2차원 캔버스에 재현할 수 있었다. 그는 조선 시대 항아리의 "한국성"과 추상 표현주의 운동의 요소를 결합할 수 있었다.

2. 5. 다시 한국으로 (1959년 ~ 1963년)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엠베지트 화랑을 위시하여 1957년 파리·니스·브뤼셀 등에서 계속 개인전을 가졌다.[29]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 교수, 초대 예술원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을 역임하였다.[29] 1960년에는 홍익미술대학 총장이 되었다.[12] 그는 예술에 집중하기보다는 가르치고 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시간이 더 많았다. 그는 이 시기에 다른 이사진과의 갈등, 그리고 현실과 그가 예술 기관에 대해 꿈꿨던 것 사이의 연결 부족으로 인해 종종 좌절감을 느꼈다.[12]

2. 6. 미국 뉴욕 시기 (1963년 ~ 1974년)

1963년 김환기는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한국 대표로 참가하여 회화 부문 특별상을 받았다.[7] 이 경험은 그에게 한국 미술의 "국제화"에 대한 열망을 심어주었다.[14]

1963년, 김환기는 현대 미술의 중심지로 떠오르던 뉴욕으로 이주했다.[18] 1964년에는 부인 김향안과 함께 맨해튼 어퍼 웨스트 사이드에 정착하여, 여러 한국 문화 관계자들과 백남준 등의 재미 한국인 예술가, 그리고 아돌프 고틀리브와 마크 로스코 같은 미국 예술가들의 지원을 받으며 작품 활동을 이어갔다.[16]

뉴욕에서 김환기는 신문지와 유화 등 새로운 재료를 실험하며, 종이 조형에 대한 관심을 키웠다. <대접>(1968)은 이러한 실험의 결과물로, 조선 시대 도자기의 표면을 모방한 듯한 "한국성"을 보존하려는 그의 노력을 보여준다. 뉴욕은 그에게 창작에만 집중할 수 있는 환경을 제공했지만, 그는 외국 기술을 접하고 탐구할 수 있는 자신의 특권적 위치를 인지하고 있었다.

김환기는 뉴욕에서 "전면 점화", 또는 "점화" 연작을 발전시켰다. 1970년경부터 그는 작은 점들로 캔버스 전체를 채우는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16] 초기 대표작인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는 김광섭의 시에서 제목을 따온 것으로, 추상과 기하학적 요소에 대한 그의 실험 정신과 동양 수묵화의 느낌을 동시에 보여준다.[8] 이 작품은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수상하며 한국 미술계에 큰 영향을 주었다.[19]

김환기는 점차 더 큰 캔버스에 "점화"를 제작하며, 특히 푸른색조를 다양하게 실험했다.[8] 1971년에는 <05-IV-71 #200(Universe)>(1971)에서처럼 점들을 원형이나 곡선 형태로 배열하는 새로운 구성을 시도했다. <우주>는 당시 뉴욕에서 좋은 평가를 받았으며,[20][21] 1974년 그가 사망할 때까지 매년 전시를 이어간 뉴욕 포인데스터 갤러리 개인전에 포함되었다.[22]

단색화는 1960년대 후반 회색, 갈색, 베이지색, 흰색 색조로 제작된 그림으로, 예술가의 몸과 마음이 그림 재료의 물리성을 탐구함으로써 융합된 것을 나타낸다. <우주>(1971)에서 김환기는 해안가에서 맥동하는 파도의 본질을 포착하는 점들로 구성된 반복적인 원형 행을 그렸다. 김환기는 작품의 시간성을 통해 다른 예술가들과 차별화된다. 그의 작품은 끊임없이 역동적이며 항상 움직임의 암묵적인 감각이 있다. 뉴욕은 이전의 새와 달과 같은 일반적인 모티프가 점과 선으로 점차 대체되었기 때문에 중요한 과도기였다.

뉴욕에서의 경력 동안 우주, 행성, 소리, 반향, 음악을 묘사한 작품이 등장했다.[12] 그는 콜라주, 파피에마셰 작품, 신문에 유채 그림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1970)와 <05-IV-71 #200(Universe)>(1971)와 같이 캔버스 전체를 점으로 덮는 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05-IV-71 #200(Universe)>(1971)는 13.03억달러 (8800만홍콩 달러)에 판매되어 가장 비싼 한국 미술 작품이 되었다.[23]

3. 작품 활동

김환기는 전후 국내외에서 14회의 개인전을 열었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32]

3. 1. 주요 작품 경향

김환기의 작품 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와 아취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渡美)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론도〉, 〈산〉, 〈산월(山月)〉, 〈야상곡(夜想曲)〉,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32] 이 중 〈론도〉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었다.[33][34]

3. 2. 대표작

김환기는 국내외에서 14회의 개인전을 가졌고, 1970년 한국일보사 주최 한국미술대상전에서 대상을 받았다. 작품 경향은 초기의 기하학적인 추상에서 출발하여 동양적인 관조와 아취를 근간으로 한 반추상의 세계를 보이다가 도미 후에는 완전히 추상화풍으로 전환하여 옵티컬한 양식의 새로운 사조를 받아들이고 있음을 보인다.

그의 대표 작품으로 론도, 산, 산월, 야상곡,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등이 있다.[32] 이 중 론도는 대한민국의 등록문화재 제535호로 등록되었다.[33][34]

4. 수상

1963년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여 명예상을 수상했고, 작품이 현지 현대미술관에 소장되었다.[26]

5. 가족 관계

관계이름출생사망
배우자김향안1916년2004년
장녀김영숙1933년
첫째 사위윤형근1928년2007년
차녀김금자1936년
삼녀김정인1938년
아들김화영1955년


6. 평가 및 영향

김환기는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로 평가받는다. 일제강점기부터 프랑스, 미국 등 해외에서 활동하며 한국 미술을 세계에 알리는 데 기여했다. 특히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서 명예상을 수상하고 작품이 현지 미술관에 소장되는 등 국제적인 인정을 받았다[26].

6. 1. 미술사적 의의

김환기는 일제강점기 전라남도 신안군에서 태어났다. 1936년 일본대학 미술학부를 졸업했다. 이후 길진섭 등과 백만회를 조직하고, 도쿄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46년부터 1949년까지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를 역임했으며, 신사실파전에 작품을 출품했다. 여러 차례 국전 심사위원을 역임했고, 1952년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교수, 1954년 예술원 회원이 되었다. 1956년 프랑스로 건너가 파리, 니스, 브뤼셀 등에서 개인전을 열었다. 1959년 귀국하여 홍익대학교 교수, 예술원 초대 회원, 한국미술협회 이사장 등을 역임했다. 1963년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에 대한민국 대표로 참가하여 브라질로 건너가 동 국제전 명예상을 수상하고, 현지 현대 미술관에 작품이 소장되었다. 1964년 이후, 부인 변동림과 함께 미국에 체류하며 활동 중 뉴욕에서 61세로 사망했다[26].

참조

[1] 서적 20th Century Korean Art Laurence King Publishing Ltd 1998
[2] 웹사이트 Kim Whan-ki http://www.christies[...] Christie's
[3] 서적 안녕하세요 예술가씨, Hello Mr.Ms. Artist. 2010
[4] 서적 Kim Hwan-gi, ŏdisŏ muŏt i toeŏ tasi mannarya [김환기, 어디서 무엇 이 되어 다시 만나랴] https://www.worldcat[...] Yurich'ang, Kyŏnggi-do P'aju-si 2013
[5] 웹사이트 멋진 의자 '득템'하면 행복 좋은 디자인엔 설렘이 있어 https://news.joins.c[...] JoongAng Sunday 2015-01-31
[6] 웹사이트 빅뱅 탑, '외할아버지의 외삼촌' 김환기 화백 '우주' 132억 낙찰에 "자랑스럽다" http://star.mt.co.kr[...] StarNews 2019-11-24
[7] 웹사이트 KIM Whanki 1913–1974 http://whankimuseum.[...] Whanki Museum
[8] 간행물 Chakp'umsegye [The Artist's Oeuvre] https://www.worldcat[...] Samsung Culture Foundation, Seoul 1997
[9] 간행물 Tokyo: At the Forefront of the Avant-Garde Movement Whanki Museum, Seoul 2017
[10] 웹사이트 백만회(白蠻會) http://encykorea.aks[...] Encyclopedia of Korean Culture
[11] 웹사이트 Kim Whanki — a pioneer of Korean abstraction https://www.christie[...] christies.com 2019-10-30
[12] 서적 Kim Whanki Youl Hwa Dang Publishing, Seoul 1998
[13] 웹사이트 Shinsashilp'a [New Realism Group] https://www.gokams.o[...] Han'gungmisul tagugŏ yongŏsajŏn [Korean Art Multilingual Dictionary]
[14] 간행물 Korean Modern Art and the Conflicts of Tradition and Modernity, c.1953 https://www.worldcat[...] Phaidon, London 2020
[15] 뉴스 왜 모두 달항아리에 푹 빠질까 http://www.segye.com[...] Segye Ilbo
[16] 간행물 KIM Whanki, Reach to the Zenith of Abstract Art https://www.worldcat[...] Whanki Museum, Seoul 2017
[17] 서적 A Poem With a Picture Chishik Company 1977
[18] 웹사이트 Kimhwan'giŭi Nyuyokshigi (1963–1974) [Kim Whanki's New York Period (1963–1974)] https://terms.naver.[...]
[19] 웹사이트 Han'gungmisultaesangjŏn [The Korean Art Grand Award Exhibition] https://www.gokams.o[...] Korean Art Multilingual Dictionary
[20] 웹사이트 An Enduring Friendship: The Legacy of Dr. Matthew Kim and Kim Whan-ki https://www.christie[...] 2019
[21] 웹사이트 Kim Whanki 김환기: Universe 05–IV–71 #200 https://www.galleryh[...] 2020
[22] 간행물 Civil Rights Movements for Minority Artists: A Note on the Archive of Korean-American Artists (AKAA)
[23] 웹사이트 Korean Wave in Saleroom: HK$102m Kim Whan-Ki's Diptych Becomes Most Expensive Korean Work of Art {{!}} Auctions News {{!}} THE VALUE {{!}} Art News https://en.thevalue.[...] 2020-06-16
[24] 웹사이트 ‘김환기 고향’ 신안 안좌도에 수상미술관 생긴다 https://m.khan.co.kr[...] 2020-11-22
[25] 웹사이트 金煥其(김환기) 미발표 油彩(유채)-과슈展(전) https://newslibrary.[...] 1977-09-02
[26] 웹사이트 김환기(金煥基) http://encykorea.aks[...] 2022-09-30
[27] 문서 https://news.v.daum.[...]
[28] 문서 김환기 대작 경매에…‘100억 원 시대’ 열리나 https://news.naver.c[...]
[29] 문서 김환기(金煥基) 한국민족문화대백과 https://terms.naver.[...]
[30] 뉴스 김환기 작품 47억에 낙찰…국내 최고가 갱신 http://news.sbs.co.k[...] SBS 뉴스 2015-10-07
[31] 뉴스 김환기 '우주', 한국미술사 새로 썼다…132억원 낙찰(종합) https://www.yna.co.k[...] 연합뉴스 2019-11-23
[32] 문서 두산백과 김환기 https://terms.naver.[...]
[33] 뉴스 김환기 ‘론도’ 등 근대회화 6건 http://news.kmib.co.[...] 국민일보 2012-12-18
[34] 뉴스 오지호 '남향집'·김환기 '론도'..그림 6점 문화재된다 http://www.asiae.co.[...] 아시아경제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