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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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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유영국은 일제강점기인 1916년에 태어나 2002년에 사망한 한국의 추상 화가이다. 그는 1930년대 일본에서 서양 미술을 접하며 추상 회화에 대한 열정을 키웠고, 해방 후에는 신사실파를 결성하여 한국 현대 미술 발전에 기여했다. 이후 '산의 화가'로 불리며 자신만의 화풍을 구축했으며, 말년까지 끊임없이 작품 활동을 펼쳤다. 그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하여 강렬한 에너지를 표현했으며, 특히 산을 주제로 한 기하학적 추상 회화로 유명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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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영국
기본 정보
유영국, 1979년경
이름유영국
출생1916년 4월 7일
출생지울진군, 강원도
사망2002년 11월 11일
국적대한민국
배우자김기순
웹사이트유영국 공식 웹사이트
활동 정보
직업예술가
스타일추상 미술
소속N.B.G. (네오 보 자르 그룹)
자유미술가협회
신사실파
모던아트협회
신상회

2. 생애

유영국은 1916년 일제강점기 울진에서 태어나 제2고등보통학교를 다니다가 일본으로 유학, 분카학원 유화과에서 미술을 공부했다.[5]

일제강점기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고, 일본인 교사들의 감시가 심했으며, 잘못하면 매를 맞았다.[5] 유영국은 동급생 감시를 거부하다 매를 맞고, 억압적인 학교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5]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1943년 울진으로 돌아온 유영국은 어업과 양조장 사업을 했다.[9] 1948년 김환기의 권유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교수가 되어[9] 서울로 왔으나, 한국 전쟁 발발 후 피난과 양조장 사업을 다시 하기도 했다.[9] 이후, 한국 현대 미술 발전에 중요한 역할을 했다.

2. 1. 초기 생애 (1916-1935)

유영국은 1916년 일제강점기 태백산맥 끝자락에 위치한 동해안 도시 울진에서 아버지 유문종(1876–1946)과 어머니 황동호(1880–1963) 사이의 8남매 중 셋째 아들(여섯째)로 태어났다.[5] 유문종은 울진의 토지 소유주였으며, 농업, 어업, 양조 사업을 했다.[5] 그는 대한제국 말기(1906)에 신돌석 장군에게 상당한 군량미를 제공했으며, 제동국민학교(1922)를 설립했다.[5]

유영국은 울진국민학교를 졸업한 후 열세 살에 서울 제2고등보통학교에서 공부하기 위해 집을 떠났다.[5] 유영국이 학교에서 가장 좋아했던 과목은 수학이었으며, 미술 수업에는 큰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5] 그러나 일본인 미술 교사 사토 쿠니오는 개방적이고 자유로운 성격으로 한국 학생들의 존경을 받았으며, 많은 학생들에게 예술가가 되도록 영향을 미쳤다.[5]

일제강점기 학교에서는 일본어만 사용하도록 강요받았고, 일본인 교사들의 감시가 심했으며, 잘못을 저지르면 자주 매를 맞았다.[5] 유영국은 동급생을 감시하라는 교사의 요구를 거부했다는 이유로 매를 맞았고, 학교의 억압적인 분위기에 환멸을 느껴 학교를 그만두고 일본 유학을 떠났다.[5] 그는 처음에는 화물선 선장이 되기 위해 요코하마 상선학교에 입학하려 했으나, 고등학교 졸업장이 필요했기 때문에 자유로운 분위기의 미술학교인 도쿄 분카학원 유화과에 입학했다.[5]

2. 2. 도쿄 유학 시기 (1935-1943)

1930년대 후반 도쿄 시절의 유영국


유영국은 분카 가쿠인(Bunka Gakuin)에서 처음 서양 미술을 접했으며, 학교의 미술 서적을 통해 레오나르도 다 빈치, 렘브란트 등 거장들의 작품을 접하게 되었다. 작품의 정교함에 감탄한 유영국은 전통적인 분야에서 더 이상 자신이 할 것이 없다고 생각했고, 처음부터 완전히 다른 추상 회화를 추구하기로 결심했다. 당시 분카 가쿠인에는 추상 회화를 전공하는 교수가 없었다.

1920년대에 이미 일본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이 시작되었고, 유영국이 도쿄에 도착했을 때(1935년) 러시아미래주의구성주의가 일본 미술계에 널리 퍼져 있었다. 파리에 다녀온 하세가와 사부로와 무라이 마사나리가 일본 아방가르드 운동을 이끌었으며, 자유미술가협회(AFA)의 조직자이기도 했다. 무라이 마사나리는 분카 가쿠인에서 유영국보다 10년 선배였으며, 그의 가까운 동료가 되었다. 유영국은 대학 선배이자 동료 예술가인 무라이 마사나리에 대해 평생 존경심을 가졌다.

작품 R3, 1938 (1979년 유영국 딸 유리지에 의해 복원), 혼합 매체, 65x70cm


작품, 1940, 캔버스에 유채, 45x37.7cm


유영국은 1937년 독립미술가협회(獨立美術家協會) 제7회 전시회에서 작가로 데뷔했고, AFA가 주최한 자유전(自由展)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유영국은 제2회 전시회(1938년)에서 협회상을 수상하고 회원이 되었다. 일본 아방가르드 운동의 주류에 적극적으로 참여한 경험은 유영국에게 한국에서의 미래 활동을 위한 견고한 기반을 제공했다. 불행하게도, 유영국의 도쿄 시대 작품들은 일부 부조 작품을 제외하고 한국 전쟁 중에 모두 소실되었다. 1979년 제8회 개인전을 위해 유영국은 딸이자 금속공예가인 유리지의 도움을 받아 남아있는 엽서에서 부조 작품을 재현했다.[6] 그 원본들은 피에트 몬드리안과 장 아르프가 파리에서 Abstraction-Création 그룹의 지도자였던 시기보다 늦지 않은 1930년대 후반에 제작되었으며, 유영국이 프랑스 아방가르드 운동에 대해 예민하게 인식하고 가장 최첨단 트렌드에 합류하려 했음을 보여준다.[7]

제2차 세계 대전 중 일본에서 예술가들은 기록화 전쟁 그림을 그려야 했고, 유영국의 가까운 동료인 하세가와 사부로는 이 정책에 따르기를 꺼려 사진 작업을 선택했다. 유영국은 1940년 도쿄 동양사진학교의 사진 강좌를 수료했으며, 주로 신라의 옛 수도인 경주의 역사적 유적을 묘사한 사진 작품을 제6회 미술창작가협회(구 AFA) 전시에 출품했다. 사진은 유영국의 평생 취미였다. 유영국은 후에 전시 중에 사진가들이 예술가보다 직업을 구할 기회가 더 많다고 생각해서 사진을 배웠다고 언급했다.[8]

2. 3. 공백기 (1943-1955)

태평양 전쟁이 격화되면서 유영국은 더 이상 도쿄에 머무르기 어려워 1943년 울진으로 돌아왔다. 마땅한 직업이 없었고 아버지에게 의존하고 싶지 않았던 유영국은 아버지 소유의 어선을 이용하여 울진 근처의 어항인 죽변에서 5년 동안 어업에 종사했다.[9] 그는 정보를 수집하고 적절한 어장을 찾는 데 매우 능숙했고, 그의 배는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은 어획량을 올리곤 했다. 바다에서 일하며 거친 자연을 가까이에서 관찰한 경험은 그의 예술 정신에 영향을 미쳤고, 일출과 일몰의 풍경, 햇빛과 바다의 상호 작용, 바다에서 보이는 산들은 평생 그의 작품에서 즐겨 사용되는 모티프가 되었다.[9]

도쿄 시절부터 유영국의 가까운 동료이자 당시 서울대학교 미술대학 조교수였던 김환기가 유영국에게 전임 강사로 서울대학교에 합류할 것을 요청하자(1948년), 그는 서울로 올라왔다.[9] 그 해 유영국은 김환기, 이규상과 함께 신사실파를 결성하고 서울에서 제1회 전시회를 열었다.[9] 비록 소규모였지만, 모든 구성원은 일본에서 아방가르드 운동에 경험이 있었고, 순수한 형태의 개념을 바탕으로 한 순수 미술에 대한 그들의 선언은, 한국에서 처음으로, 한국의 현대 미술 운동에 지속적인 영향을 미쳤다.[10]

북한군이 서울을 점령한 3개월 동안(1950년 6월 28일~9월 28일)과 서울 수복 후 수개월 동안 유영국과 그의 가족은 극심한 고통을 겪어야 했다.[9] 1951년 1월, 서울의 두 번째 점령을 앞두고 울진으로 피난했지만 경제 상황은 나아지지 않았다. 생활 전선에 놓인 유영국은 수년 동안 방치되어 운영되지 않던 아버지의 죽변 양조장을 인수했다. 수리를 마친 후 그는 술 생산을 재개하고 노동자이자 기업가로 일했다. 운 좋게도 북한에서 온 많은 피난민들이 그 지역으로 몰려들면서 술에 대한 수요가 급증했고, 유영국은 억척스러운 노력과 사업 수완으로 몇 년 안에 그 마을에서 가장 부유한 사람이 되었다. 사업은 잘 되었지만 유영국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위해 사업을 그만두고 서울로 올라갔다.[9] 유영국은 경력을 재개하기로 결심했을 때 39세였고 12년 동안 그림을 그리지 않았다. 그는 나중에 그 기간을 "잃어버린 10년"이라고 한탄했다. 그러나 그가 다른 사람에게 관리를 맡긴 양조장 사업에서 계속적인 수입은 추상화가 돈을 벌지 못했던 다음 20년 동안 유영국을 지원했고, 그가 전적으로 그림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9]

2. 4. 추상미술 정진 (1955-1999)

유영국은 한국 전쟁 이후 한국 현대 미술을 정립하고 발전시키는데 중요한 역할을 했다. 그는 여러 그룹 전시회에 참여하며 한국 현대 미술의 선구자로 인정받았으며, '산의 화가'라는 별명을 얻었다.[11]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현대미술가협회를 설립하고,[12]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미술전'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3] 또한, 국전(國展) 개혁을 옹호하고, 신상회(新象會)를 창립하여 젊은 예술가 발굴에 힘썼다.[14][15]

유영국(오른쪽)은 조선일보가 주최한 제4회 ''현대미술전''(1960)의 주요 조직자였다. 방일영(왼쪽) 회장과 개막식에서


이 시기 유영국의 작품은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구성, 두껍고 강한 윤곽선, 강렬한 원색을 특징으로 한다.[16] 형태는 추상적이지만, 울진과 죽변의 풍경에서 영감을 받은 산이 주요 모티프로 등장했다. 유영국은 산을 소재로 하면 오랫동안 작업할 수 있고 쉽게 싫증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Work, 1958, oil on canvas, 102x102cm


1963년 브라질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유영국에게 전환점이 되었다. 김환기는 유영국에게 미국의 현대 미술에 대한 소식을 전해주었고, 이는 유영국에게 큰 자극이 되었다. 유영국은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모든 그룹 활동에서 물러나 개인전에 집중하기 시작했다.

작품, 1967, 캔버스에 유채, 130x130cm


유영국은 하루 9~10시간, 주 6일 동안 작업하는 엄격한 자기 관리를 통해 자신만의 화풍을 완성했다. 1964년 첫 개인전은 유영국을 한국 대표 추상 화가로 자리매김하게 했으며, '색채의 마술사'라는 명성을 안겨주었다.[11] 홍익대학교 미술대학 학장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작품 활동에 전념하기 위해 사임했다.

1970년대 중반까지 유영국은 5주에 한 번씩 죽변을 방문하여 양조 회사를 감독하고, 강원도의 산과 동해안을 여행하며 예술적 영감을 얻었다. 1979년 덕수궁 미술관에서 열린 8회 개인전은 그의 경력의 정점이었다. 이후 잦은 질병으로 힘든 시기를 보냈지만, 죽기 3년 전까지 작품 활동을 계속하며 특유의 서정성을 작품에 담아냈다.

3. 작품 세계

유영국은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해 강한 에너지를 표현했다.[32]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 경향은 후기로 갈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였는데, 주로 산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켰다. 주요 작품으로 〈산〉 등이 있다.

3. 1. 초기 (1955-1963)

그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해 강한 에너지를 표현했다.[32]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경향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이는데, 주로 산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킨다. 주요 작품으로 〈산〉 등이 있다.

유영국이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한국은 전쟁 이후 2년 만에 세계에서 가장 고립된 국가 중 하나였으며, 세계 미술의 흐름에 대한 정보나 그림을 그리는 데 필요한 기본적인 재료조차 구할 수 없었다. 일본에서 수입된 미술 잡지를 통해 외부 미술 흐름에 대한 정보가 한국에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에 들어서였다.

유영국은 서울에서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를 설립하여[12] 한국의 단체전 시대를 열었다(1956). 그는 또한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미술전'' (1958–61)[13]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

1950년대 후반부터 1960년대까지 한국 미술계의 가장 큰 논쟁은 정부가 주관하는 연례 행사였던 국전(國展), 즉 대한민국미술전람회의 개혁이었다. 국전은 유능한 예술가를 선발하는 관문이었지만, 선발 과정의 연고주의와 관리의 후진성으로 인해 자주 비판을 받았다. 유영국은 국전 개혁을 옹호했고, 1960년 현대미술가협회[14]의 대표로 참여했다. 더 나아가 그는 공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려는 목표를 가지고 신상회(新象會)를 창립했다(1962).[15]

이 시기에 제작된 작품들은 몇 가지 특징을 보였다. 복잡하면서도 다양한 차원의 구성, 견고하지만 기하학적인 형태를 만드는 두껍고 강한 윤곽선, 두껍고 거친 질감을 전달하는 강렬한 원색이 그것이다.[16] 형태는 추상적이지만, 그의 작품에서 울진죽변의 풍경을 엿볼 수 있었다. 이때부터 산은 그의 작품의 지속적인 모티프가 되었으며, 유영국은 산을 소재로 하면 변화를 자주 줄 필요 없이 오랫동안 작업을 할 수 있고, 쉽게 싫증이 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3. 2. 중기 (1964-1983)

그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해 강한 에너지를 표현했다.[32]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경향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였는데, 주로 산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켰다. 주요 작품으로 〈산〉 등이 있다.

1963년 브라질에서 열린 제7회 상파울루 비엔날레는 유영국 경력의 전환점이 되었다.

유영국은 예술가는 시대의 흐름을 면밀히 관찰하고, 그 흐름이 어디로 향하는지 분석하며, 자신의 경력이 정점에 도달하는 날을 준비해야 한다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다.[18] 주류에서 사실상 고립된 유영국은 자기 연구와 자기 성찰에 의존하여 자신만의 길을 찾아야 했다.

그러한 관점에서 산은 아름답고, 끊임없이 변화하며, 내용이 고갈되지 않기 때문에 회화의 좋은 모티브였다. 더욱이 산은 거의 모든 사람들에게, 어디에서나 보편적으로 사랑받는다. 유영국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 모티브를 관찰하고 분석하면서, 마치 연구자가 실험을 수행하듯이 다양한 회화 양식을 탐구하며 추상 회화에 대한 연구를 수행했다.

유영국은 대부분의 시간과 에너지를 단체 활동과 한국 미술의 전반적인 방향을 이끄는 역할에 헌신했기 때문에, 동료들보다 훨씬 늦은 49세가 되어서야 개인전을 열었다. 모든 그룹 전시회 및 기타 활동에서 물러나 개인전에만 집중했다.

잃어버린 10년을 보상하려는 사람처럼, 유영국은 거의 반항적으로, 하루 9~10시간, 주 6일 동안 작업했으며, 서 있는 자세에서의 과도한 작업으로 인한 고관절 손상과 건강 악화로 인해 그렇게 할 수 없게 되고, 1980년대에는 사실상 휠체어에 앉아 작업하게 될 때까지 20년 동안 이 작업 습관을 유지했다.

1960년대홍익대학교 미술대학 유화과 학과장을 역임했지만, 더 많은 시간을 작품에 쏟기 위해 대학을 사임했다. 그는 방해받지 않기 위해 심지어 집을 방문하는 사람들을 거절했다. 이후 20년 동안 거의 2년에 한 번씩 11번의 개인전이 열렸는데, 이는 유영국의 경력에서 가장 힘든 시기였으며, 유영국 특유의 화풍이 창조된 시기이기도 하다.

1964년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0x194cm


1964년 첫 개인전은 미학적 우수성과 주제의 진정성으로 널리 칭찬을 받으며 기념비적인 성공을 거두었다. 전시회에 출품된 그림들의 주요 특징은 색상의 선명한 대비와 구성의 밀도였다. 이전 시대의 두껍고 강한 선은 사라지고, 생생한 색채가 캔버스를 채웠다. 지구 지각의 분출을 연상시키는 날카로운 붓 터치는 캔버스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평론가이자 예술가인 김병기는 "용암이 상자에서 폭발하듯 그림에서 터져 나오는 에너지는 보는 이들에게 설명할 수 없는 감정을 전달한다."라고 썼다. 평론가 이일은 “그림 속 색상의 균형과 조화는 유영국의 색채 연출이 최고의 경지에 이르렀음을 보여준다.”라고 평했다. 또 다른 평론가 김영주는 유영국의 작품이 시대의 본질을 담고 있다고 언급했다. 엄격한 구성을 통해 자연을 묘사했던 이전 작품들과 비교해 볼 때, 이 시기의 작품들은 유영국이 이전 시대에 탐구했던 규칙에서 벗어나 역동적인 운동 감각으로 긴장감을 전달한다.

1964년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6x194cm


1971년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6x136cm


유영국은 50대부터 기하학적 형태와 삼원색을 탐구하기 시작했다. 이전 시대의 두껍고 거친 질감의 물감은 사라지고, 캔버스에는 전체적으로 차분함과 안정감이 더해졌다.[23] 원색과 보색을 사용하여 시각적 자극을 높였으며, 공간을 대각선, 수직, 수평으로 교차하는 선들은 단순화된 형태로 추출된 자연 사물의 본질적인 조형 요소가 반복적으로 중첩되어 깊이와 원근감을 부여하는 캔버스에 역동성을 부여했다. 햇빛의 음영과 직선으로 그려진 공간 구성 또는 원색 영역 내부에 음화(negative exposition)로 나타나는 주요 형태는 이 시기 유영국 작품의 전형적인 특징이었다.

1973년 작품, 캔버스에 유채, 132x132cm

3. 3. 후기 (1978-1999)

그는 점, 선, 면, 형, 색 등 기본적인 조형 요소를 활용해 강한 에너지를 표현했다.[32] 차가운 기하학적인 추상회화로 일관해온 그의 작품경향은 후기로 접어들수록 더욱 단순화되고 견고한 구축성을 보이는데, 주로 산을 테마로 하여 암록색조(暗綠色調)의 바탕에 섬광처럼 번득이는 황색의 빛으로 미묘한 긴장감을 일으키는 특유한 화면을 전개시킨다. 주요 작품으로 유영국의 〈산〉 등이 있다.

1977년, 유영국은 30년 동안 살았던 약수동 집을 팔고 서울 외곽의 등촌동으로 이사했다. 새로 지은 집[24]은 매우 조용했고, 뒤편에는 작은 언덕이 있고 나무가 많아 작업실 창문으로 뒷마당에서 휴식을 취하는 꿩을 볼 수 있었다. 이 시기의 작품들은 긴장감이나 엄격함보다는 친밀함과 편안함을 제공하는 부드러운 선과 더 부드러운 색상으로 그려졌다. 나무는 종종 'Y'자 모양으로 묘사되었고 산은 더 부드럽고 둥근 각도를 가졌다.[25]
왼쪽


Work, 1988, oil on canvas, 130x194cm


유영국 화백은 말년에 여러 질병으로 수개월 동안 입원하는 일이 잦았다. 심근 경색(1976), 대퇴골 골절(1979), 심장 수술(1983), 고관절 수술(1984), 여러 차례의 뇌졸중 등이 있었다. 건강이 악화되어 활동이 심하게 제한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영국은 마지막까지 정신이 맑았다. 거의 반항적으로 유영국은 휴식을 거부하며 인터뷰에서 "이제 늙어가니 계속하려면 더 많은 열정과 자극이 필요하다. 내 그림을 쳐다보면 긴장감이 느껴지고, 이것이 나를 열정과 열의로 채운다. 나는 이런 종류의 열정으로 나 자신을 훈련시키고 그림을 그릴 것이다.[26]" 라고 말했다. 70대에 제작된 작품들은 순수한 색채와 형태를 사용하여 부드러움과 편안함을 전달한다. 하늘, 산, 해, 나무를 묘사하는 원, 삼각형, 사각형과 같은 기본 패턴은 기쁨과 즐거움을 선사한다. 반면, 80대에 제작된 작품들은 평화와 평온 속에서 자신의 궁극적인 운명에 직면한 한 인간의 엄숙한 순간을 반영한다.
Work, 1999, oil on canvas, 105x105cm


1990년 ''월간 미술'' 잡지(10월호)에서 20명의 미술 평론가를 대상으로 한 유망 작가 설문 조사에서 유영국의 예술성은 서양화가 61명, 한국화가 42명, 조각가 33명을 포함한 136명의 한국 유망 미술가 중 가장 뛰어난 것으로 평가되었다.

4. 주요 단체 활동



유영국은 서울에서 동료 예술가들과 함께 현대미술가협회(MAA)를 설립하여[12] 한국의 단체전 시대를 열었고(1956), 조선일보가 주최한 '현대미술전' (1958–61)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했다.[13]

1960년 현대미술가협회[14] 대표로 국전 개혁을 옹호했으며, 공정한 선발 과정을 통해 젊은 예술가를 발굴하고 육성하려는 목표로 신상회(新象會)를 창립했다(1962).[15]

5. 수상 및 추모

수상 연도수상 내역
1938년제2회 자유미술가협회전 최고상
1976년대한민국 예술원상 미술본상
1982년대한민국 문화예술상



유영국은 2002년 11월 11일에 사망했으며, 그의 묘비명에는 "산은 내 앞에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27]

2002년 사망 당시 추상 회화에 대한 그의 헌신과 청교도적인 직업 윤리는 널리 칭송받았으며[28], 장례식에는 3천 명이 조문했다. 사후, 국립현대미술관은 2016년 서울 덕수궁에서 이중섭과 바를렌 펜에 이어 세 번째로, 그의 탄생 100주년 기념 전시회 《절대와 자유》를 개최했다.[29] 2022년 국제갤러리에서 열린 《유영국의 색채》 전시회에는 6만 명이 방문하여 대중의 큰 관심을 받았다.

6. 유산

유영국은 추상 회화, 나아가 현대 미술의 진정한 선구자로서, 현대사의 가장 어려운 시기에 뛰어난 아름다움을 지닌 독창적인 예술 세계를 창조하는 길고 고독한 여정을 묵묵히 걸어갔다.

생전에 추상 회화가 수입원이 되리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유영국은 국내 미술 시장의 요구에 무관심했다. 그는 "예순 살까지 그림을 공부하고, 그 이후에는 마음대로 그림을 그리겠다"고 말하곤 했다. 실제로 그의 그림은 한국 경제가 번성하기 시작한 예순 살에 처음으로 판매되었다. 이병철 삼성 창업주가 최초의 구매자였다.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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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웹사이트 Murai Masanari http://www.muraimasa[...]
[3] 웹사이트 Hasegawa Saburo http://www.artnet.co[...]
[4] 간행물 The Artistic Merit and Price of Artworks: An Analysis of 20 Art Critics’ Responses 199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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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 서적 Yoo Youngkuk, the Pioneer of Korean Abstract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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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간행물 Neo Realism Group - The First Pure Painterly Artist Group 2008
[11] 서적 Yoo Youngkuk, the Pioneer of Korean Abstract Art - His Life an Prospect Maronie Books 2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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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6] 서적 Yoo Youngkuk Solo Exhibition Catalogue Hoam Art Gallery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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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 간행물 Abstract Shape and Color Filed Composition: the Art World of Yoo Youngkuk 2012
[20] 간행물 Abstract Shape and Color Filed Composition: the Art World of Yoo Youngku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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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2] 간행물 Abstract Shape and Color Filed Composition: the Art World of Yoo Youngkuk
[23] 서적 Yoo Youngkuk Solo Exhibition Catalogue 19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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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 서적 Yoo Youngkuk Solo Exhibition Catalogue
[26] 뉴스 Absracting Landscape: The Formativeness in Yoo Youngkuk's work 2003-12-01
[27] 서적 Abstract Shape and Color Field Composition 2012
[28] 뉴스 In Memory of the Late Yoo Youngkuk: An Uncompromising Artistic Spirit https://www.donga.co[...] 2002-11-12
[29] 웹사이트 100th Anniversary of Korean Modern Master: YOO YOUNGKUK (1916-2002) https://www.mmca.go.[...]
[30] 웹사이트 서양화가 유영국 http://people.search[...]
[31] 웹사이트 유영국 https://terms.naver.[...]
[32] 웹사이트 강렬한 원색이 주는 에너지…유영국 'Work' https://www.hankyung[...] 한국경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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