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림불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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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나림불루는 여허부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16세기 후반에서 17세기 초반까지 활동한 인물이다. 아버지와 백부가 명나라 군대에 의해 사망한 후 사촌 부자이와 함께 여허부를 이끌었다. 그는 몽골 및 하다부와의 연합을 통해 세력을 확장하려 했으며, 명나라와도 외교 관계를 맺었다. 1593년에는 구러산 전투에서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와 대립했으나 패배하였다. 1609년에 병으로 사망했으며, 동생 긴타이시가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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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림불루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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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본 정보 | |
![]() | |
만주어 | ᠨᠠᡵᡳᠮᠪᡠᠯᡠ |
로마자 표기 | Narimbulu |
인용 | |
출처 | 《만주실록》, 권2 |
2. 초기 생애 및 여허부 계승
나림불루는 여허부의 유력 가문 출신으로, 그의 가계는 여허부의 시조 싱건다르한(星懇達爾漢중국어)까지 거슬러 올라간다. 1584년(만력 12년), 아버지 양기누와 백부 칭기야누가 명나라 장수 이성량에게 살해되자,[1] 사촌 부자이와 함께 여허부를 이끌게 되었다.[1] 이들은 남은 부락민들을 모아 하다에 복수할 계획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 이아등(以兒鄧)과 연합하여 위원보(威遠堡)를 공격하고, 황홀태(恍惚太)와 연합하여 하다부 다이샨을 공격하였다. 마침 하다 내부에서 수장 자리를 둘러싼 내란이 일어나자,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이 기회를 틈타 하다를 침략하여 왕타이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사로잡았다. 또한 나림불루는 명에게 더 많은 칙서(勅書)를 요구하기도 했다.
1588년(만력 16년) 음2월, 요동순무(遼東巡撫) 고양겸은 이성량에게 명군을 이끌고 여허를 정벌하게 하였다. 명군이 접근하자 부자이는 서성(西城)을 버리고 나림불루에게 투항하려다가 명군과 교전하였고, 여허 군대는 동성(東城)으로 후퇴하였다. 여허성은 견고하여 명군은 이틀 동안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성량은 거포(巨砲)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 빈틈을 공략하였다. 명군은 수레에 운제(雲梯)를 설치하고 거포를 운제 위에 두어 여허 내성(內城)과 높이를 맞췄다. 이에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항복을 요청하며, 칙서를 독점하지 않고 하다부와 나누며 명에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량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명 조정은 이성량에게 칙서 499도(道)를 주었다. 같은 해 음9월, 나림불루는 누이 몽고저저를 건주여진의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다.
2. 1. 가계
- 시조: 싱건다르한(星懇達爾漢중국어)
- 증조부: 추쿵거(祝孔革중국어)
- 조부: 타이추(太杵중국어)
- 백부: 칭기야누(淸佳砮중국어)
- 사촌: 부자이(布寨중국어)
- 부친: 양기누(楊吉砮중국어)
- 형제: 긴타이시(金台石중국어), 사이비투(Saibitu)[2], 아산(Asan)[3] 등
- 여동생: 몽고저저(孟古哲哲중국어) - 훗날 누르하치의 비 효자고황후(孝慈高皇后중국어)
2. 2. 여허부 계승
1584년, 나림불루의 아버지 양기누와 백부 칭기야누가 명나라 장수 이성량에게 살해되었다.[1] 이후 나림불루는 사촌 부자이와 함께 여허부를 이끌었다.[1]3. 명나라와의 관계 및 부족 간 항쟁
만력(萬曆) 12년(1584), 여허버일러 칭기야누(Cinggiyanu, 淸佳砮)와 양기누가 이성량(李成梁)에게 살해된 후, 두 사람의 아들 부자이(Bujai, 布寨)와 나림불루가 각각 즉위하였다. 이들은 잔여 부락을 모으고 하다(哈達)에게 보복할 계책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 이아등(以兒鄧)과 연합하여 위원보(威遠堡)를 공격하였고, 황홀태(恍惚太)와 연합하여 다이샨(Daišan, 歹商)을 공격하였다. 이때 마침 하다 내부에는 수장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상황을 이용하여 하다를 침략하여 왕타이(王台)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잡았고, 나림불루 역시 기회를 이용하여 명(明)에게 더 많은 칙서를 요구하였다.[1]
1588년 명나라 군대와의 전투, 그리고 1593년 구러산 전투는 하위 섹션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만력 19년(1591), 나림불루는 2차례에 걸쳐 건주여진 누르하치에게 사신을 보내어 토지를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였다.[3]
만력 37년(1609) 나림불루는 병으로 사망하였다. 동생 긴타이시(金台石)가 뒤를 이어 즉위하였다.
3. 1. 명나라와의 관계
1588년, 요동순무 고양겸은 이성량에게 명나라 군대를 이끌고 여허를 정벌하게 했다. 명나라 군대가 다가오자, 부자이는 서성을 버리고 나림불루에게 투항하려다 명나라 군대와 교전하게 되었다. 여허 군대는 동성으로 후퇴하였고, 명나라 군대는 2일 동안 여허성을 공격했지만 함락시키지 못했다. 이에 이성량은 거포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여 빈틈을 만들었다. 명나라 군대는 수레에 운제(성벽을 오르기 위해 만든 사다리)를 싣고 거포를 운제 위에 두어 여허 내성과 높이를 같게 만들었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항복을 요청하며, 칙서를 독점하지 않고 하다부와 나누며 명나라에 조공할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량은 군대를 철수시켰고, 명나라는 이성량에게 칙서 499도를 주었다.[1]3. 2. 하다부 및 건주여진과의 갈등
나림불루는 주변 부족들과 끊임없이 갈등했다. 특히 하다부와 건주여진(建州女眞)과의 관계가 복잡했다.하다부와는 복수와 영토 분쟁으로 얽혀 있었다. 1584년, 아버지 칭기야누(Cinggiyanu, 淸佳砮)와 형 양기누가 이성량(李成梁)에게 살해당한 후, 나림불루는 몽골과 연합하여 하다부를 공격했다. 하다부 내부의 권력 다툼을 틈타 왕타이(王台)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사로잡는 등 하다부를 압박했다.[1] 1588년, 명나라 군대가 여허부를 공격하자, 부자이(Bujai, 布寨)와 함께 명나라에 항복하고 하다부와 칙서를 나누는 조건으로 명나라와 화친했다.[2]
건주여진의 누르하치(Nurhaci, 努爾哈赤)와는 지속적으로 대립했다. 1591년, 나림불루는 누르하치에게 토지를 요구했다가 거절당하고 비웃음을 샀다.[3] 1593년에는 울라, 하다, 호이파 등 해서여진 부족들과 몽골 코르친(Qorcin, 科爾沁) 등과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했으나, 구러산 전투에서 어이두(Eidu, 額亦都)가 이끄는 건주여진 군대에 대패했다. 이 전투에서 형 부자이는 전사했고, 나림불루는 겨우 여허로 도망쳤다.[3]
4. 구러산 전투 (1593년)
1593년 훌룬 구룬(扈倫國) 네 부락이 연합하여 건주의 후부차채(胡卜察寨)를 공격하였다. 음력 6월, 여허를 중심으로 해서여진 네 부락(울라, 하다, 여허, 호이파)과 몽골 (코르친, 시버, 구왈차) 세 부락, 그리고 골민 샹기얀 알린(長白山)의 주셔리(Jušeri, 朱舍里)와 너연(Neyen, 訥殷) 두 로(路)까지 총 아홉 부락이 연합하여 부자이와 나림불루를 맹주로 건주를 공격하였다.[1]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직접 여허군을 이끌고 허지거성(Hejige hoton, 赫濟格城)을 공격하였으나, 양측 모두 피해만 입고 성을 함락시키지는 못했다. 누르하치는 대장 어이두에게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여허군을 구러산으로 유인하여 성의 포위를 풀게 하고, 구러산에 건주군을 매복시켜 공격을 준비하였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이를 모르고 거짓 후퇴하는 어이두를 추격하다가 구러산 뒤에서 매복 공격을 당하였다. 부자이는 곤목(滾木, 성 위에서 아래로 던져 성벽을 기어오르는 군대를 저지하는 통나무)에 맞아 말에서 떨어졌고, 건주 군사 오담(吳談)이 그를 죽였다. 맹주를 잃은 연합군은 혼란에 빠졌고, 건주군은 이 틈을 타 기습하여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나림불루는 혼란 속에서 여허로 후퇴하였다.[1]
4. 1. 배경
1584년, 여허 버일러 칭기야누와 양기누가 이성량에게 살해된 이후, 두 사람의 아들 부자이와 나림불루가 각각 즉위하였다. 이들은 잔여 부락을 모으고 하다에게 보복할 계책을 세웠다. 나림불루는 몽골 이아등과 연합하여 위원보(威遠堡)를 공격하였고, 황홀태(恍惚太)와 연합하여 하다부 다이샨을 공격하였다. 이때 마침 하다 내부에는 수장 자리를 둘러싸고 내란이 일어났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상황을 이용하여 하다를 침략하여 왕타이의 아들 캉구루(康古魯)를 잡았고, 나림불루 역시 기회를 이용하여 명에게 더 많은 칙서를 요구하였다.[1]1588년 음력 2월, 요동순무 고양겸은 이성량이 명군을 통솔하여 여허를 정벌하게 할 것을 결정하였다. 명군이 다가오자, 부자이는 서성(西城)을 버리고 나림불루에게 투항하려고 가는 도중 명군과 조우하여 교전을 벌였다. 이에 따라 여허 군대는 동성(東城)으로 후퇴하였다. 여허성(葉赫城)은 매우 견고하였고 명군은 2일동안 공격하였지만 함락시킬 수 없었다. 이에 이성량은 거포(巨砲)를 이용하여 성을 공격하였고, 마침내 빈틈을 공략하였다. 명군은 수레에 운제(雲梯)를 실어 세우고 거포를 운제 위에 두어, 마침내 여허 내성(內城)과 고도가 같아졌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공황에 빠졌고 이에 성을 나가 항복을 요청하였으며, 아울러 혼자서 칙서를 독점하는 것을 포기하고 하다부와 칙서를 나누고 명조에 입공(入貢)하는 것을 요구하였다. 이성량은 곧바로 군대를 포기하고 명조는 이성량에게 칙서 499도(道)를 주었다. 같은 해 음력 9월, 나림불루는 누이 몽고저저를 건주여진 누르하치에게 시집보냈다.[1]
1591년, 나림불루는 2차례에 걸쳐 건주여진 누르하치에게 토지를 요구하였지만 거절당하였고, 오히려 비웃음을 당하였다. 1593년, 훌룬 구룬(扈倫國) 네 부락이 군대를 합쳐 건주의 후부차채(胡卜察寨)를 공격하였다. 같은 해 음력 6월, 여허 소재의 해서여진 네 부락 울라, 하다, 여허, 호이파는 몽골 코르친, 시버, 구왈차 세 부락, 골민 샹기얀 알린(長白山) 주셔리(Jušeri, 朱舍里)와 너연(Neyen, 訥殷) 두 로(路), 총합 아홉 부락이 연합하였고, 부자이와 나림불루를 맹주로 하여 건주를 공격하였다.(구러산 전투)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친히 여허군을 이끌고 허지거성(Hejige hoton, 赫濟格城)을 공격하였고, 양측은 서로 다쳤지만, 성지는 함락되지 않았다. 누르하치는 대장 어이두에게 정예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여허군을 구러산으로 유인하여 성의 포위를 풀게 하였고, 또한 건주군이 구러산에서 매복 공격 준비를 하게 하였다. 부자이와 나림불루는 계략을 몰랐고 거짓 후퇴하는 어이두를 추격하여 구러산 뒤로 왔다가 매복 공격을 당하였다. 부자이는 곤목(滾木, 성 위에서 아래로 던져 성벽을 기어오르는 군대를 저지하는 통나무)에 맞아 말 아래로 굴러 떨어졌고, 건주 군사 오담(吳談)은 기회를 이용하여 부자이를 죽였다. 연합 군대는 주장을 잃자 일시에 혼란에 빠졌고, 건주군은 기세를 틈타 기습을 가하여, 일거에 구부 연합군을 격파하였다. 나림불루는 혼란에 빠져 여허로 후퇴하였다.[1]
4. 2. 전투 과정
만력(萬曆) 21년(1593), 훌룬 구룬(扈倫國) 네 부락이 연합하여 건주여진을 공격했다. 여허(葉赫)의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해서여진(海西女眞)의 울라(烏拉), 하다(哈達), 호이파(輝發)와 몽골의 코르친(科爾沁) 등 아홉 부락 연합군을 이끌고 건주를 공격하였다.(구러산 전투)[1]나림불루와 부자이는 직접 여허군을 이끌고 허지거성(赫濟格城, Hejige hoton)을 공격했으나 함락시키지 못했다.[1] 누르하치(努爾哈赤)는 어이두(額亦都)에게 정예 기병 수백 명을 이끌고 여허군을 구러산으로 유인하게 하고, 구러산에 매복 공격을 준비시켰다.[1]
나림불루와 부자이는 계략을 모르고 거짓 후퇴하는 어이두를 추격하여 구러산 뒤로 갔다가 매복 공격을 당했다.[1] 부자이는 곤목(滾木, 성 위에서 아래로 던져 성벽을 기어오르는 군대를 저지하는 통나무)에 맞아 말에서 떨어져 건주 군사에게 죽임을 당했다.[1] 연합군은 주장을 잃고 혼란에 빠졌고, 건주군은 이 틈을 타 기습하여 연합군을 격파했다.[1] 나림불루는 간신히 여허로 도망쳤다.[1]
4. 3. 결과
구러산 전투(1593년)에서 여허는 건주여진에게 크게 패했다. 이 전투에서 여허의 수장 부자이는 전사하였고, 나림불루는 겨우 목숨을 건져 여허로 도망쳤다.[1] 이 패배로 여허는 큰 타격을 입었으며, 반대로 건주여진의 세력은 더욱 강해지는 계기가 되었다.[1]5. 죽음
나림불루는 만력(萬曆) 37년(1609)에 병으로 사망하였다. 그의 동생 긴타이시(金台石)가 뒤를 이어 여허부의 버일러가 되었다.
참조
[1]
서적
《满洲实录·卷2》
中华书局
[2]
논문
明珠家族谱牒与清代官方谱牒档案的文献特性
[3]
논문
明珠家族谱牒与清代官方谱牒档案的文献特性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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