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카지마 J9Y 깃카
"오늘의AI위키"의 AI를 통해 더욱 풍부하고 폭넓은 지식 경험을 누리세요.
1. 개요
나카지마 J9Y 깃카는 일본 해군이 개발한 제트 공격기로, 1944년 일본의 고성능 왕복 엔진 개발 난항과 연료 부족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기획되었다. 독일의 Me 262를 참고하여 설계되었지만, 일본의 기술력과 자원 부족으로 인해 독자적인 기술을 바탕으로 제작되었다. 킷카는 1945년 8월 첫 비행에 성공했으나, 2차 비행 중 사고로 착륙 장치가 파손되었고, 이후 일본의 항복으로 인해 실전 투입되지는 못했다. 킷카는 특공기로 사용될 계획도 있었으며, 현재는 미국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과 IHI에 전시되어 있다.
더 읽어볼만한 페이지
- 1945년 첫 비행한 항공기 - 더글러스 A-1 스카이레이더
더글러스 A-1 스카이레이더는 제2차 세계 대전 이후 미 해군이 개발한 단발 프로펠러 공격기로, 한국 전쟁과 베트남 전쟁에서 활약했으며, 뛰어난 무장 탑재 능력과 작전 반경으로 여러 국가에서 운용되었다. - 1945년 첫 비행한 항공기 - 아브로 튜더
아브로 튜더는 1940년대 영국에서 개발된 장거리 여객기로, 여러 파생형이 제작되었으나 성능 및 안전 문제, 경쟁 기종의 등장으로 인해 상업적으로 제한적으로 운용되다가 퇴역했다. - 쌍발 제트기 - 에어버스 A319
에어버스 A319는 A320의 동체를 단축한 협동체 여객기로, 플라이 바이 와이어 제어 시스템과 사이드스틱 조종 장치를 갖춘 A320 패밀리의 일원이며, 다양한 엔진과 비즈니스 제트기, 장거리형 모델 등 여러 파생형이 존재한다. - 쌍발 제트기 - 보잉 767
보잉 767은 1970년대 후반 항공 시장의 운영 비용 절감 요구에 맞춰 개발된 중형 광폭 동체 여객기로, 연료 효율적인 설계, 2인승 조종석, 첨단 항공 전자 장비, 다양한 모델 및 군용 파생형을 특징으로 하며 2027년 말까지 생산될 예정이다.
나카지마 J9Y 깃카 | |
---|---|
개요 | |
![]() | |
유형 | 지상 공격기 대함 공격기 |
제작사 | 나카지마 항공기 요코스카 해군 항공 기술창 |
설계자 | 마쓰무라 겐이치 |
최초 비행 | 1945년 8월 7일 |
상태 | 시제기 |
주요 운용국 | 일본 제국 해군 |
생산 대수 | 시제기 1대, 추가 24대 제작 중 |
명칭 |
2. 개발 배경
1944년 8월, 일본은 말레이 반도를 비롯한 남방 전선의 제해권을 잃고 원유와 자원을 본토로 들여오기 어려워졌다. 고고도 비행에 필요한 과급기를 갖춘 고출력 왕복 엔진 생산도 어려워졌고, 연료 사정도 악화되었다. 이에 일본 해군은 저질 연료로도 작동하고 구조가 간단한 제트 엔진(분진 기관)을 갖춘 육상 공격기를 개발하기로 결정했다. 이 공격기는 "황국 2호 병기"라는 가칭으로 나카지마 비행기에 개발 지시가 내려졌다.[10]
당시 일본은 독일, 영국, 이탈리아에 이어 제트 엔진을 독자적으로 개발하고 있었으나, 실용화 단계에는 이르지 못했다. 그러나 네-10, 네-12카이(추력 230kg), 네-12(추력 300kg), 네-12B 등 어느 정도 개발 경험을 쌓아가고 있었다.
초기에는 세 가지 설계안이 검토되었다. 첫 번째는 동체 위아래로 엔진을 배치하는 형태, 두 번째는 엔진을 동체 측면에 매립하는 방식, 세 번째는 메서슈미트 Me 262와 유사하게 주익 아래에 엔진을 매다는 방식이었다. 제작 및 유지보수가 쉽고, 엔진 교체가 용이하다는 점 때문에 세 번째 안이 채택되었다.[1]
이후, 일본은 동맹국인 독일로부터 메서슈미트 Me 262에 대한 기술 자료를 입수하기로 결정했다. 일본 해군은 나카지마에 고속 공격기로 사용될 유사한 항공기를 개발할 것을 요청했다. 설계 사양에는 미숙련 노동력으로 제작할 수 있어야 하고 날개가 접는 날개여야 한다는 요구 사항이 포함되었다. 그러나 핵심 자료를 운반하던 일본 잠수함이 침몰하면서 자료 확보에 큰 차질이 생겼다.
2. 1. 독일에서 입수한 설계도
일본은 독일과의 협력을 통해 Me 262의 기술 자료를 입수하려 했다. 당시 독일이 점령하고 있던 프랑스의 툴롱 군항을 통해 잠수함으로 제트 전투기의 설계도를 옮기기로 합의했다. 이 임무에는 일본과 독일 각각 1척의 잠수함이 이용되었다. 그러나 1944년 말, 일본의 I-29 잠수함(伊号第二十九潜水艦)이 바시 해협에서 미 해군 잠수함의 공격을 받아 침몰했다.[4] 다행히 항구 근해에 가라앉아 잠수부들을 통해 설계도면 일부를 인양했지만, 대부분 판독 불가능할 정도로 훼손되거나 분실되었다.결국, 싱가포르에서 자료 일부를 챙겨 귀국한 이와야 에이이치(巌谷英一) 중좌가 가져온 자료를 제외하면, 가장 중요한 동체와 엔진 나셀 부분의 설계도는 없었다. 이 때문에 일본 기술진들은 Me 262의 기초 도면을 참고하여 대부분의 작업을 독자적으로 진행해야 했다.[4]
3. 원형기 제작
킷카는 겉모습은 메서슈미트 Me 262와 비슷했지만, 처음 탑재될 예정이었던 네-12B 엔진의 추력이 약했기 때문에 가능한 한 작고 가볍게 만들어야 해서 크기가 조금 작았다. 슈발베가 양력 중심을 맞추기 위해 주익에 후퇴각을 준 것과는 달리 사다리꼴의 테이퍼익을 채용하는 등, 분실된 도면과 해군의 요구사항을 고려하느라 실제로는 많은 부분이 달랐다.[1] 일본측은 깃카가 독자 설계나 다름없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킷카는 슈발베의 복사판은 아니라고 평가할 정도의 다른 부분이 있는 것은 사실이다. 예를 들면 비좁은 동굴이나 엄폐호에 숨길 수 있도록 함재기처럼 외측 날개를 위쪽으로 접을 수 있었다. 착륙 장치는 제트기에 알맞는 세발자전거식으로 개발 기간을 앞당기고 부품 조달이 쉽게끔 앞다리는 깅가 폭격기의 미륜을 가져오고 메인 기어는 영식 함전의 부품을 활용했다.[4] 시제기에서는 개조할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브레이크도 그대로 썼는데 그것이 활주 테스트에서 오버런하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주익 아래에 2기가 매달린 엔진은 낮은 추력을 보충하기 위해서 무장 상태에서 이륙하려면 화약을 점화되는 이륙용 부스터 2개를 익근부 아래에 장착해야만 했다.
또한 이 시기는 항공기의 필수 재료인 듀랄루민 같은 경금속이 부족해서 해군항공본부는 신조 기체들에는 가능한 한 경합금을 아끼도록 하고 양철이나 망간강 같은 시중 산업 규격의 강판과 강재 같은 대체 소재를 권장하고 있었던 탓에 깃카도 이에 관한 고려가 있었다. 이런 자원 절약은 나카지마 토카 설계에도 응용되었다. 또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공정 간소화와 생산 공수를 줄이도록 고안되어 영식함전의 2분의 1 생산공수만으로 제작할 수 있었다.
기체 제작은 군마현에 있는 나카지마 비행기의 코이즈미 제작소 3층에서 설계부 주임 마쓰야마 겐이치 기사의 지휘하에 이뤄졌지만 얼마 못가 보잉 B-29의 대규모 공습으로 공장은 패닉 상태에 빠졌다. 그 후 미 해군 함재기에 의한 공습은 산발적으로 계속되었고, 개발진들은 방공호에 웅크린 채 급강하했다가 기총소사를 거듭하는 함재기 소음에 떨어야만 했다. 저녁에야 공습 경보가 해제되자 서둘러 조립 공장으로 달려갔더니 공장의 슬레이트 지붕은 폭풍으로 날아가버렸지만 다행히 기체는 무사했다.
그 후 해군은 개발 중이던 각 기체 개발팀을 부대로 나눠 사이운 부대는 타테바야시 중학교로 소개시키고 렌잔 부대는 쿠마가이 여학교에, 그리고 깃카 부대는 토치기현의 사노 중학교로 피난했다. 시제기는 미군의 추가 공습을 피하기 위해 공장에서 피난해, 도부 이세사키선키자키역 부근에 있던 농가의 양잠 오두막으로 보내져 그 곳에 숨겨진 상태로 조립을 했다. 한가로운 전원 풍경에서 리벳을 박는 에어 해머의 소음이 울려퍼지고 있었다. 사노 중학교에 숙소를 차린 설계자들은 철모를 등에 메고 각반을 두른 복장으로 설계 자료가 담긴 노트를 넣은 주머니를 가슴 앞으로 두르고 허리에는 20인치 계산자를 차고 공습 경보를 틈타 출퇴근했다. 이렇게 진행된 1호기의 조립은 5월에는 구조강도 테스트를 할 단계가 되었다. 6월부터는 동체와 미익의 강도 시험이 시작됐다. 그리고 6월 29일에는 고이즈미 제작소로 돌려진 깃카 1호기는 완성 검사가 이루어졌다. 이제 시제기는 지상에서 엔진의 내구 시험을 통과한 뒤, 비행 시험을 하기 위해 기사라즈 기지로 옮겨져 엔진과 기체가 조립되었다. 동력 의장 작업에는 야마다 다메지 기사가 주축이 되어 진행했다.[3]
같은 시기, 미국에서는 1942년부터 에어라코멧을 날리기 시작하여 실용 제트 전투기 단계에 들어간 록히드 P-80A의 부대 배치가 시작되었고 월간 생산량 30대가 만들어지고 있었으나 아직 실전 투입은 진행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반면 연합국의 일원 영국은 1944년 7월부터 글로스터 미티어를 실전 배치해서 이미 해협 초계와 유럽 본토에서 날아드는 V-1 비행폭탄을 요격하고 있었다.
4. 첫 비행
1945년 8월 7일, 킷카는 일본 최초로 제트 비행에 성공했다. 당시 연료가 부족하여 송근유를 섞은 등유를 16분 분량만 싣고 무게를 최대한 줄인 상태로 12분간 비행했다.[11] 이륙용 보조 로켓과 안테나, 노즈기어 커버는 설치되지 않았고, 바퀴를 내린 채 비행했다.
8월 10일 육해군 간부들이 시찰하는 가운데 두 번째 비행이 예정되었으나, 공습 경보로 인해 취소되었다. 8월 11일에는 악천후로 연기되어, 결국 8월 12일에 두 번째 비행이 실시되었다. 그러나 이륙 도중 활주로를 벗어나 기체가 손상되었다.[3] 이륙 실패의 원인은 보조 로켓 연소 종료 후 가속이 줄어들자 조종사 다카오카 미치가 엔진 고장으로 착각하고 이륙을 중지하려 했으나, 제동력이 부족하여 활주로 끝 모래사장에 튀어나가 다리가 부러진 것이었다. 개발진들이 킷카를 수리하던 중 천황의 항복을 알리는 방송이 나왔다.[3]
]
5. 생산 계획과 준비
1944년 8월, 일본 해군은 저질 연료로도 작동하고 구조가 간단한 제트 엔진을 갖춘 육상 공격기를 개발하기 시작했다. '황국 2호병기'라는 가칭으로 나카지마 비행기에 개발 지시가 내려졌고, Me 262와 유사하게 주익 아래에 엔진을 매다는 방식이 채택되었다. 깃카는 Me 262와 비슷하지만, 엔진 추력이 약해 소형 경량으로 제작되었고, 함재기처럼 날개를 접을 수 있도록 설계되었다. 착륙장치는 깅가 폭격기와 영식 함전의 부품을 활용했다.[3]
이 시기에는 두랄루민 같은 경금속이 부족하여, 양철이나 망간강 같은 대체 소재를 사용하도록 권장되었다. 또한 대량 생산에 적합하도록 공정이 간소화되어 영식함전의 절반 정도의 생산 공수로 제작할 수 있었다.
기체 제작은 군마현에 있는 나카지마 비행기 고이즈미 제작소에서 이루어졌지만, B-29의 공습으로 공장이 피해를 입었다. 개발진은 도치기현의 사노 중학교 등으로 피난하여 개발을 계속했고, 1호기는 농가의 양잠 오두막에 숨겨진 상태로 조립되었다. 1945년 6월, 1호기는 완성 검사를 마쳤고, 기사라즈 기지로 옮겨져 비행 시험을 준비했다.
패전 직전에는 수십 대가 생산 중이었으나, 실제로 완성된 것은 시제기 2대뿐이었다.[12] 완성된 2대는 미군에 의해 접수되었고, 연구 목적으로 사용되었다.
나카지마 비행기 주식회사는 깃카의 2인승 훈련기[5], 정찰기, 전투기 등 여러 파생형을 개발했다. 전투기는 Ne-20의 개량형인 ''Ne-20 Kai'' 엔진을 장착하여 더 높은 추력을 낼 것으로 예상되었다.[8]
깃카는 종종 일본 최초의 제트 전투기로 알려져 있지만, 실제로는 대함 공격을 위한 공격기였다.[9] 처음부터 특공 전용으로 설계된 것은 아니지만, 당시 전황을 고려하면 특공기로 사용되었을 것이라는 의견이 있다. 해군에서는 제트 엔진이야말로 특공기에 적합한 엔진이라고 생각했다는 증언도 있다.
그러나 당시 개발에 참여했던 관계자는 깃카가 전투기로 사용될 수 있음에도 특공기로밖에 생산 및 조종사 양성이 허가되지 않았던 현실을 지적하기도 했다. 다만, 깃카의 엔진 개발자는 깃카가 처음부터 귀환을 전제로 설계된 공격기였다고 주장하며, 특공기가 아니었음을 시사하고 있다.
6. 제724해군항공대
일본 해군은 생산된 킷카를 전용 부대에 배치하여 관리할 예정으로, 제724해군항공대(第七二四海軍航空隊)를 편성했다.[13] 1945년 7월 1일 이토 스케미츠(伊東祐満) 대좌가 사령관에 임명되고 비행장 직무는 타다 아쓰지(多田篤次) 소좌가 맡았다.[14] 기지는 칸노이케 비행장(神ノ池飛行場)으로 지정되었고, 724공에는 킷카 16대와 99식 함상 폭격기 24대, 훈련기 12대가 할당되었다.
7월 15일 훈련을 위해 미사와 비행장(三沢飛行場)으로 이동한 대원들은 8월 1일부터 함상폭격기로 비행 훈련을 시작했다. 부대원으로 선발된 인력은 6월 말 해산한 미자와 해군 항공대에서 비행 훈련을 받지 않은 예과련 14기 생도 100명과 16기 200명이었다. 이들은 기초 군사훈련만 받았을 뿐 비행 훈련이 동결된 뒤 입대하여 함상폭격기조차 제대로 다루지 못했다.
11월부터 미우라 반도로 전개하는 것을 목표로 3개월간의 특훈에 들어갔다. 킷카는 항속거리가 매우 짧아, 724공 대원들은 적 기지에 강행 착륙 후 백병전을 하는 상황까지 고려하여 육전 훈련도 받았다. 그러나 훈련 시작 보름 만에 종전을 맞아 훈련은 종료되었다.
7. 일본의 제트 항공기 계획
일본은 깃카 외에도 제트 엔진을 이용한 다양한 항공기 개발을 계획했다. 시제 정찰기 케이운에 네330을 장착한 제트 공격기 케이운 카이(景雲改), 공기창에서 만들던 네30을 탑재한 육상 폭격기 텐가(天河), 육군이 계획한 네130 혹은 네230 엔진을 갖출 전투기 카류(火龍)도 있었지만, 이들은 모두 설계 단계에서 종전을 맞이했다.[5] 시제기를 시험하던 국지 전투기 신덴에도 네130을 장비시킨 제트화 계획도 있었다.
로켓 추진 방식의 짧은 체공시간을 가진 특공기 오오카에도 네20 제트 엔진을 탑재한 오오카 33형(桜花 三三型), 43형 갑(四三型甲), 43형 을(四三型乙) 계획도 있었다. 오오카는 개발 초기부터 로켓의 짧은 연소시간을 고려하여 당시 연구되던 모터제트 엔진인 츠11을 장비한 오오카 22형(桜花 二二型)과 추카(MXY-9 秋花)를 생산하려던 기록이 남아있다. 그 밖에도 펄스제트 엔진 카10을 탑재하는 마이카(梅花)와 램제트 엔진 카야바 1형을 탑재하는 카츠오도리(かつをどり) 계획이 있었다.[8]
8. 현존 유물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에는 복원된 킷카가 2016년부터 전시되고 있다. 이 킷카가 패전 당시 남아있던 시제기 2대 중 하나인지, 조립 중이던 약 23대 중 어느 것인지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미국 해군의 기록에 따르면 1949년 2월 18일 파툭센트 리버 해군 항공 기지 박물관에 전시되었다가 1960년 9월 2일 노퍽에서 메릴랜드주 슈트랜드에 있는 폴 E. 가버 보관 시설로 옮겨졌다. 그 후 박물관 스태프는 1961년 3월 13일 킷카를 컬렉션에 추가하여 복원했고, 지금은 버지니아주 챈틸리에 있는 스티븐 F. 유드바 헤이지 센터의 보잉 항공 격납고에서 공개되고 있다. 이 박물관에서는 킷카의 성능을 “one-way suicide mission”을 기반으로, 네20의 크기 및 출력으로부터 다음과 같이 추정하고 있다.[15]
기체명 | 시제 킷카 (Experimental Prototype Kikka) |
---|---|
전장 | 8.12m |
전폭 | 10m |
전고 | 2.95m |
자체 중량 | 2300kg |
총 중량 | 4080kg |
엔진 | Ne-20 axial-flow turbojets, 475kg (추력:4.66kN) ×2 |
최고 속도 | 696km/h |
항속 거리 | 500kg 폭탄 탑재 시 205km, 250kg 폭탄 탑재 시 278km |
착륙 속도 | 148km/h |
이륙 거리 | 이륙 보조 로켓 사용 시 350m |
폴 E. 가버 보관 시설에는 전방 동체, 조종석, 후방 동체, 양쪽 주익이 분해된 상태로 보관되어 있는 킷카가 한 대 더 있다. 전방 동체에는 빨간 페인트로 "2"라고 쓰여 있었는데, 전후에 접수되어 미국 본토로 반입된 시제 2호기에도 동일하게 "2"라고 쓰여 있었다. 따라서 분해된 킷카는 시제 2호기일 가능성이 높지만, 글씨의 위치와 형태가 달라 단정할 수는 없다.
네20 엔진은 세계에 3기가 현존하며, 그 중 2기는 미국에 있다. 이 엔진들은 패전 직전 나카지마 코이즈미 제작소에서 제조되어 킷카 시제 2호기에 탑재되었다. 패전 후 미군에 접수되어 미국 본토의 파툭센트 리버 해군 항공 기지로 수송되었고, 이후 샌디에이고 해군 기지를 거쳐 현재의 폴 E. 가버 보관 시설에서 보관되고 있다. 1990년대에는 보관 시설 선반 위에 알루미늄 호일로 싸여 녹 방지유로 갈색으로 변했지만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어 있었다. 2003년 스미소니언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 별관 신설 계획에 따라 1997년경부터 창고에 있던 엔진들을 정규 대차로 교체하는 작업이 시작되었고, 출처가 불분명한 엔진들에 대한 조사도 함께 이루어졌다. 이 과정에서 네20 엔진도 수십 년 만에 선반에서 내려져 조사를 받았고, 네20 엔진임이 확인되었다. 1기의 프론트 프레임에는 빨간 페인트로 "2"라고 쓰여 있었는데, 패전 후 코이즈미 제작소에서 킷카 시제 2호기를 촬영한 사진에서 이 엔진과 완전히 동일한 위치와 형태로 "2"라고 쓰여 있는 것이 확인되었다. 따라서 보관 시설에 있던 네20은 시제 2호기에 탑재되었던 엔진임이 밝혀졌다. 연소기 케이싱에는 영어로 "파툭센트 리버 해군 항공 기지에서 샌디에이고 해군 항공 기지로"라고 쓰여 있었다. 조사 후 세척된 엔진 중 1기는 새로 신설될 별관에 전시될 예정이며, 현재는 융커스 유모 004 옆에 전시되어 있다. "2"라고 쓰여진 엔진은 계속해서 폴 E. 가버 보관 시설에서 보관되고 있다.
나머지 1기의 네20 엔진은 일본에 있다. 이 엔진 역시 패전 후 미 해군에 접수되어 미국 본토로 수송되었다. 1945년 가을부터 크라이슬러는 미 해군과의 계약으로 XT-36-D2 터보프롭 엔진 개발에 착수했는데, 가스터빈 시험 기술 습득을 위해 해군으로부터 2기의 네20을 지급받았다. 엔진 본체 1대는 애나코스티아 항공 정보 센터에서, 압축기와 터빈 홀은 미들타운 항공 보급처에서 라이트 필드를 경유하여 지급된 두 번째 엔진에서 부품을 조달했다. 첫 번째 압축기와 터빈 홀 및 두 번째 엔진의 나머지 부품 행방은 불분명하며, 압축기는 시험 중 파손, 터빈 휠은 균열이 다발하여 폐기되었을 가능성이 높다. 운전 시험은 11시간 46분 동안 진행되었다. 보고서를 작성한 전 크라이슬러 기술자는 "네20은 상세 설계부터 부품 제작, 제약적인 개발, 그 사이에는 극히 짧은 시간 내에 설계 변경을 적용하여 초도 비행까지 불과 7.5개월이라는 단기간에 달성한 것은 특기할 만한 위업이며, 매우 자랑스러워할 만한 일이다."라고 평가했다. 크라이슬러의 운전 시험 후에는 노스롭 공과대학에 넘겨져 교재고에 보관되었다. 1961년 후나쓰 요시유키가 이 대학에서 제트 엔진 정비 연수를 받던 중 교재고 구석에서 네20을 발견하고, 엔진 돌리와 계기반을 제작하여 교정에서 엔진 운전을 시도했다. 1973년 10월 항공자위대 이루마 기지에서 열린 국제 항공우주 쇼를 계기로, 후나쓰는 이 네20을 일본에 반환하여 전시하고 싶다는 뜻을 대학에 전달했고, "영구 무상 대여, 반환 요구 없음"을 조건으로 국제 항공우주 쇼에서의 귀향과 전시가 실현되었다. 이 국제 항공우주 쇼에서는 네20과 마찬가지로 사식 전투기도 반환을 전제로 전시 비행이 이루어졌다. 그 후, 네20은 이시카와지마 하리마 중공업 주식회사(현: IHI)에서 분해 정비되어 매우 양호한 상태로 보관되었다. 일본에서도 이 네20을 운전할 계획이었으나, 분해 검사 중 터빈에 균열이 발견되어 단념할 수밖에 없었다. 현재는 IHI 소라의 미래관의 주요 전시물로 전시되어 있으며, 부품 일부는 크라이슬러 운전 시험 시 장착된 미국제 부품이다.
8. 1. 킷카의 엔진: 네-20
네-20은 일본 최초로 실용화된 터보제트 엔진이다. 공기창, 에바라 제작소(가와사키시나카하라구) 외 여러 회사의 협력으로 설계 및 제조되었다. 제원은 다음과 같다.항목 | 내용 |
---|---|
전장 | 1800mm |
직경 | 620mm |
전체 중량 | 474kg |
추력 | 475kg |
압축기 | 축류식 컴프레서 8단 |
터빈 | 터빈 1단 |
회전수 | 11000rpm |
엔진 수명은 연속 운전 시 약 40시간으로 매우 짧았는데, 이는 추력 베어링 와셔의 소손 때문이었다. 코시바 사다오 박사(당시 히타치 제작소 야스기 공장, 현 히타치 금속 야금 연구소)가 개발한, 당시 최고 성능의 공구강 Cr-W강(이513) 덕분에 실용화의 실마리를 얻었다.[1]
독일로 파견된 이호 제29 잠수함에는 제트 엔진 실물을 포함한 많은 기술 자료가 탑재되어 있었지만, 이 잠수함은 도중에 쇼난에서 출항한 뒤 격침되었다. 따라서 킷카 제작에 도움이 될 자료는 쇼난에서 내려 먼저 비행기로 운반된 BMW 003A의 축소 단면도(사진 필름에서 확대된 캐비닛 판 사진 한 장)와 융커스 Jumo 004B의 실물 견학 기록뿐이었다.[1]
당시 제트 엔진의 터빈 블레이드를 제작하는 데 필요한 니켈, 몰리브덴 등의 내열 합금용 재료도 부족한 상황에서, 이러한 자료를 참고하여 불과 1년 만에 엔진을 만들고 저출력임에도 실용 운전 상태까지 도달한 것은 네10・네10 개(추력 230kg), 네12(추력 300kg)・네12B 등 독자 개발 경험이 있었기에 가능했다.[1] 타네가시마 토키야스 중좌가 이끄는 설계 팀은 그동안 설계를 진행하고 있던 축류식+원심식의 네12B를 포기하고, 새롭게 축류식의 네20을 개발하는 형태가 되었다.
두문자어 "네"는 "연소 로켓"의 약자이다. 당시에는 제트 엔진을 "터빈 로켓"이라고 불렀다. 네20은 종전 후 미국군에 접수되어 일부가 노스롭 공과대학의 교재가 되었지만, 전시를 위해 일본에 대여되었을 때, 당시의 설계자가 "네20은 내 아들과 같은 존재다. 아들을 돌려주는 부모가 어디 있겠는가"라고 미국에 반환을 거부했다. 노스롭 공과대학은 이에 대해 "영구 무상 대여"로 응했고, IHI(이시카와지마 하리마 중공업)에 현재도 전시되어 있다. 이와는 별도로 스미소니언 항공우주 박물관 별관에도 2기가 전시되어 있다.
추력을 20% 증가시킨 개량형 네20 개가 설계되었지만, 시제까지는 이르지 못했다. 네20 개는 최근 발견된 500장에 달하는 완전한 설계도에 따르면 축류식 컴프레서가 8단에서 6단으로 변경되었으며, 엔진의 전장도 짧아져 경량화되었다. 추산치에서는 속도가 15% 증가하고, 연비가 24% 증가했다.
9. 킷카의 제원
자료에 따라 킷카의 제원에 대한 내용은 조금씩 차이가 있다. 다음은 그 예시이다.
시험 제작 명칭 | 시제 귤화 개 | |||
---|---|---|---|---|
전폭 | 10m | |||
전장 | 9.25m | |||
주익 면적 | 13.2m2 | |||
자중 | 2300kg | 2400kg | 2200kg | 2300kg |
정규 전비 중량 | 3500kg | 3600kg | 3400kg | 3500kg |
발동기 | 네20 축류식 터보제트 (정지 추력 475kg) | 네20 개 축류식 터보제트 (정지 추력 570kg) | ||
최고 속도 | 676 km/h (고도 6000m) | 785 km/h (고도 6000m) | ||
상승력 | 10000m까지 26분 | 10000m까지 20분 | ||
항속 거리 | 680km (정규) | 843km (정규) | ||
무장 | 고정 무장 없음 | 기수 5식 30mm 기관포 2정 (휴대 탄수 각 50발) | 고정 무장 없음 | 기수 5식 30mm 기관포 2정 (휴대 탄수 각 50발) |
폭장 | 500kg 또는 800kg 폭탄 1발 (동체 하부에 반 매립식) | |||
생산수 | 2기 | 반 완성 18기 - 25기 이상 중 일부분 | 계획기 |
10. 킷카의 해군 약호
''깃카''는 종종 '''J9N1''' 또는 '''J9Y1'''로 표기되기도 하지만, 국립 항공우주 박물관의 한 연구원에 따르면 이는 잘못된 것이다.[2] 이 항공기의 공식 명칭은 橘花|깃카일본어였다. 자살 임무에 사용하도록 설계된 일본 항공기와 마찬가지로, 이름만 부여되었다.[2]
인터넷이나 프라모델 등에서 '''J9Y''' (Y는 공기창을 의미하는 기호), '''J9N''' 또는 '''J10N''' (N은 나카지마 비행기를 가리키는 기호) 등으로 표기되는 경우가 있다. 추수가 J8M이므로, 그 다음이라는 추측도 있지만, J는 육상 전투기(국지 전투기)를 의미하는 기종 기호이고 킷카의 분류는 특수 공격기(해군 약호는 M)이므로 잘못된 것이다. 엄밀하게는 M7N 또는 M8N (세이란의 다음이라면 M7, 세이란과 후지카를 사이에 둔다면 M8)으로 하는 것이 타당하다.
다만, 킷카에도 해군 약호가 붙어 있었지만, 종전 시에 군 기밀로서 서류가 소각되어 불명확하게 되었다는 설이나, 미군의 조사에 관계자가 구두로 J9N이라고 대답했다는 설도 있기 때문에, 킷카의 해군 약호 존재를 완전히 부정할 수는 없다.
참조
[1]
서적
The International Encyclopedia of Aircraft
1991
[2]
간행물
1995
[3]
서적
Monogram Close-Up 19 - Monogram Aviation Publications
1979
[4]
웹사이트
The History of Japan's First Jet Aircraft
https://airandspace.[...]
Smithsonian Institution
2016-09-28
[5]
간행물
1979
[6]
간행물
2006
[7]
간행물
2006
[8]
서적
Kikka: The Technological Verification of the First Japanese Jet Engine Ne-20
Miki Shobo
[9]
문서
'#海軍軍備(6)特攻戦備'
[10]
서적
海軍空技廠: 誇り高き頭脳集団の栄光と出発 - 第 2巻 - 229 ページ
光人社
1985
[11]
서적
近代日本総合年表 第四版
岩波書店
[12]
문서
'#海軍軍備(6)特攻戦備'
[13]
문서
'#海軍軍備(6)特攻戦備'
[14]
웹사이트
昭和20年7月24日(発令7月1日付)海軍辞令公報(甲)第1875号 p.11
https://www.jacar.ar[...]
[15]
웹사이트
Smithsonian National Air and Space Museum
https://airandspace.[...]
[16]
문서
정확하게는 네20개 터보제트를 장착하고 있기 때문에 귤꽃개에 해당하지만 게임 내 표기는 귤꽃이 되어 있습니다.
본 사이트는 AI가 위키백과와 뉴스 기사,정부 간행물,학술 논문등을 바탕으로 정보를 가공하여 제공하는 백과사전형 서비스입니다.
모든 문서는 AI에 의해 자동 생성되며, CC BY-SA 4.0 라이선스에 따라 이용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위키백과나 뉴스 기사 자체에 오류, 부정확한 정보, 또는 가짜 뉴스가 포함될 수 있으며, AI는 이러한 내용을 완벽하게 걸러내지 못할 수 있습니다.
따라서 제공되는 정보에 일부 오류나 편향이 있을 수 있으므로, 중요한 정보는 반드시 다른 출처를 통해 교차 검증하시기 바랍니다.
문의하기 : help@durumis.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