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르망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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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개요
노르만 왕조는 1066년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1세가 잉글랜드를 정복하고 왕위에 오르면서 시작되었다. 윌리엄 1세는 정복왕으로 불렸으며, 그의 통치 하에 강력한 왕권이 확립되었다. 윌리엄 1세의 후손들은 잉글랜드 왕위를 계승했지만, 헨리 1세의 사후에는 블루아 왕조가 잠시 잉글랜드를 통치하기도 했다. 이후 헨리 2세가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1066년, 프랑스 왕국의 제후였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가 앵글로색슨족이 지배하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였다. 그는 윌리엄 1세로 국왕에 즉위하며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정복왕"(the Conqueror)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리는 윌리엄 1세는 노르만인의 후예였기 때문에 그가 세운 왕조를 노르만 왕조라고 부른다.
1066년, 프랑스 왕국의 제후였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는 앵글로색슨족 왕이 지배하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 윌리엄 1세로 즉위하여 노르만 왕조를 열었다. 노르만인의 후예였던 윌리엄은 "정복왕"(the Conqueror|더 컨커러영어)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며, 그의 왕조는 정복 왕조로서 초기부터 강력한 국왕 중심의 권력 구조를 특징으로 했다. 노르만 왕조의 혈통은 이후 잉글랜드 왕가의 역사로 이어지게 된다.
2. 노르만 왕조의 시작
노르만 왕조는 정복 왕조로서 초기부터 국왕 중심의 강력한 권력 기반을 다졌다. 이후 잉글랜드의 여러 왕가에도 노르만 왕조의 혈통이 이어지게 된다.
2. 1. 왕위 논쟁
1066년 참회왕 에드워드가 사망하자 잉글랜드의 위탄회의(Witangemot)는 즉시 해럴드 2세를 왕으로 선출하였다. 해럴드 2세는 참회왕 에드워드의 처남이었다. 그러나 노르망디공 윌리엄( William, Gulliame영어 )은 에드워드가 생전에 자신에게 왕위를 약속했으며, 해럴드 또한 자신의 가신이 되기로 서약했다고 주장하며 왕위 계승에 이의를 제기했다.
하지만 당시 웨식스의 잉글랜드는 위탄 회의에서 왕을 선출하는 구조였으므로, 해럴드의 왕위 계승은 절차상 정당한 것이었다. 또한 해럴드가 윌리엄의 가신이 되기로 서약했다는 주장은, 해럴드가 노르망디에 포로로 잡혀 있을 당시 자유를 얻기 위해 억지로 한 서약이므로 무효라는 반박이 제기되었다. 게다가 윌리엄은 에드워드와 같은 대고모를 두었을 뿐, 잉글랜드 왕실과 직접적인 혈연관계는 약했기 때문에 잉글랜드인들의 지지는 해럴드에게 쏠렸다.
그럼에도 윌리엄은 잉글랜드 왕관을 포기할 생각이 없었다. 그는 교황 알렉산데르 2세에게 사절을 보내 해럴드의 왕위 계승이 부적절하다고 주장했다. 당시 잉글랜드 교회는 지리적 특성상 로마의 영향력에서 벗어나 있었고, 왕에 의해 강하게 통제되고 있었다. 이러한 상황은 로마의 권위 아래 통일된 법률과 관행을 확립하려던 교황에게는 달갑지 않은 문제였다. 교황 알렉산데르 2세는 잉글랜드 교회에 대한 자신의 영향력을 확대하려는 야심을 이루기 위해 윌리엄의 주장을 지지하였다.
교황의 지지에 고무된 윌리엄은 즉시 자신의 봉신( vassal영어 )들을 소집하여 잉글랜드 침공을 준비했다. 그러나 대부분의 봉신들은 바다 건너 잉글랜드 원정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이에 윌리엄은 플랑드르, 브르타뉴, 멘, 앙주, 푸아투 등 주변 지역에 병력 모집 공고를 내걸고 부와 명예를 약속했다. 이에 호응하여 약 8천 명의 병사들이 모여 원정군을 꾸릴 수 있었다.
2. 2. 전쟁
윌리엄이 잉글랜드 침략을 준비하는 동안, 잉글랜드 내부 사정은 복잡했다. 해럴드의 동생 토스티그가 노르웨이 왕 하랄의 지원을 받아 왕위를 노리고 잉글랜드 북부를 침공했다. 이 때문에 해럴드는 윌리엄의 침략에 대비해 모아둔 군대를 북쪽으로 보내야 했다. 해럴드는 신속히 북진하여 요크셔의 스탬퍼드 브리지 부근에서 토스티그 군대를 격파했지만, 쉴 틈도 없이 윌리엄의 상륙을 막기 위해 남쪽으로 급히 군대를 이동시켜야 했다.
토스티그의 침입은 해럴드에게는 불운이었으나 윌리엄에게는 행운으로 작용했다. 해럴드가 스탬퍼드 브리지에서 승리한 지 3일 후인 1066년 9월 28일 오전 9시경, 윌리엄은 아무런 저항 없이 잉글랜드 남쪽 해안에 성공적으로 상륙했다. 윌리엄은 군대를 헤이스팅스로 진군시켜 목책을 세우고 진지를 구축했다. 1066년 10월 14일, 해럴드는 토스티그와의 전투에서 입은 손실을 웨섹스와 동 앙글리아에서 급히 징집한 병력으로 보충하고, 헤이스팅스에서 약 11km 떨어진 곳에 진을 치고 윌리엄 군대와 맞섰다. 해럴드의 군대는 급조된 병사들과 그의 추종자, 정규군으로 이루어져 있었지만, 윌리엄이 쉽게 뚫을 수 없는 방어선을 구축했다.
해럴드 군대의 완강한 저항에 부딪힌 윌리엄은 거짓 후퇴 작전을 사용했다. 이 전술에 경험이 부족했던 해럴드 군대의 민병대가 먼저 속아 넘어가 포위 섬멸되었다. 하지만 해럴드의 추종자들과 정규군은 계속 굳건히 저항했다. 전투가 저녁 무렵까지 이어지던 중 해럴드가 부상을 입고 쓰러지자, 저항하던 병사들 사이에 혼란이 생겼다. 윌리엄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자신이 아끼는 중무장 기병대를 투입하여 색슨족 보병 부대를 무너뜨렸다. 이 헤이스팅스 전투에서 해럴드는 부하들과 함께 전사했고, 승리한 윌리엄은 잉글랜드의 왕위에 올랐다.
2. 3. 대관식
1066년 크리스마스에 정복 왕 윌리엄은 웨스터민스터 수도원에서 왕으로 추대되었다. 대관식 중 수도원 안의 귀족들과 병사들이 불어와 영어로 환호성을 질렀다. 그러나 이 함성 소리는 수도원 밖에서 경비를 서던 노르만 병사들에게는 잘못된 신호로 받아들여졌다. 겁에 질린 병사들은 대관식에 문제가 생겼다고 판단하여 주변 건물에 불을 지르기 시작했다. 불길이 빠르게 번지면서 대관식이 열리던 수도원은 큰 혼란에 빠졌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당황하여 우왕좌왕했지만, 주교와 몇몇 성직자, 그리고 제단 앞에 꿇어앉아 있던 윌리엄은 비교적 침착함을 유지했다. 윌리엄 역시 두려움에 떨고 있었으나, 왕의 축성을 중단할 정도는 아니었다. 이 사건은 헤이스팅스 전투에서의 승리에도 불구하고 잉글랜드에서 윌리엄의 지위가 여전히 불안정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일화였다. 윌리엄이 잉글랜드를 완전히 정복하고 진정한 왕으로 인정받기까지는 이후 5년의 시간이 더 필요하였다.
3. 정복왕 윌리엄의 통치
3. 1. 봉건제
정복왕 윌리엄은 잉글랜드 정복 후 교회의 축성을 받아 권위를 확보하고, 곧바로 새로운 통치 체제 구축에 나섰다. 그는 우선 자신에게 충성했던 노르만 대제후들에게 웨일스와 스코틀랜드 인접 지역의 땅을 봉토로 나누어 주었다. 이는 정복 전쟁에 대한 보상이자, 켈트족의 위협으로부터 국경 지역을 안정시키기 위한 완충지대를 마련하려는 목적이었다. 윌리엄은 대제후들이 하사받은 영지를 다시 그들의 봉신(subvassal)에게 나누어 줄 수 있도록 허용했다. 이를 통해 각 기사는 자신만의 봉토를 안정적으로 확보하게 되었고, 이는 잉글랜드 봉건제의 기초가 되었다. 당시 잉글랜드의 인구는 약 100만에서 200만 명으로 추정되는 반면, 이들을 다스리는 노르만인은 1만 명에 미치지 못하여 수적으로 매우 불리한 상황이었다.
윌리엄은 이러한 불리함을 극복하고 통치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자신이 노르망디 출신의 이방인이지만 참회왕 에드워드의 정당한 계승자임을 강조했다. 그는 잉글랜드의 옛 관습과 앵글로색슨의 법을 존중하겠다는 뜻을 분명히 하여 기존 질서를 어느 정도 유지하려 했다. 이에 따라 인민법정에서는 계속 관습법이 시행되었으나, 사법권은 대륙의 관습을 따라 세속 법정과 교회 법정으로 분리되었다. 이로 인해 주교는 더 이상 세속 법정에 참여하지 않고 자신만의 종교 법정을 운영하게 되었다.
사법 제도를 정비한 윌리엄은 정치 권력에서 기존 잉글랜드인들을 체계적으로 배제하는 작업을 진행했다. 이러한 숙청 작업은 매우 철저하여, 1086년에 작성된 토지 조사 문서인 둠즈데이 북(Domesday Book)에는 정복 후 20년 동안 일어난 변화가 명확히 드러난다. 이 시기 앵글로색슨 계통의 귀족 중 영향력을 유지한 이는 단 두 명에 불과했으며, 윌리엄으로부터 토지를 받은 약 200명의 노르만 대제후가 잉글랜드 전역의 토지를 소유하고 지배하게 되었다. 이들 대부분은 윌리엄과 함께 노르망디에서 건너온 이들이었다. 지배층 교체는 종교계에서도 이루어져, 1070년경부터 교회의 주교와 수도원장 자리에 노르만인을 임명하기 시작했다. 이후 앵글로색슨인은 주교나 수도원장에 임명되지 못했고, 이를 통해 노르만 왕조는 민중에게 큰 영향력을 미치는 교회와 수도회까지 장악하게 되었다.
윌리엄은 노르망디의 봉건 관행을 잉글랜드에 도입하여 기존의 위탄회의를 왕의 자문 기구인 조정(curia|쿠리아la)으로 대체했다. 유력한 노르만 제후들에게는 각자 영지 내 신민에 대한 경찰재판권(sac and soc)이 주어졌고, 일부 대제후에게는 사형을 집행할 수 있는 교수대 설치 권한까지 부여되었다. 결정적으로 1086년, 윌리엄은 대제후뿐만 아니라 그들에게 봉토를 받은 하위 봉신들까지 소집하여 자신에게 직접 충성을 맹세하도록 했다(솔즈베리 서약). 이는 봉신이 직속 주군보다 왕에게 우선적으로 충성해야 함을 명확히 한 것으로, 프랑스 왕국 등 다른 유럽 지역의 봉건제와 달리 왕의 권한이 매우 강력한 중앙 집권적 봉건 체제를 구축하는 기반이 되었다. 이러한 강력한 왕권 덕분에 11세기 잉글랜드는 당시 혼란스러웠던 유럽 대륙과 비교하여 상대적으로 평화롭고 질서 있는 왕국으로 발전할 수 있었다.
3. 2. 잉글랜드인 축출
1066년, 프랑스 왕국의 제후였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는 앵글로색슨 왕이 다스리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였다. 이후 윌리엄 1세로 즉위하며 노르망디 왕조를 열었다. "정복왕"이라는 별명으로 불린 윌리엄은 노르만인의 후예였기에 그가 세운 왕조를 노르만 왕조라고 부른다.
정복 왕조의 특성상, 노르만 왕조는 처음부터 국왕 중심의 강력한 권력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 노르만 왕조의 혈통은 이후 잉글랜드 왕가에도 계속 이어졌다.
3. 3. 안정
윌리엄과 그의 제후들은 잉글랜드 정복이라는 거대한 사업의 동업자 관계였다. 이들은 이러한 관계를 바탕으로 잉글랜드 지배권을 공고히 하는 데 협력했다. 윌리엄은 잉글랜드를 정복한 뒤에도 색슨족의 반란이나 데인족의 침략을 매우 경계했다. 이러한 외부 위협 가능성은 윌리엄이 귀족들을 함부로 대하기 어렵게 만드는 요인이었다. 하지만 윌리엄의 우려와 달리 색슨족의 반란이나 데인족의 침입은 더 이상 발생하지 않았고, 잉글랜드는 오랜만에 평화로운 시기를 맞이했다.
이러한 평화가 지속되자 윌리엄과 제후들 사이에 유지되었던 일체감이 점차 사라지고 긴장 상태가 형성되기 시작했다. 윌리엄은 이전 앵글로색슨 왕들이 누렸던 왕권을 그대로 유지하려고 한 반면, 잉글랜드의 제후들은 노르망디의 제후들이 누리던 수준의 독립성을 원했다. 제후들은 왕권을 제약하려 애썼고, 윌리엄은 왕의 대리인인 주장관의 세력을 통해 제후들을 견제하고자 했다. 그러나 왕권을 제한하려 했던 제후들도 윌리엄이 살아있는 동안에는 왕에게 직접적으로 저항하지는 못했다.
1066년, 당시 프랑스 왕국의 제후였던 노르망디 공작 기욤 2세(윌리엄)가 앵글로색슨 왕이 지배하던 잉글랜드 왕국을 정복하고, 윌리엄 1세로서 국왕에 즉위하면서 노르만 왕조가 성립되었다. "정복왕"(the Conqueror|더 컨커러영어)이라 불리는 윌리엄이 노르만인의 후예였기 때문에 노르만 왕조라고 불린다. 정복 왕조였기 때문에 처음부터 국왕 중심의 강력한 권력 구조가 마련되어 있었다. 노르만 왕조의 혈통은 이후 잉글랜드 왕가에도 계속 이어졌다.
4. 노르만 왕조의 잉글랜드 국왕
5. 블루아 왕조 (무정부 시대)
헨리 1세는 아들 윌리엄 아델린이 일찍 사망하여 다른 적자가 없었다. 이 때문에 헨리 1세 사후, 그의 누이 아델 드 노르망디의 아들이자 블루아 가문 출신인 에티엔이 프랑스에서 런던으로 건너가 제후들의 지지를 받아 잉글랜드 왕 스티븐으로 즉위했다. 이를 블루아 왕조라고 부르기도 하지만, 일부 역사서에서는 노르만 왕조의 연장선으로 보기도 한다.
- 스티븐 (1135년 ~ 1154년)
그러나 헨리 1세는 생전에 자신의 딸 마틸다를 후계자로 지명했었다. 마틸다는 스티븐의 즉위가 부당하다고 주장하며 반발했고, 이로 인해 잉글랜드는 내전에 휩싸이며 무정부 시대를 겪게 되었다. 오랜 내전 끝에 스티븐이 마틸다의 아들인 앙주 백작 앙리를 자신의 후계자로 인정하는 워링퍼드 협정이 체결되면서 평화가 찾아왔다. 스티븐이 사망한 후, 앙리가 헨리 2세로 즉위하면서 플랜태저넷 왕조가 시작되었다.
6. 가계도
노르망디 공국의 주요 가계는 다음과 같다. 상세한 가계도는 하위 문서를 참고하라.
- 롤로 (초대 노르망디 백작)
- * 기욤 1세
- ** 리샤르 1세 (초대 노르망디 공작)
리샤르 2세
* 리샤르 3세
* 로베르 1세
** 정복왕 윌리엄 (잉글랜드 국왕 겸임 시작)
*** 로베르 2세
윌리엄 클리토
*** 윌리엄 2세 (잉글랜드 국왕)
*** 헨리 1세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윌리엄 애설링
마틸다 + 조프루아 플랜태저넷 (앙주가)
* 헨리 2세 (플랜태저넷 왕조 시작)
** 청년왕 헨리
** 리처드 1세
** 존
*** 헨리 3세 (노르망디 공작위 포기)
*** 아델라 + 에티엔 앙리 (블루아가)
스티븐 (잉글랜드 국왕, 노르망디 공작)
6. 1. 노르망디 가문 가계도
영국 군주 가계도'''부계 롤로의 후손:'''
- 롤로, 927년경 사망, 루앙 백작 (911–927)
- *빌햘므 랑가스표트, 893–942, 루앙 백작 (927–942)
- **리샤르 1세 ''무서운 자'', 932–996, 루앙 백작 (942–996, 942년부터 노르망디 공작 칭호 사용)
리샤르 2세, ''선량한 자'', 1026년 사망, 노르망디 공작 (996–1026)
*리샤르 3세, 998–1027, 노르망디 공작 (1026–1027)
**''니콜라 (사생아), 1027–1092, 생투앵 수도원 수도원장 (1042–1092)''
*로베르 1세, ''위대한 자'', 1000–1035, 노르망디 공작 (1027–1035)
**정복왕 윌리엄 (사생아지만 공작 계승), 1028–1087, 노르망디 공작 (1035–1087), 잉글랜드 왕 (1066–1087)
***로베르 쿠르토즈, 1051–1134, 노르망디 공작 (1087–1106)
윌리엄 클리토, 1102–1128, 플랑드르 백작 (1127–1128)
***리처드, 1054–1070
***윌리엄 2세 루퍼스, 잉글랜드 왕 (1087–1100)
***헨리 1세 보클레르크, 잉글랜드 왕 (1100–1135), 노르망디 공작 (1106–1135)
윌리엄 아델린, 1103–1120 (화이트 쉽 침몰로 사망)
''다수의 사생아''
*윌리엄 드 노르망디, 1008–1025
*모거, 1019–1055, 루앙 대주교 (1037–1053)
*윌리엄 드 탈루, 1086년 사망, 아르크 백작
로베르 2세, 루앙 대주교 (989–1037), 에브뢰 백작 (989–1037), 노르망디 섭정 (1035–1037)
*리처드, 1015–1067, 에브뢰 백작 (1037–1067)
**윌리엄, 에브뢰 백작 (1067–1118)
*랄프 드 가세, 사망 1051
**로베르 드 가세
*윌리엄 드 에브뢰
*휴 드 라시
**''다수의 자녀''
모거, 988–1032
''조프루아 (사생아), 1010년 사망, 유 백작 (996–1010)''
*''후손''
''윌리엄 1세 (사생아), 1057년 사망, 유 백작 (1040–1057)''
*''후손''
'''주요 인물 관계도'''
- 윌리엄 1세 (정복왕) + 플랑드르의 마틸다
- * 로베르 2세 (노르망디 공작)
- ** 윌리엄 클리토 (플랑드르 백작)
- * 윌리엄 2세 (잉글랜드 왕)
- * 아델라 + 에티엔 2세 (블루아 백작)
- ** 티보 4세 (블루아 백작) → 블루아 가문
- ** 스티븐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 * 헨리 1세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 ** 마틸다 + 조프루아 4세 플랜태저넷 (앙주 백작, 노르망디 공작)
헨리 2세 (잉글랜드 왕, 노르망디 공작) → 플랜태저넷 왕조
6. 2. 부계 롤로의 후손
- 롤로: 루앙 백작 (911년–927년). 928년~933년 사이 사망.
- * 윌리엄 1세 롱스워드: 루앙 백작 (927년–942년). 893년경 출생, 942년 사망.
- ** 리샤르 1세 '무외공': 노르망디 공작 (942년–996년). 932년 출생, 996년 사망.
리샤르 2세 '선량공': 노르망디 공작 (996년–1026년). 1026년 사망.
* 리샤르 3세: 노르망디 공작 (1026년–1027년). 998년 출생, 1027년 사망.
** 니콜라 (사생아): 생투앵 수도원의 수도원장 (1042년–1092년). 1027년 출생, 1092년 사망.
* 로베르 1세 '웅장공': 노르망디 공작 (1027년–1035년). 1000년 출생, 1035년 사망.
** 윌리엄 1세 '정복왕' (사생아): 노르망디 공작 (1035년–1087년), 잉글랜드 국왕 (1066년–1087년). 1028년경 출생, 1087년 사망.
*** 로베르 2세 '쿠르토즈': 노르망디 공작 (1087년–1106년). 1051년경 출생, 1134년 사망.
윌리엄 클리토: 플랑드르 백작 (1127년–1128년). 1102년 출생, 1128년 사망.
*** 리처드: 1054년경 출생, 1070년 사망.
*** 윌리엄 2세 '루퍼스': 잉글랜드 국왕 (1087년–1100년). 1057년경 출생, 1100년 사망.
*** 헨리 1세 '보클레르크': 잉글랜드 국왕 (1100년–1135년), 노르망디 공작 (1106년–1135년). 1068년경 출생, 1135년 사망.
윌리엄 아델린: 1103년 출생, 1120년 사망.
''다수의 사생아''
* 윌리엄 드 노르망디: 1008년 출생, 1025년 사망.
* 모제: 루앙 대주교 (1037년–1053년). 1019년 출생, 1055년 사망.
* 기욤 드 탈루: 아르크 백작. 1086년 사망.
로베르 2세: 루앙 대주교 (989년–1037년), 에브뢰 백작 (989년–1037년), 노르망디 섭정 (1035년–1037년).
* 리샤르: 에브뢰 백작 (1037년–1067년). 1015년경 출생, 1067년 사망.
** 기욤: 에브뢰 백작 (1067년–1118년).
* 랄프 드 가세: '얼간이'. 1051년 사망.
** 로베르 드 가세
* 기욤 데브뢰
* 휴 드 라시
** ''다수의 자녀''
모제: 988년 출생, 1032년 사망.
조프루아 (사생아): 외 백작 (996년–1010년). 1010년 사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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